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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팀버튼은 디즈니에 애니메이터로 입사하게 된다. 디즈니와 팀버튼. 우리가 알고 있는 팀버튼이 과연 디즈니와 어울리는 조합이었을까?

디즈니에 있는 동안 <빈센트>와 <프랑켄 위니>라는 2편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는데, 예상대로(?) 디즈니는 팀버튼이 만든 <프랑켄 위니>의 전국배급을 거부한다. 알다시피 그는 결코 디즈니에 어울릴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이 <프랑켄 위니>는 이후 펼쳐지게 될 팀버튼의 영화세계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동화적 상상력에 의한 세계가 펼쳐지지만, 이상하게도 그 세계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난다. 저게 과연 어린이들의 동화세계가 맞나 싶을 만큼...

<프랑켄위니>의 전국배급 거부로 디즈니와의 관계를 끝낸 팀버튼은 워너 브러더스로 옮겨 첫장편영화 에서 <피위의 대 모험(Pee-wee's Big Adventure)>(85년)을 만들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목록을 나열해보면,

<비틀 쥬스(Beetlejuice)>(1988)
<배트맨(Batman)>(1989)
<가위손 (Edward Scissorhands)>(1990)
<배트맨 2(Batman Returns)>(1992)
<크리스마스의 악몽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1993)
<에드 우드(Ed Wood)>(1994)
<화성침공(Mars Attacks!)>(1996)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1999)
<혹성탈출>(2001)
<빅 피쉬 (Big Fish)>(2003)
<찰리와 초콜릿 공장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2005)
<유령 신부 (Corpse Bride)>(2005)
<스위니 토드 (Sweeney Todd)(2008 예정)> 등이다. 이외에도 제작을 맡은 영화도 다수 있다. 대표적으로 <배트맨 포에버 (Batman Forever, 1995)>.

헐리우드의 아웃사이더 팀버튼, 그의 세계가 궁금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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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감독‘팀’ 흥행의 ‘버튼’ 누르다

허미경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팀 버튼 감독.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
크리스티안 프라가 엮음·김현우 옮김·마음산책 펴냄·1만4000원


헐리우드 아웃사이더 팀 버튼 감독 인터뷰 모음
상처받은 감수성이 만든 영상미학 밑거름
세계관·제작 과정 한눈에 볼 기회


혹시, 팀 버튼이라는 영화감독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 유명한 <가위손>도, <배트맨>도, <크리스마스 악몽>도, 가족에게 사랑 받는 아이들에 대한 묘한 질투심이 일렁였던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그다지 마뜩찮았던 이라면, 글쎄, 다소 기괴한 스타일에 만화 같은 ‘과장된 감수성’을 보여주는 이 괴퍅한 감독의 인터뷰 모음집을 들춰보지 않아도 되겠다.

음울한 고딕풍 이미지와 대인기피증. 뾰족뾰족한 중세식 건물로부터 검정 반짝이옷을 입고 걸어나올 것만 같은 캐릭터들. 조울증적인 심리상태, 괴물, 어눌함 따위의 어휘들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아웃사이더’로 둥지를 틀어온 팀 버튼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의 영화에는 유독 괴물이나 귀신, 악마, 괴짜가 단골로 등장하는데, 얼핏 보면 하품 나오게 아무 일도 나지 않을 듯싶은 ‘안온한’ 교외 주택가가 주무대다. 괴짜, 혹은 괴물에 대한 탐닉은 그의 영화세계의 큰 결을 이룬다. 어린시절 안온한 캘리포니아 버뱅크 교외지역에서, 부모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피신처 삼아 자신만의 성을 쌓고 자랐던 이력은 그 밑천이다. 그에게는 폭탄 맞은 머리에 썩은 이빨을 한 <비틀 주스>의 유령(마이클 키튼)이나, 어린이들을 골려주는 걸 꽤나 즐기는 윌리 웡카(조니 뎁), 고담시(뉴욕)를 무대로 ‘괴물 대전’을 벌이는 배트맨(마이클 키튼)이나 조커(잭 니컬슨)나 매한가지. 그 자신인 셈이다.

“나는 그게 좋아요. (괴물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합니다. 아이들이 다 그렇죠. 아이들은 늘 괴물 하나를 정해서 제멋대로 상상하고 그러지 않나요?”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특이한 것은 왠지 선병질적이고 말 붙이기 무서울 것 같은 이 아웃사이더 감수성이 다수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점이다.‘할리우드 영화공장의 아웃사이더’라는 자의반 타의반 규정이 무색하게 그는 할리우드 흥행 감독의 명성을 이어왔다.

»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
 
 
영화판 평자들이 그에게 후했던 것도 아니었다. 1988년 <비틀 주스>가 나왔을 때, <뉴욕타임스>는 머리가 졸아든 유령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영화라고 비아냥댔다. 주지하다시피, “머리가 졸아든 유령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찌그러진 머리를 사람들은 아주 좋아했고, 팀 버튼은 개봉 2주 만에 3200만달러의 수익을 뽑았다.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은 2005년 미국에서 나온 <팀버튼 인터뷰>를 옮긴 책이다. 각기 다른 필자들이 쓴 14편의 인터뷰가 담겼다. 1988년부터 2005년까지 20년에 이르는 시간에 걸쳐 쓰인 글들이어서, 하나하나 읽노라면 그의 어눌한 말투 사이로, ‘현실과 황당함 사이의 독특한 경계’에 놓여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을 엿볼 수 있다. 인터뷰마다 소개되는 그의 영화 목록들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공장의 영화제작 공정도 들여다 보인다. 팀 버튼 자신의 말대로 “말 못하는 유아들이 그림을 그려 자기 자신을 표현”하듯,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괴짜성을 극대화할 줄 아는 영리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해 4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배우 조니 뎁은 팀 버튼의 분신으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돌 스타로 잘 나가던 조니 뎁을 팀 버튼이 괴상망칙하게 망가뜨리고 있다고 섭섭해 하는 이라면 이 책을 꼭 들춰봐도 좋겠다. 책 곳곳에 조니 뎁의 인터뷰와 에피소드들이 숨어 있으니까.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마을산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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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러시아 혁명의 순간을 함께하며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기록한 르포르타쥬의 결정판이라면,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는 생생한 혁명의 순간을 살았던 혁명가들의 사상의 역사이자 혁명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1990년대 중반에 실천문학사에서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란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지만, 아마도 제대로 된 완역은 이번이 처음일 게다(내 기억으론 1980년대 말에도 <핀란드 역으로(~까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던 것 같다. 이때 나온 번역본으로 읽었던 것 같은데 책장을 뒤져봐도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래 인용하는 글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고명섭 기자의 서평이다.

