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6일 광주영화영상인연대와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공동 주최로 열린 <무한텍스트로서의 광주> 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당분간 어디에 실을 생각이 없는, 단상의 모음에 불과한 글이지만,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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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구원, 또는 애도의 유령론을 위하여
머리말
나는 오늘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해, 그리고 구원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구원은 아마도 12.3 친위쿠데타 이후 4월 4일 헌법재판소 탄핵 판결에 이르기까지 4달 동안 전개된 탄핵 정국에서, 그리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내란 정국에서 가장 널리 회자된 단어들일 터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비롯된 이 세 개의 단어,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쿠데타와 탄핵, 내란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사고틀이 되었고, 또한 오늘 모임의 화두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번 내란 정국의 쉬볼렛(shibboleth)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오늘 질문해보고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간단하면서도 꽤 복잡한 질문들이다. 산 자란 누구 또는 무엇인가? 죽은 자란 누구 또는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은 또한 어떤 것인가? 아마도 이미 자명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이 단어들을 약간 낯설게 만들어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12.3 친위쿠데타와 5.18에 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오늘 내 이야기의 요지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5.18과 12.3,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네 가지 쟁점
한강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이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두 개의 단어를 대비시킬 때 떠올리는 것은 5.18 광주항쟁과 이번 탄핵 정국의 관계일 것이다. 사실 민주당 대표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인 이재명 씨 스스로 양자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아주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45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두 사건 모두 친위쿠데타로 촉발이 되었으며, 총칼로 무장한 계엄 군인들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 용감한 시민들의 투쟁이 있었는데, 그 투쟁은 기본적으로 비폭력을 기반으로 한 투쟁이었고, 투쟁의 명분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두 사건의 와중에는 시민들 서로 간의 돌봄의 연대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두 사건의 공통점은 네 가지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1) 두 사건은 민주주의적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소수의 권력자들의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쿠데타, 따라서 법적으로 내란이라고 불릴 만한 성격을 지닌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2.12 쿠데타의 주역이었고 광주 학살의 주범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내란죄로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12.3 쿠데타의 주역인 윤석열과 김용현 등도 내란죄로 기소되었고, 윤석열은 4월 4일 헌법재판소 탄핵 판결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2) 5.18 광주항쟁이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국내외에서 널리 인정받는 것은 계엄군의 극단적 폭력에 맞서 폭력적인 대항투쟁을 전개하기보다 원칙적으로 비폭력적인 투쟁, 하지만 죽음을 불사한 “공격적인 비폭력의 실천”을 전개했고, 이로써 완벽한 윤리적ㆍ정치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가정일 수 있지만, 만약 5.18 광주항쟁에서 시민군이 강력한 군사적 힘으로 무장한 가운데, 계엄군과 맞서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투쟁을 전개했다면, 그리하여 말 그대로 5.18이 내전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경우 5.18은 오늘날 누리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윤리적ㆍ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까? 5.18 항쟁은 패배함으로써 숭고화된 투쟁이었고, 군사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정치적ㆍ윤리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투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5.18은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비폭력 투쟁의 가장 중요한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12.3 쿠데타 이후의 탄핵 과정은 비폭력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5.18 광주항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공격적인 비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한데, 그 이유는 이번 12.3 쿠데타에서는 5.18의 경우와 달리 계엄군의 유혈적인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까닭에 과연 그런 극단적 폭력에 직면해서도 시민들이 광주 항쟁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공격적 비폭력을 견지할 수 있었을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2월 3일 당일 국회로 몰려간 시민들이 총을 든 계엄군과 대치한 상황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유혈 충돌로 이어지지 않았고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로 인해 계엄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12.3 쿠데타 이후의 탄핵 과정은 지난 2016~17년 박근혜 탄핵 과정과 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전자에서 비폭력적인 ‘촛불시위’가 탄핵 과정을 이끌었듯이 이번에는 ‘응원봉 시위’가 탄핵 과정을 이끌었고, ‘남태령 대첩’이나 ‘키세스 시위’에서도 비폭력 시위는 평화롭게 전개되었다. 다만 박근혜 탄핵 과정과 윤석열 탄핵 과정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는, 전자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독자적인 의제와 발언이 억제되고 배척되었던 반면, 윤석열 탄핵 과정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 소수자들의 발언이 활발하게 개진되었고 그들 사이의 주목할 만한 연대, 내가 다른 글에서 ‘상호 증언의 연대’라고 불렀던 연대 투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박근혜 탄핵 과정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12.3 친위쿠데타로 촉발된 탄핵 과정이 사회대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3) 5.18 항쟁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상이한 평가들이 제시된 바 있지만, 나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고, 따라서 공화주의적 성격의 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5.18 항쟁의 공화주의를 잘 보여주는 상징은 태극기와 애국가라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이 총칼로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는 공수부대의 위세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에게 맞서 투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수부대 그리고 그 배후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애국자이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집회 때 애국가를 즐겨 부르고 공수부대의 폭력에 희생된 시민들의 주검을 태극기로 감싼 것은 자신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공화정의 진정한 주체임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공화주의는 딱히 급진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실 고대 로마 이후의 공화주의의 역사가 말해주듯, 공화주의 자체는 반드시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키케로가 옹호했던 귀족제적인 공화주의가 존재한다면, 군주제적인 공화주의(monarchical republicanism, crowned republicanism)도 존재하며, 마키아벨리가 시도했던 바와 같은 군주제 하에서의 공화주의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사회주의적 공화주의나 아나키즘적 공화주의 같은 것이 사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5.18의 급진성은 그것이 제기하는 구호나 이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헌적인 쿠데타를 방어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극단적 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공격적인 비폭력 투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목숨을 건 비폭력 투쟁이 5.18의 민주주의적 숭고함의 요체다.
