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정봉주 - 나는꼼수다 2라운드 쌩토크: 더 가벼운 정치로 공중부양
정봉주 지음 / 왕의서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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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뜨겁다

 

 

   보통, 읽고 싶은 책은 늘 읽어야 할 책을 앞지른다. 그런데 읽고 싶은 책은 대개 읽지 않아도 될 책 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읽어야 할 책은 읽고 싶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의해 의무로 새겨보아야 할 책이고 읽고 싶은 책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되었지만 욕망에 의해 넘길 수밖에 없는 책인 것이다. 전자가 머리로 이해하는 독서라면 후자는 가슴으로 느끼는 독서일 것이다. 독서의 아이러니는 이렇듯 언제나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을 때 불현듯 현실을 파고드는 우연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내겐 이 책 <달려라 정봉주>가 꼭 그랬다. 


   정봉주 전 의원의 대법원 판결을 하루 앞둔 일주일전, 내 트윗 타임라인엔 불효자식을 용서하라며 아버님 산소 앞에 바친 그의 책과 소주 사진이 올라왔다. 그날 글샘님은 그를 응원하기 위해 서재에서 ‘달려라, 정봉주’ 6행시 이벤트를 벌이셨고 나는 늘 그렇듯 지나가는 과객이었지만 그만 울컥한 심경에 급조한 몇 자를 남겨버렸다.(잘은 모르지만 분위기상으로 무죄같은 행운이 절대 따르지 않을 것 같았다. 괘씸죄로 형이 추가되면 되었지... 그리고 다음날 징역 1년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주초에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을 넘기면서 자꾸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던 것이 끝내 미셀 투르니에는 내년으로 미루기로 스스로 합의를 보았다. 정봉주 리뷰를 내년으로 넘기기는 어쩐지 싫었다. ‘나꼼수’ 콘서트나 집회를 좇아갈 체력은 안 되는 형편이고 그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책이, 이런 사람이 있다고 세상에 떠드는 일이므로 해가 가기 전에 운 좋게 가슴 뜨거워진 그 독서값만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여 김어준, 김용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글로써 인사를 대신하려한다. 


   정봉주 전 의원이 구속 수감되던 날, 그러니까 엊그제(26일) 지나가다 KBS 뉴스를 보았는데 삼사십 분을 북한뉴스로 도배하고 스포츠 소식으로 넘어가기 전에 아주 짧은 단신 처리하듯 그것도 인터뷰 목소리까지 묵음처리하며 뉴스를 재빨리 얼버무리는 장면을 보았다. 사건을 보도 했다기보다는 무슨 불법 비디오를 두 배로 재생하듯 후다닥 화면처리 하는 것을 보고 그럴 줄은 알았지만 대단히, 허탈했다. 이 모 씨(이제 MB도 너무 일반존칭이고 이명박 다 쓰는 것도 귀찮고 가카 같은 직함도 아깝다. 그나마 씨자도 붙여 주기 싫었으나 이모 *이라고 하면 농담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할 수 없이 붙여준다. 그래도 공개로 올리는 글이므로 뒷조사 당하고 싶지 않아 한 글자 더 큰 인심 쓰는 것)는 운도 좋지 때마침 죽어준 김정일 덕에 근 열흘째 생일인 기분이 아닐까. 아주 천만다행인 연말을 보내고 있을 그와 이 나라 집권세력, 그리고 덤으로 운 빨까지 가만히 앉아서 빨아 드시는 여권의 대권 공주님까지... 북한은 제대로 따스한 연하장을 날려 보냈다. 보수신문은 연일 안철수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고 호들갑이고 TV 정보란만 빼면 全 신문지면이 로농신문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싶은, 요즘이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선관위 디도스도 FTA 날치기 통과도 4대강 사업도 한나라당 분해설도 싸그리 덮어버리는 괴담이상의 괴력을 발휘하며 연말의 대미를 장식해주고 있지 않은가.



잘못은, 잘못만이 감싸 준다

 

   정봉주 전 의원의 구속을 보면서 대체 그는 얼마나 그들의 허물을 눈감아 주었을까를 생각했다. 왜, 그들은 집권자에 대한 충성심이 이리도 유별나게 절절한 것일까 싶었다. 무슨 일이 터지기만 하면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분은 절대 모르시는 일이고 자기 혼자 독단으로 그분 좋으라고 일을 저질렀다고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 나간 발언을 해댄다. 김어준, 김용민 책에 보면 하나같이 권력자가 가장 무서울 땐 잡아다가 죄 몫으로 감옥 넣는 것이 아니라 비리를 알고서도 음흉하게 감싸줄 때라고 말한다. 가장 질 나쁜 권력자는 지금 살려주고 나중에 옥죄기 위해 혹은 내 비리가 밝혀질 때 비장의 카드로 써먹기 위해 서로서로 보험들 듯이 조커 패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보수 집권세력이 허구한 날 법과 질서가 중요하다고 대중에게 소리 높여 뻥치는 이유는 매일 술 퍼 마시는 작자가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말하는 이치와 똑같다. 그들이 가장 두려운 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고 가장 반가운건 진실이 덮여지는 것, 그리하여 혐의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안 밝혀지기만 하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이 책을 보면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그건 사건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며 떼를 쓰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지만) 맹자(공자인가?)가 말하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당신이 알면 그건 비밀이 아니라 했거늘, 그들은 그 한명의 당신만 없으면(있더라도 사라지게 하면) 완전한 비밀이라 여기는 것이다. 


   내 생각에 누가 되었건 그의 혐의를 묵인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주려는 작자들은 틀림없이 그래야만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밖에 생각하기가 힘들다. 정봉주는 이 책에서 계보가 없기 때문에 여의도에서 대표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왕따 국회의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역으로 만약 계보가 있는 정치인이었다면 과연 구속까지 되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같은 주장을 한 것인데 박근혜가 한 말은 가치판단의 문제이고 정봉주가 내세운 것은 허위사실이 되는 정치현실은 박과 정의 주장이 (홍준표 전 대표가 말한 것처럼)다른 문제이어서가 아니라 박과 정이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인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정치계에서만 발생하는 비극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학연, 지연 등의 인맥과 상관없이 혼자서 잘나가는 인사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지 않는‘같이 살고 같이 죽기’의 사회이다. 오히려 도대체 어디까지 잘나가는 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기회가 생기면 두고보자하는 식이 팽배하다고 할 수 있다. 조직사회에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기회도 많아 보이지만 그만큼 위험의 순간도 많이 찾아온다. 나는 회사 다닐 때 한국의 디자인 산업계가 S대와 H대파로 나뉘어 팽팽한 대결을 벌이다가도 신선한 유학파만 나타나면 갑자기 똘똘 뭉쳐 그들을 배타적으로 왕따 시키는 현장을 무수히 목격했다. 업계에서도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같은 학교출신이기 때문에 정의의 편을 들지 않고 제 식구만 챙기고 감싸려 드는 행태를 지겹도록 보아왔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잘못을 덮어주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비리를 외면하고 우리가 꼭 유명한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살아오면서 내가 속한 계파에 없는 타자들을 알게 모르게 나 몰라라 한 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나이 사십 넘어서 아줌마들끼리 모여도 애들 피아노 가르치는데 선생이 어느 대학 나왔냐고 일단은 묻고 끄덕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꼴을 대단히 잘 학습해온 기성세대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그토록 일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희생은 의원이 하고 당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렇게 당을 위해서 고생한 의원들은 아미도 기억하지 않
   고 구제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당의 모습이고 정치다.   
- p203


   그가 지적했듯이 저격수는 치밀하게 저격을 하는 임무도 있지만 저격에 실패하거나 노출이 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운명이다. 어떨 땐 조직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꼼수 33회에서 김어준은 아주 분통스런 어조로 자기들(민주당) 위해서 앞장서 싸운 당원을 이렇게 버릴 수 있느냐, 왜 하나도 보호해주는 이가 없는 것이냐면서 저격수된 정봉주 형 뒤에서 격조 높게 비난했다. 나이 들어 정봉주 같이 싸울 때 앞장섰다가 나중에 혼자서만 보복당하는 사람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렵고 비겁하기 때문에 자기 살기 위해 결국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를 묵인하며 살아가는구나...그런 생각이 든다. 정봉주를 보면서 알면서도 침묵하고 눈감았을 이 시대의 많은 비겁자들 속에 내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외로왔다. 어쩌면 슬픈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결국 모두 한 사람을 향한 울분의 다른 말이었을 듯하다.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MB가 BBK와 확실한 관련이 있으며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는 이명박 대통령(일 것)이라는 것쯤은 김정일의 아들 이름이 김정은이라는 것만큼 이제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추정소설의 결말이다. 나꼼수와 <닥치고, 정치>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 BBK 기업형 첩보소설의 주인공과 시나리오를 잘 이해하고 있다. 김어준이 사회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정봉주는 보다 형사적으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며 사건을 보도하는 듯했다. 두세 번 이들의 주장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 나라 정부와 검찰은 지난 4년 동안 BBK가 이명박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억지 쓰고 잘 모르는 국민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존재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우리가 이 모 씨를 대통령으로 뽑아 줄 당시로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가 그렇게 도덕적이고 인품이 높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우린 그의 도덕성 결핍을 얼추 예상들 하고 있었지만 그냥 묵인하고 다른 능력을 더 중요시 한 사람들이었다. 정봉주는 한나라의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해 도덕성 검증이 왜 필요하고 왜 그토록 중요한지 절절히 깨우쳐 준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돈을 여기저기서 끌어다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엔 배후 동업자 혹은 의사결정권자 식으로 앞으로 드러나지 않게 창업과 주주관련 사안에 관여를 하면서 회사가 성공하게 되면 슬슬 그 회사는 내가 창업했고 내 소유고 다 내가 기획했다 주장한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 치면 나는 그 회사와 일절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동업자는 썩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판단해 일찌감치 손을 뗐다 하는 것이 사기꾼 형 자본가들의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는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에 추호도 도덕적인 양심이 없다. 기업을 하다보면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큰 돈을 모으고 굴리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액수가 크면 클수록 대개 자신의 도덕성에 무감하다고 본다. 이는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죄책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통령을 한다하면 그 도덕성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 정봉주가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BBK 전모를 다시 한번 학습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모 씨는 전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있다하여도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느낀다 하여도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라는 것. 나는 확신한다, 그의 뻔뻔함과 불감증을. 문제는 우리가 그의 성향을 몰랐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의 욕망에 따라 그를 택하였다는 것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 보면 민주주의가 꼭 훌륭한 지도자를 뽑는 제도는 아니라는 투표의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정봉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환상을 하기 쉽다고 꼬집는다. 유시민은 (다양한 국가론을 빌어) 민주주의가 ‘국가를 잘 통치할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과 정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제도’가 아니라 무능하거나 최악의 인물이 지도자로 선출되더라도 그 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 정리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법치주의 역시 법과 형벌로 국민(통치 받는 자)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
     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 ” 

