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반가운 소식

 

 

나는 종교를 기회의 문제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들은 뱃속에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종교를 수용할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쪽에 속했다.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님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고등학교는 불교학교를 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나서 부터 종교는 내게 학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교일지라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선 긍정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신이란 일단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부재한다고 믿는 쪽보다 손해를 덜 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가끔 신에 의지해 남몰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있어 종교는 일상으로 체화될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신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학문과 철학, 그리고 문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 그리고 죽음, 삶의 의미 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만큼 많이 받아 온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종교가 없다고 당당히 답해왔지만 우리 사회는 어쩐지 확실한 종교가 있는 사람을 더 신뢰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어감도 불신이나 부정적 인 의미로 전달되는 듯 했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비종교인을 대할 때 교화나 전도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종교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위로나 의지의 방편으로 대안을 제시하곤 한다. 또 보편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말년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편안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죽음이 두려워 질 때, 상실감에서 헤어나고자 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해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없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가 없으면 개인은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국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똑바로 지칭한다. 종교는 인생을 충분하게 할 순 있지만 인생을 충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이 책은 저자만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저자는 그런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 책이 지루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의 체취와 발자취가 묻어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나라 미국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툭하면 애국심을 앞세우며 태연하게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때 단결 전략으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종교적 메시지이다. 지난 시절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때 마다 자신들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 말해왔다. 그런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신의 계시라며 정당성과 초월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세계에서 가장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향한 짜릿한 일침. 하느님을 믿는 것과 세계평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교회를 다니는 것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미국사회의 주류가치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 생활 정서에 간만에 날아든 고마운 소식이었다.

 

 

 

놀라운 만남

 

 

많은 영역에서 미국사회를 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저자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국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다. 종교적 다원성이 지켜지는 나라이고 비종교인,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배타하는 분위기는 미약하다. 하지만 상하, 수직적 체계에 익숙한 조직과 학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다. 대학 친구의 부모님은 배우자도 당연히 같은 종교인이길 바라셨다. 친구는 처음부터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와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에 있어 아픔이 많았다. 종교가 없었던 또 다른 친구는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종교적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친구의 남편은 공부중이고 마침 친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다. 나 역시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간 어느 지방의 절에서 백배의 절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계절마다 절기마다 절에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절에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며느리에게 종교의 권유 차원을 넘어서 강요를 하는 시집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 사람이니 같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발상이지만 우리네 시집문화라는 것이 생각만큼 현대화되지 않아 종교 갈등은 고부갈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어쩌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여성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전성교, 낙태, 동성애 결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최빈국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이다. 친구나 애인,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할아버지와 섹스에 대해선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 여기며 서로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저자는 일 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에 살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질문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부분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것은 그들에게 살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 남들은 왜 교회를 가는지 혹은 가지 않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소외당할 조건으로 기능한다. 미국과 정반대이다.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의 출산, 내세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기에 그것은 허위사실이고 아이들에게 믿으라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원하면 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권위의식은 서로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건 내 추측인데 그래서 종교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주 옛날부터 교회세를 내왔고 늘 그래왔듯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별 고민 없이 자기 자식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믿음을 행하는 종교는 철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생활 속에서 전통이나 풍습처럼 편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로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은 특정 종교인에만 해당하는 관행이 아닌가.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특정 종교가 행하는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서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온 우리 풍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장례문화로 보아야 하듯 그들의 교회결혼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종교가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사회의 봉사를 유도한다. 그런데 왜 가장 종교적인 나라 미국은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보다 부유하지도 평등하지도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것일까. 종교가 부재하는 세속적인 사회에선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범죄와 타락,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고 하는데 가장 세속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왜 그 반대인 것일까. 덴마크나 스웨덴은 자신들이 비 종교적이라서 나라가 행복하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미국은 종교 없는 나라는 불행 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외려 사회적 건강과 안녕, 도덕과 질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종교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부 보수파 종교단체는 조폭과 연대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스님들도 도박과 룸살롱 출입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MB가 다닌 소망교회는 이 정권에서 주요 핵심인력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해 왔다.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비종교적 국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기록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니 이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을 원인관계로 연결 짓지는 말아도 되지 않을까?


무심한 대답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재미가 없듯 이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시큰둥했다. 나는 그들이 답한 재미없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삶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덮고 비로소 삶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거의 충격에 가까웠던 대답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느냐는 무심한 답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살아가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런 질문 자체는 크게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은 자연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끝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지금의 삶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그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 중에는 외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떤다는 호스피스의 인터뷰는 종교에 대한 반전에 가까웠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혹시 지옥에 갈까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한다니 소름이 끼쳤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마지막 까지 욕심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종교상식과 정반대되는 실례라 이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통계상으로 보면 전 세계 무신론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다음으로 많은 수치라 한다. 믿는 사람만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새삼 종교의 필요성을 폄하하거나 근본적으로 반론하려 이 책을 쓴 것 같진 않다. 단지 종교가 없어도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할 수 있으며 국가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을 신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주변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생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미국사회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종교 없이도 최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전 나는 공교롭게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은 바 있다. 도킨스는 늘 종교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온 과학자였다. 그는 진짜 마법이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 강조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며 그 현실을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영국 철학자 러셀은 ‘신념’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러셀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믿게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은 일침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시 신이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발견

 

과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나는 늘 차동엽 신부같은 종교인의 주장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차동엽 신부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을 믿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필요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기도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또 국가의 사회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가치관들은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에서 종교를 최우선시 하지는 않는 주체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온 듯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이상향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와 종교인의 상반되는 시각, 그리고 철학자의 논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바로 종교를 가족적, 전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절대가치로서의 신념이 아닌 상대가치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이니 만큼 때론 초자연적인 존재에 삶의 한 순간을 기댈 지라도 그 무엇도 내 삶은 초월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관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어떤 교리든 이웃을 도우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든지 실천하고 현재의 내 삶에선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평생가도 겪어 보지 못할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지하지 않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는 삶. 그러한 삶이라면 비록 신이 없더라도 얼마나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가. 내 삶은 초월적인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로만 이루어진다. 내가 사는 곳 너머, 내 인생 너머의 초자연적인 현상과 존재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서 나를 나답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가장 진짜인 내 삶이 존재한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내 삶 속에 살고 있다. 신(神)없는 나라가 신(興)나는 나라가 아닐까. 신을 버리니 새삼 내 삶이 더 커 보인다. 당연히 그 삶의 주인공도 근사해 보인다. 내 안에 삶이라는 새로운(新) 신(神)이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오래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내 삶만을 믿어(信)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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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상대적 가치에 의한 인식은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일한 '보편자' 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열자(列子)께서는 우주의 탄생을 태역-태초-태시-태소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太易: 만물의 분화 이전의 준비과정
太初: 우주의 모습이 구체화되어가는 찰나의 장면(서양의 빅뱅)
太始: 빅뱅 0.001초 후의 현상을 총칭함
太素: 變을 거친 化의 단계로 제모습을 갖춘 우주의 형태

등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답니다.
열자는 기원전 4세기 인물이라던데요...

글을 읽고 언뜻 떠오른 생각이랍니다 한사람님..

2012-06-15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6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6-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
말씀을 들어보니 이해가 갑니다..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참 궁금했었거든요.
평소 한사람님의 좋은 글을 읽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좋은 글에 대한 반응이 제 예상과는 달라서 말이지요.

저는 리뷰대회에 글을 쓴 적이 없고
리뷰대회의 성격도 모릅니다.
겨우 알라딘에서 혼자 놀다가 가는 형편인지라^^

최근 일련의 상황들이 저로하여금 알라딘에 뜸하게 하더군요.
참새 방앗간 같던 알라딘이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해
무척 당황스러웠구요.

책을 가까이 하는 분들의 완고함이
제게는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졌다고나 할까요...

독서는 사람을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을
완전히 깨버리는....

역사는 이를 잘 증명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때론 제 자신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ㅠ.ㅠ
기대감에 대한 적나나한 배신을 자주 목도하면서도
도대체 바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딜레마랍니다 한사람님...ㅠ.ㅠ

친절하신 답 고맙습니다...
 
