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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① 슬라보예 지젝 - 이현우 강사 (인문대ㆍ노어노문학과)
 

2007년 09월 01일 (토) 22:08:07 대학신문 snupress@snu.ac.kr

 


 

 

▲ 이현우 강사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

  ▲ 슬라보예 지젝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

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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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전기 같은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최근에 많이 접하게 된다. 대충 생각나는 것들만 해도 <이탁오 평전>,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빌헬름 라이히>, <밥 말리>, <존리드 평전>, <노신 평전> 등이다.

괴델의 전기니까 아마도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간의 괴델에 관한 경험으로 봐서는 쉽게 읽힐 것 같지는 않다. 글쎄, 전기니까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목차를 봐서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괴델 에셔 바흐>의 그 끔찍했던 번역 같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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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불완전성 증명한 천재의 불완전했던 삶
〈불완전성-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

고명섭 기자
출처 : <한겨레> 2007년 12월 21일


» 〈불완전성〉
 
레베카 골드스타인 지음·고중숙 옮김/승산·1만5000원

20대에 20세기 지성사 흔든 증명 했으나
‘수학 부정한다’는 오해에 스스로를 유폐한
괴델의 이론과 우울했던 삶으로 안내


“이 논리학자는 자신의 생전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내재적 가치가 아인슈타인의 업적과 맞먹을 정도로 혁명적이며, 우리의 뿌리 깊은 선입관에까지 침투해오는 지난 세기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엄밀한 소수의 성과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문장의 주인공이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수리논리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이다. 괴델의 이름이 아인슈타인과 나란히 놓인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최소한 수리논리학계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괴델이라는 이름에 거의 항상 동반되는 ‘불완전성 정리’라는 놀라운 수학적 업적 때문이다. ‘불완전성 정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함께 인간 지성의 토대를 흔든 20세기의 발견으로 꼽힌다. ‘불완전성 정리’로 하여 괴델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불완전성 정리’만큼이나 난해하고 기이했다. 끝없는 침묵 속에 스스로 유폐당했던 그는 논리적 명제로 이루어진 짧은 증명으로 자신의 생각을 겨우 알렸다. 그 증명조차도 너무 상식 밖이어서 무수한 오해를 낳았고, 참뜻이 이해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레베카 골드스타인이 쓴 〈불완전성-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은 ‘불완전성 정리’라는 기괴한 증명과 이 증명을 낳은 기괴한 인간에 관한 전기적 해설서다. 지은이는 소설가의 재능을 발휘해 괴델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학자의 꼼꼼함으로 ‘불완전성 정리’의 논리적 구조를 설명한다. 괴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와도 같은 ‘불완전성의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게 된다.

» 나치를 피해 미국 프린스턴대학 고등과학원에 정착한 괴델(왼쪽)과 아인슈타인. 극도록 소심했던 괴델은 27살 연상의 아인슈타인과 유일하게 우정을 나눴다.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한 것은 24살 때인 1930년 10월이었다. 수학자·철학자·논리학자들의 모임인 쾨니히스베르크 학회가 발표 장소였다.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신출내기 괴델은 학회의 마지막날에 자신의 연구 결론을 아주 짧게 이야기했다. 이 책의 지은이는 그 순간을 두고 ‘가장 조용한 폭발’이라고 묘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폭발은 너무나 조용해서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폭발인지 아무도 즉각 눈치채지 못했다.

