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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할 수 없는 ‘문학 종언’ 경고

<인터넷한겨레> 2007 11 09

» 〈근대문학의 종언〉
 
장정일의 책 속 이슈 / 〈근대문학의 종언〉
가라타니 고진 지음·조영일 옮김/도서출판b·2만원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다수의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제국의 범위는 몇 개의 언어 권역과 일치한다. 동아시아라면 한자, 유럽이라면 라틴어, 이슬람이라면 아라비아어라는 식이다. ‘문자언어’의 성격이 강했던 이 세계어들은 제국의 주변부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제국은 수많은 지역 국가로 분절되기 시작했고, 근대 국가란 다름 아닌 ‘언문일치’의 국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 국가 만들기에 기여한다.

지은이에 의하면 근대문학이란 어느 장르도 아닌, 소설을 가리킨다. 소설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이성 능력이 아닌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 생긴 시민계급에게 지적·도덕적 발견을 실어 나른다. 제국과 세계어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서만 비로소 쓰여지는 ‘언문일치’의 소설은 ‘공감’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고,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예컨대 일제 시대의 젊은이로 하여금 계몽과 해방의 주먹을 부르쥐게 했던 것은 이광수의 <무정>이고, 심훈의 <상록수>였다.

근대소설은 그 발생에서부터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 밖에서 종교가 추구하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했고, 또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의 영역 밖에서 정치가 억압하는 진실을 드러내 왔다.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공한 혁명이 곧바로 제도가 되어버리는 어느 정치혁명보다 더 혁명적이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혁명이 보수화될 때 문학은 “영구혁명”을 계속한다고 했던 것이지만, 어느날 문학이 사회적 임무나 도덕적 과제를 벗어버린다면 그것도 ‘근대문학’일 수 있을까?

» 장정일의 책 속 이슈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성취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 문학은 대중문화에 투항하거나, 과민한 자의식만을 표현한다. 거기서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학과 출판계에 안주하거나 투신하여 스스로 제도가 됨으로써, 사회적 ‘공감’ 능력을 잃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이 한국에서도 감지된다면서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썼지만, 최원식의 말대로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한겨레> 10월 27일치 19면). 하지만 그걸 책잡아 ‘종언’이 주는 문제의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근 15년 동안 한국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들은 <녹색평론>을 능가하는 어떤 사회적 의제도 만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문학계를 떠난 그만이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무엇을 반증하는 것일까?

장정일 소설가


내오랜꿈 ----------------------------------------------------------------

장정일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논점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한다. 도입부인 첫번째 문단만 검토 한다.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 - 장정일, 위의 글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1 - 이젠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 조영일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3 -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 권성우

위의 두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정일은 인용한 문단처럼 완전한 엉터리 전제를 도입하면서 마치 훈계하는 듯한 논조로 시작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장정일의 국어독해능력이 '빵점'이거나 의도적인 '조작'이다. 그가 조금 아래의 문단에서 최원식 교수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한겨레>에 연재된 다른 두 사람 조영일, 권성우 씨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영일, 권성우 씨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에 냉소를 보내지도,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의 상황은 아니라고 무시한 적도 없다.

"오히려, 가라타니의 지적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확히 한국문학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 중략)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문학시스템에 맞게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사회·역사적 변화를 통해 다양화되기보다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성’에 의해 획일화되어버린 것이다." - 조영일, 위의 글

"오히려 가라타니의 명제는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 일반의 종언이 아니라,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드는 비판적 문학의 근본적 위기쯤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중략) 역설적인 맥락에서 늘 자명성에 대한 회의를 강조하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 명제는 실상 우리에게 스스로가 속하거나 편승하고 있는 문단시스템과 거대언론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권성우, 위의 글

조영일, 권성우 씨의 입장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누구도 가라타니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냉소를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장정일은 두 사람의 글 어디에서 그러한 냉소를 읽은 것일까? 참으로 신통방통한 재주를 지닌 장정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 더 하자면 장정일이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건 사회과학에서 상식에 속하는 내용이거나, 조영일 씨가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들이다. 장정일의 같잖은 오만함은 한마디로 꼴불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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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투쓰리쇼 2010-12-04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 말처럼, 장정일이 당신이 인용해 놓은 조영일과 권성우의 글을 몰랐으리란 전제가 가능하지 않다면 - 장정일이 저 두 글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지. 왜냐하면 장정일은 두 글이 실린 신문의 오랜 고정 필자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일은 왜 한국 문학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고언은 무시됐다'고 썼을까?

그건 한국 문학 주류 속에서 권성우와 조영일의 지분이 미미하기 때문이고, 두 사람만의 메아리로는 부족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지.

하므로 여기서는 장정일의 '오만'을 얘기할 게 아니라, '의리'없음을 얘기해야지 더 그럴듯하겠지. 즉은, 이왕 쓰는 글, 권성우와 조영일을 한번쯤 언급해 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글쓰는 사람들은 서로 의리 없거든. 권성우와 조영일에게 물을 수 있으면, 물어봐. 서로을 동지라고 생각하고, 서로 각별히 인용해 주는지? 그러니 장정일에게만 '의리'를 물을 필요도 없겠지.

내 오랜 꿈씨, 한번 봐. 상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있으면, 당신도 저 책을 한번 요약해봐.
 

절망의 밑바닥을 차오른 영혼의 노래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26
김일주 기자 
 


 
» 〈밥 말리〉
 
〈밥 말리〉스티븐 데이비스 지음·이경하 옮김/여름언덕·1만5000원

당김음이 담뿍 들어가 평화롭게 비틀거리는 듯한 리듬에 진중한 메시지를 실어내는 레게는 고통과 저항의 음악이다. 전설적인 레게 뮤지션 밥 말리의 평전이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고통은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탄생시켜야만 한다.”

