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농담 -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
마크 S. 브룸버그 지음, 김아림 옮김 / 알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1. 괴물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연의 ‘농담’은 단도직입적으로 ‘기형’이고 ‘괴물’을 말한다. 라틴어로 두 다리가 없는 염소로 태어났지만 그런대로 걷게 된 동물을 루수스 나투라(lusus natura), 자연의 농담이라고 불렀다. 괴물이라는 단어도 라틴어로 ‘경고하다’라는 뜻인 모네레(monere)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농담 중에서도 가장 뼈있는 자연의 농담은 경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인간에 경고하는 신호라 보아도 좋을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반인에게 기형은 불행이고 비극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과학자에게 기형은 ‘선물’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서 존재하는 유별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생명의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자가 말하는 농담이 모두의 불행이 아닌 행운의 기회가 되길 바라는 책이다.

 

사전적 의미로 전형(典型)은 모범이 되는 본보기이며 이형(異型)은 보통과 다른 모양이고, 기형(畸形)은 보통과 다르면서 비정상적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전형과 기형 사이에 이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어떠한 변이를 일으켜 이형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비정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 오답인 이유는 전형이 정답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오히려 이형이야 말로 진화를 위한 새로운 선택을 의미하지 않느냐 질문한다. 전형이라는 고정관념이 완성과 미완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선택의 편견을 낳게 되는 건 아닌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착화하는 것은 아닌지 제고해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만약 괴물을 만드는 발생적 메커니즘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해서 다양한 종류의 발생적 이형이 왜 다양한 괴물의 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기형이 유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그 바탕에는 진화와 DNA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찍이 위대한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의 범주를 넘어 다른 많은 학문 영역들은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 p. 20,  최재천 <다윈지능> 中에서

 

저자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자연이 완벽하며 더불어 진화론도 완벽한 체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설계와 조절 및 통제능력을 갖고 있어 동물이 조립되어 가는 설계도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DNA를 잘 계획된 프로그램이나 조리법, 청사진 등으로 은유하고 발생적 이형은 돌연변이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는 급작스런 사건으로 치부한다. 통섭학자 최재천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보잘 것 없는 DNA라는 화학물질이 단세포생물을 거쳐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살아남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니며 내 생명의 주인은 꼭 나만 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다. 도킨스는 끊임없이 그 명맥을 이어온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른다. 이 완벽해 보이는 이론은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듯이 공존, 공생의 개념을 떠올리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의 관점에서만 재해석한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이형의 발생, 이어지는 기형이라는 판단의 소용돌이이다.

 

예를 들어 남녀가 각기 다른 자세로 소변을 보는 것은 본능인가 유전인가 학습인가. 신체적 형태가 달라 다른 행동이 나타나는 차이는 유전적 행동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평범한 외부요소의 상호 영향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뇌에 유전적으로 배선된, 계획적으로 특성화된 행동 유전자와 연결 짓고 싶어 한다. 발가락이 네 개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발가락 네 개 유전자로 기형이 된 것이 아니다. 발가락 갯수는 사지가 처음 자라나는 뿌리인 사지싹의 발생과정과 크기와 관련이 있다. 괴물 같은 팔다리 기형이 가장 빈번한 동물은 양서류인데 이들은 유전적 돌연변이 때문에 팔다리 기형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과성이 용이한 피부특질과 표피 없는 알의 특성 때문에 배아가 이루어 질 때 환경적 요소가 보다 쉽게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팔다리 없는 양서류가 많이 출현한다면 환경의 오염도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딱정벌레의 경우도 뿔이 크면 혼자서 공급하는 똥이 많기 때문에 유충이 더 잘 자라게 도움을 준다. 결과적으로 몸집이 큰 아비 밑에 큰 새끼가 자라나게 된다. 이는 유전적 요소가 진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발생을 특징짓는 상호작용의 속성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유전과 DNA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후세에 더 좋은 쪽으로 진화한 것도 유전이요, 더 나쁜 쪽으로 대물림 된 것도 유전이라는 식이다.

 

저자는 DNA를 모든 발생을 위해 원료제공을 돕는 분자 정도로 인식해야지 통제 가능한 만능 프로그램으로 인식하지 말라 충고한다. 이 책은 불완전한 자연과 그 속에서의 진화보다는 발생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다. 전통적인 다윈주의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유전자 중심적의 사고방식을 경계한다. 유전적으로 예정된 산물보다 발생적인 과정에 더 집중하는 후성설을 자기 이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과학적인 평가는 전문영역이겠지만 DNA 만능이론에 안주하던 독자들에겐 의미 있는 반론인 듯하다. 무엇보다 기형이 유전이 아닌 발생의 문제라면 괴물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공동으로 인식해야 할 인재일수 있으며, 어쩌면 괴물이 괴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어쩌다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괴물은 그다지 운명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린 괴물을 그다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2. 괴물은 인간인가 초능력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산모였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이미지는 흉측한 기형아의 모습이 많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기형아들을 티베르강에 익사시켰다고 한다. 산모는 한번쯤 자신의 태아가 기형아인 꿈을 꾼다고 한다. 만약 태아가 기형이라는 결과를 받았다면 충분히 낙태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상이 아닌 것을 혐오하고 공포스러워 하는 심경은 이해가지만 정상이 아닌 이유가 곧 죽거나 불행해야 할 조건인가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알려준 외눈증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정상의 경우는 외눈증과 두얼굴 증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한 경우의 수 일 뿐이다. 새로운 형태라고 무조건 돌연변이라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싶어진다. 정상인 얼굴이 더 완성된 것이고 더 완벽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면 대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에 손을 들고 싶다. 외눈증이 비정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형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전형의 관점에서 다르게 생긴 이형일 뿐이다. 이러한 발생적 이형은 배아 초기에 가해진 어떤 원인에 의해 드러난 복잡한 발생의 연쇄적 산물일 뿐 신적인 유기체가 있어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된 계시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머리 하나를 생성하는 가능성을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연히 머리 두 개의 가능성이 진화한 것이라 부연한다. 머리가 하나일 확률이 많아지면 마찬가지로 머리가 두 개일 확률도 많아진다는 것이 진화론에 입각한 논리 일 것이다.

 



 

- 외눈증에서 정상적 형태를 거쳐 두얼굴증에 이르는 와일더의 전체 '코스모비아'계열.
두얼굴증 너머에는 두머리증이 보임. 두머리증은 두얼굴증이 심화된 형태가 아니라 결합쌍둥이의 변형된 형태 -

 


저자는 이처럼 난자가 수정된 직후의 초기 배아에서 일어난 ‘무차별적 순간’, ‘최고의 순간’을 기형을 유발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다.