생각 버리기 연습 2 - 복잡한 생각을 잠재우는 행복한 마음 다스리기 생각 버리기 연습 2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양영철 옮김, 스즈키 도모코 그림 / 21세기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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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괴로웠다면 자주 원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번 책에서 말하는 ‘생각’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이다. 지난번 책에서의 생각은 ‘잡념’이었다. 넓게 보면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도 쓸데없는 잡념에 속한다. 저자가 말하는 ‘생각 버리기’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생각만 하고 살라는 뜻이다. 이년 전 베스트셀러가 된 후 ‘생각 버리기 연습’을 읽었을 때 처음 느낌은 썩 좋진 않았다. 언뜻 보기에 생각의 총량을 줄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 나는 현재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모든 오감과 생각을 집중하라는 충고가 부담스러웠다. 절망을 뿌리치기 위해선 절망과 싸울 것이 아니라 다른 희망을 붙잡기만 하면 절망이 사라지듯이 생각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쓸데없는 잡념들은 사라진다는 이치가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조금은 공허하게 들렸었다. 외려 생각이 없어도 되는 영역까지 피곤하게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싶어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내 모든 생각들이 쓸데없다고 여기기에 나는 미련이 많았다. 가끔 책이 공허하게 느껴지면 더욱 리뷰의 완성도를 높여 나름 그 책을 보완하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심에 시달릴 때가 있다. 기대했던 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더 청개구리 심보가 고개를 내미는 것도 어쩌면 내 선택에 대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더욱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논리를 만들고 지루한 설명을 붙여가며 리뷰를 썼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그때 생각이 소록소록 떠올랐는데 가장 공감하던 불교용어가 흡사 불이 켜지듯 뇌리에서 주르륵 반응했다. 바로 만(慢)이라 불리는 번뇌의 스위치이다. 저자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프라이드에 집착하는 탐욕'이 만(慢)의 번뇌라 하였다. 인간은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 뇌에서 만(慢)이라는 번뇌모드가 활성화된다. 그 순간 끼어드는 생각의 잡음은 안타깝게도 우리 삶을 삐뚤어지게 이끌어온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만(慢)의 번뇌에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과시욕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과시욕의 밑바탕엔 '그렇지만 나는 못난 사람이다'라는 열등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만(慢)이라는 번뇌에 쫓겨 행동할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드레날린이 활성화되어 흥분 상태가 되고 이러한 고통은 뇌에 자극을 주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뇌는 우리의 마음과 같지 않아 이 자극을 쾌락이라는 정보로 받아들이고 다음번을 기약하게 된다. 뇌는 옳고 그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며 정보수용을 통해 생각구조를 프로그램화해 셋팅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뇌가 원하는 일, 뇌가 좋다고 판단한 일을 자신도 모르게 좇아가며 한번 긍정으로 저장된 생각구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뇌 속의 연인’이 있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고 했던 저자의 주장이 비로소 실감나게 기억났다. 누구든 스스로 괴롭고 싶어서, 고통이 좋아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사람은 모순되게도 괴로움의 고통을 원하는 존재였다.

 

 

살면서 어디서든 보게 되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분명 괴로움에 처했을 것이 확실한데 어쩐 일인지 그 괴롭고 힘든 감정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스스로 괴롭다고도 말하면서 가만 보면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무언가 괴롭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비슷한 유형의 괴로움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자꾸 괴로움의 구렁텅이를 스스로 파헤쳐 빠지게 되는 걸까. 이것은 같은 사람이 비슷한 상처를 자꾸 겪게 되는 과정과도 유사한 듯하다. 저자는 괴로움의 신호가 인간에게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기억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위험을 피하고자하는 것은 생존본능이다. 이때 뇌에 전달된 정보는 다른 정보보다 강렬하고 중요하게 인식될 것이다. 때론 ‘괴로움의 신경회로’가 자극되어 적절한 시기에 실수를 인정하거나 잘못을 사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자극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이어서 생각의 패턴으로 굳어지면 어떻게 될까. 혹시 그전 보다 더 강하고 더 힘겨운 괴로움에 직면하게 되지는 않을까. 괴로움의 자극은 뇌에서 마약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고 괴로움에서 당당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이렇듯 ‘괴로움의 신경회로’가 습관화되는 현상을 ‘업을 쌓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힘을 '염력(念力)'이라 칭한다. ‘념(念)’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잡다한 생각을 잡념(雜念)이라고 하지 않는가. 흔히들 정신을 집중해 물체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위치를 옮기는 초능력을 염력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것이 힘들다는 뜻은 아닐까.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자유의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무의식, 무자각의 상태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현실에서 지혜롭게 매번 괴로움의 신호를 알아차리면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반복, 더 나아가 괴로움의 증폭, 내달리게 되는 폭주 현상을 막기 위해선 무엇을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 후회하지 않아도 될 일, 화내지 않아도 될 일들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괴로움 버리기 연습’은 바로 괴로움을 만드는 신경회로를 개인의 의지로 통제해 나가는 여정이었다. 뇌에서 일어나는 착각과 왜곡에 사로잡히지 말고 고통스런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마음을 괴롭히는 사고나 언어 패턴을 줄일 수 있다는 것. 혹시 비슷한 패턴의 괴로움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땅한 탈출구가 없는 독자들이라면 퍽이나 유용한 정보가 될 듯 하다. 지난번 1권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은 ‘괴로움’이라는 한정된 잡념의 영역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 해결법 또한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자주 비난했다면 자주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익한 충고는 비난에 대한 대처였다. 비난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자는 서두부터 비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닐까. 어떤 일이 발생하고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한 뒤 다음날 언론기사를 보면 열에 아홉은 비난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선한 의도로 했다 해도 비난을 면할 순 없다. 저자는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으려 하고 이유를 찾아내 남을 헐뜯으려 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난받도록 되어 있기에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나 주장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의견과 관련된 기억정보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 속에는 공감뿐 아니라 개인적인 반감, 상처, 이해관계, 경험, 지식 등이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개인의 기억구조를 피할 수 없었던 부처도 심한 공격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의견을 제시하는 쪽은 이러한 인간의 생각구조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를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앞세우게 된다. 저자는 타자의 이해를 바라는 심리 자체를 헛된 기대, 응석, 혹은 망상이나 환상이라 일갈한다. 비난은 세상의 이치이고 원리이며 자연스런 인간 활동에 불과한데 왜 부자연스런 칭찬이나 이해를 먼저 구하냐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 누군가 비난을 받았다면 그건 애초부터 억울할 일도 화가 날 일도 따질 일도 아닌 것이다. 물론 누구나 비난을 해도 상관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비난하는 사람이 옳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마음속에서 비난이 아닌 칭찬을 받고 싶다는 기대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이 쓴 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도 나 혼자 쓰고 말 일이 아닌 세상을 향해 떠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쓸 땐 칭찬보단 비난이 더 당연하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면 어떠한 비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저자는 전에부터 분노 에너지를 극대화시키지 않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체의 방문회수나 댓글에도 마음을 닫으라 충고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메일에서도 서로 자아를 자극하는 정보를 전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번뇌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심리가 쓸데없는 잡념을 만드는 요인이다. 무언가 모자라다는 느낌은 뇌에서 감지하는 만큼의 쾌락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인 것. 저자의 일침은 사실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절대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성화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부터 정돈 하는 것이 더욱 단단한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한 방법이라 깨우쳐 주는 적절한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상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견을 제시하며 그 의견에 동조하길 바란다. 겉으론 사람들 마다 다양한 생각이 있다고 전제를 두지만 더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가 보면 그래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뇌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환상의 방을 마련해 놓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그래서 옳은 생각을 했고 이 의견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에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동조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생각이 불가에서 보자면 왜 쓸데없는 집착에 불과한 것일까.

 

 

당신의 의견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줄 때,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이미지를 뇌에 형성하고 싶은 까닭에, 비난의 위험을 망각하고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당신이 옳다는 망상을 뇌에 심어두고 싶은 것이다. -21p

 

 

이 책은 맨 앞에서 비난을 대비하는 방법을 말하고 마지막에 ‘의견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의견 자체는 논쟁이나 말싸움과 다르다. 다양한 의견이 모아져 발전적인 방향을 이끄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의견을 주장하다보면 주장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른 의견은 다른 기억을 부르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에 의해 분노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분노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나는 옳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 뇌 속의 연인은 온갖 환타지로 구성된 자신만이 드나드는 착각의 방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칭찬과 공감, 찬성의 목소리는 뇌를 수시로 자극하는 정보들이다. 마찬가지로 남의 의견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같은 이치다. 흔히 길고 충분하게 설명하면 상대가 이해할 것이라 여기지만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상대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한 내용을 이해하진 못한다. 의견에 집착하다가 결국은 반대하는 자신만 주장하거나 마찬가지인 상대방만 보게 되어 논쟁의 상처만 남게 된다. 저자는 빈번한 논쟁이 마음속에 뒤틀어진 망상만 키우게 된다며 의견자체에서 벗어나라 따끔히 충고했다.