서아프리카에서 자메이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온 노예들은 투쟁 끝에 1838년 해방을 맞았다. 이들은 세인트앤에 ‘자유의 마을’을 세웠고, 이곳에서 밥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밥은 1945년 쉰 살에 가까운 영국계 육군 대위와 ‘아름답고 대담한’ 열여덟 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밥의 외할아버지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다룰 줄 알았고, 외삼촌은 자메이카 토속 음악인 쿼드릴 밴드에서 바이올린과 기타, 밴조를 연주하는 전문가 수준의 음악가였으며, 외할머니의 노래는 들판을 가로질러 뙤약볕 노동에 지친 이들을 어루만졌다고 하니 자메이카 토속 음악에 흠뻑 젖은 유년기를 보낸 셈이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어머니를 따라 열두 살이 되던 해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서부의 빈민가 트렌치타운에 정착한 그는 그곳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날카로운 눈빛에 세상을 경멸하는 듯한 입술을 지닌 밝은 피부의 비쩍 마른 십대 소년”은 옆집 아이와 어울려 전기선에서 뽑아낸 구리선 기타줄에 통조림 깡통을 덧댄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연습에 열중했다. 열다섯 살, 다른 자메이카 소년들처럼 학교를 그만둔 밥은 생계를 위해 용접 공장 수습공으로 취직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노래 연습을 했다. 쇳조각이 왼쪽 눈에 튄 사고 뒤에는 공장도 그만두고 노래에 전념했다. 그렇게 노래에 열중하던 소년들은 한둘이 아니었는데, 지은이는 “그들의 통곡과 울부짖음이 지난 세기의 가장 놀랍고 주목할 만한 문화 현상인 라스타파리(자메이카 토속신앙) 운동과 레게를 낳은 (밥 말리의) 반란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고 적었다.

레게 음악가 ‘밥 말리’ 인생 궤적 살펴
떠돌이 생활 등 거친 삶이 ‘저항’잉태
음악가 이상의 영향력…시대 상징으로


열여덟이 된 그는 어머니가 일자리를 찾아 미국에 간 사이 여기저기 얹혀 살다가 “거리의 떠돌이, 트렌치타운의 떠돌이, 킹스턴 서부 지역의 떠돌이”가 됐다. 남의 집 주방 귀퉁이에서 잠을 잤고, 다른 쪽 귀퉁이에서 잠을 자던 청년과 함께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꼬르륵 소리를 잠재우려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노래 <노 워먼 노 크라이>의 가사에는 ‘모닥불을 피워주는 조지’가 나오는데, 조지는 당시의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1962년 자메이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그 다음해 밥은 함께 노래하던 친구들과 3인조 보컬 그룹 ‘웨일링 웨일러스’를 결성했다. 그들은 “외국의 일자리에 부모님을 빼앗긴 자메이카의 젊은이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는” 그들에게 노래로 말을 건넸다. 영국에서는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가 그들의 새로운 세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밥 말리〉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아들’ 크리스 블랙웰이 이끄는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으면서 밥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78년에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자메이카 수상과 야당 당수를 무대로 불러내 화해를 주선하는 등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981년 36세의 나이에 암으로 요절해 전설로 남기까지, 그는 경쾌하고 단순한 리듬에 전세계 흑인들의 단결과 투쟁의 메시지를 담아냈다.

<밥 말리-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는 밥 말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방대한 인터뷰, 자메이카의 현대사와 당시 세계 청년문화 흐름까지 끌어들여 한 인물의 삶을 빈틈없이 구성한다. 다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아쉽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여름언덕 제공


내오랜꿈 ---------------------------------------------------------------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10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밥 말리는 플래티넘을 기록한 뮤지션 그리고 레게의 최고스타가 되었다. 또한 그의 음악을 더욱 빛나게 했던 평화, 정의, 자유, 형제애를 부르짖은 저항정신으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밥 말리는 Bunny Livingston, Peter McIntosh(후에 각각 Bunny Wailer, Peter Tosh로 알려짐)와 함께 16세에 가수로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Drifters, Impressions, Sam Cooke, 컨트리싱어 Jim Reeves와 당시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2년에 그는 Wailing Rudeboys로 알려진 Teenagers와 함께 첫번째 음반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이후, 팀명으로 Wailers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평범하지 않은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메이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SKA'비트의 음악을 시도했고, 그래서 "rude boy music"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에 밥 말리는 Rita Anderson과 결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자메이카에서 Rastafarian신앙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신앙화된 일종의 종교로써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이들이 믿고 있기도 하다.)의 급속한 성장이 그로 하여금 다시 자메이카로 돌아오게 하였다.

SKA, rude boy music과 더욱 발전한 형태인 "rock steady"로 그의 곡들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다. 그러나 1973년 이전까지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Island Record에서 그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Stir It Up"과 Peter Tosh의 "Stop That Train"이 포함된 "Catch a Fire"를 발표하여 전세계인들에게 처음으로 레게를 소개하게 되었다. 이 음반을 통하여 rock팬들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새로움을 제공함과 동시에 열정을 자각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음악적 메시지를 담았다.

자신의 Rastafarian신앙과 자메이카 공동체에 대한 중독에 자극받음으로써 밥 말리는 레게를 전파하는 대사가 되었고, 전세계인들은 그의 노래에서 그의 결심, 저항 그리고 정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신념을 담아 Wailers의 첫 미국투어에서 젊은 미국인들에게 그의 이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4년 Peter Tosh, Bunny Wailer와 결별하고 I-Threes(그의 아내 Rita가 포함된 여성보컬트리오)를 조직한 후, 발표되자마자 레게의 클래식이 되버린 "No Woman, No Cry"와 "Lively Up Youeself"가 수록된 아주 뛰어난 명반, "Natty Dread"를 발표했다. 1974년 당시 밥 말리 곡 중의 하나인 "I Shot the Sheriff"는 Eric Clapton이 리메이크했으며 그 곡은 팝 single 1위을 차지하기도 했다. 70년대 말, 밥 말리는 "Rastaman Vibrations"와 "Exodus"가 미국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을 때 또한 "Exodus", "Waiting in Vain", "Jamming" 그리고 "Is This Love"등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트랙을 갖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축구를 무척 즐겨 했는데 1977년 Marley and Wailers의 유럽투어 때 프랑스 기자들과 함께 축구시합을 했다. 경기중에 그는 발에 부상을 입었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있던 암세포를 발견했다. 암치료를 거부한 밥말리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투어 했다. 뉴욕에서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황을 담은 "Babylon by Bus"를 발매했고, 뉴욕공연은 레게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라이브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 Kingston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와 Boston에서 흑인자유투사를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무리한 투어일정은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1979년 "Survival"을 통해서 이전과 달리 그의 정치적인 색채를 공격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조깅하다가 쓰러졌다. 암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에까지 퍼져 있었고 8달 후 그는 사망했다.

Trenchtown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한 사나이는 그렇게 전세계의 음악 대사로서 인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갔다.



위의 글은 밥 말리의 팬홈피(http://www.bobmarley.zc.bz)에서 인용한 것이다.

