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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세금 넘는 사회주의 시스템
[사민주의 논쟁] 김종철 비판, 시장기능 무시는 순진한 발상

정다신 /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 연구원
출처 : <레디앙> 2007 12 02


김종철(존칭생략)의 글을 읽었다. 필자는 사민넷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방향에 동의한다. 본격적인 논쟁에 앞서 논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철의 글이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이 논쟁에 끼어들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논쟁이 현실과 유리되어 지식인들만이 논하는 고도의 추상화로 치닫지 않기를 바라며 몇 자 적는다.

김종철은 소득 불평등도를 이야기하면서 세금을 떼기 전에는 오히려 서구 사회복지 국가의 소득 불평등도가 한국의 그것에 비해 높다고 주장하며 결론적으로 서구 사회복지 국가 역시 우리보다 더욱 심각하게 양극화된 국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시장 체제란 다 똑같다는 식으로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세금을 뗀다는 가정 자체가 그야말로 가정인 만큼, 물가 수준, 평균 임금, 최저 임금의 절대 액수, 비화폐 임금(무상 복지) 등등 많은 것을 사상시킨 조금은 치사한 주장이다. 거꾸로 묻고 싶다.

   
  ▲ 옛 소련의 소비에트 회의 모습.
 
옛 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실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소득 불평등도로만 치자면 그 어느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그 격차가 적은 평등지수 최고의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체제를 거부하고, 김종철이 이야기하는 ‘세금을 떼기 전에는 더 불평등하다는 체제’를 더 선호하는 것일까?

A라는 나라에서 상류 계층이 평균 10만 원을 벌고 하위 계층이 1만 원을 번다고 치고, B라는 나라에서는 상류 계층이 평균 5천 원을 벌고 하위 계층이 1원을 번다고 치자. A라는 나라의 경우 소득 격차가 무려 9만 원이고, B라는 나라는 불과 4천 원이다.

어느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일까?? 각 나라의 물가 수준, 절대 임금 액수, 비화폐 소득, 비화폐 복지 제도, 세금 등등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주장은 그다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언젠가 단순하게 환율만으로 비교했을 때, 구 소련의 경우 한 달 평균 임금이 수 십 달러도 안 되었던 것을 들어 저임금 착취 운운하며 비판하던 황당무계한 논리가 기억난다. 그것도 비화폐성 복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없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김종철이 억지로 분리한 그 세금이 부과되고 기꺼이 자본이 이를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체제가 우리가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사민주의자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체제이지, 자본을 통제하는 수많은 제도들을 떼어 버린 상상 속의 체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민주의자들이 세금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김종철이 제시하는 틀에 따르더라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많다. ‘불평등 사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높은 세금이다.

그것을 통해 달성되는 주요 사회 서비스의 무상 제공 세도가 사회주의적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는데,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가리켜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고 했던 적이 있던가? 당연히 이는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적인 시스템이고 사민주의자들 자신이 도입한 제도들이다.

그런데, 무상 의료, 교육, 주택 등등의 제도는 이들 사민주의 복지 국가들뿐 아니라,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민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적 시스템과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이 시스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왜 사민주의자들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그야말로 사회주의적 시스템이 아닌 시장 사회 사회주의 시스템을 선호하는가?

‘시장 체제 인정 하, 시장에서의 상위층들인 자본가, 고소득자들로부터의 높은 세금 징수와 그 기금에 의한 복지 체제’가 서구 사회복지 국가들이 선택한 길이었다면, ‘시장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자본가, 고소득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가가 국가 예산에서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체제’가 국가 사회주의 국가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나 효율성의 측면에서나 사회주의 체제가 건재한 동안에조차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였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에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바로 시장 경제의 인정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즉, 김종철이 강조하는 ‘사회주의 시스템’이 비시장적 현실 국가 사회주의에서보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에서 더 제대로 작동했고 현재도 작동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이 바로 논쟁의 핵심인 것이다. 그도 바로 이 점을 길게 비판하고 있다.

김종철은 만약 한국에서 현재와 같은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세금만 스웨덴처럼 걷어서 지원할 경우의 재앙에 대해 경고하고, 사민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는 것은 높은 세금 그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사민주의자들이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세금만 걷자고 하는 사람들인 양 묘사한 것은 매우 정당하지 못 하다.

이어서 그는 ‘중간의 10년을 빼놓고 한 번도 권력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스웨덴 사민당의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가 권력이 온존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

자본가 권력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장의 폭력을 제어하기는 해도 시장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에 사민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는 당연히 존재하고 있고 자본가 권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

같은 자본가 권력이라도 스웨덴의 그것과 삼성으로 대변되는 남한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은 본인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스웨덴 자본 권력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여전히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으며, 자본 권력을 마음 놓고 휘두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 자본가 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을 보여 주기 위해 그는 스웨덴 사회가 급격하게 우경화되었다며 이러저러한 예들을 제시하였는데, 그렇다면 현재 스웨덴 사회의 복지 국가적 성격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화되었거나 미국식 시장 근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 비스무리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의 경도의 정도를 아는지? 이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현실과 맞지 않는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이다. 분명, 우파 집권 이후 교육, 연금, 의료, 부유세 등에 있어 복지 축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파 정권 하에서조차 복지 체제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스웨덴 사회복지 여전, 신자유주의화라는 주장은 극도의 단순화

스웨덴 역시 세계 자본주의 국가와 단절하고 있지 않는 한,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외의 이유에서도 복지 국가 특유의 정체에 메스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이야기하듯, 자본 권력이 온전하게 보존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본 권력이 온존하여 신자유주의적으로 경도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스웨덴 국가-자본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민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하지 못 하고 자본가 권력이 온존해 신자유주의 체제로 경도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는 상관없이 이미 그 이전에 여성의 대규모 경제 참여, 노인층의 확대, 이주민의 증가, 탈 산업주의적 산업구조 변화 및 이에 따른 새로운 고용 형태 발생, 그리고 서구 중심부 외 지역에서의 경제 발전과 그로 인한 국제적 경쟁 강화에 의한 수입 축소 등으로 국가 예산에 과부하가 걸려 국가 복지 체제에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련의 복지 시스템 개혁을 무조건 신자유주의적 반동으로 모는 것은 극도로 단순한 주장이 아닐 수 없으며, 사태를 과학적으로 보는 시각을 방해할 뿐이다.