젊은 날 품었던 혁명에의 열정이 식어버린 당신을 느끼신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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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새로 쓴 자와 새로 쓸 자 누구인가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역사를 새로 쓴 자와 새로 쓸 자 누구인가
 
〈핀란드 역으로〉
에드먼드 윌슨 지음·유강은 옮김/이매진·2만5000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서른 살의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5) 첫줄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의 영광을 떠올리며 이 영탄조의 문장을 내뱉었을 때, 거기에 회한만 깔려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젊은 문예이론가의 가슴에는 희망도 살아 있었다. 역사에 대한 희망,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 3년 뒤 루카치는 혁명 정당에 가입해 정열적인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루카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미국 문필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도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윌슨은 인류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일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는 진보적 견해를 평생 고수했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고 러시아 10월혁명에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의 젊은 시절 관심과 열정을 응축한 책이 <핀란드 역으로>다. 1935년 쓰기 시작해 5년 만에 펴낸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인간해방의 세상을 향해 난 철로를 달려간다는 신념을 펼쳐놓은 저작이다. 문체의 유려함, 묘사의 생동감, 신념의 절실함으로 인해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파산한 뒤에도 여전히 역사교양서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시절 탐독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 책이 완역돼 나왔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주역들 통해
인간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신념 펼쳐
문체·묘사 뛰어난 ‘역사교양서의 고전’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다다른 가장 중요한 지점이 ‘핀란드 역’ 곧 러시아혁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어판 서문을 새로 쓴 루이스 메넌드(뉴욕시립대 교수)는 이 책의 가치가 ‘제목’이 아니라 ‘부제’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라는 부제는 역사를 창조하려고 분투했던 사람들의 감동어린 삶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제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신념에 찬 투쟁을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지은이 윌슨은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부터 1917년 혁명까지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탔던 혁명가·사상가들을 독자 앞으로 불러들인다.

<핀란드 역으로> 표지
이 책이 그려 보이는 역사의 철로는 한 방향으로 놓인 단선 철로가 아니다. 철로는 두 방향으로 나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지은이는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한 두 철로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철로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에서 시작해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로 끝나는 이 철로는 희망과 믿음의 점진적 쇠퇴를 보여준다.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의 감격적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의 가슴이 그렇게 활짝 열리고 훤히 트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계급·당파·재산의 구별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적도 없었다.” 이 역사가에겐 “민중이야말로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미슐레의 낙관은 세대를 거치면서 힘을 잃었다. 두 세대 뒤의 아나톨 프랑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세운 민중을 두고 “쓰레기 같은 놈들, 흉측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부르주아의 혁명적 열정은 쇠락했고 이들이 세운 철로는 끊어져 전망을 잃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지은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다른 한 철로를 살핀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표어의 차원에서 실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현실에 구현하려 한 사람들이 만든 철로다. 29살 때 혁명에 참여한 그라쿠스 바뵈프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이 개시됐을 때 바뵈프는 ‘평등협회’를 만들어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평등선언’을 썼다. “프랑스 인민이여! 우리와 함께 평등의 공화국을 선포하자!”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이었던 셈인데, 그러나 바뵈프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어 생시몽·푸리에·오언과 같은 인도주의자들이 등장해 ‘사회주의 공동체’ 방안을 내놓고 그 방안을 실천했다. 이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머지않아 ‘공상’에 가까운 실험이었음이 드러났다.



지은이는 이 즈음에서 혁명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2895)를 등장시킨다. 이 책에 서술된 혁명가 마르크스의 삶은 익히 알려진 대로 추방과 망명과 궁핍의 연속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펜은 마르크스의 반항적 정신을 묘사하는 데서 더 빛을 발한다. 스물세 살 마르크스가 쓴 시는 자기 내부의 들끓는 정열을 이렇게 묘사한다. “파도는 왜 으르렁거리는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절벽에 부딪쳐 깨지기 위해서요.” 1845년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던 마르크스는 3년 뒤 역사적 문건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이 팸플릿은 “시종일관 고성능 폭탄 같은 힘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이었다. 1850년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무려 17년의 세월을 바쳐 <자본> 1권을 완성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진통에 진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도구”, 역사를 바꾸고 창조하는 데 곧바로 쓰일 변혁의 도구였다. <자본>을 출간한 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쓰는 일이 “내 건강과 내 삶의 행복과 내 가족을 희생시킨 작업”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쓰는 동안 런던의 빈민굴에서 세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가 불러낸 지하의 힘, 곧 프롤레타리아가 서유럽을 뒤엎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도 한참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꼭 90년 전에 터진 그 혁명은 인간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신념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는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역사를 믿었던 트로츠키…인간을 믿었던 레닌
러시아 혁명 두 주역의 차이점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핀란드 역으로>에서 지은이 에드먼드 윌슨은 러시아혁명의 두 주역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역사를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동일시의 방식은 달랐다고 윌슨은 말한다.