레게(reggae)란 무엇인가? 흔히들 정의되는 것에 따르면 미국 흑인들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블루스(Blues)가 생겨났고, 카리브해 자메이카 흑인들의 한과 설움에서 레게(Reggae)가 생겨났다고 한다. 곧 레게는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자메이카에서 일기 시작한 음악 형태로, 원래는 1950년대말 자생적으로 발전한 멘토(mento), 스카(ska) 등의 자메이카 특유의 토속적인 리듬에 미국으로부터 전해진 흑인음악 리듬 앤 블루스가 혼합되어 록스테디(rock steady)로 변형되었고, 여기에 관악기 소리가 첨가되어 개발된 대중음악의 한 장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레게음악은 단순히 하나의 음악 장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흑인들, 이른바 '아프로 캐러비안'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종교적, 정치적 지향과도 맞닿아 있다.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수백년간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온 한과 설움을 딛고 '백인들의 지배를 벗어나 고향이자 약속의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과 연결되어 있는 것. 이 절실한 꿈, 그러나 결코 이루지 못한 아프로캐러비안들의 염원을 밥 말리, 지미 클리프 등 자메이카 출신의 레게 가수들이 음악 속에 담아낸 것이 레게 음악의 정치적 지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레게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현준, <WORLD MUSIC 속으로>, PP127~152를 참조).

따라서 어떻게 보면 레게의 특징은 음악성 보다 저항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로 듣기에는 경쾌한 춤곡이지만 그 속에는 출발부터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담고 있는 것. 이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밥 말리는 “음악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라며 레게가 억눌리고 차별받는 카리브해 흑인들의 저항음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도 레게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한때 '국민가수'로 불렸던 김건모의 "핑계"가 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에도 선풍적인 레게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한국의 레게는 출발부터 저항성이 거세 당한 껍데기뿐인 레게였다 할 수 있다. 룰라, 투투가 레게 뮤지션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나마 2000년대에 들어와 바비 킴(Bobby Kim)이라는 걸출한 뮤지션이 정통 레게를 소개하고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 (최근에 쿤타&뉴올리언스, 윈디시티, 스토니스컹크 등 실력있는 레게뮤지션이 등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긴 하다)

어쨌든 레게는 밥 말리를 떠나서는 절대 논의될 수 없는 음악이다. 이 밥 말리에 관한 꽤 괜찮은 책이 번역되어 나온 모양이다. 읽고 싶지만 한겨레신문 소개 기사의 마지막 문구가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아쉽다."

아래에 링크시킨 곡은 "No Woman, No Cry". 밥 말리 최고의 노래이면서 레게의 정점이라고 하는 노래다. 이 "No Woman, No Cry"는 여러 버젼이 있는데, <LEGEND> album virsion과 "Live" album virsion이 대표적이다. <LEGEND> album virsion은 원래 1974년에 발표한 오리지널 밸범인 <NATTY Dread>에 수록된 곡으로 심플한 느낌이다. 반면 "Live" Album Virsion은 뭔가 비장한 분위기가 흐르는, 슬로우 리듬의 애절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모르고 들으면 전혀 다른 노래 같은 느낌을 줄 정도이다.



"No Woman,No Cry" - LIve Virsion


"No Woman,No Cry" - Album Vi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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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g 2007-11-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근이라뇨 ㅠ

가장존경하는 스컬형님은

대거즈 시절부터 리얼레게뮤직을 표방한 음악을 계속하셨구요

쿤타형님도 2002년부터 집시의 템버린으로 활동하시면서

꾸준히 레게음악 하셨는걸요

내오랜꿈 2007-11-17 10:55   좋아요 0 | URL
ㅎㅎ...
최근에 이들을 띄워주는 신문기사가 났다는 것이죠...
 

돌아온 ‘더티 댄싱’ 떠나는 ‘단관 극장’
서울 ‘드림시네마’ 고별 이벤트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28  글:김소민/구본준 기자 사진:김경호 기자
 

» 서울 마지막 단관극장 ‘드림시네마’가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사진은 건물 안팎.
 

안 바뀌는 듯 조금씩 바뀌어가는 서울 서대문 네거리. 그 한 모퉁이에서 ‘화양극장’은 변치않은 풍경을 대표해 왔다. 지금 이름은 드림시네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화양극장으로 부르곤 한다. 그렇게 44년째. 화양극장은 대단한 극장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버티다 보니 독특한 지위가 절로 생겼다. 다른 극장들이 헐리고, 멀티플렉스로 바뀌는 바람에 서울 시내 유일의 ‘단관 극장’이 된 것이다.

건물 재개발로 헐릴 극장 1억 들여 스크린·음향시설 교체
간판·푯값도 20년전 그대로…새달 23일부터 무기한 상영


최근 이 극장 김은주(35) 대표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극장 건물이 내년 재개발되기로 해 헐린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날’이 오자 김 대표는 결심을 했다. 기왕 운명이 정해진 것, 어느날 갑자기 헐리면서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극장은 되지 말자고. 그래서 그는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1980년대 최고의 청춘영화 〈더티 댄싱〉을 다음달 23일부터 헐리는 그날까지 무기한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 아이디어를 위해 그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얼마 뒤 헐릴 극장인데도 〈더티 댄싱〉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의 점프 순간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1억여원을 들여 스크린과 음향시설을 바꿨다. 극장 전체도 80년대로 되돌린다. 간판부터 옛날 그림간판으로 올린다. 화양극장 시절 최고 인기작인 〈영웅본색〉 등의 간판을 그렸던 김영준씨가 맡았다. 표값도 그때 그대로 3500원이다. 1980년대 홍콩영화의 추억이 담뿍 서려 있는 이 곳에서 패트릭 스웨이지와 제니퍼 그레이의 그시절 옛 춤 장면을 끝으로 서울의 극장 단관 시대도 막을 내린다.

〈더티 댄싱〉의 추억

88년 〈더티 댄싱〉이 중앙극장에서 개봉해 50만 관객을 부르던 그 때, 극장 앞에선 종종 실랑이가 벌어졌다. 18살 이상 관람가였던 이 영화를 보려고 10대들은 어색한 화장을 하고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은주 대표도 중앙극장에서만 세 번 쫓겨났다. 그는 재개봉관인 신촌 ‘크리스탈 극장’(현 그래드시네마)에서 거사를 벌인다. 화장도 하고 대학생 언니까지 동행해 밤 9시 시간을 골랐다. 치밀한 준비 덕에 거사는 성공했고, 주인공의 점프 장면은 영원히 그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이후 이 영화는 그에게 끝없이 되풀이해 보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었다. 학교 영어 선생님을 괴롭혀 가며 삽입곡 가사를 모조리 번역하고 외웠다. 지금도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모두 ‘더티 댄싱’이다.