12.3 친위쿠데타는 흔히 ‘내란’으로 규정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쿠데타, 민주주의적인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찬탈하려고 한 군사적 폭력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쿠데타는, 우리가 알다시피, 12.3 당일 벌어진 군사 쿠데타에 한정되지 않고 대통령 권한대행(들)을 중심으로 한 행정부의 쿠데타, 검찰 및 사법부의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인 쿠데타들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5.18 당시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 시민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비폭력적인 저항을 수행했듯이, 이번 12.3 쿠데타에서도 시민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헌정을 수호하기 위해 지난 5달 동안 연쇄적으로 전개된 쿠데타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5.18과 12.3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기는 어려운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전자에 비해 후자에서는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빠른 시간 내에 쿠데타가 제압되고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5.18 항쟁 덕분에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인해, 대통령이 직접 지휘했고 더 많은 군대가 동원되었던 12.3 쿠데타가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사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그만큼 그것의 실행이 무모할뿐더러 부조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에서 생겨날 터이다. 따라서 12.3 쿠데타를 빠른 시간 내에 저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후에 연속적으로 전개된 행정적ㆍ사법적 쿠데타를 무위로 돌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발견하는 것은 이해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혁명적인 것으로, “빛의 혁명”으로 숭고화하는 것은 다분히 정략적인 판단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오늘날에도 여전히 친위쿠데타 같은 것이 발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민주 공화정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진정으로 혁명을 원한다면, 한국의 민주 공화정을 취약하게 만드는 그 구조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해야 하리라.
4) 만약 12.3 쿠데타에서 5.18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감행한 공격적인 비폭력 투쟁과 비견될 만한 것을 찾아보고자 한다면, 도처에서 전개된 사회적 소수자들의 상호 증언 투쟁이 유력한 후보가 되어야 마땅할 터이다. 그런데 이재명 씨 등이 제안하는 빛의 혁명의 수사법에는 이러한 투쟁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탄핵 정국과 윤석열 탄핵 정국의 세 가지 핵심적인 차이점을 지적한다면, 전자에서는 “국정농단”이 문제가 되었던 반면 이번에는 민주공화정의 수호가 문제라는 점이 첫 번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에는 집권 여당의 과반이 탄핵에 찬성했던 반면 이번에는 집권 여당 스스로 극우파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내란의 주도적인 옹호 세력이 되었고, 광범위한 극우 대중 운동을 도발했다는 점이다. 마지막 세 번째 차이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박근혜 탄핵 때와 달리 이번 탄핵 집회에서는 탄핵이나 대선 같은 “대의”를 위해 장애인운동이나 성소수자운동, 농민운동이나 이주노동자운동, 또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이나 사회적 참사 피해자 운동 같은 소수자운동이 양보를 해야 한다거나, 소수자운동의 다양한 쟁점은 “나중에” 다뤄도 된다는 식의 배제와 위계화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태령 대첩”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서로의 투쟁에 연대하고, 서로가 서로의 투쟁을 증언해주는 상호증언 연대가 이번 탄핵 집회의 기조를 이루었다. 이것은 이번 탄핵이 박근혜 탄핵을 되풀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입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호증언의 연대가 주목할 만한 것은, 내가 다른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특성을 지닌 연대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아나키즘은 한편으로는 아나키즘의 어원에서 유래하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아르케 없음(anarchia, an-arché), 곧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부정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의 아르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긍정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생, 돌봄, 자율, 연대 등이 바로 아나키즘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들이며, 그것은 생태운동을 비롯한 넓은 의미의 인권운동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나키즘은 역사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경험해왔는데, 그것은 프랑스 철학자인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최근 출간된 아나키즘에 관한 저작에서 말하듯이 오랫동안 그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아나키즘을 믿지 않으며”, “누구도 사람들이 통치/정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점, 따라서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인용자 추가] 증인들”이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아나키즘이 존재하고 아나키스트적인 봉기와 실천이 수행되어왔고, 아나키스트적인 공생과 돌봄의 공동체가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아나키스트들을 제외한 누구도 아나키즘이 사고 가능하거나 실행 가능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오직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상호 증언의 연대로만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아나키즘이 경험해온 이러한 트라우마는 한국 사회에도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스스로 아나키즘을 표방하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빈곤하고 모욕당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전개하는 투쟁들, 예컨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이나 성소수자들의 투쟁, 재난 참사를 경험한 유가족들의 투쟁, 이주노노동자들의 투쟁, 농민들의 투쟁이나 밀양 탈송전탑 탈핵 투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빨갱이로 내몰리면서 오랫동안 숨죽이며 살아온 국가폭력 피해자들 및 그 (유)가족들 역시 이러한 트라우마를 경험해왔다. 