 

 

    “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
     리는 데는 어떤 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법을 만들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
    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원칙이다
. ”    -50 p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中

 

   이렇듯 지도자의 일방적이고 잘못된 권력행사를 막기 위한 법치주의, 민주주의가 현 정권 들어 급격히 후퇴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임종하기 한 달 전 마치 유언처럼 하소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지적하신 그대로 그때 이후로 무슨 정언명령처럼 더욱 우리나라의 법치주의, 민주주의는 완전 추락의 내리막길을 달려와 이제 진실을 덮고 거대한 흐름을 막아보고자 용기 있는 한 정치인을 황급히 감옥에 보내버린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절망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국민은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 씨가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 주었다면 정봉주는 민주주의의 유약하고도 위험적인 속성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일어나서 달려라

 

 

   드레스룸에서 감옥연습을 했다는 그는 얼마나 수감생활을 하게 될까. 3월 1일 사면을 바라는 국민들에게 자신은 떳떳이 형기를 다 채우고 나오겠다 답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꼼수 녹음실에는 실물 정봉주 사진을 갖다 놓고 김용민은 편집할 때 정봉주 웃음소리를 적절히 삽입하겠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어제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의 소방서 119 전화 건으로 정봉주의 웃음소리는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우연의 일치인지 정봉주는 이 책에서 김문수와 미국에 동행했을 때 김문수가 미국을 꼭 위대한 미국, ‘Great America’라 말할 필요가 있는지 비판했다) 지난번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했을 때 욕설로 되받아 쳤다고 한 그 부분을 절묘하게 편집하여 김문수 전화목소리와 이어 붙이니 도저히 듣고서 나자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사실 욕설 수위가 높아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기가 막히게 쓰여 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정봉주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많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조직도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세상은 아직...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꼼수 에서나 대외적으로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두렵다. 일부라도 뒤집히지 않고 그대로 확정된다
    면 꼼짝없이 감옥행이다. 나를 지켜줄 사람도, 조직도 하나 없는 지금, 그야말로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 졌다
.  -256p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인데 이 정권에서의 의혹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고 검찰수사나 발표 같은 것은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보수 신문에선 모두가 근거 없는 괴담이고 괴담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병적인 요소라 지적들 하고 있지만 언제나 핵심정보를 증언할 만한 인물들은 늘 그렇듯 기획출국 아니면 기획입국된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땐 꼭 서태지-이지아 건과 유사한 대형 스캔들이 동시에 살포된다. 그리고 서둘러 눈에 보이는 요직 몇 사람이 잘리거나 구속되는 것으로 수사는 종결된다. 이에 정봉주의 결론은 이렇다. 검찰은 정치권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안밖으로 깨끗해지면 그 개혁의 칼날은 그대로 검찰개혁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에 ‘비리의 정보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정치권을 향해 적당히 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더 편한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나 역시 적극 동의한다.(자기들도 뒤로 구리기는 마찬가지니) 그런데 이 논리로 따지면 뒤를 봐주는 빽이 없고 정의롭게만 살아왔다면 그 사람은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많아진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한 뒷생각을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깨끗한 정치인이 많아 봤자 검찰만 피곤해질 것이 자명하기에. 이렇게된 사회에선 그 누가 저격수 역할을 하고 선봉장이 되어 비리를 밝히려 들 것인가.

 

 

   또 하나, 이 책의 말미에는 부산, 삼화 저축은행 비리사건에 대한 의혹도 제시 되어 있다. 핵심은 쓰러져 가는 은행에 삼성이나 포스텍 같은 대기업이 막대한 돈을 투자하게 된 배경이다. 투자 유치와 중간 돈 빼돌리기 과정에 로비스트에 해당하는 인물이 포착되는데 늘 그렇듯 대통력 친인척과 여권 수뇌부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시작은 대규모 비리수사에 착수할 것처럼 창대하지만 신기하게도 대통령의 형, 조카사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의 실명이 거론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검찰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정치권과 연관이 없다며 수사를 종결한다. 어차피 고령의 상인과 서민들만 피땀 흘려 벌어 놓은 돈을 다 날리고 난 이후이다. 시장근처에서 자주 볼 수 있어 서민과 친한 줄 알았던 저축은행은 기실 금전적 이해관계로 얽혀진 검은 커넥션으로 운영되어온 그들만의 ‘욕망의 도가니’ 로 기능해 온것이다. 정봉주는 이 챞터의 소제목을 미리보는 청문회라 칭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치적을 홍보하고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원외교로 국민을 현혹하는 과정과 교육전공자답게 대학등록금의 문제도 거론하였다. 등록금 인상이 탐욕스런 사학비리와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공공성을 담보해야 할 교육부가 학생이 아닌 대학의 편을 드는 행태 역시 전관예우와 먹이사슬 관계로 엮어진 오래된 어둠의 커넥션이라 말했다. 가만 보면 대통령부터 이어지는 뿌리 깊은 서로 눈감아 주고 챙겨주기 관행이 아닐 수 없다. 공직의 최고위직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 공무원이 좇아가는 악습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거나 부패한 대학이라고 해도 교육부는 그 대학들 편이다. 교육부 고급 공무원들이 은퇴하면 그 대학의 고
   위 직원이나 교수로 가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은퇴한 공무원은 그 대학을 위해 교육부에 감사 축소 로비
   를 하거나 혹은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한 로비 창구로 쓰인다.
  -303p

 

 

   아직 주진우 기자의 글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나꼼수 4인방 중 김어준, 김용민과 비교해보면(책만으로) 그는 말하는 대로 글을 쓰는 사람인 듯하다. 김어준의 글은 말하는 방식과는 상반되는 쪽이었고 김용민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듯 했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지만 말하는 방향은 한 곳인 것 같다. 정의와 도덕. 참여와 용기. 기죽지 말고 일어나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정치인생을 살아왔다 생각하지만 90프로는 인정받지 못한 과정 이었다 고백한다.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자신을 포레스트 검프와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과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달리라는 말이 어쩌면 우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달리는 순간 고통은 잊고 정면을 응시하는 순간 이미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나 역시 삶이 시련의 연속이라는 것에 눈물이 마를 만큼 아니 목에 침을 삼키기 어려울 만큼 말라버린 목소리로 그렇다 답하고 싶다. 정봉주, 그가 수감되기 직전에 녹음실에서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고맙다며, 그리고 사랑한다며 말해놓곤 울어 버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사람은 감옥에 가둘 수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준엄한 외침도 잊지 않으련다. 세밑이 예전만큼 따스하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순 없다. 그곳이 어디든 외롭게 달리고 있을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이제 그에게 반대로 이곳에서 이렇게 손잡고 달리고 있을 우리를 기억하라 전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어쩌면 아무 힘도 못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말해드리고 적어 놓고 싶다. 2012년엔 그렇게 견딘 모든 시련이 부디 우리가 염원하는 정의, 그리고 진실과 도덕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상식으로 열매 맺길 기대한다. 새삼 '역사를 신앙으로 섬기고 정의를 믿었으며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은 한 사람이 생각난다. 정봉주, 그 역시 이 추운 겨울동안에도 죽지 않는 인동(忍冬)의 세월을 이기고 당당히 세상에 나와 다시 정치의 꽃을 피우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때까지는 국민이고 싶다. 아니 세월을 같이 기다린 후 그때부터 라면 더욱 국민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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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이런 가슴으로 읽어주는 책 2,3권은 읽어줘야 하는데
올해 그런 책이 과연 있었나 싶기도 하네요.
저는 그 좋다던 <닥치고 정치>도 읽어주지 못하고 한해를 마무리하니 참...ㅜ
일껏 생각한 것이 올해 참 소설 안 읽었다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나라가 발전할게 무에 있었겠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란 간판 걸고 사는 것을 보면...그냥 웃지요.^^

꽃도둑 2011-12-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꼼수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는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너무 감성적으로 치우치게 했다고 우려하던데...
저는 솔직히 나꼼수 이전에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 수준이었는데...덕분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으니..
글쎄요,,이성과 감성 모두를 작동시키며 다가선 것 같은데..왜 그런 우려를 하시는지...뭔가 두려운게 있는 걸까요?
격을 너무 떨어뜨려서 우리모두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건가요?,,,ㅎㅎ

저는 이 격없음이 너무 좋은데요..시들시들한 정치라는 가지에 물 오르게 하고 새싹이 돋게 한 그들을 위해
나역시 체력이 딸리는 관계로다 그들이 낸 책을 싸그리 사는 걸로 고마움을 표시하긴 했는데 왠지 약에요(김어준투로 읽어주세요) 지금은 보수를 팝니다를 읽고 있는데 아ㅡ, 좋아요,

글샘 2011-12-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봉주 유죄의 근거가 그거잖아요.
이씨도 그렇고 딴날당도 그렇고, bbk가 지꺼 아니라는데 왜 자꾸 우기냐고,
그리고, 아마 정봉주는 아니라고 믿으면서 민주당땜에 우기는 거라고...

근데, 어떡하죠? 그 회사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이제 누구나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뜨거운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12-30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에는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망언과 공익에 위배되는 정치적 활동을 한 나쁜 정치인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정봉주 씨 같은 군력의 부당함에 맞설 줄 아는 좋은 정치인들이 있어서 다행인거 같아요.
그리고 연말에 김근태 씨가 세상을 떠난 것도 아쉽고요. 또 나꼼수의 인기도 대단했고요.
여당 박근혜 비대위에서 디도스 사건 검증을 위해서 김어준 씨를 영입하려고 했으니까요.
물론 김어준 씨가 비대위의 제안을 거절했지만요.

2012-01-01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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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면

 

 

 

   올해 나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성장했다. 순수한 시간의 속도감은 사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빠르게 체감 되었지만 글쓰기로 내가 이룬 것들은 성과 면에서 본다면 지지부진, 그야말로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성과를 지향하지 않으니 가시적인 성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무어라도 하나 챙겨 받는 사람들이 더욱 남들의 성과를 부러워하고 자연스레 욕심도 낼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것. 이 증상이 꼭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괜한 열패감 때문에 서글퍼지거나 혹은 어줍잖은 위선이나 기만으로 서로 의무적인 축하의 당위성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꼴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천히 걸어 오래 사는 거북이를 택했기에 올해 나는 글쓰기만을 위한 글쓰는 자유를 눈에 보이는 보상과 과감히 빅딜할 수 있었다고 본다.

 

 

   새삼, 지난 일 년 간 내 글쓰기 행보를 돌이켜보면 중간에 색다른 유혹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상채기들도 예상보다 많이 치루어 낸 듯하다. 모두 그전과는 다르게 쓰고 다른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달라진 글 때문이라 생각한다. 허나 글쓰기라는 행위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다짐했다고 해서 쉽게 바뀌어지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역량을 평소 열정의 부피만큼 동일한 정도로 발전시키는데 퍽이나 힘겨운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래야 하는 나를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아니 그랬기 때문에 얼마간은 견뎌내었고 결과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이룬 가장 큰 성과로 삼고 싶다.

