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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불어넣기 ㅣ 아시아 문학선 8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3월
평점 :
전쟁이라는 옛날
어렸을 때 고무줄과 공기를 쓸데없이 잘했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같이 놀았던 친구들 얼굴이 아니라 불렀던 노래와 들려왔던 싸이렌 소리다.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불렀던 노래의 첫 구절은 ‘무찌르자 공산당’이거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이거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이 세곡이 전부였다. 이 세곡은 평생을 통틀어 애국가보다 많이 부르고 들었다고 자부한다. 한 달에 한 번 민방위 훈련을 한다고 책상 밑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을 땐 선생님 몰래 공기를 하곤 했다. 그때도 우린 무슨 지나간 유행가 가사처럼-어른들 고스톱 치며 흥얼거리시듯-이 노래들을 중얼거렸다. 북한을 꼭 ‘괴뢰군’ 혹은 ‘괴수’라 지칭하며 초전에 박살내고 쥐처럼 ‘때려잡자’고 열심히 포스터를 그려댄 시절이었다. 어림잡아 70년대 후반까지 반공의 정서는 내 말랑하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다가 80년대 청소년시기에는 거의 10여 년 간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게)올림픽 꿈나무가 되어 무조건 일본을 이겨야 하는 반일감정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종목이건 한번이라도 일본을 이겨보는 것이 가장 큰 민족적 승리이자 공통된 기쁨이었다. 돌아보면 숨 가빴던 80년대에 어느 분야건 일본을 따라잡느라 국민 모두가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 가면 소니의 워크맨을 갖고 있는 친구에게 일본음악을 듣지 말라 했었고 일본잡지를 가져오면 불온서적이라도 지녔다는 듯 교무실에 불려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진국이 된 일본을 동경하고 일본의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는 누구보다 높았으나 그렇다고 일본의 문화예술에 감동하는 꼴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건 알지만 좋아하진 말아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심리가 또 하나의 우리들 성장 호르몬이었다. (나중에 올림픽을 치르고 나라전체가 좀 살만해지니 고개를 든 정서는 반미감정이다.)
옛날이야기를 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굳이 서두에 옛날이야길 한건 요즘 들어 더욱 젊은 친구들과 세대 차이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과 반일, 반미 정서는 그 기저가 국민적 피해의식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의식들인데 확실히 요즘 세대들은 우리가 뼛속깊이 교육받아 벗어날 수 없었던 민족적 열등감에서 많이 탈피된 모습들이다. 역사적 의식과는 별개로 문화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개인 취향대로 작품에 선호도를 드러낸다. 그런 모습들이 부럽진 않은데 사실 이질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일본작품을 맘 놓고 좋아해도 되나 자기검열을 하는 자신에 놀라곤 한다. 특히 전쟁의 상처나 피해를 말하는 경우 더 괴롭다. 이 책도 읽는 내내 자애와 연민의 정서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공감했으면서 마음 한 구석 좋은 책, 좋은 작가, 좋은 소설이라 소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엊그제도 아베 총리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분개하는 한 지인이 일본작가의 작품은 감정적으로 꺼려진다고 하길래 그건 초등학교적 유치한 사고라 충고까지 했는데 이 책을 덮고 나서 더욱 나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스스로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을 쓴 유홍준은 이렇게 표현했다. 왜곡도 무시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과거사의 갈등을 느끼지 않는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직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세대에게 이 책은 어쩌면 공감의 다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한국의 제주도나 부산 해안가로 바꾸고 주인공 이름을 김씨나 박씨로 바꾸면 놀랍도록 일치하는 정서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밑바탕엔 ‘전쟁으로 피해당한 지역에서의 희생된 가족’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나라나 누구나 상처의 유형 및 결과가 비슷하다면 비슷한 시각으로 인간을 위로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근육처럼 길러진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은 사라지고 술은 물이 되고