‘제 2의 스카라’는 되지 않을래

마지막 영화 〈더티 댄싱〉을 상영하기 위해 김 대표는 극장 설비까지 고쳤다. 자막은 그가 직접 번역했다. 극장 내부도 80년대 느낌으로 꾸민다. 이를 위해 옛날 턴테이블과 〈페임〉 〈백야〉 등의 영화음악 레코드판 50장을 청계천을 뒤져 샀다.

그가 이렇게 열성적으로 화양극장-드림시네마의 고별 무대를 준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5년 그가 1년 동안 운영했던 스카라극장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헐려버렸다. 문화유산 등록예고를 통보 받은 건물주가 등록 전날 건물을 철거해 버린 것이다. 도둑 철거 직전 건물주의 부탁을 받고 그는 밤 11시에 짐을 챙겨 새벽 5시에 스카라극장을 나왔다. 지금 스카라극장 터는 주차장이다. 김 대표는 “너무 속이 상했다”며 “마지막 남은 단관마저 그렇게 없어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몰래 〈더티 댄싱〉을 봤던 사람들도 이번엔 떳떳하게 제대로 갖춘 음향과 화면으로 추억을 되살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극장의 모습도 많이 찍어 기록으로 남겨줬으면 좋겠어요.”

서부지역 청춘들의 아지트 화양극장

64년 1월 1일 개관 당시 화양극장에는 가로 세로 10여미터짜리 무대가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하춘화쇼, 송창식쇼도 했다. 당시 서울에 개봉관은 열 곳뿐. 대한극장이 2천여석으로 가장 컸다. 700석 규모의 화양극장은 중간 크기의 재개봉관이었다. 개봉관에서 틀고 난 영화를 배급사가 사서 재개봉관에 나눠줬다. 좋은 영화를 받으려면 영업부장의 수완이 좋아야 했다. 근처 극장이 트는 영화는 다른 극장에선 못 틀었다. 안목도 중요했다. 개봉관에서 망한 영화도 재개봉에서 입소문을 타고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청량리에 있던 재개봉관 대왕극장은 장사가 잘되는 극장으로 꼽혀 좋은 영화들을 몰아가곤 했다.

86년, 화양극장은 개봉관으로 ‘승격’했다. 미아리 ‘대지극장’과 영등포 ‘명화극장’도 화양극장과 주인이 같았다. 홍콩영화 전문 수입사인 세진영화사와의 친분 덕분에 이 세 극장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 홍콩영화를 독점으로 틀며 인기를 끌었다. 84년 〈예스마담〉, 87년 〈천녀유혼〉과 〈영웅본색〉, 88년 〈영웅본색2〉 등 굵직한 화제작이 세 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하루 3천명을 넘으면 만원 사례로 치는데 〈영웅본색 2〉는 심야까지 7회가 모두 매진됐다. 기다려도 표를 못산 이들이 항의해 새벽 2시에 한번 더 심야 상영을 했다. 30여만명이 화양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천녀유혼〉 개봉 때는 장궈룽(장국영)과 왕쭈셴(왕조현)의 팬사인회가 열렸는데 영화관을 몇 바퀴 뺑뺑 돌아가며 긴 줄이 늘어섰다.

시사회 전용극장으로 변신-드림시네마 시기

드림시네마 앞에는 아직도 하베스트 전용관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이 영화관의 회원권 이름이다. 90년대 이후 홍콩영화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이들 세 극장들도 기운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멀티플렉스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명화가 먼저 문을 닫았고 대지는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

98년, 화양극장은 이름을 드림시네마로 바꾸고 시사회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낮에는 재개봉을 하고 밤에는 시사회를 했다. 시사회는 좌석의 80% 이상이 찼을 정도였다. 〈말아톤〉 〈왕의 남자〉 〈러브 액추얼리〉 시사회 때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한참 동안 영화관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내오랜꿈 ------------------------------------------------------------------

극장이란 공간에서의 원체험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기억으로 존재할 테지만, 30대 아니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원체험의 공통분모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재개봉관의 추억 아닐까? 화려한 외관에 빵빵한 음향시스템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었지만 '야자'를 빼먹고 눈치보며 기어들어가던 추억들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극장이란 공간의 원체험을 이야기하라면 단연코 "코아아트홀"이었다. 94년부터 99년까지 5년 동안 코아아트홀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빠짐없이 보았던 것 같다. 연인들의 아니면 여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코아아트홀"의 상징인 붉은색 의자에 혼자 앉아 30대의 전반기를 보냈다.

이런 나에게 화양극장은 그저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커다랗게 걸려 있던 그림간판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에겐 그저 스쳐지나는 극장이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저 화양극장은 '나의 코아아트홀'이었으리라.

아, 그러고보니 "코아아트홀"도 문을 내린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역시,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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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팬 2021-05-1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21년에 이 글을 보네요. 저도 재개봉관 마니 다녔는데. 성룡 영화보러 명화극장도 가보고. 좋은 글입니다
 

‘재즈’의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다
세상을 바꾼 노래 ④ 루이 암스트롱의 〈웨스트 엔드 블루스〉(1928년)


박은석/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25


» 루이 암스트롱의 〈웨스트 엔드 블루스〉(1928년)
1999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사진)은 20세기를 결산하며 “금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을 선정했다. 비슷한 시기 <라이프>도 새 천년을 앞두고 “밀레니엄을 만들어온 100인”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비틀스를 위시한 몇몇 대중음악가의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언급된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루이 암스트롱. 그에 대해 <타임>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파블로) 피카소, (제임스) 조이스와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했고, <라이프>는 “그의 즉흥연주 능력과 기교적 탁월함이 재즈를 규정했다”고 평했다.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은 재즈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솔로이스트였다. 그 말은 곧, 그가 재즈를 ‘재즈답게’ 만든 최초의 혁신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즈는 악기와 악곡을 통제하는 냉철한 이성과 그것을 정서적으로 치환해내는 뜨거운 감성 사이의 균형감각을 전제로 하는 고도의 창조행위다. 그 표준을 제시한 인물이 암스트롱이었다. 그래서 <타임>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뉴올리언스 출신 천재의 격렬한 내적 세계에서 만났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웨스트 엔드 블루스〉가 바로 그 전범이다.

