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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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응급실을 몇 번이나 가게 될까. 아니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응급실을 갔었던가. 떠올려 보니 내가 환자였던 경우와 가족이나 친지가 환자였던 경우로 나뉘어진다. 두 경우의 경험은 관점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 같은 곳을 방문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분명한건 둘 다 정신이 없었다는 것과 의사는 단 한명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문제가 해결되었건 더 심각해졌건 절대 의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진료 받은 모든 병원의 의사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심각할수록 담당하는 의사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대상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고는 더욱 확신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응급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고 최대한 그 상황을,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는 해결사에 가까웠다. 설령 그 해결방법이 환자의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응급의사의 몫이었다.

 

사람이 병원에 갔을 때 가장 응급한 상황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냐 붙어 있을 수 있느냐의 생사의 갈림길, 만약은 다시 없는 그 순간일 것이다. 작가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생사의 순간들을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최대한 밀착하여 조심스레 전달하고 있다. 그곳에 신기하게도 지난날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사람을 살렸다고 웃을 수도, 못 살렸다고 울을 수도 없는 기계인형처럼 몸과 마음을 다바치고 있었다. 내가 의사가 된 것처럼 이토록 생생한 시점과 표현이라니.

 

우연히 페이스 북에서 한 챕터를 읽고는 바로 주문했다. SNS상에서 끝까지 읽기엔 꽤 긴 내용이었는데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못이 빨려 들어가던 찰나와, 미련 없이 못을 안고 걸어오던 그의 고독과,

최후의 시선으로 못을 받아들이던 그의 안구 따위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나 믿기 어려울 때, 어떤 광경을 보고 있으나 그 존재가 가늠되지 않을 때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 생각할 때,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할 때,

그리고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 이 일련의 광경을 한번 씩 떠올려 옆자리에 앉혀본다.”

 

숨을 멈추고 연속적으로 이끌려 들어간 몇 개의 문장들은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에서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지나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절망의 3단계를 참 정확하게도 정리했다는 느낌. 그러나 사람은 결국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불행도 가늠해본다. 고로, 이 세문장이 내게 준 결과는 나도 불행 했었지에서 시작해 그러나 지금은 불행하지 않다는 자각이었고 그러므로 고독하지 않다는 깨달음 이었달까. 세상에, 저 문장의 대상은 눈에 못이 찔려 그 후로 평생 한 쪽 안구를 잃어버렸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일은 살면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군가, 혹은 내게도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이다. 꼭 못에 눈이 찔리지 않더라도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눈 정도는 잃어버렸을 때라야 비로소 확실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아니었을까.

 

죽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정된 택배물처럼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사들고 집에 와서 부터는 생각만큼 진도가 척척 나진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어가는 장면을 시시각각 확인하는 일은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멈출수는 없었다. 작가는 의사로서의 사실적인 표현은 물론 객관적인 사실을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미부여로 마무리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환자에겐 단 한번뿐인 죽음을 연속적으로 목격, 처리하고 돌아와 새삼 떠오르는 삶과 죽음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되어야하는 일상들을 그리고 있었다.

 

이 책은 왜 쓰여졌을까.

이 글은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의사된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자살자가 쏟아지는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수많은 죽음을 단정 짓던 자신의 혓바닥을 증오하던 그였다. 용기 있게 찢어진 열상을 모두 맡기고 견디어준 환자에겐 수고하셨다는 말을 잊지 않던 그였다. 지하철 투신 환자를 처리하고 돌아가는 퇴근길엔 무사히 덜컹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을 기적이라 부르던 그였다. 유가족들의 압도적인 오열이 귀를 관통한 다음엔 돌아와 숨죽이며 혼자 울 수밖에 없던 그였다. 성탄절에도 아픔을 멈출 순 없어 뜬눈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던 그였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괴물이거나 천벌을 받아야 할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이 살았기에 똑같이 하얀 눈을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을 눈이 내렸다고 소복히 덮을 수는 없는 그였다.

 

책을 덮었을 때 비로소 잊을 수는 없었기에 차라리 기억하는 방식을 택한 그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죽음에 무감해진다는 건 곧 삶에 무감해진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문득 살고자 하는 일과 죽고자 하는 일의 무게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를 생각한다. 살고자 하는 일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므로 더 힘든 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정도와 노력의 차이로 인해 우린 그렇게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날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일에는 더 쉽고 덜 어려운 노력은 없다. 죽고자 하는 일은 성공과 동시에 종료되며 그 성공마저도 내가 누릴 수는 없다. 죽고자 하는 일도 결국엔 살아내야만, 사는 동안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일은 죽고자 하는 일과 모양만 다를 뿐 기실 속 내용은 같다는 점에서 우린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아니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얄궂은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이 기록은 죽음을 잊지 않아야 삶도 더 생생하다는 역설을 묵직하게 제시한다. 어쩌면 우리는 응급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아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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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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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알게 된지는 꽤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는 분이 카톡 프로필에 이 책의 표지 사진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첼로 뒤에 숨어버린 알 수 없는 여자의 두 다리가 묘하게도 안쓰러웠거든요. 제목을 떠올리지 않았는데도 단박에 슬픈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막연하게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작가와 소설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고 기억은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책임하지 않은가요? 여자의 슬픈 각선미를 기억에 저장시켜 놓고 거기서 일 년이 더 흐른 후 엊그제 비로소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작년 여름엔 이 책을 스치기만 하고 잡아보지는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만약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 묻는다면 그땐 당신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책 한권 읽었다고 작가를 알 수 있다고 답할 순 없겠지만 알고 모름의 답이란 대체로 주관적 판단이니까요. 이 책은 이렇게 작년 여름의 나를 떠올리게 하며 슬그머니 그러나 끈질기게 다가왔습니다. 책과의 인연을 믿으며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저로서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었던) 작년 여름의 나와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던) 올 여름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지배하던 일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후 더 이상 삶은 한 발자욱도 진보하지 못한 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을 이어갑니다. 삶이 제자리 걸음을 반복한다 하여 생의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그랬죠. 인생에 너무 깊은 의미를 두지 말라고요. 토끼나 풀 한 포기처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서 주어진 삶이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뿐이라 생각하라고요. 사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던 터였습니다. 정체도 익숙해지면 남부럽지 않은 안도감을 주긴 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특정기간 삶의 정체는 전체 생의 퇴보와도 같은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죠. 말하고 글 쓰고 무언가 읽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 안보고 글 안 쓰고 살면 의미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한 건 있습니다. 굳이 찾고 밝히려 들지 않아도 삶은 또 다른 의미를 향해 자전하는 것이니까요.

