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난 박노자의 이런 글쓰기에 반대한다. '동아시아 근현대탐험' 연작시리즈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사와 같은 한국 역사 해석의 문제는 박노자 보다 더 전문가도 많을 뿐더러 이 정도 글을 쓸 사람은 넘쳐날 것이다.

그의 강점이 무엇일까? 서구 유럽에서는 기본적인 '베이스'에 해당하는데, 여기 한국에서는 엄청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것들, 이런 것들을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박노자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심사숙고해보길 권하고 싶다. 솔직히 이건 원고료 챙기기 위해 쓰는 글밖에 안 된다고 혹평하고 싶다.




<한겨레21> 제683호 2007년11월01일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정치적 의도에 따라, 시대마다 달라지는 단군…수염 긴 할아버지에 대한 흠모를 강요할 필요 있나

‘우리 모두의 기원은 어디인가?’ 인간은 개인 차원에서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늘 궁금해하지만, 집단 차원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서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다. 대가족을 단위로 했던 과거 사회에서는,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종족 내지 인류의 시조를 찾는 일로 이어지곤 했다. 중국 같으면 거인 반고(盤古)가 죽어서 그 사체가 강산과 해, 달로 변화됐다는 이야기부터 만물을 창조했다는 여신 여와(女媧) 이야기까지 다양한 창세 신화들이 존재하고, 일본 같으면 이미 8세기 초의 문헌에서 남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여신 이자나미(伊邪那美) 사이의 섹스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아주 야한 창세 담론이 발견된다. 한국이라고 해서 창세신화가 없을 리 없다. 하늘의 신 천지왕과 땅의 여신 총명 부인의 결연 등을 다루는 제주의 무가 ‘천지왕 본풀이’ 정도면 훌륭한 창세, 시조 신화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이런 유형의 민간 신화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공식적’ 문헌에 잘 수록되지 않았다. 못된 부자 수명장자를 하늘 신이 혼내주는 사뭇 반란적 내용을 관료나 승려들이 좋아할 이유도 없었지만, 유교나 불교의 관념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조야하게 보이기도 했다. 결국 조선의 주류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으로는 단군신화라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가 가장 유서 깊었다. 건국 신화, 즉 ‘국가 이야기’가 종족의 기원까지도 설명해주는 독특한 상황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가’가 점하는 매우 특별한 지위를 보여준다.


△ 서울 남산 단군사당에 있는 단군상. 노년의 남성 통치자를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삼는 것이 여성이나 서민, 어린이들이 평등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가.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무시한 신라, 부활시킨 고려

텍스트란 결국 해석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텍스트에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같은 성경에서 보수주의자는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사회주의자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가기 어렵다”는 말을 강조한다.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읽는지에 따라서 그 모습을 계속 바꾸어갔다. 그러한 차원에서는 그 신화의 원형을 찾기란 힘들기 그지없다. 게다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화의 전승에 오랜 기간이 공백기로 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일단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08년의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단군 이야기가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 구전됐으리라 추측해야 할 것이다. 그 지방이 하늘 신(해모수)과 땅과 물의 여신(하백의 딸)의 결합에 대한 비슷한 내용의 신화를 갖고 있었던 고구려의 중심지가 됐을 때 단군신화와 해모수-주몽 신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인용된 ‘단군본기’에 의하면 단군이 하백의 딸과 결혼해 아들 부루를 낳았다는데, 이 부분은 두 신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군 이야기가 신라와 5세기 후반부터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던 고구려-발해에서 전해지기에, 통일신라 말기까지 신라 금석문에서 단군에 대한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최치원 같은 신라의 대표적 불교 지식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은 석가모니의 종족과 같다. 우리 말은 불교의 원어인 범어와 그 발음이 통하다” 하여 신라를 부처와 인연이 있는 땅으로 선전했지만, 단군을 포함한 북방계 전승에 대해 하등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즉, 지금 ‘한민족의 시조 신화’로 인식되는 단군 이야기는 고려의 건국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부 쪽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북부 쪽만의 지역 신화이었다.

그러나 평양 지역을 영토화해 신라와 고구려 양쪽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졌던 고려의 건국으로 사정이 바뀌었다. 개성 지역의 영주로서 고려 왕씨의 문중 전승 자체도 일부 측면에서 단군 이야기와 상통했다. <고려사>의 첫 부분에 실려 있는 <편년통록>의 전승에 의하면, 왕건 가문의 시조로 받들어진 ‘성골 장군’ 호경(虎景)이라는 전설적 인물은 백두산을 비롯한 산천을 구경하고 범의 모습을 한 구룡산의 여(女)산신과 결합을 이룬 뒤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물론 이는 단군신화의 복제판은 아니지만 백두산을 언급한 것이나 범이나 호랑이의 모습을 띤 여신과 결합한다는 줄거리, 그리고 “산신이 돼 산속으로 사라졌다”는 결말은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북방계 전승을 연상시키긴 한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왕운기>에서 단군 이야기의 근거로 삼는 ‘단군본기’(혹은 그냥 ‘본기’)는 10세기쯤에 쓰였으리라 여겨지는 고려 초 <구삼국사>(지금 전해지지 않는 삼국시대 역사의 서술)의 일부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려왕조 치하인 10세기에 단군 이야기가 한반도에서 비로소 ‘구전’에서 ‘필기’의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평양 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이로서 평양 쪽의 전승을 꺼렸던 김부식이 <구삼국사>를 자료로 삼아 <삼국사기>를 만들었을 때 북방계 문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고조선과 단군 이야기를 제외시켜 고려 초기, 중기의 단군 의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 평양의 단군릉. 1940년대 후반에 이승만 정권이 단군 숭배 분위기를 만들어 통치 명분을 다지려 했듯이, 이북 정권도 단군릉 복원을 통해 실추된 위신을 다시 세우려 했다.