 

이 시점은 “무언가 중요한 발생학적 단계가 빠르게 진행 중이거나 빠른 변화로 막 진입할 예정이어서 특정한 부분의 발생이 다른 부분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p 80

 

역으로 이 시점에 수많은 환경적 조작을 가함으로서 다양한 기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점에 환경적 손상을 입히면 어떤 특정 기관의 발생도 괴물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다. 병아리 배아단계에서 온도나 화학처리 같은 부화환경을 조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한다. 어떤 종은 온도를 달리할 경우 성별이 달라지는 것도 있다. 따라서 진화와 발생은 분리 될 수 없으며 어떤 기형도 유전이나 환경 하나의 요인만으로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발생 메커니즘을 알면 진화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무엇도 정해진 발생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는 곧 괴물로 정해질 운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괴물일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괴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발생에서의 실패자일 뿐이다. 무차별적인 괴물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 좋게(?) 괴물이 된 후엔 어떻게 생이 달라질까.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아이는 두 팔로도 걷기를 배우고 다리를 두 개만 가지고 태어난 염소는 절룩거리며 두 다리로만 걷기를 습득한다. 기형이 된 다음에도 얼마든지 정상은 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는 채로 태어난 아이는 우리가 보기에는 불구이지만 생애초기부터 두뇌는 새롭게 조직화되고 사지가 없는 신체에 연관된 행동적 적응을 포함한 특별한 발생 경로를 겪기 때문에 외려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팔로도 잘 걸어 다니고 세심한 동작을 해낼 수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두뇌의 조직화를 통해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게 되는 보상작용이 이루어진다.(장님이지만 청각이나 촉각, 후각이 정상인 보다 더 발달한 이유가 대뇌피질의 재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달리기나 수영하기 같은 움직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이는 타고난 능력이 아니고 신체 각 부분 발생적 대화와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생명체에 있어 발생의 각 단계는 여러 선택의 나열로 구성될 뿐 최후의 완성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의도적 과정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삶의 단계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스스로 발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절대로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유전적으로 조절되는 본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제 괴물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부족한 조건으로도 자기 발전을 이루었으니 우리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인 것은 아닐까.

 

3. 괴물은 친구인가 적인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선과 악, 유전자와 환경,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의 구분이 익숙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적 모호함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단성unisexual, 간성, 다중성multisexual에 대한 개방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성별이 남성과 여성만 존재해야 한다는 시각은 자연이 어떠해야 한다는 인간이 만든 선입관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이 부분에서 '동성결혼' 찬성의 입장을 밝힌후 지지율이 하락했다는 오바마를 떠올렸다. 등을 돌린건 우파 여성이었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성별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는지 새삼 궁금하다) 환경에 따라 성전환이 가능한 열대어의 사례는 충격적이기 보다 부러웠달까. 저자는 인간과 동물계에 존재하는 가지각색의 성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모호한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나 사회의 관점으로 일방적인 수술을 하기 보다는 아이의 성정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례에서 보았듯이 태어난 직후 시행한 성 재지정 시술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정체성의 결정에 더 이성적이고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충고가 선뜻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이형이나 기형이 그 전과는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후성유전학적인 관점으로 발생기간에 형태와 기능이 상호작용한다는 인식은 신선하고도 인상적이다. 기형에 대한 동질감까지는 아직 이지만 적어도 혐오나 공포감은 많이 사그라든 느낌이다. 자연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을 놀라게 한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보다 더 놀라울 수 없다’는 저자의 깨달음이 새삼 자연 앞에 숙연해지는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은 괴물을 만든 적이 없지만 인간만이 인간을 괴물이라 부른다. 인간이 괴물을 창조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괴물이 아닌 것에 감사한 적이 있을까. 살아가면서 실은 괴물이 아니었던 사람이 더 괴물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닐까. 신체가 멀쩡하다고 해서 꼭 정신도 같이 정상이라는 법은 없다. 대개 정신적 괴물은 신체가 정상인 사람에게 더 빈번한 후천적 발생과정인 듯하다. 그렇게 보자면 어차피 괴물은 서로에게 적대자가 아니라 친구일 수밖에 없으며 누가 누구의 조연이 아닌 각자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거울을 보며 거울 속 우리 자신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겠다.

 

우리는 수많은 부분과 과정의 총합이며 생식기의 성장을 촉진하고 두뇌의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와 생식선, 호르몬분비 간 연쇄효과의 산물이다. 이 모든 요소가 협력해 거울 앞에 보이는 우리 자신을 만든다. 게다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궁극적으로는 가족과 문화 안에서, 시대 속 개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 거울에는 단 한 명의 모습만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셈이다. -p 212

 

우리는 지금 나 아닌 괴물, 그리고 옛날에 나 일수도 있었던 괴물, 앞으로 나 일지도 모를 괴물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 존재이다. 괴물은 곧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괴물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같은 인간이니까. 그러므로 괴물이 아니라 좋아할 것도 괴물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다. 괴물이 아니라면 괴물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괴물이라면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공평하다. 농담은 아마 우리 모두가 괴물이기도 하고 또 모두가 괴물이 아니기도 하다는 괴물 같지만 괴담은 아닌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지금 잠시 어떤 이유로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 할 자격도 없다. 인간은 괴물이 될 가능성과 괴물로 변할 잠재력을 이 세상 어느 존재보다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괴물이 되지 못한 인간만이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한번만 손가락질을 해보자. 우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의심할 수 없는 괴물을 향한 것이라면 그 방향은 아마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괴물의 얼굴은 아닐까. 그때라면 지금처럼 웃으며 농담이라 말할 순 없지 않을까.

 

 

 

 

 

* 이 리뷰는 yes 24와 조선일보에 먼저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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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1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적 이형 혹은 기형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허약한 사람들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망케해야 한다고 주장 하던 플라톤과 그의 시대보다
현대는 좀더 포용적인 개념의 시대에 와있어보입니다.

또,
말씀해주신 정신적 이기형은 그 수가 더욱 증가하는 듯 합니다만...
오늘은 저의 손가락을 거울을 향해 한 번 찔러보겠습니다 ㅠ.ㅠ
이거...생각을 많이 해봐야겠는걸요 ㅡㅠㅡ.

