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 불어넣기 아시아 문학선 8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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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옛날

 

 

  어렸을 때 고무줄과 공기를 쓸데없이 잘했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같이 놀았던 친구들 얼굴이 아니라 불렀던 노래와 들려왔던 싸이렌 소리다.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불렀던 노래의 첫 구절은 ‘무찌르자 공산당’이거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이거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이 세곡이 전부였다. 이 세곡은 평생을 통틀어 애국가보다 많이 부르고 들었다고 자부한다. 한 달에 한 번 민방위 훈련을 한다고 책상 밑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을 땐 선생님 몰래 공기를 하곤 했다. 그때도 우린 무슨 지나간 유행가 가사처럼-어른들 고스톱 치며 흥얼거리시듯-이 노래들을 중얼거렸다. 북한을 꼭 ‘괴뢰군’ 혹은 ‘괴수’라 지칭하며 초전에 박살내고 쥐처럼 ‘때려잡자’고 열심히 포스터를 그려댄 시절이었다. 어림잡아 70년대 후반까지 반공의 정서는 내 말랑하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다가 80년대 청소년시기에는 거의 10여 년 간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게)올림픽 꿈나무가 되어 무조건 일본을 이겨야 하는 반일감정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종목이건 한번이라도 일본을 이겨보는 것이 가장 큰 민족적 승리이자 공통된 기쁨이었다. 돌아보면 숨 가빴던 80년대에 어느 분야건 일본을 따라잡느라 국민 모두가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 가면 소니의 워크맨을 갖고 있는 친구에게 일본음악을 듣지 말라 했었고 일본잡지를 가져오면 불온서적이라도 지녔다는 듯 교무실에 불려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진국이 된 일본을 동경하고 일본의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는 누구보다 높았으나 그렇다고 일본의 문화예술에 감동하는 꼴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건 알지만 좋아하진 말아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심리가 또 하나의 우리들 성장 호르몬이었다. (나중에 올림픽을 치르고 나라전체가 좀 살만해지니 고개를 든 정서는 반미감정이다.)

  옛날이야기를 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굳이 서두에 옛날이야길 한건 요즘 들어 더욱 젊은 친구들과 세대 차이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과 반일, 반미 정서는 그 기저가 국민적 피해의식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의식들인데 확실히 요즘 세대들은 우리가 뼛속깊이 교육받아 벗어날 수 없었던 민족적 열등감에서 많이 탈피된 모습들이다. 역사적 의식과는 별개로 문화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개인 취향대로 작품에 선호도를 드러낸다. 그런 모습들이 부럽진 않은데 사실 이질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일본작품을 맘 놓고 좋아해도 되나 자기검열을 하는 자신에 놀라곤 한다. 특히 전쟁의 상처나 피해를 말하는 경우 더 괴롭다. 이 책도 읽는 내내 자애와 연민의 정서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공감했으면서 마음 한 구석 좋은 책, 좋은 작가, 좋은 소설이라 소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엊그제도 아베 총리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분개하는 한 지인이 일본작가의 작품은 감정적으로 꺼려진다고 하길래 그건 초등학교적 유치한 사고라 충고까지 했는데 이 책을 덮고 나서 더욱 나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스스로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을 쓴 유홍준은 이렇게 표현했다. 왜곡도 무시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과거사의 갈등을 느끼지 않는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직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세대에게 이 책은 어쩌면 공감의 다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한국의 제주도나 부산 해안가로 바꾸고 주인공 이름을 김씨나 박씨로 바꾸면 놀랍도록 일치하는 정서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밑바탕엔 ‘전쟁으로 피해당한 지역에서의 희생된 가족’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나라나 누구나 상처의 유형 및 결과가 비슷하다면 비슷한 시각으로 인간을 위로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근육처럼 길러진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은 사라지고 술은 물이 되고

 

 

  <혼 불어 넣기>의 주인공 우타는 전쟁 중에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아이 없이 홀로 살아온, 마을신과 교류하는 신녀이다. 우타는 친자식처럼 여긴 고타로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유일한 이웃이다. 고타로는 갓난아기 때 부모를 잃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툭하면 혼이 나가는 인물이고 우타는 그때마다 집나간 혼을 불어 넣어 살려주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소설의 사연이다. 즉, 혼 불어넣기는 처음으로 실패했고 실패는 곧 영혼분리, 죽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떠나간 혼은 누군가에 의해 돌아오지 않는다고 읽었다. 여기서 혼 불어넣기가 실패한 요인을 작가는 고타로의 몸을 껍질삼아 기생한 소라게 때문으로 보이게 한다. 작가는 이 소라게를 바닷가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아 숨진 오미토, 즉 고타로의 생모이자 우타의 친구가 환생한 존재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궁극엔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그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인간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고 자라서 바다에 의지해 살다가 죽어서는 바다 저편 세계로 가는 거라고 우타는 배웠다. - 53 p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건 조상들이 바다를 의지해 살아왔기에 자신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다짐하는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고타로의 특별한 증세가 마을에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계산하는 이웃들의 대화에서 오키나와라는 지역이 일본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사실 끝까지 우타가 할머니로 인식되진 않고 고타로의 친구(작가 자신)쯤으로 보였는데 이 부분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완벽한 할아버지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작가와 동성화자가 아닌 한)어쩔 수 없는 한계는 존재하는가 싶었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이 책의 표제작이면서 다른 제목보다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제목으로서의 매력이 충분했다. 메도루마 슌의 작품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키나와 전통시대(오키나와 전투, 미국의 통치 등)를 살아오면서 오키나와가 반환(1972)되기 전, 그러니까 반환사실 자체를 모르는 세대의 안타까운 증언자들이다. 주로 죽은 이의 영혼을 본다던지 조용히 어린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던지 하는 죽음을 초월하는 캐릭터로 화하여 시대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관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젠가 쓰나미로 폐허가 되어 버린 일본 바닷가 마을의 한 생존자로 보였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의연하게 인터뷰에 응했고 마치 전에도 이런 일을 겪고 살아 온 것처럼, 그러나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읊조리셨다. 그때 여러 번 죽음을 지나쳐 온 (것 같은)노인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평안해 보였는데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도 같은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화자(초등 4년)는 (다른 작품보다 더)작가 자신인 듯 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20대에 브라질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남미에 살다가 온 문제적 70대 인물로서 오키나와 전투로 가족모두를 잃은 희생자이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의 총에 맞은 상처와 광산에서 생매장 됬을 때 생긴 상처, 미국인과의 격투에서 얻은 상처를 훈장처럼 지니고 산다. 타자가 목격할 뿐이지 본인이 절대 증언하지 않는다. 아마존 오지에서 금을 캐고 철광석 운반선으로 미국을 왕복하고 상파울루에 세탁소를 차리고 이발사도 했다는 할아버지는 어쩌면 일본이 들쳐보고 싶지 않은 기밀문서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네 과일이나 훔치던 내가 할아버지와 비밀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가장 자랑하고 싶은 추억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이별의 순간에 마시게 된 술을 평생 혼자 간직하다가 꼭 한사람, 나와 마신 후 세상을 떠난다. 내가 진 술빚은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작가는 그 빚을 이렇듯 소설로 승화한 게 아닐까.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죽어버리며 더 이상 술로 견뎌야 할 고독이 남이 있지 않았음을 항거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자유와 평화를 누구도 폄하하는 사람은 없었다. 늘 이유를 묻지 않아온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오키나와가 반환되는 것에 온몸으로 거부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할아버지의 혼이 담긴 술 단지를 무참히도 깨어버리는 청년들은 과거 한 시대를 상징했던 비련의 역사 따위 돌아보지 않겠다는 새 시대의 냉철한 선언으로 들렸다.