이 책은 당분간 무엇에도 의미를 찾지 말자고 그러기 싫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보자고 남모르게 다짐한 제게 다시 의미를 찾아보라고 자꾸 귀찮게 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각자 우리의 생에 있어 어제까지 같이 호흡한 누군가 사라진다는 것.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 후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일생 일대에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잃어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남은 생을 이야기 합니다. 아니, 결국 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강조할 뿐이니까요. 그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느껴지도록 작가는 삶의 의미를 끈질기게도 고통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남아 있기 전 지나버린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되묻습니다. 작가는 그때가 사십년 전이었는지 오십년 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늘 반복합니다. 중요한 건 그 후로 사십 년 아니 오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를 그리워하며 다른 건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예요. 그 지점에 동의하기까지 소설을 다 읽어야 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요. 작가는 결국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래오래 설득하고 영원히 공감시키고 말아요. 대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인생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시절에 말입니다.

 

작품 초반부에 주인공은 떠나간 남자를 회상하며 자기 인생 전체를 걸어버립니다.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이죠. 사실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어법인가요. 그런데도 순간, 잠시 신선했다고 느꼈습니다. 살면서 그런 대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일까요.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확신에 대한 존중일까요. 인생 전체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 그건 아마도 계속해서 기다리겠다는 결의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혹시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평가는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숨을 쉬며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즉, 의미부여는 실제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대상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때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자신 이외에 세상 그 누구가 의미를 부여해주겠어요. 한다한들 자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사랑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래서 더 절대적이니까요. 그래야지만 기다림의 세월이 누구 앞에서든 강력한 떳떳함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누구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꼭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을 잃은 후 그 나머지인생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데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의미부여야 말로 얼마나 개인적이며 창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그래서 인지 한 사람의 고백은 지극히 공감할 수 있거나 반대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작가는 주인공의 프란츠에 대한 사랑의 근원을 원시시대의 공룡성으로 상징하더군요. 그런 원시성을 유전자로 지닌 주인공은 사랑이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너를 차지할 때만 사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요. 나의 삶은 그러니까 나로부터가 아닌 철저히 너로부터만 생과 사의 여부가 결정나는 것. 사람들은 너 때문에 살기도 너 때문에 죽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사랑을 전제할 때 더욱 분명해지는 이야기인 것이죠. 이런 일은 누구와 얼굴 보며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남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얼마나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말이 안되기 일쑤인가요. 그건 내가 남한테 남 이야기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것 보다 더 이해시키는 작업이 소설은 아닐까 이 작품을 덮으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소설의 재미와는 별개로 저는 사실 주인공을 이해하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이 작품은 읽을수록 작가를 감탄하게 만드는 소설인가 봐요. 첫 번째는 사랑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이 사라진 노년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달콤한 꿀맛 같아요. 결국 인간은 사랑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슬픈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기억자체는 ‘진주의 내부에 들어있는 이물질’처럼 조개를 성가시게 한 침입자일 뿐인데 조개 안에서 광택을 얻기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조개처럼 이물질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건 바로 인간의 영역이겠죠. 그것이 능력인지 노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의미부여.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p90

 

 

두 번째는 공룡이 살았던 시대부터 주인공이 살아내는 시간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등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공간성의 놀라울만한 압축입니다. 시공간의 축약은 마치 이 소설의 배경이 한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박물관 학예사인 주인공의 성찰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공룡 브라키오 사우루스를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뼈대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인간도 다를 것 없는 뼈대를 이루고 한걸음 한걸음 지금까지 발자국을 새기며 인생이라는 시공간을 걸어왔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누가 살면서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대 공룡의 모형 아래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구체적이고도 창조적인 환경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그저 그런 불륜과 통속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공룡의 뼈대와 발자국 아래에서 늘 생과 사를 고민하니까요.

 

마지막으로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늙음과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한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여러 번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자는 프란츠가 떠나간 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회상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끝은 비극적이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라 결론짓습니다. 비극적이면서도 진부하게 끝나버린 사랑의 주인공은 결국 예정대로 노년을 맞이합니다. 노년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쓸모밖에 없다며 작가는 주인공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부여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어떤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산다는 것. 미래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만이 내일을 예견해주는 어제와 같은 오늘. 그곳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당사자가 별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싶습니다. 벗어나는 순간 삶은 끝나는 것일 테니까요.

