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행복과 우리의 미래

'어린 시절은 어른 시절을 위한 준비기일 뿐이다'라는 생각은 철저하게 어른들의 관점이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하고 돕는 사람이지 그들을 구속하고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김규항
출처 : <웹진 인권(www.humanrights.go.kr)> 2007 11*12 (통권 47호)


박정희 씨가 독재를 한 건 인민을 괴롭히기 위해서였을까? 천만에, 가난한 인민이 잘살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노래와 영화와 문학을 검열하고 금지했던 건 인민의 문화적 권리를 빼앗기 위해서였을까? 천만에, 순진한 인민을 해로운 문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기계가 아니라서 위하는 마음이 구속되고, 보호하려는 행동이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 섬세한 맥락을 잊을 때 우리는 인권을 포기하게 되고 파시즘에 문을 열어주게 된다.

오늘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은 영락없이 박정희와 닮았다. 그들은 아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를 감옥의 수인처럼 키우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순수하고 밝은 것이 아닌 모든 것을 금지한다. 박정희를 매우 싫어할 뿐 아니라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과 싸운 제 청년 시절에 굉장한 자부를 가지는 그들이 제 아이에게 박정희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절차로 보는가, 분배나 계층 같은 좀더 구조적인 차원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받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개인의 자유가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의 강제가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느리고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평균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이들은 경쟁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과거식 어린이 탄압,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가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교육’ 그리고 ‘아이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훨씬 더 강도 높은 어린이 탄압은 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좌우도 없고 상하도 없다. 세계 어디에도 모든 아이들의 자유가 모든 어른의 합의에 의해 이 정도로 구속되는 예는 없다. 이것은 매우 가공할 인권탄압이다.

우리 사회가 IMF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무한경쟁 체제로 본격 진입하면서 아이들은 경쟁의 감옥으로 내몰렸다. 경쟁의 감옥에서 중요한 건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오로지 경쟁력이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옛날엔 아무리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 하나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보다 약하고 불쌍한 동무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인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다. 가르친다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이면 끝이다. 동무는 곧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존중하라는 말은 패배를 준비하라는 말과 같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가 있는 집에 가보면 아이들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윗사람을 무조건 공경하는 봉건적인 덕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종종 공격적이다. 지나치다 싶어도 부모들은 별 도리가 없다. 오늘 한국의 아이와 부모는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사 문제가 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과도한 훈련에 심신이 지친 어린 선수에게 그런 부분까지 요구한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그렇게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잘못 자라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도리 없이 경쟁에만 열중한다.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지 이 무한경쟁의 바다에서 제 아이가 도태될까 노심초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진 않더라도 아이들을 이렇게 키울 때 우리의 미래가 어떨지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이렇게 키운 아이들이 자라 불과 10년 후, 늦어도 20년 후 우리 사회가 이기적이고 돈과 소비적 가치관으로 뭉친 인간들로 가득 차는 장면을 상상해야 한다.

교육과 관련하여 우리에겐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이 있다. 첫째는 인생의 한 시기가 다른 소중한 시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 말하자면, 어린 시절은 어른 시절을 위한 준비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어른들의 관점이다. 누구에게나 지금이 중요하니 어른들은 지금에 미친 영향만을 기준으로 어린 시절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어른도 자기의 어린 시절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인생은 중요한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시기가 다 소중하고 중요하다. 둘째는 내 가치관을 기준으로 아이의 인생을 구성하려 하는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하고 돕는 사람이지 자기 가치관을 기준으로 그들을 구속해가면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근심하는 부모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두가 제 아이의 미래만 생각하며 분열한다면, 이 가공할 인권탄압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부모와 성인들이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보다 중요하며 심각한 문제라는 걸 깊이 되새겨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성인들이 동병상련의 정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의 미래도 행복하지 않다.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행하는 <웹진 인권> 2007 11*12 호에 실린 글입니다. 아직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려지지 않은 글이기에 업데이트 될 때까지 스크랩이나 인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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