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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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좋은 소설입니다. 건강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기까지 하군요.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덮고 이 소설 참 마음에 든다,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겠구나, 생각들이 그 많은 마음을 한 곳으로 움직이겠구나, 아마도 움직여진 그곳은 작가가 손을 잡아 이끈 곳이겠구나..... 오랜만에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을 만났습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과 세상에 마음이 상하는 시간이 많았던 분이라면 아마 그 마음이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꿈쩍 않던 마음 하나 움직이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수도 있으니까요.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읽는데 어떤 반감이나 무리가 전혀 없습니다. 쉽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작가의 문체와 단정한 문장이 편안한 느낌입니다. 능숙한 것과도 조금 다른데 어디서 한번 마주친 듯한 사람처럼 낯설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친근한 것과도 조금은 다른데 사람으로 치자면 독특한 호감이 있어 자꾸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랄까. 무심코 라디오를 듣다 보면 그래, 바로 지금 이런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할 때가 있잖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음악을 듣다보면 지금 내 마음이 이러했구나, 깨달을 때가 있잖아요. 이 책이 그래요. 바로 지금, 내가 듣고 싶고 읽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한번쯤 우리는 이런 소설을 기다려 온 것은 아닐까. 어딘가 불편하고 속상하고 아픈 구석이 있어도 꼭 이런 구성, 이런 결말이 필요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죠. 소설이란 마치 동네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기약 같아요. 그러나 내게 유독 잘 맞고 잘 듣는 약은 흔치가 않잖아요. 글쎄, 좋은 소설이란 지금 내가 걸린 무언가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싶네요. 이 소설을 읽고 새삼 그 ‘좋은’ 감정을 정리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가슴 속 무언가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아니 세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한물간 외주 제작사 PD 박상운과 경영대 출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 정기섭과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김일우라는 소년. 주인공은 자폐인데다가 지능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지만 청각에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김일우 소년이겠지만 저는 한 번 실패한 어른이라서 그런지 아주 못되지도 아주 착하지도 않은 두 아저씨들이 더 공감 갔던 것 같습니다. 아저씨들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한 시절 잘나갈 때가 있었거든요. 장애 소년이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듯 우리도 그들처럼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람들의 안 보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로 받아 들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선한 구석은 있고 또 아무리 착한 사람도 욕심은 있기 마련이죠. 이 소설은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하기 때문에 누가 피해자가 되고 그래서 상대가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리얼리티가 듬뿍 살아 있어요. 아무리 소설적인 상황이라지만 살다보면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일 부지기수잖아요. 그보다 더 사악한 사람들 쌔고 쌨잖아요. 일우 학생만 빼고 나면 나머지 어른들은 우리 현실세계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고 어쩌면 일우마저도 가끔 등장하는 우리네 일상 속 그저 그런 불행으로 보였어요. 

 

 

우리와 멀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표면적으로 아무런 연고관계가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전반부에 배치하고 중반부에 그들을 만나게 한 후 각자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헤어지게 하고 다시 재기를 다짐하고 후반부에 재회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결론은 맞아요, 돈 때문에 모여서 돈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돈 때문에 재회하는 것입니다. 이 들을 운명처럼 엮어주고 그들 모두에게 희망과 상처를 번갈아 주면서 우리의 감성을 들었다 놓았다 마구 뒤흔드는 이유는 모두 돈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같은 목적이 없었다면 이들이 사는 동안 만나야 할 기회는 전무 했을지 모릅니다. 돈 좀 벌어 보려고 그래서 명예도 얻고 사람답게 좀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죠.

 

   그렇다고 우리 사는 곳과 아주 멀거나 가기 어려운 곳도 아니지요. 그들이 원하는 돈도 백만장자가 될 만큼의 일확천금은 아니었어요. 사실 이 부분이 아스라이 저릿해지는 부분입니다. 김일우의 부모인 오영미와 김민구는 말합니다. 주제넘게 분수에 넘치는 돈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 만한 동네에서 식구 살기에 좁지 않은 아파트 한 채 사고 중형차도 한 대 뽑고 기분 내면서 외식도 좀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랍니다. 조금 더 바란다면 보너스와 연말 정산 모아 일 년에 한번 해외여행 정도 추가해 볼까요. 수천 만 원 짜리 명품백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A나 B로 시작되는 외제차를 굴리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호텔이나 콘도, 골프회원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주식으로 갑자기 대박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욕심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부부의 소박하고도 평범한 바람이 슬퍼지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소박하다고 여기는 그 정도, 그 평범함이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평범이란 개념은 대중적일뿐 결코 많거나 쉽다는 뜻과는 전혀 별개지요.

 

   거리에 나가보면 곳곳에 짓는 것이 아파트이고 24시간 달리는 것이 자동차인데 내 집과 내 자동차는 늘 그들보다 작고 형편 없습니다. 어느 개그맨이 그랬죠. 아이 키우는 집에선 월급 받고 아무 것도 안하고 숨만 쉬고 200살까지 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다고요. 요즘처럼 물가가 오른 식당에서는 아이들 데리고 고기 한번 먹으러 나가기도 얼마나 무섭던가요. 지금은 멀쩡하지만 언제 회사가 주저앉아 거리로 나 안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그랬지만 사업하다 한 번 망하면 삼년은 빚 갚느라 아무것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김일우네 가족에 닥친 시련은 서민에서 최하층 신세로 추락하는 보기 좋은 촉매제가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작가는 인물의 이름이 캐릭터와 딱 들어맞게 잘도 작명하신 것 같아요. 김일우의 이름은 어쩐지 한번 바보(一愚)는 영원한 바보일 것 같고 엄마인 오영미와 아빠인 김민구는 말 그대로 쌀이 없고 구직이 어려운 사람들 같아요. 잘 풀렸으면 영리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국민을 구하는 부부가 되었을 텐데요... 설상가상으로 아빠 김민구는 십년 넘도록 일해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중국집 배달부로 전락합니다. 사립학교 비정규직이었다고 해요. 법에 호소해 복직을 하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똘똘 뭉쳐 이미 오래전 해결된 공금횡령을 이유로 사람을 짓밟기만 하네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가진 사람들은 그 잠깐의 미동도 보기 싫고 귀찮은 법이거든요. 내 발밑에서 죽어가는 지렁이 보다는 더러워질 내 구두 밑창이 더 걱정인 것이죠. 어떻게 마련한 구두인데요...

 

   하지만, 지능이 떨어지던 자식을 돈이 없어 제때 치료도 못한 채 입에 풀칠을 면하기 위해 극한 생활전선에 내몰리는 가장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보아온 그림 이라구요? 치매할머니를 모시고 학교를 다니는 소녀가장도 있고 건설현장에서 불구가 된 아버지를 수발하는 소년도 있다구요. 예, 맞아요. 이 소설은 우리와 많이 멀지는 않아요. 너무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더 흠칫하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일우 아빠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들을 학대하는 일만 남게 되었어요. 엄마는 늘 쪼들리는 생활에 성격은 급하여 아들을 바보같은 놈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어요. 평범한 서민에게 가족의 병은 빈곤과 추락을 피할 수 없는 지름길이 되고 맙니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삼대독자 일우인데 그 일우가 바보라는 건 희망을 안주느니만 못한 주었다 빼앗는 더 억울한 일은 아닐까요. 무능력해 보이는 가장 김민구는 말해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세상 험한 꼴 많이 봤다 해도 힘든 건 힘든 거’라구요. 그 말이 왜 그리도 시큰한지 한참 입에 맴돌았어요. 힘든 건 힘든 거라구... 불행의 크기는 그것을 겪는 사람에겐 전부이고 더 할 수 없죠...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힘들어 질까봐 입술을 깨물었어요.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부친의 가게를 물려받아 세오 건어물의 사장이 된 정기섭의 사연은 웃기고도 서글펐어요. 딴에는 대학물을 먹었고 전공이 컨설팅이라고 장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위인이지만 상인회 일에는 물불을 안 가리는 기섭씨 같은 가장은 어쩌면 무능력한 일우 아빠보다 더 지독할지 몰라요. 작가는 기섭씨의 상인회 총무활동을 통해 대형마트의 무차별적 진출과정과 지역상권의 피해상황을 넌지시 고발하고 싶었나 봐요. 기섭씨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시장의 영웅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꼭 요즘 개봉중인 영화 <댄싱퀸>에서 황정민이 우연치 않게 시민을 구하는 덕에 일약 서울시민의 영웅이 되는 과정과 비슷하더라구요. 유머가 잘 믹스된 에피소드였습니다. 살다보면 별 생각 없이 한 일도 마치 정의에 불타는 시민이 행한 개념적 사건이 될 때가 있는 것이죠. 어쩌면 사람들은 늘 시민을 구해주는 슈퍼맨 같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작가는 자신의 손 끝에 마치 고화질의 다양한 카메라 렌즈가 달린 것처럼 행동과 심리를 디테일하게 혹은 대범하게 포착하더군요. 아마 방송 구성작가 출신인 이점을 살린 덕인지 후반부로 지날수록 더욱 사실적 현장감이 빛을 발했던 듯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야기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저를 웃고 울게 한 사람은 네오 프로덕션의 사장 박상운이었어요. 아내된 입장에서 기섭씨의 행보가 매우 ‘섭섭’하다면 박상운 PD의 사회생활은 참 팔자가 센 것이라고 할 밖에요. ‘운’이 필요이상으로 좋았다가 또 억세게 ‘운’이 나빠지는 경우. 늘 그 놈의 ‘운’ 때문에 성패가 좌우되는 사람. 어떤 면에서 작가는 박 PD를 통해 결국 자신이 몸담았던 시사 프로그램 방송 현장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시청자 입장에서 보자면 김일우가 대박을 터뜨릴만한 게스트이고 정기섭이 어리버리한 협찬사라면 박 PD는 마음 급한 연출자인 것이죠.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시청률 지상주의 제작자 이구요. 박 PD가 자꾸 눈에 밟혔던 이유는 순전 한 때 잘 나가가는 PD였기 때문이어요. 그는 사이비 수련원에서 ‘종교의식으로 포장된 원장 교주의 성폭력과 집단 구타 현장을 몰래 촬영’하기도 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원장이 원생을 학대하는 장면을 고발하기도 하여 시사다큐분야에선 스타가 된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 시절 꼴통이라 수없이 불렀던 후배 김상호가 방송국의 갑이 되어 박 PD에게 당한만큼 되돌려 주더군요... 공교롭게도 저 역시 큰 회사에 있다가 나와 그 회사 용역을 수행하는 개인회사를 운영했는데 직원들 월급 주려고 옛날 까마득한 후배 찾아가 굽실거린 적이 있었거든요. 영세한 개인 프로덕션 사정이야 뻔하죠. 드럽고 치사고 목구멍에 욕지기가 수없이 올라와도 그 놈의 돈 때문에 지긋이 참아야 하는 것이죠.