차트랑 2012-05-19 16:44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시니 기억이 납니다.
언제나 페이퍼를 써놓고도 잊고 있었더군요 ㅠ.ㅠ.
그것도 물과 얼마전에 말입니다 ㅠ.ㅠ

자연의 농담이 농담이 아닌가 봅니다요.
재미있는 책이라구요..?
그럴 것 같아요..그것도 아주아주..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어낸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
피터 노왁 지음, 이은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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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은 인간을 선택 했나 기술을 선택 했나

 

 

1996년도에 아이네트라는 회사에서 인터넷을 처음 배웠다. 그땐 전화선으로 PC통신이 대중화된 시기였다. 브라우저도 익스플로러가 아니고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가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강사 중 한분이 인터넷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모든 건 미 국방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말이다. 컴퓨터 끼리 데이터 통신이 가장 절실한 곳이 미 국방부였고 무언가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 누드 사진도 주고받고 싶어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리하여 인터넷 기술의 정점은 포르노가 될 것이라 말했다. 생각해보라고 사진이 될수록 빨리 떨어지고 동영상이 빨리 전송되어야 할 것 아니냐고, 그것도 실시간의 고화질 화면으로. 가끔은 우리끼리 무언가를 찍어서 돈도 벌어야 할 것 아니냐고. 모두 회사원들이었고 당시 강의는 한 달에 오십 만원이나 하는 고액의 특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말하던 기술들은 거의 실현이 된 듯하다. 그리고 강사가 농담 반으로 부연하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십 오년도 더 지나 나는 이 책에서 농담이 진담이 되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새삼 그때 넷스케이프를 띠우고 알타비스타에 검색문구를 쳐대던 모습이 떠올라 빙긋 웃음이 났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 북에서 사진을 공유하며 네비게이션은 물론 쇼핑, 게임, 강의, 영화, 음악, 라디오, TV등의 다양한 손바닥네트워크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 모든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사실은 미 국방부에서 만들었고 포르노에 가장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놀랄만한 뉴스는 아니다.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본 뉴스에 속한다가 맞을 것이다. 허나 이 책은 그것이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의 기술은 나쁜 전쟁의 기술이 착한 일상의 기술로 전이된 것이므로 우리는 그동안 악의 축을 기둥삼아 열심히 개인의 욕망을 실현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미래란 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로 상징되는 욕망의 삼위일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악덕과의 공존 전략을 세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모든 현대기술의 핵심은 20세기 중반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미국이다. 자본주의 주권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저자의 논리는 ‘많은 기술을 가진 자가 많은 식량을 소유하고 많은 권력을 가진다’는 데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미국은 적보다 유리한 기술을 찾아 유능한 과학자를 대거 투입시켰다. 당시 천재들은 모두 비밀리에 군사기술에 투입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은 군사기술에 쏟는 투자가 곧 과학연구의 중추로 자리 잡았고 신기술은 산업으로 빠르게 이전되어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미군의 피나는 기술개발이 가전제품의 대중화를 가져왔고 식품가공의 혁명을 이끌었고 컴퓨터 산업의 혁신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성혁명이 상업화, 개인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 섹스, 음식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둘러싸고 거대산업이 발전한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성욕, 경쟁,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대변하므로 3대 악의 축은 곧 3대 욕망의 뿌리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건 미국 탓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탓이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순서대로라면 맞는 말이긴 하나 읽다보면 서서히 갑갑해지고 우울해지는 책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 의하면 이미 결과가 드러난 상태에서 모든 과거의 일은 사후에 얼마든지 편향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개연성과 타당성, 합리성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연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저자는 기술발명이라는 것이 늘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과연 초창기 기술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일까? 기술전이의 핵심이 된 사람들이 모두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로부터 자유롭다고 해도 그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알지 못해서 선택을 이어왔던 것일까. 예를 들어 새로운 전쟁기술을 개발하는 목적은 고귀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함이라 떠들지만 기술이 개발된 시점엔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기술을 어디에 응용하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젊은 시절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살았던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은 이 책에 언급된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증인중 한 사람이다. 파인만은 그의 저서와 전기 등에서 폭탄을 제조해 실험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분명히 ‘사회적 책임’을 언급한 바 있다. 모두 천재수준의 과학자들로만 구성된 팀원들은 사막 한 가운데서 폭탄이 터질 때 성공의 환호성을 질렀지만 돌아올 때 침묵하였다. 원래는 독일의 위협으로 그들이 폭탄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폭탄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실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은 일본에 떨어졌다. 파인만은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끝까지 염두에 못 둔 것이 도덕적인 면에서 실수였다고,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그 이후로 국가의 기밀작업엔 참여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파인만은 당시에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했는지 생각해본 사람이 분명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은 단지 기술을 의뢰할 뿐이며 과학자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할 뿐이며 상인은 기술을 응용해 팔기만 할뿐이고 소비자는 그것을 이용만 할 뿐이라면 인간은 로봇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선택해온 사실들은 잊어버린 듯하다. 이 책은 지난 시절 미국이 해온 일들을 객관적인 통계자료와 결과지향적인 가치관으로 상당부분 합리화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문제는 지금 이후인 듯하다. 그래도 의미 있고 감사한 건 지금까지의 전개과정을 낱낱이 알려준 성실함이다. 현대문명에 있어 미국의 기여도와 과정을, 그 속내와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는 일일 것이기에.

 

 

 

2. 미국 음식을 먹는 것은 미국식 삶을 먹는 것이다

 

 

독일의 폭격으로 자존심이 상한 영국은 미국과 합작으로 레이더 장치를 개발해 많은 인명을 살렸으나 마찬가지로 적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살인광선으로 레이더를 활용했다. 이 살인기술은 전쟁이 끝나고 전자파를 이용한 전자레인지로 거듭나 일반 가정의 부엌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테프론도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 과정에서 발견된 화학물질이 프라이팬으로 변신한 결과였다. 오늘날 식용유 없이도 계란 후라이가 가능한 테팔 프라이팬은 사실 폭발물 제조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기술이었다. 전쟁덕분에 세상에 등장한 플라스틱은 다양한 밀폐용기로 널리 보급되었고 건강을 해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밤새워 공부하고 난 뒤에 또 밤새워 논다고 총력전 뒤에는 총력생활이 뒤따랐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번영과 사치, 즉각적인 쾌락이 더 중요했던 5,60년대는 환경이나 생태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시에 개발된 기술은 가정의 요리기술로 안착했고 사람들은 전쟁을 잊고 풍요를 꿈꾸었다.

