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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전기를 다루는 서평을 읽으면서 책이 왜 이렇게 두껍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올해 들어와 읽은 다른 전기들에 생각이 미쳤다. 그 책들을 펼쳐보니 <빌헬름 라이히> 787쪽,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1,055쪽 , <존리드 평전> 701쪽, <노신 평전> 421쪽, <이탁오 평전> 589쪽, <밥 말리> 507쪽(이 책은 활자가 다른 책들에 비해 1포인트 정도 작은데, 보통의 활자로 치면 600쪽이 넘는다) 등이다.

그러고 보니 철학자나 정치사상가들에 관한 전기는 대부분 엄청난 분량이었던 것 같다. 2권으로 나누어 번역된 미셸 푸코나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도 800쪽 분량이었고, 호치민 전기도 1,000쪽 가량 됐으니...

하지만 대부분 책값은 2~3 만원 정도였었는데(제일 두꺼웠던 <괴벨스>가 35,000원이었다), 한나 아렌트 전기는 신기록을 세운다. 할인받아도 50,000원이다. 완전 허걱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철학자의 삶
한나 아렌트 전기 번역출간 / 홍원표 옮김 / 955쪽 / 5만5천원

김승욱 기자
출처 : <연합뉴스> 2007년 11월 29일


(서울=연합뉴스) = "이 책은 대작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견줄만 하다". 1951년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에 쏟아진 비평가들의 찬사는 대단했다.

   1963년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악(惡)의 본질을 해부했다. 이 책은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로 평가받았다.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이자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철학자'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기가 최근 번역.출간됐다.

   미국 컬럼비아대 정신분석재활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인 엘리자베스 영-브륄이 펴낸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펴냄)'는 1천 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으로 아렌트의 일생과 사상을 풀어냈다.

   아렌트는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몸에는 아버지 파울 아렌트와 어머니 마르타 아렌트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렌트는 일생동안 유대인임을 의식했고 이는 그의 사상에 바탕을 이뤘다.

   18살이 되던 해 마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한 아렌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한 남성을 만난다. 아렌트는 자신을 가르친 마르틴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유부남이면서 17살이나 연상인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사랑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25년 여름 아렌트는 아무리 깊은 관계를 맺더라도 하이데거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당신은 왜 나에게 손을 내미는지요?/ 부끄럽게, 그것이 마치 비밀이라도 되나요?/ 당신은 우리의 포도주를 알지 못할 만큼/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인가요?'
비록 하이데거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하이데거와 아렌트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훗날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1927년 출간된 하이데거의 대표작)'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아렌트는 공부를 계속해 1928년 칼 야스퍼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독일 생활은 전체주의의 광풍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풀려난 아렌트는 파리로 도피했으며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1년은 아렌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해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간된 해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해에 아렌트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33년 이후 아렌트는 18년 간 무국적자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유명세를 탄 아렌트는 놀람과 불편함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스승인 야스퍼스에게 "일주일 전 저는 신문의 표지인물이 됐다는 것과 신문 판매대에서 제 자신을 목격한 것에 대해 선생님께 어떤 편지를 써야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아렌트는 텔레비전 대담에 출연할 때도 등 뒤에 카메라를 설치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얼굴이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다. 자신의 기질과 성향은 정치행위나 공적인 삶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60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은 아이히만이라는 남자를 체포했다. 그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집행자였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돼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 받는다.

   아이히만의 재판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모두 취소하고 '뉴요커'지의 재정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의 재판을 참관했다.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한 자였다. 그는 전혀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머리에 뿔난 괴물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

   미국으로 돌아온 아렌트는 뉴요커지에 악의 평범성을 파헤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5차례 연재했으며 이를 정리해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1975년 아렌트는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며 자식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몰려들었지만 지적인 동료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열렬하게 사랑했던 하이데거 정도였다. 나치에 협력한 이유로 곤경에 처해있던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세상을 뜬 지 1년 뒤인 1976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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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있다. 아래 소개하는 『루시퍼 이펙트』에서 다루는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을 영화화한 것인데, 정작 영화는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제작되었다.

1971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Philip Zimbardo 박사의 지휘 아래 <환경조작에 따른 심리변화 실험>을 실시한다. 목적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인간은 극한 환경을 선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의문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이를 위해 거대한 가상 감옥이 설치되고 신문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예정된 기간은 2주일. 그러나 실험은 5일만에 끝나고 만다. 영화 는 ‘스탠포드 감옥 시뮬레이션‘에 기초한 5일간의 드라마틱한 기록과 미완성으로 남겨진 9일간의 劇的 구성이다.

아래는 『씨네21』에서 인용한 영화의 "시놉시스'다.