지은이의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인색한 편이다. 그는 혁명 동지 루나차르스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소중히 여겼으며, 인류의 기억 속에 진정한 혁명 지도자라는 영광된 인물로 남기 위해 어떤 개인적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람은 관중만 많으면 서슴지 않고 러시아를 위해 싸우다 죽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트로츠키는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역사의 무대에 섰던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에게 역사란 곧 섭리와 같은 것이었고, 자신은 그 섭리를 알고 그 섭리를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볼셰비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트로츠키는 경쟁상대 멘셰비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가련한 고립된 개인들이다. 당신들은 파산했으며, 이제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당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라-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그러나 머잖아 그 자신도 스탈린에게 패배해 멘셰비키 신세가 됐다고 지은이는 씁쓸하게 말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달리 이론 속에서 살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 상황을 살피며, 자기 이야기의 조리가 맞는지는 괘념치 않은 채 가능한 한 상황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또 트로츠키와 달리 레닌에게 역사는 수호천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역사는 미적거리다가 승리를 놓친 혁명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레닌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태도가 더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 레닌조차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의 전주곡인 2월혁명이 터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변화는 때때로 불현듯 찾아오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민중임을 이 책의 지은이는 넌지시 보여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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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한 소도(蘇塗)에서 살아남기

복도훈ㆍ문학평론가
출처:<대학신문> 2007년 09월 28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이은미 옮김 / 문학동네 / 8천8백원


소설가 김영하가 한 일간지에 막바지 연재 중인 장편소설『퀴즈쇼』에는 창(窓) 없는 고시원에서 컴퓨터 모니터라는 유일한 창으로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가난하고 고독한 주인공의 형상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라이프니츠의 ‘창 없는 단자’를 연상시키는 인터넷의 퀴즈동호회에서 가상의 아이디와 아바타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작중인물들은 자신들만의 취미공동체에서만큼은 활력과 생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약속된 모임시간이 지나고 하나 둘씩 채팅방에서 빠져나가 마침내 주인공 한 명만이 남아서 커서만 깜빡이는 텅 빈 채팅방을 공허하게 응시하는 풍경에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자마자 밀어닥치는 남루한 현실세계에서 삶에 대한 전망이라고는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우울한 자화상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선험적 절망의 생리마저 엿보인다.

IMF체제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소수독과점의 경제구조,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의 전면화 등 ‘삶의 자본화’ 또는 ‘삶의 생존전략화’라고 총칭할 수 있는 이 시대 젊음의 고단한 세상살이에 대한 김영하 식의 답변이자 그 자체로 뛰어난 반(反)성장소설인 『퀴즈쇼』의 젊은 주인공에게 삶의 모험이란 그 답의 정오(正誤)에 따라 생존의 당락(當落)마저 결정되는 퀴즈쇼로, 자기형성과정에 필수적인 교양(bildung)은 오직 퀴즈쇼를 위한 무질서하고도 단편적인 정보의 집적으로 코드화된다. 그리고 그동안 잘나고 편협한 기성세대는 한낱 일본문화에 대한 표피적이고도 몰이해적인 영향에 따라 자기폐쇄적인 세계에 틀어박혀 게임을 즐기는 이들 젊은이들을 경멸적인 어조를 담아 ‘오타쿠’라고 부르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의『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무엇보다도 오타쿠에 대한 상투화된 이미지에서 멀찌감치 탈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현시점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묘사하는 일본서브컬처의 진화는 한국문화(또는 한국문학)의 한 단면에 대한 성찰적 교사의 역할에 부합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문학의 장에서 시끄러웠던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문화)을 상상하려면 이 비평가의 저작을 읽으면서 별도의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도 괜찮겠다.


▲ 그래픽 : 차주영 기자

아즈마 히로키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오사와 마사치(大澤眞幸) 등의 계보를 잇는 신진 사상가로, 앞의 비평가들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지금은 폐간된『비평공간』에 초기에는 자크 데리다와 프랑스 사상에 대한 글들을 주로 발표했으며, 현재는 일본애니메이션과 국내에도 유행하는 일본소설에 대한 비평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여러 번 방한한 인연으로 한국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비평가로 기우뚱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면모만큼이나 이 책에서처럼 오타쿠 문화에 대한 거시적인 분석과 그것을 감싸고 아우르는 저자의 지적 성찰이 주는 매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단연코 빛나는 장들은 헤겔주의자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적 삶과 욕망의 형상을 오타쿠계 서브컬처의 진화 단계에 대응시켜 비평적으로 삼투시키는 부분이다. 코제브가 1950년대에 예언한 역사의 종언이라는 서사는 ‘세계의 미국화’와 ‘일본의 세계화’로 각각 그 단계가 나뉜다. 전자가 인간적 욕망이 다만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고착된 ‘동물화하는 삶’이라면, 후자는 할복자살처럼 무의미한 형식적 게임과 의례의 연속인 ‘일본식 스노비즘’이다. 오타구문화를 생성한 일본의 서브컬처의 초기 역사는 전후(戰後)의 고도 성장기를 통해 미국의 소비지향적 삶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패전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고도로 형식화된 에도문화와 같은 전근대적인 상상체계를 수용하는 이중의 모습을 보인다. 일본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거대한 로봇으로 합체되는 에도시대 성(城)이나 다연발 조총으로 무장한 닌자의 이미저리(imagery)는 그러한 예다.

