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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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다 읽었지만 불행히도 무엇을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는 경외감은 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전체적인 느낌은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방인>보다 더 심했다고 본다. 어렸을 때 TV에서 안개가 자욱한 파리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이해는 가지 않으면서도 희미한 안개를 따라 끝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대사도 거의 없고 주인공끼리 가끔가다 던지는 한마디의 의미도 모르겠고 방금 헤어진 것 같은데 다시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가 헤어지고 끝난 것인지 다시 만남을 암시하며 끝난 것인지 내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설음이, 이 맑은 가을날 생생하게 재현 되었달까.

 

  그동안 살면서 골키퍼가 공을 막지 못하고 공이 골인되는 것을 목격하는 심정이 어떠할지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같은 운동장에 있지만 골키퍼가 다른 선수들보다 고독하고 불안하겠다는 생각은 그러니까 4년에 한 번 씩은 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연장전을 마치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페널티킥까지 가는 상황에선 늘 골키퍼가 키커보다 더 유리하다고 여겨왔다. 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막는 것이 기적에 가까우므로 막지 못했다고 욕을 얻어먹지는 않을 것이기에. 다시 말해 넣지 못한 죄보다 막지 못한 죄가 덜하다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페널티킥을 성공하지 못한 키커는 돌릴 수 없는 역적으로 남기 십상이라 사실 골키퍼의 불안 같은 건 키커의 좌절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까지 여겨왔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골키퍼가 아닌 관객의 입장이니 그랬을 것이다. 이 오랜 고정관념을 책 한권이 깨트려 주는 시간이었다.

 

  이 작품에서 블로흐는 과거 꽤 유명한 골키퍼였기에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운동장과 골대와 공과 선수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품 서두에 이렇게 써 있는데 결국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까봐 불안하고 또 불안한 사람일 것이다. 골키퍼에게 있어 골인은 자기 존재 소멸의 순간을 상징하지 않을까. 세상이 나 하나의 고통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운동장에 없는 투명인간이 된 느낌일지 모른다. 어떨 땐 내 앞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내가 보고 겪은 일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 엄청난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정말로 내가 한 일이 맞는가? 싶을 때도 있다. 끔찍한 사건 현장을 목격했을 땐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가? 싶기도 할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인간은 이렇듯 자기 눈앞의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사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현실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일까.

 

  블로흐는 해고당한 기념으로 거리를 배회한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일탈을 감행하지만 여자는 블로흐의 현실을 일깨운 이유로 그의 손에 죽게 된다. 블로흐가 여자를 죽인 이후 돌아다니는 곳은 극장, 카페, 우체국, 기차처럼 시간이 되면 문을 닫는 곳이고 자신의 집이 아닌 여관에서 잠을 잔다. 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목적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이 하루하루 정처 없이 되는대로 돌아다닌다. 자신이 거기 왜 서 있는지도 모르고 상대와 왜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서 있고 떠든다. 가끔씩 순경이나 세관직원이 감시와 관찰의 직무를 수행할 때나 긴장하고 정신을 차리려 하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인식조차도 무의미하게 보인다. 세상엔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그가 그런 줄 아무도 모른다.

 

블로흐는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곧 걷기 시작했다. 잠시 서 있다가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멈춰서, 방향을 바꿔 일정한 걸음걸이로 달리다가,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또 돌리고, 멈췄다가, 이제는 뒤로 달리다가, 다시 뒤로 돌아, 앞으로 달리다가, 다시 또 뒤로 돌아, 뒤로 가다가, 다시 앞으로 달리는 자세를 하고, 몇 걸음 걷다가 빠른 달리기로 바꾸었다가, 감자기 멈춰 서서, 갓돌에 앉았다가, 갑자기 계속해서 달렸다.    - p93

 

  나는 이 문장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라 보았다. 이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중요치 않고 오직 그 이후 같은 패턴으로 불안을 표현하며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 나는 저 행위가 축구선수, 골키퍼의 행위를 상징한다고 본다. 블로흐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경기를 관람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는 쳐다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선 골키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정중히 물어본다. 물론, 관객입장이었던 내가 주목해 본적이 없다고 답하긴 미안하다. 주목하는 경우는 바로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일 때, 그러니까 골키퍼가 가장 고통스럽고 극도로 불안을 느낄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블로흐는 자신이 방황이라고도 생각지 않는 방황을 반복 하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며 끝이 난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의 두 손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키커를 바라보며 블로흐는 한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골키퍼가 된다. 한마디로 내 이런 절박한 심정을 당신도 좀 느껴보시란 말이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블로흐의 직업이 골키퍼였다는 사실을, 한방 먹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블로흐가 해고를 당하긴 한 것일까. 책을 덮으면서 강하게 떠오른 의문은 이 모든 것이 블로흐라는 현실부정형의 인물이 생각하는 일종의 망상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현장감독의 눈짓하나를 해고로 해석하는 주인공이 시발점이다. 그가 문제에 부딪혀서 그것을 처리하고 헤쳐 나가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즉흥적, 직관적, 충동적이다. 무의식이 무장 해제된 사람처럼 제정신인 경우가 드물다. 타자의 언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인식하지도 해결하려들지도 않는다. 일어난 상황과 자신이 보는 것들을 스스로에게 질문할 뿐 절대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소극적인 시도는 하지만 인식과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나는 블로흐가 어쩌면 ‘사건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과거 어떤 사람과 있었던 일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사건 자체에 대한 해석을 내 마음대로 부여하고 오랜 세월 그 의미를 사실과 다르게 인식하려 부단히 노력했더니 정말로 없는 사람, 일어나지 않는 일로 느껴져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강하게 믿어보면 또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인간의 강하디 강한 나약함은 아닐까. 있는 사실도 없다고 믿으면 없어지고 없는 사실도 있다고 믿으면 있어지는 게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 망상행위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흐는 골키퍼 일 때 공이 들어간 적이 없다고 믿고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저 당당한 키커의 힘찬 발길질을 한번 견뎌보고 싶다.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로서 그 불안한 순간을 끝내 이겨내고 싶다. 뒤로는 골대를 두고 앞으로는 공을 두고서 기껏해야 골이 들어가는 일 밖에 더한 일이 있겠는가. 내가 매번 골을 막으면 키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골이 하나도 없는 경기를 관람하는 관객은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골키퍼는 분명 다른 선수들보다 골을 더 잘 막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왕관을 쓰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듯, 공을 막으려는 자 골인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가끔은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사람들이 하필 골키퍼 나 하나 맞으라고 공을 던지는 건 아닐 것이다. 설령 공에 몇 번 맞았다 하더라도 그건 다음 공을 잡기 위한 내 노력이자 하필 골키퍼를 택하였기에 정당한 내 몫일 것이다. 공이 라인 위로 굴러 오는 것을 목격하는 골키퍼가 되고 싶진 않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이 굴러왔기에 그 공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렇기에 앞으로 또 얼마나한 공을 잡을 수 있을지를 떠올리고 싶다. 공은 잡을 수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가끔 들어가는 공 때문에 골키퍼를 그만두는 건 이미 골키퍼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아닐까, 싶다.