심리학의 권위자, Dr. 톤은 이 야심찬 실험을 위해 신문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그리고 14일간 이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거대한 미로같은 지하 임시감옥을 셋팅한다. 연구자들은 감옥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실험자들의 모습을 감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 연구자의 개입은 없다... 오직 실험실의 생쥐처럼 이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이름대신 번호표를 달고 고개를 숙인 채 일렬로 걸어가는 죄수들과 곤봉을 차고 이들을 통제하는 간수들... 엄격한 심리테스트를 걸쳐 선발된 20명의 표본들 - 전직기자인 택시운전자 타렉, 7년간 한 번도 지각을 해 본적이 없는 항공사 직원 베루스, 엘비스 모창가수 등... 이들은 12명의 죄수와 8명의 간수로 나뉘어 14일간의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실험 1일 - 처음은 게임처럼 즐거웠다. 그러나 간수는 여섯 개의 규칙에 따라 죄수를 통제해야 한다.

실험 2일, 3일... 한 잔의 우유, 치기 어린 장난들이 점차 그들을 진짜 간수와 죄수로 몰고가기 시작한다.

실험 5일째...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하고 실험은 연구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러나 아직 9일이 남았다... (『씨네21』 2002 03 06)

영화는 물론 가상공간에서의 실험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실제 상황이며 지금도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것처럼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미군의 행태, 르완다에서의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 등. 어쩌면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의 체험공간인 군대 역시 이러한 '루시퍼 이펙트'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의 『루시퍼 이펙트』에 대한 서평이다. 책읽기가 만만찮은 사람들은 영화 「엑스페리먼트」부터 볼 일이다.

2001년, 영화가 공개되자 엄청난 반향을 몰고다니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언론은 '독일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세계를 완전히 넉다운시킨 최고의 스릴러'라는 평을 쏟아내었으며,  「엑스페리먼트」는 그해 전 세계 영화제에 최다 초청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스쳐지나간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혹시 영화에서 다루는 가상공간은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는 늘상 경험하는 실제상황의 하나이기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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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한승동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루시퍼 이펙트〉
 
 
〈루시퍼 이펙트 〉
필립 짐바르도 지음·이충호 임지원 옮김/웅진지식하우스·2만8000원


평범한 인간이 악인으로 돌변하는
루시퍼 효과 검증한 ‘스탠퍼드 실험’ 분석
“개인 기질보다 환경이 결정적 역할” 주장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만행이 내부 고발자에 의해 적나라한 사진들과 함께 외부에 공개되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해 9월 만행의 중심인물 칩 프레더릭 하사를 만난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는 당시 37살의 그가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2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침례교 교회에 나갔으며, 스스로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프레더릭은 아부그라이브 학대 만행에 가담한 뒤에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심리학자들은 모범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던 그가 자신의 근무환경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학대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정신병적 성향의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정신분열증·우울증·히스테리를 비롯해 주요 심리학적 병리학과 관련해 그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범위”에 속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악마’로 돌변했을까? 짐바르도 교수의 <루시퍼 이펙트>(웅진지식하우스)는 바로 그 문제,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를 구체적 실험을 통해 추적해가는 방대한 저작이다. 루시퍼(Lucifer)’는 원래 하느님이 가장 사랑한 천사였으나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사탄이다. 그러니까 ‘루시퍼 이펙트’는 멀쩡한 사람이 악마로 돌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지은이는 본장 첫머리에 네덜란드 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의 그림 <서클 리미트 Ⅳ>를 보여준다. 둥근 구 표면에 날개를 편 천사들이 셋씩 짝을 이뤄 나뭇잎처럼 촘촘히 그려져 있는데 묘하게도 초점을 천사한테서 그들 옆 빈공간으로 옮기는 순간 뿔달린 박쥐모양의 악마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구도로 변한다.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심리학적 진실은 이렇다. 세계는 선과 악으로 가득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고 불완전하다. 천사가 악마로 될 수도 있고, 악마가 천사로 될 수도 있다.

지은이는 오랫동안 이웃으로, 친척으로 함께 오손도손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날 살인마로 돌변해 1백만 이상을 죽인 르완다의 후투족-투치족 비극,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영국군의 미국독립전쟁 당시 주민학살 등의 예를 들면서 만행 당사자들이 칩 프레더릭처럼 평소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었음에 주목한다. 그 ‘정상’ 뒤 깊숙한 곳엔 악마가 도사리고 있었을까?