 

 

   냉정하게 말해 글쓰는 내 수준과 현재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지방 어느 중소도시 읍내 나이트 클럽의 무희 혹은 전속까지는 안 되고 이리저리 알바 뛰는 미사리 밤무대 가수 정도라 생각한다. 신인가수로 데뷔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오디션 같은 등용문을 통과하기엔 질곡한 세월의 때가 두껍게 쌓여 버린. 물론 나도 내 전공이 있고 내가 해온 일이 있으므로 그 바닥에선 전문가 소릴 들을 수 있(었)을 지언정, 노래로 치자면 그러니까 가수를 하겠다고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고 보자면 앞날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춘문예에는 대부분 문창과 출신들의 공모용으로 잘 훈련된 글이 당선이 되고 출판사 문학상에는 다소 실험적인 작품들이 신인상의 영예를 차지하며 운 좋게 그러한 바늘구멍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낙타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생활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쯤은 말 안 해줘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까놓고 말해 무엇 하나 보장되지 않은 문학의 길에 당신의 남은 인생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딱히 근사하게 답해줄 말은 없다. 언제까지 생업으로 미사리 가수를 지속할지도 모르겠고(미사리 가수는 그래도 돈이라도 받지 ㅠ)이마저도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확신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칼만 빼들은 상태인지라 포기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긴 하다만 올해 같은 시간이 몇 년 만 더 지나간다면 나는 아마 지나온 시간을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지 몰랐듯이 그때 나 역시 그렇게 살게 될지 모를 것이 뻔하지 않은가.

 

 

   늘 그렇듯, 이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한 쓸쓸함보다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적지 않은 글쓰기 책과 작법을 알려주는 책, 소설가의 소설 쓰는 이야기 책을 습관적으로 집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수많은 위대한 소설가들 중에 굳이 닮고 싶은 작가는 없다. 누구를 모델로 삼은 적도 없고 어떤 작품을 흠모해 본 적도 없다. 작가의 인생과 그가 견뎌낸 세월과 그로인해 탄생한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들은 나와는 점점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그러면서 반대로 그 작가의 단점을 찾아내 그 구멍으로 탈출구를 빚어 낼 줄은 알았다. 예를 들어 문체상으로는 이청준, 이문열, 김훈의 글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과 가장 비슷하다 여기지만 감성이 부족한 보수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는 식이다. 중산층 비틀기로서의 박완서는 완벽하지만 과거로의 끝없는 회기와 동어 반복적 서사는 고루하기 짝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소설적이지 않다, 뭐 이런 식으로 웃기지도 않게 나는 내 맘대로 내 잣대로 선을 그어 버린다.

 

 

   나는 내 글이 어느 정도 서사의 리듬감은 있지만 문장 속에서 유머나 위트가 현저히 부족해 무겁게만 느껴진 적이 많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칼날을 휘두르면 엄청난 냉소가 느껴지고 조금만 청승을 떨면 여지없이 땅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누구나 자신의 글에 대해 객관적일수가 없겠지만 나에 대해 그리고 내 글에 대해 말하는 여러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내 글은 지나치게 고집스럽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만의 논리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고, 나쁘게 꼬집으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독단의 도가니. 나는 이 성향이 좋고 싫고를 떠나 형제 없이 혼자자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온 삶의 이력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방식이라 진단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내가 쓰는 방식을 결정지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내 고집이 과연 어떠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것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제공할 수 있는 가인데 그 부분의 긍극적 질문에 이르면 내가 과연 왜 소설을 쓰려고 했던 가로 그만 다시 회기하고 만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소설은 쓰여 지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소설은 택하여 지는가. 나는. 왜. 하필. 소설. 인 것인가.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쓰고 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고 하루마다 답을 한다. 며칠 전엔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해보고자...하는 궁색한 답을 내놓고는 서둘러 질문을 폐기해버렸는데 고맙게도 그날, 이웃 한분이 당신은 미셀 투르니에 같은 글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미셀 투르니에의 작품을 하나 안 읽어 보았지만 바로 한권도 읽어보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갑자기 가슴이 홧홧해져 오는 것이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발은 흩날리자마자 길바닥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날은 그렇게 쌓이지 않는 눈들이 빗물보다 눈물보다 더 부질 없어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님이 말해주기 전까지 전혀 내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책이었지만 그 사이 혹시 누군가 그의 책들을 다 빌려라도 갔을까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생이라는 게 참 눈이 그렇게 쏟아져도 아무것도 쌓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두어 개 빌려왔고 대여를 하면서 누군가가 반납한 책이 눈에 들어와 그 책도 덤으로 가져왔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두어 달 전 같은 책을 서점에서 들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미셀 투르니에 책은 신간 에세이도 한권 주문을 했고 빌려온 두 권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안 빌려도 되었을, 아니 자칫하면 안 빌릴 수 있었던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자꾸 눈에 밟혀 결국 그 책을 먼저 읽고 말았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한 개 정도의 페이퍼를 더 쓸지 모르겠는데 만약 쓰게 된다면 미셀 트루니에로 하자,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안해도 되는 다짐을 왜 했는지 ㅠ) 나는 지금도 본 책이 아닌 별책부록을 먼저 대접한 것에 겸연쩍어 하고 있다. 어쩌면 부록이 간절해 본 책을 구입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때로는 부록이 본전이상을 뽑으며 톡톡히 효자노릇을 할 때도 있으니까.

 

 

 

 

비법을 말해 준다면

 

 

 

   제목은 우선 그럴싸한 페이크임이 분명하다. 그럴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에는 열일곱 명의 소설가가 자신만의 창작론을 저마다의 문체로 자아내고 있다. 모두들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가 되니 그것들을 모아놓고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라 근사하게 이름 붙였을 뿐. 사실 적절한 주제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나는 늘 출판사의 제목마케팅에 불만이 많은 독자라...) 허나 누가 봐도 ‘쓴다’는 것보단 ‘산다’는 것이 더 철학적, 문학적이며 더 깊이 있고 더 팔릴만한 뉘앙스이렷다. 소설가로 산다는 건 소설을 쓴다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넘어가주기로 하고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느꼈던 몇 가지 감상은 기록해두고 싶다.

 

 

   먼저 개인적으로 열일곱 명중에 소설가로 사는 모습이 정말로 궁금했던 작가는 전경린이었고 창작론이 궁금했던 작가는 김인숙, 하성란 정도였다. 나머지(라 칭하여 죄송하지만) 분들은 큰 기대가 없었다.(별로 비밀을 알려 줄 것 같지 않아서 ㅋ) 김경욱의 작자와 화자, 주인공에 대한 식견은 쉽게 해도 될 말을 현학적으로 치장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김애란의 경우도 마치 단편 소설을 쓰듯 접근한 방식이, 문청시절을 아스라이 회상하는 언어들이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음악을 모티브로 작업을 한다는 김연수의 글도 흡사 논문숙제를 하는 느낌이 들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북경, 세기 전 신채호가 살았던 집을 거닌다.’로 시작되는 김인숙의 글은 소설의 소재를 좇아 마치 마지막 퍼즐을 찾듯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글 자체로 보여준 것 같아 그 울림이 색다르고 깊게 다가왔다. 직업 소설가 십 삼년 차라는 김종광의 글은 평소 생각을 꾸미지 않고 솔직한 심정을 전달한 것 같아 애틋하게 느껴졌달까. 김훈의 글은 언젠가 책을 뒤적이면서 가장 먼저 읽었던 기억이 생생한 내용인지라 익숙했다. 하지만 그가 쓴 창작론을 읽고도 실제 창작에 도움되는 힌트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김훈은 언제나 내게 문장의 완벽함은 선사하지만 그 완벽함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박민규도 자기만의 비법 같은 건 절대 공개하지 않을 작가로 인식되는데(외려 비법이 없음에 대한 논리를 만들겠지만) 이번 글 역시 주제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아 독자로서 심히 불쾌하기 까지 했다. 글이야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실험적, 창의적이었고 심심하니까 자동기술법을 연마한다는 박민규식 오토매틱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읽고 나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김훈과 매일반이었다고 할까. 차라리 부부 동반 자리에 초대를 받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회상하며 소설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톺아가는 서하진의 글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결혼하여 이십 오 년을 살았다는 지인을 보면서 대단하지 않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소설가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는 심윤경의 글에선 자신의 낙선작에 대한 논평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심경이 제일 공감갔다.(알레고리와 메타포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던 말에 무조건 끄덕끄덕) 윤성희는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에 스티븐 킹이 답했다는 “한 번에 한 단어씩 쓰죠.” 라는 대답의 의미를 좇아 글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순간의 고민을 풀어 놓았다. 일개 독자지만 작가의 글에서 한결같은 성실함의 태도가 엿보였다고 한다면 건방지다 하실런가. 윤영수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선배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도 계속하여 글을 고민하고 있는 작가의 내면을 그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작가의 삶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나이는 고작 오십 줄이지만 의식이 통과했던 시간은 조선중엽까지의 시간을 포함하기에 추억의 깊이가 남다르게 느껴진 이순원은 어디선가 받아놓고 꽂아만 두었던 <은비령>을 쓴 작가였다. 어린 시절 별에 대해 꿈꾸어 온 것들이 다시 소설로 그려진 것이라는 그는 작가에게 공백의 시간은 없다고 위로했다.

 

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 p187    이순원 - 삼백 년 전 소년이 그려낸 ‘은비령’


  

 

    그런가 하면 이혜경의 글처럼 분명 읽었는데 인상적인 구절하나 기억나지 않는 글도 있었다. 보편적이고 무난하고 재미날 것 없어 보이는 개인의 경험들은 확실히 책속에서도 묻히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굳이 뒤져보고 나서 발견한 대목은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구절이었는데 평소 글 잘 쓰는 사람이 꼭 인품이 훌륭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곧 잘 상처를 받는 편이라 밑줄을 그어대고 싶은 걸 그냥 참고 넘어갔구나 하는 정도만 겨우 기억해 냈다.

 

다행히, 전기나 평전들은 나에게 일러주었다. 글쓴이의 인품과 글이 주는 감동이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을 쓴 작가가 고매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인품은 뛰어나나 글로만 보면 얕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니, 아예 글 같은 걸 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 p198    이혜경 - 가만히, 말을 걸어보다

 

 

   하성란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져오신 <세계 어린이 명화>라는 책에서 본적 있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에서 시작해 작품이 거울 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배치한 다음 거울에 비친 풍경을 기다리고 말하는 일이 소설가인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고 증언한다.(한편의 잘 짜여진 소설과도 같은 글이라 역시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한창훈은 서울에서 섬에 왔다가 다시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야기를 하며 사나운 바람과 거친 파도가 그리워지는 이유에 대해 자기만의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다. 함정임은 광화문 시절의 문학사상사, 적선동 현대빌딩 팔층의 책상을 회상하며 소설이 시작된 곳을 추억하는 여정의 기록을 작성했다. 기억나는 건 소설이 미리 플롯을 정해놓지 않고 ‘누구도 끝을 알 수 없는, 한편의 미지의 소설을 향해 길을 떠나는, 떠나는 중에 하나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는 고백이었다.