미국화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미국화에 반발하는 오타쿠 문화에는 이처럼 동물화하는 삶과 스노비즘이 어떠한 충돌도 없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혼란스럽게만 보이는 오타쿠 문화의 역사에서 의외로 특정한 패턴의 변화가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오타쿠 문화를 큰 이야기의 종말과 작은 이야기들의 난립, 1차 창작(저자)의 소멸과 2차 창작(패러디, 인용)의 상승, 또는 오리지널의 후퇴와 시뮬라크르의 득세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사태를 오도하기에 딱 알맞다. 오히려 오타쿠 문화는 데이터베이스라는 정보의 심층구조와 그로부터 상이하게 조합되는 시뮬라크르라는 표층구조의 무모순적 병존으로, 인터넷 또는 이진수의 기호체계로 성립된 웹, HTML이라는 기성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 삶의 층위에서 심층과 표층의 이러한 병렬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정보와 취향을 소비하는 데이터베이스의 동물화된 삶과 시뮬라크르의 형식화된 유희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스노비즘의 공존이다. 이 세계는 부모 없는 소년소녀들만의 취향공동체이며, 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위협의 그림자, 종말의 이미지로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환적인 문화형식이 궁극적으로 표상하는 사회현실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결국에는 관능적인 계모들과 소녀들로 가득 찬 왕국과 맞닥뜨리는 한 게임서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오타쿠 문화는 상징적 현실의 결핍과 상관이 있다. 저자가 다른 책에서 한 말을 빌면, 국가나 공동체 등 상징계의 부재와 그것의 결락을 메우려는 보수적 공동체주의의 회귀는 젊은 오타쿠 문화와 엉뚱한 곳에서 접속한다. 현해탄 건너의 이야기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한국의 문화적 현실에 대한 구부러진 막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김영하의『퀴즈쇼』에서 그러하듯, 창 없는 단자가 접속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즉각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영역이 아니라, 몸 둘 곳 없는 헐벗은 젊음이 자신을 맡기는 소도(蘇塗)에 더 가깝기도 하다. 이 포스트모던한 한국형 소도를 발굴하고 답사하는 일이 이 책의 독자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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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혁명이 만나는 길은?
체르니세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건인가』 표지


‘혁명이 성공하고 실연을 당하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80년대를 통과하면서 반쯤은 장난으로 던져보았던 질문이다. 혁명이 사랑을 흡수해버렸던 80년대나 사랑의 위세 앞에 혁명이 실종된 지금 이 시대나 ‘사랑과 혁명의 함수관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신파조로 말해, 혁명을 꿈꾸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혁명이 망각되는, 이 이분법적 회로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물음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다. 진정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그것도 유형지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념투쟁이 거센 시절, 혁명을 꿈꾸다 갇힌 수인의 몸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그는 사랑의 습속을 바꾸는 일, 그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아니, 사랑의 습속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과연 그가 그려내는 사랑은 ‘전복적’이다. 숙명적 엇갈림, 배신과 복수, 권태 아니면 변태로 점철되는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눈부신 생의 환희를 분출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또 다른 ‘인연의 장’을 증식시켜 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연인들은 슬픔과 연민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사랑, 늘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붙들어매는 그런 수동적 사랑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해 ‘기쁨의 능동적 촉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능동적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 넘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베라가 운영하는 ‘코뮨’은 말하자면 그 사랑이 일으킨 분자적 공명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베라가 남편 로뿌호프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 끼르사노프와 두번째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멜로적 삼각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벽을 계속 넘어서는 혁명, 아니 더 나아가 장엄한 구도의 파노라마가 된다.

뜨겁게 사랑하되 결코 한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무상한 인생의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유목적’ 여정으로서의 사랑, 그에 비한다면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강철 같은 습속의 굴레들을 기꺼이(?) 수락하는 우리 시대의 사랑은, 오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사랑과 혁명, 아니 구도가 그대로 일치하는 길이 그토록 가까이 있건만.

고미숙, 「사랑과 혁명이 난나는 길은?」『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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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 90년대 초반,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오르그’의 필독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랑이 뭔지 쥐뿔도 모르던 시절--뭐 지금이라고 사랑에 대해 아는 게 뭐 그리 달라졌을까만--딱딱한 이론서만 보다 외도한다는 기분으로 읽었던 책이다. 지금은 대강의 얼개만 기억날 뿐 스토리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내 방 책꽂이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텐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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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 허구적 세계의 진실




1. 보르헤스의 『픽션들』

보르헤스는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 즉 그는 철학을 문학화하며, 동시에 문학으로 철학을 한다. 가령 『픽션들』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각기 하나의 철학적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백과사전을 통해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새로운 혹성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를 다루고 있는 「틀뢴...」은 백과사전을 통해서 모든 지식을 담고 배열함으로써 진리에 이르고자 했던 18세기 계몽주의의 꿈을 슬며시 뒤집음으로써 지식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계몽적 통념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지구 상의 어떤 지점에 존재하는, "깨달음 자체인 어떤 사람"을 찾아가는 「알모따심을 찾아서」는 그렇게 "찾아다니고 있던 자가 찾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불교철학적 '신성' 혹은 내재성을 다루며, 하나의 동일한 텍스트가 상이한 외부적 조건을 통해서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텍스트와 외부성의 문제를, 혹은 연기적(緣起的) 조건의 문제를 다룬다. 루이스 캐롤의 암시를 확실하게 밀고 나간 「원형의 폐허들」은 타인의 꿈 속에 존재하는 사람을 통해서 현실과 꿈의 관계를 다시 철학적 주제로 부상시킨다.

또 스스로 카프카에 대한 영향을 명시하고 있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추첨의 모든 단계에 우연을 개입시키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우연의 영원한 놀이'라는 니체적 관념이 카프카가 말하는 '무한한 연기(延期)'와 얼마나 잇닿아 있는가를 보여주고,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회고적 시간구조를 가진 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반대 방향의 '무한한 연기'를, 혹은 상반되는 가능성이 공존하는 다양한 잠재성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주를 하나의 도서관으로 변형시킨 「바벨의 도서관」은 수학적 존재 내지 수학적 진리 개념을 수학적인 형식으로 다룸으로써 존재와 진리, 지식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되던지고 있다(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식의 증명에 대한 풍자; 카발리에리의 역설을 이용하여 무한한 도서관을 한 권의 책으로 바꿀 수 있다는 주석--이는 나중에 「모래의 책」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아마도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작품일 「끝없이 두 갈래로 가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상이한 가능성을 갖고 펼쳐질 시간적 세계를 정원과 길이라는 공간적 형상으로 변형시켜 병치시킴으로써 시간에 관한 선형적 관념을 전복하고 있다.