그 신자유주의적으로 경도되었다던 자본가 권력은 우파가 집권한 유리한 조건에서도 여전히 커다란 변화 없이 복지 기금에 소득의 상당 부분을 내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오히려 스웨덴 자본가들은 외부로부터의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기보다는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이와 관련하여 더욱 황당한 것은 다음 부분이다. 임노동자 기금이 성공하여 스웨덴 기업 대다수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노동자에게로 넘어 와 있다면 지금 이러한 부침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법에 대한 부분이 그것인데, 노동자 계급이 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설 수 있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가 스스로 밝혔듯, 임노동자 기금의 성격이 유고의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가 겪었던 위기, 즉 기업 노동자 집단과 지방자치 위원회들이 전체 인민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기적 행태’는 현실에서 좀처럼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레닌 (앞 줄 우산 든 사람)
 
노동자 직접 생산 통제의 이상이야 말로 ‘사적 소유 / 국가 소유’의 틀을 넘어서는 ‘사회적 소유’ 논의와 더불어 현실에서 이상과는 달리 매우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며, 역사에서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집행자 혹은 경영자의 기능을 무시하고, 시장의 기능마저 인간(노동자)의 민주적 토론에 의한 결정 등으로 완전히 대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러시아와 유고 등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 혹은 자주관리의 실험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를 안다면, 노동자가 소유하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소유 형태 그 중 다수의 이익과 권한이 보장되는 다양한 사회적 소유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든 사민주의자든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시장의 기능을 뺀 다양한 소유 형태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지 개개 기업 노동자 집단이 자신들의 기업과 자신들의 복지 이익만 챙겨 생기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형질 변화와 경제 침체 상황에서 복지 수준을 전 국가적으로 계속 유지하기에 벅차서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게 되는 복지 시스템의 부분적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인구 증가에 비해 생산력이 증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가 복지 수준을 유지하려다 거대한 과부하가 걸려 오랜 정체 끝에 결국에는 붕괴로 이어졌던 구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에서도 보이듯, 문제의 핵심은 바로 시장 기능에 대한 것이다.

다당제 인정하면 다양한 사회경제 시스템도 인정해야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인정하는가에 대해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말하였다. 다당제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일당 외 다양한 정당을 인정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당들이 근거로 하는 다양한 경제 주체와 이익 집단이 존재하는 시장과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과 같이 일당-국가가 경제와 시민 사회를 장악하지 않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이 다당제를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할 때, 다당제 인정은 시장을 현재로서는 인정한다는 식으로 제한을 둔 뒤의 그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폭력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한 것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서 싸워왔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폭력적으로 탄압해 온 것은 도리어 지배 계급이거나 제국주의자들이라는 주장을 했다.

최병천이든 그 외 사민주의자든 누구든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며 행사한 폭력이나 지배 계급의 폭력에 대응한 너무도 정당한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인가? 그의 주장처럼, 대안 사회를 꿈꾸는 운동을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인가? 문제의 핵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놓은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폭력혁명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현재 그러한 폭력혁명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주장과는 달리, ‘현존하는 모든 질서는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이…’라는 말은 실제로 과거 혁명가들에게 절대적인 것이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정치적인 변혁도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변혁이란 단순한 정치 권력 교체를 넘어 소유 체제를 변혁하는 것이었기에 그 방법은 폭력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와 지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 시장 체제를 폐절하는 것은 당연히 평화롭게 이루어 질 수 없었고,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실제로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민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소유와 시장의 문제를 인정한다면, 이제는 그러한 폭력적 변혁 방식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질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필요에 따라서는 폭력적 권력 획득 방법이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따라서는 국유화의 범위가 광범위해질 수도 있으며, 위협 정도에 따라 제한적 다당제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소유권을 박탈하고 시장을 철폐하며 경제 체제를 바꾸는 민중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과거 사회주의 체제 실패의 진정한 원인을 뒤로 하고, 그 교훈을 잊고 시장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가 권력을 온존시키는 것 운운하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죄악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사회주의 - 사민주의 논쟁의 핵심은 시장을 인정하는가의 문제

그는 국유화가 아니라 다양한 소유(작은 규모의 사기업, 협동조합 기업, 사회적 기업, 국유화된 기업 등등)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장의 폭력적 성격과 불평등한 결과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대체 질서가 가능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민주의자는 없을 것이며, 도리어 이러한 주장은 사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그의 ‘현재로서는 시장을 인정하되…’가 아니라 ‘시장을 인정하자’는 것이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의 핵심일 것이고 이 부분에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장 기능 없는 사회적 소유란 경제 발전 정체, 자원 배분에 있어서의 비효율성, 해당 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그리고 소비자의 욕구와 유리된 생산 등등 또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붕괴의 길과 유사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시장을 인정한다고 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시장=자본주의라는 사고를 교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무엇보다 노동자 소유라는 문제 만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노동 인구 중 평균 12% 정도에 이르는 서구 국가들의 자영업 비율에 비해 한국에는 그 3배에 이르는 수의 각종 자영업자들이 존재한다. 무려 6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시장 없이 어찌 할 것인가?

