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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찾은 금전산

순리적으로 흘러야 할 일상이지만, 유독 심하게 앓았던 '일상 탈출'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으로는 근 10년만에 산에 오를 생각에 내심 설레었던 주말이다. 계획하고 있던 일정이었음에도 때 없이 도사리고 있던 복병은 부산에서 충동적으로 날아든 한 무리의 친구들과 그 가족이었다. 다수가 설왕설래 하는 가운데 여수에서 근거리인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 제암산 갈대숲 - 만만한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결국 최종 목적지로 천년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함께 품고 있는 조계산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승주IC를 빠져 나와 선암사 들어가는 2차선 도로의 초입을 지나니 얼핏 단풍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플랭카드가 보인다.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좁은 도로에 차량 행렬이 긴 꼬리를 물고 있었다. 한참 가다서다를 반복하던 중 선두의 남편이 운전대를 나에게 맡기고 주차장 상황을 살피러 간 사이, 주목받지 못한 잎 진 감나무 가로수에 올망졸망 달린 유난스레 작은 감들이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수원에서부터 신고 온 새 등산화까지 생뚱맞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 일었다. 결국 예상대로 주차장까지 다녀온 남편의 가위표 손짓에 차를 돌렸고, 아이들을 이끌고 산행후 낙안읍성에서 합류하기로 한 팀을 따라 호수를 끼고 도는데, 산빛 물빛이 너무 고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자꾸만 건들거린다.

막상 낙안읍성 주차장에 이르니, 등산에의 미련을 못 버린 일행은 일제히 산이름도 모른 채 바위들이 올망졸망 박혀 있고 그리 험해 보이지 않는 뒷산을 올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이미 산행을 포기하여 옷과 신발을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후였지만, 일행의 성화로 다시 채비를 서둘렀다.



낙안온천 앞에 주차를 하고 등산로 입구를 찾아 신발끈을 재차 고쳐 묶으며 뗀 첫걸음이 사뭇 활기차다. 아침부터 우왕좌왕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무렵이었고, 남들 하산 할 즈음 오른 길이지만 따스한 날씨는 가벼운 옷차림에도 금방 몸에 땀이 배였다. 당당히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건강함이 새삼 감사한 순간이다.

예전에 엄청 폼 재고 다녔던 이력을 살려, 산 중턱까지는 일정한 폭으로 바삐 가는 남자들의 보무를 잘 맞추었지만 그기까지였다. 숨가쁨의 강도가 심해짐에 따라 걸음이 차츰 느려지니, 어느 순간 앞서 가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일행 중 뒤처져 오는 부부가 있었으니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스럽지만 갈수록 힘겹다. 자연스레 몸이 낮춰지며 땅만 보고 걷게 되고, 발끝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성큼 앞서간 남편에게 같은 페이스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란 생각을 했다.



이왕 뒤처진 걸음 위아래를 살피기 시작한다. 정상 가까이 병풍 같은 벼랑을 올려다 보는 재미가 나쁘지 않았고, 발 아래에는 옹기종기 낙안읍성의 초가들과 낙안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혼자 가는 내가 다소 안스러웠던지 하산하던 남자분이 귤 두 개와 오이 하나가 든 봉지를 손에 들려준다. 고맙기도 하지...



경사각이 있는 소나무숲 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았다. 이곳이 극락으로 가는 관문이기라도 하듯 머리를 낮추고 이 문을 통과하니, 제법 운치 있는 좁은 돌계단 길이다. 흠씬 땀을 흘리고 난 후라 시원한 바람에 현기증을 느끼며 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더니, 작은 산장 같은 느낌의 절집이 나타났다. 바로 '금강암' 이다. 부처님께 인사 드리는 것보다 일행을 찾는 게 급하여, 왼편 바위를 살짝 돌았더니 확 트인 시야가 옹골차다.