1270~80년대에 이르러 상황이 다시 한 번 확 바뀐다. 몽골에 대한 항쟁이 끝나고 고려가 몽골 제국의 제후국이 됨에 따라 몽골와 개성 사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인식이 고조됐다. 단군 전승의 발원지인 평양은 1270년 원나라가 고려로부터 빼앗아 직할구역으로 삼았다가 129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돌려주었는데, 20년 동안 ‘실지’(失地)였던 평양에 대해 고려 문인들의 관심과 애착은 절로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이제 막을 내린 최씨 무신정권하에서 고려의 큰 약점으로서 지방에서의 국가 통합 의식의 부족이 노출됐다. 1202년 경주에서 지역세력들이 ‘신라 부흥’을 들고 일어났는가 하면, 1217년에 평양의 세력들이 ‘고구려 부흥’을 시도했다 진압되고, 1237년 전라도에서 ‘백제 부흥’까지 시도됐다. 고려왕조에 대한 지방민의 귀속 의식이 그 정도로 약했던 것인데, 과거의 삼국을 하나로 묶는 어떤 표상이 고려 중앙의 지배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연치 않게 바로 이 시기에 일연과 이승휴가 잘못하면 영원히 잃을지도 모를 평양 지역의 단군 전승을 ‘해동 전체’의 기원 신화로 부각시킨 것이다. 일연이 승려이었기에 “우리 모두의 기원”을 찾는 방법도 불교적이었다. 단군의 할아버지 격인 하늘 신이 불경에서 부처를 늘 지켜주고 부처의 설법에 귀의하는 제석환인, 즉 인도의 천신 인드라(Indra)로 그려지고, 그 인드라의 아들 환웅이 땅으로 내려가려 할 때에 불교에서 부처와 보살의 염원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간(즉, 중생)에 대한 홍익”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중생에 대한 ‘홍익’ 내지 ‘요익’(饒益)이 대승불교에서 보살도 정신의 요체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가지려는 웅녀가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를 주원(呪願)했다고 하는데, 이는 불가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도’의 동의어다. 말하자면 일연에게 단군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중’(神衆) 중의 하나로 인식된 듯했다.

조선초 유교 학자들에겐 ‘성현’

반면에, 고조선에 대한 인식의 고조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만든 쿠데타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 했던 조선 초기의 관변 유교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단군은 더 이상 ‘인드라의 손자’가 아닌 유교적 의미의 ‘성현’이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웅녀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단군 관련 기사를 인용하지도 않고 “단웅천왕(환웅)이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시켜 아들을 낳게 하니 이는 바로 단군”이라는 <제왕운기>의 내용을 대신 인용했다. 샤머니즘의 냄새가 나는 동물 이야기는 선비의 관점에서 “나라 기원에 대한 언설”로서 제격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로 내려갈수록 유학자들의 단군 의식은 ‘얌전해지기’만 했다. 예컨대 안정복(1712∼91)은 그의 <동사강목>(1778)에서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됐다”는 말에 대해서 “허황하다”고 평하고, 평양 부근에 단군묘가 있다는 것을 “따를 수 없는 속설”로 봤다. 안정복의 책에서 제석환인도 웅녀도 빠져 있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유학자들이 애써 단군신화의 ‘불순한 요소’들을 ‘순화’하려 노력했지만, 민간에서는 그 반대로 무당들이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으로 모시고 단군을 특히 ‘무조’(巫祖), 즉 조선 무당의 시조로 숭배했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단군은 두 개 문화 권력의 싸움의 장이 됐다. 1929년에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을 지어 발표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과학적 근대 사학자”들을 내세웠던 일제는, 단군신화를 “13세기 후반에 날조된 이야기”로 봤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단군 연구에 힘을 쏟았던 최남선은 ‘단군’을 “하늘을 대표하는 고대 종교 지도자의 호칭”으로 인식해 단군의 종교인 ‘빛의 숭배’가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고 못박았는가 하면, 신채호는 일찌감치 단군조선을 ‘정복왕조’로 파악해 단군을 “뛰어난 정복자”로 묘사했다. 결국 담론 생산자마다 그 필요성에 따라서 단군의 상을 역사에서 지우거나 ‘시의적절한’ 단군의 이미지를 그렸다고 봐야 한다.


△ 단군의 표준 영정.

권력을 상징화하는 ‘시조’의 초상

일제의 압박에 맞서서 “위대한 장군 단군”이나 “고대의 종교 문화 대표자 단군”을 믿을 필요성도 이미 없어졌고, 단군을 “우리 모두의 할아버지”로 설정해 가족국가에 대한 충성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독재도 이미 갔다. 일연의 시대에야 “우리들의 시조” 이야기에서 여성인 웅녀를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놓은데다 단순히 단군을 낳고 나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부차적인 요소로 묘사해 환인, 환웅, 단군 셋을 다 ‘당당한 남성’으로 서술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겠지만, 양성평등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과연 여학생들에게 수염이 긴 노년의 남성으로 그려진 단군에 대한 흠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는가? 더군다나 최남선 이후로 통설화된 주장대로 ‘단군’이란 고조선의 제사장 내지 군주의 칭호, 즉 일반명사라면 ‘단군의 영정’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게 된다. 굳이 그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는 상고사 인물들에 대한 학습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시키자면 여성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양쪽과 관련이 있는 소서노(召西奴)의 가상적 모습을 교과서에 실어 ‘단군 할아버지의 영정’을 대체케 하는 것이 조금 낫지 않겠는가? 우리가 ‘시조’의 초상화를 그릴 때 결국 우리 사이의 권력과 권위의 구도를 상징화해 그린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을 마치고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를 새로 연재합니다. 민족주의로 덧칠된 고대사 인물들을 다시 조명하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우리의 편협한 역사관을 비판하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산처럼, 2004
2.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2
3. <일본인들의 단군 연구> 신종원 엮음,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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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다

군국주의적인 세계 현실에 마냥 압도되지 않았던 개화기 조선 유교적 지성들의 조용한 저항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개화기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음 해외로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이 무엇이었을까?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웅장한 건물이나 ‘화륜선’(기선), 철도 등 기술 혁명의 성과물들이 압도감을 주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무비(武備·군사시설), 그리고 ‘개명한 신세계’에서 전쟁과 같은 무자비한 국가적 폭력의 엄청난 역할이었다.


△ 중국을 가르는 열강들의 모습을 풍자한 프랑스 그림. 근대 유럽 열강의 호전적 세상은 전통적 동아시아 출신들에게 끔찍한 야수의 세상으로 비쳐졌다.(격동의 구한말 역사현장)

“우리도 힘을 키우자”는 논리의 문제점

안정적인 조공 외교로 인해서 국가간 무장 갈등들이 비교적으로 드물었던 전통적 동아시아의 출신들에게, 무장 경쟁으로 쉴 새 없는 준(準)전시인 근대적 유럽 열강의 호전적 세상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야수의 세상이었다. 17세기 전반 이후로 큰 전쟁이 없었던 조선의 지식인에게는 전쟁이 바로 국가의 주업이 된 ‘문명의 신세계’가 하도 생소하기에, 전설적이다 싶은 먼 과거와의 비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예컨대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온 젊은 온건 개화파 어윤중(魚允中·1848~96)이 고종에게 유럽식 세계질서에 대해 복명(復命·귀국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종: (요즘 시대는) 오로지 부강만을 도모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동일하더냐.