 

 

우리 집 아이는 대표적인 정크 식품인 스팸과 햄, 소시지를 좋아한다. 이것저것 온갖 종류의 햄이 들어간 부대찌개도 유난히 좋아한다. 어린이 성장과정에서 특히 두뇌와 골격의 발달에 좋지 않다는 뉴스와 연구결과를 보고도 아이는 스팸의 맛을 잊지 못한다. 스팸은 알다시피 미군이 전시식량으로 택한 음식이었다. 전 세계 식품가공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와 동일하다. 아마 당시 미국의 군부대에 스팸을 납품한 업체는 떼돈을 벌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 통계상으로 스팸을 즐겨먹는 나라에선 하나같이 당뇨병, 뇌졸중, 심장병 같은 성인병 발병이 높게 나타난다. 주부의 경험으로 보자면 식품 첨가물과 나트륨의 함유량도 대단한 중독성이 있는 듯하다. 그만한 맛과 그 정도의 간에 익숙해진 입맛은 꼭 일정량 이상 마셔야 술을 마셨다 생각하는 알코올 도수 및 주량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요즘은 감자튀김도 양파맛, 치즈맛 등의 화학조미료를 즉석에서 첨가해 더 강한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화 되었다. 뉴스에선 하루가 지난 감자튀김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알려주지만 담배 피지 말라고 해서 알아듣는 성인이 드물듯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아이 따라 먹어보면 확실히 순간의 자극은 더 심화되었고 그 기억은 또 새로운 맛이 나타날 때 까지 유효할 듯하다. 나는 아직도 태어나 처음 롯데리아에서 감자튀김을 먹었을 때 그 맛을 기억하는데 한창 성장기에 인스턴트 식품과 화학조미료의 맛이 얼마나 맛날 것인가.

 

 

냉동감자의 시작도 알고 보면 고기와 채소를 냉동식품으로 팔아온 군납업체에서 비롯되었다. 인스턴트 커피도 마찬가지다. 군인이 지치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해선 필히 탈수, 냉동, 건조 기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부지런히 전시에 오렌지주스, 감자, 우유, 달걀 등을 실험함으로써 음식맛을 가공하는 법을 알아내었다. 김연아가 광고하는 믹스커피는 전장에서 군인이 그토록 그리워한 커피 한 모금의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질량분석기는 방부제와 첨가물을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식품가공기술의 발달은 대량생산 기술과 함께 패스트푸드의 발달을 가져왔다. 잠수함 주방을 설계하던 기술자는 맥도날드 주방을 표준화했고 맥도날드는 기술혁신과 품질관리로 엄청난 수익을 올려 물류공급의 표준모델이 되었다. 미국 전체 식품 생산 시스템은 맥도날드의 모델을 따랐고 별 대안 없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렇듯 미국은 60년대 이미 식품혁명이 완료 된 나라였다.

 

 

고등학생 때 처음 압구정동 한양쇼핑 맞은 편에 맥도널드가 문을 연 날을 기억한다. 한동안 줄을 서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90년대 맥도널드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반드시 유명 연예인을 볼 수 있었다. 맥도널드는 당시 압구정동의 젊은 소비문화를 리딩하던 대표적, 상징적인 브랜드였다. 강남역 뉴욕제과가 지하철을 매개로한 만남이었다면 압구정동 맥도날드는 자가용을 전제로 한 만남을 의미했다. 미국이 전수한 패스트푸드는 우리에게 단순히 식품혁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형할인점에 가면 프라이팬, 타파웨어, 감자튀김, 믹스커피, 일회용 식품들이 즐비하다. 군인을 위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온 것이 우리자신이라 보았을 때 우린 미국식 풍요를 향해 삶의 궤도를 수정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 책에 의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우린 미국을 알기 전엔 미국처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인류가 미국식 삶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나라인 것이다.

 

 

 

3.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대상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다

 

 

식품 혁명 이후의 욕구는 성혁명으로 이어졌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 한국, 일본이 포르노 매출이 가장 높은 3대국가라 하여 흠칫 놀랐다. 전쟁, 섹스, 음식 중 섹스의 발달이 제일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인간이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은밀한 욕구를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전투장면을 찍어야 했던 필요성과 당위성이다. 미군은 훈련용 영화를 만들어 나중에 분석을 해야 했고 따라서 헐리우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카메라 작동법을 배운 군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무엇을 만들었을까. 영화계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쳤고 기술과 장비는 나날이 발전해 표준화되기 시작한다. 53년 <플레이보이>지의 창간은 소비 지상주의에 부합하는 사회적 욕구였을까. 남성용 영화제작도 활발해져 6,70년대엔 B 급 포르노 영화가 성행을 이루고 80년대엔 비디오테잎과 캠코더의 보급으로 개인 비디오 촬영이 가능해진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포르노는 더 이상 장롱 속에 숨겨둔 비밀이 되지 못했다. 군사기술은 장난감과 게임발전도 견인했으며 가상현실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역으로 전쟁이 게임화되기에 이르렀다. 종이인형이 관절이 꺾이는 바비인형이 되기까지 미사일 기술자가 미사일이 견뎌야하는 중력이나 속력, 항력을 계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인형은 로봇공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가정용 로봇, 섹스용 로봇으로 발전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군대에서 비롯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파인만과 함께 핵폭탄에 필요한 타이밍 회로를 만들었던 히긴 보덤은 같은 시기 연구소에서 간단한 비디오 테니스 게임을 고안했다. 하필 이 게임이 전신이 되어 전자오락산업의 길을 열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회사들은 10년 간 군에서 쓰는 전자장치만 만들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회사였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인텔과 소니의 탄생에 기여했다. NASA 가 미국 산업계에 넘겨준 기술의 양은 곧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갈 첨단 기술과 동일하다. 구글의 위성 사진 서비스도 지상원격탐사를 위한 미군의 프로젝트가 상업화 된 것이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미국이 무엇과 전쟁을 벌이고 있느냐가 곧 향후 산업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미국을 위협하는 무엇이 곧 적대적 대상이 될 터이다. 우주개발이든, 질병이든, 테러이든, 무역이든,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자의 논리 전개에서 본의 아니게 발견하게 된 것은 미국의 전략적인 세계지배 구상이다. 현재 전 세계 유전자변형 농산물 생산량의 60퍼센트는 미국에서 나온다. 미국산 유전자 변형 농산물로 가공된 식품은 우리 대형마트에도 수두룩하다. 미국과 이해관계가 있는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형식품의 유해성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교묘히 옹호한다. 꼭 월가와 관계를 맺은 경제전문가들이 미국의 은행을 비난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미국이 고안한 논리는 가난한 나라에 보다 많은 식량을 분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가난하면 절망하고 절망하면 더욱 테러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전 세계가 테러와 전쟁을 하느니 아예 애초부터 원인을 없애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많은 기술을 가진 자가 많은 식량을 가지게 되고 많은 권력을 얻는다는 논리로 보았을 때 미국은 식량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할 수 있다. 여전히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쟁기술을 연구하고 신 무기와 첨단 장치를 개발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군에서 나온 부산물이 모두 자기네 나라를 먹여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이제 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구하는 무기로 적이 되는 나라의 사람을 대량 살상해온 이력을 안다.