  화자의 입을 통해 작가는 미군의 통치가 끝났음에도 일본 본토의 법대로 살아가기 싫은 지역적 저항감을 곳곳에 내비친다. 엔화의 디자인이 달러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평가와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언제 피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심드렁함은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미군의 달러가 지역민을 먹고 살게 해주었다 여기기 때문 아니겠는가. 사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강제적으로 이민(이나 이주)을 가고 가족 모두가 전쟁에 희생된 후 혼자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꽃보다 진한 향기는 바로 피보다 진한 ‘술’이었다. 지역적 특산물이 술이 되어가는 과정, 역사적 사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술의 역사, 그 술이 숙성되는 시간이 상징하는 한 세대의 고독, 같은 술이 다음 세대로 지나와 맹물보다 못한 액체가 되어 버린 광경, 그것들의 여정이 누구라도 이 작품에 흠뻑 취하게 만든 원인인 듯 하다.

 

 

나쁘게 자라고 나쁘게 싸우고

 

 

  <붉은 야자나무 잎사귀> 역시 미군 통치하에서 겪은 소년시절의 추억을 아프게 그려낸 이야기다. 나는 미군기지 출입문 앞 환락가 골목에 살고 있는 S와 복싱을 매개로 친해진다. 학교가 끝나고 S가 데려간 곳은 ‘오키나와 남자들보다 배나 큰 미군들이 싸우는’ 뒷골목이었다. 성적인 면에서 개방적인 S와 S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데 작가는 처음 가져보는 성적인 감정보다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고 부끄러워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치 우리가 미군부대 근처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그 시절 양공주를 떠올리게 했다. 작가는 영양부족으로 성장이 나쁜 야자나무의 불긋한 잎사귀들을 빗대어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던 환락촌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조용히 사죄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껏 나쁘게 자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쁘게 커서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나쁘게 살아왔다 평가하고 나쁘게 살 것이라 예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오랫동안 그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지 못했던 과거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똑같은 피해자인데 그 안에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집단의식을 구분하는 인간의 본성은 같은 가해자인데 그 속에서 더 나쁘고 덜 나쁜 놈을 나누는 심리와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투계>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온도가 뜨거웠던 글로 기억된다. 작가는 계획적으로 길러진 싸움닭의 처절한 싸움과 예정된 최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이 직접 키운 병아리가 도박장에서 어엿한 투계가 되어 피와 살이 뜯기는 싸움에 길들여지는 과정은 점점 목적 없이 호전적 투사가 되어가는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이번에 이기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이겼다 하더라도 다음엔 죽는 운명.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조차 모른 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수단이 되어야 하는 전장. 싸움은 목적이 아무리 휼륭해도 나쁜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비겁한 아버지는 일본 본토를 아무 힘없는 자신은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 싸움에 진 다우치에 비유하며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작가는 모두 불태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가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내해>는 강물과 섬을 배경으로 하면서 서늘하고 우울한 문체가 비슷해서 덮고 나서 한참동안 마음이 가라앉는 글이었다. 두 작품 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여성들을 애도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은 말야. 죽으면 모두 바다를 건너서 저 섬으로 가. 그러고는 우리를 지켜봐 주지.” -234p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가 한 말씀이다. 어떤 여자는 ‘죽어서도 사람은 혼자가 아니야. 언제나 영혼으로 되살아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에서는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여성의 영혼이 자신처럼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나같이 어린 여자애에게 고백하는 인생이야기이다. 이미 죽은 여성이 자신의 서러운 죽음을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엔 삶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여자의 할머니는 ‘마을의 신녀들 중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있었던’ 분이고 여자는 학교에 못가고 할머니랑만 살면서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들로 혼자서 살게 된 경우이다. 작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는 어머니와 선생님, 배우자를 대신하면서 삶과 죽음 모두를 의지할 수 있는 절대적 대상이었던 가보다.

 

  낮에는 밭일을 거들어 드리고, 밤에는 아홉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어. 잠들기 전에 할머니가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걸 듣는 게 가장 큰 낙이었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라든가, 젊은 시절 가나가와로 가서 방적 공장 여공으로 일하던 때 일이라든가 말이야. 전쟁 얘기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잘 말해 주었단다.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이야기를 듣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나는 무엇이든 다 할머니한테 배웠단다. 글도 돈 계산하는 법도 할머니와 함께 야채를 팔거나 빈 병을 모아 팔면서 배웠고, 몸의 변화, 마을 행사, 제사를 지낼 때 신을 모시는 법 등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도 다 할머니가 가르쳐 주었어. 내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다 할머니 덕분이지.   -175p

 

  불행하게 태어나 불행하게 살다간 이 여성은 같은 일본사람이지만 오키나와 외부인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살려는 의지를 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오키나와 여성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정을 준 외부남자를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만 돌아온 건 약자를 무참히 짓밟는 집단이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오키나와 출신이 아니거나 혹은 오키나와의 전통사회 규범을 무시하거나 본토의 (경제적)마인드를 향한 인물들은 어쩐지 모두 가해자로 등장하는 것 같다.