어윤중: 진실로 그러합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은 바로 소전국(小戰國)이며 오늘날은 바로 대전국(大戰國)이라 모든 나라가 다만 지력(智力)으로 경쟁할 뿐입니다. …현재 형세를 돌아볼 때 부강함이 아니면 국가를 지키지 못하므로 상하가 한뜻으로 노력할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어윤중, <종정년표>(從政年表))

선혈이 낭자한 연속적인 싸움 속에서 호랑이와 같은 진나라가 점차 그 힘을 키워 주변의 약소 국가들을 잠식해버리는 전국시대는, 식민지를 부단히 넓혀가는 ‘열강’들의 작태를 지켜보던 조선 말기의 지식인들로서 가장 적합해 보이는 역사적 선례였던 셈이다. 그러면 ‘강약만이 중요해’ 침략자를 ‘인의로 책망할 수 없는’(박정양의 표현), 도덕이 없는 야수의 세상에서 약소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도리는 무엇일까?

전통의 완전한 고수를 주장하던 소수의 극단적인 위정척사파를 제외하고 대다수 논객들이 제시한 것은 여러 가지 내용의 ‘자강책’ ‘부국강병책’이었다. “무역을 확대하고 국부를 늘리고 군대를 강화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자”(유길준, <언사소>(言事疏))는 현실론은, 신학문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당시 지식인의 ‘주류’ 목소리였다.


△ 1900년대 초 현재의 세종로 큰 거리를 차례로 행진하는 러시아 군대와 프랑스 군대. 미국 해병대.(격동의 구한말 역사현장)


그러나 “우리도 힘을 키우자”라는, 1880년대 초부터 인기를 모은 논리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이미 불평등 조약의 올가미에 걸려 관세 장벽도 세우지 못하고, 왕조 말기의 극심한 부패와 민심 이반을 극복하지 못하던 조선이 과연 힘을 키울 수 있는가라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 못지않게 지식인들에게 중요하게 생각된 것은 이념이었다. 미국에 건너가 철저한 서구 중심주의적 ‘문명 의식’을 얻어 유교를 ‘썩은 동양 문명’으로 여기게 된 윤치호나 서재필 등 몇명의 친미파를 제외하고는, 개화파에게도 유교는 아직 궁극적인 진리로 인식됐다. 그런데 유교적인 원론 원칙의 입장에서 무기는 ‘흉물’이며 전쟁을 즐겨 벌이는 군주는 ‘주걸(紂桀)과 같은 폭군’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당위적 평화주의 신념은 시국이 시급한 만큼 일시적으로 ‘자강론’에 밀릴 수도 있었지만 유교라는 조선 사회의 가치관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이 도덕론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성순보>의 논설, 미래를 예견하다

‘근대 충격’이 빚은 현실론과 이상론의 충돌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유교적 신념이 강한 많은 온건 개화파나 개신 유림들은 당장은 부국강병, 차후에는 세계가 평화와 인의예지로 돌아와야 한다는 현실과 이상의 절충 논리를 폈다. 단순히 전쟁과 경쟁만을 주장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의 초기 사례를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알려진 <한성순보>(1883~84년 발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시인이자 온건 개화파였던 강위(姜瑋·1820~84)와 나중에 큰 서예가가 된 오세창(吳世昌·1864~1953) 등의 여러 지식인이 만든 이 신문의 주된 관심사는 열강의 재정과 징병제, 산업 등 ‘부국강병의 비결’이었지만, 가끔씩 유교적 이상론의 입장에서 세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전쟁 없는 세상을 모색하는 논설도 실렸다. 예컨대 제6호(1883년 12월20일)의 ‘소병론’(銷兵論·병기를 녹이자는 이야기)이라는 탁월한 논설의 서두를 보자.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무도하고 가장 비참하고 가장 해독스러운 것은 병란이고, 꼭 없애야 하면서도 늘 없애지 못하는 게 병란이다. …두 나라의 혈전에서 예봉들이 휘날려지고 총탄들이 날라나는데 한순간에 서로 죽이는 데에 있어서 어찌 전후의 순서가 있는가? 아버지가 아이를 잃고 아이가 고아가 되고 부인이 과부가 되고…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고 인륜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한 장군이 운이 좋아 전승을 얻어 개선한 뒤 기고만장하여 상을 얻었다 해도… 처참하게 죽은 사람의 주검들이 평야를 가득 채우고… 늙어서 혼자 남은 늙은이와 고아와 과부들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애통하게 운다. 그런데 진나라나 한나라, 수나라나 당나라 등이 백전백승하여… 수백만의 군대로 천하를 호령해도… 결국 하루아침에 민심이 이반하여 무너지고 만다.”

전쟁 참화를 여실히 서술하는 이 논설은 이라크 파병을 하기로 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한 처지에 처했던 100여년 전 선각자들이 군국주의적인 세계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비판할 줄 알았다는 사실을 알면 선조에 대한 부끄러움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강성한 국가들이 앞을 다투어 더 큰 군함들을 만들고 한 열강이 육지를 잠식하면 또 다른 열강이 질세라 바다 섬을 잡아먹는” “위정자들이 인애(仁愛)의 마음을 뒤로 하고 오로지 전쟁과 살육만 일삼는” 병든 세상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이 논설의 익명의 필자는, 오주(五洲)의 크고 작은 모든 국가들이 세계적인 ‘의원’(議院·협의 입법기관)을 설립하여 국가간의 모든 문제들을 이 ‘의원’을 통해 국제법에 의거해 결정·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이 ‘의원’ 밑에 국제적인 ‘세계 공공의 군대’를 두어서 ‘천하의 난폭한 자’들을 토벌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 ‘세계평화안’은 놀랍도록 유엔과 유엔의 평화유지군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협력 기관들을 예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조건 항복’한 것은 아니었으니…

전쟁으로 가득 찬 제국주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길을 현실적으로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제국주의·군사주의를 어떻게 지양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1880년대 이후에도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현실인식의 골간이었다. 유명한 유림이자 계몽주의자 해학 이기(海鶴 李沂·1848~1909)처럼 묵자(墨子)의 박애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고, 최초의 도미 유학생으로도 알려진 유길준처럼 열강의 힘이 국제법을 유린하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국제 현실을 열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세계적 야수들이 어떤 국제기구나 국제법에 의해 순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입장에서 끝없이 나이브(naive)하게 보이기도 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세계적 규모의 부정이 없다면 살육과 약탈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걸 20세기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적 세계로부터 경쟁과 살육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받았던 100년 전 지식인들이 현실론의 차원에서 제국주의적 ‘룰’과 타협하면서도 이상론의 차원에서 저항을 펼친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제국주의 침략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개신 유교적 지성은 결코 야수들에게 ‘무조건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대전 등의 제국주의 살육의 ‘진수’를 아직 보지 못했던 그들마저도 제국주의적 현실의 극복 방안을 모색했다는 걸 보면, 20세기의 모든 역사적 비극들을 익히 아는 우리들은 제국주의의 현대판인 신자유주의의 광포(狂暴)를 좌시(坐視)할 수 있는가.