 

 

그렇다고 갑자기 환경과 생태를 위해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편리한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버리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삶의 복원이며 미래지향적인 방안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새겨야 할 사항은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인류 문명의 자산이 ‘나쁜 것들’을 통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창출했다고 해도 나쁜 것의 원래 나쁜 속성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나쁜 것들이라도 지금 좋은 것이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나쁜 것들은 분명 나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훗날 좋은 것들이 될 확률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것들을 택할 당시 그것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야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 좋아진 사실과 결과가 나쁜 것을 택한 자들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택했던 이유는 그것이 택하는 자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파인만이 한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초에 폭탄을 제조했던 이유는 그 폭탄으로 사람을 살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폭탄을 제조한 적군에 맞서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레이더를 만들 땐 야간폭격을 대비해 사람을 대피시키려 했던 것이지 역으로 야간에 목적물을 찾아 공격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패리스 힐턴의 섹스 비디오에 나오는 속살이 분홍색이 아닌 에메랄드빛임을 보고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힐턴의 비디오와 1991년 걸프전 당시 CNN을 통해 중계된 야간폭격 장면이 같은 색이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다. 인간은 대단히 실망스런 존재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생존을 위협해도 결국은 다 같이 진화하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존재임을 믿고 싶다. 선택의 기준이 오로지 욕망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인간으로 남게 되지 못할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것을 택하여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인간과 나라가 더 자신들에게 떳떳한 일일 것이다. 불가피하게 나쁜 것을 택했다면 파인만처럼 최초의 그 불가피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의 선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존은 결국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선택을 인정하고 손 잡는 일이다. 순간의 선택이 어떤 한쪽의 피해와 상처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알고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은 궁극에 공멸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미국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유아독존이 아닌 서로를 위한 상존, 모두를 위한 공존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계속하여 그들의 나쁜 선택을 미화하고 정당화하기에 지구촌은 더 이상 공멸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패리스 힐턴의 초록 비디오가 걸프전의 초록 영상이 부디 원래 초록이 의미하는 자연과 희망의 상징으로 변화하는 선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저자가 오랜 기간 준비 끝에 이 책을 발간한 이유는 미국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책임을 더 자각하기 위함이었다고 믿는다. 저자가 바라는 다음의 초록은 아마 우리가 모르는 초록은 아닐 것이다.

 

 

 

덧붙임)

 

 

12.jpg


이 책의 결론은 '악덕이 베푸는 미덕'이다.

이른바, 본능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논리다.

가장 거슬렸던 표현은 발전했다, 진화했다가 아닌 베풀었다는

내재된 우월감의 잔상이다.


앞으로 더욱,

공존을 위한 책임있는 '선택'이 본능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미덕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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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고마워요 :)

계속 리뷰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요. 그리고 이제 취소. 발병 안 나실 거예요 히히히히히히히

차트랑 2012-05-0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워낙 적나나해서 관심밖이었는데...
한사람님의 리뷰를 읽으니 생각이 완전 달라지는데요??

저는 아직도 고리타분한 티를 벗지 못했나 봅니다 ㅠ.ㅠ
저 책을 어떻게 서재에 꼽아둔다?...생각 하면서 걱정부터 했거든요^^
저의 초등학교 동창생 이야기가 딱 맞나봅니다.
'너는 조선에서 왔냐??, 공간은 같되 시간은 왠지 다른 것만 같아...' ㅠ.ㅠ

2012-05-09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5-1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사람님,
고맙습니다

꽃도둑 2012-05-1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흥미롭겠는데요?... 세 개의 단어로 현대과학의 기술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칼자루였던 거군요,,,
이 저자의 관점이 다분히 미국에 손을 들어준거라면 그 칼자루를 던져버리고 새로이
갈아 끼우는 방법을 모색하던가..아니면 미국의 손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너무 깊숙히 너무 광범위하게 손길이 뻗어 있어서 어렵겠지요?,,^^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고. 권력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아 누구라도 한번 맛보면 그 중독성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과학적인 실험으로 입증된 결과도 있다. 권력은 두뇌에 코카인과 똑같은 효과를 일으켜 중독성 높은 도파민 물질을 상승하게 한다. 동물을 실험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도파민도 높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도 권력에 취하면 체내에 도파민이 과다 생성되어 오만해지고 공격적이 되며 성적으로도 왕성해 지는 것이다. 기분 좋은 흥분과 그로인한 자신감. 권력은 그것에 취하게 된 순간 흡사 마약주사처럼 체내에 빠르게 침투되는 위험한 약물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어쩌면 마약에 빠져 부모고 부인이고 자식이고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던 중독자들의 일생을 뒤돌아 성찰케 하는 일종의 사후 진단서이다. 그들은 조선조 황금빛 중흥기를 이끈 절대 권력자들이었고 모두 우리의 조상들이다. 우리는 중독자의 유전자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므로 어떤 이는 권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약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유난히 권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집착하는 성향의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혹시 내가 아직 권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주체자의 위치에 서보지 못해서 권력을 돌보듯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나는 마약을 해보지 않았기에 마약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저 피상적으로 주워들은 지식만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물론 마약을 해보았고 권력을 손에 쥐어보았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엇이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약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약을 해 본 자와 권력을 취해 본 자들의 일생을 주도면밀히 분석하고 파헤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왕이 되어보지 못했고 왕의 아들이 되어 본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들의 입장을 퍽이나 세심하게 배려한 듯하다. 그런 다음 후대의 사람들이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을 매우 곡진하게 전달하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많아 보였다. 내가 권력자가 되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그들을 연구한 건 아니지만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던 마약관련 지식을 알차게 수정해주고 새롭게 확장해주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영정조 시대를 바로 곁에서 목격하고 취재한 어느 유능한 탐정처럼 사건의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마침내 ‘권력과 인간’이라는 전체 그림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도세자를 쌀뒤주에 갇혀 죽은 미친 왕의 아들쯤으로 생각한다. 뇌리에 무엇보다 각인된 상징은 ‘뒤주’라는 엽기성이며 그 엽기적 공간에 아들을 몰아넣은 아버지의 비정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버지가 영조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인 것은 역사에 무관심한 독자들에겐 사실 거의 은폐된 역사와 다름없다. 굳이 뒤주와 영조, 정조를 연결시키려면 필연적으로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떠올려야 하는데 가장 쉽고 간단한 쪽은 아무래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 만한 잘못을 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즉, 죽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아버지에게)죽었을 것이라 믿는 것이 가장 편안한 방식의 추론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영정조 시기는 최고의 부흥의 시절이며 임금 또한 어질고 현명하기 짝이 없는 성인들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사치에 관심도 없고 친인척 비리에도 깨끗하고 - 외려 척결하였으면 했지 - 불철주야 국민만 생각하며 철저한 자기관리에 학식까지 우러러볼 수준의 대통령이다. 당연히 모두가 존경할만한 인물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절대자의 판단으로 실행된 아들의 죽음이라면 아들에게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와 동정으로 마음이 기울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죽을 짓을 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 죽을 짓을 안했는데 뒤주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겠지... 오랜 세월 내 머릿속에 기록된 사도세자는 불쌍하고 억울하겠지만 어떻든 당시 죽을 짓을 했기에 죽어야 했던 왕자였다.