자연석불인 줄도 모르고(?) 바위에 기댄 남편의 '고생했다'란 인사를 받으며, 땀도 식히고 자랑겸 손에 쥔 봉다리를 풀려는 찰나, 작대기를 들고 나타나신 스님. 그의 첫 마디가 불경스럽게도 금지구역에 들어간 남편에게 하는 꾸지람이다. 암자에 혼자 기거하시는 진성스님은 대화가 깊어질수록 겉모습과는 다르게 스님 같지 않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대구 파계사에 적을 두시다가 이곳에 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단다. 불청객인 우리 일행에 대한 몇 가지의 질문과 이 산 주변 정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선암사와의 불편한 관계를 풀어내신다.



간밤에 보성의 대한다원 제2농장의 매점에서 구입한 녹차 막걸리 한 통을 얼려서 베낭에 넣고 왔는데, 이 또한 부지런한 남편 덕이다. 안주로는 아침에 해장국을 먹으며 덜어 온 김치 조각. 혹시나 하여 스님께 잔을 권했더니,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면 서운했을 만큼 시원하게 목을 축이신다.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등산객이 단감을 가지고 와서 막걸리 한 잔을 청했다. 땀 흘리고 난 후 소 잔등 같이 부드러운 주변 산들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들이키는 한 잔 막걸리의 맛을 음미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스님과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을 잊고 있었지만 하산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스님은 라면을 끓여줄테니 먹고 가라고 몇 번을 재촉하신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애써 자리를 터니 제법 아쉽다. 금강암까지 다시 걸어나오며, 목이라도 축이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서 좁은 마당에 들어서니, 물이 귀하여 반나절을 받았다는 흰 생수통이 놓여 있다. '아, 스님! 저 바위 아무리 봐도 석불 같지 않은데...' 란 의문을 전하니 다시 가서 자세히 보라고 한다. 이조차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오를 때와는 달리 달리 하산하는 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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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6



토요일. 서울에서 여수까지 장거리를 달려온 피로함에도 반가운 마음에 걸친 술 한잔이 길어지는 바람에 원래 계획에 있던 여수의 향일암 일출은 일요일 아침에 시간이 되면 가자는, 다소 '무책임한' 합의를 한 덕분에 몇 시간 눈 붙이고 콩나물 해장국으로 든든한 아침까지 챙겨먹은 후 화순땅으로 출발했다. 띄엄띄엄 자리해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치며 파란 들녁이 계속 이어질 것 같던 길 끝에 불현듯 닿은 쌍봉사 주차장.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웬만한 곳에서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을 사찰 주변의 그 흔한 음식점이나 기념품 가게 하나없이 한산한 곳에 자리한 쌍봉사. 마치 어느 마을 고택에라도 들어온 줄 착각할 만큼 산속으로 드는 맛이 거의 없는지라 초행길인 나는 '정말 쌍봉사야?' 며 재차 남편에게 확인 절차를 가졌다. 똑같은 생활의 반복인 자폐적인 일상에서 벗어난 여유로움으로 일행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능수버들 늘어진 연못 주변을 서성거리다 해탈문으로 들어섰다.



앞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몇 개 밖에 없다는 3층 목탑양식의 건물이 이색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국보였던 이 대웅전은 안타깝게도 1984년에 화재로 불타버리고, 기록에 따라 복원한 것이라 한다. 소실되기 전의 목조건물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목탑의 전성기였던 수십 세기 전 옛맛을 유추해봄직 하다. 비불자들은 구경꾼으로 마당을 서성거리는데, 불자인 남편 친구는 아이들과 함께 곧장 부처님께 직행하는 신실한 모습을 보였다.^^



제법 깊은 산골에 자리한 절집이라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진압이 제대로 안 되어 대웅전 건물이 거의 타들어갈 무렵 근처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불속에서 구해낸 부처님(가운데)을 보니, 저 무거운 걸 어떻게 업고 나왔을지 신기하다. 신도들이 성금을 모아 금으로 옷을 입혀 안치한 지금의 모습을 보고 또 봐도 佛者는 아니지만 佛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좌우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의 미소는 그 어떤 것도 녹여낼 만큼 넉넉하고 매력적이었다.