[ 참고 사이트 ]
1) 오세창에 대한 인물 정보:

http://www.kcaf.or.kr/inmul/200108/right.htm
2) 신문박물관(구한말 일부 신문 논설의 한글 번역판을 읽을 수 있음):
http://www.presseum.org/
3) <한성순보>에 대한 간단한 정보: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76-1-hansungsunbo.htm
4) 제국주의의 차별주의적 논리에 크게 영향받은 유길준의 글 ‘개화등급’: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u-pil/gae-hwa-deung-geub.htm
5) 어윤중에 대한 소개:
http://unsuk.kyunghee.ac.kr/old_history/history44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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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스포츠 국가를 세우다

흉악한 전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아낌없는 후원자가 되어 서민 사이로 납시다…국가가 주도권을 장악해‘자율적 개인’이 산산조각난 사연은 한국과는 무관한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21> 제643호 2007/01/11


“그러면 자전거를 내일 사실 것이지요?” 2006년 9월 초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대학에 초빙 교수로 가게 된 필자가 현지에서 들은 첫 질문 중 하나였다. 후쿠오카에 도착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은 그곳에서 노르웨이 이상으로 일상화돼 있었다. 학생들은 물론 노인들까지도 자전거와 절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자전거뿐인가? 필자의 숙소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의 실내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은 물론 외부인까지도 검도를 즐겼고, 옆의 공원에서는 동네 노인들의 야구 연습 시간이 진행됐다. 필자도 열심히 다녔던 옆 동네의 운동 시설은, 수영부터 가라테까지 온갖 종목들을 즐기려는 주민들로 붐비기만 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필자가 본 일본인들의 대중적인 체육 생활에서 ‘선진 사회’의 면모를 좀 엿볼 수 있었다.


△ 일본의 국민체육대회 같은 행사들은 피지배민을 ‘국민’으로 포섭해 독립적인 개인이나 어떤 특정 계급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율적 의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스포츠를 즐겨라, 그게 진정한 극일

물론 체육이 가장 대중화된 사회를 찾으려면, 이는 노동 시간이 무리하게 긴 일본은 아닐 것이다. 체육 활동 참여도는 프랑스에서는 74%에 달하지만 일본에서는 60%가 안 된다. 일본에 비해 양극화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한국에서는 체육 활동을 즐길 만한 여유를 가진 이들이 약 30%밖에 되지 않으며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첨부할 필요가 있는가? 2002년의 월드컵을 앞두고도 각급 정부 예산의 0.16%만을 체육에 이용했던 한국에 비해서 체육 예산의 비중이 0.6%에 달하는 일본은 시민 건강이 훨씬 더 잘 배려되는 곳이지만, 노르웨이는 체육 예산의 비율이 1.6%에 달한다. 유럽 사민주의 국가에 미달하긴 하지만, 일본은 그래도 고강도의 기계적인 노동에 지친 대중의 ‘움직임 욕구’ ‘유희 욕구’를 스포츠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해주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축구에서 일본과 ‘붙기’만 하면 ‘국민 감정’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폭발되지만, 고교 축구팀 수가 한국보다 40배(!)나 많은 일본만큼 한국의 ‘고딩’들도 수능의 악몽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겨야 진정한 의미의 ‘극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농경 노동과 걷기, 승마 등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시간과 강도가 줄어드는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스포츠라는 인위적 ‘대체물’의 발전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스포츠가 어느 사회에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도입되지 않고 늘 주류 지식인이나 국가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정형화·보편화된다는 것이다. 근대 스포츠가 그 모양을 갖춘 19세기의 주류 지식인과 국가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유산 계급의 대표자인 지식인들은, 많은 경우 스포츠를 팀워크 속에서 희생과 복종을 잘 익히고, 사회주의나 평화주의와 같은 ‘불온사상’에 물들 여유가 없는 ‘건전한 신체 속의 건전한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했다.

스포츠의 규율화 기능에 국가도 무관심할 리 없었다. 영국에서 1880년부터 초등 교육이 의무화되자 많은 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퇴역 군인들이 고용됐다. 그들은 교련에 가까운 체육으로 남자아이들 ‘군인 만들기’에 나섰다. 보수적 관료, 귀족들의 비호를 받았던 ‘남아훈련협회’(Lads’ Drill Association)라는 어용 체육 단체의 대표자인 미드 경이 1907년 아예 교련을 각급 학교에서 의무화해 국회에서 노동당과 자유당에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본고장이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에서도 체육에 이와 같은 ‘그늘’이 따라다녔다면 권위주의적 근대화를 단행해온 일본은 과연 어땠는가? 천황제 국가를 빼면 일본 체육의 역사를 진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 ‘이미지 세탁’이라 할까? 히로히토는 군국 일본의 수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1945년 직후에는 서민적이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1940년대 후반의 일본. 맥아더 장군 등 미국 보수파의 도움으로 천황제가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띤 신”(아라히토가미·現人神)이 아니라고 ‘인간 선언’한 히로히토는 수많은 진보파들에게 흉악한 전범으로만 인식됐다. 흔들린 황실의 권위를 어떻게 복원시키는가? 히로히토는 스포츠야말로 ‘국민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국민 통합’ 방책이라 판단하고, 아낌없이 ‘국민적 스포츠 후원자’의 이미지 만들기에 투자를 했다. ‘국민적 단결’을 목적으로 1946년부터 일본체육협회가 ‘국민체육대회’(속칭 ‘국대’)라는 전국적인 아마추어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그 제3회부터 종합적으로 가장 많은 우승자들을 낸 지방에 ‘천황배(杯)’가, 그리고 가장 많은 여성 우승자를 낸 지방에 ‘황후배(杯)’가 각각 ‘하사’되기 시작했다.

땀과 환성을 정치적으로 계산하다

천황이 상금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제4회의 ‘국대’부터 친히 관람해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전범 중의 전범이었던 히로히토가 이제는 ‘평화로운 스포츠 애호가’로서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국내외에 과시했다. 국대뿐만 아니라 동서대항 축구대회와 전국 연식 야구대회, 도쿄 육(六) 대학의 야구리그나 전국 농구대회 등 1940년대 후반의 주된 스포츠 이벤트에 ‘천황의 친람(親覽)’과 ‘천황배’ 또는 각종 황족들의 상패 ‘하사’와 같은 ‘특전’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그 당시 사진들을 보면, 관중은 천황과 황후를 향해 그야말로 외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1945년 이전에 특별한 제단에 봉안된 사진으로만 ‘뵈올 수’ 있었던 ‘그분’이 이렇게 ‘서민적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시민 사이로 다가오자 “과연 나의 가족이 왜 전쟁터에서 죽어야 했느냐”는 질문을 하려는 마음이 절로 녹는 것이었다.