20쪽 남짓한 분량에 극히 압축적인 논리로 이루어진 ‘불완전성 정리’는 ‘제1정리’와 여기서 딸려 나오는 ‘제2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정리의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모순 없는 수학적 형식체계가 있다고 할 때, 그 체계 안에는 참이면서 동시에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 이 결론에서 따라 나오는 제2정리는 이렇다. ‘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이 정리가 폭탄이 된 것은 먼저 수학계 안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 당시 수학계 안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다비트 힐베르트가 주창한 ‘형식주의 수학’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학의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모순 없는 형식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힐베르트의 가정이었다. 괴델의 제2정리는 바로 그 가정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었다. ‘어떤 체계가 무모순인지를 증명할 수 없다’는 그 결론이 오직 순수형식으로만 이루어진 수학체계를 만들어보려던 열망을 날려 버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괴델의 정리가 다만 수학의 영역을 넘어 논리적 체계 일반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이 수많은 오해의 단서가 됐다. 언뜻 보면 괴델의 정리는 수학이라는 가장 이성적인 논리체계의 붕괴를 입증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속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반이성주의적 운동에 이 ‘오해된 괴델’이 이용되었다. “괴델은 수학에 대한 악마다. 괴델 이후에는 수학이 신의 언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우주와 만물을 이해하기 위해 해독해야 할 언어라는 생각은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의 주장이야말로 전형적인 오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괴델이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인간의 머리로 짜낸 어떤 수리체계도 ‘불완전한’ 지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었을 뿐, 수학이 근원적으로 쓸모없다는 주장은 아니었다. 그는 증명 불가능하다 해도 ‘참’인 명제가 있음을 밝혔고, 우리의 이성적 직관으로 그 참(진리)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괴델의 정리는 오해에 오해를 낳았고, 그것은 불안신경증을 앓고 있던 이 고립된 수학자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해 프린스턴대학의 고등과학원에 정착한 괴델은 한동안 같은 처지의 아인슈타인과 유일한 우정을 나눴지만, 1955년 아인슈타인이 죽고난 뒤 철저한 자폐 상태에 빠졌다. 말년의 괴델은 세상이 자신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누군가 음식에 독을 탄다는 의심 때문에 식사를 거부하다 굶주림으로 죽었다. 사진 승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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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슬픔에서 나의 슬픔을 만나다
〈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한승동 기자
출처 : <한겨레 > 2007-12-14


» 너의 슬픔에서 나의 슬픔을 만나다
 

서경식 김상봉 지음/돌베개·1만7000원

김상봉-서경식 교수, 8개월간 9차례 나눈 ‘현실 진단’
신자유주의라는 갇힌 세계 넘어설 다양한 세계 사유


“지난해 어느 지방 대학에서 강연을 한 뒤에 40대 교수 한 분이 저를 보고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망령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지난해 이른 봄부터 난생 처음 ‘조국’에서 장기체류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1년 반을 넘긴 그 ‘망령’은 지금의 한국사회를 진단하면서 자본주의 고도화와 더불어 물질적 풍요(라기보다는 돈)에 매몰된 일본 지식인들이 자조적으로 얘기한 ‘자발적 노예화’, ‘안락 전체주의’를 떠올렸다. 그는 안락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런 전체주의가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20~30년간에 걸쳐 진행됐으나 한국에선 불과 5~10 사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며, “이 나라의 대학과 엘리트(지식인)들에 대해 제가 지녔던 동경이 환상은 아닐까 하는 괴로운 의문이 요즘 들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 생활을 하며 강연회 등을 통해 각계 사람들과 활발하게 접촉해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56). 내년 2월 복교를 앞두고 2년 예정의 조국체험 말기를 보내고 있는 그에게 ‘과거의 망령’ 발언은 이제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을까. “선생님도 이 사회에서 외로운 디아스포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선생님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을 만났다고 해서 이 사회 전체에 아직 희망을 가져도 좋은지도 의문이고요.” 실망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나, ‘섬세한 기질’의 그가 논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한 방편일 뿐 아직 결론을 서두를 리는 없다.

그가 ‘선생님’으로 지칭한 대화 상대는 김상봉(49) 전남대 철학과 교수. 두 사람은 돌베개 출판사가 출판한 <만남>을 위해 지난 5월19일부터 8월15일까지 아홉차례 만나 총 40여시간에 걸쳐 얘기를 나눴다. 기획자는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서 교수에게 “‘탈민족주의/민족주의 비판’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는 걸 느꼈다”며 그런 부분에 대해 더 섬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두 사람에게 던진 질문은 깐깐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여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일 수 있는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위기의식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그만큼 지금 한국사회에서 절실한 질문이기도 하다.