보르헤스가 가장 빈번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완벽한 기억, 순수한 기억이 그 자체로는 사고할 수 없는 무능력을 뜻할 뿐이라는 점을 드러내면서 기억에 관한 통념을 극한에서 뒤집는다. 언표주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언표행위의 주체로 하여금 언표주체 내지 언표대상이 되게 하여 진행되는 「칼의 형상」에서는 바로 그 전도된 주체의 위치를 이용해서 억압적 세계, 비열하고 치졸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대개는 언제나 남의 탓을 하게 마련인 '나 자신'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고백의 형식을 벗어난 고백), 들뢰즈가 배신과 속임수의 구별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바 있는 「배신자와 영웅에 대한 논고」에서는, 배신자와 영웅의 역설적 단일성을 통해서 모든 외부를 삼켜버리는 목적론적 관계에 대해 풍자하고 있다(목적론에는 외부가 없다!). 「비밀의 기적」에서는 시간의 선형성, 시간의 외재성, 시간의 단일성에 대한 반문을 정지된 시간의 형식으로 체험적 시간을 독립시키는 방식으로 던지고 있으며, 비밀의 문제를 다루는 「불사조 교파」에서는 가장 완벽한 비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유지되는 비밀이란 모든 말에 의해 지칭되는 비밀, 감추어지지 않은 비밀이라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설들에서 허다하게 많은 책들을, 때로는 있는 저자의 있는 책을, 때로는 있는 저자의 없는 책을, 또 때로는 없는 저자의 어떤 책을 뒤섞어 인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상호인용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확실성의 관념이나 문헌학적 진리 관념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인용과 재인용이며 그것의 변용일 뿐이라는, 다시 말해 인용과 변용이 바로 생산이고 창조라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소설을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 만들고, 그 텍스트들에 자신 스스로 등장하기도 하고 '나'와 '보르헤스'라는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전통적인 저자의 관념을 깨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기 소설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려는 시도에 대해 가볍게 비웃는다. 즉 자신은 문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간결함과 응축(모든 말들을 다 담는 한 마디 말을 찾는 시도가 빈번하게 반복된다), 그런 만큼 별다른 수사 없이 지극히 간결하고 평이하게 쓰여진 문장들.

어쨌거나 보르헤스가 다루는 이런 주제들의 일부는 많은 경우 2-30년 정도 지난 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철학적인 담론으로 다시 제출된다. 그런 점에서 놀라운 비동시대성(선구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나중에 보니 자신이 보르헤스의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던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글을 직접 언명한 바 있지만, 가령 「저자란 무엇인가」라든가 「도서관 환상」과 같은 글에서 보르헤스적인 주제를 철학적 진지함을 갖고 천착하고 있다. 나중에 몇몇 불만스런 점들에 대해 촌평하기도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다루면서 보르헤스를 인용하고 있다.

해체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역시 보르헤스에 대해 경탄하면서 자신들의 선구자로 만들기에 바쁘다. 특히 하나의 양식적 특징을 가시화하고자 했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후적으로 문학에서 찾아냈던 '기원적' 저자가 보르헤스였다는 것은 잘 열려져 있다. 덕분에 그는 한 사조의 시조가 되었지만, 이는 자신의 근본적인 사유를 단순히 저자의 해체와 상호텍스트성의 배경으로, 패스티쉬와 키치의 일종으로 만들어버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눈이 멀도록 읽어댄 책들로, 마치 혹성 틀뢴을 만들어낸 사람들처럼 백과사전적인 지식으로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 전복적인 사유를 통해 그가 사유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지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차라리 보르헤스를 문학자가 아닌 철학자로, 혹은 어떤 화두를 들고 사유하는 사상가로 다루어보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다.


2.허구적 세계의 진실

1)진리와 허위의 경계

-백과사전: 또 다른 바로크 인? "표상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cf.고전주의 시대 표상의 에피스테메와 백과사전, 계몽주의(푸코, 『말과 사물』)

-->틀뢴과 같은 허구적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만든다면? 이로써 보르헤스는 표상 뒤를 들추는 근대적 질문이나 표상의 근거를 찾아 무한소급하는 고전적 질문 모두와 달리, 허구와 현실의 경계선 상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 관해 질문한다. 이로써 진리와 허위의 경계 자체가 문제화된다:

-->참이라고 답하는 것의 부당성(eg.「신학자들」의 아우렐리아노); 허위라고 답하는 것의 부당성(eg.'엠마 순스'의 진실성/허위성); 차라리 보르헤스는 허위의 유효성과 그 유효성의 허망성을 포착한다(「죽음과 나침반」에서 사태를 아는, 하지만 그래서 죽는 뢰로트; 「배신자와 영웅...」에서 영웅적 처형; 「매수」에서 공정성의 이용과 '허망함'이라는 죄)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것이 진실인가 아닌가, 허구인가 아닌가, 혹은 지식인가 사실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행사하는 유효성과 그것의 한계('허망성')를 보는 것이 아닌가? cf.푸코, 『지식의 고고학』.

2)환(幻)으로서 세계
-보르헤스가 환영의 세계을 만드는 요소들: 꿈(「원형의 폐허들」, 「꿈」); 거울(「거울과 가면」); 지식(책, 도서관: 「틀뢴」, 「바벨의 도서관」, 「모래의 책」); 기억(「기억의 천재 푸네스」, 「셰익스피어의 기억」); 미로(「아베하깐...」, 「두 왕과 두 개의 미로」) 등등.