<루시퍼 이펙트>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악행은 개개인의 기질 탓인가, 아니면 그가 놓여 있는 상황 탓인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상자 안의 사과가 썩는 것은 사과 자체가 먼저 썩었기 때문이냐, 사과는 원래 멀쩡했는데 썩은 상자가 썩게 만들었기 때문이냐?

» 세계는 선과 악으로 가득하며 천사와 악마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모리츠 에셔의 그림 <서클 리미트 Ⅳ>. M.C.Escher's 'Circle Limit IV' ⓒ 2007 The M.C.Escher Company-Holland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여기서 짐바르도의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이 등장한다. 이 실험이 책의 뼈대다. 아부그라이브 만행이 자행되기 33년 전인 1971년 8월14일 짐바르도는 하루 15달러씩 주기로 하고 실험참가자를 모집해 그들 중 24명의 ‘지극히 정상적인’ 대학생들을 뽑았다. 실험은 스탠퍼드 대학 지하실에 모의 교도소를 만들어 놓고 모집학생들을 교도관과 수감자 두 그룹으로 나눠 2주간 일반 교도소와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해 그들 사이에 어떤 심리·행동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경찰에 부탁해 일반적 절차에 따라 그들을 체포한 뒤 3 × 3. 크기의 방 3개에 각각 세 명씩 수감자를 넣고 1개조 3명씩의 교도관 3개조와 지원근무자, 교도소장이 배치됐다. 두 그룹으로 나뉜 학생들은 그것이 실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여차하면 실험을 포기할 수도 있으며, 부모들도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험 시작 첫날 점호시간부터 상황은 그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교도관 역을 맡은 학생들은 진짜 교도관처럼 행세하기 시작했고 그들 정체성마저 거기에 맞춰 변해갔다. 수감자들 역시 저항도 하고 일부 탈락하기도 했으나 심리상태는 일반 교도소 수감자들을 닮아갔다. 책은 그런 변화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보여주는데, 실험의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기는 이 책이 처음이라 한다.

실험은 사태가 매우 우려할 만한 지경으로 번져가던 제6일째 중단되고 말았다. 교도관과 수감자, 그리고 관찰자, 외부방문자들의 시선을 교차편집해 실험 당시의 사건과 참가자들의 심리상태, 종료 뒤의 평가, 회고 등이 종합적으로 제시돼 있다. 참가자들은 왜 실험인 줄 알면서도 극한상황으로 빨려들어갔는가. 왜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실험은 33년 뒤 아부그라이브 비극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났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루시퍼 이펙트는 개인 기질보다는 상황, 상황을 조성하는 시스템, 곧 썩은 사과보다는 썩은 상자 탓이 더 크다는 게 결론이다. ‘밴두라 실험’ ‘깨진 유리창’ 이론 등도 등장한다. 물론 그것이 개인의 비도덕적, 불법적 악행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고 책임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걸 짐바르도는 거듭 강조한다. 그는 누구든 악마로 전락할 수 있지만 누구든 영웅이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악에 맞서 싸우면서 루시퍼 이펙트에서 벗어나기 위한 영웅적 노력을 보통 사람들에게 촉구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책과 삶] ‘상황’이 바뀌면, 누구라도 악랄해진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23일


▲루시퍼 이펙트…필립 짐바르도|웅진지식하우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라는 유명한 심리 실험이 있다. 1971년 8월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평범한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의 역할로 나눠 모의 감옥 실험을 했다. 그런데 실험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수감자’들을 가학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도 갈수록 ‘창의적’으로 악랄해졌다. 성적 수치심을 주는 학대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수감자 역할의 학생들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거나 교도관에 무조건 복종하는 등 진짜 수감자처럼 행동했다. 감독관으로 참여한 짐바르도마저 참가자들을 쥐고 흔드는 교도소의 ‘권력자’로 변해갔다. 실험은 결국 6일 만에 중단됐다.

