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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재구성의 신호탄인가?
[서평]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

최광은 / 한국사회당 대변인
출처 : <레디앙> 2007-12-17


   
  ▲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 | 진보정치연구소 | 후마니타스(2007) 표지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 선거를 사흘 남겨두고 공개된 이명박 후보 광운대 특강 동영상이 막판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지금,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BBK라는 영문 세 글자만 머릿속에 남는 대선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대통령 선거라는 공간이 정책과 가치, 비전의 대결로 치러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교과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만 것 같아 씁쓸하다.

어제 내가 일하고 있는 한국사회당 중앙당사로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보낸 것이었다.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진보정치연구소 지음, 후마니타스, 2007)라는 책이었는데, 1판 1쇄 발행일이 2007년 12월 10일자였다. 내용을 대략 훑어보고 나니 불현듯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타이밍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좀 더 일찍 발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 비전과 민주노동당이 공식적으로 채택한 코리아연방공화국 비전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토론되고 경쟁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사회국가, 코리아연방공화국, 사회적 공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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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공산주의와 다른 ‘우정의 정치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코뮨주의 선언’ 펴내

강성만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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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때마다 등장했던, 이른바 '87년 체제의 리바이벌'이라 할 수 있는 '비지론자'들의 아우성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번 17대 대선의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적어도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란 의미에서 그렇다.

그들, 비지론자들이 주로 했던 말 가운데 대표적 사기성 발언은 "지난 번 대선에서는 나도 백기완 선생 지지했었는데, 이번에는 DJ를 지지(해야)한다. 지난 번 대선에서는 진보정당을 지지했었는데 이번에는 노무현을 지지(해야)한다."는 류의 발언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진정한 진보주의자나 좌파는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그 어떤 행위의 대상을 만나더라도 자신의 이념과 정치적 지향을 올곧게 표현해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대오를 이탈하여 보수야당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뉴라이트'의 기치를 드는 변절을 감행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보수정치판으로 가든, 뉴라이트의 기수가 되든-은 솔직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명확하게 공표했다는 점에서. 이도 아니면서 '진보緣, 좌파緣' 하는 사람들은 또 그 얼마나 많은가. 문국현을 이야기하고, 찍을 사람이 없어서 기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이들이 과연 진보주의자고 좌파일까? 만약 이들이 지난 번 대선 같이 한나라당이라는 극우와 자유주의 정당이 박빙의 승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또 뭐라고 말하고 행동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무장투쟁이 아니라 의회민주주의 노선을 통한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주의자, 좌파라면 민주노동당과 한국사회당 말고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두 개의 정당 말고 사민주의나 사회주의적 지향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있는 정당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진정한 좌파, 진보주의자라면 그 어떤 공간에서든 지금과 같은 선거국면이라면 자신의 이념적 지향에 맞는 행동방침을 드러내고 조직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기권한다는 소리, 투표할 사람을 못 찾았다는 소리가 진보주의자, 좌파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이상은 오늘 올리는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와 수유+너머의 <코뮨주의 선언>을 소개하는 글들, 그리고 여러 블로그들에 올라와 있는 대선 관련 글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이 사회에 실현하고자 이런 저런 실천방향과 기획을 모색해 나가는 이들의 노력에 대해서 진보연하는 먹물들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읽어보거나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책상에 앉아서 조롱하거나 폄하하는 모습들은 솔직히 역겹기까지 하다.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고 진보를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이들이 내놓는 실천의 기획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최광은의 말대로 이 책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가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그 어떤 변화를 촉진하는 매개체가 될지는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 없지만, '코리아연방공화국'을 국가비젼으로 선포하는 그룹과는 분명 함께 할 수 있는 차이를 넘어서는 차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위의 두 권의 책과 '자율평론 그룹'에서 지속적으로 번역해내는 네그리의 책들, '새사연'의 차베스에 관한 책들을 비교검토 해봐야겠다. 아무래도 내일로 다가온 투표보다는 투표결과 이후의 연장전이 더 재미 있을 것 같기에 시대에 뒤쳐지지 않을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2007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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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공산주의와 다른 ‘우정의 정치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코뮨주의 선언’ 펴내