 

   작가는 박상운 PD가 궁지에 몰려 있을 때 무리한 기획을 하게 되는 배경으로 열악한 방송제작현실과 갑과 을 간의 관례화된 부당한 방송시스템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은 시청률 위주의 ‘의미고 나발이고 확 터뜨릴 수 있을 만큼 쌈박하고도 통 큰 협찬사가 붙을 만한 대단한 프로그램’을 원한다는 것이죠. 힘들다고 모두 도둑질하고 사기 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례자를 조작하고 편집을 자극적이게 이어 붙이고 협찬사를 급조하는 등의 제작과정이 꼭 박 PD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소리로 들렸어요. <귀를 기울이면>이 방송국 입장에서 보자면 시사 프로가 사회 곳곳의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서 고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잘못되기까지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잘못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뜻으로도 들렸어요. 지금은 거대한 ‘잘못’, 볼거리가 될 만 한 ‘잘못’을 미리부터 기획해 놓고 그에 맞는 ‘잘못’을 찾으러 다니는 것일지 모른다구요. 이렇듯 방송제작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이 작품 곳곳에 주도면밀하게 숨어 있어요.

 

방송사에서 그렇게 운영을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다. 세상에는 프로덕션도 넘쳐났고 피디와 작가, 촬영기사, 조명기사, 리포터와 그 지망생들은 더욱 많았다. 방송사는 그럼에도 일하겠다는 사람들 중에 구미에 맞게 골라 쓰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칙이고 시장경제의 원칙이었다. 절은 몰랐다. 그래서 중들이 점점 저질이 되어간다는 것을, 중들은 절에 대한 애정이 없어졌고, 책임감도 없어졌다. 먹여주고 사람대접해준다면 교회든 성당이든 갈 판이었다.      -p89


 

   요즘 MBC가 파업 중이잖아요. 물론 소설과는 다른 이유지만 시청자를 위하고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시청률 위주의 방송을 제작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시청자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더군요.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시청자 되기도 쉬운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저만해도 TV 프로 하나 보는 것을 단순한 오락시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송환경 및 프로그램 발전을 위해 어떤 프로를 시청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전보다 똑똑해진 시청자도 많아졌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진 덕에 요즘은 시청자가 비판의 도가니가 되가는 건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한예슬이 드라마 펑크 내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미국으로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때 한예슬 덕에 같은 드라마에서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맨날 밤새던 스탭들이 잠잘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소설에선 제작자 박 PD가 이렇게 말하네요.

 

 

씨발, 어지간한 건 약하다고 컨펌을 안 해줬잖아. 정신과 통해서, 상담실 통해서 정식으로 섭외하려면 돈이랑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서 묻냐? 우리한테 그만큼 제작비랑 제작기간 줘봤냐? 컨펌은 늦게 주지. 걸핏하면 약하다고 엎어버리고 다시 찍으라고 하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어딨어? 그나마 우리가 밤새 뺑이치고 있으니까 사고 안 나고 방송 꼬박꼬박 나온 거야.      -p96

 

 

   아마도 작가는 이렇게 목구멍까지 차올라 꼭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가 봅니다. 제가 다 속이 시원해 지더라구요. 작가는 이슈가 될 만한 기사거리를 두고 언론과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세밀하고 단계적으로 묘사하더군요. 제목만 보면 의혹도 사실로 추정되는 무차별적 기사와 네티즌의 광분에 가까운 집단 심리가 마치 ‘복음이 전파되고 전염병이 옮아가듯’ 퍼트려진다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대회 참가비로 시장 개보수를 하겠다는 정기섭 총무나 장애 아들을 앞세워 상금을 챙겨보겠다는 일우 부모님이나 일단 화제성을 창출해서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려 보겠다는 박 PD의 발상을 아무도 욕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비 윤리적이고 선정적인 도박성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우리는 아무도 그들이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네오 프로덕션 사장도 나름 피디의 저널리즘이 있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도 나름 책임감이 있고 김일우 부부도 간절한 사정이 있는 걸요. 그것이 야바위 대회면 어떻습니까. 전 재산을 걸었다고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사실 시청자인 우리들이야 말로 늘상 극적인 드라마를 기다리고 성공이라는 환타지를 꿈꾸지 않습니까. 제작진과 협의된 어느 정도 위선이나 거짓이라는 것도 알면서 눈물짓고 환호하고 감동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예, 멀쩡한 집안에 멀쩡하게 생긴 소년보단 찢어지게 가난한 중국집 배달부의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소년이 도전하여 우승한다면 더 좋지 않겠어요? 그들이 참가비 열배의 상금을 가져가는 것이 더 공평하고 더 옳은 것이고 더 감동이라 믿지 않나요?

 

 

   우리는 무수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일등의 기가 막힌 사연을 기다리고 그들의 드라마가 승리하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니까요. 감동적인 인생 역전 드라마야 말로 현실에선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두뇌 스포츠가 되었든 춤이 되었던 연기나 노래가 되었든 상관이 없는 것이죠. 중요한 건 어느 서바이벌에서도 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참가자는 등장할 것이고 반드시 우승자는 일우만큼의 상처가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

 

 

 

“삶이 벼랑 끝이라고 느껴지십니까? 더 이상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이제 당신이 인생의 챔피언이 됩니다.
더 챔피언, 그 마지막 게임이 시작됩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 TV속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흔해졌습니다. 이제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쓰리컵 대회'만큼이나 발상이 자극적인 프로는 얼마든지 채널을 돌리면 쉽게 마주치는 것 같아요. 한 달 전 인가, ‘괴물녀’라는 별명으로 일상 생활이 힘든 이십대 여성이 미인을 만들어 주는 프로에 출연했더군요. 사연이 누가 봐도 충격적이고 기구하면 여러 닥터들의 검증을 거쳐 얼굴 및 구강은 물론 체중까지 거의 전신 성형을 무료로 해주는 형식이었어요. 너무 못 생겨서 저 정도면 해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저도 모르게 생기더군요. 시청자들은 그 ‘괴물녀’가 시간에 걸쳐 점차 괴력의 ‘미녀’로 변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 소설 말미에 박 PD는 일우의 부모에게 일우의 갱생프로젝트로서 재활과정을 담아 이른바 ‘서바이벌 휴먼다큐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의 프로를 연출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른바 바보가 똑똑해지는 과정이나 추녀가 미녀가 되는 과정이나 핵심은 남의 불행을 자세히 구경하며 내 처지를 위로 받고 그들의 성공을 확인하며 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청자와 참가자간 사연거래의 맥락은 같다고 봅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핵심에 돈이라는 자본과 성공이라는 욕망이 은밀히 숨어 있어요. 돈이 있어야 똑똑해질 수 있고 예뻐질 수 있는 것. 그래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수 있는 것. 그러니 인생을 바꾸는 건 돈이라는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죠.

 

 

   소설에서 가장 권력자로 등장하는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박 PD에게 마지막으로 ‘판결이 어떻게 나든 결국 힘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충고합니다. 글쎄... 저는 이 소리를 끝까지 듣기 싫었던 주인공 일우가 그 옳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듣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일우가 들었던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 였고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말하지 않고도 전해주는 소리였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 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어떻게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온 일우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기 싫었던 것일까...

 

 

   ‘소리 없는 소리’란 어쩌면 처음부터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요?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란 어쩌면 일우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닐까요? 아, 그렇담 우리가 들어주지 않고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서번트 증후군은 좌뇌가 발달이 되지 않은 것의 보상으로 우뇌의 특정 부분이 발달하게 된 결과 청각 같은 특수한 재능이 천재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래요. 우리는 말로는 다 듣고 귀로는 모두 이해하는 듯이 말하지만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맘에 드는 것만 이해하면서 편하게 살아왔네요. 이 소설은 사회, 가정 곳곳에서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환기시킵니다. 이미 들었으나 오해하고 잊어 버렸던 이야기, 반쪽 짜리 진실만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쩜 소설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지만 작가는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주장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 해요. 비록 버스 정류장은 아니지만 소설을 정류장 삼아 가만히 기다려 보고 싶어요.... 소설 속 이야기들이 한자 한자 말을 걸어 오네요. 지나가는 바람처럼 촉촉한 빗님처럼. 이제야 알겠어요. 소리란 바로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느끼는 것임을.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마음이 이렇게 들리고 진심이 알아진다는 것을. 어때요? 나는 안 보이는 당신을 듣습니다. 당신도 들리나요? 혹시 우리에게도 천재적 재능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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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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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아니어도 재차 옥수수와 닭의 의미를 해석하고 김영하의 작품세계로부터 감탄 혹은 비판을 할 것이다. 나 역시 지난 페이퍼에 이미 김영하만을 언급했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우수상작만 모으고 싶었다. (하나로 모으자니 너무 길고 이미 쓴 걸 줄이자니 번거로와서...) 그런데 나는 나가수나 오디션 프로의 영향 때문인지 이 책에 실린 우수상 수상작에 순위를 매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 심사위원들의 변을 보면 하나같이 마지막까지 김숨과 김영하를 놓고 고민을 했다고들 하는데 수록 순서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가나다 순도 아니고 서사의 흐름을 배려한 편집자의 순서도 아니고 무작위 제비뽑기 순서도 아닐 것이다. 읽을 땐 순서가 의미 없었는데 정작 우수상작만 따로 글을 써보려 하니 불현듯 순서의 의미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아마 등단연도 순인 듯한데 나는 내 맘대로 순위를 정해보았다. 순전 내 기준이고 내 기분 대로이므로 이야말로 의미는 없다.

 

 

 

 

1. 김숨 <국수>

 

 

 

   김숨은 작년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소설엔 유난히도 국이나 탕을 끓이거나 생선을 튀기고 굽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풍성한 식탁이 아니고 가난과 질병, 죽음과 생계의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편린 속에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아무리 하찮은 생명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삶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서늘하게 깨우치게 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이 숨 막히는 현실과 숨 쉴 틈 없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 생명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은 아닐까를 조용히 느끼게 된다. 이번엔 국수 밀가루 반죽을 하는 시간이 고통스럽게 전개되는 서사를 다루었다.

 

 

   마흔셋의 석녀가 재취로 들어와 자기 속으로 낳지 않은 의붓자식을 기르면서 수없이 치대던 밀가루 반죽의 의미는 이미 맏딸이었던 야박스런 화자가 계모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비로소 원망의 국수가 아닌 화해의 국수로 변모한다. 화자는 밀가루를 양푼에 개고 간을 하고 반죽을 하고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양념장을 만들고 국숫발을 뽑고 끓여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하는 동안 한 많은 한 여인과 자신의 일생을 연결 지으며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을 가진다. 뽑아놓은 국수 한 가닥이 꼭 ‘저기 당신과 여기 나 사이에 놓인 연줄’만 같아서 도로 뭉쳐버리고 싶지만 시간을 견뎌내고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어머니 앞에 국수를 내놓는다. 이야기의 속도감이 부족하고 서사의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 하였지만 기껏해야 멀건 국수 한 그릇 만들어 내놓는 일을 이렇게 끔찍하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서글프고 아프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어 가장 많은 공감이 갔던 작품이다. 아마 한번이라도 국수를 끓여 본적이 있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그러 할 것이다.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p244

 

 

   오래전 젊었을 때 생선을 갈아 어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 절대로 그 어떤 어묵도 안 드신다는 어르신이 생각난다. 어떤 한 가지 음식의 공정을 아주 긴 시간 반복해서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세월을 가진 사람들은 달인처럼 아마도 그 음식의 자타공인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세월이 그 음식만을 하도록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아니 그 음식만이 그 세월을 견디는 시간이었다면 그는 세월이 원망스러울까 음식이 원망스러울까...... 김숨은 세월도 음식도 소중한 자기 생의 일부분이었고 그렇기에 국수를 지겹게도 만들어준 그분의 일생도 소중했다고 회상한다. 늘 그렇듯 그 고마움을 느낄 때란 그를 잃고 나서이다. 아직 삼십대 후반인 그녀가 무에 그리 깨우친 삶의 이치가 많은 것인지 나는 그것이 소름끼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번엔 당당한 대상의 수상 소식을 기다린다.