스승이었던 킹 올리버의 곡을 연주한, 암스트롱의 1928년 버전 〈웨스트 엔드 블루스〉는 많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인 재즈 역사의 시발점”으로 꼽는 작품이다. 카덴차 스타일의 짧은 독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가 신기원이었다. 얼 하인스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에 이어지는 암스트롱의 마지막 리드 파트는 재즈 솔로의 형식과 구조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명연이었다. 잔잔하게 넘실대는 스윙 리듬, 치밀하게 축조된 솔로 연주, 노래하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스캣 창법에 이르기까지, 3분을 겨우 넘는 단출한 연주 시간 동안 암스트롱은 재즈의 우주에 창세기적 질서를 부여하는 거대한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웨스트 엔드 블루스〉를 통해 루이 암스트롱이 제시한 음악적 비전의 영향력은 재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악기를 통해 인간을 드러낸 방식은 이후 20세기의 대중음악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대중문화 책임자였던 빌리 마틴은 “루이 암스트롱이 20세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을 정도다. 실제로 암스트롱은 베시 스미스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와 지미 로저스의 〈블루 요들 넘버 나인〉에서, 그리고 빙 크로스비와의 협연작들을 통해 줄곧 블루스와 컨트리와 팝을 아우르는 ‘20세기 대중음악의 허브’로 기능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웨스트 엔드 블루스〉를 “로큰롤 역사를 만들어온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것은 그에 대한 상징적인 헌사나 다름없다.

대중적인 스타일에 치우쳤던 루이 암스트롱의 후기 활동은 오늘날에도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암스트롱이 견뎌야 했던 혹독한 차별의 세월과 그 속에서 창조해낸 음악적 유산을 외면할 수는 없다. 〈왓 어 원더풀 월드〉의 낙관적 메시지는 지난한 여정을 마친 자의 여유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 앞에서 대중영합적이라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세상을 바꾼 거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오랜꿈 =============================================================================

사실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먹물들 대부분이 한번쯤은 읽었다는 <노르웨이의 숲>(왜 한국에선 이 책이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었어야 했을까?)은 책을 펴들고 질질 끌다가 몇 주만에 읽었던 것 같다. 그 뒤로 <국경의 남쪽>인가를 한번 더 접했는데,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키의 '재즈에세이'에 관한 두 권의 책은 나에게 재즈뮤지션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과 흥미를 불러 일으키게 해준 책이었다. 한 뮤지션에 대해 한 페이지 남짓한 글에 삽화 한 페이지 달랑 있는 책에서 뭐 그리 대단한 지식을 얻었을까만 다른 책들을 읽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만으로도 나에겐 고마운 책들이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은 하루키의 <재즈에세이>에 나와 있는 루이 암스트롱에 관한 내용이다.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곡이 "West End Blues"이다. 다른 곡들은 플레이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루이 암스트롱은 열세 살 때 사소한 장난질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 뉴올리언즈에 있는 '소년원'에 수용되었다. 소년원 생활은 엄격하고 힘들었지만 악기와의 만남이 그의 고독을 구원해 주었다. 그 이후 루이에게 음악이란 마치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이 되었다.

루이가 소년원 밴드에 들어가 맨 처음 손에 든 악기는 탬버린이었다. 그리고 탬버린은 마침내 드럼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에는 나팔이 되었다. 기상, 식사, 소등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소년이 사정이 있어 소년원을 나가게 된 덕분에 루이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엉겁결에 나팔부는 방법을 배우고, 대역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생활 속에 신기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가 매일 아침 나팔을 불면서부터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눈을 뜨고, 또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째서일가? 그 까닭은 루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화 - 스탯 터클이 《자이언츠 오브 재즈》(Giants of Jazz)란 책 속에서 소개한 - 를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에피소드 하나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 편안함, 자연스러움, 매끄러움 -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마는 기적적인 '매직 터치'

우리들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들으면서 늘 변함없이 '이 남자는 정말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느낌은 놀랄만큼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존경하면서도 무대에서 백인 청중을 향하여 이를 드러내고 싱긋싱긋 웃는 그의 연예인 근성을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하지만 나는 루이는 정말로 즐겁고 신이 나서 웃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자기가 이렇게 살아서 음악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귀기울인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여, 체면이니 염치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싱긋싱긋 이를 드러내고 웃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즈 마칭 밴드와 함께 성장한 거의 마지막 뮤지션이었다. 그것은 장지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그리고 장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의 한없는 환희를 복돋우기 위한 실용적인 음악이었다. 루이의 음악의 목적은 오직 하나, 사람들의 귀와 마음에 음악이 가닿는 것이었다.

트럼펫 주자는 자기 악기를 흔히 '챠퍼'(Chopper)라고 한다. 이는 고기를 자르는 부엌칼을 말한다. 1928년에 녹음된 <웨스트 엔드 블루스>(West End Blues)의 단호하고 굵직한 연주에 귀기울여 보라. 그가 얼마나 강인한 챠퍼를 쥐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음악으로 하여 그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도.




Louis Armstrong - West End Blues



Louis Armstrong - What a wonderful world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Cheek To Cheek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Louis Armstrong - Kiss Of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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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야산다 2010-05-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주 주문한 CD가 도착했다. <허클베리핀> 4집과 <소규모 아카시아밴드> 1집 등등. <소규모 아카시아밴드>는 2집을 먼저 들었는데, 차 안에서 틀고 다니니 아내도 들어보고는 아주 좋아하는 눈치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면을 갖춘 '인디밴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내가 기대했던 건 <허클베리핀> 4집이다.

1집 "18일의 수요일"이 나왔던 때가 1998년이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그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도 수많은 홍대앞 인디밴드들 가운데, 현재 한국의 상황이나 인민들의 현실에 대해 눈감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음악성(? 창작능력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또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준 높은 음악성을 인정 받으면서도 우리 안에 내재된 끝 모를 분노와 절망감, 상실감을 일관되게 표출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뮤지션이 아닌가 싶다.