1958년에 일본이 아시아경기대회를 도쿄에서 개최한 것은, 경제가 부흥한 새로운 위상을 과시해 올림픽 유치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때에 1964년의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1960년 6월에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격렬한 데모에 30만 명 이상이 나서는 등 그 당시 일본은 갈등투성이의 사회였지만 도쿄 올림픽은 국내외에 경제 부흥으로 윤택해진 일본 생활의 ‘다테마에’(建前·실제와 크게 다를 수 있는 표면적 모습)를 과시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보수 쪽의 입장을 강화했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 관객이 보내는 환성에 국가가 계산적으로 정치적 투자를 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의 대중적 스포츠는 천황의 사진을 ‘멋있게’ 걸어놓을 수 있는 신흥 부국 일본의 ‘쇼윈도’이자 토건 국가의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

1945년 이전 스포츠는 무엇보다 군국주의적·천황주의적 세뇌의 장으로 전폭적으로 이용됐다. 1885년부터 일본 학교의 체육이 기존의 경(輕)체조 위주에서 병식 체조 위주로 바뀌었는데, 1913년 문부성의 훈령으로 학교 병식 체조는 교련의 요소를 내포하게 됐다. 모든 남학생들에게 군사 교육을 하려는 영국 보수주의자들의 열망은, 바로 일본에서 실천에 옮겨졌다. 1931년부터 학교에서 체조와 교련에다 검도나 유도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강인하고 건전한 심신의 선량한 황민’을 만들기 위해 위로부터 보급됐다가 일제 패망 이후 ‘군국주의적 스포츠’로서 금지됐던 유도가 1964년 도쿄에서 올림픽 종목으로 화려한 ‘컴백’을 이루었을 때에,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를 보도했던 기자들이 과연 이 스포츠의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의식하기나 했을까?

‘스포츠가 문명인의 필수’라는 관념은, 국가가 1924년 ‘명치절’(明治節·메이지 천황의 탄생기념일, 11월3일)을 ‘국민체육의 날’로 선포해 ‘불온사상 전염 방지’의 의미에서 모든 학교에서 그 날을 기해 대대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르게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 고이즈미나 아베 총리 유의 정객들이 그렇게도 좋아한다는 ‘애국 교육’의 원형은, ‘스포츠열’을 통해 ‘딴 생각’을 가질 여유를 주지 않고 전쟁과 노동에 쓸 만한 단단한 몸, 명령 듣기에 익숙해진 굳은 뇌를 만드는 1920~30년대의 ‘스포츠 진흥’이었다.

애국 교육의 원형은 1920~30년대의 스포츠 진흥

스포츠란 개인이 심신을 스스로 ‘개조’해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인 규율성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여가 활동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주도권을 국가와 자본이 장악할 경우, ‘자율적 개인’이라는 또 하나의 근대적인 꿈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이는 과연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 이용돼온 한국 스포츠와 무관한 이야기인가? 과연 군부에 의해서 태권도가 만들어지고 보급됐던 것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유도의 창설과 보급의 동기와 그렇게 달랐는가? 과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학교 체육 수업의 형태는, 일본이 1880년대 후반부터 진행해온 군사주의적 훈육을 많이 벗어났던가? 그리고 최근의 월드컵까지 각종 스포츠 이벤트의 관(官) 쪽 이용 형태는, 1940년대 후반에 히로히토가 벌였던 ‘쇼’들과 과연 달랐던가? 일본이란 거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1. <スポ-ツと政治> 사카우에 야수히로(坂上康博), 東京: 山川出版社, 2001.
2. <戰後日本のスポ-ツ政策: その構造と展開> 세키 하루나미(?春南), 東京: 大修館書店, 1997.
3. ‘2002년 월드컵과 스포츠 문화’(<경제와 사회> 제54호, 2002년 여름, 35∼57쪽), 안민석
4. J. A. Mangan, Viking, Harmondsworth,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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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인에게서 천황이란 자기네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천황에게 열광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직후 천황의 존재를 알리는 <어론서(御論書)>나 <인민고론>등이 나오고 이를 각 현에 보급시켜 교육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정확하게 표현하면 하급 무사들의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산죠 사네토미 등이 이른바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높은 신분인 다이묘를 억누르기 위해 천황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곧 메이지 유신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정책에 불과한 게 오늘날 일본의 근대천황제라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가리야 데쓰의 <일본인과 천황>의 핵심 주제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상과 같다. 다 읽고 나면 여러 가지로 쓸 게 많은 책 같은데, 일본 내에서도 천황제를 건드리는 문제제기가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천황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각 조직의 '두목'들이 밀실에 모여 앉아 각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각을 구성하고 차기 총리를 결정하는 지금의 일본정치는 변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건 곧 아직 일본에 진정한 주권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보적 지식을 억누르는 하나의 멍에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베 이후에 누가 일본 총리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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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민주의가 필요한 이유

무상교육·노동자 경영참여 등 1956년 조봉암의 정책도 실현되지 못해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21>제673호 2007/08/16


동구권이 몰락한 뒤로 1980년대 후반 국내 혁명적 급진주의 진영은 몇 가지 노선으로 갈라졌다. 소수는 서구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선례를 참고해 국제주의적 혁명 노선에 들어섰지만, 다수는 미 제국에 대한 혐오감에 휩쓸려 이북의 ‘민족 자주’를 지표로 삼았거나, 동구권과 달리 몰락하지 않는 북구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운동들이나 복지 국가를 현실적 모델로 삼아 기존 체제 안에서 변혁의 길을 택했다. 체제 안에서의 변혁 노선을 택한 이들이 비록 원론적으로 ‘사민주의 한계 극복’을 이야기하지만, 그 현실적 정책 비전은 넓은 의미의 사민주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민주의적 선택에 장단점이 있지만, 그들의 선택에는 우선 이해가 간다.


△ 1956년 대선에서 대규모 부정이 없었다면 이승만이 아닌 조봉암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그를 구속해서 법살했다.

부양가족이 없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월 36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 등 복지제도가 한국에서 거의 없다시피 한데다 국내외에서 ‘혁명적 상황’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들어지지 않을 듯한 정세이기에, ‘혁명’을 당분간 유보하고 복지주의적 사회로의 ‘변혁’에 골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최종적 목표를 망각하면 큰일이지만, 좋은 의미에서 ‘개량주의’는 이 단계에서 전략·전술상 필요하다.