 

 

 

2. 조현 <그 순간 너와 나는>

 

 

 

   이 작가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소설집에서 아주 난해한 단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라는 단편인데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2010, 현대문학)에 수록 되어 있다. 그때도 김숨, 박민규, 권여선, 김경욱 등과 같이 선정된 것이었는데 내 기억으로 그들 소설 중에서 전혀 서사자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어느 정도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단연 이야기가 탄탄한 구성이 재미난 소설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심사위원은 쓸데없는 에피소드가 많아 다소 구성이 산만하다 하였지만 분량도 그렇고 외려 장편으로 구성한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름 상상을 해보았다. 나이 상으로도 같은 연배이고 나 역시 비슷한 시기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어린 시절에 처음 보았던 서울의 삼십년 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지라 공감도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시골에서 상경해 80년에 왕십리역 근처로 이사 온 화자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겠다는 각오로 끝맺는다.

 

 

살아 남아야 생을 바꿀 수 있고, 정말로 간절한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다.  - p367

 

 

   왕십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자는 다 가진 것으로 보여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친구 민혁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에 가면서 당시 미래를 엿볼 줄 알았던 무당집 딸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무당집 딸과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불행의 사연을 간직하게 되는데 그중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는 살아남는 것이야 말로 어떻게든 운명을 바꿀 기회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무당집 딸의 예언대로 내일 죽는 운명일 지라도 오늘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네 서글픈 운명이라고 들려왔다. 우수상 수상 작가들 중에는 가장 늦게 등단한(2008) 작가로서 아직 장편이 없는 듯 한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3. 김경욱 <스프레이>

 

 

 

   이 작품은 읽는 내내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연상시켰다.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수집하며 소통 불가한 이웃들을 이해해보려는 한 남자의 집착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쓰레기 봉투가 이번엔 택배상자로 바뀌면서 단순한 실수가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와 연결되어 가는지 서사를 흥미롭게 구성하였다. 다만 그 구성이 흡사 기술자가 조립해 만든 레고 작품처럼 딱딱 들어맞도록 너무 완벽했다는 것이 주제가 약하다는 식의 심사평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이 백화점 구두잡화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는 것. 단골가게의 점원이 하도 손님의 발을 만지면서 늘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다 보니 집에서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기억났다. 화자이며 주인공인 구두점원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며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트레스의 탈출구로 남의 택배상자를 택했다.

 

 

잘못 들고 온 택배상자를 뜯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p182

 

 

   이 작품의 매력은 도대체 끝이 어떻게 될지 결말을 향한 매순간마다의 긴장감인 듯하다. 김경욱은 다른 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꾸준히 오르는 작가이다. 장편 <동화처럼>에서 실망한 기억이 있어 예리하다는 소설집을 아직 넘겨보지 않았던 터였다. 페이지의 가독력이야 김영하 못지 않았는데 결말이 좀 새롭지 않아서 였을까.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말보다는 신선하지 않은 결말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거장들은 대부분 차라리 새로울 수 없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결말을 맺으라고 했던 것 같다. 독자들은 결말에서 만큼은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난 결말을 택하고 결론짓는 것은 모두 작가의 한계치를 상징하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새로움만을 지향할 수도 없고 또 새롭다 예상하여도 작가의 생각만큼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새로움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어쩌면 조금 덜 소설적이지 않았나, 감히 판단해본다. 그런데 또 난 이런 짜 맞추어진 소설이 늘 즐겁고 짜릿한 독자였다. 기대한 대로 끝나주는 것도 좋더란 말이다. 어떤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나는 어디서 생겼을지도 모를 작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김경욱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4. 최제훈 <미루의 초상화>

 

 

 

   김경욱과는 반대로 이야기의 구성은 퍽이나 흥미로와 좋았는데 너무 소설적이어서 좀 그랬던 작품이다. 최제훈은 어쩐지 이야기를 경영한다는 느낌이 가끔, 든다. 그것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결과적으로 높아 보이는 완성도가 소설의 신비감을 떨어트린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기인의 풍모를 하고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어느 화가의 고백과 그 초상화에게 여자 친구의 그림을 부탁한 대학생의 사연이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지다가 마지막 초상화 그림에서 합쳐지는 구성이다. 화가의 궤변과도 같은 예술 사랑과 인간 사랑의 의미를 읽어가다 보면 예술과 사랑의 합일을 이루었다 생각하는 화가의 일생이 위대해보이기는 커녕 한없이 비루하고 이기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마지막 여자 친구의 초상화에서 화가가 발견한 생의 진리(?)를 똑같이 발견해 내는 주인공의 착각은 왜 화가 나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술 하는 것의 의미를 죽는 날까지 정립하고 그것을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든 못 벌 든 자기예술의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삶는 일은 생존만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생존의 이유일지 모른다. 최제훈은 자신이 글 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작가는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것 같고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늦게 시작한)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는 다름 아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이 소설의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미루의 초상화'는 예술과 사랑, 이상과 현실이 모두 담겨있는 자기중심적인 예술의 총체, 즉 예술가의 인생이 응집 축약된 유기적인 결과물인 듯하다. 예술은 어쩌면 무언가를 죽여서 녹여낸 신비하고 야릇한 생명체 일지 모른다. 비록 생과 사라는 폭력을 녹여낸 것이지만 또 다른 생명을 위무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할 뿐인 것이다. 소설가 역시 어떤 말 안 되는 죽음과 기가 막힌 고통을 빚어낼 지언정 이야기로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려선 안 될 것이다. 최제훈은 그것이 자신에게 소설 쓰는 소설가임을 이해시키는 방편은 아닐까.

 

 

 

5. 조해진 <유리>

 

 

 

   이 작품은 이름이 한유리인 한 대학강사의 유리같은 인생을 위태롭게 조망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유리로 상징되는 상처의 표상을 너무나 강렬하게 묘사한 덕분이지 서사가 묻히는 느낌을 받았다. 즉,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곤란한 심경이다. 남는 것은 상처의 내용이 아니고 상처의 외면, 즉 상처의 형상이 제시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읽는 내내 사방 유리에 찔리고 유리를 밟는 것과 같은 ‘통증의 촉수’를 세심하게 감지할 수 있어서 독서 후 불쾌한 느낌만은 최고로 생생했던 것 같다.

 

 

   K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는 강사 한유리에게는 열 네 살 이전의 기억이 모두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에서 살았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이 유리도시에서 깨달은 삶의 진리는 아마도 ‘자신이 깨지지 않으려면 상대를 깨트려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인 듯하다. 그러나 유리에 짓밟히면서 얻은 교훈도 그녀를 유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진 않은 듯했다. 그녀는 강의 전담 계약직 교수를 채용한다는 학교 공고에 불안을 느끼고 시답지도 않은 한참어린 제자와 도피의 여행을 떠나고 만다. 그녀에게 현실은 여전히 ‘입구도 출구도 없는 밀폐된 유리알 속’인 것이다.

 

 

짓밟히지도, 짓밟지도 않으면서 그 모든 곳들을 통과하려 했으나 돌이켜보니 세상은 늘 상처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유리일 뿐이었다. 상처가 남아 있는 한, 완벽한 망각은 불가능했다.    -p284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 전반을 은밀하게 흐르던 여성의 피해의식이 지나치게 과하게 심층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논리적으로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 한유리의 어린시절 상처가 너무 특수화(?)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유리의 아픔과 주인공의 아픔이 일체되지 않는 괴리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번 읽어보고 싶다. 중간 중간 ‘통증의 촉수’를 자극하는 문장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6. 하성란 <오후, 가로지르다>

 

 

 

   이 작품은 거의 대상을 수상할 뻔(?) 하고도 마지막 서사의 한 자락에 어떤 작가의 고집 때문에 급격하게 서사가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 된 밥에 코 빠트린 격으로 화가 나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심사위원 중에 여자가 뺨을 맞은 이유가 무엇인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분이 있었는데 나 역시 그 이유를 왜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장 짜증이 났다. 무언가 대단한, 아니면 어이없는 이유는 있겠지 하고 끝나는 느낌이 배심의 클리세 처럼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하성란의 작품에서는 독자와의 소통, 이해보다는 자기만의 주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무언지 모르게 이 작품이 그랬다. 작가의 이유야 너무나 분명하게 있겠지만(큐비클은 원인 따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이유가 내게는 아픔이었네... 하듯 이번엔 그렇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80년대 상사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십대 중반의 미스 김, 이제는 갱년기를 앞두고 신입사원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말단 회사원이다. 작가는 신도시와 구도시의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 이미지를 큐비클로 조형화하고 이를 삼면이 칸막이로 막힌 사무실내 구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자신을 알릴 유일한 방법으로 내세운다. 큐비클 속에서 싹트는 동지의식을 면밀히 투시한다. 그 비인간적이면서 별다를 것 없는 조직의 에피소드가 이 소설을 이루는 큐비클의 조각들이다.

 

 

맞습니다. 저는 길을 잃었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p220

 

 

   현실의 큐비클은 너무나 쉽고 너무나 분명하고 단순해서 삶의 길을 잃었다는 역설이다. 이는 바닷가에서 사람이 빠져서 찾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바닷속은 그 컴컴한 물길이 들여다보이지 않기라도 하는데 큐비클은 고개만 들면 훤히 속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초반, 중반의 기대감이 후반부에서 지속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밀착 취재한 듯한 느낌의 하성란식 치밀 묘사는 소설은 결국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꿋꿋하게 알려준다. 올해는 제발, 에이와는 다른 소설을 만나고 싶다. (A도 독자를 배려하는 소설은 아니지 않나......)

 

 

 

7. 함정임 <저녁식사가 끝난 뒤>

 

 

 

   오래된 지인들을 초대해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난 후의 소회를 담담히 적어 내려가는 류의 소설은 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교수나 의미 있는 직책에 오른 여성작가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식사를 준비하며 과거를 회상할 것이고 반드시 사연이 될 만한 누군가가 표면에 등장할 것이고 그와의 인연에 놓인 지인들이 하나둘 나타날 때 화자의 심경변화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불같은 청춘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만한 지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떠드는 자리는 누구를 위한 모임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이며, 어떤 이를 위한 시간일 것인가.

 

 

   내 기억으로 이들은 대부분 이제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인들의 위선과 가식에 실망을 하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났던 것 같다. 인상적이었던 건 화자인 순남씨가 여행지에서의 사진이나 은촛대, 괘종시계, 색소폰 등의 소품과 관련된 자기 사연을 간간히 믹스하였다는 것인데 초반부 무언가 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던 은촛대가 나중에 힘을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하게 사라진 것이 서운했다고 할까. 이야기는 갑자기 나만 몰랐던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겠지만 그렇다고 앞부분에서 페이크인척 하였던 자기 집중의 서사가 결말을 위한 설득을 가지진 못했다는 점에서 좀 뜬금없다는 기분이었다.

