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한 미술품 경매장에서 앤디 워홀의 '자화상'이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27억원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이다. 다른 이도 아닌 앤디 워홀이기에 눈이 가는 기사였다.

현대 미술에 있어 앤디 워홀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타니스제프스키는 그의 책
(국역:<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현실문화연구)에서 앤디 워홀을 일컬어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앨비스의 부츠, 먼로의 입술 등. 이런 작업을 통해 그는 이른바 '팝아트' 라는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것.

알다시피 워홀은 매릴린 먼로라든가 앨비스 프레슬리, 앨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슈퍼스타의 이미지를 미술의 소재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코카콜라병, 통조림통 같은 현대 사회의 대량생산품을 미술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실크스크린 기법을 미술에 본격적으로 활용해 작품생산을 '공장화'하려 시도했고, '작가'의 개성을 배제하고 동시대의 삶과 이미지를 아무런 논평 없이 묘사했다. 어떻게 보면, '고상하고 우아한 예술의 영역'에 위치하던 미술을 복제와 모방이 가능한 공장의 일개 생산품으로 전락시키는 '불경한' 행위이기도 했다. 이른바 고급문화, 귀족문화의 대중문화화!

그러나 시대가 변한 걸까? 앤디 워홀을 재해석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재해석은 온 데 간 데 없고 돈벌이로 전락하는 그의 작품들만 남은 것 같아 보인다. 현대사회를 반추하는 거울로 비춰졌던 그의 작품들이 이제는 그가 미술작업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자본의 보복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대정신인 '팝아트'는 실종되고 '키치'만 남았다.

그래서 다음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돈다발 채운 매트리스에서 잠자며 미술혁명을 꿈꿨던 워홀의 속내를 음미하기란 쉽지 않다."


‘돈다발’을 보려는가, ‘미술혁명’을 보려는가

앤디 워홀 열풍 왜?

 

 

» 앤디 워홀의 66~67년작 <자화상>(오른쪽 도판)과 대표작 중 하나인 81년작 <달러 사인>. 리움에 전시중인 이 작품들은 아크릴 물감으로 붓질한 화폭과 실크스크린 판화가 결합되어 원본적 가치(오리지널리티)가 도드라져 보인다. 워홀 팝아트의 전형적 특징인 대량 복제성과 기묘한 모순을 보여준다.


20년 전 숨진 미국 거장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난데없이 국내 전시장을 바람처럼 휘감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로 흉흉하던 지난 31일 오후. 협상장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호텔 아래의 삼성미술관 리움 직원들은 다른 이유로 내내 비상 근무를 했다. 구내 기획전시실(아동교육문화센터)에 차려진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1928~1987)의 회고전 ‘앤디 워홀 팩토리’(6월10일까지·(02)2014-6901)에 2004년 개관 이래 최대 관객이 몰렸기 때문이다. 워홀의 고향인 미국 피츠버그 앤디 워홀 미술관의 소장품 200여점이 나온 전시를 보러 이 날 입장객만 4000명을 넘겼다. 그의 대작 자화상과 유명한 마오쩌뚱, 마릴린 먼로 실크스크린 판화, 수소가스 넣은 은색 풍선 방 등 곳곳이 작품보고 사진찍는 이들로 바글바글하다. 3월부터 예약제를 폐지한 탓도 있지만, 평일도 1000명 이상 찾는다. 주관객도 20대 중심의 일반인들이 훨씬 많다. 현장 관리자는 “그 전엔 많아도 주말 1000명 미만이었다”며 “10만명 이상 돌파는 무난할 것 같다”고 전했다.

7곳이나 이례적 잇단전시·리움 개관 이래 최대 관객
시류맞는 다시읽기 평가 속 ‘블루칩’ 돈벌이 인식 우려


워홀의 전시는 지난해 9월 서울 크리스티 한국사무소에서 대표작 판화 ‘오렌지 마릴린’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10~1월 서울 인사동 쌈지길의 ‘깨어나라 워홀’전, 12~1월 서울대 미술관의 ‘앤디워홀 그래픽’전, 지난달 3~18일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 갤러리 H의 워홀전이 잇따랐다. 지금도 가장 큰 리움의 기획전 외에 서울 신사동 에스파스솔의 워홀 판화전(15일까지)과 대구 리안 갤러리의 워홀전(5월6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무려 7개 전시장이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부터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과는 별 인연이 없었던 워홀(숨질 당시 병원 담당 간호사가 한국계였다고 한다)을 국내 전시장들이 이토록 뜨겁게 기억하려 애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술판에서는 첫째 이유로 소비문화를 본질 삼았던 워홀 팝아트가 지금 시류에 다시 읽기에 딱 맞는다는 점을 꼽는다. 리움의 이준 부관장은 “전시가 겹치는 건 정말 우연의 일치”라면서 “최근 일상 대중문화를 전면적인 소재로 쓰는 네오팝 포스트팝이 유행한다는 측면에서 20주기를 맞은 워홀 팝아트가 기획자들의 취향과 공통적으로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작품 자체가 20년 전의 것인데도 요즘 뜨는 미술시장의 유사 팝 트렌드에 딱 맞다는 역설이다. 살아서도 철저히 돈을 밝히고 가식적인 기행에 탐닉했던 그의 사업가적인 태도는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신화로 바뀌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지금 미술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우량주다. 전세계 경매사 가격동향을 조사 분석하는 아트프라이스 닷컴의 공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워홀은 세계 경매시장에서 피카소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1억9천여만 달러의 거래 총액을 기록했고, 지난해 선보인 대표작 <오렌지 마릴린>은 11월 뉴욕경매에서 1630만달러, 다른 대표작 <마오>는 50년대 이후 현대미술품으로는 가장 비싼 1740만달러에 낙찰되었다. 리움 전시를 전후해 상업화랑들의 약삭빠른 판매전이 끼어든 것은 이런 맥락으로 비친다.