‘애국적 병사’와 연대한 일본 사민주의자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의 전제 조건이 사민주의적 대중 정당과 노조의 투쟁으로 얻어내는 부르주아 계급의 제도적 ‘양보’인데, 이 양보를 얻어낼 만한 힘이 개혁가들에게 확보돼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량’ 작업을 벌이려고 집권하거나 기존의 정계에 진출한 사민주의적 정당이 체제와의 긴장을 잃어 아예 원칙까지도 ‘타협을 위한 희생’으로 삼을 정도로 체제에 포획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이야기지만, 20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사민주의 세력들이 이 두 문제에 좌초돼 방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양보를 따낼 만한 세력 규합도 거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개량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원칙을 희생시킬 정도의 너무나 큰 양보들을 국가와 자본에 먼저 하곤 했다.

일본 사회주의 노동운동에서는 1924년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갈라서게 됐다. 공산주의자들은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면서 검거·투옥·전향 공작의 대상이 됐지만, 사민주의자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각종 선거에 출마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28년 총선에서 사민주의자들은 전체 표의 4.7%를 득표해 466석 중 8석을 얻었다. 그런데 두 정당으로 분열되는 내분으로 의석 수가 그 뒤로 몇 년간 줄어들기만 하는 등 정치적 소수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만주 침략 이후로는 자꾸만 전쟁 광풍에 휩쓸렸다.

소수 정치 세력으로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추구하는 상황이다 보니 체제에 압력을 넣는 것보다는 오히려 체제가 내세우는 조건을 다 받아들여 타협을 무조건 추구하는 꼴이 되는데, 체제의 가장 우선적 조건은 ‘총력 전쟁에의 협력’이었다. 노조 간부들과 기독교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사회민중당이 1931년 만주 침략을 반대했다가 바로 그 다음해에 그 후신 정당인 사회대중당은 만주 침략에 대한 반대를 싹 빼버리고 말았다. 1933년에 이르러 ‘국가의 신성한 가치’를 거의 내면화한 사회대중당은 아예 ‘이기적인 계급 이익’을 비난하고 ‘국민의 영구성’을 내세웠다. ‘국민 생계 문제 해결’을 내건 사회대중당은 1937년 총선에서 9%를 득표해 37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했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민은 중국 형제들과 손을 잡아 같이 투쟁할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국 침략에 총알받이로 나설 ‘애국적 병사’들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민초들의 전선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파시스트 국가와 거의 동질화된 사회대중당의 사민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체제 안에서의 개량은 불가피한 선택일지라도 국가가 이용하는 ‘국민’ 담론을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여 자본과의 ‘국민적 타협’을 시도하는 순간에 ‘악마와의 거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진보 운동가들이, 현 정부가 범죄적으로 이라크에 파병한 군인 중 희생이 있는 경우에라도 ‘우리 국민’의 편을 무조건 드는 대신 미 제국과 어려운 전투를 벌이는 이라크 독립운동가들을 이해해주는 국제주의적이며 노동계급다운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갈수록 한국 군대가 미 제국을 위한 총알받이로 이용되는 건수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는 더 이상 탁상공론이 아니다.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당분간 추구한다 해도 한국의 반예속적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들러리로 끼어들게 되는 각종 국제적 살육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삼균주의’ 주장한 조소앙의 변화

보통 사민주의는 계급혁명을 당분간 내지는 예측 가능한 장래에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급진주의자 출신들이 하게 돼 있는데, 1930∼40년대 조선의 경우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사민주의를 방불케 하는 미래 구상들을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1920년 후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라는 공격에 당황한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의 공산당원에 의해서 1억4천만 명의 평민이 지배를 받는 공산주의 독재 국가 소련”을 비판하고 소련식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기독교적 사회주의와 평화적인 점차적 개혁”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1930년대에 민족주의 세력들을 규합하려 했던 유림 출신의 민족주의자 조소앙(1887∼1958)은 ‘삼균주의’라는 이념을 창출해 공산주의를 나름대로 지양해보려 했다. 보편주의적 지향과 종교성이 강한 조소앙은 정치의 궁극적 목표로 ‘사해일가’(四海一家·전세계의 평화적 통일)를 정해놓고 일제의 마수로부터 조선을 되찾고 나서 정치·경제·교육을 다 고르게 하자(三均·세 가지 고르게 하기)는 의미에서 토지와 대규모 생산시설의 국유화, 그리고 무상 의무교육을 새 나라의 국시로 제시했다.

1941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에까지 수록된 이 요구는 지금도 급진적으로 들린다. 과연 광복 이후에는 조소앙이 그 실천을 어떻게 추구했는가? 광복된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조소앙은 “영국의 노동당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한다”고 기염을 토하곤 했는데, 국내 정치판에서 쓰라림을 많이 겪고 나서는 가시적으로 온건화됐다. 그가 창당해 이끈 사회당은 ‘결당대회 선언서’(1948년 12월)에서 ‘민족자본의 축적’을 사회의 목표로 인정한데다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사비 부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6·25 전쟁을 앞둔 조소앙은 영국 노동당을 능가할 생각을 버리고 ‘영국 노동당의 사회 개혁 작업’을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했다.

그가 이처럼 온건화된 이유는 간단했다. 진보적 노조들이 파괴·와해되고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할 정도로 어용적 성격이 강한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의 영역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자가 권력에 압력을 넣을 만한 대중운동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조소앙은 전쟁통에 납북돼 김일성 정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중립화 통일 방안’을 내세워 단식 투쟁하다가 죽었고, 비슷한 사민주의적 노선을 걸었던 여운형(1886∼1947)은 ‘파업 자제’ 당부로 진보적 노동자들의 지지를 거의 잃은 채 극우파의 손에 암살됐다. 지배자들이 대중에게 양보가 아닌 학살로 대응하고, 좌절한 대중이 당분간 조직적 투쟁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사민주의자들의 운명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가장 성공적 사민주의 정치인은 아마도 조봉암(1898∼1959)이었을 것이다. 1956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진보 인사들을 ‘사민주의’라는 화두로 규합해 진보당을 만든 그는, ‘소련의 세계 침략’을 규탄해 ‘자유 진영의 보루 미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할 만큼, 그리고 대규모 기간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해도 중소기업의 육성을 요구할 만큼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봉암은 1956년 5월15일 대선에서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건다. 그 결과 그는 23.8%의 표를 얻어 정계를 당황케 했다. 그는 ‘냉전적 사민주의’라는 한계에도 관료집단과 독점자본 위주의 한국 정치 패러다임 전체를 확 바꿀 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위험을 알아챈 이승만 정권은 용공 조작이라는 낯익은 수법으로 1958∼59년에 진보당을 해체시키고 조봉암을 ‘법살’(法殺)했다. 한국적 사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조봉암을 옹호해 구원해낼 만한 힘을 가진 대중적인 사민주의 운동은 당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노총 지도자들이 조봉암을 두둔하기는커녕 그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섰을 정도였다.