35년 뒤, 그동안 세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 충격적 실험의 전말이 공개됐다.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는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과 실제 사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선과 악,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뒤늦게 책이 나온 데에는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포로 학대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TV에서 나오는 사진들을 보고 저자는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벌거벗은 수감자들의 ‘피라미드’ 뒤에서 웃고 있는 병사들, 수감자의 목에 개줄을 묶어 끌고다니는 여군, 자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수감자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이 사건의 군법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30여년 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부활을 목도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했던 ‘루시퍼’가 천사에서 사탄으로 돌변한 것과 같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적당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사악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건 하얀 천사들인가, 검은 악마들인가. 그림은 M C 에셔의 ‘Circle Limit Ⅳ’. ⓒ 2007 The M.C.Escher Company-Holland
저자는 ‘사악한 행동은 개인의 기질에 원인이 있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상황과 시스템의 힘에 주목한다. ‘썩은 사과’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썩은 상자’, 나아가 ‘썩은 상자 제조자’가 문제라는 것. 선량한 소시민이 죄의식 없이 포로를 학대하는 잔악한 병사로 변하게 된 데에는 공격과 폭동에 대한 두려움, 열악한 근무환경 등 상황적 힘과 ‘학대 문화’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시스템의 압력이 컸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이라크 주둔 미군 고위 지휘관은 물론 럼즈펠드 국방장관, 체니 부통령, 부시 대통령까지 심판대에 세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공포를 조장하고 학대와 고문 행위를 부추긴 ‘행정 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사악한 행동으로 유도하는 다양한 심리적 동인들을 소개한다. 집단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는 집단 동조의 힘과 권위에 대한 복종이 대표적이다. 1978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정글 속에서 목사 짐 존스의 명령에 따라 900명이 넘는 신도들이 집단자살한 ‘존스타운 사건’은 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규칙과 역할, 익명성, 탈개인화, 비인간화 등도 ‘썩은 상자’를 구성하는 심리적 절차들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결코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뿌리째 뒤흔들기 때문이다. 책에는 겉보기에 선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행을 일삼는 경악할 만한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1994년 르완다의 후투족은 어제까지 친구나 이웃이었던 투치족을 100만명 가까이 살해했다.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 수 만명을 학살한 독일 101예비대대는 막 징집된 신병들로, 모두 노동자 출신의 가정적인 중년 남자들이었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웃고 있는 미군 병사들.
저자는 아울러 “도와주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하거나 내부고발의 필요성이 있을 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악”이라고 규정한다. 엔론 같은 부패한 회사에서 회계장부가 조작됐을 때 이를 못본 척한 직원들이나 르완다나 수단 다르푸르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을 때 이를 묵인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하지 않는 악’의 역할이 컸다고 질타한다.

저자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인용한다.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아이히만의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와 같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도착자나 사디스트가 아니었으며, 무섭고도 두려울 정도로 정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악의 평범성’에 대비해 ‘영웅적 행위의 평범성’도 강조한다. 악의 유혹에 저항하고 불복한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왔고, 이들은 ‘평범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사람들을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상황과 시스템의 힘을 억제하고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회가 시민들에게 ‘(평범한) 영웅에 대한 상상’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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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너무나 '유명한' 책이 제대로 번역되어 나왔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인가 뭣인가가 나와서 시끄러울 때가 벌써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옛날 같다. 그 즈음의 난 20대 말의 어수선함과 혼란스러움으로 인생의 방향을 놓고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기에, 후쿠야마식의 이데올로기 종언, 역사의 종언이라는 '선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이라는 사실만으로 시선을 끌었던 책이었다. 현실에서 현재진행형이던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내겐 전혀 실천적인 철학자로 보이지 않았던 데리다가 정면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을 이야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때 내게 데리다는 너무 어려웠다. 알뛰세, 푸코, 들뢰즈의 책들은 그 이해의 완전함은 떠나서라도 읽혀지는데 데리다 만큼은 이상하게도 읽혀지지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일차적으로는 나의 선입견, 현실의 실천에서 거리를 둔 철학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원인이었을 게다.

또 하나는 데리다를 가장 처음 접했던 게 솔 출판사에서 나온 입장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데리다와의 대담을 엮은 <입장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의 호감으로 그후 몇몇 데리다 해설서를 읽게 되었는데, 그게 오히려 데리다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다. 김형효씨의 데리다 해설서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고, <데리다와 푸꼬,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극단의 예언자들: 니체.하이데거.푸코.데리다> 등에서 다루는 데리다도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었다(그나마 <극단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데리다를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걸 알면서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나중에 번역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발리바르나, 들뢰즈를 통해 데리다의 긍정적 평가를 접하게 되면서 언젠가는 다시 데리다를 읽어야지 하면서도 지금까지 미뤄져오고 있는 것.

이번엔 미뤘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제대로 한번 데리다를 읽어봐야겠다. 번역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는 책이기에.  아래 인용하는 두 글은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와 <동아일보>의 권재현 기자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서평인데 차례로 옮겨 놓는다.



