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싫었습니다. 글도 쓰기 싫었습니다.

신기한 건 단지 일상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하기 싫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제겐 다른 일을 하고 말고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꼭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매번 희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사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처럼 습관이 되어버린 일이 어쩌면 하루를 좌우하고 나아가 계절을, 한 해를, 인생을 지배하는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미 책 읽고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세요, 물어 본다면 근사하게 답해줄 대답도 없습니다. 목적이 사라진 것이죠. 아무런 목적 없이 좋아서 하는 단계도 지나고 그냥 해오던 것이니까 관성에 의해 책을 펼칩니다. 그래도 자꾸 모자란 것만 같아 다른 책을 펼치게 되고 그것도 부족한 것만 같아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글은 같이 모자라거나 더 넘치기만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이죠, 아마 이 비슷한 답이 가장 적절해 보이네요. 세상엔 책을 펼칠수록 아직 펼치지 않은 책들이 넘쳐나고 글을 써 나갈수록 잊혀지는 문자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책과 글의 바다, 거기서 허우적 대는 나날들. 이 시간들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이일이 허무해지기 시작한 건 책에서 구한 지혜는 그다지 현실 속에서의 실천과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과 한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요. 읽었다고 떠드는 것도 마찬가지.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 역시 다른 문제입니다. 알지만 하지 않고 썼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것.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 느꼈지만 말하지 않고 말했지만 다시 잊어버리는 것. 물론 책은 책이고 글은 글이며 생각은 생각, 생활은 생활이니 매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니까요. 결국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심인 것이지 내가 그리 살겠다는 의지와는 괴리감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대표적인 위선을 실천하는 행위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위선을 견디기 위해 또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위선이 사라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기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밖에 더 굴었을까요. 책을 읽었다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는 것. 심지어는 이해했다고 버젓이 쓰고 말하고 다른 이에게 아느냐 묻기까지 하는 것... 다른 이의 생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무엇을 안다고 아느냐고 알아야 한다고 묻지도 답하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빛 좋은 위선만 배양하는 생활을 이만 멈추어야 겠다 생각했는데, 이 저자는 그래도 계속 읽어야 한다 말하네요. 달리 방법은 없다고 충고하네요. 책 읽기가 혁명이라 말하네요. 아...혁명하려고 책 읽어온 것은 아닌데 말이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이 여름밤의 궤변도 아름답구나, 아니 참 서정적이며 인간적인 논리구나, 아니야, 내가 몰랐던 진실이구나...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이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 질 정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말처럼 결코 쉽거나 당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을 읽은 최후에 이르게 되는 ‘고독의 싸움’이란 아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렵고도 쓸쓸한 결정의 순간은 아닐까요. 미쳐버리고 싶다는 것은 사실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 일 수 있겠어요. 자신의 무의식을 목격하는 일은 미쳐야 가능한 일이라는 뜻도 되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책에 미치면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 버린 것인데 내 속에 책이 들어온 것인지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하여튼 어느 지점에서 내 무의식과 만나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어요. 결정해야 합니다. 들어와 버린 책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을 뚫고서 원래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허나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다른 책을 읽습니다. 보류하는 것이죠. 그러니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다음 책에서도 똑같고 그렇기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겁한 자가 왜 혁명을 이루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런 - 저같은 -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방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덜 미친 방황의 시간. 고독한 싸움의 맛보기 과정. 열정과 공포의 적당한 반복. 이런 힘겨운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을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괴로움도 중독된다고 그래요, 이 전 책의 스님은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진부합니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책을 읽는 내가, 책을 읽었다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미쳐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제대로 읽었다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책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으로 책 처럼 산다는 건 책 읽기 전의 삶을 버리는 일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자는 40년간 독일어로 나온 책의 3분의 1을 썼던 루터를 예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땐 그것이 가능했죠. 그래서 혁명의 본체는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문학이 혁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저자가 부르짖는 핵심입니다.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웃기지 않나요? 저자가 문학을 과대평가 한 것인지 제가 문학을 과소평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거죠. 이해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읽고 쓰는 것을 목숨 걸고 해야 한다 설파하기엔 우린 다들 순수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기엔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로 먹고 살만큼의 당면한 문제이거든요. 먹고 사는 방법은 문학 말고도 너무나 많은 오늘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읽고 써야 한다면 그건 비참하고 슬픈 일이거든요. 예, 그래서 저는 보다 넓고 큰 바다처럼 존재하는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에 감동적이라든지 신선하다라든지 놀랍다든지 하지는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혁명에 대한 오래된 불감이, 그리하여 문학에 대한 강렬한 불신이 더 팽배한 상태니까요. 읽고 쓰고 노래하는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지금 내 삶과 너무 멀어서요... 단지 문학과 책, 글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설득해준 저자의 논리가 고맙긴 합니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계속 읽고 써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으니까요. 저자는 저 같이 문학에 비관적인 사람에게 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문학을 하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이른 바 사임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겁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p226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저자는 계속하려 설득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요. 인류가 생겨난 건 20만 년 전이고 그중에 문학은 50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아주 젊은 예술에 불과하다고요. 어느 시대건 자기 사는 시대가 암담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던가 봅니다. 니체는 살아 생전엔 니체만큼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술가는 문학 말고도 발에 치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늘 밤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세상은 변혁이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죠. 그러니 니체가, 그를 읽은 우리가 하는 일은 절대로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기만 한데 왜 굳이 종말을 걱정하고 절망을 택하는 것인지 저자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웃고 있어요.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은 저자만의 독특한 에너지가 있어요. 문체도 그렇고 근거 있는 자신감도 매력적입니다. 논리나 내용은 모두 동감하지 못했지만 그냥 심정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잖아요. 말하는 구석은 기분 나빠도 그냥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요. 꼭 이 책이 그렇습니다. 저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어요. 기분도 나빠집니다. 맞기만 하면 다인 줄 알잖아요. 이 책을 옮긴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장하고 떠들어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싫어서 ‘논리적이고 개방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역겨워서 스스로를 편파적이라 말해요. 자신은 편식과 편견에 빠진 사람이라 부르죠. 좋고 싫은 것이 먼저고 다음이 논리라 말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고백하죠. 문체나 행간의 분위기, 비유한 표현, 분노의 에너지 등 이런 점들이 책 전체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말합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공감하진 않았지만 읽다보면 사람에 빠지듯이 점점 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후반부 루터의 혁명부터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근대의 근원을 밝히면서 읽고 쓴다는 것의 혁명성을 체계화하는 통찰은 사상가로서의 자기 주장의 확고함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충분합니다.