 

 

 

 

계속 써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현재 내 위치에서 가장 구체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전경린이었다. 내가 만약 원고를 청탁한 쪽이었다면 전경린의 글이 가장 취지에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저마다 개성적인 자기만의 문체로 자신만의 창작론을 언급했지만 대부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았던 반면 전경린은 구체적인 디테일을 이야기 하면서도 큰 크림을 자신만의 언어로 축조하는데 능숙했다. 그녀는 지금 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내게 고맙게도 소설이 쓰이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소설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은유라 말했다. 말하자면 ‘내가 쓰는 전체를 한 단어로 은유할 수 있는가, 한 문장으로 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소설쓰기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과정이다. 대부분 내 소설은 내가 잘 아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을 향해간다. ...머뭇거림이란 불길한 징조다... 흥미는 사라지고 채워야 할 당위만 남아 뻣뻣하게 굳은 과제로 변해버린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을 끌고 가는 의문과 유혹과 몰입이다.   - p207 

 

 

소설이 삼분의 일 지점을 살짝 넘어설 때에야 대체로 전체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와 함께 쓰기의 원인도 잡히고 결말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기가 쓰는 것에 대해 잘 모를 때도 열망이 있다면 쓰기 시작해야 하고 계속 써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쓰기의 현재성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 소설 역시 발밑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과정 자체의 아름다운 인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고 완성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쓰는 것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내 의도를 지나가, 잠재되어 있었던 가능성의 끝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겨우 초고가 생겨난다.   - p209

 

- 전경린 - 울려와 은유 中

 

 

   책을 낸 작가보다 초고를 품고 있는 작가가 부럽다는 전경린은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무어라고 감히 문단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이 말하는 창작론을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책을 읽었다는 독자된 특권으로 작가와 방법론을 비교하며 즐거운 평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울러 진부하지만 그들로부터 또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가려한다. 현재 능력은 안 되지만 끙끙대며 두 번째 소설(비슷한 작품)을 써대고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떠한 성과가 없다 하더라도 절대 중단하지 않고 끝을 낼 작정이다. (나는 현재 서바이벌 형식의 연재소설 공모에 참여중이다) 연말에 내린 결심이라곤 이거 하나지만 나는 어디서 상 하나 타는 실적보다 우스운 결말이라도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막연히 깨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비 작가들이 다음 단계로 진출이 확정되지 못하면 스스로 연재를 중단한다는 다소 처연한 분위기의 고지를 올린다. 어떤 분은 2단계 심사가 통과되지 못하여 아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쓰셨다. 그의 아내도 아니면서 그의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따로 소설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거절당한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완성을 하게 될 지 그냥 그것으로써 작품의 운명은 끝나게 되는 것인지도. 다른 작가들이 속속들이 다음 단계를 통과하며 고지를 향하고 있을 때 탈락한 작품을 붙들고 완결한답시고 연재를 지속하기가 얼마나 쪽팔리고 또 서글픈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나도 끝까지 갈 것 같지는 않고 대충 어느 단계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이유로(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평가로) 탈락이 될지 모른다. 나 역시도 그때가 되더라도 그래도 끝은 내야겠다며 고집스럽게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이 틀렸는지 어디가 부족한지 집요하게 듣고 알아보기 위해 그리하여 그 어렵다는 객관의 평을 손에 붙들고 읽고 또 읽어보기 위해, 그분처럼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번쯤 울어는 보기 위해 끝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끝내는 두려움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기에 ㅋ)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이미 쓰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한다면 지금,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는다는 김병만의 얼굴이 생각난다. 거북이의 매력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꿈을 이루는 일은 어쩌면 살면서 가장 기쁜 일이기에 누구에게나 슬픈 추억이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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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2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일종의 `고시 합격생 수기`같은 것이로군요. 아무래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앞으로 그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일 것이므로 뭔가 회상적이고 비틀어진 글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직접적인 것이 더 나을 수 있겠죠.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는데 `소설가는 삶의 공백을 보는 사람`이라고..그렇다면 문제는 그 공백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겠지요. (저는 여기에 없지만 배수아 작가의 창작기, 창작론이 궁금하네요. 여기에 낄 급(?)은 아닌지 모르지만, 김중혁 작가라면 뭔가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줄 것 같기도 한데..)
 
거장처럼 써라 - 헤밍웨이, 포크너, 샐린저 외 18인의 작법 분석
윌리엄 케인 지음, 김민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해가 가기 전에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멍하니 쳐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에 틈만 나면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지난번에 다 읽었으나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한 책들을 정리하면서 무언가 빚진 마음을 털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변명의 리스트에도 끼지 못한 채 읽다가 흐지부지 되었거나 분명 읽기는 했는데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책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 중 놀랍게도 어떤 책은 친절하게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건만 나는 그 중요하다 판단된 구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을 ‘잊는’ 사람들은 아닐까 싶었다. 좋다고 남들한테 추천까지 한 책 중에도 그러한 비운의 책이 있었다. 책을 읽었다고 덮었다고 다 내 것이 되지는 않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섣불리 읽었다고 말해버린 책 중에 다시 두 번째로 정독한 책을 말하고 싶다. 소설 좋아하고 글쓰기 좋아하고 나같이 문학에 꿈을 둔 적이 있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안테나가 발동하여 사들이는 책.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쓰기 책은 사실 주관적인 경향이 짙은데 비평가나 일선 교수가 정리한 책은 체계적이면서 온도가 일정한 장점이 있다. 바로, 위대한 작가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글씨기 비법에 관한 책이다. 

 

 

   사실, 글 쓰는 입장에서 이런 책은 열심히 밑줄 칠 땐 절실하나 막상 덮고 나면 수많은 밑줄만큼 효과가 큰 책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에서 끝나고 연습이나 실천으로 이행되지는 않는 틀에 박힌 내용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론적 차원의 충고들이 현재 소설 좀 써보겠다고 바둥거리는 내게는 새삼 뼈가되고 살이 되는 느낌이다. 책이 어떤 사람에게 찾아와 실용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는 다 때가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보다는 지금 당장 글을 쓰고 있는 와중의 펜을 든 사람들에게 더 유효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작가는 모두 21명이며 그들의 장점이라고 소개된 구체적인 테크닉은 이미 문학적으로 성공이 입증된 장치들이다. 안다고 해서 모든 걸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한다 해서 결코 그들만큼 훌륭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런데 저자는 모방하고 모방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을 뛰어 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주장한다. 줄기차게 모방하다보면 어느덧 모범이 된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그렇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모방’이라는 테크닉에 관한 설명서이다. 독창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려면 모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비롯된 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들도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카프카도 남녀 간의 사랑묘사는 빈약했고 등장인물의 배경설명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샐린저같은 대작가도 어떤 부분 자신보다 뛰어난 카프카를 모방하고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지닌 천재적인 작가 앞에서 숱한 좌절을 느끼며 패배감을 맛보았다. 저자는 내 글이 독자의 귀에 음악처럼 들릴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고 끝까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잊어먹지 않기 위해 현재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분들과 요약노트를 나누는 심정으로, 기록차원에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책에선 작가별로 분류했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다시 소설의 구성요소로 나누어 보았다. 겹치는 내용이 많았고 내게는 누가 말했느냐 보다는 무엇을 말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누구라도 카프카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단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모방은 이런 것이다. 진정한 모방은 본보기로 삼은 작가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방은 당신과 당신이 모범으로 삼은 작가 사이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모범으로 삼은 작가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 183p

 

 

 

 

1. 문장

 

 

 

   맨 처음, 문장으로 치자면 발자크도 거지같은 문체였기에(그의 더듬거리는 문체를 견디지 못한 독자가 많았다고 한다) 매끄러운 문장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문장력이 유려하지 않아도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바꿔 말하면 문장력 좋다고 소설이 꼭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퍼뜩 생각나길 언어학을 공부하고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고종석과 오랜 기자출신의 김훈이 떠올랐다. 고종석은 ‘흠 잡을 데 없는 문장력을 지닌 스타일리스트’ 혹은 ‘가장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알려진 소설가이며 김훈은 서사보다는 문체 장악력이 뛰어난 우리시대 대표적 문장가이다. 이들이 아름다운 문장 통제력을 가진 작가라는 걸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들의 소설이 가장 재미나고 완벽한 소설이라는 데에는 주저하는 독자도 있을 터이다. 문장력이야 작가들의 필수적인 요건이지만 만약 문장에 자신이 없다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적확한 수식어구와 세밀한 감정묘사에 치중하라는 말. 그러다 보면 차츰 문장도 발전하리라는 뜻.

 

 


- 정확한 표현을 위해 주저하지 말고 길고 복잡한 문장을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라.

  (내 글은 길고도 긴 기차와 같다. 문장 끊기가 정말 어렵다.)

- 헤밍웨이는 쉼표와의 전쟁을 벌였다. 종속절이 지나치면 학문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빈번한 종속절을 사용하여 내 논리를 정당화하고자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 페이지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짧은 대화로 속도감을 유도하고 긴 문단 사이에 한 문단 씩 짧은 문단을 삽입하
  라.

  (헤밍웨이는 페이지가 꽉 막힌 듯 답답함을 싫어했다는)

- 많은 시를 읽고 직접 써보는 것이 훌륭한 문장가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소설이 막힐 때 시집을 읽는다고 하지...)

 

 

 

 

2. 소재

 

 

 

   톨스토이, 플로베르, 헤밍웨이, 조지오웰 등 수많은 거장들은 하나같이 실제 인물을 토대로 등장인물을 만들어 왔다는 주장이다.『모비딕』의 허먼 멜빌은 정말로 수년간 바다위에서 항해하면서 사색을 했고 선원생활을 했기 때문에 고래라는 상징적 자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첩보기관에서 일한 이언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저자는 주저 말고 자신의 추억을 최대한 이용하고 경험한 감정을 변형시켜 줄거리를 만들어 인물을 창조하라 말한다. 현실에서 겪었던 인간관계가 소설의 소재로 채택되고 자신의 경험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고서 상상만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대부분의 소설가가 인터뷰 할 때 특정 인물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다 소재가 된 해당 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이라고까지 증언한다. 소설가가 갑자기 친한 친구와 절교했다면 그건 그 친구의 이야기를 소설에 써먹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정). 어느 순간 ‘과거가 작가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그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다시 구성하고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허긴 사연이 없다면 아무도 작가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 현실의 두 인물을 하나로 합친 복합적 캐릭터는 소설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이건 한명만 들이 파면 미안하니까 즐겨 쓰는 방법이란다)

- 여성독자를 겨냥한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처럼)

- 독자를 파악하고 그들이 경험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공하라. 마가렛 미첼은 여성독자의 심리를 이용했다.
 