그 트라우마의 핵심은 그들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그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고, 그 투쟁의 가치와 중요성을 공감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그들만이 외롭게 자신들만의 투쟁을 전개해왔다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남태령 대첩”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이번 탄핵 정국의 여러 집회와 시위에서 보여준 상호증언의 연대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동안 서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르케 없는 삶,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을들이 스스로 입증한 싸움이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계기였으며, 광장의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증언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만약 누군가가 5.18과 12.3 이후의 탄핵 정국을 비교하고 서로 연결 지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아나키즘적인 상호 증언의 연대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연대는 5.18 당시 광주 시민들도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막강한 권력을 대표하는 공수부대로 포위된 도시 안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도 외롭게 자신들의 투쟁을 전개하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가 서로의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기 위해 맺었던 상호 증언의 연대가 바로 열흘 동안의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더욱이 광주나 전남 출신이 아니면서도, 광주나 전남과 특별한 연고로 연결되지 않았으면서도, 그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세대에 속한 것도 아니면서도, 그 상호 증언의 연대에 스스로 참여하여 5.18의 이름으로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던 전국의 수많은 증인들이야말로 5.18 운동을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5.18을 5.18로 만드는 것은 상호 증언의 연대에 입각한 공격적인 비폭력 투쟁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오늘 12.3 이후의 탄핵 운동을 “빛의 혁명”으로 지칭하는 것이 과연 여기에 부응하는 것일까?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구원: 이 범주들로 충분한가?
그러므로 이제 머리말에서 약속했던 질문을 제기해볼 때가 됐다. 과연 산 자는 누구/무엇인가? 죽은 자는 누구/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산 자에 대해 누구라고 물어야 하는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물어야 하는가? 또한 죽은 자에 대해서는 누구라고 물어야 하는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물어야 하는가? 또는 산 자는, 그리고 죽은 자는 누구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다분히 수사법적인, 게다가 정작 별로 수사적인 효과도 낳지 못하는 질문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 그렇게 무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산 자를 ‘누구’라고 부르는지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죽은 자를 ‘누구’라고 부르는지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는 아니다. 더 나아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게 쉽게 지나치거나 외면해버릴 수 있는 문제인 것도 아니다.
만약 산 자와 죽은 자를 누구라고 규정한다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구원의 관계’는 오직 사람에게만 한정될 터이다. 오직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구원의 관계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가 사람들로서 서로 관련을 맺을 수 있다. 그게 타당하고 바람직한 주장인가? 이렇게 사람 아닌 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범주, 그리고 구원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것이, 따라서 구원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정의의 차원에서 소거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정의론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인가?
다른 한편, 산 자와 죽은 자의 범위에 ‘무엇’의 차원까지 포함시킨다면, 이 문제는 충분히 제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까지, 동물을 포함한 생명체까지 포함되고, 아마도 어떤 경우에는 무생명체까지 포함될 수 있으니, ‘누구’보다 ‘무엇’이라는 범주야말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를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사고하기에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누구’만이 아니라 ‘무엇’이라는 범주까지도 아마 우리 시대의 정의론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을 것이며, 12.3 내란이 제기하고 그 해법을 촉구하는 문제의 수준에도 부응하기 어려울 듯하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12.3 내란이 제기하는 문제의 중심에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따라서 누구라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고 무엇이라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는 어떤 것, 존재와 무, 그리고 존재자라는 존재론적 범주로 포괄할 수 없는 것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에서 작업하는 박경훈 화가는 “백골난감”이라는 주제의 목판화 전시회를 제주와 광주, 서울에서 동시에 개최하고 있다. 주제가 말해주듯, 이 전시회의 주역은 제주 4.3 항쟁의 “백골”이다.