조용히 뒤돌아 앉아서 곰곰히 벽을 맞대고 / 허공에 고갤 묻으면 입속엔 가득 흙먼지
오래전 읽던 책들은 모두가 남의 이야기 / 차라리 거릴 걸으며 내 안의 말을 찾는다
참 한참을 나혼자 바래 왔던 것 있었지, 바람이 / 똑 같은 걸 나만이 바래 왔던건 아니야, 부는 것
오래전 읽던 책들은 답답한 말만 내뱉고 / 허공에 고갤 묻으면 입속엔 가득 흙먼지

-- "첫번째곡" --

저 우물가 그 곁으로 갈 수 없는 목마른 절름발이들
그 위에 포개지는 무력한 우리 얼굴들
말라버린 잉크 위에 그려내려 애쓰는 우리 얼굴들
그 위에 포개지는 모마를 절름발이들
Hey yeah yeah
불을 지르는 아이 불을 지르는 아이

-- "불을 지르는 아이" --


1집 이후 몇 년이 흘러, 나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무렵 듣게 된 2집 <나를 닮은 사내>. 이때부터 난 이들이 단순히 분노를 내뱉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뱉음 속에 뭔가 그들 나름의 목표를 가진 밴드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 기대감은 3집 이후 몇 년 만에 접하는 4집에서 현실로 확인하게 된다. 이번 4집에서는 1, 2집의 단순한 시대의 분노, 상실감의 표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좀더 나아가고자 한다. 친구를 모으며, 동지를 모으며 함께 나아가자고 한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시대가 바뀌고 / 나는 너의 노예가 아니므로
너는 나의 주인도 아니구나 / 이제 우리 서로 결별한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 이곳을 파괴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지하에서 / 온 대기의 친구들 모여라

뭐라고 해줘

내달리는 사람들

-- "내달리는 사람들" --

눈이 내린 지붕 위 / 술렁이는 영혼들 말하네
언젠가는 그들이 /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네

춤을 춰 모여서 아가미 / 참을 수 없다면아가미

한 시대가 끝나고 / 술렁이는 영혼들 말하네
언젠가는 그들이 /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네

-- "그들이 온다" --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그냥 듣고만 있으면, 그저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음악평론가 박준흠씨가 왜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을 가르켜 “신중현, 한대수로부터 시작한 한국 싱어 송 라이터 계보의 현주소”라고 극찬하는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인용한 글은 <한겨레 신문>의 앨범 소개글과 <웹진 가슴>에 실린 이지환의 허클베리핀 4집에 대한 평론글이다.

2007 10 16



허클베리 핀 - 낯선 두 형제


인디밴드 1세대 ‘극과 극’
나란히 새음반 낸 허클베리핀·노브레인
 
 
한겨레2007 10 14  
 
 
» 허클베리핀
 
최근 거의 같은 시기에 새 앨범을 낸 밴드 허클베리핀과 노브레인은 인디 음악이 진화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을 보여준다. 대중성이냐 작품성이냐. 1996년에 결성한 노브레인이 폭넓은 대중성으로 스타 밴드가 되었다면, 1997년에 결성한 허클베리핀은 높은 작품성으로 열광적인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다. 인디 음악 1세대의 대표 주자인 두 밴드의 새 앨범을 통해 인디음악계의 현재를 돌아본다.

‘작품성’으로 압도하거나 ‘대중성’으로 다가가거나

■ 허클베리핀 4집 <환상…나의 환멸>?

허클베리핀의 리더이자 작곡가인 이기용(33)은 평단과 음반 관계자들로부터 최고의 작곡·작사가로 평가받는다. 평론가 박준흠씨는 “신중현, 한대수로부터 시작한 한국 싱어 송 라이터 계보의 현주소”라고 극찬한다.

이번에 발표한 4집 <환상...나의 환멸>은 이미 데뷔 앨범을 능가하는 역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정성으로 기울었던 2, 3집과 달리 록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현악기를 배제하고 기타와 신디사이저, 드럼과 베이스를 중심으로 짰다. 거의 전곡에 걸쳐 나타나는 기타 리프(짧은 구절이 반복되는 멜로디)는 어려울 것만 같은 허클베리핀의 음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 같은 구실을 한다. 듣다보면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음울하면서도 폭발적인 가창력의 보컬 이소영(30)은 한층 성숙해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듯 모를듯한 중성적인 목소리는 타협을 거부하는 허클베리핀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함축적이며 은유적인 노랫말은 여전하다. 국내 밴드로는 드물게 지식인 팬을 몰고다니는 데는 시적인 가사가 큰 몫을 한다. ‘내달리는 사람들’은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밤이 걸어간다’는 홍대 앞의 밤 풍경을 노래한다.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억압적인 행위에 분노가 치밀어”(이기용) 만들었다는 ‘낯선 두형제’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뜻하고, ‘휘파람’은 북녘의 동포들에게 전하는 안부 인사다.

이기용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기타를 처음 들었다.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노래책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25살에야 밴드를 시작했다. 이기용은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오히려 더 쉽게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디로 살기 위한 ‘물적 토대’를 만들려고 홍대 앞에 ‘빠샤’라는 술집을 냈다.

 
» 노브레인
 
■ 노브레인 5집 <그것이 젊음>

노브레인의 노래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 노랫말은 쉽고 단순하다. 5집 <그것이 젊음>에서는 이런 성격이 더 강해졌다. 영화 <라디오스타>의 ‘넌 내게 반했어’처럼 쉽고 따라부르기 좋은 노래들이 즐비하다. 타이틀곡인 ‘그것이 젊음’이 대표적이다.

“때론 부딪혀봐, 때론 울어도봐 그것이 젊음, 거침없이 제껴봐/때론 부딪혀봐, 때론 울어도봐 그것이 젊음이기에”

박력있는 리듬과 사운드에 맞춰,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를 따라 하다보면 청중은 행복감에 젖는다. 노브레인이 대형 라이브 공연의 단골 출연자로 인기를 끄는 이유다. 노브레인의 대중성은 이렇게 획득된다. ‘메이크 잇 빅’ ‘컴 온! 컴 온! 마산 스트리트여!’ ‘한밤의 뮤직’ ‘탈옥’ ‘내일로 내일로’ ‘고마워 친구’ 등도 쉽게 친해지는 노래다.

노브레인의 대중성을 ‘변절’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2집까지 함께 활동하며 음악적 리더 구실을 했던 기타리스트 차승우가 탈퇴한 이후, 모든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펑크 밴드의 지향을 잃었다는 비판이다.

밴드 리더 이성우(31)는 당당하다. “그런 얘기 들어도 상관없어요. 펑크 정신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는데, 커서 먹으면 그 맛을 못느끼는 경우가 있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계속 바뀌는데,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기대치에 부응하려고 연기하는 게 싫었죠. 오히려 뒤통수를 치고 싶었어요.”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기대에 역행하려고 하는 노브레인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더 펑크에 가까운 듯하다. 아무튼 노브레인은 “인디 음악에 대한 대중 일반의 이해를 확장시키는데 공헌한 바가 크다”며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가수상’을 탔다. 그들의 노래에 깊이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디 음악계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음악적 지향이나 장르는 다르지만, 허클베리핀과 노브레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홍대 앞’이라는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지난 10여년 동안 인디 음반의 발매량은 10배 가까이 늘었다. 한해 250장 가량의 인디레이블 음반이 쏟아져 나온다. 양이 곧 질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지표로 읽힌다.

