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 그녀를 말하다


...그녀, 지우기 힘든


   지난 10여 년간 보수논객으로 단단히 굳어진 이미지 때문에 시대와 스스로 불화하며 폐허의 시간을 보낸 이문열의 정치적이지 않은 소설.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을 여주인공의 모델로 삼아 문화적 정체성과 예술가의 고민을 진지하게 교차시킨 이야기. 1980~90년대의 이문열을 사랑했던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권하고 싶은 작품이라는 어느 기자의 한줄 서평. 이 세 가지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책을 덮은 느낌을 음악적 비유로 한마디로 부연하자면 전에 없이 목소리에 힘을 뺀 이승철의 새로운 발라드쯤으로 덧붙이고 싶다. 이문열의 소설을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될까 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에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쩐지 이제부턴 겨울이어도 좋겠다는 생각. 스산한 가을을 떠나보내기에 참 적절한 선택이었다.

   작가가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볼까 생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업무 차 동행했던 외지에서 그녀의 추억담을 전해들은 시점이라고 한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대통령은 네 명이 바뀐 세월이다. 그사이 작가는 더욱 낭만적이 되었고 그녀는 너무나 유명해저 버렸다. 외려 그 시절과는 반대로 작가는 오랫동안 문학적 투쟁을 중단하는 것으로 그녀는 소설적 인물이 아닌 생생한 현실의 무대에 더 화려하게 노출되었다고 할까. 그는 18년간 이렇게 변화한 상황을 의식한 듯 자신의 작품이 ‘마치 냄비처럼 달아오르는 우리 시대의 호오감정에 편승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주 싫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이 책의 출간소식을 접한 그 시점에 하필 박칼린이 어느 토크쇼에 출연한 것을 보면 두 분의 인연도 서로의 의지를 너머서는 운명적(?) 관계는 아닐까, 하고 나름 추상적인 의미를 더하고 싶어진다. 작년 이맘때인가 작가들의 여행기를 담은 프로에(sbs '감성여행 내 안의 쉼표') 그가 출연해 자신의 고향인 영양, 안동을 방문하며 음식과 고향집을 공개하고 산과, 마을을 둘러보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 이웃집 할아버지 같이 한결 푸근해진 인상과 털털한 웃음, 사투리로 던지던 농담어린 말씀이 나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 짠해지는 것이었다. 모든 작가의 흘러간 세월이란 필연적으로 깊어지는 회한이 아닐까. 저분이 과연 누구보다 현학적인 지식과 관념론적인 수사를 날카롭게 펼치던 한 시대의 거장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는 많이도 둥글어지고 어떤 부분 결연을 너머 초연해져 있었다. 하여 개인적으로 모든 걸 웃음으로 받아 넘기던 작가의 일년 전 얼굴과 최근 토크쇼에서 많은 이야기를 토로한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겹쳐지던 건 어쩔 수 없는 연상효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읊조릴 때 앞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작가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자격’ 출연으로 많은 사랑을 얻었지만 잃은 것도 많았으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는 고백을 했다. 자신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며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후배가 아닌 선배들의 시기와 질시를 받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마지막에 예술적 재능 및 실력과 상관없이 항상 자신의 국적이 거론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도 했다. 그 프로를 보면서 내가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도시락으로 직접 싸온 반찬들이었는데 고향이 부산인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면서 반갑기 그지없어 저 사람은 정말 한국적으로 살았구나(!)를 비로소(?) 인정했다고 할까. 나조차도 그녀가 사투리를 쓰면서 부산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던 반찬이 그리웠다며 이 맛이 고향의 맛이요 삶의 치료 회복제라 감탄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더욱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이 조용하게 그리고 뭉클하게 이해되었다. 작가는 ‘실존 인물을 여주인공 모델로 삼았을 뿐 소설에 나오는 사건과 갈등구조는 100% 허구’라고 강조하며 나처럼 소설을 현실로 오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실존 인물의 에피소드를 빌려 왔을 뿐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당부를 자꾸 떠올리는 것 자체가 이미 실존인물과 극중 인물을 더 할 수없이 비교하게 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잊자고 애쓰다 보니 더 그리워지는 꼴이었다.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이미 소설의 소재가 된 주인공이 실존인물이고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끝에 가서는 무한대로 퍼져나가던 감동이나 나만의 성찰의 기회를 사정없이 차단해버리더라는 것. 이문열의 작품 치고서는 놀라울만한 가독력을 보여준 작품이었고 만만찮은 작가의 인문학적 통찰력을 과시하며 대중들에게 중첩된 시각으로서 ‘예술의 정체성’이라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칼린만 아니었더라면, 박칼린만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훨씬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 때문에 시발이 되어 그녀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외려 그녀가 방해되는 이 역설을 조금 죄송스러울 정도로 나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이 소설이 그녀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녀, 상간(相姦)의 인연