이 몇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박경훈 작가는 백골 전사들을 이미 죽었으되 죽지 않은 것, 그리하여 무덤 앞의 가족과 비가시적으로 해후하고 밤이면 무덤 밖으로 나와 동지들과 재회하고 남태령에서 한강진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활동하듯이 스스로 활동하는 것으로 재현하고 있다. 따라서 백골 전사들은 단순히 죽은 자가 아니라 죽었으되 죽지 않았고 활동하되 살아 있지 않은 어떤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을 ‘죽은 자’라는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그들을 모종의 실체로 만들고 그리하여 ‘산 자’라는 또 다른 실체와 존재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 이후에 이 두 개의 실체를 연결하는 것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의 구성적 타자를 이룬다는 점, 따라서 산 자는 죽은 자와 분리될 수 없고 죽은 자는 산 자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한편,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이 또한 존재하지 않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는 그들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명칭이었거니와, 그들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을뿐더러, 그 가족들과 친지들까지도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 바깥으로 배제되도록 만드는, 배제의 명칭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만이 아니다.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 그리하여 존재하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놓이는 이들,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고 증언되지도 못하는 이들도 바로 그런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대량 학살당하면서도 학살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그렇게 재현/표상되지도 않는 동물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한강 작가가 왜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구원에 대해 말했는지 새삼 질문해보게 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뜻깊고 중요한 질문이지만, 그 질문이, 그리고 그 질문이 포함하는 범주들이 12.3과 5.18, 4.3 등이 제기하는 질문,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와 정의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한 범주들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것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으되 죽은 것이 아닌 이들, 그것들에 대해, 그것들 사이의 분리되지 않는 관계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더 나아가 왜 한강 작가는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해,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미래 내지 장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과연 과거와 현재에 대해, 구원에 대해 온전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통해서만 서로 연결될 수 있고, 역으로 미래는 과거와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만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예컨대 비단 제주 4.3에서 “희생자”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그리하여 애도의 대상에서 배제된 “수괴급 공산무장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 대한 배제는 분명 한국의 민주적 공화정의 장래를 불가능하게 하는 문턱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희생자의 지위에서 배제되고 또한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한(희생자로 인정받는다는 것과 애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서로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버틀러가 말하듯 “애도할 만한 것”(grievable)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민주 공화정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을 것이다.
미래 내지 장래에 관해 나는 무엇보다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 하지만 구조적으로, 실존적으로 이미 우리 자신에 의해 영향 받고 이미 폭력을 겪고 아마도 어쩌면 이미 죽임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른바 ‘미래 세대’(future generation)가 그들이다. 아직 현존하지 않고 아직 현재의 실존으로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에게는 과거가 될 우리 자신에 구속되어 있고 우리 자신에게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연루되어 있다. 이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구원에 대해 온전히 말할 수 있을까? 이들에 대한 정의 없이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온전히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항상 “도래할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로서만 온전히 인식되고 실천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구원에 대해서만 말해서는 안 되며, 그것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에 앞서 유령들과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데리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현재 살아 있는 것들로 존재하지 않는 타자들―이들이 죽은 이들이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든 간에―을 원칙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어떠한 윤리도 어떠한 정치도 (혁명적인 정치든 아니든 간에) 가능하지 않고 사고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유령들 없이는, 유령들과 함께 하기가 없이는 “어떠한 타자와 함께-존재하기도, 어떠한 사회적 관계(socius)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유령들과의 관계야말로 타자들과의 관계 일반, 사회적 관계 일반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령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유령은 이미 죽은 이들(아마도 많은 경우 국가폭력에 의해, 사회적 폭력에 의해)의 유령이면서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의 유령이다(더욱이 이들은 단지 인간적 유령들만은 아니다). 따라서 유령들과 함께 하기가 없이는 어떠한 윤리도, 어떠한 정치도 가능하지 않다면, 그 유령들을 과거의 유령들로만 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떤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그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다중재난의 시대에 정의의 문제(윤리학에서 특히 “세대간 정의”(inter-generational justice)라고 부르는 것), 민주주의의 문제의 중핵을 이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미래의 유령들에 대한 정의의 책임을 배제하고 과거의 유령들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없으며, 또한 역으로 과거의 유령들에 대한 올바른 애도 없이 미래의 유령들에 대한 환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다중재난의 시대 윤리와 정치의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날의 5.18, 오늘날의 “빛의 혁명”은 이러한 애도와 환대의 변증법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