-보르헤스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환영maya이다. 그것이 사실성의 형상(「독일 진혼곡]의 수용소, 「자이르」의 돈)으로 나타나든, 지식이나 책의 형상으로 나타나든, 아니면 표상이나 감응(「후안 무라냐」의 칼)의 양상으로 나타나든. 왜냐하면 가령 「자이르」의 돈처럼 그 자체로는 하나의 물질적 사실적 형상을 갖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그에 대한 거의 강박증과도 같은 사람들의 믿음, 사람들의 집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것과 결부된 의지, 요컨대 마음에 의해 삶으로 들어오고, 그런 만큼 그것은 마음과 의지의 산물이다. 부인을 패는 남자는 술 때문에 패는 게 아니라 패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고, "우리는 꿈 속에서 스핑크스가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꿈을 꾸는 것이다."(「꿈」) 따라서 환영이 일종의 꿈이라면, 그것은 허망하고 무의미하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 꿈과 같은 환영을 만드는 우리 자신의 공포와 욕망, 마음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영은 거짓이 아니라 정확하게 진실성을 갖는 현실이고 유효성을 갖는 실재다. (환상문학의 리얼리티!)

다만 그것이 환영이란 이름에 값하는 것은 그 욕망이나 마음이 무상하며 그런 만큼 그것의 현실성도, 유효성도 무상하다는 사실이다. 틀뢴은 보르헤스가 보기에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현실이었을 지도 모른다. 틀뢴을 다룬 그 백과사전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처럼 진리의 저장소가 될 수도, 혹은 후일 사실로 간주될 수 있는 사료가 될 수도 있었을 어떤 문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안 되는 시간만으로도 '실재성'의 옷을 벗고 진리의 관을 벗어야 할 어떤 것이다. (리얼리즘의 허구성, 불가능성)

이런 점에서 보르헤스의 환영이란 거짓도 허상도 아니지만(현실성, 유효성--욕망과 마음이 실린 것,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또한 진리도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달라지는 어떤 욕망 내지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무상한 마음의 일부라는 점에서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것의 표현이다(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그것은 어떠한 자성도 갖지 않은 마음이 잠시 머무는 어떤 형상을 빌어(假) 나타난 것이다(이를 용수는 『중론』에서 '假名'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환, 환영, 그것은 용수가 말하는 假 내지 假名이다. "가면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보르헤스) 그것은 자성을 갖고 실재하는 어떤 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말고는 따로 존재하는 것도 없다는 점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非有非無--空!) 것으로서 幻이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단지 유효성으로서 실재만을 보고 있다고 말해선 충분하지 못하다. 오히려 그는 어떤 것을 환영으로 만드는 관계들, 연기적 관계들을 그려내고자 한다. 동일한 것, 동일한 책, 동일한 얼굴, 동일한 텍스트를 단 한번도 허용하지 않는 그 연기적 관계의 무한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가 동일성과 가까운 공간보다는 가변성과 가까운 시간을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고, 추리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감추어진 관계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모든 것인 동시에 하나인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이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다.

만약 앞서 언급한 예들에서 지워지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푸네스의 기억」, 「셰익스피어의 기억」)의 대비를 찾을 수 있다면, 나아가 형식화된 것과 탈형식화된 것(eg. 「거울과 가면」에서 모든 것을 담는 한 마디의 시구; 「두 개의 미로」에서 잘 만들어진 미로와, 벽도 없고, 입구도 출구도 없는, 따라서 가장 완벽한 미로로서 사막; 은밀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비밀과 「불사조 교파」의 그대로 드러나지만 결코 누설되지 않은 비밀 등등)의 대비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幻으로서 세계, 假로서 세계가 갖고 있는 '空性'을, 결국 절대적인 것(그 자체로 모든 것인 하나, 혹은 알레프 내지 알모따심)은 본질적으로 공인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뿐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cf.보르헤스의 '회의주의' 혹은 '허무주의'?