‘유령’이란 틀로 위기의 마르크스 재해석
해체주의 철학 거두 데리다 후기 대표작
“마르크스주의 종언은 집단주술” 비판
체제모순 넘어서는 ‘메시아적 유령’ 역설
 
 
출처 : <인터넷한겨레>2007/10/05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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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이제이북스·1만9천원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자크 데리다(1930~2004·사진)가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10여 년 전에 출간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데리다는 1960년대 이래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8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고, 수백 편의 논문을 썼다.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 데리다만큼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 사람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썼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는 데는 극도로 인색했다. 침묵에 가까운 이런 정치적 태도 때문에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계에서 그의 사상은 줄곧 의심의 대상이 됐다. 1970년대 이래 미국에서 그의 ‘해체주의’가 유행하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도대체 ‘해체’를 통해 뭘 하자는 건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말하자면, 이런 의심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된 책이다. 이 책을 전후로 하여 죽는 순간까지, 그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정치적·실천적 발언을 쏟아냈다. 이 시기를 데리다의 ‘후기’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후기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그 대표성에는 화제성도 포함된다. 데리다의 저작 가운데 이 책만큼 널리 화제가 된 책도 없다. 프랑스에서 이 책의 내용을 각색해 연극으로 공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10여 년 전에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으나, 데리다의 복잡한 논리와 어려운 용어들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진태원(리옹 고등사범학교 박사 후 연구원)씨가 꼼꼼한 작업 끝에 이 책을 새롭게 번역했다. 풍부한 옮긴이 주석이 달린 이 번역본은 데리다의 어지러운 생각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령’에 관한 책이다. 좀더 부연하면,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주위를 떠도는 유령에 관한 책이다. 유령이라는 모호한 존재는 근대 철학을 포함한 근대 학문에서는 금기 혹은 축출의 대상이었다. 명료성을 추구해야 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유령이 들어앉을 곳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철학서는 예외적인 책이다. 옮긴이의 감탄 섞인 표현은 이 예외성을 잘 보여준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하여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 자크 데리다
이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출간 시기와도 관련이 있다. 1993년이면,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념을 따라 건설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였다. 여기저기서 마르크스주의의 파산 선고가 잇따랐다. 데리다가 이 책에서 특별히 지목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역사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이다. 1992년 출간된 후쿠야마의 책은 철학적 저작치고는 전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관에 집어넣어 뚜껑에 못을 박듯,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궁극적 승리를 선언했다. 역사가 이 시점에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득의양양하게 단언했다.

이 책이 왜 그토록 열광적으로 팔려나갔을까? 데리다는 그 열광이 일종의 ‘푸닥거리’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몰아내 영원히 매장해 버리려는 집단적 주술행위가 이 책에 쏟아진 열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그런 열광이야말로 이 현존 체제의 취약함·허술함을 역으로 증명하는 일일 뿐이다. 푸닥거리는 이 체제가 실업·빈곤·증오·전쟁을 안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체제임을 부인하려는 안간힘일 뿐이다. 그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유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데리다가 더 공들여 해부하는 것은 ‘마르크스 안에 있는 유령’이다. 마르크스에게 유령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유령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첫 줄에서 불러들인 그 유령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때의 유령은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유령이며, 곧 도래해 현실이 될 유령이다.

다른 한 유령은 마르크스가 축출하려고 애썼던 유령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유령적 존재들을 언급하는데,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 화폐나 상품이 그런 존재들이다. 마르크스는 이 유령적 존재들을 몰아낼 때 참다운 자유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이런 생각은 순진하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데리다는 〈공산당 선언〉에서 등장한 유령이야말로 유령다운 유령이라고 본다. 그런 유령은 체제의 모순 위에서 출몰하며 체제 너머를 환기시킨다. 유령은 일종의 메시아다.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한 마르크스는 되돌아온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자크 데리다 지음·진태원 옮김/400쪽·1만9000원·이제이북스
◇ 출처 : 동아일보 2007/10/0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4년 타계한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인용도 많이 된 책이다. 언어유희에 가까운 데리다의 난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 제목 저자 내용 등 네 가지의 어긋남(out of joint)에서 발생한다.

이 책이 ‘햄릿’의 유명한 문구, ‘시간은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에 대한 심오한 독해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첫 번째 불일치는 그 반시대성에서 발생한다. 이 책은 1993년에 출간됐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가 선언된 시점이다. 구체적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종언’으로 찬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출간된 지 1년 뒤다. 그런 시점에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회귀할 것임을 주장했다.

두 번째는 저자와 주제의 불협화음이다. 데리다는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사회에 있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저작을 다룬 적이 없었다. 그의 주된 활동 영역은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와 재구성이란 ‘이론’에 있었지 ‘실천’에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돌연 마르크스를 들고 나오며 ‘정의’와 ‘책임’의 문제를 제기했다.

세 번째는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와 유령, 그것도 복수의 유령을 병치한 제목의 충돌이다. 이 제목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 공산당선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거기서 유령은 일종의 반어법으로 사용된 것이었고 그것도 ‘공산주의’라는 단 하나의 유령만 지칭했다.