 

이 책을 덮으면서 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가 늘 느끼고 숨 쉬던 시간의 흐름과는 아주 터무니없이 다르게 각인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일 년은 그렇지 않았던 일 년과는 완전히 시계침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난 기간은 그렇지 않았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거나 짧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삶의 일정한 어느 시기에 사로잡혀 꼼짝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나는 지나간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은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으면서 발자국을 떼는 시늉만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지금 나와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오늘을 되돌아 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늘 나중에 안 좋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을 택하고 순간을 늦춥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재는 더더욱 나쁜 결과를 상상치 못하도록 힘이 세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생각하기 싫어집니다. 아마 사랑을 잃게 되는 두려움이 눈앞의 많은 것을 놓치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주인공은 프란츠가 돌아오지 않자 방안에서 혼자 그를 오랫동안 사랑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합니다.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데도 그 결과를 바꾸기보다 미리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합니다. 제가 슬픈 부분은 바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는데도 왜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않았는지요. 어쩌면 우리 모둔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아버리는 존재들은 아닐까요.

 

불행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만 더 불행해지기 싫어 이별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 다는 거. 어쩌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이별하기도 한다는 거. 원래 사랑은 행복과 불행과 상관없이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인간만이 지난한 의미놀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거.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렇지 않고서는 시작하거나 끝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 일테니까. 역설적으로도 이 책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모두 사랑을 버리지 않나요.

 

어떨 땐, 지나온 모든 사랑을 추억하지 않고 더 이상 기억할 수도 없어 새롭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는 지독한 사랑을 이로써 잊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질기게도 만나게 되는 악몽이 있는데 아마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소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통일이 되기 전 파괴된 도시를 보고 그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것인지 모릅니다. 집 전체가 불에 탈 경우 ‘가구와 그림 책, 그리고 우리 삶이 구체화 되었던 다른 모든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재가 되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순서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사라짐 전체, 결과로서 사라졌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비로소 삶은 재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름이 내 불타고 있는 가슴보다 미지근하다 생각된다면 슬픈 이 소설을 읽어보세요. 다 잊고 더 이상 잊어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또 잊고 마음이 공허하다 못해 마음자체도 사라진듯하여 깃털보다 가볍다 느껴지는 순간, 아니 내 존재 자체의 무조차도 실감나지 않을 때 아마도 고개 들어 새로운 누군가를 향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예견해봅니다. 인간은 슬프지만 그런 인간만이 슬픔을 겪을 수도 견딜 수도 지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요. 최소한 브라키오 사우루스보다는 괜찮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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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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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연말에 이어지던 술자리로부터 시작된 위와 장의 반란이 진정되고 몸의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신체 어느 기관의 균형이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데 예전과 같은 시간이 걸리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달까. 겨우 책상 앞에 돌아와 새해 처음 읽은 명작이 <해부학자>이다. 육체는 생로병사의 출발지이자 도착지라는 깨달음을 인식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서 인지 책 덮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는 ‘육체’였다. 죽고 나면 썩거나 태워져 한 줌 재로 사그라드는 이 몸 뚱아리 하나를 보존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발버둥치고 안타까워하는지 그 모든 육체에 대한 정성이 새삼 서글퍼지는 시간이었다.

 