 

  모든 페널티킥 앞에선 세상 모든 골키퍼를 응원한다. 그건 어쩌면 세상 모든 현실을 막아내고 그러면서도 뚫린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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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0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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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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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작가는 미겔 스트리트를 미치도록 떠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책을 덮고 가장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인공의 행위는 ‘탈출’이었다. 현실 회피나 도피, 인간 외면이나 부정이 아닌 합법적 탈출. 그런데 작가는 지금 이 탈출을 다행한 추억으로 여길까 아님 행운이나 필연으로 평가할까.

 

  이 소설은 그가 열여덟에 트리니다드 섬을 떠나 옥스퍼드 대학을 마친 후 작가로 생활하기 시작한 초반기에 쓴 작품이다. 그러니까 지긋지긋한 그곳을 떠난 지 채 십년이 되지 않은 불같은 청춘의 시기에 그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작가는 떠나면서 항아리가 깨지는 것이 혹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징조이냐고 어머니에게 확인하면서까지 비행기에 올라탔던 것일까.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에서도 언급되지만 작가는 무엇을 특별히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곳을 떠나기 위한 생각뿐이라 답한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선 꿈을 가질 수 없고 가졌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 거리의 사람들처럼 살고는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 곳의 어른처럼 어른 되기는 다시 아이가 되는 것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 트리니타드에서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벗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쉽게 하지 못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은 그에게 어떤 시절이었던 것인가. 결국 쓰레기 수거원이 된 엘리아스에게 웃으며 자랑할 만한 시절이었는가. 결코 성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실패만 약속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성공적이었다 떠들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얻은 해답은 바로 주인공 내가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에 있었다. 나는 작가가 회고하는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을 ‘그리움’이라 칭하고 ‘고마움’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웃겨도 웃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내었음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50년대 영국의 엘리트 사회에서 이민자로서의 열등감, 외모 콤플렉스 등에 시달리며 힘겨운 유학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트리니다드 가디언>지의 기자였는데 아마도 그가 작가가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지 싶다. 탈출을 했지만 그후 영국에서의 청춘은 부친도 사망하고 자살을 시도할 만큼 작가는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시기를 보내었던 것 같다. 지난 시절 그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도 그 쓸모없음에 매달리고 삶을 의존해왔다. 목수는 가구를 만들지 않았고 재단사는 옷을 만들 수 없었고 정비공은 자동차를 고칠 수 없었으며 이발사는 머리를 제대로 깍지 못했다. 남편은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아내는 바람을 피웠고 자식들은 밥먹듯이 맞고 자랐다. 미치거나 취하지 않은 제정신의 사람은 늘 누군가를 흉보고 이웃의 불행에 그 만큼의 위로를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누군가를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경쟁이나 비교가 의미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쓸모있는 것을 만들고 제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이 부질없기만 한 그 거리를 떠나 변화된 환경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인도에서는 ‘이방인’이고 영국에서는 ‘식민지’이고 조국 트리니타드에서는 ‘유랑민’인 그가 왜 그렇게 전 세계를 여행하며 돌아다녔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광활하고 폭넓은 사회는 개인이건 집단이건 변화의 가능성이 많아요. 반면에 비좁고 한정된 사회는 어떤 것을 변화시킨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요. 정체성이란 넓으면 넓을수록 좋아요.”

 

  조그만 식민지 마을 출신의 작가가 앞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미겔 스트리트는 가장 먼저 추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극복되어야 할 치명적인 유산은 아니었을까.

 

  열 일곱 편의 단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경계심>의 주인공 볼로였다. 볼로는 신문에 난 기사를 불신하면서도 신문에 집착하는 유형인데 하이라이트는 바로 자신의 복권 당첨을 믿을 수 없다며 복권을 찢어버린 장면이다. 이 부분은 꼭 그토록 매번 거절당한 상대를 기다리다 지친 여자(혹은 남자)가 마침내 상대가 자신 앞에 돌아왔을 때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매몰차게 차버리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것 같아 가장 짜릿했다. 복권 당첨의 사실여부보다 신문불신에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믿음이 그를 기다리게 하는 - 안 돌아옴을 견디게 하는 - 힘이 되는 인생의 역설. 복권이 당첨 될 리 없고 그 당첨되지 않을 진실이 실릴 리 없는 신문이 나를 절망케 하는 사실은 바로 오랜 시간 기대온 불신에 대한 광신을 한 번에 저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복권이 얼마나 당첨되고 싶었으면 복권을 찢어버릴 것이며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를 밀쳐내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소설속의 여자들은 허구한 날 두들겨 맞고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또 애를 가지고 낳고 기른다. 남자들 역시 현실에서의 몸부림을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 토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웃들도 아내와 자식을 구타하는 것을 큰 일로 여기지 않으며 묵인, 방조, 외면, 구경하곤 한다. 작가가 여성들을 야만적으로 학대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소설 속에서 화자는 남자 어른들보다 여자 어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시선이 냉철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피해를 당하면서도 여성들은 그다지 피해자로 인식되지 않았고 외려 확연하게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남성들이 희생자로 남겨지는 인상을 받았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화자의 어머니인데 중요한 결정은 여성이 하고 출산, 양육, 교육의 역할 역시 어머니 쪽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로서는 불운속의 행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청소년기 7,8년을 살았던 나의 스트리트를 떠올려 보았다. 서울 와서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고 그 시기 나의 가치관이 많이 형성된 기간이라 나는 그 동네가 사실상 제 2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땐 저층 아파트에 엘리베이터, 자가용도 없었던 시절이라 이웃 간 왕래가 활발해 서로 어제 저녁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훤히 들 알고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캐릭터로 기억될만한 인물은 손꼽아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어른, 친구들, 이웃들 삶의 풍경이 몇 장의 사진처럼 고정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내가 이웃으로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고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상상해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각각 짧은 이야기지만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토록 풍부하고 흥미롭게 펼쳐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위대하고 놀라와 보였다.

