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기 직전인 7월 중순의 주말, 서울에서 친구 한 넘이 여름휴가 대체 주말나들이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이곳 남도야 한여름 휴가철에도 부산이나 강릉처럼 그리 심하게 붐비지는 않는 곳이니 어디든 특별한 먹거리가 있는 곳으로 코스를 잡으면 최소한 실망하는 일은 없게 마련이다.
수원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라 오는 길에 아내를 픽업하여 오랬더니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운전하면서 금요일 저녁 늦게 도착했다.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 전라도 땅을 처음 밟아 본다는 친구부부와 아이들을 데리고 화순 운주사를 거쳐 흔히 남도 답사 일번지라 일컫는 강진 일대를 둘러 보는 코스를 잡았다.
운주사 가는 길에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탑을 둘러보고 운주사의 이름없는 불상들도 감상하고 다산초당의 마루에서 드러누워 보기도 하면서 빡빡한 오전 일정을 끝낸 뒤, 월출산을 끼고 돌며 30년 전통을 가진 영암의
독천식당을 찾아갔다. 나도 처음 가는 집인지라 은근히 찾는 길이 걱정되기도 했는데, 독천마을 자체가 온통 낙지전문 식당들 일색이었다.
보통의 여느 시골읍내 분위기가 물씬 나는 독천은 알고 보니 낙지마을로 꽤 유명한 곳이다. 밥 때를 조금 넘겨 찾은 이 식당은 주변 여러 식당에 비해 입소문이 자자하고, 소박하지만 낙지 전문 요리집 답게 3단으로 된 수족관에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꼬물거리는 싱싱한 산낙지 무리를 실컷 감상할 수 있다. 원래 이 집은 낙지의 개운함과 갈비의 구수함이 만난 갈낙탕이 유명하다지만 일행들은 밥과 함께 나오는 갈낙탕보다는 다른 요리를 원한다. 먼저 마리당 삼천원 하는 세발낙지를 10마리 시키고 위장이 허락하는 한 다양한 낙지요리를 맛보기 위해서 구이, 데침을 반씩 시켰다.
제일 먼저 나온 <산낙지>. 철양재기의 옅은 식초물에 담겨 나온 녀석들은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꼬물거린다. 성질 급한 놈은 벌써부터 위기감을 느꼈는지 그릇 밖으로 기어나온다. 보통 낙지는 횟집에서 먹는 것처럼 잘게 썰어 참기름에 찍어 먹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의 세발낙지는 젓가락에 둘둘 말아 통채로 씹어먹어야 제맛이 난다.
낙지 대가리를 잡고 한번 손으로 훓어내려 물을 쭈욱~ 빼고는 나무젓가락에 둘둘 감아 초고추장에 찍은 다음 소주 한 잔을 털어넣고서 입 안에 넣어 씹기 시작하면 된다. 입안에서 꼬물거리는 감촉을 느끼면서 잠시 뒤 다시 소주 한 잔을 먹어주고 계속 씹으면 어느새 세발낙지 몸통의 고소한 맛이며 대가리에 들어있는 먹물의 쌉싸름한 맛이 어울려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맛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곳 낙지마을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세발낙지 한 마리면 소주가 한 병이라고 했단다. 먼저 씹기 전에 소주 한 컵(맥주잔)을 마시고 씹으면서 한 컵. 먹어 보면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생전 처음 산낙지를 통채로 먹어보는 친구는 물론 처음에는 못먹는다고 손사래를 치던 두 여자들도 신기해하면서 나를 따라 통채로 씹기 시작한다. 맛있는 것 앞에서 여자들의 징그럽니 어쩌니 하는 '아양'은 한낱 술안주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자들의 합세 때문에 결국 10 마리가 모자라 몇 마리 더 추가하여 먹고 나니 입주변은 온통 빨간 초고추장 투성이다.
산낙지도 곧잘 먹는 아이들을 위해 살짝 익힌 <낙지데침>을 주문했다. 싱싱한 것을 익혔으니 살이 입에 살살 녹을 만큼 부드러웠지만, 아무래도 깨소금 송송 넣고 참기름까지 발라져 나오니 그냥 생각없이 먹으면 몇 십 마리는 앉은 자리에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술안주를 위해 낙지에 양념을 발라 먹음직스럽게 구운 <낙지구이>가 나왔는데,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지금까지는 내가 운전을 했지만 이제는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길 작정이었으므로 연신 들이킨 술이 벌써 두 병을 넘어섰는데 도무지 취기가 오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밥과 함께 나온 <낙지연포탕>. 낙지가 아주 부드럽게 씹히며 자극적인 그 어떤 양념도 허용하지 않고 박을 넣어 연하게 은근히 익힌 탕으로 국물 맛이 일품이었고, 젓갈 등 밑반찬들이 짜지 않고 정갈했다. 역시 남도다 싶은....
흔히 뻘 속의 인삼(人蔘)이라 일컫는 낙지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는 "봄철 농사철을 맞아 논과 밭갈이에 지쳐 쓰러진 소에게 낙지 2~3마리를 먹이면 벌떡 일어난다"고 기록했고, 동의보감에서는 "낙지 한 마리가 인삼 한 근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콜레스테롤과 많은 철분을 함유하고 있어 빈혈이 있는 사람에게 특효라고 한다. 서울이나 부산쪽 사람들에게 이곳 영암은 멀게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일단 와서 먹어보면 오며가며 투자한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느낌을 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03 /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