예나 지금이나 인디의 숙제는 홍보와 유통이다. 1년씩 땀을 흘려 음반을 내놓아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음반업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계’ 문제가 인디에서는 발생한다. 무슨 뾰족한 수가 따로 있으랴. 미디어의 공정한 관심과 귀밝은 청중을 기다릴 수밖에.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환상... 나의 환멸] (2007/Sha Label)

이지환
출처 : <웹진 가슴> 2007/09/27


90년대 이후, 문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그저 옛것에 대한 주석들에 지나지 않게 된 초라하고도 빈곤한 시대, 그와는 정 반대의 길을 가며 오직 자신에 대한 믿음 한 조각 위에 자기 존재를 완전히 새롭게 세우려는 진지하고 고집 센 한 예술가, 96년 겨울, 자신의 조그만 방안에서 무언가를 파괴하고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이미 했던 것이나 반복하며 하품만 나오게 하는 도식적 표현들과 단호히 결별하며, 시간이 조금 지나면 비틀거리던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손바닥만 한 자신의 작은 땅위에 새로운 꿈의 건축물을 지으려는 멋진 청년. 그에게 분노는 한없이 하찮아진 세상에서 자신의 열정을 되찾게 해 주는 강력한(동시에 치명적인) 환상이자 든든한 감정의 방패였다. 밑도 끝도 없이 열광하는 창백한 무리들에서 벗어나 홀로 침잠하길 택한 그, 처음 가졌던 파괴의 분노를 끝까지 잊지 않고 자신을 육성하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기를 벌써 10년. 이제 청년의 시절은 지나가고, 그 옛날 작은 공간에서부터 꿈꾸었던 아름다운 비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다짐한 2007년 늦여름, 자신의 밴드 허클베리핀의 네 번째 음반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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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겨울, 허클베리핀 2집은 (세간의 평가완 달리)나에겐 하나의 충격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음반을 통해 난 이기용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표면에 불과한 절망의 정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도 여전히 간직하게 되는, 그 선명한 무엇의 표현을 향한 치열한 응시임을 알게 되었다. 난 그에게서 저 멀리 위대한 거인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소통하고 있는 거대한 표현의 희망을 보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음악의 윤곽들은 몇 번을 다시 들어도 대부분 뚜렷이 기억나질 않는다는 사실을 난 깨달았다. 얼마 후 ‘웹진 가슴’에 기고한 이기용 본인의 글을 우연찮게 보게 되었고(아마 이즈음부터 ‘가슴’과 나의 인연은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언급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의 윤곽. 그것을 채우고 있는 무늬들, 희미하고 엷은 무늬들”이란 말을 곱씹었다. 이는 신기하게도 글을 읽던 당시, 내가 홀로 구상하던 어떤 것과 맞닿아 있는 말이었기에 더욱 큰 울림을 가졌는데, 허클베리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그 어떤 풀리지 않는 매듭은 이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

베일과 분칠을 벗겨버린 그 알맹이만을 가지고 과연 어떻게, 어디까지 자신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을지, 난 그가 예술가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그 의연함과 대범함이 무척이나 멋지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비평적 풍토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영원한 오해로 남기 십상인 이곳에서 얼마나 자신을 실현시킬지, 매우 궁금했다. 간드러지는 가사 하나 없고 유행하는 스타일의 차용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하나만으로 부단한 음악적 담금질을 하던 허클베리핀은, 종종 또렷하고 선명한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뭉개진 회색 선을 그려 넣곤 했다. 이기용은 ‘선명’하게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려고 작정하는 듯 했고, 이 모순된 방식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묵직하고, 거칠고, 생생하게 살아남으며 자기만의 자율적인 진행 원리와 정서적 효과를 찾아 나가는 허클베리핀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난 이기용 음악의 자기 전개과정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진검승부는 언제나 승패에 관계없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음악의 스타일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려는 야심찬 음악가이다. 오직 내적인 힘만으로 지탱되어 외양이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게 되는 음악. 그 어떤 가이드라인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음악. 그래서 그는 구태여 에두르지 않는 정공법을 택한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가락과 리듬을 가지고, 자신이 겨냥하는 심리적 진실, 그 정중앙을 단숨에 잡아내려 한다. 결국 ‘멀리서 선명히 보이는 그림의 윤곽’이란 말은 가슴으로 음악을 하기위한 이기용의 음악적 방법론이자 자신을 긴장시키는 그만의 독특한 알레고리의 표현이지 않았나 싶다. 그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음악을 하게 되는 순간, 음악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 당당히 밝히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제 청자들에게도 거꾸로 적용되는 말이 된다. 평자들은 그동안 고리타분한 스타일 분석 비평을 통해 허클베리핀 표면의 허울 정도야 붙잡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 4집은 그 부스러기조차도 붙잡을 것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허클베리핀 음악에 가슴으로 적극 동참할 수 없다면, 이들의 음악적 매력을 조금이나마 감득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허클베리핀 4집엔 따뜻한 태양빛을 쬐고 있는 문학적인 도마뱀 같은, 성숙한 종합을 이룬 한 예술가의 인간적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들은 밤에만 해왔던 지상에의 요구를 낮의 모습 앞에서도 당당히 드러내기도 한다. 비틀즈의 [Abbey Road]음반을 연상케 하는 복고적 사운드 편성도 눈에 띄며, 전체적으론 정통 록에 기반을 둔 간결하고 직선적이면서도 다층적인 악곡 구조를 지닌다. 4집은 허클베리핀 작품 중에서 가장 밝은 태양 빛에 의해 건조된,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작품이다. 그 안에서 이기용은 불이 붙을 듯 바싹 마른 톤으로 내면에 응축된 에너지를 뽑아내는 멋진 기타 연주를 들려주기도 하며, 사운드의 공간을 폭넓게 활용하는 음악 장인다운 노련함을 통해, 자신의 자아마저 훌쩍 뛰어넘는 경이로운 순간을 온전히 담아내기도 한다.