그의 말처럼 시장은 ‘현재로서만’ 인정해서는 안 된다. 세금을 떼면 시장 사회는 어느 국가든 불평등한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자본 권력이 없어지지는 당연히 않겠지만,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로부터 이익의 50%를 세금으로 떼어 낼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일년에 6조에 달하는 성접대비를 복지 기금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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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혁명’ 반대하면 ‘의회주의’ 뿐
[김종철에 답함] 전진 대선강령 "코리아연방 저리 가라" 수준

최병천 / 사민넷 기획담당
출처 : <레디앙> 2007 12 01


   
  ▲필자 모습.
우선 김종철의 답변에 감사드린다. 하지만 이 논쟁은 특정 김종철 ‘개인’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특히 '전진' 회원들의 답변과 참여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번 논쟁은 사민넷의 공식 의견이 아닌 최병천의 ‘개인의견'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힌다. 

전반적 아쉬움, 그리고 소위 ‘전문가 토론’에 대해

지난 번 글의 제목은 '실체 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였다. 한마디로 사민주의와 ‘체제’ 수준에서 변별되는 사회주의의 내용적 실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게 핵심 논지였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 불가능”이었다. 답변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사족으로 김종철이 전문가 토론의 참여를 이야기했다.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그람시, 비그포르스 등의 사람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론가들이자 동시에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레닌과 모택동 역시도 이론가이자 정치지도자였다.

그렇게 볼 때, 활동가가 논쟁을 주도하고 학자들이 결합하는 것이 모양새가 맞을 듯 싶다.

다시, ‘전진’의 대선강령을 되돌아보며 - 민중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나는 전진 김종철에게 △PT독재 △폭력혁명론 △중앙집중계획경제 △시장 및 상품 △국유화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전진을 ‘스탈린주의’로 음해하고 있다고 반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종철의 답글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 지점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전진이 5월에 채택한 대선강령을 보면, 맨 마지막 부분에 「모든 권력을 민중대표자 회의에게」(이하 ‘회의’)라고 시작하는 단락이 있다. 이 부분은 내가 보기에 소비에트식 중앙집중계획경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자세한 내용은 전진 사이트에 들어가서 원문 참조하시길.)

강령의 주요 내용은 △‘회의’는 의회를 대체 △사법부와 행정부도 ‘회의’에서 선출 및 소환(3권분립 해체) △‘회의’는 (가칭)경제기획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설립 △ ‘위원회’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하는 ‘초기업적’ 계획과 조절의 관철 및 정치/경제적으로 통일된 권력 행사 등으로 돼있다. 

위 내용에 따르면 국회가 사라지고, 삼권분립도 해체되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위원회’로 복속된다. 이 내용을 보고 ‘소비에트식 중앙집중계획경제’를 연상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역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

만일 전진이 다당제와 보수정당의 집권도 용인하는 것을 전제로 전진의 대선강령이 우리의 현실에서 ‘실현’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야말로 ‘독재사회’가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 당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다.

당내 제1야당인 전진이 ‘그냥 한번’ 이러한 대선강령을 채택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위 대선 강령을 본 사람이라면 전진의 입장이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와 뭐가 다른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논쟁의 ‘역사성’에 무관심한 김종철의 답변 - 다시, 폭력혁명론과 PT독재론에 관해

김종철은 폭력혁명론과 PT독재론에 대한 나의 질문이 엄밀하지 않고 사려 깊지 못한 질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같은 세상에 누가 폭력혁명과 PT 독재론을 주장하겠느냐고 반문하며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종철의 반문은 논쟁의 ‘역사성’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발언들이다. 100년전 베른슈타인 논쟁의 핵심은 '정권 장악 방식' 혹은 '경로'가 뭐냐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베른슈타인은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의회주의 논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을 주장하는데 왜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바로 당대 정통 맑시즘의 기본 입장이 ‘폭력혁명론’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NL이건 PD이건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PT 독재론 역시도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김종철이 언급한) 자본의 ‘사보타쥬’ 혹은 정권교체를 막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위 두 가지 문제는 사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를 갈랐던 역사적으로 ‘핵심 변별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나라 PD 계열 운동조직 중에서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을 ‘공개적’으로 폐기한 집단은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인민노련) 이외에는 들어본 바가 없다.

당시 주대환의 ‘신노선’이라는 것이 바로 이 내용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당시 PD 계열 조직들로부터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었다.(그 사람들이 요즘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국민들은 아직도 사회주의라고 하면 소련 아니면 북한을 생각한다. 만일 전진이 폭력혁명론과 PT독재론을 반대한다면 이를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정파는 그 자체로 대안정당이라는 점에서, 국민적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힐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이 답변한 ‘소유의 다양성’은 100년 전 베른슈타인의 핵심 주장

19세기 후반,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도, 그리고 80년대 남한의 사회주의 운동권들에게 사회화란 곧 국유화였다.

   
  ▲독일 사회주의 이론가 베른슈타인.
김종철은 ‘소유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는 100년 전 베른슈타인이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했던 주장의 핵심이기도 하다. 또한 스웨덴 사민당내에서도 칼레비, 비그포르스 등이 당내 국유화론자들에 맞서 ‘소유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사상투쟁을 했던 영역이다.

즉, 오늘날 사민주의 국가들의 소유의 다양성은 그냥 ‘사회주의적 이상’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당내 사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과의 ‘사상투쟁’을 통해서 얻은 역사적 전리품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국유화를 남발한 곳은 오히려 영국노동당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효율을 초래하여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반격을 쉽게 초래하게 되었다.)

정리하면, 김종철이 소유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사실상 100년전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며, 스웨덴 사민당내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사상투쟁을 했던 ‘사민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사민주의에서 ‘좋은 것’은 사회주의 때문? 소련/북한에서 ‘나쁜 것’은 우리와 무관하다 ? 

오늘날 사민주의가 보육, 교육, 주택, 의료, 실업복지, 노후복지 등에서 (김종철의 표현에 따르면)‘사회주의적’ 요소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조차 당대 정통 사회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사상투쟁을 벌이며 승리했기 때문이다. 국유화 남발 반대(=소유의 다양성), 중앙집중계획경제 반대(=현대적 거시경제관리), 시장의 긍정성 인정 등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사회복지 확충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종철의 답변은 사민주의 중에서 ‘좋은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공로이고, 소련식/북한식 모델에서 나쁜 것은 사회주의와 무관하다는 입장인데 상당히 편의주의적 접근이라 생각한다.