대담은 비정규직 문제, 민족주의문제, 통일문제, 교육문제 등 현안들을 통해 언어와 교양·예술·종교·형이상학 등 다방면에 걸친 주제들을 다룬다. 기획자의 질문은 김 교수가 인용한 서 교수의 다음과 같은 필생의 질문과 상통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여기에 있는가?”(<디아스포라 기행>) 바로 김 교수가 매달린 화두이기도 했다. 김 교수에게 ‘나’는 “내가 존재하는 장소일 뿐 아직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비존재와도 같은 것”이다. 현실적인 나는 언제나 그 장소가 내용을 통해 채워질 때에만 참된 의미에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내 존재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바로 나의 경험이며, 그 경험의 총체가 ‘세계’다. 따라서 세계는 오직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의 의식 속에서 열리는 지평이며, 주체의 경험이 달라지면 각자의 세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곧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물음”이며, “철학이 자기의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가 ‘거리의 철악자’로 현실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학벌체제’와 ‘도덕교육의 파시즘’ 타파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 〈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그래서 되돌아본 “내가 살아온 역사와 사회”는 “치명적인 분열과 단절” 속에 빠져 있었고, 그것은 서구 제1세계와는 달리 ‘자기 땅에서 추방된’ 식민지배에서 초래된 자기상실의 결과였다. 그런데 자기상실은 자기 정체성과 주체성의 혼란을 초래하지만 또한 “타자적 정신과의 만남을 통한 정신의 임신이며 바로 그런 까닭에 현재 우리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동요는 새로운 정신을 잉태하기 위한 입덧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김 교수가 말하는, 타자를 배제한 제1세계의 ‘홀로주체성’에 대비되는 ‘서로주체성’이 거기서 나왔다. 지배자의 철학이 아닌 참된 철학은 고통과 경악과 절망, 곧 슬픔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이며, “철학은 너의 슬픔 속에서 나의 슬픔을 보고 끊임없이 이 슬픔과 저 슬픔을 만나게 함으로써 더 보편적인 슬픔의 바다로 나아간다.” “오직 타인의 슬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슬픔이 보편적인 형식을 얻을 때 그런 정신이야말로 철학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 교수에게 온 가족이 질곡의 삶을 산 재일동포 서 교수야말로 “걸어다니는 철학”이다.

서 교수는 생활보수주의, 국가주의, 아류 제국주의가 횡행하는, 신자유주의로 귀결된 87년체제를 식민지 구조의 연장으로 파악한다. 이건 닫힌 세계다. “고통스럽고 어두운 지하실만이 닫힌 세계가 아닙니다. 네온사인 요란한 유혹이 있고,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널려 있는 가운데서 당뇨병으로 죽어가야 하는 이런 세계도 하나의 닫힌 세계인 거지요. 다소 비약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국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도 그런 닫힌 세계, ‘이런 것이 성공적인 삶이다’라는 일원적인 가치관을 주입시키고 그 외부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걸 넘어서서 굉장히 다양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것, “그것이 교양의 역할”이다. 김 교수에게 교양은 “올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힘”이며 그것은 유영모·함석헌의 사상에서 내려오는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예술 역시 타자성으로의 초월, 곧 타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교양, 예술과 더불어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하는 공적 주체를 키우는 교육을 통해 제대로 지킬 수 있다.

조국생활 중간결산 쯤에 해당할까. 두 교수의 대담 주제들은 이미 그들의 여러 저작들을 통해 어느 정도 낯이 익지만 서 교수의 장기체류 체험과 대담형식이라는 중대한 변수를 깔고 있는 만큼 ‘철학적 깊이와 역사 담론의 넓은 폭’이 새롭게 다가온다.

[관련기사]
 
 




역사를 고민하는 두 디아스포라

한승동 기자
출처 : <한겨레 > 2007-12-14 


» 대담 중인 서경식(왼쪽) 교수와 김상봉 교수.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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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5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이 책 기대만빵이에요. 월요일에 온다는데.

내오랜꿈 2007-12-15 01:24   좋아요 0 | URL
벌써 주문하셨군요.

서경식의 책을 몇 권 접했는데, 다른 책보다 <소년의 눈물>이 이상하게도 오래 남아 있습니다. 처음 읽은 서경식의 책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
[연재] 21세기의 사유들⑩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강사(서울대ㆍ철학과)
출처:<대학신문> 2007년 11월 10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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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동경 품고 도쿄로…“이중적 역할 한계”

김일주 기자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펴낸 박선미 교수
 
 


인터뷰 /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펴낸 박선미 교수

일제하 조선인 여자 유학생 행적 연구
여성 지도자 됐지만 식민권력에 이용되기도
“유학도 유행…요즘 미국 유학 열풍도 비슷”


“재주가 있으니, 또 재력도 있으니, 우리보다 못한 집 애들도 가는데 가야 되지 않느냐, 의당히 간다고 생각했죠.”(유학생 ㅇ씨·테이꼬꾸여자의학약학전문학교 1932~42)

 
»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식민지시기 조선여성의 일본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박선미(44·쯔꾸바 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과 전임강사) 박사는 최근 펴낸 <근대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1만5000원)에서 여자유학생 64명의 구술조사와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 여자유학생 관련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 여자유학생이 조선을 출발해 귀국한 뒤의 활동까지를 사회문화사·문화교류사·젠더사의 관점에서 밝혀냈다.