(드라마 작가들이 자주 이용하는 심리가 아닐까)

 


 

 

3. 주제

 

 

 

   주제는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더라도 본격적으로 써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소설이 있고 반대로 너무 주입식으로 강조하는 소설을 만날 때도 있다. (고구려 같은 소설은 너무 가르치려 드니까 어떤 부분 웃기는 것 같기도..) 또 세간에 알려진 주제와 내가 느끼는 주제가 틀릴 때도 있었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결론이 다른 소설이 더 의미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큰 주제 안에서의 다양성이 아니라 아예 큰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희망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은 줄거리가 단순해도 충분히 더 주제적(?)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바로 조지 오웰의 경우 서사의 복잡함보다는 단순한 스토리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 철학적 개념을 더 자세히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 주제는 구조의 결함을 고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주제를 뒷받침하거나 구현하는 사건이 있다면 최대한 활용하라.

- 주요 모티프와 주제, 상징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한다.

 

 

 

 

4. 서사 및 구성(내러티브)

 

 

 

   18, 19세기 소설가들의 소설 구성 방식이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마치 우리 때와는 다른 책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해도 결국 말하고 듣고 쓰고 읽어야 하는 문제인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하다. 이 책에서는 누구는 발음이 좋았고 누구는 독해가 좋았고 누구는 작문이 좋았다고 구분했다. 작가로 보자면 간결한 문체를 가진 최초의 거장 서머싯 몸 같은 작가도 있고 단어를 아끼고 압축된 글을 쓴 헤밍웨이도 있고 반대로 복잡하고 장황한 글의 포크너도 있다. 이들 중 누가 정답이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한들 어느 한가지의 답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들의 재능이나 매력은 곧 결함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치명적 단점이 그 작가의 개성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거장들은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무슨 공식처럼 그들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똑같이 나도 중요하리라는 법은 없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달린 로렌스도 똑같은 소재로 다섯 번 이상 다른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문제는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발전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정보를 꼭꼭 숨겨두는 미스터리 기법을 활용하라.

-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기대하는 데에서 나아가 근심하고 걱정하도록 만들어라. 위험에 처한 인물의 사건 
  해결이 고의적으로 지연되게 하라.

- 복수하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도록 독자에게 위험을 환기시키고 반복을 통해 불안을 지속시켜라.

- 연애와 사랑을 다루는 소설에서는 첫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 중요한 정보는 반복한다.

-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인물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통합적 기교는 서사를 풍부하게 한다.

- 전조를 소설 곳곳에 12개 정도 흘려 놓는다.
 
(12개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 생각보다 많다고 느낀다. 독자가 기억하는 건 모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일까...)

- 고요함과 격렬함의 교차, 빠른 행동과 느린 설명의 교차, 보폭의 변화로 완급을 조절하라.

-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광고하고 약속하라

- 뜻밖의 사건에는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개연성을 확보하라.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는 불친절한 소설이 많아졌다.)

- 만약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면 주인공의 로맨스로 보편성을 확보하라.

- 소설과 독자 간의 심리적 거리를 단계적으로 좁혀라. 명예롭던 캐릭터가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하락할 때 중간
  과정을 충분히 겪도록 하라.

 

 

 

 

5. 결말

 

 

 

   의심 없이 결말은 소설의 성패를 좌우한다. 어떤 소설을 기억할 때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 소설은 나중에도 결국 희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분명하게 기억되는 결말이 많지 않았다...) 흥미로왔던 건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의 절정과 결말을 정해놓지 않고 소설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등장인물의 망령’이라고도 하는데 흔히들 인물이 소설 속에서 발이 달린 말처럼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고 줄거리를 구성해 나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비록 처음이었지만 나 역시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결말이 결정지어졌기 때문에 이 역시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확실한 결말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것이 더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단편의 경우 더욱 결말을 결말짓는 작업이 힘들다는 생각이다. 결말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 할 사실 중에 독자는 결말에서 놀라움과 발견을 즐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야기 마지막 순간에는 대체로 관대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겉멋을 부린다든지 갑자기 시를 차용한다든지 해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 무엇보다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듬기 위해 작가가 사용해야 할 무기의 하나라는 것이다.

 

 


- 울림이 있는 결말은 주제를 반복하거나 다시 환기시킨다.

- 기분 좋은 울림을 주기 원한다면 ‘그러나’보다 ‘그리고’로 마무리 하는 게 낫다.

   (바꿔 생각하면 ‘그러나’는 비극이나 불쾌한 결말이 아닐까...)

- 결말에서 서로 다른 가치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느낀다.

- 앞선 이야기에서 미묘한 암시를 흘려 결말을 예고하라.

 

 

 

 

6. 인물

 

 

 

   책에선 어떤 작가건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든 부분을 이야기 할 때 인물이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인물은 소설의 핵심이고 작법에 있어 메인이다. 가장 예문과 구체적인 팁들이 많아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 등장인물에는 약점과 결함을 부여하여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도록 하라.

- 등장인물끼리 서로 궁금하도록 만들어라

- 지나치게 인물을 완벽하게 묘사하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척점 상에 놓인 상대적 인물을 그려라

- 등장인물이 자신의 세계에 눈을 뜨는 시점, ‘깨달음의 순간’이 일어나는 지점, 즉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에 정성을 들여라

- 등장인물의 정서적 상태를 드러낼 때에는 감정이 실린 언어를 사용하라.

- 특정인물에 대한 명쾌한 단정보다는 모호한 암시로 관심을 이끌어라.

- 반그림자 접근법이 제공하는 불확실성이 역설적으로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든다. 오해가 충격적 이해로 바뀌
  기 때문이다. 특히 악당은 불확실한 묘사로 더욱 악의가 강렬해진다.
- 단짝 캐릭터를 사용하면 중심인물이 한명 일 때보다 더 심리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비교와 대조를 통해 주제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

- 인물의 지배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하라

-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으로 인물을 밀어 넣고 그 결정이 인물의 인생을 바꿔놓도록 하라.

- 슈퍼 히어로, 괴물(악당), 남성 속에 자리잡은 여성성(amima), 조력자(helper)등 전형을 잘 사용하라.

 

 

 

 

7. 세부사항(묘사, 배경, 화법)

 

 

 

   작법에 있어 디테일한 원칙들은 작가의 취향과 작품의 성격과 관계한다.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며 제시했기 때문에 이해하기는 쉬웠으나 그 작품이 아닌 경우엔 예외적 상황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세부사항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 묘사 > 

 

- 장면전환의 대가는 도스토예프스끼이다. 한 인물의 마음에서 다른 인물의 마음으로 이동하면 장면전환을 입체
  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

- 장소의 빠른 전환과 더불어 정서적 요소를 추가하라.

- 강렬한 감정에 휘둘리는 인물의 외모와 심리상태를 극적으로 묘사하라.

- 등장인물에 매력적인 이름을 짓는다.

- 인물의 지배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하라

- 오감을 자극하고 쾌락을 상상하도록 하여 대리만족 하게 하라.

- 고급음식, 고급차, 고급술, 고급 옷을 자세하게 묘사하라.

- 사치스러움, 상류사회의 삶, 신체의 안락함과 관련된 세부묘사에 공을 들여라

- 인물의 외모를 묘사할 때 풍자를 섞어서 핵심만 짧게 묘사하라.

 

 

< 상징 및 배경 >

 

- 공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 문학적 색깔이 강화된다.

-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집, 먹는 음식으로 신분을 암시하라.

- 더 깊이 있는 소설을 구성하려면 이야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포크너는 입체적인 배경의 대가였다.

- 설득력 있는 소설의 배경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전쟁이나 사건 배경에 대한 느낌과 감상
  을 대화 속에 삽입하라.

-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시각적 생각을 발전시키라.

- 낯선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시작한다.

 

 

< 화법(관점) >

 

 

- 정신적 혼란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먼 과거, 가까운 과거, 현재의 시점을 섞어서 다중시간대를 서술하면 생각
  이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 주인공을 억압하는 의식의 흐름은 꿈을 통해서도 보여주어라

- 1인칭 화자의 경우엔 자신의 병약함을 인정하는 서술을 하라.

- 주인공과 멀고 객관적인 곳에서 가깝고 개인적인 곳으로 접근하라.

- 아무 이유 없이 농담을 하지 말고 진지한 유머로 웃음을 유발하라

- 등장인물의 머리와 마음속에 떠오를 법한 단어나 구절을 찾고 빌려서 말하라. 등장인물이 하는 말과 생각을 비
  롯해 마음속의 느낌까지 전달하는 자유간접화법을 구사하라.

- 수치, 분노, 불안, 추락, 동요, 모욕과 같은 주인공의 감정을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밖으로 꺼내어 보여라

- 인물의 마음속 의식의 흐름과 감정을 폭로하라.

- 주인공을 부드럽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을 고통스럽게 만들어라. 그 옆에 바짝 붙어서 고통을 낱낱이 
  파헤쳐 전달하라.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대부분 은둔하며 글을 썼다.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썼다. 포크너 같은 작가는 독자를 잊어버리고 오직 작가 자신을 위해 글을 썼을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오는 것이라 주장한다. 미리부터 독자의 반응이나 평가에 대한 걱정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주저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독자를 무시하는 작가도 있고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도 있다. 나는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게 될까... 내일은 처음으로 내가 쓴 소설을 평가 받는 날이다. (완성은 아니고 도입부 100매지만 이렇게 떨릴 수가...) 가능성과 용기만으로 글이 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비판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자 이런 책을 다시 펼쳐들고 악착같이 정리까지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뒤돌아 말하고 싶어 이렇게 다독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다시 시작하게 될 때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읽고 나면 더 야무진 마음이 생길지... 부디 포기만 하지 말기를 남몰래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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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2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오래 전에 읽으신 줄 아는데 리뷰는 이제 썼군요.
이책 나름 유익하고 재밌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다 읽지를 못했어요.ㅠ
좋긴한데 리뷰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리를 아주 잘 하셨습니다.^^

굿바이 2011-12-2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이 글 몇 번을 읽어도 신나서...늦었습니다 ㅜㅜ (저녁으로 약속을 옮겼어요)
소설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간 조금 읽어 본 한사람님의 글로 감히 짐작하면
미셀 트루니에,같은 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그저 느낌입니다 :) 싫어하는 작가라면 죄송해요~
그나저나 꼼꼼하게 정리하신 내용을 보면서
저 같은 사람은 포기하기 잘했다 싶습니다. 잘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 어찌나 즐거운지요 orz

2011-12-24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1-12-26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이 모범이 되는 그 두려움이라니요. 울림이 꽤 크네요. ㅠ
포기만 말자는 다짐이 한단계의 심사통과로 돌아와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잘은 몰라서 도대체 몇단계를 거쳐야 최종통과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축하드려요. 흐흐.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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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소설인가


   이 책이 끌렸던 이유는 무엇보다 내게 지금 당면한 문제에서 기인했다. 예전부터 나는 내가 가진 능력과는 상관없이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최근엔 만족스럽진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쓸 수는 있겠다는 생각까지 진도가 나아가긴 했다. ‘하고 싶다’에서 ‘할 수 있다’로 바뀌기 까지 근 이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막상 허접하기 짝이 없는 글을 어영부영 끝마치고 난 후 나는 도저히 내가 쓴 소설 비슷한(?) 글을 다시 읽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이제 그것을 ‘했다’고 말하기엔 얼굴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작정하고 내 글의 내러티브와 구성력, 문체, 인물 등을 면밀히 분석한다면 분명 당신 글은 형편없기 짝이 없군요, 이렇게 말하리라 의심치 않았지만 나는 내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또 (비겁하게도)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건 분명 있긴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잘못을 뒤로 하고는 또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멈추질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은 잘못을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정 오디션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된 듯 했다. 가끔 멘토나 심사위원들이 당신은 당신만의 습관이 너무 굳어진 것 같아 지금 내가 손대기엔 어려워 보인다거나 그동안 불러온 방법을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는 싸늘한 평을 목격할 때가 있었는데 곧 잘 노래는 하지만 가수로 키우긴 석연찮아 보이는 참가자의 모습을, 그만 발견하고 만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려고 발걸음을 떼는 내 모습, 정확히는 그러기 전 거울에 비친 내 참담한 얼굴에서.