  소설의 구성은 크게 세부분이다. 해부학자가 어떻게 해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는지의 과정과 재판과정에서의 고소와 변론, 그리고 재판 후 해부학자에게 일어난 일, 즉 재판 전, 재판 시, 재판 후 이렇게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해부학자가 달콤한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작가는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의 이름이 탐험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와 뿌리와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해부학자의 발견을 신대륙 아메리카의 발견에 빗대었다. 작가는 실존인물인 마테오 콜롬보에 대한 기록 -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발견했고 교황의 주치의였다는 - 두어 줄을 가지고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당시로선 신성모독이자 마법행위 아니 악마숭배로 평가될 이 발견의 업적 당사자가 어떻게 교황의 주치의가 될 수 있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아무 기록이 없음이 바로 상상력의 시발점이 된 듯하다. 실제로는 ‘여자의 의지와 사랑과 쾌락을 지배하는 기관’을 발견했다는 사실과 누구나 우러러보는 교황의 주치의로 역임했다는 사실이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 사안일수 있겠지만 작가는 사형수가 중죄를 뛰어넘는 권력자가 되기까지를 미스터리로 보고 그 중간 사연을 완성해냈다. 이 소설에 대한 많은 평가가 있겠지만 내겐 그 두어 줄이 불리고 불려져 이토록 흥미로운 소설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클리토리스와 주치의 사이에 극적인 사연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부학자가 여성을 대상으로 연구와 실험을 하고 여성을 도구화하여 사람을 치료했기 때문이었다. 해부학자는 창녀의 육체와 성녀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한 남성이며 유모의 젖과 어린 여자아이의 피를 동시에 약으로 이용한 의사였다.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기도 했지만 생명으로 사랑을 저버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줄의 기록이 이백 장이 넘는 사연으로 꽃피운 그 중심에 꽃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육체를 죄악시하고 여자를 도구로 본 중세시대에 여성 해방에의 가능성을 탄압한 역사로 읽히기도 한다. 창녀학교가 종교교육은 물론, 고대 신화, 모국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가르치고 일종의 문예부흥학교로서 시청에서 보조금을 받았다는 서술은 당시 창녀의 신분을 말해준다. 고위인사로부터 공무원 임명장을 수여받는 졸업식은 어느 학교의 졸업보다 영예로와 보였다. 즉,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의 성기는 자기 자신의 쾌락이 아닌 남성의 쾌락을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제도화 한 것이다. 그런 여성이 육체의 열망으로 자기 존재를 주체화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영혼이 있어서 스스로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에 구속되는 소유물이지 자유가 허용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거의 현재까지도 남편이 아내의 개별적 쾌락은 인정하지 않는 성적 집단 분위기로 이어진 면이 있다. 작가는 해부학자의 길고 긴 변론을 통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이중, 삼중적인 잣대와 시선을 꼬집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시대가 죽여 버린 여성을 두 번 죽이면서 공평하게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볼 수 있는 남성들을 대표하여 한 사람의 희생양을 가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해부학자가 여성안의 더 극적인 여성을 발견했지만 왜 소설 속 두 여인은 모두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걸까. 해부학자의 첫사랑이었지만 창녀였던 소피아는 성병에 걸려 괴물처럼 죽는다.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게 해준 해부학자를 사랑한 이네스는 화형을 당한다. 한 여인은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몰랐고 한 여인은 클리토리스를 제거했다. 클리토리스를 발견한 의미가 없어져버린 해부학자가 택한 인생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의 백미를 해부학자가 펼쳐낸 자기 변론의 페이지들이라 언급하곤 한다. 그런데 멈출 수 없는 가속력으로 넘어가던 그들 페이지 끝에 에필로그처럼 무심하게 덧대어진 까마귀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잊기가 힘들다. 사실상 해부학자보다 더 인간을 해부하면서 일상을 날아가는 까마귀의 날갯짓은 다시 우리네 덧없는 ‘육체’를 회상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탐험가나 해부학자가 아니더라도 무엇을 발견하고 그 발견의 기쁨을 상징하는 깃대를 어딘가에 꽂을 상상……을 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역사 속 해부학자가 무엇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진실을 허구화하여 자기 인생의 아메리카로 만들어버린 작가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기분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마다의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탐험가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해부학자는 새로운 여성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세상을 확대했고 한 사람은 우리가 아는 여성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로써 우리가 아는 소설의 무게는 분명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연은 마테오 콜롬보에게 서양을 향해 항해를 계속하면 동양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해줄 것이다. 향신료를 찾는 사람이 우연히 근사한 금광과 맞닥뜨리는 것처럼, 자신과 동일한 성을 가진 제노바 출신의 그 남자처럼, 마테오 콜롬보도 자신의 ‘아메리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운명은 그가 베네치아로 금의환향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렌체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줄 예정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여자의 마음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109p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당시 해부학자는 예술가이자 과학자, 기술자였고 사상가이자 법률가였고 스승이자 전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형의 인간이었던 그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소설 속에서 그는 유려하고 감동적인 문장으로 성녀에게 연서를 보내는 문필가였다. 해부대상이 된 신체를 혼을 담아 그려낸 화가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변론하기 위해 그가 펼쳐낸 논리는 과학, 윤리, 종교, 도덕, 심리를 총 망라한 자기인생의 감독관이자 연출자의 관점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이 모든 역할을 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펼쳐낼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며칠 전 소설을 읽으면 뇌 부위가 활성화되어 읽는 사람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처럼 느낀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 있다. 뇌신경세포에 변화를 일으켜 소설을 읽고 나서도 최소 5일 지나도 그 효과가 지속된다고 했다. 소설가가 하는 일이 인간의 뇌를 변화시키는 영역에 있다하면 한 편의 좋은 소설은 한 명의 인간에 기여하고 남을 일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내 이름과 같은 유명인을 떠올려본다. 만약 유명한 미스코리아와 같다거나 대통령, 혹은 유명한 작가, 아니면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같았다면 오늘의 우연이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분명한건 그 우연이 행운의 범주에 있다 하면 반드시 그 이전에 어떤 갈망에의 발걸음과 실망스런 넘어짐이 무수히 반복된 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해부학자>는 미래에 다가올 알 수 없는 반가운 우연을 준비하는 꽤 신선한 발자국쯤 되지 않을까.

 

  새해가 시작되면 어쩐지 꿈의 크기와 무게가 더 강력해지는 느낌이다. 우리 모두 각자 정복의 깃발을 꽂는 그날을 위하여, 그리하여 내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그날을 위하여, 나의 아메리카여, 부디 끝까지 기다려 주시길.