 

 

그런데 과연 사도세자는 죽을만한 짓을 했던 것일까. 사도세자도 뒤주에 갇히면서 자신이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그것이 죽을만한 일이냐고 묻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여지껏 사도세자가 죽을 짓을 했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차기 임금으로 내정된 아들을 꼭 죽여야 했던 영조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죄인이 되어 죽었지만 아들인 정조가 어떻게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끌 수 있었는지도 연결고리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늘 중요 이슈는 과연 사도세자가 죽을 만큼의 짓을 했는지의 여부와 그 죽을 짓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선정성이 남달라 역으로 다른 연계된 인물들의 입장과 당시 배경, 여러 정황들을 가리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미쳤기 때문에 죽었다는 ‘광증(狂症)설’이 진실인지 당시 주도세력인 노론의 반대편에 섰다가 음모에 휘말려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이 진실인지 죽음의 이유를 따지는 타당성 연구만이 부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건의 사인에서 한발 물러나 렌즈를 교환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닌 절대 권력자와 권력을 위협하고 대항하는 반군의 관계로 피사체를 새롭게 주목했다. 주인공은 영조도 사도세자도 정조도 아닌 ‘권력’이라는 보다 확실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실체였다.

 

 

영조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 사람이었고 미친 아들이 급기야 자신을 죽일까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군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사건을 조작하고 자작극은 물론 사기극까지 마다않은 치밀한 계략의 종결자였다. <한중록>을 집필한 혜경궁은 친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단식과 자살기도까지 주저하지 않았던 철의 여인이었다. 이 세 명의 공통점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약은 순간의 행복감과 희열을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초조, 집착과 편집증을 불러오는 영혼의 쓰나미이다. 완벽한 권력자는 완벽한 정신병자이다. 마약과 같이 권력에 중독되면 진실이 하찮게 여겨지고 중요한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진실이냐 뿐이다. 오로지 자기 권력을 잃게 될까봐 모든 신경을 권력보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권력상실에의 두려움은 아마도 마약주사를 끊게 되는 두려움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반응이자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것이다.

 

 

영조는 권력을 잃을까봐 그 두려움에 진실을 외면하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조는 권력을 더 유지시키기 위해 진실을 조작하고 왜곡했다. 혜경궁은 무너진 권력을 복원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 이들이 가진 것은 권력이었고 잃은 것도 권력이었다. 이들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 자기 자신을 투자한 일은 권력을 만들고 지킨 일이었다. 권력은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으나 실행주체는 오로지 자신이기 때문에 궁극에 가장 사적인 욕망의 영역이 된다. 개인의 욕망은 결국 부모나 자식 같은 혈연관계나 부인과 남편이라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뛰어 넘는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그 권력의 크기를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지금처럼 임기 없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보장받는 절대자라면 그에게 있어 권력은 목숨과 동격일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아들이 다음의 왕이 되는 것이라면 죽기 전까진 그 누구도 왕의 권력에 흠집을 내어선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권력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사도세자 역시 광란의 순간엔 신하들의 두려움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그것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쾌감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왕실에서의 권력싸움은 곧 피를 부르는 전쟁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핏줄과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권력의 피(皮)는 혈연의 피(血)보다 두껍고 진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며 가장 마음 아팠던 사람은 권력이라는 옷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하고 피를 본 왕자, 가장 끈끈한 핏줄이었지만 가장 처참한 피의 숙청을 당한 사도세자였다. 가끔 드라마에서 완벽한 아버지를 둔 무능력한 아들을 목격할 때가 있다. 권력과 명예, 돈과 인기를 다 가진 아버지는 세상에서 더 없이 평판 좋은 인물이었지만 유독 아들에게만은 혹독하기 짝이 없어 늘 아들이 못마땅하고 꼴 보기 싫은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 노력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버지 앞에서만 주눅이 들고 실수투성이이다.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꼭 아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간만에 이룬 성과도 깎아내리고 자신처럼 완벽하지 못한 아들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린 이러한 통속의 드라마에서 아들의 행보가 어떠할지 너무나 잘 학습되어 있다. 아들은 점점 야비해 질 것이며 세상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아들은 필히 사고를 치게 될 것이며 아버지와는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아들의 삐뚤어진 복수와 아버지의 비열한 대응 사이에 아마도 치정과 불륜, 출생의 비밀이라는 자극적 스토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을 터이다. 우리가 쉽게 치부해온 그동안의 막장 드라마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피할 수 없는 유전자의 변형된 모습일지 모르겠다. 부자지간의 갈등과 출생의 비밀, 권력과 재산싸움에 얽힌 통속 시나리오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요즘 재벌에서도 유효하다. 왕실과 재벌, 그리고 드라마의 통속은 한통속이라는 게 새삼 씁쓸해지는 건 왜 일까.

 

 

그렇다고 마음의 병이 깊어 정신분열에 이른 사도세자가 모두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좀 더 약삭빠르고 현명했더라면 자신의 아들 정조처럼 자기 이미지를 포장하는데 능숙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에 자기 편을 더 만들고 아버지의 무시를 무시하고 주변으로부터 차근히 신뢰를 쌓아나갔더라면 설사 뒤주에 갇혔더라도 탈출구는 있지 않았을까 싶어 너무나 안타까웠다. 뒤주에 갇히고 난후 일주일 이상 사람들이 세자의 죽음을 방치하였다는 사실이 뒤주에 들어가라고 한 영조보다 더 소름끼쳤다. 세상은 역시 살아있는 권력에만 관심을 가진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갈 만큼의 죽을 짓은 안했을지 몰라도 뒤주에서 당연히 나올만한 아니 마땅히 나왔어야 할 죽지 않아도 될 짓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가진 자라면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살아야 할 이유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조와 정조, 혜경궁은 한 평생 지독히도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더 많았기에 그토록 비정한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적당한 위선과 처세술이 곧 권력을 굳건히 하는 기본적 기술이라는 깨달음이 서글프다.