   소설은 한 연극연출가가 혼자 아파트로 이사와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하는 사진 몇 장으로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그 사진을 설명하던 혜련, 혹은 헬렌 킴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그녀와 헤어진 지 십년이나 되었지만 삼십년 세월너머 '금발의 제니'로 기억되는 그녀를 기꺼이 좇아가는 계기가 된다. 나는 소설의 시작도 마치 한 연극이나 뮤지컬의 서막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린 시절 같은 고향인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대학을 가고 지방 소극단을 운영하고 서울로 입성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하는 이 십여 년의 세월동안 남자는 우연과 필연에 의해 혜련과 조우와 재회를 반복한다. 이 작품을 고향이웃이면서 음악적 선배인 남자와 혜련의 사랑과 예술에 관한 서사라고 본다면 두 사람은 이어질듯 끊어질듯 삶의 어느 한 시기 연속적으로 스치기만 하는 안타까운 인연이자 결실이 맺어지지 않은 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만남을 약속하거나 그렇다고 헤어짐을 다짐한 것도 아닌 사이. 그러나 늘 자기 인생의 사랑과 예술을 떠올릴 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거울처럼 의심없이 반사되는 한사람. 아마 이 소설의 속편이 나온다면 반드시 두 사람은 재회할 것이라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에 변화가 생기진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또 반드시 헤어질 것이므로) 이런 관계는 소설적으로도 상당한 서글픔을 안겨주는 모티브가 되었다.

   혜련은 몽골리안 음악교수와, 연출가는 극단 여배우와 각각 결혼을 하고 서로 비슷한 이유로 파경을 맞으며 홀로이 예술을 실천해가는 아티스트로 성공을 이루어 간다. 두 사람의 시간의 흐름 속에 구체화되는 서사의 줄기는 크게 예술가로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창조하기 위해 고민하고 결론을 정리하는 과정과 부산사투리를 쓰면서 금발의 제니의 외모를 지닌 혜련의 다국적 정체성의 고민이 다각도로 전개되는 과정, 두 가지이다. 그런데 혼혈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당사자 혜련 보다 언제나 관찰자인 남자가 더 깊게 파고 드는 쪽이므로 결국 두 고민 다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혜련의 급작스런 부상과 어이없는 몰락의 과정에서 얼마간 작가의 지난날 상처까지 투사되는 느낌인데 어떤 부분 연출가나 음악가 모두 한사람의 예술가인 작가의 분신으로 느껴졌다. 연출가의 질문과 혜련의 대답을 통해서 결국은 작가가 이 시대 대중들에게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을 천명한 것이라 여겨진다. 보편적이지만 이문열다운 방식이란 생각이다.


