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 아닌 긍정적 사유 바탕 대중의 자발성 중시
일상 속 대안적 실험들의 소통·확산이 세상 바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코뮨주의’는 매우 익숙한 단어다. <문화/과학> 동인과 조정환씨로 대표되는 자율주의 평론 그룹,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이 이 용어를 새로운 미래사회 모델을 담는 그릇으로 애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부상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실패한 체제인 스탈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공산주의(코뮤니즘) 대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현실 사회의 코뮤니즘은 물질적 생산과 분배 등 생산력주의에 과도하게 치우치면서 마르크스가 애초 생각한 ‘코뮨’이 주는 상상력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요인이었다. 마르크시즘을 마르크스주의라고 바꿔 부르듯이, 코뮤니즘을 코뮨주의로 대체시켜 자신들의 미래 변혁 모델을 담은 것이다.
그렇다면 ‘코뮨주의’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인가? 코뮨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 가운데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이 질문에 응답했다. 이 단체가 최근 펴낸 <코뮨주의 선언-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교양인)은 코뮨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정치·철학 등 여러 각도에서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코뮨주의’가 “현실 자체에 대한 변혁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이념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이념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공산주의’와 반대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코뮨의 정의에서부터 차이는 드러난다. “다양한 차이들, 여러 특이점들이 소통하며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코뮨이라고 부른다.”
옛 ‘동지들’처럼 사유화와 자본주의 화폐 경제에 반대하고 혁명을 꿈꾸지만 궁극적 목표로 가는 길은 다르다. 이 책의 부제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기존 마르크스정치학은 모든 차이와 대립을 계급 적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적대의 정치학’이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대신 어감상 정반대인 ‘우정의 정치학’을 내세운다. 적이 아니라 친구에서 시작해야 하며, 부정적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 방법으로 사유하자는 것이다.
“긍정적 감응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적대 관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조차도 우정을 막는 결정적인 경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함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코뮨은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방법은 일상의 구체적 실험이다. 대중은 “특정한 촉발이 주어지면 갑자기 솟아오르며 거대한 힘과 운동을 만들어 나아가는 자발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전위가 아니라 이 ‘자발적 흐름’이 혁명을 만들어나가는 주체라는 설명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을 바꾸고, 감응과 감각을 바꾸고, 습속의 무의식을 변혁하는 것이 의식화보다 훨씬 더 혁명에 긴요한 직접적 동력”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에너지, 음식, 정보, 지식, 정서 등을 다른 코뮨과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하는 일상의 대안적 실험이 중요하다.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하고 확산시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국가를 독점의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국가적 공공성’이란 개념에 부정적이다. 이런 견해는 혁명에서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화/과학> 동인의 사유와 크게 다르다. <문화/과학> 동인들은 국가 권력이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중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뒤 그 기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대안사회 건설 원리는 위로부터의 국가 개입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삶 속에는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많다”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줄이고 싸워나가는 일상 속의 대안적 실천이 중요하며 국가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고 대표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겠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 펼친 부분 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