 

 

인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 넘어가는 줄 모르게 흥미롭고 또 슬픈 책이다. 부록으로 실린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은 역사학자로서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독자 스스로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에 대해 짜릿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권력으로 오만해진 사람들을 목격하는 일은 슬픈 일상이다. 정치인뿐 아니라 재계인사, 유명 연예인, 스포츠 인물 할 것 없이 권력이라는 마약에 대책 없이 빠져든 사람들이 몰락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우울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릇 무상한 삶의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권력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그 무상함을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 심화시키는 결정적 폐인은 아닐까 싶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절대 권력자들은 자기가 쏘아댄 새들처럼 처량하게 추락하지 않았던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영,정조 시대를 촘촘히 둘러본 이 책은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비굴하고 초라해 질수 있는지 어떻게 잔인하고 교활할 수 있는지 가장 화려하고 막강한 임금의 실상을 통해 진실을 전달해 준다.

 

 

앞으로 우린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는 역사적 광경을 지켜보아야 할 시점에 도착해있다. ‘군주는 대단한 거짓말쟁이이며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통치철학을 훌륭하게 준수한 정조처럼 스스로 달이 되어 이 세상을 감시, 조종, 통제하는 통치자를 만나게 될까 두렵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인물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권력을 얻으려고 그 측근이 되고자 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가려내어야 할지 새삼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맛을 본 중독자들일 것이기에 더 강한 약효만을 원할 것이 자명하다. 이 책을 거울삼은 독자로서 나는 그저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는 명언만 기억하시라 조용히 돌아서서 중얼거리고 싶다. 슬프지만 그것이 권력에 집착한 중독자들의 말로일 것이라 혼자 끄덕이며 눈감아 드리고 싶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오늘날 치유가 가능하지만 권력자의 정신병은 불치병임도 함께 알려드리면서.

 

 

 

덧붙임)

 

 

 

1.jpg

 


신령스런 칼이 오래도록 땅에 묻혔으나
검광은 북두칠성을 쏘고

붕새가 날자 그 날갯짓 하늘을 덮네

대장부가 뜻을 얻음은 모두 이와 같으니

어찌 산수에서 세월을 보내리

- 사도세자의 문집 <능허관만고>, 아무에게 주다 中, 1758 -

 

 

불안한듯 분명한 개성이 있어 보이는 필체가 인상깊었다.

내용상 대장부의 뜻을 펼치지 못한 사도세자가

왕의 아들로 태어났음이 안타까워지는 글이다.

사도세자는 친필로 된 시를 그때그때 곁에 있던 시종에게 주었던 듯하다.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허공에 띄우는 그의 심경이 기울어진 필체와 함께

새겨졌다.

아무에게나 주었다는 그 아무개는 이 시를 읽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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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0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도세자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저절로 소름이 돋습니다.
한사람님 말씀대로, 일주일이나 뒤주 안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기다렸다는 사실이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세자가 약삭빠르거나 현명하거나.... 라는 문구, 한숨이 나오네요.
저는 이덕일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좋아해서리,,, 비판하는 분들도 많지만 말입니다. ^^

음,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할 올해........... 어쩐지 기대 하나도 안 되고 다시 기대하기도 무서운건 저 뿐일까요?
5월, 어버이날이네요, 저는 카네이션 화분 받았는데, 한사람님은?

숲노래 2012-05-08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들이 임금이라는 자리를 물려받거나 이어주려 하지 않으면,
스스로 조용히 제 삶을 일구는 흙일꾼으로 지내고자 한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할 까닭이 없겠지요.

한 자리를 혼자 차지하려고 다투니까,
꿍꿍이가 태어나고
나쁜 마음과 미움과 앙갚음이 생기겠지요.

2012-05-09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
조지프 핼리넌 지음, 김광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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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나이 들었다는 건 그 만큼 실수의 경험도 많다는 뜻일 터이다. 하지만 실수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을 매번 수정하고 보완하며 살아왔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반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교정하긴 커녕 외려 같은 종류의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덮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바로 우리가 실수의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실수할 수밖에 없었구나 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실수가 잦아지는 경험을 한다. 작게는 사람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에서 시작해 돈 계산을 틀리게 하거나 크게는 주어 담을 수 없는 말을 하거나 운전 중에 차도로 뛰어드는 강아지를 보지 못하는 등의 실수까지, 실수는 아무리 조심하려해도 사라지지 않고 더 성화를 부리는 듯하다. 이제 기억력의 감퇴로 인한 단순실수나 순간의 착각으로 인한 판단착오는 하루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생활 속 한 단면이다. 그런데 생명을 다루는 의사나 안전이 생명인 조종사,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판사처럼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비극으로 초래된다면 그때의 실수는 얼마나 치명적인가. 실수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실수(失手)이상의 참수(斬首)로 느껴진다. 어떤 실수는 어떻게든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불행한 과거이기에 기록되며 보관되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의료과실을 주제로 한 보도로 199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한 저널리스트의 저서이다. 20년 동안 사람들의 실수담을 모았더니 그 원인도 해결책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책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삶은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저자의 보도 경험과 저널리스트로서의 오랜 통찰력이 매끈한 번역과 함께 빛을 발했다. 실수하는 내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보시다 시피 이 책에서 말하는 실수는 무언가를 ‘잘못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잘못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사전적 의미로 실수는 과정보다는 결과에 비중을 둔다. 누군가에게 조심하지 않아서 발생한 잘못, 다시 말하면 말이나 행동이 예의에 벗어난 행위로서 실례(失禮)에 가깝다. 실수에는 분명 중대한 실수가 있고 사소한 실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드러난 결과로서의 실수의 무게감을 구분 짓지 않고 인간이 사고하는 과정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실수를 말하고 있다. 우리 문화에서 실수는 사소한 착오로 빚어진 우발적인 결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아 이 책에서의 실수와는 의미가 다른 듯하다. 사고의 결과가 아닌 그 시작과 전개과정을 따져볼 수 있는 기회로서 이 책은 유용한 의미를 지닌다. 실수를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 치부해버리면 같은 실수는 반복될 것이며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나뿐만이 아니고 누군가의 불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과정에선 도대체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실수를 하는 것인가.