  그것이 기나긴 발견의 기쁨이라면 당신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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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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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후 없어진 부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 그 부위에 통증이 동반되는 경우를 환지통(幻肢痛)이라 한다. 그런데 환지통은 대뇌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소아에게서는 발병치 않으며 15세 이상인 경우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환지통이 심할 경우는 교감신경을 파괴하는 수술 등으로 통증을 치료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팔, 다리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있다고 여기는 환자의 뇌가 아닐까 싶다. 즉, 우리의 뇌가, 분명히 사라졌음에도 거기 그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현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와 연결시켜보면 우리가 고통스럽다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은 실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 정목 스님이 환지통을 비유하면서 인간은 기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환기시켜준 적이 있다. 모든 고통은 경험한 실제 상황 때문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는 개인의 관점, 시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하면서 그럼에도 끄덕이게 되는 일인가.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 거기 사라졌는데 아직 남아있다 여기는 것. 지금은 잊혀졌지만 그때 그것이 아픔이었다고 믿어온 것. 돌아보면 그때 내가 누군가 때문에 혹은 어떤 사실 때문에 아파했는지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으면서 어느 시절, 어느 장소, 어느 상황을 떠올리곤 아직도 기억의 상처가 유효하다 자신을 위로하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아파했던 걸 애써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명백히 사라졌지만 그때 그 기차역에서의 이별을 말하려면 기차역은 절대 사라지면 안되듯이……. 소설이 바쁘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들에 강렬한 화두를 던지기가 힘든 시절인데 권여선의 소설을 통해 나는 잠시 인간의 기억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즐겨보았다. 재미나고 흥미로운 소설도 많겠지만 덮고 나면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몰랐던 숲길을 혼자서 걸어 나온 기분이랄까. 실제로 나는 열흘 전 혼자 여행을 떠나며 이 책을 슬며시 가방에 넣어놓고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뭇해 한 적도 있다. 한번쯤 스스로 걸어 나온 망각의 숲을 되돌아 가보고 싶을 때, 소설이 뜻밖의 동반자가 되어줄지 모르겠다.  

 

  <팔도기획>은 소설가가 대체 무엇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에 관한 글이다. 궁극에 소설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던 인간의 이야기로 인생을 집필하는 사람인데 그저 그렇고 그런 인간도 소설 속에선 특별해보이고 매일 보던 인간도 낯설어 보이는 게 다 글에 향기를 불어 넣기 때문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소설가라면 글에 향기를 불어 넣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진심을 다해 세상의 진실을 전달하려 하는 사람이다. 진짜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로 전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글에 향기가 스며들어야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충격적인 신문기사나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을 목도하고도 하나도 감동받지 않는 이유는 여백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 틈 하나 없는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은반지>에서 사람들은 한 시절을 공유하여 내가 생각하고 그토록 그리워한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은 감정으로 그 시절을 떠올리진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정반대로 그 사람에겐 악몽의 한 시절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지 않고 전혀 의심하지도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서로 증표로 반지까지 나누어 끼었지만 그 시절이 악몽이었던 상대는 은반지가 일생의 더러운 반지로 기억되고 만다. 인간관계라는 게 시간이 지나다보면 관계를 지속시키고 이어가는 주 패턴이 있어 주종관계가 되기도 하고 일방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 특히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내다 보면 한번 맺어진 관계의 패턴이 도무지 바뀌어 질 기회가 오기 쉽지가 않고 왔다고 하더라도 뜻대로 바꾸기가 참 어렵다. 만약 한쪽에서 패턴을 바꾸려 무언가 시도를 한다면 유지되어온 관계에 금이 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내가 감수해온 것들을 불행히도 상대는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알았다면 좋은 관계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다지 충격적인 언사없이 둔중한 깨우침을 산사의 종소리처럼 깊게 울려준다. 혹시 돌아보니 그때가 누군가와 더없이 좋은 시절, 부러웠을 관계로 기억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 나를 위해 참고 견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며 상대는 나와 반대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묘한 여운을 가장 깊게 남겨주는 글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우리를 그 숲에 데리고 갈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가을저녁처럼 어둑하고 신선한 그 숲’은 가보지 못한 후라야 비로소 비밀의 원형을 복원해 낸다. 사실 이런 기분은 나도 산소를 가면서 많이 접하는 기분이긴 한데 막상 산소에 도착해선 머무르는 시간도 짧고 나누는 대화도 성의없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산소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출발하여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거기 가야할 연유의 모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돌아오고 나서야 매번 깨닫고 하니 말이다. 작가는 ‘환각의 종료를 알리는 뾰족한 별 모양의 현기증’을 끝으로 숲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가보지 않고서도 눈에 선한 숲길을 아주 오래도록 걸어 나온듯한 이 충만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내가 아는, 내가 가본 그 길이라는 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길모퉁이>는 이 책에서 가장 슬펐던 글이다. 한 시절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변변치 않은 나를 찾아와 역시 변변치 않은 수사를 늘어놓고 저 길모퉁이를 돌아나갈 때 그 뒷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비루한 청춘의 눈물에 관한 기록이다. 이십대 초반 가진 건 탱탱한 육체덩어리와 영글지 못한 꿈 하나가 전부일 때 같은 꿈을 향하여 밤낮을 시간단위로 공유하던 친구. 비슷한 이야기로 <진짜 진짜 좋아해> 역시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 살던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돈이 없고 남자도 없고 일이 없어도 수술실 같은 화장실을 같이 쓰며 하루를 기대어온 내 살 같던 친구. 그 친구의 존재를 돌아보니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다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오늘만 동동거리던 여기 우리들에게 길가다 한 대 얻어맞은 뒷통수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나 하는 노래 가사처럼 잠시 내게 왔다가 사라진 너를 위해, 아니 그러한 너를 이제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소설은 말없는 위로를 건넨다. 얄궂은 비를 맞아 뒹굴고 흩어지고 가라앉아도 겨울이 아닌 다음 가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또 한번 저 낙엽들을 가슴에 묻게 된다.