 

  요즘은 주변 어떤 사람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누구하나 소설이 되지 않는 캐릭터가 없다는 걸 느낀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하나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도 하나 없다. 사람이 문제고 인생이 곧 사연이고 그래서 모두 소설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서늘할 만큼 그 모든 인간과 그들의 사연에 냉정하다.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듯 너무 힘들었기에 별일 아니었다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

 

  쓰는 게 종교란다. 거 참, 웃음도 눈물도 멈추게 하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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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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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두 편의 단편이 희한하게도 술술 읽혔다. 몇 년 전에 읽다가 만 책이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다. 다만 그땐 왜 읽다가 그만두었는지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필요에 의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만 읽었을 것이다. 얄미운 고양이 독서를 해놓고선 이 책을 다 읽은 척, 작가를 아는 척 했던 것도 같다. 이런 책은 다시 집어 들기가 참 싫은데 그래서 더 용기를 내보았다.

 

   순서대로 소설을 읽었고 책을 덮고 난지 며칠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소설의 해석이나 감상보다는 작가의 삶을 그려보게 되었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이 소설들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내게 열 두 편의 소설은 같은 이야기로 들렸고 주인공도 한사람으로 보였다. 그 한사람은 자기 인생에 있어 지나가버린 어느 한 시기를 몹시도 안타까워하고 남몰래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지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살지 못한 회한은 왜 꼭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 찾아오는 것일까. 누구보다 담담한 척해도 나는 그 무심함의 지나침이 바로 간절함의 다른 표현임을 알 것 같았다.

 

   알려졌듯이 레이먼드 카버는 주로 부부를 등장시켜 일상의 한 단면을 현미경처럼 관찰하고 시시콜콜하게 포착해낸다. 이들 부부는 한때 죽도록 사랑했고 그 죽을 만큼으로 미래를 약속한 채 달려왔지만 현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는 실제로 일찍이 알코올 중독과 가정불화로 별거와 이혼을 해 본 사람이고 치료차 입원도 했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뒤늦게 단칼에 금주결심도 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알코올 중독인 화자가 현재 별거중이거나 이혼한 상태에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리거나 더 확실한 이별을 예감하는 이야기는 원인과 배경만 달라졌지 비슷한 구도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화자들은 공교롭게도 툭하면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낸들 알겠는가’ 하고 태연스레 반문한다. 내 삶의 문제이니 ‘그들이 뭘 찾을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고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 있었겠’느냐 자조를 일삼는다. 그렇지 않고 ‘괜찮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어쩌겠는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생 앞의 무력함을 호소한다. 결국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제와 괜찮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게 남은 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가,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첫 번째 이야기 <깃털들>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문제의 깃털을 선물한 ‘올라’였다. 나와 직장동료인 버드의 부인 올라는 센스가 결여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호감의 민폐형 인물이다.(물론 내 기준에서) 이해는 하지만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은 올라가 어리숙한 척하며 할 말은 다하는 사람임을 나는 아직 아이가 없는 프랜에게 자식자랑을 하던 - ‘정말 똑똑해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니까요. 무슨 말을 하면 그걸 다 알아들어요. 그렇지, 해럴드? 한번 아기를 낳아보세요, 프랜. 금방 알게 될 거예요.’ - 장면에서 깊이 공감했다. 가끔 (현실에서도)못생기고 뚱뚱하고 총명하지도 않은 것 같은 여성이 자신의 유일한 경쟁력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자부심으로 아직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을 향해 우월감의 수사를 잔뜩 늘어놓을 때가 있다. 그런 유형은 내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서 너는 왜 아직도 남자가 없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없느냐는 핵심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어 한다. 또 그런 유형은 외모적으로 평균치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는 자기비하와 지나친 배려를 통해 상대방을 더욱 숨막히게 하곤 한다. 사실 이 작품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 천천히 시작되는 변화와 그것을 감지하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사후평가가 굉장한 쓸쓸함으로 남겨지는 글임에도 나는 그저 올라의 역겨운 치열과 그녀를 닮은 못생긴 아이의 얼굴만 강렬하게 남았다. 소설에서 강한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한 작품이다. 

 

   <체프의 집>에서 인상적인 대화는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될 수는 없다는 화자의 항변같은 대답이다. 별거중인 아내에게 답하긴 했지만 결국 헤어짐을 받아들여야하며 더 이상 같이 살수는 없는 이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 답하는 말이기도 했다. 웨스는 여름 한동안 남의 집에 머물며 아내와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불태워보았지만 결국 그 집은 주인의 상황에 때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하는 집이었다. 아무리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도 과거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작가는 아마 술을 끊기 위해 마음으로는 어떤 결심도 하였겠지만 제대로 실천한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당시 (작가가)술을 끊으려 했던 이유가 아마도 같이 사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갈등과 함께 문제가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누군가를 위해서 누구 때문에 끊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대한 리뷰는 故 박완서 작가의 수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작가가 이미 아들을 사고로 먼저 보낸 어머니였기에 아마도 그 심정을 더 공감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줄거리 말미에 ‘삶이란 존엄한 것인지, 치사한 것인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하셨다. 왜냐하면 아들을 잃고도 빵집아저씨와 밤새 대화를 나누며 빵을 먹는 모습을 보니 부부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게도 퉁명스러워만 보이던 빵집주인 -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 같은 - 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밤새 굽는 빵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또 하나 이 소설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 즉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입장과 그 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입장이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무 일 없는 일상과 무슨 일이 터진 일상의 합이 결국 한 사람 인생의 총합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침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었다가 거짓말처럼 다시 운행되기도 한다.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는 때가 언제이고 무슨 이유때문인지를 몰라서 그렇지 이 원칙은 일상을 운행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을 사실 중단되기 직전까지 우린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곧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하는 다음의 예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p102

 