  기지촌 술집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조폭이나 미군을 상대하던 양공주, 신규 건설현장에 나타난 용역 일꾼들, 생필품을 팔러 오는 장사꾼……. 이들은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파생된 인물이자 오키나와 반환 시점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사실상 이런 인물군은 전후 기지촌이 생성되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었고 70년대 말까지 지속된 이러한 풍경을 목격했던 내 세대까지는 대충 기억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그러니 다음 세대부턴 이러한 소설이 더 이상 등장하지 못할 역사적으로 귀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내해>역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자신과 자식을 모두 버린 어머니의 슬픈 운명에 관한 기록이다. 할머니는 미군을 상대로 물건을 팔던 - 처자식이 있는, 무정하게 떠나버린 - 장사꾼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내 어머니가 된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했기에 아버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해 여자를 안으면 발기가 안 되는 남자이다. 이 부분은 침략을 주도한 일본이 다음세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었다. 할머니는 40여년 파초섬유로 옷감을 짜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영혼이 보이는 경우이다. 나에게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힌 ‘내해’는-나 역시도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기에-나를 반겨줄 진정한 고향인지 모른다. 마을의 공동묘지처럼 섬에 떠 있는 묘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슬프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내면 깊숙이 영혼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이긴 하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장편으로 받아 들였다. 전쟁의 상처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인간에 대해 실망하거나 인간끼리 복수하려는 정서는 읽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 바닷가와 숲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작가의 고요한 외침을 그저 둔중한 메아리로 확인한 듯 하다. 남의 피해를 확인하니 내 피해도 사그라드는 감정만은 아니다. 외려 모든 피해를 낱낱이 소리쳐 전달하고 내가 더 피해를 보았다고 설득, 강요, 주장하는 심리가 부끄러워진다. ‘조용하고 고독하게 살면서도 힘들어하지 않는 강인함’,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이렇듯 브라질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모습은 어떤 파도가 휘몰아쳐도 멈추지 않고 변함없이 흘러가는 바닷가의 풍경과 같지 않을까.

  작년인가 배경이 오키나와였던 미니시리즈가 기억난다. 그땐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 따윈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동양의 하와이로서 놀러가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태양이 이글거리는 산호초 바닷가 시골정경이 새삼 궁금해진다. 바닷가에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얻어 올지 벌써부터 마음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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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1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우큐우섬은 일본과 다른 겨레요 삶이에요. 류우큐우섬에서도 더 작은 섬은 또 류우큐우와는 다른 태평양 삶이고요. 아름다운 이야기 만나셨겠지요~ 오늘 달빛 한껏 누리셔요~
 
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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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엄마를 보내드린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내게 복역 중이시다.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딸이다. 허나 엄마에게 잘 가시라 인사하는 일, 그것은 곧 내게 다른 삶을 살라는 말과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살라는 뜻과 같았다. 엄마는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 알았고 그렇기에 지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고 믿는다. 엄마와 헤어지는 날이 아마 내겐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는 기쁠까 슬플까. 엄마는 나를 반겨주실까 꾸짖으실까...

 

 

소설을 사다 놓고 여러 번 읽기를 주저하곤 했다. 책을 덮으면 어쩐지 나 역시 작가처럼 엄마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의 의미도 결론도 앞으로의 갈 길도 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럭저럭 삶의 핑계를 대고 이유를 만들어 작별을 보류한지 벌써 5년째. 몇 주째 소설의 제목을 스치기만 해도 나는 아직 엄마의 부재를 메꾸어 볼 다른 무엇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했다. 부끄럽고 옳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면 엄마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엄마의 한마디 대답과 격려, 혹은 잔소리, 아니면 말없는 미소를 찾게 된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이미 죽은 엄마를 그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보내드리지 못한 듯하다.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으니 엄마와 나는 사실 그 날 이후 같은 자리에서 몇 년째 대치중인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이년반 동안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기꺼이 엄마를 팔고 죽음의 사연을 과시하며 슬픔을 전시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내 특별한 사연을 되도록 많이 떠들고 싶어 안절부절 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극복한다는 구실로 더욱 엄마의 죽음을 말하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내 글이 지향하는 결론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사람을 잊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결국은 더욱 그리워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뿐. 이 소설은 일흔 넷 작가가 아흔 넷의 어머니와 작별하는 심경을 기록한 고백록이다. 뼛속에 사무친 그리움이 증오와 원망과 분노로 대체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의 시신 앞에 돌아와 비로소 자신과 어머니, 가족과 화해하는 순간을 아프게 그려내었다. 열다섯 이후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와 객지를 떠돌던 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혹시 ‘잘가요, 엄마’ 그 한마디는 너무 짧은 인사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다 하지 못한 말이 넘쳐흐르고 그렇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최후의 신음소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한 점 먼지로 날려버리도록 그리하여 더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구경꾼을 사임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들을 따라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은 걸음걸음마다 힘겨웠다. 아내가 여행 간 사이 마치 자신도 여행을 떠나듯 고향을 향한 여정이 곧 내 원망과 분노를 돌이켜보고 내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한평생 드난살이와 품팔이로 살아온 어머니의 죽음이 절망만은 아니었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나를 강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일까. 소설 속 사람들은 끈질기게도 내게 그만 엄마를 놓아주라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다. 그들이야 말로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듯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작별 과정을 지켜보며 나만의 은밀한 이별식을 치룬 것이다. 소설 속 어머니의 죽은 표정에서 내 어머니의 보랏빛 시신을 겹쳐볼 수 있었고 그 곁에 선 작가의 결연한 얼굴 위로 내 붉은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무허가 화장장에서 어머니가 연소될 때 소멸되어가는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꼭 내 가슴속 불타버린 새까만 그것만 같았다. 나를 안아주고 먹여주던 세상 유일한 살결과 체온의 어머니가 모두 타 버릴 때 작가는 무엇을 태웠을까. 오래 세월 피할 수 없었던 결핍과 수치심,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허세, 위선을 견디기 위해 자학해온 고통의 시간들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토록 생존하기 위해 질기게 부여잡아온 세상과 어머니에 대한 복수는 한 줌 재로 남아 버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머니의 허물도 치욕스런 가정사도 개인의 누더기 같은 치부도 아니었다. 구십 평생 끝내 다 치르고 만 어머니의 죄값도 아니었다. 당신은 위대하진 않았지만 장한 어머니였고 삶이 눈부시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허물이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다 갚고 가기 위해 모진 삶을 살았다고 자식에게 모진 삶만을 남기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도 자식을 등에 업는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토록 그 어머니의 안온한 등허리를 기억하며 세상과 당당히 마주해온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니 어머니를 등져온 건 세상을 속여 온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눈을 감자 이제야 뒤돌아 있던 등을 다시 돌린 것이었다. 우릴 향해 열어젖힌 작가의 앞모습은 한없이 엄숙했고 목메인 광경이었다.