강성만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12월 12일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들이 안산의 이주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구원들은 지난해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농민·노동자 및 이주노동자들과 연대 모임을 갖고 집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실천 활동을 펼쳐 왔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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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면 역시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봐야 한다. 궁금하신 분들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홈페이지(http://www.transs.pe.kr/)에 들러보기 바란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곡해된 프리즘으로 이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이들이 펴낸 <소수성의 정치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수성의 정치'에서 '전위'를 찾아내는 무지함을 용감하게 표출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의 그 어느 '연구집단'도 새만금 반대투쟁의 일환으로 삼보일배투쟁이나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에 집단적으로 참가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 역시 왜 이들의 실천적 모습이 하필 이러한 문제에 발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꼬뮨주의'를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핵심으로 참여하고 있고, <꼬뮨주의 선언>의 공저자의 한 사람인 이진경씨와의 대담이다. 상당히 오래전(2,000년)의 대담이지만, '꼬뮨주의'의 사상적 모태는 이때부터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일차적으로는 1997년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이미 그가 말하는 '꼬뮨주의'의 기본적 골격이 갖추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꼬뮨주의에 대한 단상
[인문학데이트] ⑨ 이진경

글 고명섭 기자 사진 김진수 기자
출처 : <한겨레신문> 2000년 07월 20일


인문학 데이트 아홉 번째 초청자는 이진경(37)씨다. 이씨는 약관 25살 때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으로 1980년대 대학가에 마르크스주의 원전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학생운동 조직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출감 뒤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강의와 공부를 하고 있는 그를, 같은 공간에서 강의를 한 바 있는 권보드래(31) 서울대 강사(국문학)가 만나 <수학의 몽상> 등 그의 저서들을 놓고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눴다. 편집자

'근대에 묶인 사람'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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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07-12-1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왠지 이진경은 현실 너머에 메달려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글을 읽을 적마다 불편했습니다. 그의 글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한다면 좋을 듯 싶은데 1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글에 달린 수많은 주석들이 글읽기를 방해하곤 합니다.

내오랜꿈 2007-12-13 00:2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런데 그의 글에 달린 수많은 주석이 달린 책이란 어떤 책을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아는 한 그의 최근 주저인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은 주석이 아예 하나도 안붙어 있고, <미래의 맑스주의>(2006>는 거의 주석이 없는데요. 이 책들 말고 최근에 나온 그의 책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ntitheme 2007-12-13 00:41   좋아요 0 | URL
최근 책들 중 많이 읽진 않았지만 <미래의 맑스주의>의 경우 주석보다는 수많은 인용이 가독성을 떨어뜨리더군요. 전 인용 많은 글도 별로 안좋아하는 성격이라...

내오랜꿈 2007-12-13 00:56   좋아요 0 | URL
ㅎㅎ..
무시하고 읽으시면 될텐데...^^
그래서 요즘은 많이들 인용은 후주로 일괄 처리하잖아요(<미래의 맑스주의>도 그렇고...).

어쩌면, 인용은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번역서들의 경우는 특히나 어쩔 수 없는 것일테고요.

antitheme 2007-12-13 00:59   좋아요 0 | URL
수유+너머나 이진경의 성과들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진경의 글에서 맑스, 알튀세르, 발리바르 등의 어록(?)이 사라지고 현실과 그의 육성이 담긴 글이 나와서 좀 더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듭니다. <사사방>, <현실과과학>, <노급> 등에서 보여줬던 나름의 벽과 한계를 아직은 깨뜨리지 못하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학자로서 이진경보다는 그이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성과물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오랜꿈 2007-12-13 01:28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생각할 때 <현실과 과학>이나 <노급>의 그림자는 90년대 중반 이진경이 <문화과학> 그룹과 교류할 때까지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푸코, 들뢰즈를 경유하면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도 어느 정도 일차적인 단절을 겪습니다(97년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이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경계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적어도 2000년 이후 이진경에게서 알뛰세르나 발리바르의 그림자는 조금 찾기 힘들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맑스주의자에게 맑스를 버리라는 건 좀 너무 가혹한 것 같고요..^^