또한 김종철의 답변은 위에서 언급한 전진의 대선강령과도 ‘모순’되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만일 김종철 개인의 답변을 모두 인정한다면, ‘체제’ 수준에서 도대체 사민주의와 내용적으로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유령 사회주의’ 혹은 ‘같기도 사회주의’라는 의구심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폭력혁명론을 거부하면 집권경로는 ‘의회주의’ 이외에는 없다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을 반대하면 집권경로는 뭐가 있을까?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 이외에는 없게 된다. 즉 ‘의회주의 노선’ 이외에는 없다. 이 부분은 지금, 현재 ‘실천적’으로 몹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주체파의 경우 여전히 ‘북한식 공산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그들의 집권경로는 ‘전민항쟁’이다. 그들에게 100만 민중대회는 전민항쟁의 예행연습이며, 전민항쟁을 위한 예비군 훈련이다.

그리고 진보연대류의 ‘통일전선체’ 운동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이며, 오늘 현재 민주노동당을 사실상 ‘통일전선체’로 전락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전진의 폭력혁명론과 의회주의 사이의 ‘왔다리 갔다리’ - 소위 ‘운동정당론’의 폐해

앞서 강조했듯 폭력혁명론과 PT 독재론을 반대한다면 집권경로는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의회주의) 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전진을 포함하여) 일부에서는 의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도정치와 대중운동의 변증법’을 거론한다. 소위 ‘운동정당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주의 심각한 혼동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한나라당도 국보법을 반대할 때 수만명이 시위를 하는 ‘대중운동’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의 활용은 정치적 ABC의 영역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집권경로’가 뭐냐는 근본적인 범주의 질문이다.

즉, 집권경로는 ‘의회주의’ 이외에는 없는 것이며, 대중운동은 의회주의라는 ‘전략적’ 상위개념 하에서 ‘전술적’으로 정세에 맞게 활용될 뿐이다. 한마디로 ‘레벨’이 다른 개념이다.

만일 전진이 대중운동을 통한 집권 경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전진은 80년대 남한에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던 NL의 아류, 즉 ‘탈색된’ 전민항쟁론자일 뿐이다.

전진의 反의회주의와 운동정당론의 ‘실천적 폐해’ - 겸직금지와 투명회계 문제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당정치의 부재에서 찾으며, 한국 민주화의 특징으로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요약한다. 나는 최장집의 이러한 견해에 적극 동의한다. 최장집의 이러한 주장을 민주노동당의 현실에 접목한다면,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대체하는 ‘의회주의’ 노선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볼때 전진파의 反의회주의 노선과 운동정당론은 실천적으로 큰 폐해를 끼쳤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겸직금지 문제’와 ‘투명회계 문제’이다.

먼저 겸직금지 문제를 살펴보자.

겸직금지 발상은 당은 ‘대중운동의 구심’이고, 의회는 ‘분견대’라는 발상에 기초해있다. 그래서 의원단은 ‘의회주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통제’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마이너정당, 정파연합당, 통일전선체적 정당 등의 제약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정치인의 ‘정치력’이 그나마 이를 ‘돌파’ 혹은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겸직금지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족쇄를 채운 꼴이었다.

이러한 겸직금지는 결과적으로 의원들을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도피하도록 조장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중 권력을 장악한 의원들이 당으로부터 ‘책임’을 도피할 수 있는 것을 구조적으로 도와준 꼴이었다.

다음으로 투명회계 문제를 살펴보자.

2004년 총선 직전 오세훈법에 의해 지구당 폐지가 결정되었다. 원래 '지구당 폐지-투명회계-국고보조금'은 ‘한 세트’이다. 지구당을 유지하려면, 국고보조금을 반납하든가, 국고보조금을 받고자 한다면 지구당을 폐지하든가 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논리적 일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지구당 폐지가 타당한 것인가는 지금 논의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주체파와 전진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파는 '지구당 유지-불투명회계-국고보조금'을 한 세트로 선택하고 있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자행하고 있다.

우리는 3가지 가치를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나와 같은 사민주의자들은 투명회계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당(公黨)’이며 당원들의 당비로 운영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야당 교체 없이 당내 여당교체 없다

전진의 소위 ‘운동정당론’은 현재 결과적으로 주체파의 ‘통일전선체론’과 절묘하게 동거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反의회주의’이다.

이는 투명회계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주체파와 사회주의파의 ‘담합’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당유지-불투명회계-국고보조금'은 당내 만성적 재정적자의 근원이다. 또한 계속되는 회계부정 사건의 근원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국민의 세금을 불법적으로 유용하고 있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의 운명을 선관위와 검찰, 그리고 언론에 ‘위탁한’ 꼴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야당을 교체하지 않는다면, 당내 정권교체는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이 ‘사민주의자’들의 독자적 세력화가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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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진보진영 구심점 될 수 있다
[투고-사민주의 논쟁] 사민넷, 사회투자국가 대응하는 비전 없어

이영수
출처 : <레디앙> 2007 11 30


대선 시기이지만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이 <레디앙>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한 번 끼어들고자 글을 보낸다. 사민주의 국가 중에서 대표적인 나라인 스웨덴 사민주의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규명함은 물론 진보진영이 이러한 사민주의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사회주의 이상 없이는 사민주의는 불가능하다

스웨덴은 임노동자기금 프로그램을 시도하면서 사회주의 운영체제로 나아가려고 했던 사민주의 국가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웨덴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혁파하고 사민주의가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까지 근접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의 역사를 보면 사실상 점진적인 개혁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계급타협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노력은 분명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스웨덴 사민당은 1920년 소수내각으로 최초로 집권을 했고 1929년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면적인 사회화를 추진해야 된다는 내부 주장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자 스웨덴의 대표적인 사민주의자 칼레비(Karleby)가 소유권이라는 것은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아니며 사회적으로 부여된 여러 가지의 권리의 총합이기 때문에 이러한 권리의 총합에 대해서 일정 정도 제한을 가하면서 사적소유권을 극복한다면 점점 사회화로 나갈 수 있음을 주장하여 스웨덴 사민당은 전면적인 사회화를 유보하게 되었다.