 

 

자주 흔들렸다면 자주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망상의 업을 키우지 않기 위해 저자는 무엇보다 타인을 구실로 자신감, 자존감, 자만심을 구하거나 잃지도 말 것을 강조했다. 타인과 바깥세상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은 외부 세계에 좌지우지 되어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응 때문에 자존심을 상해한다거나 자신감을 잃는 것 모두 평정심이 없기 때문이므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주장을 피력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지 자신이 있다면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자신을 잃어 버려 놓고 타자나 세상을 통해 자존심을 찾으려는 발상은 계속하여 자존심에만 집착하게 되는 요인은 아닐까.

 

 

예를 들어 살면서 친한 친구는 하나쯤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 연인이 필요하다는 생각,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확신, 가족이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 동료가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이기심, 배우자가 이것을 해주어야 한다는 고집도 모두모두 내 평정심을 해치는 쓸데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면 어떨까. 중요한건 내 마음의 평정이지 그들과의 관계 완성도가 아니다. 특히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타자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려는 것도 대표적으로 쓸데없는 만(慢)의 욕구에 해당된다 가르친다. 부처가 말한 악마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이자 불만이 악마부대를 늘리기도 줄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악마는 다분 자기학대적인 성향이 있어 불쾌한 자극을 반복하려 든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뇌는 정보를 왜곡해 그릇된 환상을 만드는 사기꾼이라 여기고 뇌의 정보처리에 농락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고 헛된 미래를 꿈꾸는 것 역시 오늘의 나를 보지 못하는 자세이다. 저자는 다른 누구보다 지금의 나를 응시하고 집중하며 관찰하는 습관을 반복하라 주입한다. 화가 났다면 내가 지금 처한 감정이 무엇이라는 자각만 제대로 인지해도 금방 화는 줄어들게 된다. 친한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독을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을 미화하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오래된 방법이다.

 

 

이처럼 저자가 알려준 방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업을 쌓지 말라는 뼈아픈 충고였다. 불교에서 ‘업’이란 ‘마음에 축적되어 다음에 생길 감정을 낳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마음의 에너지는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운동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뿌린 마음의 씨앗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 같아도 결국 내 마음을 불태우거나 재로 만든다. 업을 쌓아가는 주체가 언젠가 어디선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겨난 에너지의 여파는 반드시 본인과 상대에게 다음 감정을 불러들이고 좋건 나쁘건 어떤 형태로든 이차적인 에너지로 축적, 응고되어 훗날 더 큰 고통의 감정, 업의 결실을 만들게 된다. 부정적인 행위, 생각들이 업이라는 에너지의 흐름을 활성화시켜 괴로움을 유발하는 패턴이 된다. 그러니 남의 험담, 혹은 잘 보이기 위한 위선, 무심코 던진 거짓, 사소한 말다툼 이런 것들은 죄다 훗날 분노와 욕망의 열매로 익어가는 착실한 과정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온라인에 글을 남기고 이웃과 글을 나누는 것 자체가 업을 쌓는 행위이고 또 다른 감정을 유발하는 악업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남겨온 글들과 수많은 대화의 궤적을 생각하면 새삼 소름이 끼친다. 더욱 평정심을 뒤 흔드는 글과 말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내 경우는 글을 쓰면서 힘겨웠던 시간을 털어버리는 습관이 있어 일단 쓰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동안 내 평정심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평정심을 해치지 않았나 싶고 사실 이 글도 그다지 속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모두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들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가만 보면 오해하는 것도 기실 하는 입장에선 자기 입장에서의 이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오해는 대부분 오해를 부르는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자업자득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해보다는 오해가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해는 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에 늘 오해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우리는 마음에 사소한 악업을 쌓지 않도록, 욕망과 분노에 휘둘리지 않도록 늘 의식의 센서를 켜놓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생활속에서 염력을 발휘하는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었다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기도 쉽지가 않다. 나만해도 지난번에 읽은 ‘생각버리기 연습’에서의 충고를 또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우를 범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깨우친다. 괴롭고 싶어 하는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자신에게 속지도 자신을 속이지도 말아야 할 것을 당부드리고 싶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진정 괴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그 당연한 절차를 거부해온 시간들에 사과한다.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미처 몰랐다면 지금부터 괴롭다고 적어보자. 그리고 읽어보자. ‘괴롭다’고 쓰고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부디 당신도 그래주시길. 괴로움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괴롭지 않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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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6-06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게 살아가는 내 하루를 사랑할 수 있으면
언제나 좋은 이야기 피어나리라 믿어요

가연 2012-06-0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뇌 리셋, 이 코이케 류노스케의 전작이었는데.. 그 책은 조금 읽어본 기억이 나네요. 저는 또 얼마나 많은 업을 쌓으며 살아가는지.. ㅎㅎ

비로그인 2012-06-0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들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이렇게 이쁜 글이라니요... ^^
 
자본주의, 미국의 역사 - 1차 세계대전부터 월스트리트 점령까지
전상봉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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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무엇을 좇고 있나

 

 

이 책은 지루하다. 내용상 화가 나는 구석이 많은 편인데 그 화남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이 지루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지난해 월가의 점령시위에 이르기까지 약 백 년 동안 미국이 돈을 가지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보고서이다. 한평생 자본주의의 역사만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9개 달린 괴물 같은 뱀, 히드라와 같다고 말했다.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다시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나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 같은 특질이 자본주의 본성이라는 것. 지난 백년간 자본주의는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언제나 그 변화의 국면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어 자본주의의 본성에 충실함을 증명해 보였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을 ‘도덕성’의 싸움이 아니라 ‘현실성’의 싸움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것은 사회주의보다 더 도덕적,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덜 도덕적이고 덜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지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에 바짝 붙어 공생해 왔다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과거의 모든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그러한 나를 깨달으며 내일을 더 지혜롭고 풍요롭게 살고자 한다. 여기서 어떤 인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누구나 오늘을 산다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현재는 사실 한정된 시간이지만 욕망이라는 현실은 내일도 계속된다. 어제의 오늘, 내일의 오늘에도 변함없이 돈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결국 돈을 지배하는 주체의 역사이다. 돈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인간만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무엇도 인간만큼 돈을 지배하려고 원했던 존재는 없었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직접적으로 빠르게 해결해주는 제일 분명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은 돈의 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팔순이 너머 외할머니는 처음 커피 맛을 보시곤 내가 왜 여태까지 커피를 안 먹었을까 하셨다. 그 전까진 아무리 커피가 맛나다는 사람을 보아도 반응이 없으셨다. 쉬운 예를 들었지만 돈의 맛에 길들여져 그것에 눈멀게 되면 자본주의 본성 같은 건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아이를 학원에 잘 보내다가도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학원을 보내지 않으면 되는 시절에 살게 되었나, 무엇 때문에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것인가, 왜 아이에게까지 스마트폰을 사주고 또 그것에 중독될까 염려해야 하나,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주변에 한국에서의 교육정책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마침 남편의 공사 해외발령으로 미국과 태국, 홍콩에 살다온 친구가 있다. 원래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살아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온 사람이 아니라 친구처럼 생의 일정 시기에 해외에서 살게 된 경우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들끼리 모여서 특유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 같다. 그곳에서도 서열화 중심의 입학경쟁은 똑같았고 거기서의 창의적(으로 보인) 경험은 돌아와서 그럴싸한 이력서 몇 줄로 대체 될 수 있음을 친구는 더 극명하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일단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아 어디가 되었건 올라갈 수 있을 때 까지 올라가길 바라는 심리는 요즘 거의 습관이나 관행에 가까울 지경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교육정책에도 있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승자독식과 우승열패, 한탕주의 식의 경쟁구조를 나도 모르게 수용하고 좇아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똑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똑같은 학교를 보낸다는 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식의 경쟁에 놓여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언뜻 보기에 내가 사는 지역과 사는 곳, 학교 등을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택한 것 같지만 우리는 많은 것이 이미 택해진 세상에 발을 들여 놓고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에서 일등이 혼자서 엄청난 상금을 다 가져가는 것을 당연히 받아 들이며 경쟁구도에서 탈락한 사람의 눈물에 예전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일진’도 승자독식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땐 소위 말해 노는 친구를 뜻했던 ‘날나리’는 그냥 노는 애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학교 밖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렸고 교실에선 될수록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냈다. 즉, 교실 밖에선 누구와 나쁜 짓을 하는지 어떤 폭력이 오가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일진 중엔 공부도 잘하고 키도 크고(발육이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선 모범생과 다를 바가 없고 외모도 세련되어 인기도 많다. 놀라운 사실은 아이 반에서 일진으로 불리는 친구가 반장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운동회 때엔 일진(반장) 아이의 학부모가 반 전체에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일진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바탕으로 모종의 권력을 얻는다. 아직 돈을 모르는 아이들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까. 바로 교실 내에서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아이를 왕따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일진은 학교폭력이라는 표면적 의미외에도 반에서 최상층의 신분을 상징하고 친구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아이 말로는 일진이 입는 유명 브랜드의 점퍼와 신발은 다른 아이들이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스마트폰을 인터넷에 떠도는 계급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서열이 낮은 아이는 교실 내에서 신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이러한 서열화 작업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단순히 높은 위치라 생각되는 아이들을 외려 부러워 한다는 것. 이긴 자, 혹은 높은 자는 다 가져도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어떻게 높은 지위를 만들고 그 위치에 있는 아이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벌써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 계급을 나누어 같은 친구들을 지배하는 심리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기만 한다. 우리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는가. 조직 및 계급 서열화, 그리고 성과지향주의에 물들어 버린 우리 사회가 결국은 아이들에게 성장한 후에도 권력을 얻기 위해 무조건 노력하라는 것 밖에 더 가르쳐 주었는가. 권력은 곧 돈으로 발생하니 되도록 돈 많이 버는 직업을 택해라, 그럴려면 반드시 일류대에 가야하고 그럴려면 오늘 가기 싫은 학원도 가야하느니.... 아... 우리의 일상은 무엇에 지배받고 무엇에 조종되어 굴러가는 것인가. 주체적인 삶, 인간다운 삶, 나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잘사는 사회라는 듣기 좋고 보기 좋고 허울 좋은 그 옛날 도덕책에나 나오는 소리를 아이들이 진심이라고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리 부모들은 기껏해야 일진의 눈에 안띄게 앞에서는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라는 말 밖에 더해왔는가. 우리 부모님들은 그래도 탈선을 방지하고자 날나리와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린 위선을 가르치고자 일진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떠들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몸속에 무엇이 흘러 들어왔나

