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수첩] ‘오래된 미래’ 씁쓸한 개정판

손제민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 12 03


최근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공식 한국어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왔다. 책은 예의 재생용지가 아니라 빳빳한 종이와 두툼한 하드커버로 돼 있다. ‘공식 한국어판’을 낸 곳은 중앙일보 산하 출판사인 ‘중앙북스’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이 책은 10년 전 녹색평론사에서 소개됐다. 인도 북부의 ‘라다크’라는 때묻지 않은 작은 마을이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파괴됐는지 비판적으로 보여준 책이다. 그 사이 이 책은 20만~30만부 팔리면서 한국 생태운동의 고전이 됐고, 녹색평론사의 대표 도서로 자리잡았다. 어떻게 출판사가 바뀐 것일까.

연유는 이러하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씨(전 영남대 교수)는 1996년 저자의 허락 하에 이 책을 번역해 한국에 소개했다. 피차 생태운동을 하는 사람들로서 법적인 계약서는 필요 없다고 여겼다. 여기엔 녹색평론사가 상업적 출판사가 아니라는 점과 호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생태학자인 김종철씨에 의해 번역·소개된다는 점을 반겼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에서 ‘오래된 미래’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저작권 계약을 하지 않았지만 녹색평론사는 그동안 인세에 준하는 돈을 부정기적으로 호지에게 보냈다. 하지만 책이 의외로 많이 나간 사실을 안 호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벌여놓은 활동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여성포럼 참석차 방한한 그는 환경재단 관계자 등에게 혹시 책을 새로 내려면 어떤 출판사가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 호지는 중앙북스를 알게 됐다.

호지는 이후 그의 ‘오랜 친구’ 김종철씨(호지는 그를 ‘솔메이트’라 부른다)에게 다른 출판사와 정식으로 계약 맺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김씨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통보한 것이어서 붙잡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종철씨에게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은 고심의 산물이다. 이 책의 원제는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다. 일본에서는 ‘라다크, 그리운 미래’로, 프랑스에서는 ‘개발이 빈곤을 낳을 때’로, 독일에서는 ‘라다크의 매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김씨가 붙인 ‘오래된 미래’는 이후 한국 생태운동의 상징어가 되었다. 한 출판사가 이 이름을 딸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 이 책의 인기 뒤에는 제목 덕도 있었던 셈이다.

‘공식 한국어판’은 아무런 협의 없이 앞서 녹색평론사에서 펴낸 책의 제목을 그대로 취했다. 중앙북스의 관계자는 “‘Ancient Futures’에서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 외에 나올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호지 여사는 여전히 김종철 선생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그분이 하시는 활동에도 공감한다. 결별이 안타깝긴 하지만 호지 여사는 라다크에서 펼치고 있는 사업에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정식계약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양 분들은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는 입장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자는 ‘공식 한국어판’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봤다. 당연하겠지만, 예전 것보다 번역도 더 깔끔한 것 같다. 하지만 수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오래된 미래’를 사랑했던 독자로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반(反)개발주의’의 가치가 대자본이 소유한 출판기업에까지 확산된 것을 두고, ‘이제 대안적 가치가 대자본 또는 주류사회에까지 당당히 진출했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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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민 기자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2001년도판인데, 240페이지 정도다(초판본은 200페이지 정도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출간했다는 중앙북스판은 364페이지라고 나와 있다. 아마도 라다크에 관한 사진이나 자료들이 추가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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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04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씁쓸하군요. 제목이 주는 힘도 컸고, 재생지 특유의 친자연적인 느낌도 좋았었는데...

내오랜꿈 2007-12-04 09:49   좋아요 0 | URL
네에, 기분이 좀 '꿀꿀한' 소식입니다.

푸하 2007-12-09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사건)에 씁쓸해하실 분이 많을 것이란 기대에 희망을 걸고 인사드립니다.^^;

내오랜꿈 2007-12-10 12:27   좋아요 0 | URL
즐거운 한 주 맞이하세요.^^;
 

[책@세상. 깊이읽기]영웅 되고픈 욕망, 과학사기의 근원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 엄청난 배신-과학에서의 사기… 호레이드 저드슨|전파과학사


 
‘다시 그 가을이 돌아왔다. 2년 전 이맘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황우석 전 교수의 난자 위반 윤리, 논문 진위 문제가 알려졌다. PD 수첩팀이 황우석 박사의 연구 윤리를 문제 삼기 시작한 지 벌써 2년. 조사 결과는 과학과 상관이 없었을 뿐 아무 죄 없는 일반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뿌리치고 진실의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왜 난데없이 다시 “황우석 스캔들”이냐고? 잊혀져야 할 시점에 나 자신, 그 누구보다 곤혹스럽다. 황우석 사태는 결국 내 교수 생활의 색깔까지 바꾸고 말았다. 나는 윤리 전문가가 아닌데 요즘은 가끔 연구 윤리 교육과 자문을 ‘부업’처럼 하게 되고 말았다. 결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고,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지당하신 말씀들 때문에, 또 두 해 전 당시 서울대 총장에게 황우석 박사의 논문 진위 문제를 조사해 달라고 했다는 그 운명 같은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찔끔찔끔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해주다 보니, 내 인생의 색깔이 원하던 것과 조금 달라졌다.