3.시간의 정원

보르헤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시간이다. 『픽션들』만 보아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나 「비밀의 기적」,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관한 연구」는 시간을 직접적인 주제로 하고 있고, 「삐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나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간접적으로 시간을 다루고 있으며, 백과사전을 써서 만들어낸 환상의 혹성 틀뢴은 시간적인 세계다. "그들에게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픽션들』, 30) 「모래의 책」에 실린 「타자」나 「1983년 8월 25일」은 시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명의 보르헤스를 통해서 시간의 문제에 다시 접근하고 있다. 취팽만큼이나 보르헤스에게도, "시간이란 문제만큼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고뇌하도록 만든 문제가 없었다는 것"(「...정원」, 『픽션들』, 163)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단 이 작품들에 공통된 것이지만, 보르헤스에게 시간이란 외연적인 양 내지 시계적인 시간이 아니라 체험적인 어떤 것으로서 시간, 사건적인 어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는 베르그송과 유사하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이란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다루어지며, 그런 한에서 체험적인 것이었다. 이를 그는 "이질적인 것의 연속"으로서 지속이란 개념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는 보르헤스에게도 마찬가지다. 틀뢴에서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30) 이미 본 것처럼 그에게 모든 것은 환영이었고, 그것은 곧, 욕망이라고 하든 마음이라고 하든, 주어진 것을 나름대로 변용하여 수용하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보르헤스에게 모든 것은 "마음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것은 유효성과 실재성을 획득한다. 요컨대 보르헤스에게 시간이란, 그처럼 마음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의 이질적인 연속이었고, 이질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에 대해 베르그송처럼 양이 아닌 질, 동질성 아닌 이질성 등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보르헤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의 비선형성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선형적이고 일시적이며 따라서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시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베르그송의 비판과는 다른 의미에서 시간을 공간화한다. 가령 「두 갈래 길...정원」에서는 상이한 사건들의 연속으로서 시간을 길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로 치환하고, 정원이라고 불리는 시간의 장 전체를 상이한 가능성에 따라 한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의 '그물'로 변환시킨다. "그는 시간의 무한한 연속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게 증식되는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는 시간들의 그물을 잊으셨던 거지요."(164) 따라서 그 그물 속에 "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166). 과거도, 혹은 다른 조건과 계기에 의해 다른 경로를 그리는 또 다른 미래도 역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 속에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는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시간은 셀 수 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지지요. 그 시간들 중의 하나에서 나는 당신의 적이지요."(165)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는 뒤돌아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정지된 시간 속의 움직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한다. '허버트 쾌인'의 작품 『에이프릴 마치』,는 "시간적으로 거꾸로 씌어있고, 가지처럼 갈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설"(120)이다.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이유'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소설이 펼쳐지며, 그에 따라 "전날 밤에 일어날 수 있었던 또 다른 사건"(122)을 서술하면서 거듭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씌어지는 소설. 하지만 보르헤스는 거슬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 상이한 사건들이 병치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가능성이 병치되면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죽음」에서 과거를 수정하는 다미안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치욕적인 죽음을 수정하는 것,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고, 치욕 속에 죽은 자의 잔영 안에 깊이 남아 있는 의지요 욕망이다. "그렇게 해서 1946년, 오랫동안 가슴 안에 품고 있던 열망에 따라 1904년 겨울과 봄 사이에 벌어졌던 마소예르의 패전에서 전사했다."(『알렙』, 111)

반면 시간을 멈추고 주인공의 미완성 드라마를 완성하게 해준 「비밀의 기적」은 못다 한 여행을 마치기 위해 시간을 멈추게 하며, 그 사이에 자신만의 흐르는 시간을 갖는 '비밀의 기적'이었다는 점에서, 머묾을, 여행이 멈추는 순간을 뜻하는 파우스트적 '정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시계바늘의 움직임을 세우는 기적이 아니라, 사실은 돌아가는 시계바늘 안에서 비선형적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어김없는 시계적 시간의 선형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간을 잊는 것, 아니 본래 空인 시간을 사는 것이고 시간의 空性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형적 시간이 표시하는 정해진 사건에서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사는 것이고, 다른 가능성 자체의 세계로 비약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는 가능한 다른 사건이 병치되는 쾌인의 소설의 구조와, 그런 사건적 시간이 두 갈래 길들로 병존하는 취팽의 정원의 구조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제 자리에서 여행하기.)

이에 비해 「삐에르 메나르」와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시간 그 자체가 갖는 변환 능력을 보여준다. 메나르의 작품은 시간이 달라짐에 따라 동일한 문자들의 집합인 텍스트가 전혀 다른 텍스트로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시간 자체가 변환의 계기로 작동하는 무상함의 형식임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우연이라는 계기와 시간이 직접적인 연관을 갖게 되었을 때,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무한한 추가를 야기하여 무한한 연기의 형식으로 종착지를 제거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앞의 네 작품이 시간 자체를 비선형화하는 방식으로 변형하여 다른 가능성의 시간을,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혹은 잠재성 자체를 가시화하고 있다면, 이 두 작품은 시간 자체를 변환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 그 자체가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열리는 직접적 계기임을 보여준다.

한편 시간의 격차를 두고 두 명의 보르헤스가 만나는 「타자」에서 젊은 보르헤스와 늙은 보르헤스의 만남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일인이 사실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비슷했으면서도 너무 달랐다."(『셰익스피어의 기억』, 19)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앞서 말한 두 번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1983년 28월 25일]에은 좀 다르다. 거기서는 이미 자신에겐 과거인 젊은 보르헤스의 미래를 늙은 보르헤스가 알려주지만, 젊은 그에게 그것은 죽음(자살)으로 귀착되는 지겨운 모방의 선형성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젊은 보르헤스 자신은 바로 거기서 도망치듯 벗어난다. "나는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밖에서는 또 다른 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55)

-->보르헤스에게 선형성을 넘어선 시간의 사유란 결국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요,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무상성이 함축하는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를 사는 것, 가변적인 삶을, 삶의 가변성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4.불멸성, 혹은 다른-것-되기

시간에 대한 보르헤스의 관심은 이제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불멸성이란 무엇인가? 「죽지 않는 사람들」은 이 주제를 명시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다룬다면, 그에 바로 뒤잇는 「죽어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가는 '나'가 죽을 고생 끝에 찾아낸 것, 천백년 전에 호머였던 혈거인의 되찾은 기억으로 도달한 것은 결국 자신이 바로 그 불사의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새로운 왕국, 새로운 제국을 헤메고 다니며 수많은 생을 산다.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라이프치히에서도 살고.... 요컨대 윤회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불사의 삶,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존재며, 다른 것이 되는 삶 그 자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알렙』, 26)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이 보여준 불사성에 대한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26). 아니 반대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사성에 대한 믿음이 불사의 삶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에 대한, 따라서 불사에 대한 관념의 부재가 불사의 삶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불사의 삶이란 불사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며,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삶 그 자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나'라는 관념, "나는 호머다", "나는 셰익스피어다", "나는 보르헤스다"라는 구별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나'의 탄생과 '나'의 죽음이란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내게 좀더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은 힌두스탄 지역의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수레바퀴다."(26) 무아를 설파하는 부처의 법륜? 따라서 '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불사의 강물을 마시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사의 존재인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36)