 

 

소설엔 어머니 사후 성이 다른 아우가 형을 고향으로 이끌며 지난 시절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는 과정을 담았다. 형제는 살아생전 어머니집과 가족 내 서글픈 추억이 어린 중국집, 어머니가 방아를 찧고 국수를 말던 권씨네 고택, 방학마다 떠나있던 외갓집을 차례로 돌아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잔해가 된 어머니를 흩뿌리며 형은 아우와 화해한다. 마을 산기슭 위로 사라지는 어머니를 향해 그들은 인사한다. 순간 엄마야 누나야를 외치며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겨울 때마다 뛰는 것이 유일한 용기였고 위안이었던 작가가 어린 시절 ‘꼬질꼬질하고 암울한 애옥살이가 불길하게 노출되는 비애가 서린 그 집’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태우고 온 그 날도 달려가 옹기전 항아리 속에서 새우잠을 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살아계신 동안 내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에 죄책감이 들면서도 세상과 부모에 속절없이 화풀이만 해댄 세월 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엄마는 내게 진짜 나만의 삶,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엄마의 목숨값은 결코 나를 향한 죄값도 내게 지게 된 빚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나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한 엄마는 죽음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잘가요, 엄마. 몇 십 번, 몇 백번을 더 말해야 정말로 엄마를 잘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엄마와 헤어지는 일만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보다 더 씩씩하게 인사를 잘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지금부터 한 살 두 살, 새롭게 나이 먹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진짜 엄마를 만나는 날이 가까워 질 것 같다. 잘가란 인사는 하지 못했다. 대신 후회 같은 인사를 지금 할 수는 있다. 그날까지 잘 있어요, 엄마.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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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7-0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씨앗은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내 씨앗은 내 아이들한테 어머니(또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새로 자리하면서, 곱게 이어가리라 느껴요. 떠나 보내거나 잊거나 할 수 있는 인연이나 운명이 아니라, 늘 보듬고 사랑하면서 내 삶을 보살피는 하루하루이리라 느껴요.

2012-07-05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화 혼종성 -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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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 이 책은 문화혼종성이 작금의 전지구화 시대를 정의하는 핵심이라 말하는 책이다. 문화혼종은 더 이상 수용과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관점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다보니 참고서적 분위기가 물씬이다. 저자는 건축, 음악, 종교, 문학 등 다양한 혼종화의 영역을 소개하며 모든 문화들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으며 어떤 것도 단일하거나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이며 서로 자기 살을 내어주고 남의 살을 빌려온 역사이다. 우리는 살을 섞었을 때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기대한다.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은 이러한 문화혼종화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를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짧게 핵심만 정리한 책이라 할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량이다. 개념정리에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보이다.

 

사실 한국에서 다문화란 여러 나라의 문화양식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소수문화를 상징하는 느낌이 많다. 수는 적고 힘은 작은, 완전한 역설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과 똘레랑스를 의미한다기 보단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환기하는 힌트로 기능한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은 아무래도 농촌으로 시집오는 동남아 여성들과 이주노동자들 덕택이 아닐까. 2007년도에 이미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백 만 명이 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이 늘어날수록 한국인 남편의 학대나 폭력, 노동자의 인권 및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하게 된다. 새로 출연한 언어의 개념은 자주 노출되는 사건과 기사로 재정립되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지금보다 더 현명한 지혜가 요구되는 필수적인 미래지향적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보편적 결론보다는 글 말미의 이택광의 해제가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택광은 지젝의 논의를 빌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옹호적인 시선이 외려 정치적인 억압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다문화주의라는 전략적 선택과 관리 방안이 마치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것처럼 운명화되는 것에 비판을 가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모든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이택광의 시선은 문화혼종성이 가지는 지구적 보편성 위에 한국적 특수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은 사실 우리에게 다문화가 무슨 의미이냐가 아니고 우리가 다문화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어떤 마음인가, 어떻게, 진정으로, 인 것이다. 오랜 세월 단일민족, 하나 된 국민이라는 가치를 선호해온 입장에서 한국인은 다문화 수용에 있어 그다지 개방적이지 못하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면서 퍼뜩 지난 2011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고가 떠올랐다. 관용과 평화의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많은 인명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했다. 바로 인구의 95%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에서 인종과 이민을 이유로 벌어진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테러범은 단일문화 국가이면서 살기 좋은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다시 말해 테러범이 인식하기에 한국은 다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로 본 것이다. 왜 하필 우리나라였는지 왜 우리나라가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나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오해라 할지라도 늘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외쳐온 과거를 돌아볼 때 테러범의 언급은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우리는 입으로는 다문화에 개방적이라 떠들면서 속으로는 폐쇄적인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문화를 포용한다는 의미가 추상이 아닌 정책적으로 실행되면 바로 일자리, 교육 및 의료, 복지 등의 혜택을 나누어야 할 경쟁 프레임으로 이동한다. 또 과거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을 향한 문화박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서 다문화에 포함되는 대상을 계급의식 구조 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농후하다 할 수 있다. 민족적,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은 마치 지난시절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 느꼈던 박탈감, 열등의식을 보상하는 차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냉정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문화혼종성의 그 인정 너머에 다가가야 할 메시지로서 어쩌면 역사와 시대의 필연으로 도래하고 있는 다문화국가를 맞이해 한국인이 가져야 할 용서와 관용, 배려의 정신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에 성과의 목표를 두었을 땐 아주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 민족이었지만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을 땐 상당히 변화가 느린 민족이다. 좋은 말로 주체적이고 반대로는 고집이 센 민족인 것이다. 노르웨이는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을 당하고도 여전히 다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며 테러범에 대해 관용적이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 한명이 살인사건을 일으키면 당장 그 나라를 쳐들어갈 것처럼 흥분하고 평소 숨겨왔던 적대심이나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그럴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살인자와 그의 국가를 매도하고 복수의 방법을 의논하기 까지 한다. 지난 9.11 테러 후 미국이 보여준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관용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보기에 좋아 보이고 이익이 되는 것만 발췌, 선별해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경제무역에나 가능한 것이지 생활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을 주고 받는 일엔 적절치 못한 듯하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이 사실은 서양의 문화적 산물을 매우 수월하게 차용해 온, 전유의 전통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한자와 불교를, 영국에서 국회체계를, 독일에서 대학과 군사체계를, 미국에서 물질문화 대부분을 차용해 왔다. 그러면서도 일본 고유의 문화는 어느 나라보다 차별화된다. 일본의 박물관과 전시관에 가보면 항시 유럽과 미국의 장점을 잘 믹스해 일본만의 개성을 살리는 쪽으로 공간을 연출한다. 좋은 것을 모방하고 가져오되 궁극에 자신들의 조건과 능력에 맞게끔 다시 재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반면에 우리는 독창성에 대한 아집과 잘못된 자존심, 괜한 자격지심으로 쓸데없이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거나 베껴도 꼭 재창조하지 않고 부분 이식하듯 물리적으로만 따라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행히 요즘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K-pop을 보면 이러한 국수적인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든다. 또한 첨단 IT기술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전략들을 보면 문화수용과 전파에 있어 상당한 개방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건 기술적 발전과 성장이 아닌 정신적 성숙과 그에 따른 실천인 듯 하다. 미혼모의 혼혈 아동문제, 이주노동자의 빈곤문제, 다문화 가정의 교육문제, 최근 탈북자의 문제까지 문화혼종성을 근간으로 하는 여러 사회문제는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자체를 자유주의적 환상이자 기만이라 비판한 지젝을 존중한다. 그러나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들이 섬처럼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저자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의 ‘눈과 뇌, 그리고 문화는 함께 작동한다’는 말씀을 떠올린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이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재구축 하기 위한 초석으로 이 책은 미약하나마 기본지식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 이전에 마음을 여는 오늘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로 모아지는 동일한 가치를 더 선호해 왔다. 이는 조직과 학교에서도 왕따를 배출해내는 사고체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며 무리에서 배척하고 싶은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문화는 타자성에 대한 인정을 그 초석으로 한다.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혹 자신에 대한 집착은 아닐까. 이것은 꼭 한국인이 보는 외국인을 말하진 않는다. 불교에선 수십 수백 수천가지를 모아서 자기로 삼고 있을 뿐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기에는 나라고 할 어떠한 실체도 없다고 말한다. 나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실체가 있다고 확신하니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타자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문화의 문제는 결국 다양한 문화, 즉 그 문화를 생성해낸 수많은 타자가 아닌 나의 우리 문화가 따로 있으며 그것을 만든 우리와 내가 문화의 주체자라는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문화에도 정답은 없다. 삶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문화는 그 다양한 삶이 모여들어 하나의 풍경과 내면을 창조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삶은 마주치게 되었고 그러하기에 문화는 섞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섞이지 않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문화혼종이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다음 세대의 새로운 문화를 위해 소화되는 생태적 과정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써 성공하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들은 삶의 위대한 생태계를 과소평가하는 일일수도 있겠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에서 삶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기 마련이니까. 문화가 섞이건 그렇지 않건 인간은 자기 삶의 방식을 긍정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 다문화 국가를 맞이할 우리나라가 어떻게 당면한 문제들을 헤쳐 나갈지 무척 궁금하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 마음을 먼저 열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은 억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 하나도 꿈쩍도 않았으면서 마음을 움직인 척 당연히 열은 척 한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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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28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나 언론이나 학문이나 사상에서 말하는 '다문화'는 모두 부질없다고 느껴요. '다문화'란, 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결을 나타내지 않을까 싶어요. 서로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 다르게 살아온 나날'을 받아들여, 작은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곧 '다문화'라 할 테지요. 꼭 먼먼 나라에서 한국을 찾아와 섞일 때에만 다문화일 수 없으리라 생각해요.