국민주의·민족주의의 함정을 피하라

조봉암이 이야기했던 무상교육제도나 노동자 경영 참여 등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좋은 의미의 ‘개량’은 지금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개량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우리가 그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려면 사민주의적 개혁가들은 국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함정들을 피하는 한편, 비정규직을 비롯한 광범위한 ‘피해 대중’들의 조합화·조직화를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튼튼한 운동적 기반을 다지고 급진적 노동투쟁의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본과 국가에 압력을 넣어 의미 있는 ‘양보’를 따낼 수 있다.

참고 문헌

1.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사상> 강명숙, 백산자료원, 1999, 60∼82, 194∼246쪽
2. <조소앙이 꿈꾼 세계> 김기승, 지영사, 2003, 193∼315쪽.
3. <조봉암과 1950년대> 서중석, 상권, 역사비평사, 1999, 309∼454쪽.
4.〈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 Andrew Gor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pp.12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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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난 그 어떤 민족주의도 혐오한다. 윤도현이 <오, 필승코리아>를 외칠 때 난 냉소했다.

"이 자식(죄송.-.-)도 맛이 갔군!"

록의 진정성을 이야기 하는, 그건 권위에의 '저항'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했던 자칭 '락커'라는 인간이 월드컵 응원가를 부른다? 하지만 뭐, 그의 선택이니 어쩌겠는가. 딱, 저 한 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게 민주노동당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당원으로서 나름대로 욕할 자격이 있으니까. 뭐 굳이 대선후보 선출과정이 아니라도 비판할 건덕지는 많았다. 그 동안 짜증나서 잘 쳐다보지를 않았지만, 엔엘 애들 하는 짓거리 보고 있노라면 탈당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 후보 선출과정에서도 엔엘 애들하고 권영길이 한 건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엔엘 애들의 조직적 지지 표명에 이 '늙은이' 감동먹었는지 '혁명열사릉 참배'와 '조선노동당사 공유'를 외치며 화답한다. 나 참, 진짜 환장하겠다.

이게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인간이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국민경선을 치르는 와중에 할 수 있는 소리인가? 그렇게 주사파 애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걔네들의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제발 헛 짓거리 하지 말고 나 좀 투표에 참가하게 해주면 좋겠다. 지금 같아선 이 주사파 애들 정신건강 염려하는 권영길에 투표하기보다는 차라리 기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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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민족주의’는 있는가


폴란드·핀란드에서는 ‘독립 은인’으로 여겨지는 조선의 적 일본 경무총장 아카시…
특정 제국을 혐오했을 뿐 제국주의에는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민족주의자의 근시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 21> 제640호 2006/12/21


필자가 아는 구미의 한 일본사 전문가는 언젠가 한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두고 “한 국민의 영웅을 죽인 사람이 그 공로로 다른 국민의 영웅이 된,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경우”라고 비꼰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역사에 없다는 가정법을 억지로 적용한다면 이토 히로부미와 다르지 않은 부국강병 위주의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안중근을 비롯한 한국 개화파 인물들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약해진 청나라의 분할에 참여하는 식으로 이토와 동격의 침략자로 나서는 등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역사 속에서는, 신생 제국의 수반 중 한 명을 처단한 이는, 당연히 그 제국의 희생자에게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에서는 가해 집단의 기억과 피해 집단의 기억은 극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 안중근(왼쪽)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사진 왼쪽)처단을 두고 ‘영웅의 상대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안중근과 같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집단기억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까.


러시아를 ‘변방’부터 무너뜨려라

그렇다고는 해도 안중근과 같은 영웅들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집단기억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가? 아쉽게도 꼭 그렇지도 않다. 안중근 의거 당시에 조선에 헌병대장으로 들어와 의병 탄압에 열을 올렸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1919)라는 일제의 고급 군인을 둘러싼 기억의 대립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집단적 기억들이 얼마나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인에게, ‘합방’과 함께 경무총장이 되어 1914년까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해온 아카시는 ‘적’이 아닐 수 없었다.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기독교 신자, 계몽운동가들에게 수십 종류의 가혹한 고문을 가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아카시였다. 조선의 적이기도 하지만, 1914년부터 중국을 ‘조선화(化)’하는 일, 즉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따먹어 식민지 내지 반(反)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하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만 총독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아카시는 중국 민족주의 입장에서도 ‘적’일 것이다. 그런데 1900년대의 계몽운동가들이 조선과 그 비극적인 운명이 흡사하다고 동병상련을 느꼈던 폴란드의 민족주의나, 러시아 제국의 또 하나의 속령이었던 핀란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아카시가 다름 아닌 ‘독립운동의 은인’이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가?

20세기의 벽두, 조선을 놓고 대립했던 러시아와 일본…. 덩치가 훨씬 작았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전혀 예상하지 않는 부위에다 불의의 타격을 가하는 것이 거인 러시아를 쓰러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902년부터 이 계획이 일본 군부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후쿠오카 출신으로서 육군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한 아카시 모토지로 대좌(대령)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부임됐다.아카시는 한 헝가리 계통의 엔지니어를 통해 러시아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로부터 더욱 많은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던 핀란드의 헌정당(온건 민족주의자)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1904년 1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아카시를 포함한 일본 외교단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적국에서의 내란 유도 공작’에 착수했다.

서구의 매너에 밝고 사교성이 탁월했던 아카시는 짧은 기간에 여느 열강의 정보장교가 부러워할 정도의 넓은 첩보·공작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스웨덴 군부와 러시아 군부 간의 전통적인 적대관계를 이용해 스웨덴의 군사첩보부를 통해 러시아군에 대한 정기적 사찰을 시작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핀란드 헌정당의 가장 급진적 활동가인 콘니 질리아쿠스(Konni Zilliakus·1855~1924)를 가까이 사귀어 그를 통해 러시아의 혁명가를 비롯해 폴란드, 그루지야, 라트비아, 벨로루시의 민족주의자까지 알게 됐다. 핀란드를 ‘러시아화’해 그 자치를 말살하려는 러시아 정부가 미웠던 헌정당의 일부 지도부는 “일본 쪽에서 총 5만 정 정도를 공급해주면 러시아의 후방을 크게 교란시킬 수 있다. 대신에,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 핀란드 독립을 요구해달라”는 대담한 제안까지 내놓았다가 유럽의 정치에 그 정도로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본 외무부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 요즘 일본에서는 아카시를 “일본의 승리를 이끌어준 위대한 첩보전의 왕”으로 치켜세우는 책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왼쪽). 대만에 남아 있는 아카시의 묘지에는 일본식 신사 문인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오른쪽).