“이번 소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고민하는 예술가에 관한 소설이다. 일종의 유미적 주제랄까. 그런 이야기를 여주인공을 내세워 길고 처연하게 하려다 보니 가벼운 사랑의 모티프를 집어넣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 2011. 11.19)




...그녀, 머리칼을 휘날리며


   언젠가 ‘무릎팍 도사’에서 박칼린은 자신의 고향은 부산이고 자신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한국 사람 이어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국적은 미국이지만) 극중 혜련의 외할아버지는 미국도 한국도 아닌 리투아니아의 몰락한 봉건 영주였다. 1940년대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병합될 당시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소련에 끌려간 이후 둘째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해 정착했다. 둘째 딸은 대학에서 각국의 민속음악을 공부하던 중 축제 때 ‘아리랑’을 부른 것을 계기로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한국의 남성과 결혼을 한다. 아리랑을 불렀던 그 둘째 딸이 한국 남성과 만나 낳은 딸, 그녀가 바로 혜련이었다. 책에서도 혜련은 한국과 미국, 리투아니아를 오가며 때로는 도피, 때로는 여행, 때로는 공부의 목적으로 특별한 디아스포라(유민·流民)적 삶을 살게 된다. 작가는 작중 연극연출가의 목소리를 빌어 혜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모들의 기구 만장한 사연을 역사적 지식과 함께 뭉근히 펼쳐 보이고 시대적 운명을 짊어진 그들의 아픔에 인간적인 공감을 유도한다. 식민지와 분단의 상처를 지닌 우리에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겪은 전쟁과 이산의 역사가 전혀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지며 하루아침에 이산가족이 되어 서로의 생사를 모르는 채 각자 타지에서 굴곡진 인생을 마감한 그들이 어쩐지 친척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미국에 데리고 가지 못한 나머지 두딸, 혜련 이모들의 사연은 소설속의 또 하나의 소설이기에 충분했다.

   연출가는 혜련이 들려주는 가족사에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뿌리 깊게도 가족 같은 공감을 느끼면서도 세계의 식단이나 주거, 의상에 관한 그녀의 다문화적 소양을 접할 땐 문화적 다양성에 의문을 가지며 은근한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혼혈 예술인이나 유명인을 대 할때 드러나는 우리네 이중적 시각인 것이다. 작가는 가지처럼 뻗어 나갈 수 있는 문화적 다양성과 근본이 되는 민족적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연출가를 보편타당한 우리 대중의 대표 격으로 상정한 듯 했다. 연출가는 ‘네게는 기본이 되는 음식문화가 없느냐’며 ‘아버지의 것이든 어머니의 것이든 아니면 그 절충이든 지역이나 혈통과 관련된 어떤 기본문화’가 없는 지를 질문하고 독자로 하여금 궁극에 궁금했던 바를 대신 물어 보도록 짐을 지운다. 그에 대한 혜련의 답변은 마치 준비된 자의 반론이 불가능한 자기변호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음의 글에서 나는 작가 이문열의 (생각보다)보수적이지 않은 문화적 관점이 쉽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 글쎄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제 기본 식성이 한식이냐, 미국식이냐, 또는 리투아니아식이냐를 묻는 것이면 조금은 당황스럽네요. 전 음식문화라면 먹을 것 일반을 두고 변형 발전해온 우리 식생활의 보편성 같은 것만 생각했지, 저만의 기본 문화가 있는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요. 재료부터 그래요. 그게 어느 지역 어떤 족속의 것이든 주재료와 부재료 그리고 향신료의 구분이 있을 뿐이지, 어떤 재료가 내 기본문화와 가깝고 먼지, 또 내가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합치되는지, 그런 것을 따져 본 적은 없어요. 의식주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럴지도 모르죠. 내게 있어 의식주의 문화란 이미 알고 있던 것과 새로 보태지는 것이 있을 뿐이지, 그것들이 원래 내 것인 어떤 것과 특별히 절충되거나 종합효과를 드러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더해 가는 것, 내 다양한 선택 앞에 널려있는 어떤 것들일 뿐이죠.”   - 216p

 
   