 

 

우연히 올해 들어 자본주의에 관한 책만 몇 권 째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유럽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혹은 우리나라 이야기건 하나같이 이런 책을 덮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우리나라와 내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이렇게 쳇바퀴를 돌다 영원히 돈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바둥바둥 살아갈 수 밖에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 생활은 40대 주부로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키우는 지극히 평범한 학부모의 일상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어찌 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적 일상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잘 운영해온 미국의 역사를 아는 것과 2012년 우리 일상은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날 유가 폭등을 지켜본 미국은 중화학 공업으로 대표되는 고에너지 산업을 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철강, 조선, 기계 등의 중화학공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이때 아랍 산유국들의 막대한 오일머니는 어디로 들어갔을까. 월가는 이 돈을 돌려 개발도상국에 선심 쓰듯 빌려주었고 그 결과 중남미는 80년대 외채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미국의 판단과 선택이 다른 나라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음을 기록으로 부인할 수가 없다.

 

 

비약적으로 말하면 일진과 왕따는 신자유주의 추종과 신봉의 결과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현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스트레스를 감지하는 주체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사회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보편적 스트레스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이나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다.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본 것이다.

 

 

지난 일 백년간 우리 몸속에 내장처럼 깊숙이 흡수되어 온 삶은 바로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미국적 삶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을 가장 앞에서 조종하고 주창하고 운영, 유지해온 주체는 미국이다. 미국은 우리와 낮과 밤도 틀리고 바다건너 먼 곳에 있는 나라지만 그들이 쓰는 돈과 버는 돈의 궤적이 사실상 우리 삶의 궤적을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얽히고 설킨 국제관계속에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치는 영향의 크기와 의미로 보았을 때 그렇다. 그래서 인지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읽는 일은 한국인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 책의 결론은 마음에 안 들게도 새롭게 부상한 중국을 중심으로 경제위기 해결방안을 마련하든가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위기와 혼란을 지속하든가 하는 상당히 자조적인 조언이다. 지난 백년을 미국 중심의 역사로 서술해 놓고 앞으로 탐욕에 눈먼 1퍼센트가 아닌 99퍼센트의 민중이 변화를 선도하도록 ‘미국 없이’ 노력하라고 하니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이 책은 역설적으로 앞으로도 미국중심의, 미국이 해결하는 자본주의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결론보다는 과거정리 차원의 꼼꼼한 기록의 여정에 더 관심일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을 넘기면서 새삼 매 시기 미국의 발빠른 행보와 탁월한 선택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유럽 열강들의 이권다툼은 전쟁을 낳았고 전쟁은 독일이라는 패자를 낳았다. 승자는 패자에 엄청난 책임을 물었고 패자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패자는 기회를 엿보다 어떻게든 계기를 만들어 다시 전쟁을 창출했다. 두 번의 세계 전쟁으로 혜택을 입은 나라는 미국이라는 패권국이었다. 패권국은 끊임없이 주류 담론을 만들고 그에 따라 세계를 지배해왔다. 패권국은 때론 자작극과 조작을 서슴치 않았으며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삼아 왔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참여할 때 내세운 논리는 “우리는 독일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적과 싸우는 것이다”였다. 때마다 전쟁특수로 위기를 탈출해온 이력이 곧 미국의 역사를 대변한다. 전쟁이 남는 장사임을 깨달은 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장사로 여긴 나라는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다. 피를 흘려도 돌아오는 이익이 많다면 전쟁은 언제나 정당화되는 국가활동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기론 언제나 혁명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늘 포악한 공산당 쪽이라 자다가 깨어나도 공산당이 싫다고 외칠 정도로 지겹게 세뇌당해 왔다. 미국은 툭하면 세계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테러를 뿌리 뽑기 위해라며 전쟁선언을 하곤 한다. 그런 미군이 전쟁 때마다 죽여온 민간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이 책을 넘기다 보면 결국 죽여 온 사람이 많은 나라가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는 구나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돈의 맛을 어디에서 배워왔나

 

 

예전에는 한국이 미국과 얼마나 격차가 있을까 이런 질문과 기사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미국은 1920년대 이미 부와 번영으로 돈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나라였다. 당시 미국인 여섯 명 중 한명이 자동차를 소유했고 미인대회와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가 탄생했고 주식의 광풍으로 구두닦이 까지 주식시장에 발을 들여다 놓았다. 파산으로 투자자 열 한명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은 1929년의 일이었다. 이후 미국은 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문제는 어느 시기건 미국이 공황이면 결국 유럽이고 아시아고 전 세계로 그 여파가 확산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자본에 의지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미국은 대공황을 2차 대전 덕에 잘 극복하게 되고 공황이라는 위기를 잘 학습한 자본주의 경력자로 거듭난다. 공황을 겪었기 때문에 애국심도 생겨나고 국민이 단결해 정부의 개입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은 똑같은 이유로 나중에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게 되는데 시장이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지금가진 돈을 더 불리고 잃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을 둔 같은 문제였다. 50년대 한국전쟁, 70년대 오일쇼크, 80년대 중동 전쟁, 90년대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을 버라이어티하게 헤쳐 나온 미국은 늘 앞에선 세계평화와 번영을 주장하면서 뒤에선 자신들이 가져갈 돈 계산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1차,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살펴보다 보면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은 애초부터 미국을 얕잡아 보고 무시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이 미국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 우월감은 지금도 유럽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열패감과 분노를 느끼는 유럽은 연합으로 대항해 세력을 만들고자 하지만 생각만큼 단결이 쉽게 되어 보이진 않는다. 미국은 두 번의 전쟁이후 엄청난 기술개발과 경제발전을 이루며 70년대 말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하기 전까지 상당부분 유럽과 격차를 벌여 놓게 된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를 통해 미국은 이미 50년대 다국적 기업을 출발 시켰고 60년대에 식품혁명이 완료된 상태에서 현대문명을 이루는 기술개발이 전문화, 집중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첨단 군사기술은 과학과, 식품, 전자, 영화, 방송, 통신 등 전 분야에 이전되며 미국식 풍요를 전 세계에 전도해왔다. 이제와 부질없는 소리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너무 구석으로 몰았다는 생각이 든다. 애국심의 극단이 나치즘이라 보았을 때 정도의 차이만 배제한다면 사실 부시의 애국심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애국심은 강대국이라는 프리미엄 덕에 언제나 세계평화와 안전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며 사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아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평화는 매번 소환되어야 하는 허울좋은 태제일뿐이었다.