즉 즉각적인 생산수단의 사유화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조금씩 규제해 나가는 것 또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임을 주장한 것이다.

   
  ▲ 스웨덴 노총(LO) 건물 모습.
그래서 이러한 노선을 취하면서 스웨덴 사민당은 사민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보편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스웨덴 사민당은 노동자들이 대기업들의 초과이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대기업들의 주식을 소유하게 되는 임노동자기금에 대해서 적극적인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결국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스웨덴 사민주의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불가역적인 사회운영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유럽의 전통 사민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현존하는 사민주의가 사회주의의 경로로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의 경로가 아니다, 라고 단정 짓기 위함이 아니다.

유럽 사민주의가 지금까지는 사회주의의 경로로서는 실패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의 경로이며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사민주의가 사회주의로의 경로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더욱더 좌로 움직이어야 하고 우리들의 사민주의 또한 사회주의와 유리되어서는 안되며 사민주의가 사회주의의 경로로서 더디더라도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스웨덴의 사민주의를 언급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의 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2. 사민주의의 현상황 : 그래도 사민주의는 전진하려고 한다

사민주의를 평가하는 이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권력자원이론이고 나머지는 구조적 종속이론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에는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사민당들이 집권을 하고 많은 개혁을 이루어내면서 권력자원이론이 정당화되는 듯했지만, 70년 대 대공황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사민주의가 쇠퇴하면서 구조적 종속이론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에스핑 엔더슨(Esping-Andersen)과 코르피(korpi) 등이 주장한 권력자원이론은 사민주의 정책으로 만들어진 완전고용과 무상의료, 교육 같은 복지체제가 소득재분배와 노동의 탈상품화를 이끌어서 노동계급들이 복지국가체제를 수호할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추동하는 권력자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반대로 구조적 종속이론은 국가는 구조적으로 자본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민주의 정당 또한 자본의 투자를 유발할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유지해야 하는 필요로 인해 자본으로부터 정책 및 전략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사민주의체제는 개량적 국면에서는 자본의 타협과 양보로 일정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지만 경제 불황과 같은 위기적 국면에서는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자본과 노동의 타협이 깨어지고 자본이 노동을 공격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민주의는 급속도로 와해되었기 때문에 구조적 종속이론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론을 받아들여 경제적 효율성을 우위에 두는 체제로 전환하면서 전통적 사민주의 체제와 이별을 고했으며, 스웨덴을 비롯한 노르딕 국가 또한 사회투자국가적 요소를 복지 부문에 받아들여 기존의 체제에서 후퇴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사민주의 국가들이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사민주의체제는 개별 나라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똑같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며, 최근에는 구조적 종속이론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예견한대로 사민주의체제가 단편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잘 견뎌오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특히 노르딕 모델 같은 경우에는 평등과 효율 면에서 모두 영미식 모델을 앞서면서 성장을 위해서 분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민주의가 권력자원 이론가들의 희망대로 자본주의체제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구조적 종속이론과 신자유주의가 예견한대로 체제가 해체되지도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사민주의를 통해서 권력자원을 구축해놓으면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며, 오히려 전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민주의가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비가역적인 제도를 완벽하게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을 많이 구축하면서 비가역성의 가능성을 여전히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민주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이 제시했듯이 사민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완전히 비가역적이지는 못했지만 사민주의는 언제든지 다시 전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3. 한국에서 사민주의의 의미 : 보수독점체제를 무너뜨리고 진보진영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한겨레>의 몇 년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진보지식인들은 대체적으로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절반 정도의 국민들 또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으로 영미식 모델보다는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지형은 보수독점체제가 더욱더 공고화하면서 일방적으로 영미식 모델로 수렴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진보진영은 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는 사민주의를 통하여 영미식 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한국의 보수독점 체제를 진보 / 보수체제로 재편하고 다수의 국민들을 진보진영으로 결집시킬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의 반 수 이상이 사민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사민주의는 한국적 권력자원을 구축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고 진보진영은 이러한 부분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앞으로 지속가능하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치적 지형을 혁파할 수밖에 없는데 사민주의가 현재의 보수독점체제를 혁파하고 진보/보수의 정치체제를 안정적으로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노선이라는 측면에서 사민주의는 매우 의미가 큰 것이다.

4. 사민주의는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 / 보수체제로의 재편은 사민주의만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민주의를 토대로 하는 구체적인 국가비전과 이러한 국가비전에 걸맞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선보이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당내 사민주의자들이 사민주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당 내외를 아우르는 활동을 시도하고 있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러한 활동이 당원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들을 추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비전 없이 당위론적으로만 흐르는 것 같아 아쉽다.

예를 들면 이미 중도개혁세력들은 사회투자국가를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국가비전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 사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회투자국가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는데 왜 그것이 홍시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처럼 민주노동당은 사민주의 정당인데 어떤 사민주의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없지만, 여전히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를 내세우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정당화한다면 그건 한 참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일 뿐이다.