네 번째는 그처럼 과학성을 강조해 온 마르크스주의를 역설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넘나드는 유령적 실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독특한 ‘유령론(hantologie)’으로 해체 및 재구성해 낸 파격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도구로서, 억압과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해방운동의 대명사로서 어디선가 불러 대는 목소리가 있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망령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올 것이란 논리가 그것이다. 그래서 헤겔이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보다 셰익스피어가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이 더 강조된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이 아닌 ‘운동’이며 정교한 ‘과학’보다 메시아주의에 기초한 ‘종교’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 책은 가상과 환영, 유령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과학적 이론을 표방해 온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이상인 그것을/더 이상 하나 아닌 그것을’로 끝나는 서장의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그런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전복을 함축한다.

이 책은 1996년 한 차례 번역됐으나 절판됐다. 국내에서 번역된 데리다 저술에 대한 비판을 펼치던 진태원 박사가 직접 나선 이 책의 미덕은 데리다 철학의 까다로운 개념과 용어를 세심하게 안내한 점이다. 이를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으로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용어해설’부터 일독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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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에겐 '대중들의 공포'를 느끼기 전에 책 두께 자체가 공포다. 그런데 목차를 쭈욱~ 훑어봤을 때, 예전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논문들이 상당수 중복되어 있는 것 같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2부의 "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 "피히테와 내적 경계 : <독일 민족에게 고함>에 관하여", "맑스라는 이름의 쟈코뱅", "부록1 - 푸코와 맑스 : 유명론이라는 쟁점", "부록2 - 파시즘, 정신분석학, 프로이트-맑스주의"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알튀세르, 발리바르의 이전의 책이나, 90년대 발간되던 계간지 <이론>에 수록되어 있는 논문들이다. 특히, "맑스라는 이름의 쟈코뱅"은 루이 알튀세르가 죽은 직후 윤소영 교수가 엮은 <루이 알튀세르>에 실려 있는 논문이다.

그렇다면 발표된 지 25년이 지난 논문("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을 비롯하여 20년 가까이 된 논문("맑스라는 이름의 쟈코뱅"-1989, "푸코와 맑스:유명론이라는 쟁점"-1988)들도 들어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이미 번역되어 출간된 논문이.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전의 글들은 대부분 윤소영 선생의 번역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의 주번역자는 서관모/최원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새롭게 엮어져 나오면서 재번역된 게 아닌가 싶다. 책 제목은 조금은 '선정적'인 것 같다.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만을 따로 다루는 게 아니라면, 부제로 붙은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이 실질적 제목이 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아래 서평은 경향신문에 실린 걸 옮겨 놓는다.



[책@세상. 깊이읽기]폭력을 넘어서는 법 ‘시민인륜’

출처 : 경향신문(www.khan.co.kr) 2007년 09월 21일 14:47:57

▲ 대중들의 공포…에티엔 발리바르|도서출판 b



아포리아(aporia)는 논리적 궁지를 뜻한다. ‘대중들의 공포’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가 아포리아이다. 발리바르의 친구이자 스피노자 전문가인 마트롱은 언젠가 발리바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려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들 개념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민주주의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이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발리바르의 철학하는 핵심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전제하거나 새롭게 구축하려 하지 않고, 통일적인 체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낸다.

아포리아를 찾는 과정은 사유가 어디까지 근본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도정이다. 먼저 어떤 사유가 닦아놓은 논리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고, 그 논리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며, 또한 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근본 전제와 가설을 복기해야 한다. 여기에 이를 때 비로소 아포리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대중들의 공포’는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근본적인 사유의 도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성과물이다.

이 책의 문제 틀은 ‘대중들의 공포’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발리바르가 고민하는 철학의 대상은 계급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이는 경제주의적 계급론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대중들은 과학적인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진리와 허구가 혼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의 갈등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틀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구를 함축한다. 여기서 ‘대중(mass)’이 아니라 ‘대중들(masses)’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는 대중들이 단일한 주체(단수)가 아니라 복합적인 양면성(복수)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들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말이 ‘대중들의 공포’이다.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이 용어는 대중들이 느끼는, 그리고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가리킨다. 이는 1차적으로는 민중의 능동성과 진보성을 신화화했던 과거 민중론이 지닌 한계와 유사하게 대중들의 일면적인 봉기성만을 특권화하는 논의에 대한 비판이다. 대중들은 능동적인 만큼 수동적이고, 진보적인 만큼 보수적인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함의는 대중들의 역량이 갖는 잠재적 폭력성에 관한 것이다. 대중들의 힘은 때로 폭력과 구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공포에 느끼고 이를 제거하려는 대중들은 오히려 대항폭력을 통해 대중들에 대한 가공할 공포를 초래하여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붕괴로 나아갈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런 양면적인 긴장을 전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반폭력 정치이다. 반폭력 정치에 대한 사고는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시민인륜(civilite) 개념으로 정교해진다.

