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페터 한트케의 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로 시작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부정성의 사회는 소멸하고 긍정사회, 투명사회로 변모되었다는 점에 있다. 책 전체를 이끄는 문제의식은 이전의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니체)-하이데거, 그리고 이 책에서는 특히 아도르노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 자원으로 삼는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15) 그가 보기에 인간 영혼, 더 나아가 인간 문화 일반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시선이 없는 혼자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포스트프라이버시 이데올로기는 투명성의 이름으로 사적 영역의 포기를 강요한다. 문제는 투명성의 강제는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18)되있다는 점이다. 아도르노를 떠올리지 않기가 어렵게, 그는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19)이고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26)라고 쓴다. 그는 sns에서 그 징후를 읽기도 한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26)
벤야민을 원용하면서 한병철은 오늘날 긍정사회에서 사물의 제의적 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고 진단한다. 페이스북과 포토샵의 시대에서 인간의 얼굴은 아우라나 타자의 초월성 같은 것이 사라진 투명성, 동일한 것의 내재성 속에 거주한다(30). 투명한 것에는 탄생도 죽음도, 운명도 사건도 없다. 전시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고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사라진다.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34) 여기에 심미적 반성, 변증법, 사색적 머무름 같은 것은 들어설 수 없다.
투명사회는 또한 명백사회로, 쾌락에 적대적이고 모든 비대칭성의 폐기로 나타난다. 여기에 비밀, 매혹 또는 푼크툼 같은 것은 없다.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69) 오늘날의 투명사회는 정보사회이고, 긍정화되고 조작가능해진 닦아세움Ge-stell의 언어이다. 신성한 진리도 가상도 없는 공허, 단지 정보 더미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는 투명사회를 또한 폭로사회로도 정의하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스타로뱅스키의) 루소이다. 스타로뱅스키의 저작에서 이야기되듯이 18세기에 허위, 인습, 위선에 대한 고발과 탄로, 폭로 같은 개념의 빈번히 사용되었다. 루소의 <고백록> 또한 이 점에서 인간의 완전한 본성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유례없는 기획이었다.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마음은 루소의 근본 사상으로 해석된다. "루소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똑같은 솔직함으로" 마음을 "공개"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바로 루소가 추구한 마음의 독재다" (88) 가면들로 가득찬 극장으로서 18세기의 세계. 루소가 이 점에서 가면과 역할의 유희에 마음과 진실의 담론을 대립시킨 것은 옳다. 그러나 "전면적 투명성의 도덕이 폭정으로 돌변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루소에게서 드러난다"(90)는 지적은 분명하지 않다. 루소에 대한 전체주의적 독해라는 오래된 편견을 되풀이하면서 한병철은 루소적인 투명사회는 전체주의, 전면적 통제와 감시 사회라고 생각한다. <누벨 엘로이즈>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소의 예가 한병철의 논의를 지지해주는지 여부는 나중에 따져보기로 하자. 여하튼 계속해서 규율사회의 표본으로서 벤담의 파놉티콘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오늘날의 투명사회는 통제사회이고, 또한 특수한 파놉티콘,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히 커뮤니케이션하는 독특한 파놉티콘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그의 전작에서 논의되었던 성과사회,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가 되는 피로사회의 논리가 관철된다. 더불어 소셜미디어는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Ansammlung가 나타나는 장소가 되고, 커뮤니케이션과 상업, 자유와 통제는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기며, 스스로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의 전설에 동참한다.
여기까지가 <투명사회>의 내용이고 책의 2부를 이루는 <무리 속에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디지털 사회의 문제들을 다룬다. 가령 악플 문제. 그는 존경Respekt이 돌아봄Rueksicht의 뜻을 가지고 거리의 파토스를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공공성의 초석으로서 존경은 사라진다. 존경은 이름과 결부된 것으로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117) 악플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고유한 현상인 이유도 이처럼 기명성의 결여, 즉각적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디지털 매체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비대칭적, 위계적 관계를 수립하는 한에서, 디지털 매체는 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고 이는 권력에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원칙상 악플은 대칭적 인정 관계의 기초로서 상호 존경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악플이라는 현상으로 인해 주권 개념도 다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가 곧 주권자이다. 우리는 이 명제를 다음과 같이 청각적인 차원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주권자는 절대적 고요를 생성할 수 있는 자, 모든 소음을 제거할 수 있는 자, 모두를 일거에 침묵시킬 수 있는 자이다. 슈미트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만일 그런 경험을 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총체적 위기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슈미트는 평생 전파에 대한 공포를 품고 살았다. 악플도 전혀 통제할 수 없이 마구 퍼져나가는, 일종의 전파(물결)다. 노년의 슈미트는 전파를 두려워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집에서 치웠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전자기파 때문에 주권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명제를 고쳐 써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죽음에 즈음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주권자란 공간의 파동에 대한 처분 권한을 가진 자이다." 디지털 혁명 이후 우리는 슈미트의 주권 명제를 다시 한 번 고쳐 쓰게 될 것이다. 주권자란 인터넷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이다."(122-23)