오히려 이진경이나 그의 동료들은 '꼬뮨주의'를 정식화하면서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같은 그들이 한때 기대었던 사람들보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나, 용수의 <중론>이나 <벽암론> 등 불교 사상, 아날학파의 역사학 등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착취'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현재의 이진경보다 안티테마님께서 더 많은 '이진경의 옛그림자'를 짊어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바라 2007-12-13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껏해야 철굴을 통해 그의 저서를 접했을 뿐인 저는 이진경을 잘 모릅니다만 최근의 미-래의 맑스주의 같은 책을 예전에 어설프게 읽은 기억으로는 이진경씨에게 알튀세르는 거의 의미가 없는 듯 했고 들뢰즈나 네그리를 주된 전거로 삼는 듯 했습니다. 이진경씨에 대해서는 예전에 무영이란 분이 올려놓으신 글이 생각나네요.(http://blog.aladdin.co.kr/muratova/870232) 뭐 저는 한참 공부가 짧아 뭐라 가치판단은 못하겠지만; 수유너머라는 집단이 흥미롭다는 생각은 듭니다

내오랜꿈 2007-12-13 10:06   좋아요 0 | URL
네에, 이들의 코뮨주의에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아우토노미아운동'의 흔적이 많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영님의 글은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기본적인 정보에서 잘못된 게 있습니다. 이진경은 63년생이니까 <사사방>을 쓸 때는 24살인데 27살로 되어 있군요. 아마 인물정보에서 착오가 있으셨던 듯. 그리고 황우석 교수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가 정말 들뢰즈와 노자에게 비롯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고 한 대목도 너무 단순화시킨 전제를 만들어놓고 비판의 논지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코뮨주의'가 들뢰즈와 노자에게만 전적으로 기대어서 나온 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판하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제가 일별한 느낌이 그랬습니다.
 

'라클라우/무페 논쟁'으로 유명한 샹탈 무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받아들여 자신들(논쟁을 하면서도 라클라우와 무페는 지속적인 공동작업을 수행한다)의 '급진적 민주주의' 기획을 도출해낸다.

그들은 '사회'(구성체)를 그 요소들, 예컨대 자본, 이데올로기, 노동, 실천 등의 요소들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접합과정'으로 이해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주의적 토대결정론을 비판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에서 다루는 계급투쟁이 실제로는 다양한 사회적 대립를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일 뿐이며, '사회'(구성체)에는 다양한 투쟁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 사회의 변화/변혁이란 항상 '가능성의 (새로운) 장'이란 의미에서 열려 있으며, 그 열린 공간을 누가 어떻게 장악하느냐 하는 것 또한 항상 가능성의 장으로 열려 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열린 가능성의 장에 새로운 접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헤게모니 투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여기서 그람시 헤게모니 개념의 전략적 의미가 도출된다.

이러한 이들의 이론적 정식화는 공저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번역은 김성기, 김해식 등에 의해 <사회변혁과 헤게모니>(1990, 터)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당시의 시대분위기와 맞물려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 역시 당시 어떤 '갇힌 공간'에서 한창 그람시를 새롭게 읽고 있었기에 흥미롭게 보았던 책 가운데 하나였다.

아래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 대한 서평이다. 그런데 솔직한 느낌으로는 너무 늦게 찾아온 손님 같다. 앞에서 언급한 <헤게모니와 사회전략>의 연장선 상에서 읽혀지고 다루어졌어야 할 책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헤게모니와 사회전략>이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을 너머 새로운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이 책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과 완전히 단절된 시각을 보여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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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노예들이여, 정치로 돌아오라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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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접점을 찾다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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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7-12-08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좀 늦게 소개된 감이 있습니다. :-)

내오랜꿈 2007-12-08 17:46   좋아요 0 | URL
네에,, 아마 그때는 사회과학계 내에서 '(맑시즘에서) 너무 벗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갈림길에 서다

대학신문 2007년 11월 04일


진중권 “근대성의 부족”, 천정환 “근대성의 포화”
한국 대중, ‘파시스트적 군중’과 ‘자율주의적 다중’의 양면성 보여

지식인, 현상의 원인을 끝없이 합리적으로 보여줘야
계몽의 시대는 끝났지만 계몽의 과제는 계속된다



지난해 발생한 일명 ‘황우석 사태’는 한국 문화의 병리적 측면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문화적 ‘거울’이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올해 8~9월에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져 평론가들에 대한 대중의 거센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현상, 대중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의 문화평론가, 진중권과 천정환이 이 물음에 답하고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그리고 지성을 열쇳말 삼아 대담을 진행했다. 지난달 29일 서울대 두레미담에서 열린 대담은 근대성에 대한 이견으로 초반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사회 : 원선우 편집장
정리 : 서형준 부편집장
사진 : 서유경 사진부장
속기 : 장서연 수습기자


▲ 지난 29일(월) 서울대 두레미담에서 진행된 대담장면.