인연은 계속되었다.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에서는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 양서를 번역하여 출판해오고 있다. 2004년부터 학회의 출판 위원을 맡았던 나는 학회 사업으로 번역할 책을 찾고 있었다. 첫해는 나의 게으름으로 출판 사업에 차질을 빚었다. 그 이듬해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연구 윤리에 대한 책만 찾아다녔다.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는 황우석 사태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논문 조작에 가담했던 중요 인사들이 학회의 회원들이었으며, 국민 영웅 시절 황우석 박사는 학회의 윤리위원장을 거쳐 부회장까지 지냈다. 2004년이 가기 마지막날, 사태를 파악한 학회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냈으나, 학회가 책임을 벗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위조, 변조, 표절 등의 연구 윤리 위반 행위들은 황우석 스캔들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그 혹독한 겨울을 나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회를 대표하여 책을 펴내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과학계 연구 윤리에 관한 책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저드슨은 분자생물학의 탄생을 생생하게 기록한 과학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창조의 제8일’의 작가이다. 박사학위 과정 때 지도 교수는 갓 대학원에 들어온 내게 그 책을 권했다. 그 책을 읽으며 과학도로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주저없이 나는 그 책을 번역하자고 덤벼들었다. 저드슨은 분자생물학의 태동 이후를 타임지의 과학기자의 눈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과학사를 공부하여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통찰력으로 각 사건을 취재해가며 쓴 책이라면, 당연히 신뢰할 만했다. 그렇게해서 어렵사리 번역 판권을 확보하고 한 번의 좌절 후 이한음씨의 번역으로 2년이 걸려 책이 완성되었다.

저드슨은 과학에서의 사기를 ‘엄청난 배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장 정직해야 할 과학이 경제, 언론, 스포츠, 종교에서의 사기와 같은 유형과 형태를 지님으로써, 그 여파는 훨씬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섭게도 불특정 다수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저드슨은 과학 사기의 원인과 그 유형을 사회 문화적 배경, 무소불위가 된 과학 권력, 동료 논문 심사 시스템의 문제 등을 짚어가며 분석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생물학에서의 사기 사건들을 다루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형태가 우리가 겪은 황우석 사태와 흡사하다. 이것이 교훈이었던 것이다. 과학 사기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 욕망을 부채질하는 다양한 사회적 원인이 있었다. 그 원인을 알면 예방책도 나오는 법이다. 부끄러워 숨기기보다는 처절하게 분석하고 거듭 반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우석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비단 아직도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그의 행보나 시위를 멈추지 않는 그의 추종자들만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최근 학력 위조 사건, 최고 기업들의 비자금, 회계 부정, 기자들의 날조 기사, 종교집단의 위선과 탈선 등…. 사례는 널려 있으며 세상을 뒤흔드는 모든 거짓은 과학계의 사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든 사기의 유형은 같다고 저드슨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진부하다는 비난을 받아가며 즐겁지 않은 책, ‘엄청난 배신-과학에서의 사기’를 펴낼 수밖에 없었다. 황우석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본 같은 대학의 후배 교수이자 같은 학회의 회원으로서 참회의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과학계에 국한하지 않는다. 사실은 참이 참으로 통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같은 울림을 얻으리라 확신한다.

〈이현숙|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내오랜꿈 ------------------------------------------------------

호레이드 저드슨의 책 발간에 때맞춰 국내 과학계에서도 황우석 사태의 본질과 그것이 가능했던 '과학사회-네트워크'에 대해 분석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황우석 사태. 벌써 2년이나 되었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벌써'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리라. 황우석 사태는 사실 끝난 적이 없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윗글에서 언급되는, 아직 그를 추종하는 집단들이 인터넷이나 현실 공간에서 활동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황우석 사태의 본질, '맹신'과 '애국'으로 무장한 폭력성을 얼마 전 <디워> 사태를 통해서 다시 한번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국익, 애국을 위해서라면 침략전쟁 파병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는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에서 파시즘은 그들 시민들 가슴 속에 언제든 부화할 수 있게끔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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