 

   제대로 문학을 공부하지 않은 채로 열정과 의지만으로 도전을 해보겠다 생각하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날 내가 들추고 있던 책은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이었고 나는 솔직히 신경숙의 소설이 궁금해서 그 책을 읽어 보던 중은 아니었다. 일정기간 작가의 단편이 알토란하게 모였고 출판사에선 자기네 계간지에 게재된 단편을 앞세워 마치 7년 만에 대단한 소설집을 낸 것처럼 홍보하였지만 나는 소설집에서 몇 편은 이미 다른 책자에서 읽어본 글들이었고 그때 하필 젊은 작가들 틈 사이에서 신경숙의 단편은 그다지 신선하지 못했던 것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유명작가의 신작 소설집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또 관성대로 페이지를 넘겨가며 아무런 감동 없이 소설을 읽어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클릭하는 순간 저마다 예약된 감동에 계산대로 도착해야 한다는 계획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왜 이런 식으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연말에 무언가에 쫓기듯 신경숙을 안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이끌려 무엇을 느끼려 소설을 읽는 것인가. 어제도 그제도 읽었고 내일도 읽을 것이니까 오늘도 읽는다, 는 어처구니없는 변명 앞에서 나는 하루를 보냈다. 급기야 그렇다면 언젠가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오늘 읽고 있는 소설은 맞는 것일까, 왜 하필 많은 글 중에 그것이 소설이어야 하고 소설일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소설을 쓰시오란 말을 들은 적이 없고 그 누구도 내게 소설을 쓰면 좋겠다 말한 적이 없었고 나 또한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소설은 언제부터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언제부터 소설을 향하게 되었을까. 왜 소설만이 감동을 줄 것이라 믿게 되었을까. 아니 나는 왜 다른 무엇이 아닌 소설로 감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까. 이런 대책 없는 생각들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퍽이나 고마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글쎄, 오래전부터 나는 어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한권의 책은 그 시점의 몸과 정신에 당장 필요한 필수적 영양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근육에 단백질이 부족하면 고기가 끌리듯 나는 소설에 대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이 대체 우리네 인생에 무엇이며 나는 왜 내 인생에 하필 소설을 끌어 들였는지를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의 문학 비평교수가 쓴 소설론인데 이 편안하고 간명한 가르침 덕분에 나는 지난 일주일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흡사 소설을 명상하듯 이 글을 따라가며 나를 가라앉히고 나를 다독이며 스스로 답하면서 소설의 본연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누구보다 소설이 필요했던 것이고 소설 속에서 다시 내 인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결국 자기만족적인 서사에 빠져들 수 있었던 시간. 책보다는 사실 그 시간에 대한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 회상의 기록을 전하고자 한다.




2. 나는 누구로 말하는가

 

 

   먼저 이 책의 제목은『 How Fiction Works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며 (물음표가 없다) 'works'는 어떤 기계가 장치로서 작동하다는 뜻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책을 덮고 느낀 결론으로서의 'works'는 소설이 인간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여지껏 소설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어떤 긍정적인 도움을 주었나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논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소설의 구성요소(인물, 사건, 배경, 시점)들을 저자의 방식대로 구분하여 서술하기(Narrating), 세부사항(Detail), 작중인물(Character), 언어(Language), 진실·관습·리얼리즘(Truth·Convention·Realism) 등으로 나누어 논지를 펼쳤다. 이론이나 예시가 장황하지 않고 서론 없이 바로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며 저자가 언급했듯이 시점을 말하다가 인물로 들어가고 인물을 말하다가 세부사항을 정리하는 식으로 각장의 경계는 독립적이지는 않다. 프랑스, 영국과 미국의 많은 작가들이 예시로 등장하고 거의 내가 읽어보지 못한 소설을 인용하고 있지만 작가와 작품을 몰라도 상관이 없는 참으로 편안한 문체와 공감을 유도하려는 설득의 자세가 인상 깊었다.

 

   저자는 이 책이 소설을 섬세하게 읽는 입문서가 되길 바란다고 했는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지금 습작을 하고 있는 예비작가 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특히 내 경우 소설을 쓰려고 하니 제일먼저 화자와 주인공에 대한 시점처리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화법에 대한 불안감을 이 책을 통해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할까. 소설을 읽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입장에선 1인칭과 3인칭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넓고 넓은 시점의 바다에서 끝없이 방황하게 된다. 언젠가 소설가 김훈은 3인칭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최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도 ‘1인칭과 3인칭 사이에서 좌초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조바심 속에서’ 한 줄 한 줄 글을 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면 우선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운반할 3인칭 주어가 있어야 하고, 그 3인칭 주어의 실
   존을 
감당해 줄 만한 술어가 있어야 할 터 인데,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과 글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에게서 너로, 너에게서 그로, 그에게서 그들로, 그들로부터 다시 우리로, 단수명사에
   서 
복수명사로 넘어갈 수 있을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진땀 난다.”

    - 『소설가로 산다는 것』 김훈 / 강물이나 바람, 노을의 어휘 몇 개  中

 

 

    이 책에서 바로 김훈이 고백한 ‘3인칭 주어의 실존을 감당해 줄 만한’ 대상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플로베르와 체호프의 작품을 언급하며 마을공동체 혹은 마을 코러스로부터 전해지는 ‘(미식별) 자유간접화법’을 상세히 알려준다.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시점은 일인칭이 아닌 3인칭 관찰자 혹은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을 말하고 있고 작가들이 자유간접화법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정도를 소설의 발전과정이었다 평하고 있다. 결국 작가 자신의 언어와 작중인물의 언어, 그리고 세상의 언어 모두를 압축하여 그 삼중고를 극복해내는 화법으로서의 시점을 고난이도의 소설적 요소로 보는 것 같았다. (우주속의 신이라는 위치가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우주 속의 신과 같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하고 1852년의 어느 한 편지에 썼다. ‘예술은 제 2의 자연이므로 그 자연의 창조자는 유사한 절차에 따라 작업해야 한다. 숨겨진 가없는 피동성이 모든 원자, 모든 현상에서 느껴지게 하라. 바라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는 경이로움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게 어떻게 일어났을까!’      -p53

 

 

   저자는 <마담 보바리>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의 자서전적 소설『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이 ‘플라뇌르’의 선구자라 칭하며 화자로서 소설을 어떻게 작동시켰는지 말한다. 플라뇌르(flâneur)는 흔히 산책하는 사람(만보객)을 의미하는데 ‘대개 젊은 남성으로 크게 다급한 일 없이 거리를 걸으면서 보고 응시하고 생각에 잠기는 한가한 인물’을 말한다. 도시의 모든 것을 꿈꾸고 사람과 현상을 유유히 관찰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게 거리를 두는 도시 한량이 곧 본질적으로 작가의 대리자로 수행해왔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대체 내가 아닌 누가 어디서 어떤 위치에서 사람들을 말하여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플라뇌르가 모든 창의적인 시점의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나로선 참 반가운 산책자였다.

 

 

 

3. 나는 무엇으로 진실한가

 

 

   저자는 소설의 발전과정은 자유간접 화법의 발전과정이며 그 역사는 세부사항의 부상과정이라 말한다. 세부사항, 즉 서사에서 무심코 제시되는 디테일에서는 무의미한 것들의 의미심장함, 허구적 실재의 효과가 나타내는 진실을 보다 강조하였다. 소설 속에서는 논리와 무관한 것 같아도 실재적 온도를 높이기 위해 제시되는 기법들이 ‘무관함 또는 설명될 수 없음이라는 범주’에 엄연히 속하는 것으로서 무관하지 않은 것들과 같이 ‘삶속에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인위적인 거짓외연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리얼리즘의 기호들이 ‘지시적 환상(referential illusion)’에 불과하다는 바르뜨의 주장을 반론하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교수형」(A Hanging)을 예로 들며 사형수가 교수대로 걸어가는 길에 웅덩이를 비껴가는 모습을 그 반대의 근거로 제시한다. (실제로 오웰은 금방 죽을 목숨인 사형수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충격을 받고 생명의 소중함, 삶의 일상성을 깨닫는다) 오웰의 에세이를 한편의 소설이라 가장 한 후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하는 행위를 (바르뜨의 주장처럼)무관한 세부사항이라 보았을 때 허구에서는 실재 자체의 무관성이 바로 리얼리즘의 효과이며 ‘리얼리즘적’ 문체의 효과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치 생의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는 ‘핵심적인 인간적 진실’을 불현듯 포착하는 것이 훌륭한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이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을 이루는 모든 하찮은 거짓은 삶을 이루는 모든 거대한 진실만큼이나 진실하다는 충고로까지 느껴졌다.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것은 순전히 기억된 습관이다. 그렇다면 삶도 불가피한 잉여, 없어도 무방한 것으로 채워진 여백, 필요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하는 영역-더 많은 물건들, 더 많은 인상들, 더 많은 기억들, 더 많은 습관들, 더 많은 단어들,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불행을 포함하는 영역-을 항상 포함 할 것이다.  -p97

 

 

   저자는 문학은 우리가 삶을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며 우리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과 흡사하게 작동하는 소설은 우리가 보다 다양한 인간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운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책무는 ‘이것이 일어났을 법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늘 지어낸 것이고 모방인 것인데 그렇기에 삶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과 문학, 책은 모두 소설을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소설은 개인의 운명에 관심 갖게 만드는 예술형태‘라는 결론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소중하게 건져내어 가슴 한 구석에 담아 놓고 싶은 구절이었다. 비록 내 운명이 순탄치 않아 소설을 내 인생에 끌어 왔지만 내 소설에 담아낸 사람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영감을 주기를 바라는 기대. 내가 그랬듯 소설이 나를 포함한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혹은 그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 소설은 아직 운명지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운명이 아닐까, 감히 기다려 보는 것.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점이다...(중략)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p77

 

 

   저자는 소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후반부에 성공한 소설과 진정한 작가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저자는 인물의 평면성, 입체성에 대한 논의는 소설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라 생각하지 않아 보였다. 인물이 깊이가 없다거나 반대로 너무 복잡해서 소설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곧 작가가 자신이 탄생시킨 인물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통제하고 운영하는지의 능력과 관계한다. 이는 곧 인물이 평면적이어서 소설이 생동감 없는 것이 아니고(사실 깊게 들어가 보면 그 작품에서 평면적인 인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평면성도 인물의 입체화의 다른 말에 불과하지만) 작가가 평면적인 인물이나 혹은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에 대한 집요한 설득을 끝내 하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 그 부분에서 나는 극적인 캐릭터 없이도 감동적인 소설을 창조해내는 몇몇 작가들과 잔잔한 창법으로도 큰 울림을 선사하는 특정 가수를 떠올렸다.