   연출가는 이를 '중첩'과 '병렬'이라 표현 했고 혜련의 말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의는 하지 않는 것으로 문제를 덮는 것으로 보였다. 소설 후반부에 혜련은 더욱 작가의 분신처럼 ‘정체성이란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개념이고,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아가기 위해서 가다듬어 보는 자기 파악의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나의 조국은 음악이고 내 동족은 내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며 ‘거기서는 생물학적인 정체성이나 혈통의 조국처럼 인종과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더 이상 예술 분야에서 한 사람의 혈통이나 국적, 정체성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작가의 시각이며 피와 땅에 바탕 하는 정체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곧 민족주의에 함몰된 배타적인 시각으로서의 섣부른 편견을 나아가서는 진보나 보수에 얽매인 편 가르기 식의 가치논쟁을 질타하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작가는 결말부에 그녀를 통해 투사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로 ‘가축들과 함께 거칠고 낯선 땅을, 멀리 여러 겹 세상의 끝을, 그래도 흥에 겨워 떠돌고 있길 바라는 ‘유목민 악사’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유목민적인 자유로움은 ‘리투아니아의 바닷가에서 그 모래빛깔을 닮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 있는 그녀의 스산한 뒷모습’과 같다는 쓸쓸함으로 결론지으며 결국 예술가 된 자신의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듯했다.


2. 그를 말하다


...그는, 고민 한다


   또 하나 혜련과 상관없이 이 소설에서 돋보였던 것은 연출자가 혼자서 자신과 독대하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연출가인 화자는 자신이 공연해야 할 작품으로 <벚꽃동산>같은 체호프의 문학작품을 상당부분 언급하며 자신과의 내면적 인연을 톺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작품의 완전한 이해와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 그리고 연출의 성과는 그대로 자기 예술의 발전을 의미하고 작가의 문화적 지식이 더해져 어느 부분 소설이 고급스럽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연출가가 작품소재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작품은 분단 전 한국의 대표적 좌파시인 임화의 시,<너 어느 곳에 있느냐>였다.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연출가와 혜련, 그의 후배가 한데 모여서 창작 뮤지컬의 아이디어로 계획하는 실마리를 제공한 시로써 혜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이모들이 헤어지게 된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작품이었다. 시의 제목은 어쩐지 혜련에게 던져지는 궁극의 질문이라는 생각. 그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깨달음. 소설 속에서 혜련의 이모님들의 사연과 더불어 식민지의 딸과 혁명가의 딸을 결합한 창작 뮤지컬 <너 어느 곳에 있느냐> 역시 또 한편의 흥미로운 서사였다고 본다. 북한에서 처형된 아버지 임화와 아버지와 헤어진 임화의 딸 혜란, 미쳐서 막내딸을 업고 평양을 헤매는 혜란의 계모 지하련,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혜란이 북한방문에서 아버지와 지하련의 소식을 듣고는 실어증에 걸린다는 비극의 뮤지컬은 자연스레 월북한 작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가슴 저린 이야기였다.

   그리고 연극과 상관없는 논리적 독백에서 나는 작가의 뚜렷한 관념적 세계를 엿본 듯한 기쁨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고독이나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그것이다.


   
 


고독은 공간을 인식수단으로 삼는 추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밀도와 관련이 깊은 어떤 물질이다. 그것은 우주 속 물질 백에 아흔 아홉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암흑물질처럼 볼 수 없거나 느끼지 못할 때도 끊임없이 우리 삶에 중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고독을 느낄 때를 우리가 공간과 관련된 갈망이나 결핍의 감정에 빠져 있을 때라고 단정한다. 곧 혼자라는 느낌 또는 다른 존재들로부터의 단절이나 소외감에 빠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독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물질의 그것처럼 고독의 중력도 항시적이고 불변이다. 우리가 감지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도 고독의 중력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짓누른다. ”  -97p

 
   


   연출가는 ‘눈앞으로 바짝 다가든 마흔이란 나이가 무의식의 바닥 가까이 밀려나 있던 고독의 중력을 느닷없이 절감케 하고 가중하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고독의 중력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늘 불변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단순한 깨달음과 소름끼치게 일치한다는 생각에서 흠칫 숨이 멎을듯한 느낌이었다. 그런가 하면 뻔하고 진부한 시간의 덧없음에 대한 판단은 이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로울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시간의 파괴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할 수 없을뿐더러, 어쩌다 벌어지는 부질없는 저항은 오히려 웃음거리나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체념한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운명을 허무라 이름 하여 슬퍼하고 한탄해왔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염세와 비관의 노래는 대개가 그런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속절없는 표현이다."    -111p