▲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좁은 의미의 미학을 넘어
사회학적 존재미학을 탐구 중이다.


▲ 천정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의 근대 문학에 대한
문화론적 연구가 주된 관심사다.


사회(원선우 편집장): 오늘날의 한국 문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한국의 근대성 전반에 대한 평가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천정환(이하 ‘천’) : 근대를 합리적인 것, 인권과 보편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 더불어 타자에 대한 폭력과 제국주의, 인종주의 등의 이면도 갖고 있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한국의 근대성은 포화 수준이라고 본다. 포화된 근대성의 폐해가 최근에 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해 근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권력이 도를 넘어서 (사람들의) 자치에 대한 생각을 빼앗아 버렸다. 그것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이하 ‘진’): 나는 근대성의 개념을 제국주의로까지 확장하지 않고 철학적 프로젝트로 한정해서 본다. 바로 자율적 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시민의식의 성숙이 함께 일어났지만 한국은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발달이 따로 진행됐다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근대성은 4ㆍ19, 5ㆍ18 등을 통해서 차츰 성장해 지금은 상당한 수준에 다다랐지만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민주화 혁명을 이뤄냈지만 아직도 산업화시대의 군사독재의 잔재, 즉 집단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개인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미디어의 관점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근대는 기본적으로 문자문화인데, 한국은 문자문화로의 진입이 비교적 늦었다. 해방 이후에도 문맹률이 90%에 달했지 않나. 또 서구에서는 500여년에 걸쳐 서서히 이뤄진 문화 변화가 한국에서는 50여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문자문화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영상문화 시대에 도달하면서 문자문화가 쇠퇴해 버렸다.

천: 193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문맹률은 78% 정도였으며, 해방 이후 조사에서는 60% 정도로 변화했다는 점은 먼저 지적하고 싶다. 문자문화 전통이나 서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한국에 결여돼 있었다는 점은 수긍한다. 하지만 이는 근대성의 결여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근대성의 이면들, 그늘들 때문이다.  (월드컵 응원에서 보듯) 사회 전체적인 동시성이 무척 높다든지, 계속되는 개발과 중앙집중, 한국적인 가족주의, 민족주의 등 한국사회가 계속 처할 수밖에 없는 질곡들이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들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민사회를 형성시켰던 서구의 근대조차도 사실 내면을 살펴보면 다른 사회나 식민지에 대한 폭력이라든지, 여성이나 노동자 계급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진 : 가장 근대적인 현대 서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왜 근대성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근대성 자체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거나 폭력으로 연결된다거나하는 식의 탈근대 담론에 찬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근대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안 된다. 칸트나 데카르트, 경험주의 철학에 꼭 제국주의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나 나치를 보면 자신들은 근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구술문화와 같은 봉건적인 이데올로기를 이용했다. 야만적인 문화가 근대적인 기술과 결합해서 제국주의가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시대는 잘못이 없다.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천 : 자본주의와 그에 결합하는 국민국가가 문제 아닌가?

진 :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자체도 식민주의를 함축할 필요는 없다. 로마는 자본주의 이전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전쟁, 노예, 속주(屬州)가 있지 않았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19~20세기에는) 서구에서 식민주의 경향이 기술과 결합돼 전세계적으로 확대됐다는 차이만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나 야만성의 문제를 근대성의 포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 지난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은 ‘군중’과 ‘다중’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사진제공 : 로이터 통신)



사회: 이제 다른 열쇳말인 대중으로 넘어가보자. 근대성의 문제성과 대중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2007년 한국의 대중은 어떤 사람들로 이뤄져 있고, 대중의 속성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진 : 인민ㆍ민중과 다르게 대중은 대중매체와 더불어 등장했다고 본다. 하나의 원본으로 수십만의 복사본을 만들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그런 복사본을 소비ㆍ향유하는 사람들을 대중으로 정의한다. 한국의 경우 대중이 인터넷과 더불어 부각된 것 같다.