「죽지 않는 사람들」의 본문의 이 마지막 문장에서 보르헤스는 불사와 불멸이 '무아'며, 그것은 곧 모든-사람이-되는-것devenir tout le monde이라고 명확하게 언명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각각의 사람, 각각의 순간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각각의 구별되는 이름을 갖는 개체가 되기도 하는 것을 이 불사와 불멸의 존재 안에서, 불사와 불멸의 존재조건임을 발견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갖는 것,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되는 것이다(「셰익스피어의 기억」, 186). 세르반테스 시대의 문제를 연구해 그 시대의 스페인어를 구사하게 된 메나르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다(『픽션들』, 77). 아니 문학이란,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베로에스의 행적을 추적하던 '내'가 마지막에 이르러 발견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동안 이 이야기가 바로 나 자신인 그런 어떤 사람에 대한 상징이고,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는 그 사람이 되어야 했고, 그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 했"다(「아베로에스의 추적」, 『알렙』, 143-4) 그렇다면 윤회와 환생의 형식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만 아니라, 창작의 형식으로든, 사유의 형식으로든, 혹은 행동의 형식으로든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니 나 자신이 현재의 삶을 살면서 정체성의 중력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다른 삶을 사는 것, 바로 이 모든 것이 불멸의 삶이며 불사의 삶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통상적인 불멸의 존재인 신의 삶이기도 하다. 연기를 하며, 작품을 쓰며 평생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며 살아온 셰익스피어("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다." 「전체와 무」, 『칼잡이들의 이야기』, 58)가 죽기 직전에 신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한 신의 대답: "나의 셰익스피어여, 나 또한 나 자신이 아닌걸. 나는 마체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를 꿈꾸었지.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서 마치 나처럼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거지."(59)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신 사이에, 나와 신 사이에, 혹은 세상의 모든 것과 신 사이에 있는 근본적 구별이 사라지는 걸 알게 된다. 끊임없이 다른 삶을 사는 불멸의 존재, 내가 만약 그런 존재라면, 내가 바로 신인 것이다. 굳이 나라고도 할 것이 없는.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전적으로 모방하고 전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 동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현재 선 지점과 가려고 하는 지점 사이에서 제 3의 선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메나르는 "어떻게 해서든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목표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삐에르 메나르이면서, 비에르 메나르의 경험들을 통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덜 야심적인 작업, 따라서 덜 흥미로운 작업으로 생각되었다."(『픽션들』, 77) 전적인 모방은 메나르의 관점이 아니라 세르반테의 관점에서 『돈키호테』를 쓰는 것이고,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전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헤르만 세르겔은 모든 게 자신을 셰익스피어로 데려가는 강력한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혀 다른 무엇을 다시 섞는다. "엄격하고 장대한 음악, 바하"(『기억』, 193)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게서 보르헤스가 발견했던 위험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5.알렙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평생 찾아다닌 것은 바로 '신의 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마술적인 하나의 문장."(「신의 글」, 『알렙』, 165) 혹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단 한 줄의 시(「거울과 가면」, 『기억들』, 87). 이는 사실 우주의 모든 책들이기도 한 한 권의 책(「모래의 책」, 「바벨의 도서관」), 모든 별이기도 한 하나의 별 내지 모든 사람이기도 한 한 명의 사람(「알모따심으로의 접근」)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 쉽게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알렙, 그것은 수학적으로 모든 實數를 자신 안에 포함하는 하나의 수다(집합론). 보르헤스는 그것을 서로 겹치거나 투명해지는 일 없이, 그리고 전혀 크기의 축소 없이 모든 점들에서 본 우주의 모든 상들이 들어있는 조그만 구체인 알렙으로 변형시켰다. 우주 전체를 머금은 한 알의 좁쌀('설봉의 좁쌀'), 혹은 시방삼세를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먼지(一微塵中含十方).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구체, 이는 필경 우주 전체로 펼쳐져 있는 상호적인 관계의 망, 緣起的인 관계의 그물 전체와 결부된 것이다. 즉 신의 글, 그것은 "미래에 있을 것이고, 현재에 있고,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 짜인 채 그것을 형성하고 있었다."(「신의 글」, 『알렙』, 169)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이는 '알렙'이나 '모래의 책'과 같은 기이하고 특별한 어떤 존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시방삼세의 緣起的인 관계 전체를 포함하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말한다. "나는 인간의 언어들에서조차 우주 전체를 암시하지 않는 발하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즉 '호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낳은 호랑이, 그가 삼켜버린 사슴들과 거북이들, 사슴들이 뜯어먹은 목초, 목초의 어머니인 대지, 대지를 낳은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알렙』, 167) 따라서 시인이 찾아낸 '운드르'라는 말(「운드르」, 『기억』, 97)만이 아니라, 모든 말이 바로 신의 말이고, 모든 말이 "그 안에 수많은 말들이 들어있는 단 하나의 말"이다(『알렙』, 167). 모든 먼지가 시방삼세를 다 포함하고 있다(一切塵中含十方). 따라서 시인을 사랑했던, 그래서 시인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한 여인이 있었다면, "삶 또한 내게 모든 것을 주었지요. 삶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요."(「운드르」, 『기억』, 97) 마지막 말, 혹은 신의 글, 그것을 보르헤스는 '운드르'라고 말한다. 경이로움을 뜻하는 단어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우주를 담고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듯이, 자신의 삶이 바로 모든 것을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발견할 수 없는 단어다. 반대로 그것은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에서 우주 전체를 보고, 모든 말에서 신의 글을 보게 되면, 어떤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경이로움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그 경이로움 속에서 긍정하고 그것이 주는 우주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보르헤스가 평생을 찾아다녔던 깨달음의 징표, 혹은 신의 글이 아니었을까? 알렙.


수유 연구실 + 연구공간 '너머' 2001년 봄 강좌 <문학과 철학 사이>, 2001년 4월 18일 / 강사: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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