차트랑 2012-06-2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이렇게 생각합니다요

'가래떡 트는 기계'
다수를 한 곳에 모아 틀어대면
똑같은 모양의 가래떡을 얻을 수 있는데요
물론 그 전에 푹~ 스팀으로 익혀내야 하지요
적당한 길이로 잘라만 주면 됩니다.
얼마나 보기 좋아요 먹음직~
참 쉽지요~^^

한사람님의 글을 읽어 보니 교육만 그런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왠만하면 틀에다 넣고 마구 틀어대는거에요

기계를 쓰지 않으면 안되려나요??

기억의집 2012-06-2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글 올리셨네요,라고 말하려다 스크롤 해보니 24일에도~
반가워요. 한사람님~ 저도 현재 알라딘 간간히 잠깐 잠깐 들어오는지라 챙겨지 못했어요^^

책읽는나무 2012-06-2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정말 읽을수록 공감되는군요.
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척 하는 사람들.
책도 읽고,님의 글도 읽어보아야지 않을까? 싶네요.^^
올리시는 글마다 집중하게 만드시고,또 생각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으십니다.
이젠 실천(?)만 남은셈이지요.^^

아이리시스 2012-06-3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할 말은..안하는 걸로?!
그러면 안돼요!! 저는 호기심이 많으니까.
아..오늘 드라마 하는 날이었구나..(주말 별로 안 기다리는 1인)ㅜ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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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싫었습니다. 글도 쓰기 싫었습니다.