핀란드 등이 받은 혁명 자금은 3500만달러

‘마당발’이었던 아카시를 통해 폴란드의 온건 민족주의 지도자인 로만 드모브스키(Roman Dmovski·1864~1939)는 1904년 5월에 도쿄에 온다. 그리고는 일본군과 전투 중인 러시아군에 속한 폴란드계 군인들을 어떻게 스스로 항복하게끔 유도할 수 있는지 참모본부의 관계자들과 의논했다. 그 뒤를 이어 급진적 민족주의 지도자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ozef Pilsudski·1867~1935)도 도쿄를 찾는다. 그는 아예 일본 자금으로 폴란드에서 무장 반란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지만 역시 일본 군부로부터 퇴짜를 맞고 폴란드계 군인들 사이의 선전선동과 후방 교란 비용으로 2만파운드 정도만 받아냈다. 러시아의 패배를 틈타 폴란드를 독립시키려던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여 일본군에 항복한 폴란드계 군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관 암살과 격렬한 데모 등을 위시한 폴란드에서의 피우수트스키 추종자들의 활동이 러시아 내부 사정의 전체적인 악화에 기여했음은 틀림없다. 즉 폴란드 민족운동에의 일본 군부의 ‘투자’는 그 나름의 ‘부가가치’를 생산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성공은, 그루지야를 비롯한 코카서스 지역의 급진파 민족혁명가들에 한 ‘투자’였다. 아카시는 그 지역에 8500정 정도의 스위스제 총을 수로를 통해 공급해주었는데, 그 무기는 1905년 겨울의 포티·수후미 등 그루지야의 여러 도시에서 무장 반란을 가능케 했다.

아카시를 통해 핀란드, 폴란드, 그루지야, 그리고 러시아 내의 혁명세력들이 받은 돈은 당시의 화폐 단위로 약 100만엔, 즉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약 3500만달러에 달했다. 아카시의 공작이 일본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러시아 제국 안에서의 중앙정부와 피압박 민족 간 갈등의 표면화에 공헌했다고 생각된다. 사실, 굳이 ‘돈’이라는 요소가 없었다 해도, 억압자 러시아의 패배 자체가 그 내부의 소수자들에게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아카시라는 일제 군인과 러시아 제국 안의 혁명세력의 협조는 ‘동상이몽’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혁명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아카시가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일체의 혁명 지원을 중단해버린 반면, 러시아 혁명세력 안에서도 애당초부터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제국과 협력관계를 곱지 않게 보는 여론들이 있었다. 예컨대 주로 농민들에게 기댔던 소부르주아적 경향의 사회혁명당이 일본 지원을 즐겨 받았지만, 레닌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세력들은 혁명의 계기로서 자국 러시아의 패배를 기원하면서도 일본 돈에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윤치호의 표현대로 “조선 독립의 관에 마지막 못을 박았던” 일본군의 승리들에 대해 폴란드나 핀란드에서 무비판적인 지지를 보내고 기회 닿는 대로 일제와 협력하고 싶어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폴란드와 조선은 식민화의 고통을 공유했지만, 조선을 짓밟았던 일본 군부에게 거금을 요청해 ‘일본과 폴란드의 동맹’을 갈구했던 피우수트스키는 지금도 수많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웅으로 각인돼 있다.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압제를 비판했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라는 청나라 계몽주의의 ‘스타’ 논객의 글을 조선 계몽주의자들이 읽어 핀란드의 비운에 동감을 느꼈지만, 악질 헌병 아카시는 질리아쿠스의 회고록을 탐독했던 1920~30년대의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존경스러운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해서 한 약소민족에게 ‘원흉’으로 기억되는 제국의 충견이, 다른 약소민족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은인’으로 기억되는가? 문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본질에 있다.

미국이 은인인 쿠르드 민족주의자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독립만을 원했던 피우수트스키나 질리아쿠스는 하나의 특정 제국인 러시아를 혐오했을 뿐이지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조선을 불법 점령한 일본의 돈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우리 적의 적과의 연대’일 뿐이었다. 오늘날의 일부 쿠르드족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를 불법 점령한 미군을 “민족 독립의 은인”으로 오해해 미국 쪽의 장기적인 유전 지역 장악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근시안이 아닌가?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특정 압제자를 상대로 하는 국지적인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도 세계적인 압제의 그물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초민족적·초인종적 투쟁의 수준으로 이를 잘 승화시키지 못한다. ‘반러 코드’ 하나로 일본 군부와 친해질 수 있었던 피우수트스키나 질리아쿠스, 일제의 감옥에서도 ‘황색인종의 대동단결’과 ‘백색 인종과의 대결’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안중근의 수준을 넘어 보편적인 반제 투쟁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아카시와 손을 잡는 대신에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반전 연대를 만들고 있었던 레닌이 이미 그때부터 외쳤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이외에 과연 있겠는가?


참고 문헌:

1. Akashi Motojir?, Helsinki: SHS, 1988.
2. <明石工作―謀略の日露戰爭> 이나바 치하루(?葉千晴), 丸善ライブラリ一, 1995. 3. Michael Futrell, London: Praeger, 1963.
4. <Японские деньги и 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Русская разведка и контрразведка в войне 1904-1905 гг.: Документы> Павлов Д., Петров С., Москва: Издательская группа “Прогресс”: “Прогресс-Академия”,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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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박노자의 거의 대부분의 견해에 200% 동의한다. 읽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견해라면 동의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것은 그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의 균형 잡힌 시각 때문이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한 절대 보편타당한 비판은 더더욱 그렇다.

솔직히 세계사를 돌아봤을 때 '민족주의' 치고 '사고치지 않은 민족주의'가 존재하기나 했을까? 결국은 국수주의, 국가파시즘, 전체주의로 전락하게 되는 빌어먹을 넘의 민족주의. 세계사의 독재자, 파시즘 치고 '애국', 민족', '국익' 외치지 않은 것들이 있었나? 그래서 난 '민족'이니 '애국'이니 '국익'이니 하며 벌어지는, 혹은 벌일려고 하는 그 모든 일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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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편적 민족주의는 없죠? 보편적 인류애가 있을뿐.... 한때는 그래요. 저항적 민족주의의 진보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그건 반쯤은 의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이고 더더욱 지금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민족주의는 오히려 반동이 되고 있지 않나 싶을정도예요.

내오랜꿈 2007-09-19 01:04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난 '광화문에서의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 하나에 '목숨 거는 슬픈 애국'.

지금 20대 초반의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각 팀 선수들에 대해 우리가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이나 술술 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의 시발점은 아마도 2002년 월드컵이겠지.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너 대한민국 사람 아니냐, 심지어 매국노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분위기.

이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것이 바로 '황우석 사건' 아니겠나.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황우석 사태 당시 MBC 보도가 나가고 MBC가 취재윤리 문제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자 MBC 시청거부해야 된다고 흥분한 인간들도 여럿 된다.

그런데 그 인간들, 한때는 '운동권'이었단다. 시부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엔엘 애들 대부분이 내가 아는 이 운동권 인간하고 똑 같았을 걸?

누에 2007-09-19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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