 

  <소녀의 기도>는 이 책에서 가장 치열하고 속도감 있어 같은 작가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외인 글이었다. 명백한 내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남겨진 책임을 덮어 씌우고 다시 내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어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인가. 인간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사실을 해석하고 왜곡하고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꽃잎 속 응달>은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된 이유를 반대로 모든 걸 선택했던 내 잘못으로 돌리고 그것을 오랜 세월 연민하는 보통 여자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돌아보면 마냥 슬프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그렇게 대책 없이 불안한 젊은 날’에도 ‘문득 어디선가 벼락같은 따스함이 찾아오기도’했었다는 회상이 작가가 그려내는 문장의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벚꽃이 딱딱한 가지위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순간처럼 몸속에서 끌어올려진 물기가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촉감의 기적을 만들고 어느 순간 그것은 감격적으로 톡 터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영겁처럼 기나긴 인내와 응달의 시간을 견뎌야 하리라.’   -p228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꽃잎 속 응달’의 실체이다. 이제 우리는 몇 십 번의 꽃잎을 틔우고 또 그만큼의 낙엽을 떨구었기에 그 시절이 영영 가버렸으며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단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한순간의 감격과도 같은 청춘의 희열과 지나고 나면 영겁과도 같은 응달의 시간을 이제는 알 수 있어 마침내 알게 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유독 떨어지는 낙엽이 슬픈 이유는 아마도 자기 생의 남은 낙엽들의 숫자가 점점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은 아닐까. 낙엽의 다음 운명이 궁금한 이유는 아마 다음 번 낙엽을 보고도 계속 궁금해 하는 나를 내 자신이 가장 기다리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다음이 있어야 낙엽의 다음도 있는 것이니까.

 

  다시 환지통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 시절이, 그 상처가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생각하면 우린 오늘까지 살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어제 일어난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중요한 건 얼마나 아팠는지가 아니라 언제라도 반드시 잊혀 진다는 것이다. 잊어야 한다는 그 생각조차 없어져 내가 그 사실을 잊었는지 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날, 기어이 오고 만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잊고 싶어 했으나 아직은 잊혀지지 않은 상처들에 대한 염려이자 걱정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내게 소설은 아무리 내가 죽고 난 머나먼 미래를 말한다 해도 언제나 나만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회상의 동력인 듯하다. 잊혀진 기억, 떠나버린 사람, 추억의 계절, 잊을 수 없는 장소, 잊어서는 안 될 실수, 이 모든 과거의 조각들이 망각의 합작으로 완성될 날을 기다린다. 아쉽고도 애처롭지만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작가는 앞으로 일어날 다음의 망각도 너그러이 용서를 해줄 듯 그렇게 소설로써 회한의 세월을 감싸주었다. 이제 남김없이 떨어진 낙엽들이 어디로 가는지 처음 겨울을 맞는 아이처럼 다시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소설이 소설다운 기능을 하여 소설보다 힘든 현실을 지탱할 조그만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면 부끄럼없이 이 소설을 권한다. 한파가 기다리고 있다는 저 겨울이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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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투 2013-12-2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나만의 과거와 머나면 미래를 그려보는 상상은 나만의 기쁨이곘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도 인연이 되어야 펼쳐본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근 일 년 간 소식을 주고받지 않았던 (독서광인)한 지인이 우연히 내게 보내온 책들 중 한권이었다. 여름이후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책은 이미 여러 권이었지만 예의상 무심코 펼쳐든 터였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번째 소설인 <구멍>은 여간해선 이 책을 덮을 때까지 다른 책을 집어 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다. 언젠가 어느 작가가 말하길, 소설가는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잠긴 것들을 삽으로 팔 것인지 포크레인으로 팔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라 말한 기억이 났다. 안 그래도-최근에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실로-구덩이를 깊게 팔수록 마음만 지옥이니 그 속에 구덩이를 파지 말라는 누군가의 법문 비슷한 충고도 들은 바였다. 소설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해지기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나와 연배도 비슷한)이 작가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게 난 ‘구멍’의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 여기저기 함몰된 내 인생의 여러 ‘구멍’들이 잉크처럼 빠르게 번지더니 하나의 대형 맨홀이라도 만들어진 듯 가슴께를 둔중하게 덮어오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라는, 우리네 말할 수 없는 모든 비밀들의 무게이기도 했다.

 

  이 책에 엮인 열 가지 작품들은 모두 화자가 말할 수 없었던 비밀에 관한 뒤늦은 고백들로 이루어 졌다. 공교롭게도 화자는 약속이나 한 듯 그때 그 일을 당사자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다. 조금 비겁했지만 뒤돌아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선택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언뜻 보면 인생에 있어서 진실의 파헤침이 아니라 묻어둠의 미학을 말하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열편 모두에 흐르는 작가의 공통된 낙관의식이 이해는 가면서도 어쩐지 무책임해 보인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나처럼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공감대를 제공하는 것과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라고 본다. 아마 이 책이 한편으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비밀스런 과거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라고 판단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나고 나면 대개 과거라는 실수와 상처에 대해 후한 점수를 매긴다. 우리는 어쩌면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꽤 너그러운 착각 때문에 계속해서 오늘을 믿어보고 그런대로 미래까지 예견하면서 꿋꿋이 살아가는 존재는 아닐까.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모두 도움 되지 않을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로 사람들이 이런 작품에 자석같이 끌리는 이유는 이와 같은 사후 긍정의 심리가 결국 불안한 미래와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우리들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에.