<혼 불어 넣기>의 주인공 우타는 전쟁 중에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아이 없이 홀로 살아온, 마을신과 교류하는 신녀이다. 우타는 친자식처럼 여긴 고타로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유일한 이웃이다. 고타로는 갓난아기 때 부모를 잃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툭하면 혼이 나가는 인물이고 우타는 그때마다 집나간 혼을 불어 넣어 살려주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소설의 사연이다. 즉, 혼 불어넣기는 처음으로 실패했고 실패는 곧 영혼분리, 죽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떠나간 혼은 누군가에 의해 돌아오지 않는다고 읽었다. 여기서 혼 불어넣기가 실패한 요인을 작가는 고타로의 몸을 껍질삼아 기생한 소라게 때문으로 보이게 한다. 작가는 이 소라게를 바닷가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아 숨진 오미토, 즉 고타로의 생모이자 우타의 친구가 환생한 존재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궁극엔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그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인간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고 자라서 바다에 의지해 살다가 죽어서는 바다 저편 세계로 가는 거라고 우타는 배웠다. - 53 p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건 조상들이 바다를 의지해 살아왔기에 자신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다짐하는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고타로의 특별한 증세가 마을에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계산하는 이웃들의 대화에서 오키나와라는 지역이 일본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사실 끝까지 우타가 할머니로 인식되진 않고 고타로의 친구(작가 자신)쯤으로 보였는데 이 부분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완벽한 할아버지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작가와 동성화자가 아닌 한)어쩔 수 없는 한계는 존재하는가 싶었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이 책의 표제작이면서 다른 제목보다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제목으로서의 매력이 충분했다. 메도루마 슌의 작품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키나와 전통시대(오키나와 전투, 미국의 통치 등)를 살아오면서 오키나와가 반환(1972)되기 전, 그러니까 반환사실 자체를 모르는 세대의 안타까운 증언자들이다. 주로 죽은 이의 영혼을 본다던지 조용히 어린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던지 하는 죽음을 초월하는 캐릭터로 화하여 시대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관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젠가 쓰나미로 폐허가 되어 버린 일본 바닷가 마을의 한 생존자로 보였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의연하게 인터뷰에 응했고 마치 전에도 이런 일을 겪고 살아 온 것처럼, 그러나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읊조리셨다. 그때 여러 번 죽음을 지나쳐 온 (것 같은)노인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평안해 보였는데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도 같은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화자(초등 4년)는 (다른 작품보다 더)작가 자신인 듯 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20대에 브라질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남미에 살다가 온 문제적 70대 인물로서 오키나와 전투로 가족모두를 잃은 희생자이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의 총에 맞은 상처와 광산에서 생매장 됬을 때 생긴 상처, 미국인과의 격투에서 얻은 상처를 훈장처럼 지니고 산다. 타자가 목격할 뿐이지 본인이 절대 증언하지 않는다. 아마존 오지에서 금을 캐고 철광석 운반선으로 미국을 왕복하고 상파울루에 세탁소를 차리고 이발사도 했다는 할아버지는 어쩌면 일본이 들쳐보고 싶지 않은 기밀문서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네 과일이나 훔치던 내가 할아버지와 비밀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가장 자랑하고 싶은 추억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이별의 순간에 마시게 된 술을 평생 혼자 간직하다가 꼭 한사람, 나와 마신 후 세상을 떠난다. 내가 진 술빚은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작가는 그 빚을 이렇듯 소설로 승화한 게 아닐까.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죽어버리며 더 이상 술로 견뎌야 할 고독이 남이 있지 않았음을 항거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자유와 평화를 누구도 폄하하는 사람은 없었다. 늘 이유를 묻지 않아온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오키나와가 반환되는 것에 온몸으로 거부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할아버지의 혼이 담긴 술 단지를 무참히도 깨어버리는 청년들은 과거 한 시대를 상징했던 비련의 역사 따위 돌아보지 않겠다는 새 시대의 냉철한 선언으로 들렸다.
화자의 입을 통해 작가는 미군의 통치가 끝났음에도 일본 본토의 법대로 살아가기 싫은 지역적 저항감을 곳곳에 내비친다. 엔화의 디자인이 달러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평가와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언제 피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심드렁함은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미군의 달러가 지역민을 먹고 살게 해주었다 여기기 때문 아니겠는가. 사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강제적으로 이민(이나 이주)을 가고 가족 모두가 전쟁에 희생된 후 혼자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꽃보다 진한 향기는 바로 피보다 진한 ‘술’이었다. 지역적 특산물이 술이 되어가는 과정, 역사적 사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술의 역사, 그 술이 숙성되는 시간이 상징하는 한 세대의 고독, 같은 술이 다음 세대로 지나와 맹물보다 못한 액체가 되어 버린 광경, 그것들의 여정이 누구라도 이 작품에 흠뻑 취하게 만든 원인인 듯 하다.