이미 소련은 해체되었고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21세기이다. 더욱이 서구의 전통적 사민주의가 변모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가진 당원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사민주의인지 구체적인 제시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민주노동당은 사민주의 정당이기 때문에 사민주의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성만 주장한다면 동어반복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당내 사민주의자들은 중도개혁세력들의 사회투자국가에 대응할 수 있고 당원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국적 사민주의에 대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이미 당내에서 제기되었던 사회연대국가와 같은 국가비전을 지지하면서 사민주의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외화시켜 나가면서 당원들과 대중들에게 명확한 비전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사민주의 논쟁이 생산적으로 흐르기 위해서는 한국적 사민주의의 비전과 그 하위 정책방향에 대한 논의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논쟁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당내 사민주의자들이 고민했으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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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30일 (금) 07:52:50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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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 불가능
[최병천에 답함] 엄밀하지 않고, 사려깊지 못한 질문들

김종철 / 전진 집행위원장
출처 : <레디앙> 2007 11 27


먼저 답변이 늦어진 점 죄송하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고민할 일이 많았고, 또한 이 논쟁이 대선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약간은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지라 어떻게 하면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좀 늦어지게 되었다.

전문가들 참여 토론 수준 높여주기 바란다

한가지 전제를 하고 넘어가자면, 사회주의-사민주의 체제 논쟁과 같이 주요한 논쟁은 최병천 동지(이하 존칭 생략)나 필자와 같은 활동가들이 지나치게 폭넓게 가져가기에는 부담이 되는 논쟁이다. 필자는 이러한 토론에는 가급적 주요한 전문가들이나 이론가들이 참여하여 토론의 수준을 높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다.

사실 필자와 같은 활동가는 지금까지의 연구와 탐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필자와 최병천은 2006년 지방선거에 함께 출마한 적도 있는 대중정치운동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적 과제까지 자신의 과제로 가져간다는 것은 한국 진보운동의 발전에서 그닥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덧붙여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진보적 이론가, 지식인들도 필요하다면 이 토론에 개입해주어 토론의 수준과 <레디앙> 독자들과 관심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올려주었으면 한다.

사민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핵심은 사회주의

최병천이 지난 기고에서 필자에게 물었던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하여는 마지막에 답변을 하기로 하겠다. 글의 시작은 조금은 구체적인 논의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먼저 최병천과 독자들께 한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한 사회의 소득불평등도를 측정하는 주요한 지표로서 지니계수가 있다. 이 지니계수는 0부터 1사이의 값을 가지는 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것이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민주의의 대표적 국가로 꼽히는 스웨덴, 핀란드, 독일의 지니계수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정답은 '세금을 떼기 전에는 우리나라보다 높고, 세금을 뗀 후에는 우리나라보다 낮다'는 것이다.

필자가 몇몇 자료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비록 비교시점의 일정한 차이는 있지만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세금을 떼기 전에는 0.449이고, 세금을 떼고 나면 0.218이 된다. 핀란드의 경우는 0.379와 0.209이고, 독일의 경우는 0.395와 0.249이다.

한국의 경우는, 2000년 통계에 따르면 0.374와 0.358이 된다. 달리 말하면 사민주의 국가들이 세금을 떼기 전에는 한국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민주의 국가 세금 떼기 전엔 한국보다 더 불평등

   
  ▲정부의 실업급여 삭감에 항의하는 스웨덴 노총 조합원들.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 사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높은 세금과 그것을 통해 달성되는 주요 사회서비스의 무상제공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 서비스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교육, 의료, 주택, 보육, 노후보장 등이 사회주의적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있다는 사실이다.(물론 독일의 의료는 조금 복잡한 체제이지만)

만약 한국에서 현재와 같은 교육, 의료, 보육 등의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세금만 스웨덴처럼 많이 걷어서 지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뻔하다. 그렇게 증세된 재원이 고스란히 교육자본, 대형의료자본, 사적보육자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여 만약 오늘날의 스웨덴 사회가 세금제도는 유지한 채 교육, 의료 등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걷어내면 맞이하게 될 결과와 동일한 것이다.

즉, 사민주의 국가를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것은 높은 세금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높은 세금이 민중의 권익을 신장시켜주는 제도, 즉 사회주의적 제도에 있다는 것이다.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없으면 성립이 불가능한 체제다. 역사와 현실이 모두 그것을 입증한다.

그런 면에서 잠깐 한마디만 하자면, 이번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공약 중에 대학평준화, 국공립화, 공공의료 확충 방안 등이 부각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제 사회주의적 개혁은 민중들의 삶에 이미 가장 절실한 요소가 되었다.

스웨덴 사민주의, 그 계급타협 모델의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사회를 희구하고, 그 대안사회가 자본주의의 운영원리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나 경쟁원리, 시장만능주의와는 다른 사회운영원리로 운영되기를 바란다. 그런 것이 갖춰졌을 때 우리는 그러한 사회를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사회체제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체제가 꼭 가져야 할 요소가 있는 데 그것은 ‘불가역성’이라는 요소다. 마치 봉건시대에 왕조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정치영역에서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이것이 ‘불가역성’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의 운영원리에 대해 ‘불가역적’인 사회운영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며, 이 민주주의는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경제 영역의 민주주의를 뜻한다. 이것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강령이다.

필자가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그 ‘민주주의’는 단순히 급진적 사회주의를 순하게 보이기 위해 장식품으로 단 수식어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실내용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각설하고, 이러한 ‘불가역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민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민주적 사회주의

사민주의 모범국가인 스웨덴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정완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스웨덴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지 않지만, ‘어떤 자본주의가 좋은가’하는 문제의식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스웨덴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사민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타협을 전제로 한다. 즉, 타협적인 자본주의 체제인 것이다. 스웨덴 사민당은 지난해 야당이 되긴 했지만, 1932년 집권한 이후로 약 10년 가량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권력을 놓쳐본 적이 없는 정당이다.