신기한 건 단지 일상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하기 싫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제겐 다른 일을 하고 말고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꼭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매번 희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사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처럼 습관이 되어버린 일이 어쩌면 하루를 좌우하고 나아가 계절을, 한 해를, 인생을 지배하는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미 책 읽고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세요, 물어 본다면 근사하게 답해줄 대답도 없습니다. 목적이 사라진 것이죠. 아무런 목적 없이 좋아서 하는 단계도 지나고 그냥 해오던 것이니까 관성에 의해 책을 펼칩니다. 그래도 자꾸 모자란 것만 같아 다른 책을 펼치게 되고 그것도 부족한 것만 같아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글은 같이 모자라거나 더 넘치기만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이죠, 아마 이 비슷한 답이 가장 적절해 보이네요. 세상엔 책을 펼칠수록 아직 펼치지 않은 책들이 넘쳐나고 글을 써 나갈수록 잊혀지는 문자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책과 글의 바다, 거기서 허우적 대는 나날들. 이 시간들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이일이 허무해지기 시작한 건 책에서 구한 지혜는 그다지 현실 속에서의 실천과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과 한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요. 읽었다고 떠드는 것도 마찬가지.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 역시 다른 문제입니다. 알지만 하지 않고 썼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것.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 느꼈지만 말하지 않고 말했지만 다시 잊어버리는 것. 물론 책은 책이고 글은 글이며 생각은 생각, 생활은 생활이니 매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니까요. 결국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심인 것이지 내가 그리 살겠다는 의지와는 괴리감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대표적인 위선을 실천하는 행위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위선을 견디기 위해 또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위선이 사라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기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밖에 더 굴었을까요. 책을 읽었다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는 것. 심지어는 이해했다고 버젓이 쓰고 말하고 다른 이에게 아느냐 묻기까지 하는 것... 다른 이의 생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무엇을 안다고 아느냐고 알아야 한다고 묻지도 답하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빛 좋은 위선만 배양하는 생활을 이만 멈추어야 겠다 생각했는데, 이 저자는 그래도 계속 읽어야 한다 말하네요. 달리 방법은 없다고 충고하네요. 책 읽기가 혁명이라 말하네요. 아...혁명하려고 책 읽어온 것은 아닌데 말이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이 여름밤의 궤변도 아름답구나, 아니 참 서정적이며 인간적인 논리구나, 아니야, 내가 몰랐던 진실이구나...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이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 질 정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말처럼 결코 쉽거나 당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을 읽은 최후에 이르게 되는 ‘고독의 싸움’이란 아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렵고도 쓸쓸한 결정의 순간은 아닐까요. 미쳐버리고 싶다는 것은 사실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 일 수 있겠어요. 자신의 무의식을 목격하는 일은 미쳐야 가능한 일이라는 뜻도 되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책에 미치면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 버린 것인데 내 속에 책이 들어온 것인지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하여튼 어느 지점에서 내 무의식과 만나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어요. 결정해야 합니다. 들어와 버린 책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을 뚫고서 원래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허나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다른 책을 읽습니다. 보류하는 것이죠. 그러니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다음 책에서도 똑같고 그렇기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겁한 자가 왜 혁명을 이루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런 - 저같은 -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방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덜 미친 방황의 시간. 고독한 싸움의 맛보기 과정. 열정과 공포의 적당한 반복. 이런 힘겨운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을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괴로움도 중독된다고 그래요, 이 전 책의 스님은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진부합니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책을 읽는 내가, 책을 읽었다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미쳐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제대로 읽었다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책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으로 책 처럼 산다는 건 책 읽기 전의 삶을 버리는 일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자는 40년간 독일어로 나온 책의 3분의 1을 썼던 루터를 예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땐 그것이 가능했죠. 그래서 혁명의 본체는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문학이 혁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저자가 부르짖는 핵심입니다.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웃기지 않나요? 저자가 문학을 과대평가 한 것인지 제가 문학을 과소평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거죠. 이해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읽고 쓰는 것을 목숨 걸고 해야 한다 설파하기엔 우린 다들 순수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기엔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로 먹고 살만큼의 당면한 문제이거든요. 먹고 사는 방법은 문학 말고도 너무나 많은 오늘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읽고 써야 한다면 그건 비참하고 슬픈 일이거든요. 예, 그래서 저는 보다 넓고 큰 바다처럼 존재하는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에 감동적이라든지 신선하다라든지 놀랍다든지 하지는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혁명에 대한 오래된 불감이, 그리하여 문학에 대한 강렬한 불신이 더 팽배한 상태니까요. 읽고 쓰고 노래하는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지금 내 삶과 너무 멀어서요... 단지 문학과 책, 글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설득해준 저자의 논리가 고맙긴 합니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계속 읽고 써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으니까요. 저자는 저 같이 문학에 비관적인 사람에게 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문학을 하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이른 바 사임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겁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p226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저자는 계속하려 설득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요. 인류가 생겨난 건 20만 년 전이고 그중에 문학은 50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아주 젊은 예술에 불과하다고요. 어느 시대건 자기 사는 시대가 암담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던가 봅니다. 니체는 살아 생전엔 니체만큼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술가는 문학 말고도 발에 치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늘 밤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세상은 변혁이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죠. 그러니 니체가, 그를 읽은 우리가 하는 일은 절대로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기만 한데 왜 굳이 종말을 걱정하고 절망을 택하는 것인지 저자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웃고 있어요.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은 저자만의 독특한 에너지가 있어요. 문체도 그렇고 근거 있는 자신감도 매력적입니다. 논리나 내용은 모두 동감하지 못했지만 그냥 심정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잖아요. 말하는 구석은 기분 나빠도 그냥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요. 꼭 이 책이 그렇습니다. 저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어요. 기분도 나빠집니다. 맞기만 하면 다인 줄 알잖아요. 이 책을 옮긴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장하고 떠들어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싫어서 ‘논리적이고 개방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역겨워서 스스로를 편파적이라 말해요. 자신은 편식과 편견에 빠진 사람이라 부르죠. 좋고 싫은 것이 먼저고 다음이 논리라 말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고백하죠. 문체나 행간의 분위기, 비유한 표현, 분노의 에너지 등 이런 점들이 책 전체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말합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공감하진 않았지만 읽다보면 사람에 빠지듯이 점점 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후반부 루터의 혁명부터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근대의 근원을 밝히면서 읽고 쓴다는 것의 혁명성을 체계화하는 통찰은 사상가로서의 자기 주장의 확고함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충분합니다.

 

 

희망을 전달하는 방법이 새로운 책이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시달린지 오랩니다. 그랬기에 책으로 희망을 발견하고 글로 치유해 나가는 것도 익숙합니다. 허나 어줍짢게 이 책을 통해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한 공감을 널리 유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제넘은 추천이나 권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그렇게는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 비록 일 퍼센트라도 그건 큰 확률이라고요. 저자는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는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이라죠. 모두 사라지고 그만큼만 남은 텍스트들의 위대함을 상상해 봅시다. 그러니 만약 적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책이 있다면 그건 승리이며 환희이며 혁명입니다. 살아 남아 또 다른 새로운 혁명을 유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혁명을 이어지게 하는 인류의 끈질긴 과업인 게죠. 이런 깨달음은 평범해 보여도 난해한 실천이 과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읍시다. 일단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읍시다. 그리고, 글을 씁시다. 멈추는 건 대안이 아닌 듯 합니다.

 

 

글쎄, 달리 방법은 없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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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24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고사는 걱정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먹으면서 어떤 이웃하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책도 다른 무엇도 모두 혁명이 되리라 느껴요

비로그인 2012-06-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이 구절을 읽는데 울컥합니다.. ㅠㅠ


2012-06-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6-2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서평단 도서인데, 읽고나서 꼭 다시 리뷰를 읽으러 오겠습니다.

2012-06-26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읽고 댓글은 이제 달아요.) 근래에 읽은 글 중 가장 재밌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분이 한사람님이시죠.^^ 한 가지 주제를 일관되이, 개성있게 밀고 나가는 글. 그리고 그 글은 재미있지만, 주제는 윤리적인 질문이라는 것. 저는 죽어도 이런 글은 못 써요~.

가연 2012-06-2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괜찮죠??ㅎㅎ 평가단에서 추천하고 뿌듯했었답니다.
 