 

 

희망을 전달하는 방법이 새로운 책이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시달린지 오랩니다. 그랬기에 책으로 희망을 발견하고 글로 치유해 나가는 것도 익숙합니다. 허나 어줍짢게 이 책을 통해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한 공감을 널리 유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제넘은 추천이나 권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그렇게는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 비록 일 퍼센트라도 그건 큰 확률이라고요. 저자는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는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이라죠. 모두 사라지고 그만큼만 남은 텍스트들의 위대함을 상상해 봅시다. 그러니 만약 적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책이 있다면 그건 승리이며 환희이며 혁명입니다. 살아 남아 또 다른 새로운 혁명을 유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혁명을 이어지게 하는 인류의 끈질긴 과업인 게죠. 이런 깨달음은 평범해 보여도 난해한 실천이 과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읍시다. 일단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읍시다. 그리고, 글을 씁시다. 멈추는 건 대안이 아닌 듯 합니다.

 

 

글쎄, 달리 방법은 없지 않겠어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2-06-24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고사는 걱정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먹으면서 어떤 이웃하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책도 다른 무엇도 모두 혁명이 되리라 느껴요

비로그인 2012-06-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이 구절을 읽는데 울컥합니다.. ㅠㅠ


2012-06-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6-2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서평단 도서인데, 읽고나서 꼭 다시 리뷰를 읽으러 오겠습니다.

2012-06-26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읽고 댓글은 이제 달아요.) 근래에 읽은 글 중 가장 재밌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분이 한사람님이시죠.^^ 한 가지 주제를 일관되이, 개성있게 밀고 나가는 글. 그리고 그 글은 재미있지만, 주제는 윤리적인 질문이라는 것. 저는 죽어도 이런 글은 못 써요~.

가연 2012-06-2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괜찮죠??ㅎㅎ 평가단에서 추천하고 뿌듯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