강약의 리듬을 탄력적으로 교환하며, 시원스레 내뻗는 기타와 보컬의 정서적 교감, 그것이 빚어내는 묘한 긴장을 멀리 공명시키는 <밤이 걸어간다><오나비야><죽은 자의 밤>,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늘한 서정이 끝 모르며 굴곡을 이루는 <60‘s><환상환멸><휘파람>, 재치 있는 편곡과 담백한 사운드가 드넓은 멜랑콜리의 바다를 암시하는 <푸른 수평선><알바트로스>,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활성화 시키며 들끓는 아나키의 세포들을 마구 두들겨 깨우는 <그들이 온다><내달리는 사람들><낯선 두 형제>. 이렇게 이기용은 자신의 꿈과 도취의 환희, 열정, 그리고 서늘한 환멸의 기억들을 하나도 버릴 것 없는 11곡 안에 빼곡히 채운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 정면으로 마주하길 꺼려 저 멀리 지나가 버린 듯 했던 청년 시절의 진한 절망의 기억과, 그 속에서 건진 아름다웠던 비전들을 다시금 불러내, 현재 자신의 거울 속 이미지들과 냉정히 비추어본다<환상환멸>. 그 속에서, 자기 그림자들의 배후를 보기 시작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과 마주친다. 비틀즈 다큐멘터리를 본 후 영감을 받아 만든 <60'>에서, 젊은 날 그 거인들과 함께 꿈꾸었던 영원한 비전들은 따뜻한 온기를 얻는다. 끝 모를 듯 막연했던 감정들은 빛나는 서광을 받아 하나의 특색 있는 작품으로 거듭난다.

<푸른 수평선>은 따뜻한 태양이 내리쬐는 유토피아를 열광적으로 쫒는 현재의 환상을 위트 있게 표현하면서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서늘한 환멸의 바다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2:40초 부터 시작되는,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충만한 힘과 긴장을 선사 하는, 지금까지 결코 들어본 적 없는 가락으로 순간적인 섬광처럼 번뜩이는 기타 연주. 그 어떤 음악적 도취의 상태에서 흘러나왔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상을 불허하는 진행. 이 지속적이고 강렬한 쾌락과 활력을 가져다주는 힘의 획득을 통해 그의 자아는 더 큰 다양성과 능동성을 드러내며 갑작스런 도약을 한다. 이렇듯 이기용은 음반 곳곳에 자신의 자아마저도 훌쩍 뛰어넘는 경이로운 성숙의 순간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그는 날고 있으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기용이 음악을 통해 분출하고자 하는 두 가지 주된 열망, 선명한 시적 정적의 환희와 생생한 힘의 역동성은 <밤이 걸어온다><오나비야><죽은 자의 밤>에서 성숙한 종합을 이룬다. 강한 리듬 섹션을 중심으로 율동적인 생동감, 위풍당당한 단순함을 구현하는 이 순도 100%의 열정은 강력하면서도 유연한, 눈에 보이지 않는 음들의 연결고리에 심혈을 기울이며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듣는 이를 압도한다. 허클베리핀이 붙잡으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희와 비애, 희망과 공포, 희열과 절망 사이를 쉴새없이 진동하는 동적인 고요이며, 그 속에 깃든, 굴복하길 거부하는 그 어떤 심리적 확실성이다.

<그들이 온다>의 속편격인 <내달리는 사람들>에서 이기용은, 온 대기를 부유하며 떠도는 역사 속 거인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는 흑마술사의 섬찟한 목소리로 새로운 세상의 조짐, 그 복음을 동지들에게 타전한다(<그들이 온다>의 2분12초 에서부터 시작되는, 노이즈 속에 숨겨진 나레이션에도 함께 귀 기울여 보라!). 그들이 돌아온 후, 사람들은 그 알 수 없는 노예의 고통이 자신들의 고통이었음을 깨닫고는 비로소, 시간의 얼음장을 깨고, 스스로 일어난다. 이제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는 더 이상 도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린 새로이 실재하는 저만치의 세상을 향해, 함께 내달리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형상의 왕국은 이렇게 건설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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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음반은 처음 들었을 때 그 어떤 시원한 청량감마저 느껴졌을 정도로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투명하고 직선적이었다.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저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뿐이지만,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미궁으로 남을 만한, 허클베리핀 제 2기를 세상에 알리는 걸작이다. 또한 음악적으로 약간은 혼재된 듯했던 이기용의 개인 프로젝트 스왈로우와의 음악적 영역 구분에 대한 정리도 끝나면서, 허클베리핀은 더욱 강한 집중력을 갖게 되었다.

이전 허클베리핀 작품들에선 특유의 절제된 표현과 탐미적 성향이 혼재되어 있었다. 난 그가 표현에 대한 강렬한 예술가적 열망이 그 어떤 심리적 리얼리티에의 완고한 집착 때문에 자신의 상상력을 제한하곤 했다고 느꼈는데, 이기용에겐 자신의 음악이 윤리적·실천적 함축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낭만적인 취향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빠져드는 것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경계가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난 탐미적 성향으로 음악적 중심을 마음 놓고 잡아본 스왈로우 1집을 내심 음반 전체의 완성도로 볼 때 이기용의 최고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클베리핀 4집 음반을 통해 탐미와 리얼리티 양자 간의 성숙한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그들 음악은 새로운 항해의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기용은, 자신의 자유로운 탐미 성향을 스왈로우 활동을 통하여 더욱 자유로이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가 황홀한 환상의 혼란, 그 인간의 근원적인 혼돈에 마음 놓고 뛰어들길 바란다. 그는 그곳에서 굉장한 어떤 것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예술가이다. 이제 그는 이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이기용은 환상과 환멸을 거듭하며 자신을 숙성시키는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을 음악 안에 정교히 아로새겨왔다. 그의 음악이 전개해 가는 과정은 정신의 자기전개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그 항해의 끝에 도달하게 될 새 세상이, 나는 점점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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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휘파람 - Huckleberry Finn
    from 소년의 눈, 소녀의 귀 2008-09-21 22:37 
    눈부신 아침에 그대는 어디에 내 곁을 떠나서 영원으로 가는가 안개 속 헤치고 휘파람 바람불며 혼자 출렁이듯 가는데 굽어진 두 어깨 아리듯 높고 높아 영원으로 가는가 혼자인 이 시간 그대는 어디에 눈부신 아침에 너에게로 가볼까 안개 속 헤치고 휘파람 바람불며 혼자 출렁이듯 가는데 굽어진 두 어깨 아리듯 높고 높아 영원으로 가는가 언제쯤 멀리서 휘파람 들려올까 내 맘 아득해져 오는데 차가운 바람도 잦아든 눈의 나라 안녕한지 그대는 언제쯤 멀리서 휘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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