왕따 없는 곤충 학교 재미있는 곤충 학교 3
우샹민 지음, 샤지안 외 그림, 임국화 옮김, 최재천 외 감수 / 명진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첫번째 추억을 떠올리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자주 듣게 된 소리는 바로 ‘왕따’와 ‘일진’이었다. 어느 날인가 반에서 ‘찐따’(찌질한 왕따)로 불리는 아이와 짝이 되어 불쾌하다고 했다. 마트에선 매장에 같은 학년의 일진이 떴다고 빨리 가자며 손을 이끈 적도 있다. 일진에 찍히면 왕따가 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날을 잡아 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 땐 소위 말해 노는 친구를 뜻했던 ‘날나리’는 그냥 노는 애들일 뿐이었다. 그것도 거의 학교 밖에서 날나리들끼리 어울렸고 교실에선 선생님도 아이들도 제외시켰다. 날나리들도 반에선 될수록 눈에 뛰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냈던 것 같다. 교실 밖에선 누구와 나쁜 짓을 하는지 어떤 폭력이 오가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반에서 유난히 친구가 없고 지금처럼 왕따에 가까운 아이가 있긴 했지만 날나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때와는 달리 공부도 잘하고 덩치도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 일진이 되어 반에서 권력을 장악한다. 날나리가 ‘탈선’의 상징이었다면 일진은 ‘위선’의 아이콘이 된 것 같다. 적어도 겉으로 보아선 모범생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진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바탕으로 교실 내에서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아이를 왕따시킬 수 있는 어엿한 신분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운동회 때엔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의 학부모가 반 전체에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알고 봤더니 그 아이는 반장이었다. 아이 말로는 일진이 입는 유명 브랜드의 점퍼와 신발은 다른 아이들이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스마트폰도 계급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서열이 낮은 아이는 교실 내에서 신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벌써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 계급을 나누어 같은 친구들을 지배하는 심리에 익숙해져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서글펐다. 조직 및 계급 서열화와 성과지향주의에 물들어 버린 우리 사회가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물려주었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일진의 눈에 벗어나면 ‘왕따’가 되는 것이다. 뉴스에서도 보았듯이 왕따가 된 친구는 일진으로부터 정신적, 물리적 폭력에 시달려 급기야 자살까지 하게 된 경우도 있다. 왕따와 일진은 분리될 수 없는 학교문제가 되었기에 이제 왕따가 없다면 일진도 없는 것이고 학교폭력이 없다면 왕따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요즘 초등학교 일진은 중학교 일진을 빽으로 두고 반에서 짱노릇을 하는 친구가 많다. 아이 말로는 어떻게라도 일진과 연결고리가 있으면 중학교 언니, 오빠들이 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중학교 일진이 초등학교 후배를 선별해 기르면서 중간관리자를 만드는 꼴이었다. 초등 일진은 왕따를 중학교 일진에 보고하고 중학교 일진은 타겟이 되는 아이들만 골라 돈을 뜯거나 이유 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인접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그 연결고리가 탄탄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진이 싫어도 표면적으로 친한 척 해야 하며 혹시라도 찍힐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들이 일진에 찍히는 것일까. 이웃 학부모들과 이야기 해보면 엄마들이 교실까지 따라다닐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최선이라는 결론이었다. 아니면 공부나 예체능을 아주 잘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실력자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너무 잘난 척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침묵해도 안 되고 혼자 얌체 짓을 해도 안 되고 혼이 났다고 징징대도 안 되고 어떤 특정 과목을(특히 예체능)너무 못해도 안 되고 너무 더러워도 안 되고 너무 뚱뚱하거나 못생겨도 안 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의 중간치인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이 찍히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가슴 아픈 것은 혹시 학원을 안다니고 학습지도 안하고 핸드폰이(혹은 MP3) 없거나 집이 멀다는 이유도 찍힐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 깊은 획일성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전형적인 집단이기심이기도 하다. 아이들 입장에선 더 많은 쪽이 강한 것이고 다르고 적은 쪽이 약한 것이다. 일진이라는 의미는 학교폭력 조직을 상징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아이들(기득권)이 휘두르는 소수자에 대한 과시와 배제 심리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생각할수록 왕따와 일진의 문제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아주 밀접한 학교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라는 조직에서 위선을 먼저 배우고 성장한 후에도 궁극에 권력을 얻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어른이 될까봐 걱정스럽다.


덕분에 나는 언젠가부터 왕따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서점에서도 꼭 훑어보는 학부모가 되었다. 아마 많은 학부모들이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이는 이 책을 보고 자신이 4학년 때 과학관에서 얻어온 장수풍뎅이와의 추억에 흠뻑 빠졌다. 알 상태로 집에 가져온 장수풍뎅이는 애벌레와 번데기를 지나 어엿한 살아있는 곤충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곤충의 몸이 커지자 마트에서 집도 사고 나무와 먹이도 사다가 그럴싸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아이는 당시 전학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갔다 오자마자 ‘짱수’(애칭)에게 인사하고 정을 붙였었다. 짱수는 4월에 우리 집에 들어와 겨울이 시작될 무렵까지 살았다. 친구들의 곤충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지만 평균수명을 고려해 볼 때 퍽이나 오래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는 어느 날인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짱수가 뒤집어 진채로 죽어 있었다고 자신이 새벽에 뒤집어 줬어야 했다며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짱수를 어쩌지 못했던 아이는 첫눈이 흩날리던 날 집 앞 화단에 묻었다. 그 후로 화단을 지날 때 마다 짱수야 안녕, 하며 인사를 잊지 않던 아이였다. 우리는 애완견을 키운 적이 없었고 아이는 개나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편인데 곤충에 쏟는 애정은 남달랐다. 이 책에는 장수풍뎅이 같은 딱정벌레 곤충들이 인격을 가진 친구들로 등장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모범생 장수풍뎅이가 정확한 답안을 쪽지에 적어 사슴벌레에게 전달한다. 폭탄먼지벌레의 독가스 살포로 교실은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타 다른 학생들이 답안을 베껴 쓴 덕에 딱정벌레반은 전체 학생이 시험에 통과한다는 해피엔딩이었다. 정의를 위해 단결한 건 아니지만 아이는 역시 장수가 자기처럼 똑똑하다고 우쭐해 했다.