나쁘게 자라고 나쁘게 싸우고
<붉은 야자나무 잎사귀> 역시 미군 통치하에서 겪은 소년시절의 추억을 아프게 그려낸 이야기다. 나는 미군기지 출입문 앞 환락가 골목에 살고 있는 S와 복싱을 매개로 친해진다. 학교가 끝나고 S가 데려간 곳은 ‘오키나와 남자들보다 배나 큰 미군들이 싸우는’ 뒷골목이었다. 성적인 면에서 개방적인 S와 S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데 작가는 처음 가져보는 성적인 감정보다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고 부끄러워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치 우리가 미군부대 근처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그 시절 양공주를 떠올리게 했다. 작가는 영양부족으로 성장이 나쁜 야자나무의 불긋한 잎사귀들을 빗대어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던 환락촌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조용히 사죄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껏 나쁘게 자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쁘게 커서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나쁘게 살아왔다 평가하고 나쁘게 살 것이라 예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오랫동안 그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지 못했던 과거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똑같은 피해자인데 그 안에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집단의식을 구분하는 인간의 본성은 같은 가해자인데 그 속에서 더 나쁘고 덜 나쁜 놈을 나누는 심리와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투계>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온도가 뜨거웠던 글로 기억된다. 작가는 계획적으로 길러진 싸움닭의 처절한 싸움과 예정된 최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이 직접 키운 병아리가 도박장에서 어엿한 투계가 되어 피와 살이 뜯기는 싸움에 길들여지는 과정은 점점 목적 없이 호전적 투사가 되어가는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이번에 이기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이겼다 하더라도 다음엔 죽는 운명.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조차 모른 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수단이 되어야 하는 전장. 싸움은 목적이 아무리 휼륭해도 나쁜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비겁한 아버지는 일본 본토를 아무 힘없는 자신은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 싸움에 진 다우치에 비유하며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작가는 모두 불태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가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와 <내해>는 강물과 섬을 배경으로 하면서 서늘하고 우울한 문체가 비슷해서 덮고 나서 한참동안 마음이 가라앉는 글이었다. 두 작품 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여성들을 애도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은 말야. 죽으면 모두 바다를 건너서 저 섬으로 가. 그러고는 우리를 지켜봐 주지.” -234p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가 한 말씀이다. 어떤 여자는 ‘죽어서도 사람은 혼자가 아니야. 언제나 영혼으로 되살아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에서는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여성의 영혼이 자신처럼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나같이 어린 여자애에게 고백하는 인생이야기이다. 이미 죽은 여성이 자신의 서러운 죽음을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엔 삶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여자의 할머니는 ‘마을의 신녀들 중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있었던’ 분이고 여자는 학교에 못가고 할머니랑만 살면서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들로 혼자서 살게 된 경우이다. 작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는 어머니와 선생님, 배우자를 대신하면서 삶과 죽음 모두를 의지할 수 있는 절대적 대상이었던 가보다.
낮에는 밭일을 거들어 드리고, 밤에는 아홉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어. 잠들기 전에 할머니가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걸 듣는 게 가장 큰 낙이었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라든가, 젊은 시절 가나가와로 가서 방적 공장 여공으로 일하던 때 일이라든가 말이야. 전쟁 얘기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잘 말해 주었단다.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이야기를 듣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나는 무엇이든 다 할머니한테 배웠단다. 글도 돈 계산하는 법도 할머니와 함께 야채를 팔거나 빈 병을 모아 팔면서 배웠고, 몸의 변화, 마을 행사, 제사를 지낼 때 신을 모시는 법 등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도 다 할머니가 가르쳐 주었어. 내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다 할머니 덕분이지. -175p
불행하게 태어나 불행하게 살다간 이 여성은 같은 일본사람이지만 오키나와 외부인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살려는 의지를 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오키나와 여성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정을 준 외부남자를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만 돌아온 건 약자를 무참히 짓밟는 집단이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오키나와 출신이 아니거나 혹은 오키나와의 전통사회 규범을 무시하거나 본토의 (경제적)마인드를 향한 인물들은 어쩐지 모두 가해자로 등장하는 것 같다.
기지촌 술집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조폭이나 미군을 상대하던 양공주, 신규 건설현장에 나타난 용역 일꾼들, 생필품을 팔러 오는 장사꾼……. 이들은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파생된 인물이자 오키나와 반환 시점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사실상 이런 인물군은 전후 기지촌이 생성되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었고 70년대 말까지 지속된 이러한 풍경을 목격했던 내 세대까지는 대충 기억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그러니 다음 세대부턴 이러한 소설이 더 이상 등장하지 못할 역사적으로 귀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내해>역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자신과 자식을 모두 버린 어머니의 슬픈 운명에 관한 기록이다. 할머니는 미군을 상대로 물건을 팔던 - 처자식이 있는, 무정하게 떠나버린 - 장사꾼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내 어머니가 된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했기에 아버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해 여자를 안으면 발기가 안 되는 남자이다. 이 부분은 침략을 주도한 일본이 다음세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었다. 할머니는 40여년 파초섬유로 옷감을 짜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영혼이 보이는 경우이다. 나에게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힌 ‘내해’는-나 역시도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기에-나를 반겨줄 진정한 고향인지 모른다. 마을의 공동묘지처럼 섬에 떠 있는 묘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슬프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내면 깊숙이 영혼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이긴 하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장편으로 받아 들였다. 전쟁의 상처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인간에 대해 실망하거나 인간끼리 복수하려는 정서는 읽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 바닷가와 숲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작가의 고요한 외침을 그저 둔중한 메아리로 확인한 듯 하다. 남의 피해를 확인하니 내 피해도 사그라드는 감정만은 아니다. 외려 모든 피해를 낱낱이 소리쳐 전달하고 내가 더 피해를 보았다고 설득, 강요, 주장하는 심리가 부끄러워진다. ‘조용하고 고독하게 살면서도 힘들어하지 않는 강인함’,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이렇듯 브라질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모습은 어떤 파도가 휘몰아쳐도 멈추지 않고 변함없이 흘러가는 바닷가의 풍경과 같지 않을까.
작년인가 배경이 오키나와였던 미니시리즈가 기억난다. 그땐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 따윈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동양의 하와이로서 놀러가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태양이 이글거리는 산호초 바닷가 시골정경이 새삼 궁금해진다. 바닷가에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얻어 올지 벌써부터 마음이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