대웅전 뒤 왼편으로 철감선사의 부도탑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자생 차나무들과 대숲에서 죽순이 쑥쑥 자라고 있어 짙어진 신록과 함께 싱그러움을 더해주지만, 바람 한자락이 아쉬울 만큼 무더위에 지친 약자의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아이답게 팔팔한 둘째 녀석은 엄마의 손을 이끌며 걸음을 재촉하는 기특함을 보이고, 몇번의 동행으로 지구력이 다소 떨어짐을 확인한 첫째 녀석은 제일 힘겨워하며 늦장을 부린다. 공짜로 국보를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음인가. 윗쪽엔 포크레인이 한참 길을 정비중이라 신발은 이내 먼지를 뒤집어썼다.



<철감선사 부도비>는 비신은 없어졌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거북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었으며 오른쪽 앞발은 막 세상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이려는 중이고, 나머지 발은 땅을 굳게 디뎌 역동성이 느껴지는 재밌는 형상이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기법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작이라 하는데, 구름 속에서 두 용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현란하게 보인다.



사진의 오른쪽에서 보이듯 지붕돌 추녀가 조금 상해 있긴 하지만, 석조문화재의 백미로 꼽히는 <철감선사 부도>는 화려하고 참 잘 생겼다. 연한 석재인 대리석으로 만든 로댕의 작품보다 오히려 조각하기 어려운 이 화강암으로 만든 우리 부도를 보니,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앞을 다투는 지리산 연곡사 부도나 여주 고달사지 부도와 함께 자유자재로 돌을 다루었던 이름모를 석공의 섬세함을 절로 예찬하고 싶어진다.

기단 윗 부분에 상반신은 인간의 모양,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를 확대하여 찍었었는데, 사진 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삭제되었다. 한참 부도 앞에서 머물고 있으니 일꾼인지 공양주인지 주변의 풀을 베고 있던 할머니께서 봉지의 과일을 깍아 먹으라고 재촉 하셨지만, 아침 먹은 지 얼마되지 않았고 새참으로 준비하신 먹거리에 손대기가 죄송하여 마음만 흠뻑 받고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엉경퀴가 아닐까 싶은데, 부도를 보고 내려오면서 눈에 들어온 들꽃이다. 대웅전 앞마당의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놓여있어 잠시 땀을 식히는 사이, 운전사인 남편이 시동을 걸어 차안을 시원하게 했음에도 일행들이 오지 않으니 담 너머로 살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지만 운주사 가는 길에 잠시 들린 절집에서 의외의 많은 것들을 본 흡족함을 안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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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마지막 주말에 주왕산을 거쳐 울진 백암온천을 돌아보는 코스를 잡았다. 서울에서 친구 부부를 태워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죽령터널을 지나니 풍기, 영주, 안동, 영양, 청양 등의 낯익은 지명이 줄줄이 엮여온다. 결혼해서 처음 구미에 살던 그 시절, 주말이면 어김없이 돌아다녓던 곳들이다. 곧게 뻗은 심심한 고속도로를 벗어나 속도를 줄이고 꼬불꼬불 자연에 순응한 길을 달려 찾은 주왕산 달기약수터.



그저그런 달기백숙을 먹고 백암온천을 찾아가는 길에 영양 봉감 마을의 '5층 모전석탑'을 찾았다. 위풍당당한 품새지만 강물을 끼고 폐사지에 덩그라니 저 혼자 외롭겠다 싶었는데, 살짝 고개를 돌리니 구형 안테나와 옆으로 나란히 하고 있다. 저렇게 허접해보여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나름대로 유명한 탑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 사진을 찍고 돌아나오는 마을길. 어느 댁 담장에서 금방이라도 툭 터질듯 새빨갛게 영근 앵두가 우리를 유혹한다. 누가 볼새라 우루루 달려가 한움큼씩 서리를 하고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다...-.-...