 

 

 

새로운 추억을 만들다

 

 

나는 아이와 책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에 나오는 곤충들을 예로 들어 보았다. 혹시 반에서 큰 턱으로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슴벌레 같은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사슴벌레의 행동을 지혜롭게 변화시키던 남생이잎벌레처럼 힘이 아닌 머리로 친구들을 움직이는 친구는 있는지 물었다.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누구보다 최고인 달팽이 같은 친구가 있는지도. 독가스를 뿜어대는 폭탄먼지 벌레 같이 결정적 한방이 있는 친구. 초음파로 사냥감을 찾는 박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밤나방 같이 촉이 예민한 친구. 날개는 없지만 독니를 가진 늑대거미 001처럼 자신만의 유별난 무기가 있는 친구. 죽은 동물의 사체를 묻어주는 송장벌레처럼 반에서 더럽고 궂은 일을 하는 친구. 쉰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꿀벌처럼 부지런한 친구. 개미같이 몸은 작아도 반을 위해 자기 역할에 충실한 친구...... 누가 폭력적인지 물었다면 대답하기 더 쉬웠을까. 아니었다. 곤충의 생김새와 특성을 확인하면서 친구를 떠올리니 한결 더 쉬웠다. 희한하게도 곤충학교 학생들은 아이네 반 친구들에서도 볼 수 있는 캐릭터와 일치했다. 친구를 곤충에 비유하고 곤충을 친구이름으로 부르니 마치 소꿉놀이 하듯 재미가 났다. 우린 기세를 몰아 책 뒤에 있는 스티커로 교실 분포도를 만들었다. 스티커 위에 곤충이름과 그 옆에 친구설명을 적고 새롭게 합성된 별명을 만들어 우리끼리 키득키득 거리고 나니 새로운 방법의 독서 감상 대화(?)를 마치고난 느낌이었다.(이름을 적으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실 책은 고학년이 읽기엔 조금 쉬웠으나 어른들도 가끔은 만화나 쉬운 그림책이 재미나듯 아이들도 자신의 수준보다 한 단계 낮은 책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듯 했다. 덕분에 나는 친구관계를 조사하고 감시하는 엄마가 아닌 아이와 친구별명을 만들고 그것을 우리끼리 비밀에 부치는 같이 흉보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 아이와 함께 만들어본 ‘우리 반 곤충분포도’ 이다. 가운데 늑대거미는 노래와 춤도 잘추는 반장이면서 일진인 아이를 상징한다. 일진을 중심으로 2인자 딱정벌레들과 행동대원 사슴벌레, 심부름꾼 바구미들을 근처에 붙였다. 아이는 참았다가 폭발하는 ‘폭탄먼지벌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것저것 고자질을 잘하는 친구, 소문을 내고 말을 옮기는 스피커 같은 친구, 조용히 책 읽고 숨은 지도자 같은 친구, 멋만 부리고 반 일에 관심이 없어 겉도는 친구를 비슷한 곤충과 짝짓기 했다. 맨 오른 쪽과 왼쪽 아래에 못생긴 ‘찐따’ 배자바구미와 더러운 ‘왕따’ 쇠똥구리가 보이고 힘이 세 보이지만 아직 이름은 알수 없는 전학 온 친구도 보인다. 현실은 아쉽게도 왕따 없는 곤충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곤충을 붙이는 위치를 보고 아이가 친구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다 만들어 놓고 나는 이 분포도가 어른들 조직에서도 비슷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나 아이는 학교숙제로 독서 감상문을 내야 하는데 다른 읽은 책이 없어 이 책에 대해 써야겠다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제가 너무 쉽다고 무슨 주제로 써야 할지 내게 물었다. 왕따에 대해 쓰자니 마음이 불편해서 솔직하기 싫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나는 기억나는 한마디가 없느냐 물었고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지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다 싶은 나는 페이지를 펼치며 ‘중요한 건 무엇이 없느냐가 아닌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늑대거미 001의 한마디를 펼쳐보였다. 늑대거미는 뿔이나 턱이 없었지만 독니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아이가 어떤 내용을 써내었는지 보진 않았다. 꼭 내가 가르쳐 준 힌트를 작성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아 부러 잊은 척 했다. 학부모로서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은 많은 것 같다. 벌써 나만해도 곤충을 빗대어 아이 반 친구들을 파악했으니 대화소재로도 유용했다. 교사라면 곤충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역할극을 만들어도 될 만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도움이 된 메시지는 딱정벌레반 반장인 늑대거미의 한마디였다.

 

 

한창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라 요즘 들어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누구는 다리가 짧은데 반바지를 입고 왔다고 흉을 보기도 하고 자신은 신체에 비해 발이 커서 창피하다고도 한다. 어떤 아이는 얼굴에 비해 코가 크고 친구 누구는 눈은 큰데 너무 튀어 나왔다고 대신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한창 다른 친구들의 장점이 유독 부러워 보이고 내가 가진 장점은 크게 여기지 않을 시기인 것이다. 더불어 내 단점만 상대적으로 심각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고 그 사람의 장점은 반드시 단점과 연결이 되는 것. 곤충의 경우에도 더욱 크고 힘이 센 뿔은 일을 하는 데는 효율적이겠지만 운동성과 순발력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꼭 신체 외모 뿐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환경도 장점은 언제든 단점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단점이 어느새 장점으로 기능하게 될 수 있다. 자신의 단점을 긍정하면 상대의 단점도 받아들이게 되고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나아가 왕따를 사라지게 하는 근본은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쉽고 웃기지만 그 효과만은 우리 모녀에게 어떤 책보다도 확실했던 것 같다. 우리는 흔히들 인간의 아주 비참한 상황을 ‘벌레만도 못한 삶’이라 비유하곤 한다. 기어다니고 새의 먹이나 되기 쉽상인 곤충들은 우리가 사는 우주와 생태계에서 아주 하찮은 존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왜 저렇게 생겼을까 싶은 신체 부위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고 부족한 능력은 다른 것으로 보상하며 살아가는, 인간보다 지혜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하기 위해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처음엔 옥신각신하다가도 결국 아무도 왕따없는 교실환경을 구축해나가는 곤충들이야 말로 어쩌면 사람보다 공존과 공생의 개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바로 이 책의 가치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가는 곤충들이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친구들과 무엇이라도 조금만 다르면 왕따가 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곤충들의 모습은 어른이나 아이에게 새삼 되새겨야 할 교훈인 듯 하다.

 

 

작년 말부터 터져 나온 학교 폭력의 실상과 그로인한 청소년들의 자살이 이제 곧 청소년이 되는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처럼 귀뚜라미 선생님이 실종되자 다들 모여 단체로 개미네 집을 방문하는 학생들이 그립다. 문득 아이가 정성을 다해 돌봐주던 짱수도 그립다. 이제 짱수는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유익한 거름이 되었거나 다른 유충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잊혀진 유기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 가슴에 새겨진 맨 처음 곤충의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더불어 오늘 아이와 나눈 우발적인 대화도 짱수 뒤에 새로운 곤충의 추억으로 덧붙여지길 기대한다. 자연속에서 우리 인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와 쉬운 교훈으로 아이와 의미있고 재미난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한다.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 모두에게 이 책은 살아있는 곤충의 추억을 만들고 서로 나누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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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1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한사람님 서재에 들러서 글을 읽다가 남깁니다. 대단한 글이네요. 한사람님 뿐만 아니라 한사람님 자녀와 함께 쓴.. 한편으로는 참.. 뭐랄까 씁쓸한 기분도 남네요. 찐따와 일진은 진짜 사라져야되는데.. 잘안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