아쉬운 것은 보기드문 앤디워홀 열기가 팝아트의 본질을 비껴간 채 돈벌이용 키치로만 해석하는 태도를 대개 보인다는 점이다. 미술을 개념으로 인식한 뒤샹에 이어 소비문화를 미술적 맥락에서 전폭 수용한 그의 업적은 갈수록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 미술관과 리움을 제외한 다른 국내 전시들은 패션, 아트상품이나 고가 컬렉션 판매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벗지 못한다. 리움 기획전의 경우 판화 위에 작가본인의 붓질이나 필적 등이 들어간 수공적 작업이 많아 전시의 격은 월등하지만, 2000년대 워홀 팝아트 세계를 재해석하는 식견이 묻어나오지 못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돈다발 채운 매트리스에서 잠자며 미술혁명을 꿈꿨던 워홀의 속내를 음미하기란 쉽지 않다.

노형석기자 nuge@hani.co.kr



앤디 워홀 ‘자화상’ 27억원 해외작품 최고가
〈경향닷컴www.khan.co.kr〉/ 입력: 2007년 09월 17일 13:57:57

극내 미술품 경매에서 미국 팝아트작가 앤디 워홀의 1986년작 실크스크린화 ‘자화상’이 27억원에 팔려, 해외작가 작품으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지난 15~16일 서울 코엑스 3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아트 옥션 쇼 인 서울’의 경매에서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또 다른 리히터의 추상작품이 18억6000만원, 앤디 워홀의 마오는 18억원에 각각 낙찰됐다.

국내 작가 가운데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은 이우환의 ‘선으로부터’. 생존 국내 작가 가운데 최고 가격인 16억원에 낙찰됐으며, 지난 7월 107회 경매 때 13억5000만원이었던 작가 최고가격을 다시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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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9-1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홀은 정말 재능있는 사업가인 것 같아요. 부럽기도 하죠. ^^
 

나윤선 “늘 노래 불렀지만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해”
팝앨범 ‘메모리 레인’ 낸 재즈 보컬 나윤선
 
 
2007 04 15 김일주 기자 김경호 기자
 

 
» 재즈 보컬 나윤선.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13년 전 처음으로 섰던 무대에서부터 나윤선(38)은 그랬다. “〈지하철 1호선〉 주인공이었는데, 전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노래만 불렀어요. 설경구씨나 방은진씨는 일인다역으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죠.”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연기도 못하고 춤도 못추는” 모습으로, 더군다나 “남 앞에 나서는 걸 정말 싫어하는” 모습 그대로 뮤지컬 주인공이 됐다. 첫 무대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최근 음반 〈메모리 레인〉으로 다시 팬들 곁으로 다가온 그를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몇차례나 조곤조곤한 말투로 “내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되뇌었다. 이런 그가 무대 위에서 신들린 듯 ‘스캣’(아무 뜻 없는 말로 노래부르는 것)으로 프랑스와 한국의 재즈 팬들을 휘어잡는 가수란 게 놀라울 정도다. “학창시절 반에서 ‘누구 노래할래’ 하면 항상 ‘노래 시킴을 당하는’ 아이였어요. 노래 부르면서 많이 적극적인 편이 됐지만 늘 자신없고 떨리고 절망하고 그래요. 유명한 뮤지션 공연을 본 날은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음악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죠.”

 

» 재즈 보컬 나윤선.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남 앞에 나서는 것 싫어해
27살에야 스스로 음악의 길 찾아
늘 자신없고 떨리고 절망하고…
재즈가 ‘사람들과 만남’ 주선해줘