 

 

소설이 실패하는 것은 작중 인물이 충분히 생생하거나 깊지 않을 때가 아니라, 문제의 소설이 자신의 관습에 어떻게 적응할지 독자에게 가르치는 데 실패했을 때, 작중인물들과 실재성의 수준에 대한 독자의 구체적 허기를 다루는데 실패했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p130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꾼은 신이며, 신이 운명의 대본을 쓴다.’는 전언은 저자가 생각하는 작가의 위치를 잘 말해준다. 소설은 철학적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옳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는 충고도 고마웠고 설득력 있는 불가능성은 설득력 없는 가능성보다 언제나 더 낫다는 명언도 감사했다. 책을 덮으며 소설은 삶에 대해 얼마나 진실해지려는 욕구를 가지고 모든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얼마나 정확하고 세심하게 볼 수 있는가에 따라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작가는 비록 관습적인 생각일지라도 대중이 알고 있는 관습이 작동하기 이전에 그것을 관습적이지 않게 통제하는 특별한 능력을 반복하여 개발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하여 누군가 이미 작동시킨 관습을 따라가지 않고 작가 스스로 최초 대중의 관습으로 자리해 누군가의 관습으로 작동되는 사람이 아닐까.

 

 

진정한 작가, 곧 삶을 자유롭게 섬기는 자는 삶이 마치 소설이 지금껏 포착해 낸 그 어떤 것으로도 포괄되지 않는 범주인 것처럼, 마치 삶 그 자체가 항상 관습적인 것으로 화하기 직전의 순간에 있는 것처럼 항상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다.  -p251

 

 

   이번 독서를 통해 다시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더 진실하기 위해 택한 것이 소설이고 소설은 그동안 나를 더욱 진실하도록 만들었기에 나 또한 소설을 통해 내가 아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 하찮은 진실 하나라도 꼭 전달해야겠다는 의지였다.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내가 포착한 것들, 내가 떠올리는 인물, 그밖에 무수한 허구들은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위대한 작가들도 어떤 대단한 결심이나 창대한 진리가 있어 작품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위대한 작가들도 위대해지기 전에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진실해지려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꼭 내가 지금 진실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소설을 쓰는 것이 자신을 더 진실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이 작동하는 곳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진실이 작동하는 그곳이 아닐까. 진심으로 진실을 작동시키는 소설가야 말로 문학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로 남는 것이 아닐까.

 

   간절히 진실해지고 싶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 불가능도 진실로 작동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설득할 수 있는 불가능은 설득하지 못한 가능성보다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 혹 나처럼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과 이 책이 전하는 진실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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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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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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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2-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해 전 소설을 아주 조금 공부했었어요.
[여명의 눈동자]를 쓰신 추리소설가 김성종 선생님이 꾸려가시는 추리문학관에서 말이죠.
물론 다른 소설가 분이 수업을 맡으셨는데 소설은 이러이러한 형식을 갖추어야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지라..형식을 의식하다 진짜 소설이 뭔지 제대로 한편도 써보지 못한채 그냥 끼적거리던
습작 두 편을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하고 말았어요.
아ㅡ, 소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생각하도록 저를 인도했다면 아마 소설을 써보겠다고
무작정 덤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네요,,ㅋㅋ
글을 읽다가 불현듯 그때가 떠오릅니다.
 
보수를 팝니다 - 대한민국 보수 몰락 시나리오
김용민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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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자


   무엇보다 이 책은 편안하다. '목사 아들 돼지'라는 그의 별명답게 친근함이 가장 큰 매력인 듯하다. 풍기는 인상과 종교적 배경, 교수, 시사평론가라는 직업 때문에 나는 당연히 연배가 나보다 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그는 주진우 기자보다 아래였다.(는 점에서 충격^^, 신선^^) 그는 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젊은 책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혹시나 강준만, 유시민 처럼 보수에 대해 이론과 사회,학문적인 접근이 많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저자가 공부는 충분히 했으나 독자에게 일일이 주입시키지 않고 눈높이를 맞추어 나름의 소신대로 논리를 끝까지 유지한 점이 신선했다. 무엇보다 이 책으로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더 중요시 하는 자세가 물씬 느껴져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최근 나꼼수 주자들의 저서는 책의 컨텐츠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소통의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느껴진다. 제발 좀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 우리 의견에 동감 해 달라, 같이 이야기 하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같이 하자, 다 같이 일어나면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한층 더 익숙한 공감을 유도했다고 본다. 나 역시 거의 앉은 자리에서 이 책을 완독하며 차근히 보수(保守)에 대한 보수(補修)를 보충할 수 있었다. 하여 책 덮고 서재에 모셔만 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나꼼수’ 여의도 콘서트에서 정치인의 성대모사를 작렬하신 덕에 좀 힘들어 한다는 소식도 접했고 또 하나 이 책을 처음 접한 내 지인들의 반응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도 아쉬웠다.(힘을 좀 내셨으면 해서 ㅠ)


   나는 사실(리뷰에서 여러 번 밝혔지만) 김용민처럼 어린 시절부터 조선일보를 완독하면서 자라나 잘 길러진 온실 속의 화초군단에 속하는 보수였다. 저자는 보수를 모태보수, 기회주의 형 보수, 무지몽매 형 보수, 자본가형 보수로 구분 짓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 지역형 보수를 추가하고 싶다. 내 경우는 다른 무엇보다 부산, 경남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보수의 특징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각 보수의 유형들 중 한 가지 이상 섞여 있는 복합형 보수도 즐비하다고 부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아버진 부자였고 어머니 주변엔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맹모삼천지교에 의해 일류대학까지는 나와 어엿한 기업에 입사한 사람들. 그래서 부모님의 재산을 기반삼아 출발선에서부터 강남의 아파트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비교적 운빨 좋았던 내 친구들...처럼.


   살면서 명예퇴직이나 사업실패, 혹은 권고사직 같은 불이익을 전혀 당해보지 않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삶의 뿌리가 된 중산층에서의 이탈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특별히 나약하고 돈만 중요시해서 라기보다는 삶에 이렇다 할 굴곡이 없었기에 좌절이나 실패에 대한 저항력이 길러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김용민도 두 번의 직장에서의 강제적인 이탈로 인해 보수의 실체를 파악할 기회를 가졌듯이 예정대로 승진하고 예상대로 집값이 오르는 세월이 반복되다보면 세상의 모든 문제에 외려 너그럽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엔 하나같이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무슨 불온서적으로 취급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SNS 야권인사들은 모두 종북 좌파이며 괴담을 선동하는 우리 사회 불순세력이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트위터를 하느냐 안 하느냐도 이제 보수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정도이다. 보수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게 무엇인지는 자신들도 잘 모르지만)가치를 위협하는 소스가 될 만한 것들은 아예 보거나 듣지도 않으려 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책 좀 읽어보시오, 하는 것은 괜한 논쟁만 유발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 <닥치고 정치>때 나는 그런 비슷한 상황을 겪었었고 그 책 재미있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너도 이런 책을 읽느냐는 식의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 무슨 신종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물질을 쳐다보듯 하던 그들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소모적인 설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ㅠ) 그런데, 이 책 <보수를 팝니다>는 아예 접근도 하지 않으려 하던 자세에서 진일보해 뭐, 보수?, 하면서 목차를 흥미롭게 살펴보더라는 것이다. 특히 교회관련 부분에 유독 관심을 보이면서 그 부분이라도 펼쳐서 들쳐보고 앉아서 읽어보더라는 것이다. 가져가!, 저자 사인본이니까 돌려보지 말고 꼭 돌려주고. 됐어. 나중에. 하하하. 안 빌려 간다가 아니라, 지금은 말고 나중에 필요하면 보겠다고는 하더라는 것이다. 진보를 사세요가 아니라 보수를 판다는 전략은 일차적으론 성공적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 조현오 성대모사는 완전 수준급이야.”
   “나두 나꼼수를 두 번 인가 들어봤는데 나는 김어준하고 그 깔때기가 싫어. 모두 위선이야. 그렇게 정의로우면 김진숙처럼
   왜 크레인에 안 올라가는데? 앉아서 입으로만 떠드는 것들이 제일 싫다.”
   “저마다 자기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저항 하는 것이지. 그런 말도 쫄아서 못하잖아.”
   “생긴 것도 싫어. 자기가 무슨 히피나 스타일리스트냐.”
   “김용민도 거기 앉아 있잖아. 이 사람 책도 많아.”
   “그래? 아... 그 에어콘과 경쟁한다는 사람이 이 작자야? 점잖게 생겨가지고 목사 아버지가 가만 두시나?”
   “책에 아버지는 존경한다고 써 있어. 자기 아버진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하하, 괜찮은 *이네. 원래 아버지가 목사면 더 위선에 밝은 법이지. 싸가지 있는 * 일세.“
   ”핵심을 흐리지 않으면서, 너무 이론 주입하지도 않고, 또 천박하지도 않아. 자기 경험도 많고. 내용은 진보인데 말하는 방
   식은 보수야. 김어준이 내 타입이면 김용민은 당신 타입, 히히.“

   - 40대 보수 남성과의 대화 中



   김용민은 ‘나꼼수’ 진행자들 중 자신이 비교적 외부의 공격을 덜 받는 편이라고 한 바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배경엔 아무래도 (정치인이 아니면서)목사 아버지, 교수, 방송국 PD출신, 중후한 평론가 이미지들이 더해져 형성된 보수적 아우라가 한 몫을 한 것은 아닐까. 내 주변의 보수들과 이야기를 해보아도 김용민은 그들 중 가장 덜 씹히는 인물이면서(본인 주장으로는 말을 적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확실한 존재감으로 보수층에 가장 은밀한 호감을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김어준의 급진성과 정봉주의 공격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보수라면 김용민의 탈급진, 비공격성에 더 뚜렷이 반응하지 않을까. 위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용민은 너무 튀지 않으면서 보수에 소구하기 적절한 외모를 지녔다. 그래서인지 진보를 주장하지 않고 보수를 주장하는 이 책은 그의 가정 환경적 반전과 외모적 역설과 잘 어우러져 무지몽매형의 보수를 공략하기 참 적절한 책이라는 결론이다. 주변에 별다른 변절의 기회가 없어 그대로 보수를 유지하고 있는 지인들이 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소시민적 보수들에게 다름 아닌 보수의 종말을 나지막이 전도하는 유용한 복음서가 되어 줄 것이다.