   배경이 집이고 관계가 부부이니 인물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 집을 방문해 현관을 통과하고 문을 열고 등장하는 모습도 빈번하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이지만 작가는 그곳을 불길함을 제공하는 상황으로 이용하고 섬세한 디테일은 초단위로 이루어진다. 소파, TV, 냉장고, 전화, 책상과 같은 소품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고 각종 음료수 및 음식을 놓고 대화가 이어진다. 대단한 사건이나 특별한 갈등이 아니라 단지 어제도 하던 일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할 줄 알았던 일,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존>은 바로 냉장고가 고장 난 일이 어떻게 일상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보존하지 못하게 하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일마치고 돌아온 저녁 왜 갑자기 냉장고의 프레온 가스가 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운전 중 중고차 바닥에서 새어나온 일산화탄소에 질식해 사망한 아빠가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단지 음식물을 보존하는 기능이 잠시 고장 난 것일 뿐인데 그날 저녁의 풍경은 앞으로 더 크고 많은 것이 보존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나 역시 언젠가 세탁기가 고장나고 TV가 고장 난 적이 있다. 한 겨울 세탁기 AS는 그날 일과 중 가장 큰 스트레스였고 TV는 결국 새 제품으로 구입하게 되었는데 며칠 괜히 불안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집안 가전제품이 우리 일상을 아무 일없게 무사히 가동시키는 핵심 장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칸막이 객실>은 목적지가 분명하고 만나는 사람이 확실함에도 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하는지 이동 중인 화자를 통해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외려 스스르 ‘잠속으로 빨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얼마나 무수히 잠 못드는 밤을 지내고 난 뒤 깨달았을까. 사실 우리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어떻게 편히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어떨 땐 앞일을 모른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일 때가 있다는 것, 그건 아마도 어떤 일을 겪고 난 후 그 일을 겪기 전을 떠올리며 비로소 깨우친 인생의 진리는 아닐까 싶다.

 

    <비타민>에선 어쩌다 복합비타민 방문 판매 일을 하게 된 아내가 등장한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배신당하고 아내는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며 ‘어른이 돼서 비타민이나 팔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남편에게 넋두리한다. 결말에 이르러 남편은 골치가 아프므로 비타민이 아닌 아스피린을 찾으며 늘 필요하지 않지만 가끔 필요한 인생의 무엇을 환기시키며 피식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인생은 이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정답을 찾으려는 우리에게 사는데 정답은 없다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조심>에서는 별거중인 남편을 찾아온 아내가 정작 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귀지만 파다가 돌아간다. 이때 작가는 어쨌거나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인생이라 말한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작가의 자전소설 느낌이 많이 드는데 왜 술 마시는 버릇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독백이 잊혀지질 않는다. <조심>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남편인데 이들은 절대 혼자서 병을 치료할 수는 없어보였다. 그리고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자신들을 예전처럼 돌보아주지 않는 것을 다시 알코올 의존에의 이유로 치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 중 만난 굴뚝 청소부 J.P의 아내가 외모도 건실한 여장부처럼 묘사되었고 다른 중독자의 아내들도 무척 현명하고 능력 있는 고학력자로 보인다. 이들은 <열>에서처럼 자신의 전공이나 사랑을 이유로 집을 나가거나 혼자인 남편을 - 혼자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 방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떠나가는 쪽이 아내이고 버려지는 쪽이 언제나 작가와 같은 남자 쪽이다. 그들 화자들은 누구를 탓하느냐 하면서도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신의 확신을 탓’하기도 한다. 즉, 버려질 만 했다는 자책과 반성인 것이다. 허나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제 앞으로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각자 상대방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슬픈 일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 p284

 

   상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과거의 연을 좇아가던 한 시기,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난 것이라 인지한 바로 그 순간의 슬픔과 충격이 작가에겐 한 평생 짐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의 여주인공이 총구를 겨냥해야 했던 주인공은 바로 작가 자신은 아니었을까. 끝내 총을 쏘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여자가 목격한 장면은 늙어서도 티격태격하는 老커플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시간이 되어 기차는 도착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기차에 올라탔건만 승객들은 도통 심드렁하다. 원래부터 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 p241

 

   ‘기차가 움직이면 저마다 기차가 서기전에 빠져들었던 생각, 자신들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라는 작가의 결론이 나는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니 특별할 것 없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가정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살짝 경마도박꾼으로 바뀌어 등장한 <굴레>에선 추락중인 가장이 아파트를 떠나면서 ‘낡은 검은 가죽의 말굴레’를 두고 간다. 굴레를 두고 간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엔 이사를 핑계삼아 굴레를 버리기 적당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니 이사를 가게해서라도 굴레를 잊어버리게......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은 어쩌면 작가의 이루지 못한 소원처럼 느껴져 여운이 길었다. 맹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감각하나를 잃어버린 사람과 정상인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소통이라는 것이 꼭 정상적인 사람들끼리의 축복된 전유물은 아니라는 의미도 있다. 요즘 같으면 서로 테이프에 녹음한 소식을 주고받는 일일랑 무슨 전쟁세대의 낭만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작품 말미에 도저히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남편이 맹인과 짜릿한 공감을 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남편이 살면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맹인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 p351

  나는 그 순간 맹인이 작가라 확신했고 남편은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과 소통하지 못한 세상 모든 이의 표상이라 믿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모든 독자들이 그에게 ‘It's really something’, 이거 정말 뭔가가 있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고 느꼈다. 열 두 편의 이야기 중 가장 해피엔딩이면서 또 가장 울림이 크고 넓었던 이유는 마지막 대사가 마치 어느 대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소설은 지으려고 꾸미려고 노력해서 나오는 이야기 같진 않다. 인생이라는 게 대단히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라는 이것이 정말 뭔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은 별의 별 종류의 일로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내일을 기다린다. 결코 아무 일 없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을 리 없겠지만 저마다 자기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으므로 주어진 일을 닥쳐온 이별을 버려야 할 굴레를 내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 받아들이고 나서 정말 뭔가가 가득하다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행인건 누구에게도 그 순간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작가는 너무 오래전에 그것을 알아버렸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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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저녁장을 보다가 선생의 선종(善終)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두망찰한 가운데 문득 마트를 채운 사람들의 활기가, 일용의 먹거리들이 담긴 장바구니가, 살아가기 위한 나날의 노역과 노력이 퍽 낯설게 보였습니다. 가던 길이 뚝 끊긴 것 같은 당혹스러움은,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이었을까요?

 

  소설가 오정희님이 이제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에게 쓴 편지이다. 갑자기 오래된 작가의 이름이 검색어 1위로 올라섰을 때 나는 거의 부고임을 확신하며 바로 기사를 클릭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면 같이 혹은 멀리 있던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주며 세상에 그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세상에 이제는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한 시간이면 누구도 속일 수 없이 세상을 뒤덮고 남는 시절이 왔다. 그러나 소식을 모두와 공유했다고 그 슬픔의 크기까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게 사람들을 더 슬프게 만드는 건 왜일까. 내가 아는 걸 너도 알지만 결국 내 슬픔은 내 몫이고 네 슬픔도 똑같다는 걸, 어쩌면 삶이나 죽음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걸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순간. 세상 모든 부고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삶의 경고장일지 모른다.