 

 

한 가지 예로 독일의 폭격으로 자존심이 무척 상한 영국은 미국과 합작으로 레이더 장치를 개발했지만 정작 그 레이더를 대중화시켜 전 세계 가정에 전자렌지라는 새바람을 몰고 온 건 미국이었다. 영국은 자존심은 찾았는지 모르지만 실리는 얻지 못했다. 지금의 미국을 보면 유럽 나라들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잘 이용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자존심이 상하면 곧바로 애국심이 발동되는 나라였다. 애국심은 세계를 지키겠다는 공명심으로 발전한다. 이 한몸 던져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허리우드 영웅들은 지난 시절 숱하게 반복되어 온 전세계 공통의 영화적 학습장치였다. 미국이 지켜온 건 사실 자국의 이익뿐이었다. 전쟁 이후 만들어진 국제기구들은 대부분 미국이 협상시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본주의 유지 시스템들이었다. IMF의 최대주주는 미국이었고 미국의 지지와 동의를 얻지 못하면 사실상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무역자유화와 외환거래의 자유화로 가장 큰 이득을 볼 나라는 언제나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부업체처럼 돈을 빌려주었다가 그 나라가 빚을 못 갚아 파산을 하게 되면 재빨리 투기 자본을 침투시켜 중요기업들을 사들인다. 어떤 협상도 누구를 위한 개방이고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따지고 들어가 보면 결국 미국을 부자 시켜주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렇게 미국의 파렴치함을 비난하기는 쉬운데 정작 그것을 가장 잘 복제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은 있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평화로와 질 수 있는가

 

 

최근 그리스가 재정위기에 빠졌다고 우리는 국민이 게을러서 혹은 은행이 방만해서라는 식의 학습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긴축재정에 나선 그리스 정부가 복지 축소로 연금을 삭감했기 때문에 노후 연금이 끊긴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국제 금융 자본가들은 그리스의 방만한 경영, 그리스의 내재적 결함이 재정위기를 초래했다고 18세기식의 청교도 윤리를 들이대곤 한다. 이를 보고 우리 보수와 수구언론은 그리스가 복지를 마구 시행하다가 재정위기가 온 것처럼 떠들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유럽의 재정위기가 복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일 통화를 사용하지만 단일한 연방국가가 아닌 유로 존 때문이라 한바 있다. 유로 존에서는 화폐만 통합되었을 뿐 자유무역으로 인한 소득격차, 생산성 격차는 모두 각국의 소관이다. 쉽게 말해 관광업 발달한 그리스는 제조업 발달한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하준은 같은 유로존 속에서 그리스를 도와주지 않는 유럽 국가(특히 독일)들을 강원도가 부도났는데 나라가 해결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며 상당히 비윤리적인 행태라 꼬집었다. IMF가 터졌을 때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해서 외환위기가 닥쳤다고 믿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시절 장롱속의 금반지를 죄다 꺼내어 나라 빚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고자 그렇게 너도나도 줄을 서대지 않았던가. IMF의 근본적 원인은 자유화된 국제 자본의 횡포에 있었다. 동남아 외환위기는 대처리즘과 레이거 노믹스로 가시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지 갑자기 우리나라 혼자서 흥청망청해서 일어난 경제위기가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외환위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만성 고질병쯤으로 생각된다. 단지 이번이 중남미면 다음은 서유럽, 그 다음은 동아시아, 또 그다음은 순서를 바꾸어 등장하게 되는 무슨 당번 같기도 하다. 당번이 죽어라 죽겠다 소리칠 때 미국은 엄청난 규정을 제시하며 도와주는 생색을 낸다. 케인스 주의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잇는 신자유주의는 지난 시절 신보수주의(반공 이데올로기와 패권주의)와 결탁해 미국의 침략이데올로기로 십분 활용되었다.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양극화를 초래했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냉전과 소련해체도 주도했다. 미국에는 유독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을 무대로 치고 빠지는 식의 투자를 일삼아 막대한 수익을 챙기는 투자자들이 많다. 금융자본주의가 활황하기 시작하던 90년대 이후 국제 금융시장은 이들 투기 자본가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교역 상대국엔 자국의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버젓이 불공정 무역과 시장개방의 압력을 가한다. FTA 가 발효되면 농업, 제조업, 제약업 등에서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이제 중국의 대미 수출 증가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다른 나라가 외환위기에 닥쳤을 때 미국이 주장했듯이 글로벌 불균형이 미국 내부의 과잉소비가 원인이라 일침을 가했다. 미국이 말하는 균형은 어디까지나 자국이 중심이 된 자국이 흑자를 내는 방식의 균형이다. 그러던 미국에서 드디어 2008년 158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세계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금융자본주의도 파산했을까? 아쉽게도 오바마는 노무현이 검찰개혁을 하지 못했듯이 금융개혁을 하지 못했다. 월가의 집요한 로비는 꼭 검찰이 권력과 멀어짐을 두려워 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미국은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을 걷어 월가 은행들에 공적자금을 퍼부어 주고 그들은 임원에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는 나라다. 이긴 자가 다 가지는 것이고 다 가졌던 자가 더 가지기 쉬운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라틴어로 미국의 평화를 뜻한다는 ‘팍스 아메리카’는 누구를 위한 평화였는지 명백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는 이겨서 가진 자, 가져서 강해진 자, 이른바 소수 특권층으로 상징되는 1%를 위한 평화였던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는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상층의 상부구조에서 발달해 왔다. 최상층의 경제활동은 독점을 상징했고 독점은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불평등의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불평등은 불공정, 불합리적 경쟁관계를 연차적으로 유도할 것이다. 99퍼센트의 민중이 평화로와 지는 날은 어쩌면 도래하지 않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인간은 미래를 낙관한다. 탐욕으로 눈 먼 1퍼센트를 지지해 놓고도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이 실현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국이 쏘아대는 미사일을 두 눈으로 보고도 세계는 곧 평화로와 질 것이라 기대한다. 99퍼센트의 평화를 원한다면 최상층이 원하는 탐욕의 현실적 욕망을 버리고 공정과 도덕이 지배하는 비현실적인 이상을 택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99퍼센트의 평화는 99퍼센트의 불가능만큼이나 비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비록 단 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그것이 특권층이 아닌 대다수 국민들의 행복과 평화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99퍼센트 확신하게 된 이 책의 가장 큰 교훈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희망을 절망과 바꿀줄 아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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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2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우리나라의 구제금융 상황은 약과에 불과했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파장은 매우 컸지만요..

요즘의 그리스처럼 지하금융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은 탓이기도하고
국채와 기업의 외자의 존도가 상대적으로
그리스보다 규모가 적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국가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덕분인가 싶습니다.

사실 털어 먹을 것이 적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일본의 경우 그지경까지 털리리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는 모습은
그 얼마나 강력한 타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지적해주신 팍스 아메리카의 개념이
우리의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러의 붕괴가능성 이지 싶습니다.

경제와 역사는 양면의 동전과 같아서
어쩌면 자본이 배제된 순수한 역사의 개념을 기대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아닌가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역사 연구의 의도가 대부분 불순한 것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구요.