시민인륜은 ‘시민권’과 ‘사적이고 공적인 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결합한 신조어이다. 이 개념은 대중들의 폭력이 동일성(identity)과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국가) 내부에서 증오와 잔혹으로 나아가는 동일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한에서 해방의 정치나 변혁의 정치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물론 이상의 간략한 정리는 전체적인 문제 틀에 불과하며, 이 책에는 훨씬 풍부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유가 갖는 전복적인 힘을 예증한다. ‘대중들의 공포’는 구태의연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네그리,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과 쟁점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며, 무엇보다 빈곤과 잔혹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돌파하려는 이론적 실천이다. 이 두툼한 책이 옮긴 이들(최원·서관모)의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

〈김정한|서강정치철학연구회 회원


용어 번역에 대하여: '시민인륜'과 '의념'/서관모
저자 서문
수록 논문 출전

1부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인륜
정치의 자율성: 해방
정치의 타율성: 변혁
타율성의 타율성: 시민인륜의 문제

2부 근대성들: 인민, 국가, 혁명
스피노자, 반(反)오웰: 대중들의 공포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 : 루소와 칸트
피히테와 내적 경계 : <독일 민족에게 고함>에 관하여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3부 맑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동요
1 관념론의 교대군
2 세계관들
3 붙잡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4 정치와 진리

부록1 - 푸코와 맑스 : 유명론이라는 쟁점
부록2 - 파시즘, 정신분석학, 프로이트-맑스주의

4부 또 다른 장면 : 폭력, 경계, 보편성
유럽적 인종주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인종주의 : 여전히 보편주의인가?
모호한 동일성들
경계란 무엇인가?
유럽의 경계들
폭력: 이상성과 잔혹

5부 보편적인 것들
보편적인 것들
[역자해제]이론의 전화, 정치의 전화 : 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로/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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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군가 날 감시하고 있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유능한 시험 감독관은 대개 교실 뒷편에 선다. 가끔 헛기침이나 발소리를 효과음으로 덧붙이면 효과는 훨씬 커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는 학생들을 볼 수 있지만 학생들은 그를 볼 수 없다.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이상 학생들은 시험 시간 내내 '바른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처럼 단순한 감시의 원리는 19세기 초 제레미 벤덤이 설계한 판옵티콘(원형감시장치)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왕없는 권력'은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발견했다면, 벤덤이 찾아낸 것은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벤덤이 구상한 것은 집단적 격리와 통제가 필요한 영역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원리였다. 그는 판옵티콘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부류든 감시되어야 할 사람들을 수용하는 사회시설, 특히 감화원, 감옥, 공장, 작업장, 구빈원, 제작소, 정신병원, 검역소, 병원, 학교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 원리."

판옵티콘은 사회 전반의 조직 원리였다는 점에서 벤덤식 유토피아였다.

판옵티콘은 빛과 시선을 교묘하게 배치한다. 벤덤의 계획은 중앙의 감시탑 주변에 독방들로 채워진 원형의 건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중앙의 감시탑에는 감시자 한 명을 배치하고 독방 안에는 광인이나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누구든지 한사람씩 감금한다. 중요한 것은 빛과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중앙의 감시자는 독방을 볼 수 있지만, 독방에 감금된 자는 결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감금된 자는 빛에 노출되지만 감시자는 어둠 속에 숨는다.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각자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할 때 판옵티콘의 효과는 정점에 달한다.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눈'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동료가 감시자다." 이것이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하는 규율 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규율이 존재하는 어떤 집단에서도 시선의 권력은 작동한다. 군대와 학교, 직장, 심지어는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안에는 늘 우리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다.

'자율'이 준법의 동의어로 쓰일 때, 그것은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결과에 가깝다. 가령 경찰 대신 교통법규 위반자를 감시하는 '카파라치'의 효과가 그것이다. 그들의 사진기는 경찰의 시선을 무한대로 복제한다. 제복을 걸치지 않은 감시자는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 덕분에 운전자는 곳곳에서 감시자의 존재를 실감한다. 이 제도의 진정한 효과는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자율'은 자발적 복종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감옥에 대한 책이 아니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한없이 촘촘한 권력의 시선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권력을 자유의 억압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푸코는 말한다. '보이지 않는 눈'은 개인들에게 일일이 번호를 부여하고 관찰하며 세심히 기록한다. 훈련과 평가가 뒤따르고 규준에 못미치는 자에게는 처벌이 가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길들여진 신체는 개인과 집단의 생산적 능력을 증대시킨다.