 

  열 한 살 때 둘도 없는 친구 탈이 잔디를 깎다가 자기네 집 구멍에 빠졌을 때에도 나는 탈이 그 구멍으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당연한 사실이 섬뜩한 이유는 우리가 그 구멍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몰라서 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서 갑자기 그러한 구멍에 빠지게 될지 몰라서는 아닐까. 어떠한 구멍이라도 한번 빠져본 사람들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상 이 책의 전언처럼 들리는 첫 번째 작품 <구멍>에서 작가는 구멍을 ‘부정한 어떤 것, 하나의 비밀 같아’ 보인,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선 사실상 전혀 알지 못’하는,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크고 빈 공간’이라 정의했다. 내게는 이 정의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아마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언제든 이 구멍을 위험이 아닌 유혹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구멍>이 친구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본 죄책감에 대한 ‘고백’이라면 <코요테>는 부모의 결혼생활이 깨어질 것을 예감하고 그 과정을 목격한 스스로에 대한 ‘격려’ 이다. 열 두 살 때부터 겪은 아버지의 부재는 집 뒤쪽 같은 자리에서 울려 퍼지던 코요테의 울음소리로 천천히 들려온다. 화자는 예술가 아버지의 무기력한 일상과 다른 남자를 만나던 어머니의 외로움을 공평하게 이해할만한 나이가 되어 단지 그때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고 회상한다. 화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한 적이 없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을 접수하고 수렴했을 뿐이다. 그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도 전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각한다. 세월 지나 아버지의 재능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니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화자에겐 최선의 배려였을 것이다.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발견은 왜 꼭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1mm라도 움직인 후에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아술>은 아이가 없는 캐런과 폴이라는 부부를 통해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양식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은 알려졌듯이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인간의 천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이때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행동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인간의 (학습된)이성이 (천성인)직관에 의해 발달된 편향을 이길 수 있을까. 혹시 자신도 모르게 강요된 이성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미성년자 아술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직관이며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성이다. 두 부부는 아술에게 닥칠 위험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거울 같은 서로와 직면한다. 아술이 문제가 없는 교환학생이어야 자신들도 문제가 없는 대리부모로 위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신 혹은 외부가 바라는 모습대로 일치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일에 노출된 우리 스스로를 방치하고 자신을 모른 체 하는 경우가 있다. <아술>은 계산된 이성을 위해 익숙한 직관을 외면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마주해야할 자기기만에 대한 ‘진술’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사실 작품들 중에서 가장 뻔뻔하다고 느꼈는데 삶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과학적 이론을 아름답게 지지하는 문학적 변론으로 읽었다. 이 작품의 통속성을 해결한 건 제목이 팔 할이라고 보는데 ‘어느 누구도 빛 입자(인간)가 자신의 경로(삶의 방향)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지 못하며, 특정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은 작가가 드러내는 인생관이자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파인만은 일찍이 규칙이란 건 너무 괴상해서 믿을 수 없지만 그 규칙을 따른다면 답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수수께끼 때문에 과학이 흥미진진하다고 설파한 과학자이다.(나는 언젠가 파인만의 전기를 읽었는데 물리학을 전공한 지인에게 물어본 결과 전공자들도 파인만의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들은 적 있다) 자연의 이치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는 괴상하기 짝이 없어 우리 맘에는 들지 않지만 황당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고 - 이는 철학적 통찰력에 해당한다고는 보지만- 말이다.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사물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얽혀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 그 신비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파인만이 발견한 황당하고 괴상한 규칙이 우리네 알 수 없는 삶의 이치임을 주장하기 위해 당신이 버린 것들이 끝내 버려지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 버린 것들이 실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요건이 될 줄 우리는 그때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울적했던 이유는 로버트를 사랑하면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로버트라는 사실도 알면서 그를 떠나는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로버트가 헤더의 아버지벌 되는 교수라는 배경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종의 함정이었다고 본다. 헤더는 교수와의 불륜을 의식해 괴로웠던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로 발생되는 손득실을 따지게 되는 자신을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위험을 회피하고자하는 보편적 심리는 일단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결혼을 앞둔 남자친구)을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것(새롭게 생긴 로버트)을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헤더는 무언가를 결정해서 발생한 후회보다는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가 자기 삶에 득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 판단이 흐려졌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현재 남편, 심지어 자신을 보내준 로버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로써 끝은 아니다. 작가는 어쩐지 파인만의 이론에서 'strange'를 살짝 빼놓았다. 원래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이 세상의 규칙이다. 크게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결론은 여기까지이고 그 다음은 장담할 수 없다. 작품 너머의 헤더의 삶은 과연 변화를 택하지 않았기에 누릴 수 있었던 안락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죄책감을 덜기 위해 비밀을 고백하는 것이 누구의 행복과도 상관없는 일이라 깨달은 시절이 있었다면 반드시 오랜 비밀을 고백하고 거짓의 형벌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나머지 행복을 기다리는 최소한의 예의임도 깨닫는 날, 반드시 오게 되지는 않을까.