 

  책도 잘 굴러가고 있던 일상에 우연처럼 나타나 때 되면 탁자위에 던져지는 월말 고지서처럼 서늘하고 불쾌할 때가 있다. 이언 매큐언의 책을 읽는 내내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는데 - 물론 기분 좋으라고 소설 읽는 건 아니지만 - 한편씩 이야기가 쌓여갈수록 좋지 않은 기분은 더 확실하고 분명해졌달까. 한 권 들면 웬만해선 다른 책을 기웃거리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이 책보다 더 빨리 끝낸 책만 두 권이었다. 어쩌다 이 책이 한참을 내기 싫은 세금처럼 그렇게 하기 싫은 최후의 숙제로 느껴졌는지 이 불쾌감이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차분히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그건 아무래도 여러 차례 배신을 당했음에도 그것을 제공한 가해자가 원망스럽지 않고 외려 더 공감하게 된, 더 배반당한 마음 때문인 듯하다. 여덟 개의 작품이 대부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청소년이거나 성인이 되었어도 비정상적인 정신 소유자로서 미성숙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허나 이들의 강박과 폭력, 만행, 강간, 살인은 그들의 일상과 패턴 속에서 대단치 않게 스쳐지나가거나 독자에겐 그다지 큰일이 아닌 양 비추어진다. 작가가 흔한 일처럼 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폭행범이고 강간범이고 살인자에 아동 학대 및 성추행자이지만 어느새 그들에 동조되어 그럴 수도 있지, 뭐 잘못되었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하는 내 자신과 언제나 마지막에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런 결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 몰랐다고 생각되는 배신감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고만 스스로를 속일 수 없으니 좀 더 지속되지 않는 이야기에 속절없이 당혹감만 느낄 수 밖에.

 

  모든 작품에서 어른은 가난과 질병, 우울을 물려주는 원인제공자로 등장한다. 6,70년대 영국의 경제위기를 상징하듯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며 그들은 비틀거리고 뒤틀린 모습이었다. 사춘기 화자인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매일 저녁 더 늙고 피곤하고 가난해져서 집에 가는 수많은 사람들’(『가정처방』)이었고 영국에서 시작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 참가한 사람들은 등수에서 밀려나 ‘아무 보답 없이 폐인이 되도록 달리는 패배자들의 정복욕’ 으로 그려진다.

 

- 한갓 의미 없는 자신의 왜소한 운명을 가늠하며 저린 발을 서서히 젖은 풀밭으로 내딛는 인간, 숨 막히는 거대도시의 하늘 아래, 인간의 도전욕과 유기체의 진화과정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의지를 시연하듯, 광장 저편에서 작은 아메바 덩어리 같은 것이 나타나 점차 사람의 옷을 입으며 도전욕과 결승점을 통과하려는 헛된 노력으로 무장한 채 비틀거리며 뛰어왔다. 그건 순간순간 새롭게 얼굴을 바꾸는 삶, 바로 우리 삶 자체였다.   - 48p

 

  인생이 가혹한 장거리 경주인 크로스컨트리라면 당시 영국 어른들은 뒤늦게 결승점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오는 패배자의 얼굴이었다는 통찰에서 나는 이 모든 작품 속 결말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입체기하학』에서 화자는 ‘45년 동안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장을 써온 증조부’의 습관을 따라한다. 일기장에 집착하고 골몰할수록 아내와의 불화는 심화되어 가고 급기야 부부간의 폭력적인 상황으로 까지 치닫는다. 화자는 일기장에서 갑자기 M이 사라진 이유를 당시 입체기하학에 대한 지식과 실험에서 찾아낸다. 일기장에서 증조부와 M이 나눈 이야기를 보면 19세기 세계 패권을 장악한 영국 지식인으로서의 우월감이 가득하다. 화자인 나는 증조부에게서 상속받은 ‘방부 처리된 페니스’가 담긴 유리병을 ‘나와 증조부의 삶을 연결해주는 고리같던 물건’이라 칭하는데 이는 곧 고집스럽게 후대에 전수되는 영국의 우성 유전자로 보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징적인 유전물질을 깨트리는 주인공은 바로 그 유전자를 품고 길러야 할 화자의 아내였다. 여기서 작가는 과거 대영제국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실에 머물러 있는 오늘의 성인 패배자 - 작품 속 청소년들의 부모 - 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일기장에서는 헌터라는 젊은 수학자가 세미나에서 발표한 ‘표면이 없는 평면’이론이 싸구려 속임수라 비난 받자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이론을 증명하고 자신은 사라졌다는 기록을 확인한다. 마치 M이 사라진 미스터리를 발견해낸 것이 대단한 일인양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화자가 진짜로 실행하고 싶었던 것은 아내(현실적 장애물)의 제거가 아니라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쉬지 않고 충고하는 현실의 잔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내에게 똑같은 실험을 해보지만 아내는 사라지는 듯 끝까지 사라지지는 않고 메아리처럼 목소리만 울려댄다. 어찌보면 우스운 이야기를 이토록 심각하게 전개하는 작가의 계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작가는 시종일관 아무 일도 아닌 일을 대단하게 말하거나 아주 심각한 일은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능청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결핍된 욕망이 자신의 자식에게 투사된 어머니상은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가장무도회』등에서도 나타났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작품들 중에 가장 문체의 온도가 높았는데 고백화자인 나의 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언뜻 보면 작가가 벽장 속에 틀어박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남자의 편에 선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이유는 아버지 없이 나를 혼자 키우면서 집에 가두고 밤낮으로 지킨 엄마 때문이라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 스스로도 ‘내 삶의 첫 두해를 언제까지나 반복해서 살아가며 불행하다는 생각없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오븐 속으로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남몰래 문이 닫히기도 바랐고 교도소에서 농아인 데피와 차를 마셨던 석 달 동안이 가장 행복했다고도 기억한다. 이토록 자발적 자폐공간을 꿈꾸고 오래 유지하려는 화자에게 독자가 진심으로 연민을 표하려 할 즈음 작가는 슬며시 물음표를 던진다.