 

 

   또 하나 이 소설은 순번 상 마치 나가수 1번 가수의 노래가 7번 가수의 노래를 듣고 나면 대단치 않을 경우 기억에 가물가물한 이치와도 같았다. 무언가 진부하다는 느낌도 서사가 갈피를 못 잡았다는 느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우수상 수상작 중 꼴찌를 주었다. (아...어쩐지 인순이가 꼴지한 느낌은 무엇인가...)

 

 

 

 

 

    아쉬운 게 있다면 지난번까지 우수상 수상작도 (뒤편에)따로 평이 더해졌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김영하에 치중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건 평가식으로 글을 모두 적고 나니 또 대상은 김영하가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등은 일등의 실력 때문이 아니고 일등을 할만한 이유가 있을 뿐...) 나가수 식(자문위원식)으로 말하자면 함정임과 하성란은 주제를 상징화하는 무대의 관록을 엿볼 수 있었고 김경욱과 최제훈은 치밀한 구성으로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고, 조해진은 섬세한 감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묘사의 절정을 보여주었고, 조현은 서사에 본인의 이야기가 녹아든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고, 김숨은 소름끼치는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감동을 선사했다. 모든 작가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마치 심사위원이나 된듯이 우쭐하구나 ㅋ)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분명한 건 내가 그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고 그저 그런 오늘, 어제와 달라질 것 없는 오늘을 보내면서도 새로운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당신들이 피할 수 없는 문학의 ‘큐비클’이고 안 먹을 수 없는 ‘옥수수’이고 매번 기다려지는 ‘국수’이고  입출구 없는 ‘유리’알 속이고 30년 전 ‘왕십리’이고 기다려지는 ‘택배’상자이고 살아있는 ‘초상화’이고 일 년에 한번 있는 ‘만찬’이다. 이상으로 다소 빚진 심정이었던 이상문학상의 리뷰를 마친다. 나의 이상은 언제쯤 날개를 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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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2-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잘 읽었습니다.
전 언제부턴가 더이상 김영하는 읽지 않지만, 이 페이퍼를 보니 김경욱은 끌리는 걸요.
근데 말이죠, 근데 말이죠~
김경욱 얼굴이 윤상 버젼으로 나왔어요.
이 말 들으면 김경욱이 승질 낼까요, 아님 윤상이 승질 낼까요?
옥수수 먹고 싶어요.
목욕 가야 하는데,
목욕 가면서 옥수수 파는데 없나 찾아보려구요~^^

노이에자이트 2012-01-2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의 초창기 화제작 '투견'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왠지 묘한 분위기...개도살하는 장면을 정말 실감나게 묘사했어요.

작가 나이 삼십대 후반이면 인생에 대해 충분히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닐 나이라고 봅니다.작가가 인생을 보는 통찰력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듯해요.

2012-01-3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2-01-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난 딱 김영하만 읽었어.
재밌더만. 허전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영하답다~는 느낌이었어.

니가 매긴 순위에 따라 다음 작품을 한번 읽어볼까?
나도 우수상의 순서가 무엇일까.. 의아해 하다가 말았음. (난 요렇게 포기 잘함)
맨날 의전을 하다보니 순서가 중요하게 생각되기까진 해.

함정임을 인순이에 비유했네. 좋아했던 작가인데^^

그나마 난 요즘 조금 정신이 나는 시기야. 바쁜것 좀 끝났고...
이제서야 2012년을 시작하는 느낌^^
직장녀는 인생의 촛점이 그저 회사라우~ ㅋ


아이리시스 2012-01-3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도 공지영 만큼이나 어색하네요, 저 자리가ㅋㅋㅋ
저는 매번 욕심만 내고 문학상 수상집을 잘 못 읽어요.
사놓고 몇 년 된 것도 있고요. 이거 너무 재밌어요. 우수상 수상작들까지 분석해주시고^^
진짜 한 권 읽은 듯한 느낌이네요.
저는 문체가 좋은 작품이 좋더라고요. 내용까지는 아직 잘 못 보는 것 같아요.

여기도 함정임쌤이 계시네요. 제가 4학년 때 저희 학교로 오셔서 소설이론과 창작을 강의하셨어요.
바로 그 다음해에 졸업을 해서, 제 지도교수님은 강은교 쌤이라 잘은 모르지만요.
그래서 매번 반갑네요. 그런데 몇 번째 우수작인 것 같아요.
 
침묵 입문 - 말 많은 세상에서 말하지 않는 즐거움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말 버리기 연습

 

 

 

   짧고, 쉽고, 분명하고, 유익하고. 한마디로 이 책은 오며 가며 펼쳐들 수 있는 책이었다. 


   류노스케 스님의 책은 <생각 버리기 연습>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을 말할 땐 은근히 기대만큼 별로였다는 뉘앙스의 평을 할 때가 많은데 내겐 의외로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매 순간마다 하고 있는 것에 더 집중하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의 메시지를 거의 잡념을 버리고 오감이 느껴지는 바를 더 생생히 체감해보라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예를 들어 생각에 사로잡혀 밥을 먹으면서도 전혀 밥맛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을 청산 하라는) 그것이 더 인생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충고가 나같이 생각만 끊이지 않는 사람에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말이 쉽지 나조차도 알 수 없게 떠오른 생각을 무슨 수로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잊으려고 하면 더욱 생각나는 헤어진 사람처럼 생각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허나 힘겹게 버리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하면 버려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설파하는 것은 제대로 솔깃한 주장이었다. (가만보면 사람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버려질 수 있는 과정을 말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생각 버리기 연습>의 연장선상에 있다. 생각 버리기가 아니라 말 버리기 연습쯤 될 듯하다. 누구나 생각을 버리고, 화내지 않고, 버리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처음부터 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有이기 때문에 자신처럼 無를 지향할 수 있다 말한다. 하지만 운이 좋아 노력한 대로 無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有는 존재한다 말한다. 생각을 버린다고 말을 아낀다고 생각이 사라지고 말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실용서에 가깝다) 아무튼, 이 책은 <생각 버리기 연습>보다 유연하고 부담이 없다. 큰 기대 없이 카페에 앉아 두어 시간 들추어 볼 수 있는 미덕을 가졌다. (그러므로 제목만큼의 심오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자기농도의 희석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용어는 ‘자기 농도’이다. 와인으로 치자면 바디감이다. 당연히, 묵직한 풀 바디감을 선호해 온 나였다.


‘나 자신’에 연연하며 ‘자기농도’를 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각자 내뱉는 지루한 얘기처럼 인간관계도 별 볼일 없어진다.    -p15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진심으로 자신을 말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성이며 그러한 마음만이 상대에게 잘 전달 될 것이라 믿고는 한다. 거짓된 마음 없이 내 심경을 모두 전한다면 상대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전하여지는 나 자신에 대한 자기농도를 ‘엷게’ 만들어야 ‘맑고 투명하게’ 살면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고 충고한다. 인생을 맛있는 과자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재료를 아주 조금만 넣어도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책의 제목이 되고 있는 침묵은 실상 나에 대한 침묵, 나를 말하는 것에 대한 침묵이다. 나 자신에 대해 조금만 덜 말하고 조금만 더 옅어지라는 것이다. 흠칫흠칫 자꾸 호흡이 멈추었던 것은 아마도 나라는 사람이 나 자신을 말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내 생각을 말하고 전달하는 방법과도 연결되었다.


   남에게 생각을 말할 때, 특히나 글로 전달하려고 할 때 나는 어지간한 밀도이하의 글은 아예 쓰지 않으려 한다. 사유가 헐렁한 것은 무언가 덜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초창기 리뷰 쓸 땐 생각도 충분히 하고 그 생각을 모두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부부싸움을 할 때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내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설명하면 할수록 상대는 더욱 들리지 않는 것 같은 경험...나중에는 아예 같은 시작이 될까봐 설명을 거부하던 시간... 살면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나는 침묵이라는 카드를 써먹으며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보면 말 안하고 견디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겐 조용히 침묵하는 것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이는 모두가 자기 잘난 병에 걸린 사람들의 욕망이요 분노요 어리석음이라, 저자는 타이른다. 자기 색깔이 너무 짙고 강하여 발생하는 피곤함이라는 것이다.


 

비난으로부터의 자유

 

 

   저자는 특히 트집이나 불평, 비판이 실은 자기 만족을 위한 일이므로 일절 삼가라 말한다. 상대의 행동이나 말에 트집을 잡는 것은 속으로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불과하며 상대를 위한답시고 솔직함을 드러내는 일도 자기 농도를 높이는 일에 불과하다고. 모두의 발전을 위해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도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져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정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역시 자의식 과잉이라는 독소 때문이라고. 이어지는 습관적인 사과 또한 순간을 모면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위선일 뿐 자신은 변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라 일갈한다. 논쟁으로 상대를 이기려 하는 것도 상대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천박한 욕망의 일환이라 꼬집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런 당신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뜻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건전한 비판이란 없으며 비판은 애초부터 모두 불건전하다는 식이다.

 

비판이란 자신이 멋지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을 그럴 듯하게 아닌 척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이란 이름을 빌려, ‘나 자신’이 가진 아우라를 드러내려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또 자기 농도가 진해지는 것을 피 할 수 없다. -p76

 


 

   흔히들 우리는 남을 비판할 때 그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라며 혹은 학문적으로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며 아니면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며 자신의 비판이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비판에 상처받고 흥분하는 일을 우스운 일로 여기려는 경향들도 있다. 서로서로 이렇게 비판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 나는 비판받지 않기 위해 완벽한 글을 써보려고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나는 비판의 내용보다 우선 내가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음에 충격을 받고서 며칠을 멍했던 기억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비난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일이라고. 즉 무엇을 하든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부처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예전부터 말해온 것이고, 지금 새삼스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도 비난을 하고, 말을 많이 해도 비난을 하며, 조금만 말해도 비난을 한다. 이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p127

 

무릇 비난에 대해 일일이 화를 내거나 상처를 입는 것은, ‘내가 이만큼 잘하는데 비난 받을 리가 없지’라는 기대와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와 환상도 사실은 삶에 대해 유치하게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p128

 



   아... 도대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만큼 잘하는데 비난 받을 리가 없지’... 왜 이 대목이 목에 가시처럼 커억 걸리는 것일까. 나는 혹시 이렇게 까지 열심히 진심으로 썼는데 누군가 나를 비난하진 않겠지... 내 진심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겠지...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살면서 비난의 면역력을 높이라고 말한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 자신을 보고 막 일어난 감정을 관찰하여 감정이 발화한 지점을 집중해 응시한 후 그것이 나를 관통해 흘러가게 내버려 두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침묵수행법은 일종의 명상법이기도 한데 자기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기분을 명상으로 요리하는 방법을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다. 당장 따라 하기만 하면 집착이 줄어들고 자기 농도가 낮추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차분히 반복해서 읽다보니 가능도 하겠다 싶었다. 


    만약 지금 화가 났다면 화가 일어난 그 지점을 집중해서 응시해 보시라... 그리고 욕망의 더러움, 질투의 유치함, 분노의 어리석음... 욕망의 바보, 질투의 멍청이, 분노의 불구...이렇게 여러번 되뇌여 보시라. 어떤 나보다 형편없는 사람(예를 들면 실력도 꽝이고 인간성도 파이고 게다가 얼굴까지 나보다 아닌 하하하)이 어느 날 갑자기 나보다 잘되어 유명세를 타고선 떼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나는 지금 그 사람이 몹시 부럽구나...나는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한 내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하는구나... 나는 지금 그 사람보다 내가 무엇이 못났는지를 분통터져 하는구나...하면서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투시해보시라. 다른 누가 지적해서가 아닌 내게 일어난 내 감정을 내 스스로가 관찰하며 진단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견뎌낸 다면 흥분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저자는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오는 이 과정이 집착을 버리는 명상의 시간이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쓸데없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초조한 마음으로 나를 말하는 것에 에너지를 덜 쏟게 되고 자연스레 자기 농도가 낮아져 상대가 편안하게 느낀다고 한다.