 

  <강가의 개>는 그해 열일곱의 여름,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형의 범죄를 알고 있는 내가, 형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달라는 일종의 탄원으로 읽혔다. 형이 잘했다고 생각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외출>도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열여섯의 여름날 아미시 공동체의 소녀 레이첼과 나누었던 감정을 애써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나를 이해해달라는 청원. 인상적이었던 추억은 레이첼과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밤 맹목에 가까운 믿음으로 10미터 아래 강물위에서 나무 널판을 가로지르던 광경이었다. 재수가 없어 발이 쑥 빠져버리면 10미터 강물 아래로 추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았다는 화자의 기억은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에게서 적당한 호기심을 얻고 거리를 유지한 자신에 대한 -그러니까 그 나이에도 성숙할 수 있었던 -대견함으로 보였달까. 싸움에서 끝까지 무모할 정도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던 아이작 킹을 ‘비정상’이라 단정짓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어떤 동요도 없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한 시절 ‘눈먼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퍽이나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무사히 건넜다고 다음번 철로다리를 무사히 건너란 법은 없는 것 아닐까. 어떨 땐 발을 디디는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면서도 막연한 자신감으로 대책 없는 횡단을 할 때가 있지 않는가, 인생이라는 황당한 규칙에서는.

 

  <머킨>은 어쩐지 한국적인 소설같아 보이는 친근함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동성애자 린의 공식적인 남자친구 마이클이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신이 가르치는 청각장애아의 싯구발표와 대치, 연결시킨 것이 적절했다. 설득력 면에서 가장 안정적이었다고 본다. 마지막 결말에서 린과 마이클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멀리서 지켜본다. 입이 있어도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호세는 마음이 있어도 린에게 전달할 수 없었던 마이클의 다른 모습이다. 두 가지 층위가 마지막에 합쳐지며 어느 정도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이 내가 추구하는 소설적 가치는 아닐까, 이 소설에 호감을 가지는 나를 통해 나는 나만의 비밀을 살짝 발견하기도 했다.

 

  <폭풍>은 아버지의 부재로 상처 입은 누나가 자신의 -과거와는 달리-소중하고 따스한 미래를 위해 가해자 역할을 자신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에 대한 고백이다. 비밀은 여행지에서 누나가 약혼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약혼자가 자신을 버리고 이탈을 한 것이었다. 나는 누나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가족으로서 ‘가꾸기 힘든 씨앗’으로 판명된 누나의 분노를 이해하며 어린 시절 퇴근하는 아버지를 같이 기다리던 시간을 회상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것만큼 소박한 기쁨이 없기에 나는 누나의 비밀에 동의하며 누나의 행복을 바랄 수 있었다. 여러 작품에서 작가는 화자의 가족구성원 중 아버지의 부재를 배경으로 삼는 일관성을 볼 수 있었다. 특이했던 건 아버지의 부재로 어머니와 누나, 형은 모두 일정시기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균열의 상황에 이르나 그 모든 걸 지켜보는 화자는 언제나 객관적, 중립적 입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품 속에서 상실한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장으로서의 담담한 남성성을 무의식적으로 지켜온 것은 아닐까.

 

  가장 짧았지만 꽤 강렬했던 <피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주 어이없는 결말로 마무리되던 체호프나 김영하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서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고 막상 그 미래가 오늘이 되었을 땐 지나간 과거를 습관적으로 후회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현재 내 모습이 미래를 이끌 것이라는 이 단순한 원리를 우리는 매순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긴 하지만 또 지금 내가 매달리고 있는 현재 마음이야 말로 가장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피부’는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오늘이라는 시공간의 시각적 표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피부로 이렇듯 삶의 시간을 이동시켜 그곳을 흐르는 굵직한 혈류로 이어지게 만드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마지막 작품인 <코네티컷>은 열 세 살에 목격한 어머니의 동성애 장면에 대한 당당한 폭로이다. 화자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이웃집 여자와의 비정상적인 만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건은 요양간 아버지가 돌아오고 가족 모두 예전 일상을 되찾았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과거 속으로 안개처럼, 스며든다. 화자에게 남겨진 건 무너지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추스르던 어머니의 모습, 그 힘겨웠던 노력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비밀을 감지하고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해 스스로 화해가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열 세 살 짜리가 어떻게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추론하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를 차분히 끌어가는 과정이 어머니도 화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이번 독서는 그리 즐겁진 않았다. 한 편 한 편 넘겨가며 이번엔 또 어떤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걸까, 왜 작가는 이런 종류의 비밀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와 비슷한 비밀이 어느 시절 나도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설의 작법으로 보자면 열편의 작품은 몇 가지 반복되는 패턴을 가진 자기 복제작에 해당된다. 주로 십대 사춘기 남자 캐릭터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워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 내에서 가족구성원들이 겪어야 했던 상처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목격한 후 그들의 비밀을 공유한 내가 결국엔 삶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으로 다양하게 육화되었다는 것이다. 화자가 그 시절 지켜보았던 건 내 주변을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겪어야 했던 이별 혹은 내가 감당해야 했던 누군가와의 이별이었다. 누군가와 헤어졌기에 그는 나와 만나고 내가 그와 헤어졌기에 그는 누군가와 이어진다. 그런데 가만 보면 크고 작은 이별 속에서도 작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해체시킨 적은 없었다. 가족이란 어쩌면 서로간의 비밀을 파헤치기 보다는 적당히 삭히며 묻어두어야 관계가 지속되기 쉬운 가장 비겁한 단위의 인연의 끈은 아닐까. 갈등이 없는 평화라는 게 실은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을 묵인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서로 이유를 묻지 않아도 더없이 편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그려본다. 사실, 한 가지 내가 너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평생 혼자 간직할 것이라는 자기 약속이야말로 얼마나한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인지 파인만이라고 알수 있었겠는가. 그저 괴상하고 황당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그것이 당신과 나의 인생이라고 조용히 끄덕일 수밖에.

 

  파인만처럼 그를 추종한 작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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