한동안 경제관련 서적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글을 읽으니....
또 이러네요 ㅠ.ㅠ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님~

차트랑 2012-05-27 07:58   좋아요 0 | URL
쿠더덩~
한사람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는....ㅠ.ㅠ
제가 몸둘바를 몰라
얼굴이 화끈 붉어집니다 ㅠ.ㅠ

연휴에는 경제 역사와 상관없이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여
부처님께 다녀올 계획입니다^^

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를 보기도하고
부처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렇게 가끔 하거든요^^

한사람님께서도 편안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2012-05-25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6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5-2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 책 별 세 개예요? 한사람님도 별점에 후하신 편이라 생각하는데 이거이거 왜 세 개예요? 어떤 의미로? 이 책 장바구니에 끼여있단 말이에요. 세 개짜리는 싫어요. 이건 소설이 아니니까요 :) 근데요,

2012-05-27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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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강렬합니다. 색상이 진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도 인상은 강렬했어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저자가 여러 방향으로 에둘러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 핵심을 전달하는 어법이었습니다. 인문서를 읽다보면 보통 처음에 정의를 하고 부연 설명을 하거나 반대로 설명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결론을 내는 방법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방대한 다른 이야기로만 중심을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놀이기구로 말하자면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전체를 둘러보는 식의 투어형 탑승기구를 상상하게 됩니다. 모두 둘러보았더니 출구에서야 모아진 하나의 그림이 남겨지는 것. 여행은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습니다. 호흡도 길고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들었다고 꼭 끝에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진 않은데 그 하나의 그림을 무언가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해설이 참 고맙더군요. 평소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졌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독자에겐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저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1979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주제를 미리 소개하는 세 차례 강연 모음집입니다. 강연은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어체에다 설명위주로 구성되었어요. 강연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출간되기 전에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원저 못지않게 자주 인용되며 경제사회학 분야를 비롯한 여러 강의와 세미나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원저는 너무나 방대하여 일반 독자외에 전문가로서도 힘겹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프랑스 역사학자인데 15-18세기 세계 경제사를 30년에 걸쳐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30년 세월의 결론을 그려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저술 하는데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저자는 1985년 사망했는데 그렇다면 40대 후반부터 인생 말년기를 통털어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집요하게 천착한 것이 됩니다. 바로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역사가’였다는 것이 이 책을 꿰뚫어보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말합니다. 아주 핵심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전제조건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거의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것, 인간의 명료한 의식 밖의 역사, 인간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 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 같은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보았어요. 예를 들어 화폐와 도시는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뼈대를 이룬 구조물입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표층의 역사’가 아니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좀 섬직한 이야기도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 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존재이지만 역사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 200년, 10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기나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뿐. 자본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 언제를 정확하게 말하려면 인간 생활의 변화부터 포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14-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400-500년 동안 유럽에서의 경제를 해부했어요. 이 책이 의미 있었던 건 현재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뉴욕 이전에 서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흐름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그 시기 서유럽을 살펴보았더니 맨 밑에 물질생활, 그 위에 시장경제, 그리고 맨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구조를 발견했어요. 400년 이상 서유럽에서 장기 지속했던 이 구조의 특징은 바로 상업자본주의의 주된 특징들(운송, 상인, 화폐, 무역의 역할 등)이었고 이 오래된 역사가 사실상 자본주의를 탄생케 하였다고 본 것이죠.

 

당시 교환메커니즘은 중국이나 이슬람등 유럽 외에도 있었지만 거래소와 다양한 신용 형태같은 우월한 장치와 제도 덕분에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유럽경제가 다른 곳보다 앞서 있었다고 합니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이 슬프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는 구별되는 시대의 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늘 역사가들이 무대의 중앙에 배치했던 주제이잖아요. 브로델은 역사가로서 애석한 점이 바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않는 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최하층에서 자본주의 실체가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니라 최상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장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아니라 독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일어난다고 보았어요. 장기 지속하는 역사를 보았더니 자본주의는 결코 경쟁에 바탕을 둔 게 아니라 경쟁을 없애는 반시장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반대되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늘 자동반사적으로 시장은 경쟁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외워왔으니까요. (그런데 독점을 자본주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요즘 동네빵집을 잠식하고 있는 대기업 제과 프랜차이즈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독점으로 시장을 장악한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수직적 위계의 교환의 세계에서 상인자본가들은 선주이면서 보험업자이면서 대부업자, 차입자, 금융가, 은행가이기도 했어요. 한편 농장의 경영주이기도 했죠. 외려 하층은 전문화 되어 있는 반면 최상층은 전문화가 거의 없어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손에 자본을 손에 쥔 상인들의 기득권이 곧 선점효과였고 그것이 전문성 없이 유지되어온 배경이었어요. 당시 원거리 무역이 일어나면서 자본가들은 그들이 축적한 자본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해당 시대의 굵직한 국제사업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과정은 곧 최상층의 상거래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브로델에 의하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경쟁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데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본질적 요소인데 이 ‘불평등의 힘’, ‘소수 특권층의 힘’은 단지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으로 뻗어 나간다는 게 자본주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운 좋게도 전 세계가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어야 하는데 영국은 바로 그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안팍으로 갖추어졌기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나서 기초적 경제의 힘과 활력이 넘쳐났고 그러한 배경이 산업 자본주의를 받쳐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당도하는 ‘밤의 손님’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좋아서 하고 싶다고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역사가는 ‘왜?’라는 문제보다는 ‘어떻게?’라는 문제를 더 편하게 접근합니다. 또 커다란 문제의 근원보다는 결과를 더 잘 알아 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역사가는 더욱 더 그 근원을 찾는데 열광합니다. 비록 그러한 근원들이 역사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자주 비껴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p94


역사가라는 직업이 원래 유럽에서 발달했잖아요.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는 건 항상 자신들의 과거였구요. 저자가 보기에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까지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에서 발달했고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구요. 브로델은 자신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를 통해 유럽이 팽창했고 더불어 유럽의 경제계들이 자본주의적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들 전형적인 경제계가 유럽자본주의를 낳았고 이것이 다시 세계 자본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결론 냅니다. 유럽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미국. 크루즈 여행으로 보면 자본주의 탐험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결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최상층의 존재라는 것. 자본주의의 특징과 강점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하고 그 변화하는 국면에 따라 수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변화무쌍함의 와중에도 비교적 자본주의의 고유한 본질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또한 자본주의 특징이라는 점.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고 언제나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자본주의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어느듯 다시 생환해 있잖아요. (지금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 몇번의 위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살아나던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의 부제인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같은 뱀이죠. 머리가 9개 달린 괴물의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났다고 해요. 바로 자본주의를 불사의 영속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독하고도 끈질기며 탁월한 유연성과 적응력으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역사가 아니라는 것. 소름이 끼쳤습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할 때 이제 곧 자본주의는 사라진다는 기사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들자는 책도 보았습니다. 세계의 경제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해 얼마나들 노력하고 있습니까. 몇 백 년 전부터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의 역사가 새삼 두려워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안도 중요하겠지만 변하지 않았던 과거의 원대한 흐름을 뒤돌아 보는 것도 오늘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좋은 거울이 될 듯 합니다. 무엇보다 한 평생 자신들의 과거만 연구한 역사가의 충고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입니다.

 

“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처럼...”


프랑스의 역사가가 그려낸 세계지도는 과거의 강물이 현재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쩐지 우리의 미래를 더 입체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마치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사진처럼요.

 

 

 

덧붙임)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이 궁금해 찾아보니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중 일부를 확대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산 루이지 교회에 그려진 그림 중 하나인데 제목은 <성 마태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이다. 마태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 그림은 바로 세리(세무관리)인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을 은유해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일생이 뒤바뀌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잘 보면 오른 쪽에 나타나 ‘나를 따르라’고 손짓을 하는 이가 예수이고 놀란 눈을 한 채 왼손으로 ‘나 말입니까’하는 인물이 마태 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세금 징수업자였던 마태가 아닌 고개 숙여 돈을 세고 있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어 표지로 한 것일까.

 

 

 

 


자세히 보면 표지에서 돈을 향한 손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돈에 눈을 맞추고 있는 인물의 손 같지만 위에 손은 바로 마태의 손이고 아랫 손만 고개숙인 인물의 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마태는 왼손으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있지만 오른속으로는 계속 하던 일인 돈을 세고 있는 것이었다.