 

 

   달리 보면 침묵하기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나를 이기는 자세로 여겨진다. 욕망에 휘둘리는 자신을 구속해 자기농도를 흐리게 한 뒤에 이야기도 몸짓도 느리게 한다면 혀로부터 오는 재앙을 막을 수는 있다는 것. 화법으로는 애매하게 부정하는 화법 - 글쎄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런 경우도 있었군요. 어떻게 된 거 였더라. 그래요? - 와 같은 아가씨 화법이 서로간의 상처를 줄일 수 있다는 부분에선 박근혜가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금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린 대부분 침묵해야 할 때 나서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우를 범해왔으니까. 그러나 책이라는 것이 이 책을 읽을 땐 이 책이 모두 진리이고 정답이다. 그것은 리뷰를 작성하는 동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지식들을 내재화하고 새기면 되는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다음 불교에서 말하는 십선계를 적어본다. (세속에서 선행을 쌓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열 가지)

 

 

불망어 (不忘語,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불기어 (不錡語, 현란한 말을 하지 않는다)

불악구 (不惡口, 험담을 하지 않는다)

불양설 (不兩舌, 이간질을 하지 않는다)

불살생 (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

불투도 (不偸盜, 도둑질하지 않는다)

불사음 (不邪淫,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하지 않는다)

불탐욕 (不貪欲, 욕망을 억누른다)

부진에 (不瞋恚, 분노를 억누른다)

불사견 (不邪見, 그릇된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

 

 

   이중에 직접적으로 말과 관련된 것이 네 가지나 된다. 다른 것도 욕망이나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할 수 있고 그릇된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사실상 7할이 말이요, 입이요, 혀이다. 입하나만 잘 다스려도 인생이 평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선 현란한 말이 제일 걸린다. 사전을 찾아보면 ‘현란하다’는 것이 ‘시나 글 따위에 아름다운 수식이 많아서 문체가 화려하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수식이 많다고 모두 화려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수식을 하지 않는다면 화려해질 확률은 줄어든다. 이번 책을 통해 ‘침묵’과 ‘현란’사이를 조심히 왕복해본다. 오가는 여정이 그럴듯 해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지도만큼 쉬워 보이진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늘 그렇듯 다음은 실천인 것이다. 나를 좀 줄이고 수식을 덜어 보자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토록 짧은 리뷰에 성공을 했다... 웃기지만 조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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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1-2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시는 말씀들이 모두 저에게도 상당부분 해당되는 말이라, 읽으면서 마음이 뜨끔뜨끔합니다. 새겨들어야 할 좋은 말이 많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2-01-2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선계라 좀 뜨끔한 말이네요.과연 저대로 살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보물선 2012-01-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트에 <굿바이 카뮈>가 있네?

선물받아 읽고 있는 책인데
도무지 책표지가 너무 맘에 안들어.
초등3학년용 책 같아.
나름 철학책인데 표지가 좀 우아~했으면 ㅋㅋ
간만에 달력종이 찾아서 책한번 싸봐... 우...ㅅ ㅅㅣ...

보물선 2012-01-27 15:30   좋아요 0 | URL
내가 오늘 미투에 이상문학상 표지 이야기 올렸는데!
맘이 통했어~

꽃도둑 2012-01-2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농도를 엷게 만들라고 하셨다고요?...그러다 물처럼 되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인간이 될런지요?...ㅎㅎ
공자께서 말씀하셨지요. "모두가 좋다고 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저는 공자님 말씀에 한표!ㅎㅎ
저자 이 분의 말씀은 다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 서면 자기농도를 엷게 만드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하루에 수십번도 짙어졌다 묽어졌다 하는데....(나만 그런가?)
이론과 실제의 괴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하는데..
그래서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책이 필요한 거 아닌가 싶네요..^^

반딧불이 2012-01-2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이 금이 되기는 커녕 싸움이 되는 일이 많은 저도 뜨끔하는 글이군요. '인생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양념을 조금만 넣어야'한다는 말씀 올해보터 명심하고 살아야겠습니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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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훈과 나 사이

 

 

 

 

   나는 솔직히 이 소설이 전에 없이 지겹고 무겁고 갑갑했다.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대가의 문장과 작품이야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천하의 김건모도 꼴찌를 할 때가 있고 인순이도 탈락은 하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매번 똑같은 밀도로 감동과 위대함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한마디로 전작인 <내 젊은 날의 숲>만은 못했다고 느낀다. (물론 전작 역시 그 전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완벽함 가운데 트집을 잡고 실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리뷰 같은 경우 더더욱 유려한 논리로 신랄하게 작품을 비판하면 좋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세배 이상 똑똑한 사람이라 여긴다는 통계결과치도 있다. 나는 의무가 아닌 경우 책이 지겨웠다면 사실 리뷰를 안 쓴다. (안쓰고 만다) 될 수 있으면 이 책이 별로라는 글도 선호하진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내 지겨움의 깊이와 무게를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겨울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더 솔직히 다음의 계산도 해 볼 만큼 나는 그가 지겨웠다고 말하는 게 죄송스러울 지경이다.(그렇다고 거짓말 할수는 없지 않은가) 

 

 

   1. 나는 내 돈을 주고 예판을 구입했다 - 공짜로 생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한 독서의지 반영.

   2. 리뷰작성의 의무가 없다 - 시간에 맞춰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글을 방지할 수 있음.

   3. 지금 이 책에 관한 어떠한 리뷰대회도 없다(알라딘에서는) - 문장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글 즉, 대회 참가를 위한
      작위적 구성이 필요치 않음.

   4. 나 또한 이 글로 어떠한 평가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 평가항목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됨.

   5.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리뷰를 정성스레 써 놓았다 - (초기가 아니므로) 내 비판이 구매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
     (읽어볼 만한 사람은 거의 읽어보았다고 판단)

 

 

 

   즉, 이 책의 장단점들은 이미 많이 노출된 상태이기에 나는 부담 없이 자유롭고 싶다. 모처럼 맞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비판을 위한 구실만은 아니다. 정말로 내 지겨움의 근원을 찬찬히 따져 물어 정리해 보고 싶은 연유이다. 김훈의 반복적인 세계관도 좋고 끈질기게 설파하는 동어반복의 논리도 좋고 완벽한 문장에 갇혀버린 한계치의 절정도 좋다. 나는 이 리뷰에서 반드시, 김훈이 지겨운 이유를 말할 것이다.

 

 

 

   먼저, 다음은 내가 생각한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길 위에는 늘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고 먼 길을 달려 갈 때 몸과 길이 합쳐져서 앞으로 나아가듯 흐르는 강물은 언제나 흘러서 합쳐지고 물과 하늘은 시야의 끝에서 닿게 되며 저 바다에서는 말이 생겨나지 않기에 언어가 세상을 지배하지 아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언은 누가 지어내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듯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며 삶이 무상한 만큼 똑같이 죽음도 무상하지만 사는 동안 붙어서 번식하는 일은 ‘늘 그러한 일’이어서 그 누구든 피할 수가 없다.

 

 

 

   이제 김훈의 어법으로 말해보면, 김훈과 나 사이에 흘러가는 저 언어들은 내가 한번 읽고 이해했다고 내가 주워 담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김훈의 언어를 찾아서 내 삶속으로 주워 담기에 나는 그의 생각을 온전하게 알 수 없었다. 김훈의 글과 내 마음이 같아서 그의 글이 내 맘으로 흘러와 그 마음으로 세상을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더 이상 세상은 새롭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어둠속에서, 나의 생각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그와 합쳐지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했다. (정말 멋진 말이지만 한마디로 나와는 맞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지)

 

 

 

 

 

2. 김훈과 풍경 사이

 

 

 

 

   책을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가고 가고 또 가는’ 한 마리 생명체의 고요한 날개 짓은 아니었다. 새와 배와 물고기와 말의 형상이 하나의 생명체로 모아진 ‘가고가리’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만 가야하는 지독한 운명 같은 것, 고달프고 서글프지만 끝까지 살아가야하는 지겨움의 기록에 가까웠다. 누구나 한번 주어진 삶을 단념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살기 위해 그토록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간다 해도 사는 것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터인데 왜 그들은 모두 살기 위해, 아니 죽기 위해 삶의 의미에 매달리는 것일까. 모르긴 해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꼭 써야 했을지는 몰라도 쓰고 싶어 쓰고만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틀림없이 작가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하려는 방법 따윈 자신의 일이 아니라 믿었을 것이다. 재미를 말하고자 함도 그것을 느끼게 함도 아닌 이것은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 하는 범박한 우리네 인간사 운명과도 같은데 그 이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것만이 작가의 깨달음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산문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의 지겨움을 준엄하게 설파한 적이 있으며 <내 젊은 날의 숲>같은 소설에서 저절로 피어나 제 색을 이루며 완성되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여러 번 아니 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바라보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고 그 말하여진다고 다 알 수 없는 ‘본래 그러한 것’들을 전달하려 핍진하게 애를 쓰는 고집쟁이 글쟁이였다. <내 젊은 날의 숲>이 사람과 사람, 사람의 몸과 꽃과 나무와 숲, 자연이 서로 엉기어드는 풍경을 그려 보였다면 이 소설은 꽃이 물고기로 나무와 숲이 섬과 바다로 치환된 것일 뿐 ‘흑산’이라는 절망의 시공간 그 안쪽 풍경을 끈질기게 뒤집어 보고픈 지루한 여정의 반복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조선조 천주교 박해를 다루는 역사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자기 내면의 고독한 성찰이 주를 이루는 산문이 더 어울려 보인다. 김훈은 어떠한 시대, 어느 사건, 어떤 인물을 소재로 삼아도 결국 그 전체 풍경의 내피를 투사하여 말로 이해시킬 수 없지만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언어로 자기 한계를 내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훈에겐 자기 한계의 최대치를 최선을 다해 최고로 표현하는 것만이 그가 소설이라는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 초로의 봄날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 물가를 달리다가 새싹이 돋아나는 산들이 물에 비치자 이렇게 말했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이 별 볼일 없는 생애는 어찌 그리도 고단했던가. 땅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구나.’      - <밥벌이의 지겨움>, 156p

 

 

   자전거가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얼마나 고독하고 고단한 길인가. 그는 계속하여 다음의 풍경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어떤 그림이든 그 풍경을 먼저 본 그의 기쁨과 슬픔을 나중에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먼저 깨달은 풍경이 비록 내 걸어감에 일치하지 않더라도 대책없이 걸어갈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늘 그 혼자 걸어감이 지겨웠노라 고백하는 것이다.