 

- 난 자유롭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아기들이 부럽습니다. 이불에 싸인 채 엄마 품에 꼭 안겨 돌아다니는 모습이.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난 왜 그럴 수 없죠? 왜 나는 왔다갔다 일하러 가고 식사 준비하고 살기 위해 수백 가지 일을 해야 합니까? 난 유모차에 타고 싶어요. 천치 같은 짓이죠. 180센티나 되는 내가.   -140p

 

  나는 왜 이 문장들이 언제까지 부모 탓을 하며 어릴 적 유모차나 그리워 할 것이냐는 따끔한 조롱으로 들리는 걸까. 설령 부모가 그렇게 키웠다 하더라도 ‘180센티나 되는 내가’ 유모차 타령을 하는 건 똑같은 전철을 밟겠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나 하는 자조섞인 질타만 같다. 『가장무도회』도 피해자로서의 조카 헨리의 상처보단 가해자로서의 이모 미나의 책임에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은퇴한 연극배우 미나는 엄마를 잃은 열 살 조카 헨리에게 초현실적인 엄마로서 역할하며 매순간 자신들의 현실을 잊고 싶어 한다. 연극대사처럼 대화하고 무대의상을 입은 채 식사하고 늘 무대 위의 배우처럼 가장을 일상화하여 진짜 자신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것이다. 미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순간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자신이다. 헨리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이모(를 포함한 세상 모두가)를 통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숙한 자신이 보기에 어디까지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 누군가가 다른 사람처럼 입고, 다른 사람인양 행동한다면, 그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타인으로서 했던 짓에 대해……?    -206p 

 

  즉, 예술가처럼 가면을 쓰고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자기’가 벌인 행동은 과연 누가 책임 질 것인지 가면만 쓰면 잘못도 용서되고 따라서 벌도 받지 않는 것인지.

 

  부모의 역할을 다정한 소꿉놀이로 시작해 서늘한 근친상간의 이벤트로 발전시킨 경우가『가정처방』이었다. 사실 이 작품은 ‘근친상간’이라는 심각성 보다 사춘기시절 남매끼리의 해프닝 정도로 이해했다. 나를 성인세계로 인도한 친구 레이몬드에 지지 않으려고 집에서 성행위 예습을 한 것이라 보았다. 왜냐하면 화자는 어설픈 성교에도 불구하고 처음을 치루고 성인으로 입장했다는 자부심만큼은 만족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돌아보는 화자에겐 당시 일이 가정 ‘폭력’이 아닌 ‘처방’으로 기능하므로 사실 굉장히 남성중심의 시각이 배어 있다고 느껴져 내겐 불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름의 마지막 날』과 『나비』는 한 번의 실수와 이어지는 우발적인 사고의 반전을 위해 그 전 장면 모두가 더욱 아름답고 외로워야 했던 이야기들이다. 마치 어디서 들은 이야기처럼 전혀 내 경험이 아닌 것처럼 남일 전달하듯이 담담하고 차분히 상황을 묘사하는 작가가 소름끼치도록 오싹해졌달까. 우리 집 다락방에 이사 온 너무 뚱뚱한 제니는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전형적 인물인데 제니는 그러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함과 섬세함, 인내심을 무기로 집안 엄마의 공백을 메우려한다. 그러나 제니의 자발적 엄마되기는 사람들의 몸을 편하게 만들었을진 몰라도 마음은 불편하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제니와 제니에게 맡겨진 앨리스, 그리고 내가 만든 여름날의 추억이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이다. 나는 정말로 제니와 앨리스가 보트가 뒤집혀 빠져 죽을지 몰랐었기에 읽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멈칫 했었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같이 겪은 다른 이에게는 잊어야 할 사고가 되는 일 이것이 인생이라는 입체기하학일까 싶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여름날 강가의 보트에 탄 사람은 엄마를 사고로 잃은 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제니와 엄마가 내 팽겨쳐둔 앨리스였다. 세 명 모두 진짜 자신의 보호자가 부재한 무방비 위험 상황에서 가장 약자(여성과 아이)가 희생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는 뜻으로도 읽혀 덮고 나서도 씁쓸했던 이야기다.

 

  『나비』역시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일을 끝내 확인해야 하는 잔인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반전은 - 목과 턱이 구별되지 않아 불신감을 주는 - 용의자로 지목될 만한 인상을 가진 내가 결국 소녀의 살인자였다는 게 맞다는 사실에 있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아이를 죽인 원인과 그 배경에 있었다. 나는 아이를 성폭행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내 욕망을 목격한 그 아이를 살려봤자 어차피 성폭행범으로 지목받을 것이라 믿었기에 살리지 않았을 뿐. 화자에게 살인 자체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죽은 사람, 시체를 처음 보았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이전에도 차에 치인 개와 어머니의 시체를 보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인데 늘 죽음처럼 살다간 어머니의 죽음은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땐 시체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나 화자는 소설 맨 첫 문장에 ‘목요일에 나는 난생 처음 시체를 보았다’라며 자신에게 특별한 에너지를 주었던 제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곤 제인과 뜻밖의 산책의 실마리가 된 나비에 대해 강렬한 싯구를 선사한다.

 

“조금만 더 가면 나비가 나와. 빨강나비, 노랑나비, 그리고 어떤 땐 초록나비도.”

 

  그에게는 남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일상들이 ‘손을 내미는 순간 날아가는 나비만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던 것. 그러니 운하에 빠져 익사한 제인은 결국 나에게 한 마리 핑크빛 나비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화자의 어머니는 화자에게 얼굴기형을 물려주며 삶에 무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상하게도 아이가 머리를 하천에 쳐 박은 광경이 영화 <시>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을 한 여고생과 겹쳐졌다. 나는 이 작품이 소설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고 특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소녀를 밀어버리는 장면과 마지막 돌을 주머니에 넣고 피해자 부모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결말이 그래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잘 살아보고픈 의지로 다가와 응원을 하기까지 했다.

 

  표제작이었던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사실 그다지 인상 깊진 않았다. 그나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우리가 그 놈을 아는 이상으로 그놈은 우리를 잘 알 터였다’고 언급한 쥐 한 마리였다. 두렵고 끔찍하지만 첫사랑에 빠진 자신들을 가장 괴롭혔다고 판단되는 쥐를 때려잡는다는 것의 의미가 더 이상 덜 익은 첫사랑은 의미가 없고 끝이 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부분은『입체기하학』에서 아내가 깨버린 유리병과도 같은 장치여서 충격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실제로 고양이만한 쥐와 대치한 순간이 있었고 그때 이 쥐를 잡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함을 실감해 본 적이 있어서 쥐로 인한 공포감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여자 친구의 이혼한 아버지는 화자를 주점으로 불러내 경제적으로 화자를 이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작품 전반에 미성년자들의 부모, 즉 기성세대로서의 장년층은 피곤하고 무력하며 무례하거나 무식하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들의 위험한 무의식의 세계는 어느날 갑자기 도래한 특별한 징후가 아니라는 뜻으로 읽혔다.