 

악덕업자로 불리던 세금관리는 그 시절 무척 안정된 직업군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의하면 16, 17세기 이탈리아는 자본주의를 태동케 한 일등공신이다. 자본주의가 일부 소수 특권층에게만 일어나는 최상층의 현상을 상징한다고 보았을때 이 그림에서 돈을 가리키는 손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정확히 세고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와 상관없이 경쟁을 비껴나와 독점으로 향하는 히드라와 같은 괴물. 그렇다면 아마도 고개를 숙인 청년의 눈은 돈에 눈멀어 자본주의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나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혹 사람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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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2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빠서 어리버리하는 사이에 글을 많이 올리셨네요
앞으로 정리 계획에 있으신 자본주의 역사, 저는 기대가 좀 됩니다.
쉬운말로
"'돈'과 무관하게 서술된 세계의 역사는 정말 김빠진 사이다와 다를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저 지금 기대에 부풀어 있으니까요^^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하는 바보를 위하여

 

이 책을 덮은 느낌을 단 한마디로만 말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부끄럽다’고 할 것이다. 두 마디로 가능하다면 ‘부끄럽다, 그리고 놀랍다’ 일 것이다. 세 마디까지 허용된다면 다음에 붙여질 한마디는 아마도 ‘내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 정도가 될 듯하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생각의 오류를 낱낱이 해부한 책이다. 나름 생각이 너무 많아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과 비례해 꽤 합리적인 인간이라 자처했던 나로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온 것들이 그저 불합리, 불공정, 비현실적인 사고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충격이 적지 않았음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러한 내 사고방식이 여지껏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치 그동안 건강하리라 여겼던 오장육부에 대한 정밀검사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나는 재미있고 인상 깊고 여운이 많아 감성을 자극하는 책을 많이 집어 들었다. 사고를 유도하는 책보다는 사고를 막아주는 책을 원했다. 물론 어떤 책도 그런 책은 없었다. 책을 쓴 사람은 이 책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강렬히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두려운 마음이 많았다. 어쩐지 기존의 내 사고체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받게 될 것 같아서 였달까. 이 책은 분명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원하는 분들에겐 금상첨화일 듯하다. 더 나은 선택은 당연히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틀린 생각, 잘못된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불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이처럼 직접적인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책은 만나기가 어렵다. 누구나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는 힘들며 그렇다하더라도 또 다른 책에 의해 언제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 책이란 그 책을 읽는 동안엔 그 책이 전하는 세상이 전부인 관계로 책과 소통한다는 것은 사실상 해당 저자가 그려준 그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책 밖으로 나오면 그 책과 반대되는 논리와 상황은 너무나 수두룩하다. 내 경우 두 권 이상을 동시에 읽지 않는 이상, 그리고 몰입을 전제로 한다면 보통 책 한권이 곧 한 사람의 한 가지 주장이라 여기게 된다. 그 한 가지 주장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놓으면 마치 내가 그 책을 더 잘 소화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유익한 순간은 곧 다른 책과 다른 리뷰로 대체되고 독서의 경험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아마 이 책도 세월이 흐르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겠지만 내 기억 속엔 분명 여지껏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는 인식만은 영구 저장될 듯하다. 그 저장된 라이브러리에서 가끔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의 종류를 다시 꺼내어 나의 선택과 판단에 적용해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듯 하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이의 생각이나 책에서 펼쳐지는 논리를 따져보고자 저자의 주장을 다시 뒤져볼 것만 같다. 유익한 책이란 이 순간의 유익함이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책이 유익하지 않은 독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렇지만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만큼 논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하는 바보, 그 인간의 바보 같은 생각을 다루었다. 이 책에 의하면 바보가 되지 않을 사람은 딱 한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할지 모른다.

 

 

편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말할 때 흔히들 사고가 편향적이다,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비판에 해당한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듣지 않으려고 상충되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려 하고 내 판단의 근거를 찾아 제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노력을 증명하려 애를 쓰곤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일까? 관점을 이동시켜 사고한다는 것의 실현가능성, 그 완벽한 일치를 백으로 보았을때 결과는 반도 되지 않을 듯하다. 그저 피상적으로 가늠할 뿐인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누가 뭐래도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제 1의 천성이라고. 그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으로만 추론하는 휴리스틱으로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온 존재였다고.

 

쉽게 말해 저자는 우리의 직관이 편향을 만든다 말한다. 그리고 이성은 편향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편향은 착각이 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나아가 확신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전문가일수록 사고 체계의 오류에서 벗어난 판단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저자는 여러 실험을 통해 전문가들도 편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일반인과 전문인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전문가는 자신의 편향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인정하지 않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저자는 이 결론을 보다 흥미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하 S1, S2)라는 가상의 등장인물을 내세웠다. S1은 노력이나 통제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직관에 해당하는 자아이며, 이 책의 주인공에 해당한다.(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증명했다) S2는 노력과 통제를 수반하여 느리게 진행되는, 의식하고 추론하는 자아에 해당한다. S1과 S2는 모두 우리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린 그들의 존재가 분리되어 활동하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S1이나 S2는 모두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상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사후 반응 혹은 사고 후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일어난 후 한 사람이 감정상으로는 슬프지만 감정을 통제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행위를 감성 대 이성의 대결로 보고 이 구조가 S1과 S2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 대 이성은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빠르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 느리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사고주체이다. 흑인으로 제시된 살인범의 몽타쥬를 보고 바로 혐오감을 가졌다면 S1이 작동한 것이고 범인이 여러 정황상 흑인일 것이라는 기사를 읽고 타당성을 따져보는 것은 S2가 작동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S1은 단순하고 S2는 복잡하며, 간혹 S1이 내 사고를 지배하더라도 잘 학습된 S2가 있어 결국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은 반대로 S2가 내 논리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때로는 S1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경우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의 직관은 마치 무당이나 역술인처럼 예지능력을 의미하는 나만의 경쟁력이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관은 직관대로 나의 장점이며 사고력은 또 깊은 대로 나의 능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처음부터 난 예감 했었어’, ‘무슨 일이 터질 줄 알았어’, ‘그 팀이 우승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이 스스로의 직관을 꽤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자신의 지식에 자부심이 있다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터이다. 간혹 실수나 착각을 하긴 해도 크게 봐선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해칠 만큼은 아니라 생각하며 그건 전체 생산총량 대비 불량률정도로 치부해왔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간혹 일어나는 실수에 해당하는 사고불량률이 가뭄에 콩 나듯 발생하는 합리적인 경우이고 나머진 대부분 실수와 착각과 오류로 얼룩진 시간이라 설명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결과만 해도 몇 십 개가 등장한다. 이 책의 예문을 읽고 정답을 추론하는 일은 흥미롭긴 해도 꽤 머리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배워 온대로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왜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을 의심하지 않을까, 였다. 논리는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반론을 만들어 자기 이론의 타당성을 구축하면서 직관은 그러려니 해 버리지 않는가. (직관은 그것이 작동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혹은 직관으로 치부하기 싫은 심리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직관은 언제나 진실보다는 익숙함을 택하고 익숙함은 호감을 낳으며 호감은 기억의 패턴으로 굳어진다. 가장 허탈한 예로 한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 판사는 배고팠을 때가 식사가 끝났을 때보다 가석방 요청을 거부하는 비율이 크다. 의사 또한 피곤한 상태에선 오진을 할 확률도 수술에서 실수를 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도 잘 갖추었다.

 