2007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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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 온 지 벌써 4년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내가 여수에 있다는 것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 여수를 방문한 사람도 여럿 된다. 손님들이 올 경우 대부분 주목적은 남도의 풍부한 제철 먹거리 탐방이지만 볼거리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기에 처음 여수를 찾는 방문자에게는 오밀조밀한 남해바다의 동선을 끼고 돌아 여수 시내의 향일암이나 돌산공원에서 바라보는 돌산대교 야경을 일순위로 안내하곤 한다. 일정이 좀 넉넉한 경우에는 보성차밭을 경유하여, 조계산 선암사나 송광사, 벌교, 고흥, 순천만 갈대밭을 둘러보는 코스를 선택하는 게 공식화되다시피 한다. 그래서 여수 시내의 유적지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방학을 맞은 대학 동아리 후배 부부 2팀이 지난 1월 중순경 여수에 놀러왔었다. 부부가 모두 학교 선생인지라 이들에게 방학은 그야말로 보통의 직장인들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날들의 연속이다. 이들 부부 가운데 3명이 역사 선생인지라 진남관을 가자고 하니 당연히 좋다고 하여 들리게 된 진남관. 다른 여행객들은 가보자고 하면 "그기 뭔데?" 하기 일쑤여서 쉽게 가볼 수 없었던 곳이기도 하다.
 

 
정면을 들어서니 정면 15칸 측면 5칸, 현존하는 지방 관아로는 제일 크다는 팔작지붕의 장대함이 우선 나의 시선을 압도한다. 세상에나, 저 기둥 굵기 좀 보소. "서울에서 비원에서 본 기둥 말고는 아직 저런 굵기의 기둥을 본 적이 없다. 거의 궁궐 수준 아냐?" 라고 후배에게 물으니, 역사 선생이 이야기 하기를 이 정도면 궁궐 수준이 맞단다. 자기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은 처음 본단다.
 

 


 
그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니 거침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먼저 저 기둥은 '적송'이라는 종류의 소나무란다. 그래서 내가, '아니, 도대체 저 정도 굵기의 소나무를 구할려면 우리 나라를 온통 다 뒤져도 힘든 거 아냐?' 라고 하니, 몇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야산의 적송들이 저 정도 자라는 것은 많았는데, 저 적송들이 열성유전 하면서 지금처럼 볼품없는 나무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좋은 나무들은 자꾸 베어져 목재로 쓰였을 것이고, 안 좋은 나무들만 살아남아 씨를 퍼뜨리니 자연 열성 유전자들이 퍼지게 되었음을...


 
 


 
역사 선생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벌써 자기들만의 놀이를 찾아 한참 게임을 즐기고 있다. 역시 아이들은 너른 공간에 풀어 놓기만 하면 저그들이 알아서 잘도 놀이를 만든다.
 

 


 


 
겨울 같지 않은 어느 겨울날의 오후, 한가로이 앉아 여유를 즐긴 진남관에서의 1시간 30분. 여행은 차를 타고 멋있는 풍경만 찾아 돌아다니는 게 아님을 이곳에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2007.01.14
 
여수에서
 
 

고래의꿈 - Bobb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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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와온 해변의 해넘이 정경




 
지난 토요일, 순천만에 있는 "와온마을"에 갔었다. 이 인근에 있는 순천만 대대포구 일대는 이제 전국적으로 알려진 갈대밭 군락지이자, S자 코스 너머로 보이는 해넘이 정경으로 유명해져 사람들 발길로 북새통을 이룬다. 4년 전에 처음 찾아갔을 땐 그나마 한적하니 보기 좋았는데, 이젠 무슨 시골 장터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한적한 갯벌 사이로 일몰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곳이 바로 이 와온해변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부산에서 모처럼 여수로 오겠다는 후배 부부들을 데리고 해넘이 시간이 맞춰 와온해변에 갔건만, 이날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해넘이를 잘 보라고 순천시에서 나름대로 공원처럼 꾸며 놓은 높다란 곳이 있건만 귀를 스치는 바람은 잠시라도 그곳에 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해넘이는 보고 가자며 바람막이 할 곳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기를 30여 분. 그 사이 철 모르는 한 후배의 딸 아이 두 녀석만 신이 나서 추운 줄도 모른 채 콧물을 흘리며 뛰어다니고 있다.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는지 올해 들어와 첫 일몰을 볼 수 있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마지막 숨을 쉬듯 타는 듯한 광선을 내뿜는 해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추운 주말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역시,
해넘이는 아무리 쳐다보아도 무엇인가 아쉬움을 남긴다.
 
 
 
2007년 1월 13일
 
여수에서
 
 
 

꿈꾸는 백마강 - LADIES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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