나윤선에게 음악은 운명이다. 그는 성악가인 나영수 한양대 음대 교수, 그리고 뮤지컬 1세대인 성악가 김미정씨의 딸로 부모에게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악적 ‘끼’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직업으로 음악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보았던 탓에 음악을 업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주변에선 집요하게 노래를 시켰다. 심지어 입사 면접 때에도 면접관들이 노래를 시켰고, 합격해 회사를 다닐 때도 노래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적성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자 이번엔 주변에서 “지하철 1호선의 오디션을 보라”고 ‘압박’해왔다. 대학교 1학년 때 장난스럽게 만들었던 데모 테이프를 보냈는데, 바로 합격해 〈지하철1호선〉 무대에 섰다. 얼떨결에 그해에만 뮤지컬을 세 편을 하고 난 뒤, “이제는 노래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스물일곱살에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떠밀리지 않고 음악을 찾아 스스로 프랑스 재즈학교에 입학했다. 공부하면서 할 수 있는 음악이 재즈였고, 샹송에 대한 관심을 채울 수 있는 곳이 프랑스였다. 동시에 학교 네 곳을 다니며 공부에 빠졌다. “너무너무 못해서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무작정 배웠어요.” 스탠더드 재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고민이었다. “죽었다 깨도 흑인들의 스윙감이 안 생길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저처럼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는 유럽쪽 재즈 보컬을 들려주셨어요.” 마침내 그는 자기 음색에 맞는 옷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정식 가수로 나섰지만 사람들 앞에 서기 싫어하는 성격은 여전했다. 그러나 재즈가 그 문제를 해결해줬다. 재즈는 ‘만남’이었고, 만남이 답을 준 것이다. 여러 재즈 콩쿠르에서 상을 탄 그에게 유명 뮤지션들은 함께 연주하자며 먼저 다가왔다. 그 덕분에 다섯장의 음반을 낼 수 있었고, 그 음반들이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나윤선이란 뮤지션은 자기 자리를 얻었다.

이번 음반에서 선보이는 ‘팝 음악’은 어떤 것일까? 조동익, 김광민, 하림 등의 국내 뮤지션과 덴마크 출신 피아니스트 닐스 란 도키, 일본 피아니스트 사토 마사히코 등의 곡이 담겨 있다. 정형에서 벗어나 독특한 느낌을 주는 나윤선식 팝이다. “재즈는 늘 뭔가에서 벗어나있는 음악이죠. 내 느낌을 갖고 하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그런 그의 ‘느낌’을 사람들이 따라가게 만드는 나윤선의 힘, 그 힘을 이번 팝음반에서도 느낄 수 있다.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언제부터인가 나윤선을 자주 접하게 된다. TV,라디오,신문 등지에서. 그녀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윤선 열풍'이라고 한다면 좀 그렇지만, 어쨌던 그녀는 이제 '한국 재즈의 대중화'라는 아이콘을 선점한 것 같아보인다. 뭐 나쁠 것 없는 현상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재즈는 뭔가 고상하고 우아하고 '교양있는 넘들'의 전유물 비슷하게 인식되어져 온 느낌이 없지 않으니까.

물론 반대편의 평가도 가능할 것 같다. 이걸 재즈 음악이라고 할 수 있냐, 너무 눈높이를 낮춘 거 아냐, 얘 요즘 밥벌어 먹고 살기 힘들어졌냐, 등등. 사실 작년부터인가 TV오락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가수들, 특히나 락가수들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도 "저 자식 요즘 먹고 살기 힘드나, 왜 저런 생쇼를 다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으니까(그런데 그게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서 락가수가 살아남는 방법이란다..-.-..).

어쨌거나 그녀의 목소리는 쇳소리 같은 차가움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나른하고 아련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음란서생>에서의 오달수의 표현을 빌자면, 어딘가 모르게 '진맛'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정통 재즈마니아들에게 나윤선의 이러한 변화 아닌 변화는 그렇게 호의적일 수만은 없겠지만 나 같은 얼치기들에게야 낮은 곳으로 포복하는 그녀의 시도가 좋기만 하다. 천상에서 아무리 유아독존한들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질 않는가. EBS 채널 <스페이스 공감>에서 청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난 왜 <지하철 1호선>에 그녀가 나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 흐르는 곡은 <오래된 정원> O.S.T. 음반에 나온 '사노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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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나윤선의 <사의찬미> 가 아주 전율이던데...^^ 좋은 가수죠.

내오랜꿈 2007-09-18 16:5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좋고 '실력있는' 아티스트죠.
전 운전하면서 이 앨범 듣다가 9번 트랙이 나오면 뒤로 돌립니다. 운전하면서 듣기에는 "사의 찬미"는 너무 심장을 후벼파는 목소리 같아서요. 목소리에 몰입하다 운전에 방해 받을 것 같아서요..^.^..

바람돌이 2007-09-1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노라면도 괜찮네요. 저야 재즈든 뭐든 음악이라곤 잼병이지만.... ㅎㅎ <지하철 1호선>은 봤지만 기대보다 별로였다는 기억밖에 누가 나왔는지도 하나도 기억안나요. 아 도대체 나는 왜 이럴까? ^^;;

내오랜꿈 2007-09-18 16:58   좋아요 0 | URL
너무 처량한가? <오래된 정원>과는 꽤 어울리는 것 같은데...

<지하철 1호선>이 워낙에 리바이벌 많이 되어서 주연 배우들이 그때마다 달라서 그런 것도 있을 걸... 94년, 95년에 할 때 방은진이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그 이후에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