그런 사회라면 사민당이 추구한 사민주의적 개혁은 대부분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인데, 그러한 사회에서조차도 자본가들의 권력은 온존하였고 오히려 강화되기조차 하였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1970년대 스웨덴 모델에 급격한 위기가 닥쳤을 때 스웨덴 노총(LO)이 주도하고 사민당이 형식적으로 추진한 사회주의적 프로젝트인 임노동자기금이 자본가와 보수세력의 반대로 실패하면서 스웨덴 사회는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본가의 강력한 저항과 노동자 회유전략은 노동자들마저 분열시켜 스웨덴 노동운동의 오랜 전통인 ‘동일노동 동일임금’, 즉 연대임금제도를 해체시켰고, 스웨덴 노동운동의 고수익 노동자층이라 할 수 있는 금속노조(Metall)가 총연맹(LO)을 제치고, 금속부문 사용자대표(VF)와 별도 교섭을 가지게 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로 치자면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분열이 가시화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각종 사회서비스의 민영화, 공적연금 운영에서의 시장원리 도입 등도 실행되었다.

사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러한 스웨덴 모델의 부침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자본의 권력이 온전하게 보존됨으로써 결국 신자유주의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있는 사민주의 국가의 오늘을 말해 준다.

즉, 사민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일부 사회보장 영역에서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제외하고는 무엇인가 불가역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이것의 결과가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경도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1970년대 그들이 시도하였던 사회주의 프로젝트인 임노동자기금이 성공하여, 오늘날 스웨덴 기업 대다수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노동자에게로 넘어와 있다면 지금 이러한 부침을 겪고 있겠는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임노동자 기금이 노동자 자주관리와 유사한 형태인 만큼 유고의 자주관리 사회주의가 겪었던 것처럼 새로운 위기를 맞았을 수도 있다. 즉, 경제운영의 권한을 넘겨받은 대기업 노동자 집단과 지방자치코뮌이 전체 인민의 이해보다는 자신들의 이해를 앞세우는 이기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실업의 만연, 지역별 격차의 확대 등 악순환이 시작됐고 이것이 심화되어 결국 파탄을 맞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조차도 기업들의 이러한 이기적 행동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도입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자주관리 사회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이해관계자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대안은 끊임없는 모색 속에 열려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조금 고쳐서 쓰는 데 안주할 것인가 그 차이에 있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더 많은 토론을 기약하며

오늘은 지면의 한계상 사민주의 체제에 대한 간략한 평가로 마치고자 한다. 앞으로 여러 가지 토론이 있을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시장에 대한 평가, 자주관리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 국유화에 대한 평가 등 말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필자와 최병천만의 토론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할수록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므로, 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며 최병천이 토론의 시작에 필자에게 물은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질문 자체가 엄밀해야 된다

첫째, PT독재를 인정하는가. 이 문제에 최병천이 자문자답하면서 ‘본인은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답변하였는데 필자는 ‘모든 인간은 정치사상과 결사의 자유가 있으므로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답변하겠다.

그런데 조금 사족을 달자면 오늘날 자본주의가 다당제라는 면에서는 부르조아 민주주의라 하겠으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전제로 하는 사회라는 점에서는 부르조아 독재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PT독재와 PT민주주의 역시 대립될 하등의 이유가 없고, 최병천의 질문은 ‘다당제를 인정하는가’로 수정되어야 한다.

오늘날 그 질문에 일당독재를 해야 한다고 답할 사회주의자가 어디 있겠는가. 극소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사회주의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대중이 듣기에 아름답지 못한 ‘독재’란 용어를 쓸 필요는 없겠으나, 이론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질문이라면 질문 자체가 엄밀해야 한다.

둘째, 권력획득방식에서 폭력혁명론에 대한 질문은 좀 사려 깊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사회를 꿈꾸는 운동을 폭력적이라고 잠재적으로 규정하는 질문이다.

   
  ▲칼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현존하는 모든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이..”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변혁이 그렇게 폭력적이었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한 것은 비열한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이 누구보다 앞장서 싸웠던 결과였고, 식민지 수탈자들에 대해 누구보다 결연히 그들이 맞서 싸운 결과가 아니었는가.

대안사회 운동 폭력적이라고 잠재 규정하는 질문

그들의 투쟁은 인민들의 염원 그 자체였다. 사회주의자는 늘 평화적으로 민중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걸 폭력적으로 탄압해온 것은 오히려 항상 자신들이 만든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요구해온 세력이다.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과거 칠레처럼 일시적인 정세에 의해 노동자,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정치세력이 집권한다 해도 제국주의와 구 지배세력의 폭력적 사보타주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합법적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과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지배세력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셋째부터 다섯째 질문은 비슷한 질문을 나눠서 한 것 같아서 한꺼번에 대답하겠다.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소유를 장려해야 한다는 답변이 적절하다. 이는 이미 민주노동당 강령에도 명시돼 있다.

아주 작은 규모의 사적기업과 조금 큰 규모의 협동조합기업, 지방자치단체 등이 개입된 사회적 기업, 국유기업 등 기업의 성격과 규모를 나눠서 다양한 소유를 인정하되 어떠한 경우라도 민주적 운영원리에 어긋나는 소수의 지배는 배척해야 한다.

또한, 시장은 현재로서는 인정하되 그 폭력적 성격과 불평등한 결과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대체질서가 가능한 지를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 또한, 소련과 같은 중앙집중계획경제, 혹은 명령형관리경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계획이 필요 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국가는 여전히 한 사회의 균형과 바람직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야 하며, 이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나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 지금까지의 나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고자 한다.