 

 

 

3. 김훈과 흑산 사이

 

 

 

 

   그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은 어디인 것인가. 매번 참으로 멀고 깊어 가닿을 수 없어 보이지만 그는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미처 가보지 않았거나 가닿을 수 있는 길도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흑산’은 도대체 어디이고 언제인 것인가. ‘흑산’은 시간인가 공간인가 둘 다인가. ‘흑산’은 흑산도가 아니니 섬이 아니고 산인 것인가. ‘흑산’은 검은 바다를 의미한다는데 그렇다면 산이 아닌 바다인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이 말하는 ‘흑산’은 산도 섬도 바다도 아닌 육지와 섬 사이 끝없는 바다 밑에 숨겨진 캄캄한 길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가 볼 수도 없었지만 영영 모르고 지나갈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아마 이 마을과 저 마을 사이의 길일 수도 있고 여기 사람과 저기 사람과의 보이지 않는 인연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김훈과 작품사이의 길일수도 혹은 작품과 독자사이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약전이 흑산에 끌려와서 흑산에 머물고 흑산에 주저앉듯이,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아니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은 흔히 있을 것이었다. -p280

 

 

   흑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아니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 길은 희망이나 전망이 없이도 살아야 하는 우리네 삶의 길이요, 그래서 믿기 힘든 현실의 길이다. 김훈에게 있어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흥정과 타협의 산물을 뜻한다. 이는 곧 예술이 더럽고 폭력적이어도 하면서 견디고 견디면서 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김훈에게 예술은, 김훈이 할 수 있는 예술은 누가 뭐래도 말이라는 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절대로 칼이 될 수가 없고 칼이 되어서도 안 된다. 칼로서 기능해야 할 때만 제 역할을 하면 된다. 김훈은 ‘말이 칼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버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훈에게 말은 더없이 하찮고 언어는 점점 쓸 수 있는 것이 줄어들어 속수무책지만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칼이 될 수 없기에 그 비극을 견디고 계속 쓰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흑산은 김훈이 걸어온 길이면서 앞으로 지겹도록 가고 또 가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을 가보았다고 갈 수 있으니 가야한다고 말하는 일이 어찌 고통스럽지 아니할 것이며 어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사람이란 무릇, 힘겨우면 더 빨리 지겨울수 있는 통속적 존재가 아니던가.

 

 

 

 

4. 김훈과 죄인 사이

 

 

 

 

   그래서인지 정약전은 시대와 사명과 업보를 바꾼 김훈의 대리인에 불과했다고, 감히 판단한다. 사학죄인 사형제 중 가장 현실적인 사람은 정약전이었다. 나는 정약전의 사고와 상념들 속에서 현실이라는 절망과 비극에 타협하며 세상을 긍정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 작가상을 엿보았다. 정약전은 가장 맏형인 정약현과 함께 동생 정약종과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설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참수 당함으로써 정약전과 정약용을 구해준 것은 동생 정약종이었다. 정약종의 죽음에 기대어 목숨을 건진 건 정약전과 정약용이 마찬가지였지만 황사영을 고발함으로써 완전배교한 정약용에 비해 정약전은 그 행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어중간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종교를 택한 것도 형제를 택한 것도 그렇다고 자신만 택한 것도 아닌 지극히 수동적인 처세였다.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순교를 택한 것도 아닌 정약전은 훗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그는 스스로 배교가 아니라 기교棄敎를 택한 현실에 긍정하며 자신을 흑산과 일체시키는 합리화의 길을 걸어간다. 이 모습은 바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던 (말할 수 없지만 쓸 수밖에 없는)작가의 비극적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작가들은 살거나 죽거나 외에 쓰거나가 하나 더 있다고 여긴다. 살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에 쓴다고 믿는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처음 바다를 바라볼 때 ‘인간이나 세상의 환란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인’ 바다라 생각했지만 서서히 ‘이 막막한 바다일지언정 여기서 끝나고 또 여기서 시작’이라 믿기 시작한다. 마침내 순매와 신접살림을 차리고 흑산에서 ‘집을 지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떠날 것이라 믿었던 마을에 서당을 짓고 사람들에게 하늘의 법치과 인간의 본성을 글로써 가르친다. 형틀에 묶여 매를 맞으면서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살아보니 캄캄한 바닷길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만은 결코 캄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런 작가의 말과 글에 대한 의지는 정약전뿐만이 아니고 열여섯 나이에 급제한 조카사위 황사영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황사영은 단지 김훈의 대리인으로서의 정약전의 한세대 어린 인물을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다지 참혹하거나 슬프지 않았고 외려 한 세대가 끝이 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황사영이 죽었다고 말과 글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그것은 곧 작가의 강력한 고집이자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그들 주인공은 하나같이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를 선호하며 모두 드러나 있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발견함에 기뻐한다. 세상의 원리는 ‘인간의 언어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언어에 의한 증명이 필요 없이 사람의 생각으로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정약전은 형제들과 ‘우주의 근본과 몸과 마음이 살고 또 죽는 이치를 말하며 놀라워 했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말과 글로 엮인 생각의 구조, 말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개념들에 집착하고 그 이룰 수 없는 번민들이 언젠가는 저 흐르는 강물과 합쳐져 새로운 의미로 탄생하길 기대했다. 그것은 말과 글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죄인의 본심은 아니었을까. 말과 글을 버리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자는 다시 말과 글로써 그 세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언어로 증명할 수 없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갈 수 있고 저절로 알 수 있다는 삶의 이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혹 죄인을 심판하기 보다 스스로 죄인이 되어야 삶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5. 김훈과 희망 사이

 

 

 

   정약전은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흑산의 ‘검을 흑黑 자가 단 한 개의 무서운 글자로 이 세상을 격절시키고 있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다. 이 무서움은 비단 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에 대한 무서움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약전은 그 무서움의 안쪽을 들여다 보았고 희미하게나마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흔적’을 발견한다. 정약전이 발견한 흔적은 ‘고향 마재 마을 개울의 게와 흑산 개울의 민물 게’의 모양새가 같다는 기억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증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기억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글이다.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p337

 

 

 

   흑산이라는 캄캄한 바닷길은 바닷 속에 사는 물고기들의 언어에 다다르길 노력하자 흐리고 깊지만 이곳을 의미하는 ‘자산’으로 변모한다. 똑같이 검은 바다였지만 언어로서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흑산이 자산이 된 이유는 검은 바다의 색깔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검은 바닷 속에서 발견한 흐릿한 무엇 때문이다. 저 바다 너머 저 산 너머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감지되는 희망의 빛인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저곳이 아닌 이곳이기에 그들이 아닌 우리들이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산은 당신과 내가 지금 여기 사는 우리들의 섬인 것이다. 그것은 정약전이 흑산에서 지을 수 있었다는 ‘집’이기도 하며 흑산에서 우리가 발견한 김훈이 걸어간 길 위의 ‘집’이기도 할 것이다.

 

 

 

   정약전은 흑산이 아닌 자산 바다의 ‘물고기들의 종류와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적었고 물고기가 글을 끌고 나가니 글이 물고기와 나란히 가는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물고기들이 푸른 등위에 제 몸으로 파도를 헤쳐 나간 무늬를 새기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글을 쓰게 한 것은 물고기이고 사람을 이끄는 것은 글이었다. 사람인 우리는 흑산이라는 길에서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친다. 김훈이 말하는 희망은 실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글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결국 글로써 희망을 안을 수 밖에 없었지 않을까.


 

 

 

6. 김훈과 문장사이

 

 

 

 

   허나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요망한 언동으로 국본을 부수는 삿된 미신의 무리’로 등장한 천주교 신도들에 있었다. 그들은 어쩐 일인지 변별력을 갖추지 못했고 개별적인 캐릭터로 기억되지 않았다. 작가는 정약전과 황사영 사이에 갖가지 기막힌 사연을 가진 노비와 천민의 이야기를 심어 놓았지만 그들 모두는 김훈식 문장의 지배구조 하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말(馬)의 형상을 가진 마부 마노리와 정약현의 노비에서 면천된 김개동, 황사영에게 딸려갔다가 면천된 육손이, 대궐 내시한테 천주교를 배운 길갈녀, 천주교인들의 거점지를 조성한 강사녀, 포도청의 염탐꾼 노릇을 한 박차돌, 남대문 옹기장수 최노인, 오동희, 아리...등등 인상 깊은 조연이 하나 없었던 것은 곧 서사의 빈약한 점으로 연결지어 졌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배, 섬과 바람과 물고기가 삶의 바탕을 이루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순매 정도만 뇌리에 남았고 그들은 그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교 교리 속에 등장하는 이웃의 무리로만 기억될 듯하다. 순환적 문체로 서사를 통제하는 소설이 가지는 치명적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김훈은 자신도 자기 문장의 단점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문장이 ‘내면에서 올라오는 필연성’이기 때문에 오류를 알고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 바 있다. 작년 연말에 막을 내린 드라마 <천일의 약속>의 김수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일의 약속을 보고 싶어도 말이 너무 거슬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는 어느 시청자의 목소리에 김수현은 ‘천일의 약속’을 ‘외면’하라고 응수하며 “나한테 말투 고치라는 건 가수한테 딴 목소리로 노래하란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내 대사가 바로 김수현이니까요” 라고 답했다. 신기하게도 김수현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김수현 한 사람이 속사포 같은 대사를 던지는 느낌이 드는데 김훈도 마찬가지다. 정약전이나 김개동이나 말하는 어투는 불행히도 같게 느껴진다. 흔히들 그의 문체를 ‘칼로 조각한 것 같다’는 표현을 하지만 이번엔 쳇바퀴 돌 듯 그 칼로 조각한 모양이 거기서 거기였다. 아무리 완벽하고 아름다워도 같은 모양의 그림은, 이렇게 지겨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 김훈의 어법은 유배죄인의 언어로서 관조와 고통의 문체를 완성했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완성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자기 고민을 치열하게 펼치고 해결하는 시간으로서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다만 바다와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상념 대 그 바다가 일으키는 파도(매)를 온몸으로 때려 맞는 육신의 아픔을 대치시킨 화법은 정신과 육체를 대변하는 말과 글의 진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끈질긴 공력의 성과가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돌아가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서 복받쳤다. -130p

 

 

 

 

   김훈 어법의 한 유형인 문장을 또박또박 받아 적는다. 현재 유배생활 비슷하게 은둔을 자처하는 죄인 같은 나로선 이 말이 가장 복받치게 들려온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간다하여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그 마음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흑산이 가르쳐준 삶의 지독한 진리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곳 흑산에서도 능히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정약전은 아마 나처럼 웃으면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훈을 견디는 것은 유배지 흑산의 삶을 견디는 것이고 그것은 삶이라는 동일한 지겨움을 견디는 일이다. 지겨움에 면천되는 일은, 글쎄 살아있는 한 가능할 것 같진 않다. 김훈과 나 사이 이 캄캄한 흑산에 의하면.

 

 

 

 

 

 

 

 

 

덧붙임)

 

정말 짧게 쓰고 싶었고 어느 정도 짧게 썼는 줄 알았는데,
다 쓰고 나서 옮겨보니 또 길다...