“모든 변화는 그때껏 진행된 파괴과정의 한 단락이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보는 일이 언제나 우리에게 쓸쓸함을 자아내는 것은 그때까지의 변화 속에 스며있는 사멸과 종말의 예감이다. 오랜 세월 뒤에, 한때 머물렀던 땅 또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찾는 일은 시간의 파괴력을 확인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 ‘살이’의 부질없음이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곱씹는 일이기도 하다.”    -112p

 
   

   이문열의 소설을 읽는 재미란 이렇듯 서사와 별도로 단순한 속세의 진리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문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지적인 쾌감은 아닐까. 나는 이런 문체와 문장에 좀 과도하게 반응하는 독자인지라 통으로 몇구절을 외우고 싶었음이다.


...그는, 충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서사속에서 지난 10년 동안 상처받은 작가의 흉터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나는 작가가 자신의 상처를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는 의지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세상과 시비를 시작한 이후 문학적 감수성과 언어 감각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 작품이 구상의 시점과는 달리 많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하다고 고백한다. 작품 말미에 혜련은 하루아침에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마찬가지의 아침에 대중을 기만한 예술가로 낙인찍힌다. 혜련은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늘 소신있는 음악적 행보를 멈추지 않아왔지만 대중은 자기들 식으로 그녀를 영웅시했다가 어이없는 일로 갑자기 죄인시하기 시작한다. 대중은 과연 그녀의 예술적 자산인 그녀가 하는 음악이 좋아서 그녀를 좋아한 것이었을까. 책속에서 당사자인 혜련은 그에 대해 침묵하지만 그 모든 부상과 추락을 지켜본 연출가는 혜련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여러 번 하고 있다. 이때 대중들의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주며 논리를 설파하는 연출가는 단연 작가 이문열의 준엄한 목소리로 들렸다. 20여 년 전 부산 동네 한구석에서 사소한 시비로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혜련의 모습은 바로 대중에게 외면 받던 작가의 모습과 중첩되며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말씀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알 것 같아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그 부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혜련을 위해 두려워 한 것은 바로 그런 분별없는 대중의 호오와 종잡을 수 없는 그 변덕이었다. 그들의 대중적 성감대와 맞아 떨어질 때에는 눈부신 아이콘으로 추어올려 그 갈채와 박수에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 주파수가 바뀌고 교신이 끝나면서 예고도 없이 추어올리던 손길을 거두어 버린다. 그리고 패대기쳐지듯 바닥에 떨어지면 호의에서 깨어나 더 표독스러워진 악의로 그 추락한 아이콘을 짓밟아 버린다. 나는 그런 대중의 속성, 특히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정에서 더욱 증폭되고 제어하기 어려워진 집단 악의에 소름이 끼쳤다.”    -243p

“몰려와 헹가래 치는 것도 눈 깜짝할 사이지만, 솟아오른 사람 받쳐주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 또한 이 시대의 분별없는 대중이다.”    -245p

 
   


   연출가는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달은 보지 않고 그 손가락 끝만 빤히 쳐다보다가, 손톱에 낀 때나 찾아내어 “손이나 잘 씻고 다니쇼.”라고 빈정거려 놓고 잘난 듯 사방을 돌아보며 헤헤거리는 부류가 이 시대 마녀재판을 유도하는 사팔뜨기 지식인이라 판단한다. 글쎄, 나는 이 부분이 바로 자신을 열렬히 비난해 대던 진보논객들과 페미니스트 들이 아닐까 여겨진다. 어떤 드라마 작가는 어제, 운명적 사랑은 없다지만 사랑의 운명은 있다고 말했던가.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운명적 소설은 없지만 소설의 운명은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이 소설이 부디 작가에게 유목민 적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회복하는 극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데올로기나 가치적 편협함에 따라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성취가 재단되는 것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여인인 혜련이 그랬듯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문학적 소비자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의 작가.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문학을 이루시기 간절히 바란다. ’리투아니아‘가 작가에게 영원한 예술의 우주라면 ’여인‘은 그 우주를 유영하는 유목민인 것이다. 나는 그가 무한한 예술의 우주에서 어떤 작가보다 자유롭게 자신을 발견하고 그래서 대중을 자석처럼 이끄는 아름다운 난민이 되어주길 바란다.