 

  가장 짧았던 『극장의 코커씨』는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꼬집는 일종의 풍자극으로 이해했다. 연극연출가와 안무가, 음악담당의 스탭들이 자본을 향해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갑이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드러워도 노동해야 하는 을로 비쳐졌다. 그들 중 스스로 코커를 자처한 한 배우가 당신들이 진짜로 보고 싶은 장면은 흉내가 아니라 실제가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위질하듯 무대를 걸어가고 가위질하듯 사라지던 데일이라는 인물이었다. 예술작품에의 가위질(검열)을 상징하는 것인지 의아했고 다른 작품들과 지향하는 지점이 틀린 것 같아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진짜 속내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여덟 작품을 덮어온 내가 최종적으로 이해하고픈 작가의 공통된 주제의식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고통스런 의식, 그 혼자만의 절차이다. 오랜 세월 계승되어온 과거라는 관습에서 벗어나고, 당당하게 성인 남자의 세계로 입장하고, 한 시절의 아픈 추억은 마감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첫사랑도 고별하고, 자신을 버리거나 가둔 부모와도 화해하고, 거추장스런 가면을 벗어던져버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만들어온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들이 꼭 필요하다는 당부로 들려온다. 중요한 건 어느 시기, 어떠한 방식의 의식이건 의식이후의 삶일 것이다. 무의식의 통제는 결국 의식意識에서 가능하고 살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는 자기만의 의식儀式을 통해 인간은 무의식과 의식의 불균형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와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육체만 성장한 ‘성인(成人)’이 아니라 무의식마저 의식화되어 그 경계가 없어진 ‘성인(聖人)’을 어른이라 부르고 싶은 건 아닐까. 다행히 누구도 완성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진 않는다. 그래서 더욱 삶의 완성은 죽음인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언제부턴가 - 대략 어머니를 보내고 부터인 듯 -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고 그 며칠은 함께 상중인 경우가 많은 요즘이다. 안 그래도 가을의 시작과 함께 환절기를 잘 통과하자 굳게 마음먹었던 게 엊그제 인데 금새 비보하나로 일상의 축이 흔들리는 게 우리네 중생 삶인 듯 하다. 오정희 님의 말씀처럼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을 잊지 않는다면 바로 지금이 마지막 성인식을 위해 마음을 일으켜야 할 시간은 아닐까. 지난날의 무언가를 꼭 버리고 싶은 사람, 알면서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잘못들에 자주 패배하는 사람, 그것들이 자꾸 앞으로 나가려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경우라면, 이 책이 꽤 훌륭한 수단이 되어드릴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진행형이지 완성형은 아닌 존재들이니까. 성인이라고 다 성인은 되지 못한 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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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골에서 살며 지켜보니,
모든 풀과 나무는 가을에 꽃을 마지막으로 피우고 씨를 맺어
흙에 떨구고는
이 씨앗들이 흙 품에서 겨울을 나도록 해서
봄에 새싹이 돋게 하더라고요.

가을이란, 참 아름다운 철이지 싶어요.
가을빛 한껏 누리셔요.

아이리시스 2013-10-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게 단편이었구나.. 잘 지내시는 거죠?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일정시기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음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시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데 더 낫다고 판단한 그 사람의 본능적 의지라고 믿는 편이다. 즉, 한 사람의 生에 있어서 가장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그 사람 본인이 가장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실제로도 나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이 이상하게도 사고 일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 있다. 가족이 다 같이 둘러 모여앉아 같이 운명적인 한 순간을 공유했는데도 그 중 한사람은 자신이 그 순간에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심지어는 그 자리에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몇 가지 실례를 시작으로 그렇다면 치매에 걸리는 사람은 혹시 인생에 있어서 남들보다 잊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궁극에 걸리는 병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본 적도 있다. 여하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기억을 찾아야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이제는 그 기억을 되찾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소설은 어떤 독자이건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에 나라면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추적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가, 그렇다면 기억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닌가 하는 소설의 텍스트적인 질문들에 예정대로 한껏 시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느 상식 시험지의 정답같이 결정 되어 버린 답 - 십 년 전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망연자실하던 롤랑에게 신분증명서는 물론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던 위트가 은퇴를 하면서 니스로 떠나기 전 그에게 했던 말 -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라는 뻔 한 문구를 연결 지으려 습관적으로 뇌가 작동함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술 먹으면 절대로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어느 캠페인 문구의 반복적 피로 유발성 멘트로 느끼지 않기 위해 나는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쯤 롤랑의 미래분신으로 보였던 위트가 미래보단 과거가 중요하다는 말이 맞았다고는 했을지언정 그 정도는 그토록 과거를 찾아 헤매던 롤랑을 배려한 예의쯤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추적 여행이 그다지 흥미로와 보이지 않았음에도 책을 덮은 후엔 적잖이 밀려오는 아련함, 설레임 비슷한 진동들에 꽤 고개를 끄덕인 하루였다. 화자도 필요를 언급했듯이, 로마에 있다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 명칭만으론 꼭 명품 패션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부티크 옵스퀴르가, 그러니까 화자가 프랑스로 건너오기 전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이 막 시작되던 장소에 가보았자 더 분명해지는 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복원이 아니라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완성일 뿐이라는 충고. 그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지워질 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너무 빨리 지워질 것을 안다는 슬픔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그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들 수만큼 똑같이 소멸될 것임을 알아버린다는 것. 작가는 이 거대한 슬픔의 크기를 위로하려 아이스크림 소녀와 어린 위트와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우리 모두의 어린 아이를 내세우고 있다.

 

 

  저녁 무렵 집 앞에서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그 어린아이의 찰나적 슬픔을 오래 붙들고 있었던 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막연한 소회의 실체를 어렵지 않게 건져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시절 내가 잊고 싶은 과거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반가움 이었고 결국 망각에 대한 갈망은 그 간절함만큼이나 언젠가 그리움으로 환원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잊고 싶은 것들은 결국 그 전에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고 단지 나중에 (기억을)잃어버렸다고 잃어버리기까지의 좋았던 모든 것이 잊혀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 그것들의 ‘잊을 수 없음’은 잃어버릴 수는 있었던 기억과는 별도로 내 몸속에 혹은 내 마음의 나머지 속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그럼에도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이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람의 뇌는 고통을 기다리며 고통에의 반응을 쾌락과 똑같이 즐겨한다는 뇌과학의 연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단지 오래전에 지나갔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를 관통한 시간들에 대한 전관예우. 어쩌면 가장 기억하기 싫어하는 그 시간들이 바로 내가 가장 돌아보고 싶은 시간들이며 가장 나를 만들어온 재료들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다시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가장 유력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작가도 실은 전후 어느 시기를 가장 고통스러워 했겠지만 사실상 그 시기가 가져다 준 가장 큰 행복을 잊을 순 없다고 뒤집어서 항변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때 잃어버린 가족, 이제는 사라진 장소, 어쩔 수 없이 소멸된 관계들이지만 천천히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보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일이야 말로 고통과 상처를 더 확실히 마주하며 상처만큼이나 함몰되어 있던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이 되지는 않았을까.