다섯장 안으로 쓰는 걸 목표로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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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별점 세 개! 왠지 반가운...(응?)
저는 재회의 작품인데도, 글에 공감이 가네요.

gimssim 2012-01-18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흑산>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전에 나온 책도 읽지 않았네요.
부지런히 찾아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마음이 좀 멀어진 이유가 님의 글을 읽다보니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던 5매짜리 칼럼은 '칼'이었었는데...
아무래도 전 좀 더 묵혀두어야할까 봅니다.

gimssim 2012-01-19 21:53   좋아요 1 | URL
아니요, 제목이 '칼'이 아니고 시시칼럼이라 군더더기 없이 시작하고 내용이 대단히 압축적이었다는 뜻입니다.

cyrus 2012-01-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학생 때 <칼의 노래>를 통해 김훈의 글을 처음 만났는데요, 그 때는 정신적으로 어려서 그랬는지
읽어나가는데 애먹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이 책이 노 대통령 필독서라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랐어요. 그리고 김훈이라는 작가의 이력을 모르고 있었는 것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을 줬고요. 그러다가 <자전거 여행>을 읽었는데 에세이는 잘 읽혀지더군요.
여행 에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풍경을 묘사한 문장들이 좋았어요. 군 입대 하기 전에
김훈의 <개>를 구입해서 한 번도 읽지 않은게 후회되네요.
휴가로 부대로 복귀하게 되면 꼭 책 한 권씩 가져오도록 규정이 있었는데 그 때는 책 한 권 사기가
돈이 아까워서 일부러 그 책 한 권을 부대에 기부하고 말았어요. ^^;;
한 번이라도 읽었으면 괜찮았는데 막상 사 놓고 안 읽은 책을 내놓은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2012-01-18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1-19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래한글 원고지쓰기로 해 보셔요 ^^;;;
그러면 그야말로 짧게 쓸 수 있으리라 믿어요~

stella.K 2012-01-19 12:02   좋아요 1 | URL
헉, 그런 기능이 어디 있나요?
난 못 찾겠던데...ㅠ

saint236 2012-01-19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책이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항상 고민만하다가 그냥 오곤 하지요.

stella.K 2012-01-19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젊은 날의 숲은 저도 좀 실망했어요.
이작품 처음 나왔을 때 별로란 말있던데
어느새 별 네개 이상씩 단 리뷰들이 쏟아져서
역시 작가의 명성을 무시 못하겠나 보다 싶기도 하더라구요.
그것과 상관없이 그래도 숲 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데...
저는 김훈이 순교를 어떻게 다뤄놨을지가 궁금해요.
이게 맨 정신 가지고 못할 짓인데 말입니다.
순교도 그렇고, 희생도 그렇고.
갈수록 개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저는 이게 참 낮설면서도 신기할 지경입니다.ㅋ
 
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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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은 안 해도 된다

 

 

 

   나는 농담 잘하는 사람은 부럽지만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농담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농담의 대상이 된 상대, 혹은 사건 등이 기분 나쁘지 않게 같이 자리한 모두가 유쾌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류의 사람 중엔 뼈있는 농담을 꼭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미 상대가 기분 나빠할 줄 알기에 농담의 형식을 빌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는 경우. 혹은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던져놓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비로소 농담으로 치부하며 얼버무리는 상황. 뼈 있는 말을 해 놓고 농담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거나 웃자고 한 이야기니 기분나빠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모두 진담의 위선으로 농담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해서이다. 


   나는 이미 말하여 지는 순간 누군가가 기분이 상했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그건 확실히 농담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 가깝다. 농담은 먹히지 않을 경우 상대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좋아 제공자에겐 어느 정도 본전인 방법이다. 농담이었다 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기분 나쁜 농담은 전달되지 않은 그 어떤 하찮은 진심만 못하다. 웃음이 사라지면 불쾌감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농담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공유되는 것이지 미리 계획하거나 나중에 포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담이 농담을 넘어서 진담 이상의 실력을 행사하게 되는 상황은 왜 발생할까. 문제는 늘 농담을 한 쪽 보다 농담을 들은 쪽의 해석의 문제인데 이 해석의 기준은 사람과 관계마다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농담이라고 모두 웃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농담의 진정성은 곧 가려진 숨은 뜻의 해독에 있기 때문이다. 농담의 진의, 그러니까 모든 농담은 진짜 뜻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농담은 가짜일 수 있는 것이다. 칭찬도 비난도 자랑도 흉도 모두. 


   이쯤이면 이 정도일 것이라는 상호 신뢰가 없이 이루어지는 무차별 농담은 혹시 사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편은 아닐까. 그런데 농담에의 공감이 상호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배경은 결국 농담의 내용이 뼈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농담을 안 해도 되는 것은 농담을 안 하기 때문이다. 결국 농담은 어느 정도 기분나빠할 소지를 반쯤 내포한 성질을 지니고 드러나는 개인 및 사회의 기획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분나빠해야 할 것이라면 굳이 농담을 하지 말고 그냥 진담으로 말하시오, 뭐 이런 방어 자세를 가진 사람인 듯하다. 이 진지함이 나도 지겨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 중에 농담 많이 하는 사람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나는 농담이 필요했다면 어쩌면 진담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글의 행간을 읽듯이 농담에서의 숨은 뜻을 읽는 수고가 귀찮은 사람이다. (참 피곤한 사람 ㅠ)

 

 

 

그의 농담만 소설이다

 

 

 

   그래서 일까.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희극이라고 써놓고 비극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는 것만 같아 한없이 허탈하고 쓸쓸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인간이 오늘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바로 내일, 아니 오늘 저녁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비극은 사실 대단히 웃기는 일에 속한다. (나는 최진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농담 하지마,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우리가 늘 죽어왔고 서로서로 죽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지독한 우리네 세상은 농담과도 같다고, 그 농담이라는 세상에 속한 우리네 인생은 모두 농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이토록 유쾌하지 않은 뼈 아픈 농담은 안 듣고 안 보느니 만 못한 슬픔이 된다. 소설의 ‘배경 전체를 하나로 통일 시키며 모든 곳에 스며 있는 한기’가 그 슬픔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기분이 정말로 나빠지는 운명 같은 농담인 것이다. 어떤 진담도 견줄수 없는 이것이 왜 농담이어야 하는가. 왜, 농담은 우리를 울게 하는가.

 

 

   농담으로 포장된 진담의 알맹이를 가볍게 툭툭 건네 온 우리 소설가 성석제는 인간은 ‘농담’하는 존재이고 우리 삶은 ‘소풍’과 같은 것이며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소설’이라 말했다. 밀란 쿤데라는 젊음은 실수이고 분노는 지옥이며 시간은 화해이고 농담은 운명이라 말한다. 그것만이 진담이라 주장한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뜻밖에도 내 지난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소설이 왜 나를 빠져들게 했을까, 도대체 좋은 소설이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마치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의 인생도 농담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의 꼬리 끝에 하나로 모아진 결론은 내 잘못을 인정하고 이제 그만 용서하자, 이런 현문우답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소설이 각자 주인공의 절실한 입장을 목격하면서 내 아픔과 실수를 간간히 엿볼 수 있는 무대라면 독자는 바로 자기 잘못과 그로인한 상처를 숨김없이 발견하는 동안 비로소 세상과 자신에 대한 용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세상의 위대한 소설은 이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운 좋은 독자는 무대 앞에서 나처럼 작가의 설득에 기꺼이 머리를 조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한 농담이었든 간에 그것은 그때 그들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속한 세상으로 귀환하여 저마다 농담보다 지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여기 사람들을 격렬하게 두드린다. 원래 모든 소설은 농담이었고 모든 인생은 농담이었는데 우리가 우리 이름표에 미인이나 추남이라 쓰지 않고 남과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같아지기 때문인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이 아닌 동명의 장르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이 그냥 농담인 이유는 다른 종류의 농담 아닌 소설을 대적하는 처사인 것이다. 일반명사가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체의 절대성에서 기인한다. 이 소설은 농담이다, 고로 다른 소설은 농담이 될 수 없다. 아니 그의 농담만이 소설이다. 이는 다른 소설에 대한 실례이고 무례이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유일하게 이해 가능한 독법인 것이다.

 

 

 

가벼움은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이다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농담으로 상징되는 가벼움에 대한 무게이다. 이 가벼움은 그 어떤 삶의 무게를 인지하는 사람도 깃털만큼 가벼워 질수 있는 無에 대한 가능성이다. 부재의 실존을 작가는 몹시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부여잡고 있던 소설 속 빈번한 ‘가벼움’을 무어라 변명했을까. 소설가의 산문에 꽂혀 빌려온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에 이런 힌트가 있다.

 

 

 

<농담> : “나는 이 먼지 날리는 포장도로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묵직한 가벼움을 느꼈다.”

<생의 다른 곳에> : “야로밀은 간혹 무시무시한 꿈을 꾸곤 했다. 그는 찻잔이나 숟가락, 펜같은 아주 가벼운 물건을 들어 올려야만 하는데 들어 올리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면 그 물건들이 가벼운 만큼 자신의 무력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자신의 가벼움에 짓눌리는 것이었다.”

<이별의 왈츠> :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비극적으로 살았고 결국 자신의 행위의 무게에 눌리고 말았다. 야콥은 자신의 행위가 너무도 가벼워 그것이 자기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무게가 없다는 것에 놀란다. 그래서 그는 이 가벼움이 그 러시아 주인공의 신경질적 감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서운 것이 아닌가를 자문해 본다.”

<웃음과 망각의 책> : “배 속의 이 텅 빈 주머니,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다. 하나의 극기 언제라도 다른 극으로 바뀔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는 가벼움은 가벼움의 무시무시한 무거움이 되었고 타미나는 이제 자기가 이 가벼움을 한순간도 더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책의 번역본들을 다시 읽으면서 비로소 이러한 반복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는 소설가 들이 쓰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주제(최초의 소설)에 대한 변용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 p176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008, 민음사

 

 

 

   작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을 이미 <농담>에서 발견했고 그 주제를 다음 작품에 계속하여 주장했다고 고백한다. 며칠 전 김훈의 <흑산>을 읽다가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터였다. 어떤 역사, 어떤 혼란을 그리더라도 결국 자연과의 조화로 귀결되는 그 하나의 실마리, 즉 작가의 작가된 본성을 관통하는 질문의 뿌리는 매 한가지다, 라는 깨달음. 밀란 쿤데라에게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웠던 깨달음은 우리 ‘삶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묵직한 가벼움’ 이 아니었을까. 새털 같이 가벼운 물건 하나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무력감, 그 가벼움에 대한 막중한 절망감, 쉽게 지나쳐 버린 가벼운 행동에 대한 자기 두려움,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기실 텅텅 비어만 가는 인생 주머니 속에 존재하는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자 그 ‘가벼움의 무시무시한 무거움’이었던 것이다. 없어서 더욱 분명하고 가벼워서 사무치게 무거운 건 우리가 살기 때문에 죽어지는 삶의 근원적인 슬픔이다. 나는 <농담>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무게가 똑같이 가벼워 사라질 만큼 희미했던 적이 모두 있었기 때문에 누가 더라 할 거 없이 공평하게 무거운 인생이었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작가가 수사한 이 다양한 삶의 무게들이 신기하게도 나와 똑같은 부피와 질량으로 되새겨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것은 마치 농담같이 짜릿하고 아슬아슬하다. 전율, 충격, 해방, 자유, 그렇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 다음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을 목격한다.

