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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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엄마를 보내드린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내게 복역 중이시다.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딸이다. 허나 엄마에게 잘 가시라 인사하는 일, 그것은 곧 내게 다른 삶을 살라는 말과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살라는 뜻과 같았다. 엄마는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 알았고 그렇기에 지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고 믿는다. 엄마와 헤어지는 날이 아마 내겐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는 기쁠까 슬플까. 엄마는 나를 반겨주실까 꾸짖으실까...

 

 

소설을 사다 놓고 여러 번 읽기를 주저하곤 했다. 책을 덮으면 어쩐지 나 역시 작가처럼 엄마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의 의미도 결론도 앞으로의 갈 길도 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럭저럭 삶의 핑계를 대고 이유를 만들어 작별을 보류한지 벌써 5년째. 몇 주째 소설의 제목을 스치기만 해도 나는 아직 엄마의 부재를 메꾸어 볼 다른 무엇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했다. 부끄럽고 옳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면 엄마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엄마의 한마디 대답과 격려, 혹은 잔소리, 아니면 말없는 미소를 찾게 된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이미 죽은 엄마를 그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보내드리지 못한 듯하다.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으니 엄마와 나는 사실 그 날 이후 같은 자리에서 몇 년째 대치중인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이년반 동안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기꺼이 엄마를 팔고 죽음의 사연을 과시하며 슬픔을 전시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내 특별한 사연을 되도록 많이 떠들고 싶어 안절부절 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극복한다는 구실로 더욱 엄마의 죽음을 말하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내 글이 지향하는 결론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사람을 잊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결국은 더욱 그리워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뿐. 이 소설은 일흔 넷 작가가 아흔 넷의 어머니와 작별하는 심경을 기록한 고백록이다. 뼛속에 사무친 그리움이 증오와 원망과 분노로 대체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의 시신 앞에 돌아와 비로소 자신과 어머니, 가족과 화해하는 순간을 아프게 그려내었다. 열다섯 이후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와 객지를 떠돌던 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혹시 ‘잘가요, 엄마’ 그 한마디는 너무 짧은 인사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다 하지 못한 말이 넘쳐흐르고 그렇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최후의 신음소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한 점 먼지로 날려버리도록 그리하여 더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구경꾼을 사임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들을 따라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은 걸음걸음마다 힘겨웠다. 아내가 여행 간 사이 마치 자신도 여행을 떠나듯 고향을 향한 여정이 곧 내 원망과 분노를 돌이켜보고 내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한평생 드난살이와 품팔이로 살아온 어머니의 죽음이 절망만은 아니었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나를 강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일까. 소설 속 사람들은 끈질기게도 내게 그만 엄마를 놓아주라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다. 그들이야 말로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듯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작별 과정을 지켜보며 나만의 은밀한 이별식을 치룬 것이다. 소설 속 어머니의 죽은 표정에서 내 어머니의 보랏빛 시신을 겹쳐볼 수 있었고 그 곁에 선 작가의 결연한 얼굴 위로 내 붉은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무허가 화장장에서 어머니가 연소될 때 소멸되어가는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꼭 내 가슴속 불타버린 새까만 그것만 같았다. 나를 안아주고 먹여주던 세상 유일한 살결과 체온의 어머니가 모두 타 버릴 때 작가는 무엇을 태웠을까. 오래 세월 피할 수 없었던 결핍과 수치심,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허세, 위선을 견디기 위해 자학해온 고통의 시간들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토록 생존하기 위해 질기게 부여잡아온 세상과 어머니에 대한 복수는 한 줌 재로 남아 버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머니의 허물도 치욕스런 가정사도 개인의 누더기 같은 치부도 아니었다. 구십 평생 끝내 다 치르고 만 어머니의 죄값도 아니었다. 당신은 위대하진 않았지만 장한 어머니였고 삶이 눈부시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허물이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다 갚고 가기 위해 모진 삶을 살았다고 자식에게 모진 삶만을 남기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도 자식을 등에 업는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토록 그 어머니의 안온한 등허리를 기억하며 세상과 당당히 마주해온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니 어머니를 등져온 건 세상을 속여 온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눈을 감자 이제야 뒤돌아 있던 등을 다시 돌린 것이었다. 우릴 향해 열어젖힌 작가의 앞모습은 한없이 엄숙했고 목메인 광경이었다.

 

 

소설엔 어머니 사후 성이 다른 아우가 형을 고향으로 이끌며 지난 시절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는 과정을 담았다. 형제는 살아생전 어머니집과 가족 내 서글픈 추억이 어린 중국집, 어머니가 방아를 찧고 국수를 말던 권씨네 고택, 방학마다 떠나있던 외갓집을 차례로 돌아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잔해가 된 어머니를 흩뿌리며 형은 아우와 화해한다. 마을 산기슭 위로 사라지는 어머니를 향해 그들은 인사한다. 순간 엄마야 누나야를 외치며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겨울 때마다 뛰는 것이 유일한 용기였고 위안이었던 작가가 어린 시절 ‘꼬질꼬질하고 암울한 애옥살이가 불길하게 노출되는 비애가 서린 그 집’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태우고 온 그 날도 달려가 옹기전 항아리 속에서 새우잠을 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살아계신 동안 내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에 죄책감이 들면서도 세상과 부모에 속절없이 화풀이만 해댄 세월 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엄마는 내게 진짜 나만의 삶,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엄마의 목숨값은 결코 나를 향한 죄값도 내게 지게 된 빚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나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한 엄마는 죽음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잘가요, 엄마. 몇 십 번, 몇 백번을 더 말해야 정말로 엄마를 잘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엄마와 헤어지는 일만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보다 더 씩씩하게 인사를 잘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지금부터 한 살 두 살, 새롭게 나이 먹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진짜 엄마를 만나는 날이 가까워 질 것 같다. 잘가란 인사는 하지 못했다. 대신 후회 같은 인사를 지금 할 수는 있다. 그날까지 잘 있어요, 엄마.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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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7-0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씨앗은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내 씨앗은 내 아이들한테 어머니(또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새로 자리하면서, 곱게 이어가리라 느껴요. 떠나 보내거나 잊거나 할 수 있는 인연이나 운명이 아니라, 늘 보듬고 사랑하면서 내 삶을 보살피는 하루하루이리라 느껴요.

2012-07-05 15: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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