대중을 흔히 엘리트 그룹과 분리시키는데, 나는 모든 사람이 대중이라고 본다. 나도 특정 부문에서는 전문성을 갖고 있지만, 내 분야를 넘어서면 대중이 된다.

천 : 그 말에 동의한다. 실제로 대중현상의 ‘외부’는 존재하기 힘들다. 대중현상은 미디어, 국가 ,자본에 의해 사람들이 군집화된 현상, 어느 순간 특정 사건에 쏠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대중 안에는 노동자, 여성, 청소년, 많이 배운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계급이나 젠더의 차이를 흐린 채 대중이란 말을 사용한다면 이 개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진 : 대중은 하나의 본질만을 갖는 집단이 아니다. ‘황우석 사태’ 때나 이번 「디-워」 논쟁에서 볼 수 있듯, 대중은 두 가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듯하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한 파시스트적 ‘군중’의 길과 안토니오 네그리가 원하는 자율주의적 ‘다중’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 때의 브릭(BRIC, 생물학연구정보센터)은 인터넷이 갖고 있는 집단지성의 위력을, 대중의 다중으로서의 가능성을 정확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항상 소수라는 게 문제다. 다시 말해 다수의 군중화와 소수의 다중화로 대중이 분리되고 있다.

천 : 대중현상에는 항상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 한 방향으로 확 쏠리는 현상 속에서 희열을 맛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대중을 이용해 자기 권력이나 자본의 이해를 실현시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대중현상에는 폭력성이 늘 잠재돼 있다.

진 : 미국에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행동하지 않았다. 외려 한국인들에게 “너희가 왜 미안해하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이외에도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는 우리 못지않게 발달한 대중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사회의 대중현상을 일반적인 대중론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한국적인 습성이다.

사회: 대중의 위험성과 가능성에 관해서는 두 분이 생각을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면 한국 대중의 위험성의 사회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

천 : 한국사회에는 개인이 비판적 이성으로서 역할하는 것을 막는 구조가 있다. 민족주의, 가족주의 같은 집단문화가 바로 그런 구조인데, 이것이 한국의 자본주의 전개과정과 만나 악화된 측면이 있다. 대학 입시에서 자녀가 떨어졌는데 (비판적 개인으로 행동해야 할 자녀 대신)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해 “우리 딸 왜 떨어졌죠?”라고 말하는 식이다. 두 번째는 민족적 측면으로, 식민지로서의 피해자 경험이 변형ㆍ재생산되는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지정학적 측면으로,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소위 ‘슈퍼파워’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항상 불안해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대중의 위험성을 초래하는 요인들이라고 본다.

진 : 나는 국가권력이 정치적인 통제를 위해서 물적 토대의 근대화만 허용하고 개인의 자유화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유화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묶어 관리하는 것이 편하니까. 이런 습속이 아직도 남아서 진행되고 있다.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히 지정학적으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벗어날 길은 없다. (강대국인 러시아 옆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민적 합리성을 성취한) 핀란드와 같은 해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대중의 위험성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진 : 한국인의 신체 구조를 잘 보는 것이 해법이다. 한국인은 근대적인 군사문화와 전근대적 신화적 의식으로 무장하고 탈근대적인 매체를 이용한다. 그것을 해체시켜야 한다. 이것은 습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싸움이 필요하다. 내가 ‘「디-워」  논쟁에서 대중의 욕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이유는, (집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디-워」 에 대한 부정적인 평들이 등장하지 않았나.

천 : 동의한다. 작은 자치들도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는 대학이든 회사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수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굉장히 큰 문제이기 때문에 (회사와 학교 같은) 작은 단위에서 자치를 만들어내고, 그들과 연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세대들은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 모른다. 큰 집단을 이뤄서 싸우는 것이 당장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작은 싸움을 계속 벌여나가고, 연대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방향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 그렇다면 대중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진 : 대중들은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지식인은 “내가 옳다. 내 말 들어라”라는 말 대신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끝없이 합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우리 신체가 어떻게 구성돼 있으며, 우리는 왜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가에 대한 분석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이 앞으로 (자신의 신체와 행동양식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나는 그것을 ‘존재미학적 제시’라고 표현한다.