 

 

 

절대음감은 소설의 기술이다

 

 

 

   또 하나 이 소설을 읽어가는 재미는 은근히 감지되는 음악적 리듬감이다. 작가 스스로 스물 다섯 살까지만 하더라도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고 악기를 다루며 음악적 창작활동에 매진했다고 말한다. 소설의 건축술이라 할 수 있는 분할구조와 서술유형이 다분 음악적 구성을 따르고 있고 인물의 비율이 수학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은 루드비크, 야로슬라프, 코스트카, 헬레나, 이렇게 네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 되죠. 루드비크의 독백은 책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독백들은 모두 합해야 전체의 3분의 1- 야로슬라프 6분의 1, 코스트카 9분의 1, 헬레나 18분의 1- 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러한 수학적 구성을 통해 , 제가 ‘인물의 조명’이라 부르는 것이 결정됩니다. 루드비크는 가장 밝은 곳에 있으면서 안으로부터(자신의 독백에 의해) 조명받기도 하고 밖으로부터(다른 사람의 독백은 모두 그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이니까요) 조명받기도 하지요. 야로슬라프가 책 전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독백으로 그려 내는 자화상은 루드비크의 독백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수정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각각의 인물은 각기 다른 밝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명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인 루치에는 자신의 독백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는 루드비크와 코스트카의 독백을 통해 오직 외부로부터만 조명됩니다. 내적 조명이 없는 까닭에 그녀는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유리창 저편에 있어서 사람들이 건드릴 수가 없는 거죠.   -p128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한 번 더 소설과 음악을 비교해도 괜찮겠죠. 한 부는 박자예요. 각 장은 하나의 소절이고요. 이 소절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또는 아주 불규칙한 길이를 갖지요. 이것은 우리를 템포의 문제로 이끌어 갑니다. 제 소설들의 각 부분은 모데라토, 프레스토, 아다지오등과 같은 음악적 지시를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p129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008, 민음사

 

 

 

   하지만 이와 같은 수학적 구조는 작가가 미리 계산하여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어느 체코의 한 비평가가 알려준 공식이라 말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것은 늘 비평가의 몫이다) 템포의 변화는 곧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6부에 다소 이질적인 인물인 코스트카라는 변형된 마디가 출현하는데 이는 새로운 주제를 위해 섬세하게 기술된 의도된 장치라는 것이다. 작가는 음악을 작곡하듯 악기를 연주하듯 각 악장을 자기만의 음표로 빼곡히 채우는 사람이었다. 각장의 분량과 문장이 밀고 가는 속도가 전체 악곡의 균형을 위해 연출되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 한 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나는 여간해선 재미나면서도 그것이 재미로만 끝나지 않고 끝없는 사유를 유도하는 소설을 만나지 못했었는데 지난 주말동안 나는 온전히 이 소설에 빠져 있었고 다시 또 이런 소설을 만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야 했다.

 

   은희경 작가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는 소설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를 느꼈다고 했다. 나는 그 한마디 때문에 <정체성>을 집어 들었지만 작년 이맘때쯤인가 책을 덮으면서 큰 감명을 느끼지 못했었다. 어찌 된 것인지 잘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작가가 말하는 방식에 하나도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밀란 쿤데라의 전집이 새롭게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처녀작인 <농담>을 먼저 읽기로 한 생각은 기특하게도 적절했던 것 같다. 쿤데라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선 <농담>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좋은 소설의 요건과 나지막한 비밀, 그리고 삶의 진리까지 더불어 기쁘기 그지 없는 것들을 한아름 수확해 간다. 내게 이런 고마운 소설이 의미하는 것들은 요즘의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위로이다. 나는 나를 견디고 나를 이기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나를 가르치고 나를 지적하기 위해 소설을 덮는다. 소설은 내게 대답 없는 경쟁자이고 칭찬 없는 선생님이다. 이런 완벽한 소설은 편곡이 필요치 않으며 편곡을 할 수도 없다. 단 하나의 원곡으로서만 존재하는 절대음인 것이다.

 

 

나는 당신의 쓸만한 농담이고 싶다

 

 

 

   소설의 주인공인 루드비크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일 뿐이었고’ 그저 당시 기분 때문에 그랬던 것에 불과한 몇 마디의 농담으로 인해 당과 대학에서 축출되며 당시 체제의 불구대천의 연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바보같은 농담을 즐기는 성향이었지만 마을 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고 어엿한 대학생 신분이었던 루드비크는 졸지에 군대생활, 수감생활, 탄광생활을 차례로 겪게 된다. 청춘을 증오와 분노로 보내고 난후 고향에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며칠 후 고향을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일어난 농담 같은 에피소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고향에 돌아와 그 며칠을 보내면서 돌아본 과거에 의미없던 첫사랑과 친구들의 배신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치욕과 고통의 세월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누구에게나 청춘이 참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작가는 시기적으로 체코의 공산화가 이루어진 1948년 혁명의 시기 이후 사람들이 보여준 ‘위대한 집단적 신념의 시대’를 종교인 코스트카를 빌어 냉철하게 비판한다. ‘종교가 주는 것과 아주 유사한 느낌들’에 사로잡혀 ‘보다 높은 것, 보다 초개인적인 어떤 것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 이익, 사적인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일상과 사고, 의식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읊조린다. 복수와 증오, 분노에 사로잡힌 루드비크가 듣지 못하는 형식으로 그를 충고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루드비크는 마치 그 진심어린 작가의 충고에 화답하듯 자신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전조나 분위기 이탈로 보여지는 코스트카의 대목은 분명 작가를 대리하는 역할로 보여진다. 종교인이라는 이념에 자유로와야 할 지식인을 앞세워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복수를 열망하지요. 당신은 예전에 당신을 해친 사람들과 오늘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러고는 복수하는 거예요. 그래요, 당신은 복수하고 있어요. 당신은 사람들을 도와주고는 있어도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느껴져요.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증오는 또다시 증오를 낳고 복수의 복수를 계속 불러올 뿐 대체 무엇을 가져다 주나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지옥이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334p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파도가 나를 온통 집어삼켰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내 나이에 대한 분노였고, 자기 밖에 놓은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너무도 커다란 수수께께인 그런 나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자기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 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도 같은 열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  -344p

 

 

 

   나는 코스트카의 충고와 루드빅의 독백을 몇 번이나 읽었다. 인간은 자기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를 통해 상쇄한다는 그의 논리가 나를 집요하게 굴복시키려 들었다. 그 증오라는 것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결국 한 개인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라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개인에 분노를 투사하는 것이 우리이고 나라는 사실에 분노했음이다. 작가는 누구라도 단 한번이지만 치명적으로 저질러진 인생의 실수가 ‘괴물처럼 증식해 가는 그 고약한 농담’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실수는 절대 철회할 수가 없으며 ‘너무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한다고 설파한다. 그리하여 그 농담 속에 포함된 자신과 그 불변의 농담자체는 어떻게든 다시 원점으로 무화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다만 실수는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잊혀질 뿐이라는 통찰이 이리도 벅찬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의 영혼의 치유가 되는 장치로 음악을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계처럼 의미 없이 반복되어온 공산당을 선동, 선전하기 위한 정치음악이 아니라 그 옛날 친구들끼리 순수 음악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민속예술로서의 음악으로 귀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다분히 목가적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오래된 친구와 화해했다고 믿는다면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말한다. 작가는 끝까지 농담으로 여정을 마무리 한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이다 말하는 것 같았다. 음악으로의 귀결 직전에 펼쳐지는 후반부의 깨달음의 연속적 문장들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어제 나는 이 소설이 주는 깨달음을 몇 줄 문장으로 요약해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은 시간의 물결을 결국 화해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기억은 취사선택되고 실수는 망각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한 번 저질러진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이 다행이기도 한 이유는 그 잘못과 결과가 동등하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가끔은 당연히 울어야 할 대목에서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웃는다고 그것이 웃어야 할 일이라 마땅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웃음의 주인공은 당연히 울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 정말 살면서 내가 저질러온 만행과도 같은 그 고약한 농담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 내가 한 농담들은 곧 내가 걸어온 내 과거, 그리고 지금 숨 쉬고 있는 현재, 알 수 없는 미래의 모든 것이 될 터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내 삶의 진실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다만 당신도 나와 같다는 것만이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변변치 않지만 쓸만한 농담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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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느 촬영장에서 김효진이 책을 즐겨읽는데 그날은 [정체성]을 읽고 있다고 해서 학생 때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동갑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 뭐 저런 책을 읽나.. 배우가.. 이랬다니까요. 어쨌든 빌려서 대충 읽다 반납한 것 같은데 그때부터 김효진이 좋았어요. 유지태도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알아보는 김효진한테 반했다고 한 것 같아요. 문화적 코드가 통했다면서^^;; 그래서 한사람님 페이퍼 보면서 [정체성] 얘기는 없나.. 하고 쭉 봤어요ㅋㅋㅋ 은희경이 그런 말을 했군요. 근데 이 책은 왜 새 판본이 안나올까요. 기다리는 1인, 바로 저.

새해되고 처음이에요^^

stella.K 2012-01-1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길게 쓰셨구만요.
얼마의 양을 쓰느냐 보다 진지하게 썼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ㅋ
그니까요. 전집으로 읽으시지 않고. 예쁘게 잘 나왔더만.
젊었을 때 멋모르고 참을 수 없는...을 사 읽었다 뭐 이렇게 소설이 어렵나 해서
못 읽겠던데 지금쯤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저의 꼰대(사부)가 밀란 쿤데라와 하루키를 좋아했었어요.
그후 한참만에 다시 만나니까 그 둘을 욕하더군요. 늙으니까 노쇄해져서 노망난 것 같다고.
요는 글이 별볼 일 없어졌다는 거죠. 작가가 오래되면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반짝반짝 할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ㅋ

보물선 2012-01-1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빼꼼~~~^^ (슬며시 얼굴을 들이 밀어 봄)

정말 오래간만에 왔어.
지난 두달쯤 회사일이 너무 정신 없었거든.
마무리 딱 짓고, 3일간 제주를 다녀와 오늘 출근했다우~
그래서인지 오늘이 올해의 첫날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하다니깐^^

다행이야. 설날이 곧 있어서.
새로운 한해를 다시 선물 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내 새해 인사는 받았지?
그새 당신은 달인이 되셨드만! 축하축하!!!
근데 소설은 어디 갔어?
18회 이후 못 읽어서 아주 아쉬워.
개인 출판이라도 해라~ ^^*

cyrus 2012-01-1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쿤데라 전집이 출간되었더라고요. 쿤데라 소설은 안 읽어봤는데 표지가 멋지더라고요.
마그리트 그림이라서 구매욕이 들기도 하고요. 이번 기회에 집에 있는 민음사 전집 <농담>을 읽어봐야겠어요 ^^

꽃도둑 2012-01-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은 일단 길어요. 할 말 다하겠다는 의지가 보이고, 성실해요
또한 짜임새 있는 아주 건강한 글이에요.
저 여간해서 혹~ 하지 않는데...일단 긴호흡이 경이롭네요.
아무래도 제가 폐활량이 적은가봐요...ㅎㅎㅎ 언젠가 날 잡아서 글을 아주 잡으리라 맘 먹고 있는데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몇 해전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긴 읽었는데 정말 제 스탈이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감성코드 에러였지요. 작가와 독자인 저와의 간극이 흑해 갈라지듯 그렇게 쩌~억 갈라졌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좀 좁혀지려나?...암튼 농담에 대한 진지한 견해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01-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좋았는데ㅎㅎ 물론 제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농담이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권 뿐이지만요. 이건 여담인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한테 농담이나 장난을 안걸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농담을 걸면 나는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일테니...

2012-02-20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0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