사민주의자들이 고민해야 할 것들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타협의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이 없이는 애초부터 사민주의는 형성조차 불가능했다. 오늘날 사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포기하고, 계급타협에 안주하며, 불가역적 사회변화를 추진하지 못했던 역사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 온건하다던 독일 사민당이 최근 당 강령과 정책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을 한층 강조하며, 좌파 정당으로의 선회를 추진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한국의 사민주의자 동지들도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사회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주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오늘 필자가 사민주의자 동지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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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아니라 정파 리더십이 문제다
[최병천 논쟁을 우려하며] 이념 통한 대중동원은 엘리트 발상

채진원
출처 : <레디앙> 2007 11 26


최근 이런 저런 이유로 권영길 의원실과 선본 일을 그만두고 사민주의에 공감하는 이들의 폭넓은 세력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한국 사회민주주의 네트워크(약칭 ‘사민넷’, 추진위원장 유팔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최병천(존칭 생략)이 <레디앙>에 '실체 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 : 김종철 전진 집행위원장에게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을 제안하며'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이 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유권자들이 이런 논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논쟁은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려가 되고,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첫째로 유권자들이 이념논쟁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최병천 당원이 제기한 이념논쟁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을지라도, 최 당원이 제기한 문제의식 밑바닥에 있는 유권자들이 느끼는 이념에 대한 체감정도를 이해하는 바로미터는 될 수 있다.

유권자들 이념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지난 11월 15일 CBS-리얼미터 조사발표에 의하면, 유권자 중 62%가 이념논쟁이 대선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이번 대선에서 대북관계 등 이념논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거의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36.1%)과 ‘대체로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25.6%)이 다수를 차지해,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61.7%로 나타났다. 영향을 줄 것으로 보는 의견은 17.4%에 그쳤다.

지지 정당별로는 민주당 지지층의 71.5%가 이념 논쟁이 대선구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응답해 가장 높았고, 그 뒤를 이어 한나라당(66.1%), 국민중심당(65.1%) 순으로 조사됐다.

반면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층은 55.8%로 영향력을 낮게 보는 의견이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고, 이념논쟁이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의견은 민주노동당 지지층이 24.3%로 가장 높았다.

둘째, 최병천식 문제 접근방식에 한계가 있다. 그가 이런 논쟁을 제기한 배경에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있는 것 같다. 의식은 존재로부터 온 것이다. 즉, 운동권, 좌파의 위기의 원인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념의 부재로 진단하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사민주의가 민주노동당에 없어서 당이 위기인가? 분명치 않다. 인과관계가 잘못되면, 정파의 위기가 당의 위기로 둔갑되고, 정파의 책임이 당의 책임으로 오인된다.

어쨌든, 최병천의 주장이 인과관계를 논하고 있지만,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증 가능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추후 논의의 한계가 있고, 따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최 당원의 입증되지 않는 주장은 반증되기 힘들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펼치더라도 합의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념 아니라 리더십이 부족

셋째, 당 위기의 진단에서도 ‘당 이념부재’가 아니라 ‘정파 리더십’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굳이 현재 당의 모습이 위기라고 진단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그 진단의 핵심은 ‘당의 이념부재’라기보다는 이념성향이 강한 소수 정파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정파일체감의 약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소수 정파들이 느끼는 ‘고립감’이 문제이고, 따라서 당 위기 원인은 이념부재가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정파 그 자체’의 문제이고 따라서 ‘정파의 리더십 부재’가 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는 운동권 용어로 유권자들 앞에서 잘난 척해도 씨알도 먹히고 지지를 받았는데, 이젠 안 통한다는 현실. 그렇게 잘난 척했다간, 욕만 먹고 외면 받는 현실. 괴로운 이 현실이 위기인 것이다.

넷째, 설령 최병천의 주장처럼, 몇몇 외국에서도 이른바 이념적 정체성이 혼란한 잡탕 정당을 비판하고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처방을 내렸지만 실패한 정반대의 효과를 낳은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유럽 좌파정당들이 그랬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유럽 좌파정당들이 왜 포괄정당(잡탕정당)으로 갔는지 반증해주는 좋은 사례이다.

유럽 좌파정당들도 이념 문제로 괴로워했다. 이념을 지키고 싶었다. 이념을 지키자니, 선거에 떨어지고. 자꾸 떨어지니 정당 존립이 힘들고. 그래서 살기 위해서, 포괄정당 잡탕정당으로 간 것이다.

왜 갔을까? 과학기술과 정보혁명, 후기산업구조의 변동에 의해 노동자계급이 중산층화되면서, 유권자들의 정당일체감 약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당은 생물적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변화된 상황에 조응해야 살아남는다. 문제의 선후관계 / 인과관계를 따져보자면, 후기산업구조의 변동과 유권자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정당은 생물적 본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이념정체성을 약화시키면서, 잡탕정당으로 갔던 것이다.

유권자와 소통하는 대중정당이 대안

다섯째, 그렇다면, 어떻게? 소통으로 무장한 리더십 그룹이 나와야 한다. 과거 운동권처럼 정파일체감이 강한 유권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또다시 이념과 계몽을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유권자들의 변화된 인식과 상황에 맞춰 소통적 방식(매우 어렵지만, 시도해야 한다)을 채택할 것인가?

노동자계급 내의 다수의 유권자들은 정파일체감이 극도로 약하다는 점에서 매우 유동적이고, 이슈에 따라서, 정책에 따라서, 인물에 따라서 그때 그때 반응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소통적 접근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념을 통해 대중을 불러 모으는 것은 여전히 엘리트적이며, ‘진리의 독재정’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시대착오적 방법이라 생각된다. 엘리트들 그들만의 이념논쟁, 유권자들이 볼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사민주의든 사회주의든 하나의 의견 정도로 만족하면 족하다. 유권자들이 느끼는 생활세계의 이야기를 서로 소통하는 데 적합한 것은 무엇일까? 이념보다도 생활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개성을 살피는 일일 것이다. 그들을 외롭게, 이기적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하는 따뜻한 신뢰의 공동체와 따뜻한 연대의 손짓이 필요하다.

필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민주노동당이 당내의 이념적 정파심이 강한 소수의 폐쇄적 엘리트 집단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노동자계급 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파심이 대단히 약한 다수의 유동층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그들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그야말로 개방적인 ‘대중적 정당’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부정적 이미지의 정파가 아니라 소통으로 무장한 긍정적 이미지의 리더십그룹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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