 

 

 

 

  롤랑은 위트와 지낸 8년 동안은 자신의 기억상실을 문제 삼지 않고 흥신소 일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위트와 나눈 편지들을 보면 롤랑과 위트가 서로 배려하며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동료로 보인다. 허나 기억상실 이후 내 삶의 이정표를 제공한 동료가 은퇴를 하니 더 이상은 잃어버려서 잊고 있었던 과거를 묻어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시간이 흘러 이제는 흥신소 팔년간 길러진 추적의 근육으로 과거를 대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도 생긴 것이다. 나를 찾아나서는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타당하고도 기대되는 장치, 늘 누군가를 찾는 직업에서 내가 누구인지 찾도록 한 의도된 역설, 주인공에게 도서관과도 같은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열람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공되는 단서들, 사색과 산책을 하면서 과거라는 낭만에 흠뻑 빠져들 수 있게 한 파리라는 배경, 이러한 조건들은 과연 프랑스 사람이 아닌 이 남자에게 그때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밝혀진 단서들은 전쟁 속에서의 ‘망명자’라는 신분과 ‘국적’이라는 안전 보호망, ‘국경’을 넘다가 벌어진 사고로 요약된다. 위조된 증명서로 파리 시내를 걷던 한 외국인 남자는 언제 어디서건 증명서를 보자고 검문당할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방법에 목숨을 건다. 그는 스위스를 통해서 포르투칼로 넘어가는 방법에 무리한 베팅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하지 못한 채 자신마저도 잃게 된다. 한 시절 그에게 있어 내가 누구라 말할 수 있는 떳떳함은 가족이나 사랑, 돈보다 중요한 가치였을까. 그에게 ‘망명’이 우연한 원인이라면 ‘국경’은 선택된 과정이고 ‘국적’은 보상같은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례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환경과 조건이 집요하게 질문하는 정체성문제로 환원되고 독자는 전쟁과 국적과 상관없이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궁금했던 건 안전한 장소라 판단된 므제브의 남십자성 산장에 같이 간 게이와 프레디, 페드로는 외국인이었기에 이러한 여정이 이해가 갔지만 프랑스인이었던 드니즈는 왜 페드로와 함께 국경을 넘는 것에 쉽게도 응해야 했던 것일까. 당시 직업적으로는 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게이와 드니즈지만 소설 속에서는 유독 존재감 없고 생각 없는 여성인물로 그려진 것 같다는 불만은 나만의 과잉반응일까. 그래서인지 화자는 드니즈가 실종되어 행방불명이라는 문서를 보고도 어떤 흔들림이나 슬픔 따윈 내비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사실조차 화자의 과거를 찾기 위한 단서로 활용할 뿐 작가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소식에 애타하거나 그녀 자체를 인간적으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그저 그때 그러했던 나를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는 나,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듯 했다.

 

 

  그런데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없다는 슬픔이 사랑했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일이 되어 가고 있음을, 사실 요즘에서야 더 실감하곤 한다. 나이를 들면서 점점 과거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 비슷한 아련함, 문득 다가오는 당황스러움이 그것이다.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각도 둔해져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찾아보면 삼 년 전이고 삼 년 전이라 생각했던 그때는 거의 7,8년 전이고 십년이라는 단위가 거칠고 무디게 잘라놓은 야채 한 토막처럼 덩그러니 간결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더불어 기억이라는 것도 정확하고 공평하게 기억하기 보다는 각자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저장하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깨닫곤 한다. 우리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닌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진 그들과 만나고 살고 나누었다 여기며 오늘도 그 기억 속에서 웃고 울며 떠들진 않았을까.

 

 

  그곳에는 지난 오십년 동안의 각종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작업도구라고 위트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하곤 했었다. 그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페이지마다에는 오직 그것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세계들이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부와 연감들을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으로 표현한 부분이 인상 깊다. 이와 연계 해 기억에 남는 건 니스로 간 위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도서관 사서를 꿈꾸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전화번호부와 연감을 뒤지며 한 평생 타인의 삶을 좇아온 그가 이제는 무수한 기록이 담긴 책들을 정리, 관리하는 사서로 살겠다고 하는 모습이 어쩐지 롤랑의 미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자신이 과거를 추적한 방법 그대로 미래도 정리할 것 같다는 예감. 롤랑은 어렵게 찾아간 사람들이 남겨준 비밀상자들을 건네받고 이제는 사라진 상자 주인의 일생을 떠올린다. 누구라도 그래봤자 거기 담긴 건 사진 몇 장이나 아끼던 기념품, 편지나 사소한 기록들이 전부일 것이다. 문득 우리네 인생의 도서관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싶어진다. 인간이 소멸되는 방법 중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이외의 다른 공통된 모습을 떠올리기 힘든 내게 이 책은 삶이라는 도서관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들었다. 글쎄, 그건 아무래도 부티크 옵스퀴르가 2번지처럼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시작되는 바로, 그 거리의 빛나는 혹은 침침한 표정들이 아니겠는가. 한번쯤 다시 돌아갈 필요는 있지만 다행인건 소설속 주인공처럼 그것이 도서관을 짓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 아님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고마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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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3-09-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도서관 사서였었는데....

기억의집 2013-09-2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 지금 아주 오랜만에 서재 들어왔는데 한사람님 글이 딱 보이네요. 반가워요~ 이 글 쓰고 잠깐 스크롤 해보니 계속 글 쓰셨군요. 알라딘 들어와 인사나 해야지 하다가도 잘 안 들어오게 되서 한사람님 계속 활동하고 계시는지 몰랐어요. 가만보면 책 읽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책 읽을 수 밖에 없어 나의 서재 못 버리나 봐요~ 저도 작년부터 딴곳에 정신 팔려 있다가 이젠 슬슬 서재 좀 신경써야지 하고 있어요. 여튼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