1910년대에 유학의 동력은 ‘실력양성론’이었다. 일본이라는 여과지를 거쳐 들어온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1930~40년대에 이르면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도입한 근대 교육체제의 피라미드적 구조 맨 꼭대기를 일본 고등교육기관이 점한다. 일본 정부는 조선학생의 유학을 점차 장려했다. 여기에 맞물려 조선사회에 형성된 강력한 성취의식과 상승지향의 학력주의, ‘조선=외부=주변’ ‘일본=내부=중심’이라는 식민지의식이 각인돼 품게된 중심부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일본유학은 근대적 산업이나 근대적 기술·지식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일부 사회계층에서는 일종의 문화적 유행이 됐다.

일본에 간 여자유학생들은 어땠을까? 1920년, 사범학교를 제외한 고등교육기관에는 조선 내의 학생보다 일본유학생 수가 더 많았다. 가령 1929년 조선에 하나뿐인 여자전문학교인 이화여전에 138명의 학생이 다녔고, 일본에서는 21개 여자전문학교에 158명의 조선인 여학생이 다녔다. 숫자도 빠른 속도로 늘어, 1910년 34명에서 1942년 294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일반적인 유학 동기에서뿐만 아니라, 봉건적인 가족제도를 깨고 사회로 진출하고자 일본 유학을 갔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여자유학생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여성운동 지도자가 됐으며, 교사, 의사, 약제사, 신문·잡지 기자, 예술가 등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박 박사는 여자유학생의 역할이 ‘젠더적 이중성’과 ‘민족적 이중성’을 함께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자유학생들은 유학을 통해 학력과 자격을 얻어 사회에 진출했고, 따라서 여성의 영역을 가정에서 사회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대다수는 사회에 나가서는 현모양처 의식을 보급하고자 노력했고, 따라서 성별역할분담의 젠더시스템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했지요. 귀국해서는 전문지식을 학교나 지역사회에 보급하는 교육자와 여성전문가가 되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식민지권력이 이용하려고 하는 인재가 됐습니다.”

» 도시샤여자전문학교의 조선인 학생(1937년, 기숙사) 사진에서 보듯이 학교나 기숙사에서 조선옷을 입은 예도 적지 않았다. 창비제공
 
 

이들은 일본에서 주로 가정학을 배웠다. 일본이 서구에서 들여온 가정학을 조선유학생이 다시 배운 것이다. 여학교의 가사과 교사가 된 그들은 식민지권력의 요청에 응해 조선가정의 일본화를 지향하는 조선가정개량운동에 협력하기도 했다. 또 1920·30년대에 현모양처론을 전개해온 여성지식인들은 일제말 총력전체제에서 현모양처를 ‘총후의 부인’, ‘군국의 어머니’로 전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의 일본 유학을 지금은 미국 유학 열풍이 대신하고 있다”는 박사의 지적은 흥미롭다. “교육 피라미드는 근대 교육제도의 보편적 특징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일본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는 데 그 식민지적 특징이 있었죠. 조선인들이 도쿄를 문화의 총본산 메트로폴리스로 동경했듯이, 일본의 고등교육기관은 선진학문의 중심지로서 최고학부의 지위를 차지했고, 유학은 일부 사회계층의 사회문화적 행위로 유행이 됐습니다. 제국의 중심으로 가고자 열망했던 식민지적 사회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지요. 해방후 선진학문의 중심지는 미국이 되었고, 교육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을 미국대학이 점하게 됐어요. 이는 우리가 여전히 세계체제의 변두리 문화식민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우리 사회문화적 행위의 식민지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 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석사과정을 시작한 1996년부터 ‘일제하 여자유학생 연구’에 매달렸다. 그때부터 일본어 초보 수준으로 연구를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살을 붙여나간 그의 지난 10년 동안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뒤 한국사회의 성차별 의식이나 성폭력, 가정폭력과 같은 사회문제를 주로 연구해온 그는 ‘현재성의 역사성’에 부닥쳤다고 한다. “근대적 젠더 체제에 들어선 지 100년이 됐고, 1980년대 이후에는 이 체제가 해체되면서 생활양식과 역할이 변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모든 변화를, 실은 19세기 이후 조선이 세계화 과정에 편입되면서 당시의 여성들이 그대로 겪었던 것이지요. 지금의 변화를 그때부터 축적된 변화 속에서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 이 연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책은 2년 전 일본에서 먼저 출간됐다. “어느 일본인 연구자가 서평에서 만약 제가 사회과학적 여성연구 출신이 아니고 처음부터 역사학계에서 출발했다면 전혀 다른 연구서가 됐을 거라고 평했더라고요. 약점이 때로는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구나 싶었어요. 인생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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