지금은 예전처럼 지식인이 존경받는 시대가 아니다. 옛날처럼 지식인이 포괄적이고 넓은 층위에서 지성을 대변해서 말하기보다는, 자기 전공분야에서 대중들에게 자기의식을 매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천 : 계몽의 시대는 끝났지만 계몽의 과제는 계속되고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동의한다. 지식이 널리 개방ㆍ공유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의 공유를 막는 힘들이 계속 작용하고 있다. 또한 현재 지식인들이 자기 전공지식 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도 낮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식 자체나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존경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진정한 생각들, 진지한 모험들은 존경을 받지 않는가. 진 선생님이 「디-워」 사태에서 다른 한편으로 받았던 많은 격려도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지식인상이나, 레닌주의처럼 외부로부터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의식성을 주입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 같다. 하지만 계속적인 생각의 깨우침이나 연대, 자기의식 가지기는 계속 진행돼야 할 것이다.

진 : 미래의 문맹은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다. 대중들은 황우석이 제시하는 그림들, 심형래가 제시한 영상들을 다 그냥 믿어버렸다. 그 밑에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이제 세계는 이미지가 구성한다. 이미지는 실사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구체적이다. 반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문자에 기반한다.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는 거다. 문자는 점점 더 추상적이 된다. 둘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대중은 이미지만 보고 문자로 된 토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은 이미지를 더 진실한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지식인의 역할이 생긴다. 이미지 아래에 숨어있는 의미, 의도, 프로그램 등을 읽어내 대중에게 알려줘야 한다. 황우석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사실 포토샵으로 거짓 영상을 만들어냈다. 포토샵이라니 얼마나 허탈한가? 브릭이 거짓을 밝혀낸 것이다. 이것이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다.


사회: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를 살펴봤으니, 근대성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진 : 포스트모더니즘,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은 무책임하게, 이론적 섬세성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우선 그 이론 자체도 문제가 많다. 독일에서는 비판적 이성(Vernunft)과 도구적 이성(Verstand)을 구분한다. 전자는 목적의 설정에 관한 합리성, 후자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유체계에서는 레종(Raiso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프랑스에서는 합리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는 거다. 독일 사람이나 독일에서 공부한 나로서는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근대 그 자체, 합리성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빠져버렸다.

말하자면 격이 있어야 파격을 할 것 아닌가? 하지만 한국에서는 격을 세워야 하는 상태에서 한국적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서 탄생한 파격을 들여왔다. 이러면 격이 없는 것과 같아져버린다. 전근대와 근대가 혼동돼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대결해야 할 지점이 근대를 넘어선 탈근대적인 가치로 설정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천적 보수로 변했다. 전근대적인 가족주의를 근대 개인주의 극복에 대한 해결책으로 둔갑시키고, 전근대적인 감성을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난센스가 일어난다.

천 : 탈근대주의, 탈식민주의는 아시아ㆍ아프리카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사이드, 바바, 스피박 같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활동은 했지만 그들의 논리는 서구적 중심성을 전복한다는 의의가 있었다. 이는 인정해야 한다. 

진 : 이론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옳다’는 강한 관념으로 우리와 맞지 않는 이론을 한국에 대입하려 하면 보수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론을 나이브하게 수용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이론을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이론의 보수적 수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천 : 한국에서는 박정희식 근대화를 반성하는 탈민족주의, 평화운동론, 생태주의와 같은 흐름들이 탈근대론의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탈근대론이 갖고 있는 비판적 핵심들을 식민주의나 폭력적 근대화, 국가 폭력의 문제를 반성하는 힘으로 이해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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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대항하는 대중,‘제국’을 넘어서는 대중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⑦ 안토니오 네그리 - 윤수종 교수 (전북대 사회학과)