우리는 미모의 상담원, 인상이 좋은 영업사원이 권하는 보험이나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감동받은 영화,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이 내가 경험한 가장 작품성 있는 컨텐츠로 대체된다. 잡지의 화보를 본 기억 때문에 그리스 해변 가에 살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광우병 소식 때문에 갑자기 소고기를 사지도 먹지도 않게 된다. 노인에 관한 문장, 노후에 관한 기사를 보면 느리게 걷게 된다. 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발음이 쉽고 철자도 쉬운 회사의 주식에 끌리게 된다. 같은 결과라도 병원에선 생존률 보다는 사망률에 반응한다. 선거에선 객관적인 능력보단 자기 마음에 드는 외모를 보고 후보를 결정한다. 행복감은 언제나 현재의 마음 상태만이 기준이 된다. 혜택은 과대평가하고 비용은 과소평가한다. 복권은 아무리 당첨률이 낮아도 상금을 타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당첨 가능성 때문에 계속하여 사게 된다. 테러나 가스폭발은 위험률이 매우 낮지만 걱정하느니 마음 편하게 보험을 들게 된다. 쓰나미나 지진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내가 여행을 갈 땐 중요한 변수이다. 새로 생긴 식당에서 메뉴를 추천받았지만 후회할까봐 주문을 하진 않는다. 미래의 휴가는 마지막 휴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결정이 된다. 비싼 입장권을 내 돈 주고 샀기 때문에 눈보라나 폭우를 뚫고서도 야구 경기장으로 향한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며 손해를 보아도 다 경험상 좋은 실패였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옳고 좋은 판단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판단의 패턴은 반복되며 여간해선 수정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까. 저자는 의심을 지속하기 보다는 확신에 빠지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 생각엔 직관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보다 익숙한 그림을 택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즉, S2는 S1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인간은 좀 더 쉽고 편한 S1을 자꾸 지향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일부러 그러려고 느리게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받아 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몸이 편한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주의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사고도 편한 방식을 좇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편한 대로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자기기만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그 내러티브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어떤 이야기에 인과성이 부여되면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연성은 물론이고 타당성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좋은 일만 하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고 나쁜 일만 한다는 무책임한 직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비난했다면 그 사람은 비난의 대상을 직관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논리는 차후에 직관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사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느닷없이 황당한 종류의 비판을 당하는 경우 이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방법과 자료가 없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직관을 증거로 말하면 아무도 신빙성 있게 받아주지 않는다. (대개 함부로 오해하지 말라고 비이성적이라는 핀잔만 듣게 될 것이 뻔하다) 그만큼 직관은 그저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심증정도로 과소평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운 때문에 발생한 일들에도 인과성을 부여해 정합성을 구성하길 좋아한다 말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말이 안 되면서도 자주 목격되는 예는 바로 장례식장에서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그 사람이 직전에 행했던 일들이 모두 사망의 원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이가 죽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나봐... 그이가 그 일을 한 건 며칠 후 죽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이런 판단은 사후편향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사람은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인지적 착각이 내 자신은 물론 내 인생까지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고한다. 바로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착각이 우리 스스로 미래를 예견하고 통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사후에 평가하는 생각의 오류를 미처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이 심리는 미래가 불안 할 경우 더욱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가 되는 듯하다. 현재, 과거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착각은 당연히 지금 위치의 자기 능력을 과신하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긍정을 지나 낙관이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산 주식이 판 주식에 비해 더 좋은 수익률을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투자자가 판 주식이 산 주식보다 수익률이 높게 나타났다. 저자는 가장 적게 거래하는 투자자가 가장 좋은 성과를 내며 여성이 남성보다 투자성과가 좋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주식에 있어 낙관은 그저 잘못된 직관의 하나의 유형일 뿐인 것. 대다수의 펀드 매니저는 포커게임이 아닌 주사위게임처럼 주식을 선택해 추천하고 거의 모든 주식투자자는 운에 좌우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회사가 운을 기술로 착각하고 보상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식을 투자할 기회는 있었으나 주변에서 이득을 본 사람을 보지 못해 실행에 옮기진 않아 왔다. 저자는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라서 그런 것인지 손해와 이익을 비교하는 데이터가 많았고 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무척 흥미로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심리중 하나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위험회피’를 지향한다는 심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달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150달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보다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골프 선수들이 보기보다 파 퍼팅을 할 때 성공률이 더 높은 이유는 손해를 두려워하는 심리가 강해져서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손실을 막고자 하는 이 심리는 자기가 가진 좋은 재화(예를 들어 와인이나 카메라, 자동차 등)를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재화를 얻음으로써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긴 하다.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심리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득을 얻기 보다는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세상과 조직과 사람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저자는 그래서 방어하는 쪽이 이길 승산이 많다고 보았다. 최소한의 변화만 선호하는 우리 사회 보수지향자들이 왜 확실히 눈에 보이는 혜택보다 손실이 적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이 논리는 이번 진보당 사태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비주류 진보주의자들이라 해도 그 속에서는 기득권과 비주류가 또 나뉘어 진다. 최소한의 변화만 원하고 손해가 적길 바라는 심리는 진보나 보수나 매 한가지라는 뜻이다. 사회가 진보적이길 바라는 것과 자기 생각이 진보적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와서 좀 충고해주었음 좋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더욱 우리는 인간에게 실망해야지 진보에게 실망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곧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보다는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후회에 더 민감하다는 심리와도 연결된다. 지난 4.11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해온 대로 새누리당을 지지해서 결과가 좋을 것이라기 보다는 민주당을 지지해서 후회를 할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S1이 직관이고 S2가 이성이라 보았을 때 보수는 직관에 호소하고 진보는 논리에 호소했다는 사실도 내겐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S2는 대부분 S1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기려면 S1을 더 의심하고 더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진보주의자들이 꼭 탐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생각에 관한 생각들이 개인의 삶과 행복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S1과 S2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생활하는 ‘경험자아’와 점수를 매기고 선택하는 ‘기억자아’의 출연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결혼을 보아도 만약 이혼한 사람에게 당신의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간의 ‘경험자아’를 무시하고 마지막에 불행을 초래한 ‘기억자아’만 우대하여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고 행복의 유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삶의 질이 경험자아에 있으니 행복의 의미를 기억자아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결론은 S1와 S2, 그리고 경험자아와 기억자아, 사고하는 자신과 행동하는 자신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선택을 위해 S2에 더 많은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S1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 그것만이 바보 같은 생각을 줄이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이라 조언한다. 생각보다 생각을 잘하는 인간이 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을 한다고 다 생각다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수두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을 잘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는 일은 그다지 인간답지 않은 일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하길 싫어하고 잘못 판단하길 좋아하며 그러는 자신을 가장 편안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완벽한 모순의 존재인 듯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동안은 불변하는 딜레마일지 모른다. 생각은 그 자체로 미완을 의미하진 않으나 언제나 미완성의 결과로 인간을 곤경에 빠트린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그 곤경에서 탈출하는 방법 또한 생각하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만이 완성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비인간적일 필요가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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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의 글을 보면 참 합리적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논리 정연하고, 이론도 제대로 끌어다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픈 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런 글을 언뜻 보면 S2를 제대로 활용한 것 같지만, 실은 S1이 먼저 작동되어 S1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을 타당화시키기 위하여 S2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S1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1은 편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이 잘못 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S2를 이용하여 포장하는 때도 있죠.

깨어있는다...........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쉼없이, 이렇게 노력하는 한사람님이 저는, 항상 좋아보이고 멋져 보입니다.
즐거운 주말 되셔요.

가연 2012-05-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읽네요. 요즘은 거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로그인도 잘 안하는 편이라 그동한 뜸했습니다. ㅎㅎ 어쨌든..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숲노래 2012-05-19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배운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바보짓을 해요. 사람들은 '느낀 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들어져요.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까닭은, 아이들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아닌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든 믿음이든 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데, 사랑이라면 이렇게 되야 하거나 믿음이라면 저렇게 되야 하는 듯 자꾸 한쪽으로 내모는 '교육을 제도권에서 주입'시키고 '책으로 읽히'며 '지식으로 가두'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배울수록 바보가 돼'요.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스스로 손에 호미를 쥐어 들판에서 몸을 놀리며 풀내음 흙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물내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익혀'야, 비로소 '마음을 슬기롭게 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깨달아요.

차트랑 2012-05-2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성공률은 언제나 80%이상,
타인의 실패율은 언제나 80%이상,
같은 대상을 두고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S1과 S2가 자신에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

스마트 폰으로 글을 읽다보면 저는 눈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5분을 못 넘기고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나빠서 그러나?? 싶습니다요 ㅠ.ㅠ

서점엘 자주 가시나봅니다.

저의 동네에 참 괜찮은 서점이 하나 들어온지가 오래지 않은데
매장이 얼마나 널찌근하고 좋던지...
교보나 종로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여유로움,
아마도 이런 여유로움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느낀 듯...
서적들을 디스플레이한 방식도 이건 정말 독특하다...
책을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의 것이라며
완전 효율성이 떨어지는 책들의 배치...
대신 책을 보기에는 최고의 배치...
서점에서 감동먹기는 처음이었습죠.

그곳에 종종 놀러가곤 했었는데...
어이없게도 지난해 여름 홍수 피해로 그만...
널찌근한 빌딩의 건물 지하 전체를 서점으로 꾸몄는데
홍수때 물이 가득 들어 찬거에요.

결국 그 서점은 없어졌습니다.
홍수피해로 자동차들이 사거리에서 둥둥떠다니던 지난 해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에는 시원하 에어컨을 돌려주는
서점에가서 책을 꺼내들면 바로 피서였는데...

그렇게 저는 서점을 잃었답니다 ㅠ.ㅠ
제가 그 서점 주인은 아닙니다만
어찌나 서운하던지...ㅠ.ㅠ

저는 서점엘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