3. 나를 말하다 
 

   한나절, 말하여야 할까, 를 고민했다.


   우리는 이 좁은 땅 덩어리에서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일지라도 생활 속에서 사회 속에서 자주 ‘정체성의 불협화음’을 느끼곤 한다. 극중 혜련은 외모는 서구적이지만 생활방식은 전통방식으로 한국적이며 학업과 직업에선 미국적인 다국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거창하게 국적을 논하지 않더라도 내 경우엔 글을 쓰는 입장과 남의 글을 읽는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통감한다. 나는 이문열이 비판한 변덕스런 일반 대중의 영역에 당연히 포함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글을 쓸 땐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자세가 되가고 있음을 아프게 주시한다. 최근 들어 내 스스로가 책을 읽었다고 리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책은 거의 한 달만 에 이 책이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이 내 어린 마음을 위무해주고 내 두려운 마음 한 구석을 이겨낼 수 있게 한 점에 대해 감사의 글은 남기고 싶었다. 어떤 집단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추방하는 것과 같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작가도 치열한 내적 추방의 시간을 견뎌내왔을 것이라 믿는다.  

   우연한 혜련이 도왔고 필연의 작가가 나를 구출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운명은 내게 운명적 소설이 되는 것이었나 싶기도 하다. 살면서 이렇듯 어떤 소설은 운명같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가을밤은 시인의 그것과는 달리 그다지 촉촉하지는 않은 것 같다. 리투아니아의 여인처럼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십자가의 언덕에 올라선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 잘은 모르지만 혜련도 이문열도 그 비슷한 마음으로 고통스런 창작을 지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그맣지만 모든 예술인들에게 이 사무치는 마음을 전해드린다. 그들을 경원한다. 그를 축원한다. 그리고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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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0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때마다 감탄, 또 감탄하고 갑니다..
책한권으로 이런 멋진 리뷰를 쓰시다니요 ㅠ

저도 리투아니아 여인 흥미있게 조사햇는데..
책은 아직 못봤어요. 곧 사서 읽어야겠지 말이에요.

2011-12-01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2-0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중심의 소설이라 술술 넘어 간다고 해서
생각할게 뭐 있겠나 싶었는데 역시 같은 이야기 중심이라고 해도
이문열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한사람님 리뷰 때문에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아, 언제 읽을까나...ㅠ

2011-12-0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2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를 뛰어넘는 가독성. 만화만큼만인 사유성. 만화만 못한 저장성. 그로인한 망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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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0-0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2권이랑 3권을 제 돈 주고 못사겠는 거예요. 뭐랄까, 가독성은 좋지만 소설은 역시 소설일 뿐이랄까요. 미천왕 시대는 역사계에서도 드디어 막 연구되는 중의 왕이래요. 아무래도 고대사는 많이 가려져 있으니까. 그래서 예상기출이거든요, 한국사시험에서 고구려사가. 한국사강의 쌤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저는 그래도 <고구려> 끝까지 잘 읽어볼 참이에요.^^

2011-10-08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0-08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의 저 40자평이 책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도 리뷰대회 한다고 해서 이 기회에 관심을 가져 볼까 하는 생각을
얼마 전에 해 봤는데, 역시 그쪽으로는 마음이 안 가더이다.
김진명은 역시 저랑은 인연이 없는 작가인가 봅니다.흑.

2011-10-12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2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과 철학의 향연
양운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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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욕심이 과했네요. 오이디푸스 빼곤 많이 피곤합니다. 그래서 슬퍼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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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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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원고 철학으로 포장하지 맙시다. 그냥 씨네21 기사모음집이라고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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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기술 -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질문만 던져주는 책. 쉽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치기 쉽상입니다. 낯설은 매력이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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