대학신문 2007년 11월 03일 (토)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는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autonomia)1)운동 및 이론의 흐름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탈리아의 특수성 속에서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다음 세기를 향한 진전방향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푸코 등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타리와는 공저를 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가타리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파리 8대학 정치학 교수로 활동했고, 『전미래(Futur Anterieur)』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확산시켰다. 1997년 중반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투옥됐다. 최근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있다. 2000년과 2004년에는 각각 마이클 하트와 『제국(Empire)』과 『대중(Multitude)』2)이란 책을 써서 사회과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먼저 『제국』은 미시논리에 함몰되고 파편화돼 있는 사유들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사유의 거시적 종합화를 시도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로부터 『구성권력』으로 이어지는 네그리의 사유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 세계가 휩쓸려 가고 있는 대변동(세계화)에 대해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그리고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에 근거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현대사의 주요한 이행을 해방의 도래로서, 그리고 혼성적이고 노마드적인 정치의 기회로 파악한다. 20세기의 이른바 고전적인 제국주의들과 구별해 이 새로운 초민족적ㆍ세계적ㆍ총체적 배치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제국은 미국적인 것이 아니고 유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며 전지구적인 것이다. 네그리는 국민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이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인 주권으로 변형돼 간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이행에서 탈근대화의 생산적인 내용으로서의 생산의 정보화에 주목한다. 더욱이 네그리는 생산을 객관적인 경제적 영역의 생산으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네그리의 사고의 밑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이 대중의 저항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받아들여 생체 정치적인 생산으로의 이행을, 차이를 용인하면서 통합을 해나가려는 제국적인 권력의 새로운 (네트워크) 양상을, 그리고 기존의 훈육사회에서 통제(관리)사회로의 이행을 강조한다.

▲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이 지배에 대해 분석했다면 『대중』은 그 부제 ‘제국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중에도 대중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 방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그의 대중 개념은 군중, 인민, 일반적인 ‘대중’, 국민 개념과 대비되며, 상이한 문화, 인종, 인종성, 젠더, 성적 지향, 노동형태,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등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뤄져 있어 통일적인 혹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이 배제적인 개념인 데 반해 그의 대중 개념은 포괄적인 개념으로, 즉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주민층인 빈민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대중은 서구에서는 68혁명 이후에, 한국에서는 1987년 노동자ㆍ농민 대투쟁 이후 다양한 욕망을 담지한 채 나타났다. 노동자계급의 내적인 분화와 다양화 속에서 대중의 노동형상은 다양화되고 더욱 더 비물질적 노동의 특성을 띠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체로서의 대중의 등장과 함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 방향이 변하고 있다고 네그리는 설명한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게릴라 투쟁모델은 집중적 투쟁모델의 단말마를 보여주며 네트워크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자율운동에서 나타난 네트워크 투쟁은 그 이후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널리 확산되며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절정에 달한다.

또한 네트워크 투쟁으로의 변화과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투쟁과 주체성 생산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이해투쟁과 대비되는 욕망투쟁의 전개 속에서 대중은 자본이 부과한 자본주의적 주체성 생산에 대항해 각종 시설들 속에서 다양한 일상적 파업을 통해 자본의 훈육을 거부하면서 색다른 주체성 생산(특이화)을 시도한다고 한다.

네그리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쟁점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좌파 운동에 대해 비판점을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의 이러한 입장은 당 형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네트워크 형식의 운동을 강조하고 대안세계화운동, 다양한 소수자운동, 대안운동을 비롯한 자율운동의 활성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

편집자 주
1) 자율주의. 이탈리아 비의회 좌파운동의 커다란 흐름이자 동시에 기존 좌파(공산당)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노동자운동에서 나타난 ‘노동거부’를 통해 공산주의적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사회주의 사회와 대립한다.
2) 흔히 ‘다중’으로 옮기나 필자는 ‘대중’으로 옮겼으므로 이를 따른다.


 필자 윤수종 교수
전남대ㆍ사회학과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농업생산에서의 노동조직의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자유의 공간을 찾아서』, 역서로 『제국』 등이 있다.






내오랜꿈 ----------------------------------------------------------------------

<소수성의 정치>를 언급하는 어떤 글에서 상당히 '용감한' 언급을 봤다. 근본적으로 '소수자의 정치'란 건 존재하지도 않는 용어일 것이다. 하물며 소수성의 정치에서 '전위'를 찾아내는 '선견지명'에는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아우토노미아 운동이나 소수자 운동은 그 어떤 전위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전위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소수자 운동에 대한 몰이해를 웅변하고 있을 뿐이다. '무식이 용감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나 찾아질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안토니오 네그리나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대해서 차분하게 공부해 볼 것을 권한다. 어지간한 책은 윤수종 선생의 번역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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