선명한 보수는 쫄지 않아


   지난 12월 1일 마침내 종편 채널이 개국을 했다. 어제 오늘 종편 개국과 함께 가장 눈에 띠던 인물은 바로 공지영도 김연아도 아닌 박근혜였다. 종편이 동시에 박근혜를 띠우기로 담합을 했는지 박근혜가 종편을 적극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근혜는 공중파가 아닌 종편을 통해서 꽤 오랜 시간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마치 안철수가 통 큰 기부를 결정하고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에 화답이라도 한다는 듯이. 어짜피 모태보수인 박근혜의 등판이 어쩌면 종편 개국과 잘 짜 맞추어진 듯한 뉘앙스까지 물씬 풍기면서. 이 책에서도 그나마 보수의 마지막 도덕성이나 원칙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부류는 모태보수정도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박근혜는 이참에 자기야 말로 우리 시대 보수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가장 적임자로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보다 사회근본적인(?) 가치를 지켜나가겠다고 천명하는 듯하다. 나는 이명박, 오세훈 같은 기회주의형 보수와 선천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다르다며 안철수처럼 하나의 현상이 아닌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인물(인간)이라고 재차 선포하는 느낌이 들었다. 현상은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람은 인간으로 보여 지는 것이다, 정치는 내가 인간임을 증명하고 나를 인간되게 하는 긍극의 꿈이다...


   김어준에 의하면 박근혜에게 국가는 아버지 유산이며 정치는 효도이자 제사라 말한다. 박근혜는 최근 어느 대학의 강연에서 학생들이 사랑을 해보았냐는 질문에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간이냐는 답을 했는데, 나는 이 답은 거의 김어준을 향한 답이라 생각한다. 김어준은 박근혜가 도무지 생활인, 자연인으로서 구체적이고도 인간적인 경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통찰할 기회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생활인으로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삶의 균형 감각이 없는 인물이고 자기 삶에서 사실상 인간이 빠진 채로 공주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바로 그러한 우리 같은 인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 예의를 갖추며 애정을 쏟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박근혜는 나도 어엿한 당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며 화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김어준은 연애를 해봐야 자기 밑바닥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공주인 것은 맞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첩’이라는 수식의 연장선상에서 남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기억한다는 하나의 닉네임이므로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고까지 웃어넘기는 포용의 자세를 과시하기까지 한다. 소개팅에서 안철수를 만났더라면 인상이 좋아서 잘 나갔다 생각했을 것이고 비키니 사진이 공개된 것도 몸매가 따라주기 때문이라며 정치인으로서의 여성의 한계를 외려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적 장점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박근혜가 갑자기 김어준의 책에 반응을 보이기 위해 그러한 준비된 답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20대에 폭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어준을 의식하지 않고서 그에 대한 분석이나 결과하나 없이 20대와 소통하자고 마음을 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박근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꿈, 인간의 삶, 인간의 행복을 언급하며 자신이 인간 속에 있는 다 같은 인간임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의하면 박근혜는 모태보수의 정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새삼스레 박근혜의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바로 누가 뭐래도 꿈쩍 않는 자기 소신에 대한 확신과 흉내 낼 수 없는 비감의 아우라였다. 나는 종편 개국 날 TV 조선의 ‘최·박의 시사토크 판’을 시청했다. 진행자로 나선 조선일보 문화부 박은주 부장은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끄덕이던 조선일보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은 기대대로 서론도 없이 바로 직구로 들어가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상당히 직접적이고 예리한 질문에 잘도 회피하며 핵심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럴싸한 논리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초반부터 던져진 안철수에 대한 껄끄러운 질문에는 그런 것에 정치 공학적으로 연연하면 나의 꿈을 이룰 수가 없다거나 대북정책이 김대중 쪽이냐 이명박 쪽이냐에 대한 질문에는 강할 땐 더 강하게 유연할 땐 더 유연하게 균형을 잡겠다는 진부하면서도 퍽이나 박근혜 다운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누구하나 틀렸다 하지 않고 모두를 수용하겠다는 태도는 모태보수 특유의 자신감으로 더욱 강조되어 보였달까. 언뜻 보았을 때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닌 양극단을 두루 살핀 후 모두를 감싸 안는 중용이 생각날 정도였다. 자유와 평등의 가운데가 아닌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두루 포섭하여 자유와 평등을 뛰어넘는 그 무엇.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을 읽었는데 상당부분 해설에는 오늘날 미국에 대한 종속을 우선가치로 여기는 보수적인 정치인과 상층계급에 속하는 기독교편향의 지식인들 들으라고 하는 쓴 소리가 많았다고 기억한다. 박근혜가 공교롭게도 꼭 내가 읽는 책들만 같이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선명보수 전략은 오세훈, 이명박의 꼼수형 보수와는 차별화된 응집의 시발점이 될 듯하다. 특히, 안 그래도 연일 괴담으로 젊은이를 선동하고 있다며 SNS 야권인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보수 언론에 길들여진 무지몽매형 보수들은 박근혜의 이런 태도에 상당부분 안정감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웃는 자가 이긴다지


   이 책은 감히 그러한 무지몽매형 보수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한 교신서의 역할을 해 줄 것으로 믿는다. 아니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가장 기억에 남은 부분은 아무래도 교회관련 비리를 단순 고발차원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일반적인 성찰의 수준으로 제시했다는 점이고 공부안하는 보수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충고도 뇌리에 남는다. 내가 봐도 보수는 정말 책도 안 읽고 같은 사건에 대해 아는 심도와 수준도 그야말로 수준이하다.(다른 것으로 수준을 과시하면 되기 때문에) 뚜렷한 자기 논리는 없으면서 조선일보 헤드라인만 보고 좌파를 싸잡아 욕하는 습관을 길러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좌파성향의 책들을 관심 없다는 척을 하며 속으로는 두려워한다. <닥치고 정치>까지는 애써 무시했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그들을 이성적으로 충분히 유혹할 만한 책이다.


   또 하나, 김어준이 쫄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면 김용민은 웃을 수 있어야 이긴다고 설파한다. 어느 때보다 정치상황이 심각하다고 같이 심각하게 머리 터질 것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하게 싸우자는 그의 논리가 나는 참 좋았다. 웃자고 정치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모두 웃자고, 웃는 세상을 만들자고 정치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날아오는 폭력과 억압에 분노하고 저항하더라도 공포에 떨지는 말자고 외려 씨익 웃어주자고 독려하는 패기가 어느 혁명에 동참하라는 투사보다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서로 웃는 얼굴을 보며 그 에너지로 내일을 기다리자 다짐하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 때 선관위 홈페이지가 디도스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해 김어준이 누군가 젊은 층의 투표율을 끌어 내리려고 계획한 짓이라 말했을 때 보수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괴담과 음모로 우리사회 분열을 조장한다고 떠들어 대었다. 이제 올해의 문학상에 추정소설 분야를 신설하고 추정과 사실이 일치하는 기준에 의해 그 1회 수상자는 당당히 김어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나꼼수를 없애는 단 한가지 방법은 바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언론을 장악하지 않으면 된다는 이외수 작가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점점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나꼼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또 나꼼수의 분석과 추정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면 반드시 관련 수사가 진행되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적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이렇게 빨리 정치, 사회적으로 조사및 수사가 진행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결과를 눈을 뜨고 주시하고 있는 경우를 겪어 본적도 없다. 일년 전과 같은 뉴스, 괴담논문을 작성중인 신문, 아이돌 기사뿐인 포털과는 다르게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김용민 교수, 정봉주 전의원, 주진우 기자 모두가 이런 폭발적인 관심으로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부디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보수들은 제발 책 좀 읽고 공부를 좀 하길 바란다. 보수는 자존심은 뭣같이 세기 때문에 자기들이 뭘 모른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이 있다. 처음엔 같이 욕하는 척 하는 것이다. 뭐, 좀 더 아는 우리가 그들을 계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나처럼 대화가 되지 않아서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면 조심스레, 이 책을 권하는 바이다. 김용민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하하.
 


- 지난 11.30 나꼼수 여의도 공연 포스터 / 강풀 -


   성경책을 든 '돼지'와 '먼지뭉치' 그리고 깔대기와 '누나‘ 품에 안긴 남자, 이들의 방송이 이제 거뜬히 두 시간이 넘어가기 때문에 편집하는 입장에서도 고충이 상당할듯하다. 오늘도 나꼼수 녹음 끝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선관위 건 때문인지 재녹음 들어갔다는 소식에 접었던 일정 하나(리뷰쓰기 ㅋ)를 부활시켰다. 체력이 딸려 여의도 같은 공연에 나가진 못하지만 오늘도 나는 그들을 기다린다. 김용민이 책에서 남긴 명언 중에 하나를 옮겨본다. 돼지입장이어서 그런 것인지 이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참으로 절실해 보였음이다. 우리모두는 굶어 죽을 보수를 그 어느때보다도 명징하게 예상할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보수는 정치무관심을 먹고 산다. 그런데 이제 보수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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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느낌이에요. (물론 이것은 알량한 착각이겠지만 ㅎㅎ)
정치에 관련된 서적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른 집어들어야겠네요!

비로그인 2011-12-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딱히 보수한테 공부하라고 하지 않아도 정권은 바뀔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득권층이 바뀌는거죠.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세요. ^^ 거기에 나꼼수가 기여한 바가 큰 듯하구요. 대학생들의 투표참여도가 한참 바뀔듯합니다.

꽃도둑 2011-12-0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도 나꼼수 폐인? 아님 말기 중독자?..ㅋㅋ
저는요 두번 반복해서 보고 듣고 하는 거 재미없어 하는데..
나꼼수는 mp3에 저장해 놓고 틈틈이 반복청취 중입니다. 이정도면?....ㅎㅎ
4인방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즐겁습니다. 너무 선명하고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죠.
30회 듣다가 웃다가 눈물까지 찔금찔금짰어요. 나꼼수가 민주언론상은 받았고 이제 공로상도
줘야 할 거 같은데... 혐오하고(?) 냉소하던 정치를 끌어안게 만들었으니 말이죠..
뭐 보수 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 사람들이 정치를 공부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없다고 생각돼요.
나꼼수도 고맙고,,,^^ 리뷰도 근사하게 쓰신 한사람님도 고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