다시 인터넷 사회는 격분사회, 스캔들의 사회이다. 침착함, 자제력, 논의와 대화는 억제된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Masse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126) 귀스타프 르봉이 군중의 시대로서 근대를 모격하며 느낀 전통 지배 질서의 붕괴와 문화의 파괴를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디지털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흡사 근대 사회계약론에서의 다중처럼, 오늘날의 디지털 무리는 영혼, 정신이 없고, 하나의 우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디지털 무리에는 내적 일관성이 없고,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악플도 하나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 때문에 악플은 소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129) 호모 디기탈리스는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무도 아닌 존재는 아니다. "그는 무리의 일부로 등장할 때 조차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익명으로 나타나지만 대개 일정한 특징을 지니며 그것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는 "아무도 아니"기는커녕 누군가로서 스스로를 전시하며 주목받고자 애쓴다." (130)
"인터넷의 디지털 주민은 집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리를 생성해낼 수 있는 집회의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결하지 않는 특별한 양상의 군집, 내면이 없는 무리, 영혼과 정신이 없는 무리다. 그들은 무엇보다 고립된 채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히키코모리다. 라디오와 같은 전자 매체가 사람들을 집결시킨다면,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디지털 개인들은 스마트몹에서 보듯이 때때로 뭉치기도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운동의 패턴은 마치 동물의 무리처럼 매우 순간적이고 불안정하다. 휘발성이 그러한 모임의 특징이다. 게다가 그것은 종종 카니발, 또는 특별한 책임이 따르지 않는 유희와 같은 성격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디지털 무리는 전통적 군중과 구별된다. 에컨대 군중은 노동자 집회에서 보듯이 휘발해버리지 않고, 결의에 차 있으며, 순간적인 패턴이 아니라 확고한 대오를 형성한다. 하나의 영혼으로, 하나의 이념을 통해 뭉친 군중은 한 방향으로 행진한다. 군중은 굳은 결의를 지닌 까닭에 우리가 될 수 있고, 기존의 지배 관계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행동에 함께 나설 수도 있다.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군중은 권력이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행진하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러한 휘발성에서는 정치적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악플 역시 지배적인 권력관계를 동요시키지는 못한다. 악플은 그저 개개인에게 달려들어 망신을 주고 추문에 빠뜨릴 뿐이다." (131-2)
디지털 주민과 전통적인 근대의 군중과의 대조는 유용하며 일리가 있다. 그러나 군중과 인터넷의 디지털 주민이 정말로 그렇게 쉽게 분리가능한지 의문스럽다. 설령 위의 논의가 맞다고 하더라도 디지털 주민이 일베가 아니라 인터넷의 진보 좌파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 휘발적이고 유희를 벌이는 일베, 광화문 단식장에서 피자를 먹으며 카니발을 하는 이 디지털 무리들은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단순한 스마트몹 이상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광화문 농성장은 하나의 군중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권력을 산출하고 있는가? 그 정치적 에너지를 얻고 있는가?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는 사람들, 일일 동조단식을 하는 사람들, 일베충들. 그들 중 누가 군중이고 누가 디지털 무리인가? 차라리 위의 인용에서 새겨들어야 할 구절은 악플이 지배적인 권력관계를 동요시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악플이 아니라 선플이든, 좋아요 누르기이든 간에 우리는 지배적인 권력관계를 단순히 전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한병철은 플루서 등이 주창하는 직접 마을 민주주의의 유토피아적 경향을 경계한다. 디지털 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 하에서, 사람들은 쇼핑하듯이 선거하며 이는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된다. 아마 인터넷이 투표소를 대체하고, 통치가 마케팅에 가까워지며 여론조사는 시장조사를 닮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정신적이어야 할까?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186)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정신이 곧 고통임을 보여준다. "반면 디지털의 현상학은 정신의 변증법적 고통과 무관하다. 그것은 좋아요의 현상학이다." (187)
이 점에서 나는 상당히 아도르노적이고, 헤겔적이기도 한 한병철의 변증법적인 논의가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디지털 매체는 현존의 매체"(136)와 같은 단언은 이를테면 디지털 혁명 이전의 잔재들이 디지털 혁명에도 분리불가능하게 잔존해 있음을 너무나 쉽게 간과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과 대조되는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145) 같은 것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그는 이미 그가 비판하는 루소에 너무나 가까워지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비일관적인 것이 아닌가? 오히려 18세기 당시 투명성에 대한 루소의 희구는 21세기 한병철의 디지털 사회 비판의 모티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가 스마트폰이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앗아간다고, 소셜미디어가 투명사회의 산물이고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148)이라고 비난할 때 그는 (데리다의 말을 빌자면) '시골뜨기' 하이데거의 제스처를 부지불식 간에 반복하면서 이른바 좋았던 옛날, "땅과 하늘, 필사의 존재와 신적인 존재"로 이루어진 하이데거의 농부적 세계를 시대착오적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가? 투명성은 항상 불투명성을 전제로 하고, 마치 자기면역의 방식으로 항상 전제되어 있다. 만약 데리다였다면 이러한 한병철의 투명성 이전의 '순수한' 어떤 세계에 대한 집착 또한 비판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