대신 권력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뺀다. 자기 안에서 감시자의 눈빛을 느끼는 자의 복종은 체념을 동반한다. 신체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지만 '쓸모 없는' 힘은 제거되는 것이다.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주어진 질서의 밖에서 종종 겪에 되는 당혹감을 생각해 보라. 혹은 명예퇴직한 은행원과 제대 군인이 맞닥뜨려야 할 무력감 따위들!

푸코는 낡은 문서 창고에서 자질구레한 삶의 조각들을 끄집어 내 권력의 격자 위에 펼쳐 놓는다. 권력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 작동하며, 일상은 낱낱히 감시의 시선에 노출된다. 근대의 개인은 권력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그물코다. 그래서 권력의 그물망이라는 푸코의 비유는 섬뜩하다. 지나치게 비관적이거나 무기력한 결론인가? 그러나 저항은 이 책의 숨겨진 주제다. 들뢰즈의 표현처럼 『감시와 처벌』은 "전투의 흙먼지로 술렁인다." 이 책이 돌연 "멀리서 들려오는 전투의 아우성"으로 끝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최태원, 「지금 누군가 날 감시하고 있다」,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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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람돌이의 서재"에서 CCTV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접했다. 이 CCTV를 통해 감시 문제는 단순하게 사생활 침해니 아니니 하는 차원으로 접근해서 인권의 문제로 나아가는 게 가장 일반적인 접근일 것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그 글을 쓴 바람돌이 역시 자신이 어느 정도는 거부하는 CCTV와 같은 '일상적인 감시자의 시선'이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교사라는 그의 신분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그도 자신이 거부하는 감시자의 시선을 일상적으로 발휘할 수밖에 없는 이 기묘한 이중성.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교실의 배치에서 '교단'이란 게 아직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피감시자보다 높은 위치에 서는 교단의 위치. 하지만 사실 이것은 벤덤의 판옵티콘과 같이 눈에 보이는 감시자의 시선이기에 즉자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통제 메카니즘이다. 바람돌이의 에피소드에서 CCTV의 존재라는 말 앞에서 스스로 자수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것은 이미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통제 메카니즘'에 길들여진 주체에 다름 아니다. 아이들은 이미 CCTV라는 권력 앞에 게겨봤자 자기한테 더 큰 손해가 돌아올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자수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감시자의 시선을 스스로 내면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면화한 감시자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분석한 책이 바로 <감시와 처벌>이다.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의 분석을 통해 우리가 흔히들 우리 행동의 규범적 준거틀로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CCTV라는 존재 앞에 '알아서 기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라).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성의 역사1 :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자그마한 인내력만 담보된다면 <감시와 처벌>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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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궁금증에 대한 답변- 요즘은 교탁 없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키작은 사람은 슬퍼요.
학교에서 교사의 역할은 감시자 맞죠? 공부 하나 안하나 청소 하나 안하나 사고 치나 안치나 끊임없이 감시하고 협박하고 또 때로는 처벌하는.... 가끔은 이게 뭐하는건가 싶을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점순이 2007-09-19 16:37   좋아요 0 | URL
가르치는 위치에서 권력을 포기하면 좀 많이 힘들어지지~ 학원은 학교와 또 달라서 강사라고 해봤자 그렇게 큰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는 진짜 많은 경험과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가끔은 체벌이나 어른이라는 권위에 기대 아이들로부터 자기가 필요한 거리를 충분히 확보한 채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금 부러울 때도 있지. 하지만 학생들과 눈높이를 비교적 맞추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지내는 학원이 학교보다 낫지 않나 싶을 때도 가끔은 있다. 최소한 수업을 들어오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는 충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해서 골치아플 때도 있지만..^^;

내오랜꿈 2007-09-20 09:49   좋아요 0 | URL
뭐, 그런 감시자/피감시자는 괜찮지 않나?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고 서로를 이겨낼(=속여낼) 궁리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각자 서로 기술이 느는 것 아닌가?

내가 문제시하는 건 그런 즉자적 감시/처벌은 아니지... 네 직업이니까, 좀 즐겨도 괜찮을 거 같애. 그 속에서 감시받는 아이들의 재능도 발전하는 것이니까...^^

누에 2007-09-1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런 감시체제에서 탈출하는 법에 대해 쓴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

내오랜꿈 2007-09-20 09:50   좋아요 0 | URL
후후. 안녕하세요... 글쎄요. 탈출하는 법은 책이 아니라 생활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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