 

 

편향은 실수의 지름길이다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한 것은 ‘편향’과 ‘과신’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보통 이상은 된다고 믿는다. 특정 부분 열등감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평균을 상회한다고 믿는다. 또 어느 정도 독서와 글쓰기가 생활태도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무척 합리적이며 구사하는 논리는 매우 타당하며 개연성, 정합성, 객관성에 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말하고 쓰는 것이 직업인 사람, 가방 끈이 긴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보고 듣고 아는 것이 많으면 아는 것 만큼 옳고 정확한 판단을 할 것이라 자타가 기대를 한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은 것과 옳은 판단을 많이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많이 알아도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는 편향성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자기 과신은 늘면 늘었지 줄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내 자신이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판단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 커질 뿐. 외려 많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똑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잘 알려진 사회유명인사들 중엔 누가 보아도 뻔한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제2, 제3의 논리를 만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저자가 첫 번째로 강조한 우리가 실수하는 이유는,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을 보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일부를 판단의 근거로 사용한다. 사상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그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 김영사, 2012>에서 인간의 편향성 중 하나로 WYSIATI의 법칙을 주장했다. WYSIATI은 ‘What You See Is All There Is’의 약자이며,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뜻이다. 인간은 좀처럼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의 직관을 벗어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의 이성으로 사고하기가 힘든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지극히 제한된 정보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심지어는 보고 들은 내용으로 사실을 재구성해 인과성을 부여하고 개연성은 물론 꽤 타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 해당해 특별히 인간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쉬운 예로 뒤에서 하면 뒷담화 일 것이며 앞에서 하면 충고나 비판으로 포장될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직관이 판단하는 대로 인상 좋고 착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며 반대로 험악하게 생긴 못된 사람이 나쁜 일을 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선시된 직관적 사고로 이루어지는 편향은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과 판단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저자는 편향이 곧 실수의 지름길임을 지적했다.

 

 

일상에서 나는 잃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한 물건들을 자주 찾기 힘든 곳에 두는 바람에 물건을 찾느라 진땀을 뺀 적이 많다.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더 신경 써서 보관한다는 것이 꼭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찾고 보면 어이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며 장소를 선택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험과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서 물건을 찾는다고 한다. 특이한 장소라면 기억하기 쉬울 것이라는 착각이 화를 부르는 것이다. 특이한 장소는 반대로 기억하기 최악의 장소이며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장소이다. 연구자들은 무언가를 숨기기에 알맞은 최적의 장소는 숨길 물건과 숨길 장소가 곧바로 연결되는 곳이라 말한다. 사람들의 머리는 의미의 연결 없이 단순한 문자만으로 기억이 가동될 만큼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엊그제도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들어오다가 아파트 현관에서 비밀번호 12자리 중 끝에 4자리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창피를 무릅쓰고 경비실을 호출한 적이 있다. 비밀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어렵게 구성하다보니 가끔씩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의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구성하는 논리에 의미를 붙이고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실수를 거침없이 자행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편향 중에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힘든 종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검정이나 빨간색 캡슐의 약이 흰색보다 약효가 강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어이없는 결과는 충격적이기 까지 했다.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약효라는 과학적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니 새삼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구나를 실감했다. 첫인상에 대한 집착도 인상 깊었다. 시험을 칠 때 처음 선택한 답에 집착하면 정답을 맞히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는 처음 택한 답을 고치는 학생이 정답을 맞힐 확률이 많은데 우린 답을 고쳐서 틀린 경우를 더 기억하기 때문에 여전히 처음 답이 정답일 것이라 믿는다. 나 역시 학창시절 처음 생각한 것이 답이니 절대로 고치지 말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얼마나 들어왔던가. 후보자 선호도에서도 능력보다는 외모가 주는 첫인상이 결정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입증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후보자의 정책이 더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쉽게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이는 행동하지 않았을 때보다 행동했을 때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인간의 후회심리를 반영한다. 무언가를 실행하다가 실패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난 4.11 총선에서도 우린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어 후회를 하느니 차라리 여당을 선택하는 편이 후회에 안전하다고 판단한 유권자를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시험에서도 괜히 답을 바꿔서 틀리는 것보다는 내버려 두는 편이 덜 후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애초 믿은 대로 변화하지 않으려는 습관. 역시 단순한 인간에겐 의심보다는 확신이 더 편하기 때문일까.

 

 

과신은 자신에 대한 무지이다

 

 

이처럼 편향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용하며 판단착오에 큰 영향을 준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편향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줄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편향만큼이나 무책임한 또 하나의 요인은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며 과신을 근거로 한 실수는 주식이나 기업 경영의 실패로 이어지기도 한다.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은 실제 자기 성적보다 더 부풀려 성적을 기억하고 자신의 얼굴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으로 평가하며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을 더 중책으로 여긴다고 한다. 다이어트는 몇 개월 내로 성공할 것이며 헬스 이용권은 연중 적절히 활용할 것이며 대출금은 때가 되면 갚을 수 있다고 믿는다. 보통 여성보다는 남성이 자신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고 지능이나 매력도 높게 여긴다.- 그래서 전쟁이나 금융쪽에 남성이 더 과감한 것이다 -  여성은 실수를 했을 때 보다 자신을 더 책망하고 남성은 여성에 비해 빨리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이는 남성이 좀 더 낙관적인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가 남성과 여성이 실수에 이르는 과정을 구분하는 덕에 나는 어떤 실수가 각각의 성별에 더 어울리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미래는 결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과거의 말이나 행동을 미화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과거의 기억을 긍정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장밋빛 안경’ 이라 칭했다. 사건의 결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과거의 사건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이미 결정이 나버린 일은 얼마든지 ‘사후해석’을 통해 필연적인 사건으로 포장할 수가 있다. 실연이나 실패는 마치 미래를 위한 초석쯤으로 보이게 된다. 상처가 지나간 뒤 과거를 모두 받아들인 후 그때 일을 좋았던 것으로 해석하면 현재 시점에서 미래는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이 한참 서로를 할퀴며 싸우고 난 뒤 시간이 흘러 그 일은 우리 관계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서로의 눈에 ‘장밋빛 안경’을 끼워 준채로 미래를 낙관했다면 그 연인은 반드시 비슷한 이유로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평가 하는 데는 대부분 너그럽고 어떻든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든다. 나 역시 사업이 망한 이유는 남은 내 인생의 성공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고 여기고 있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도 다 지나가고 나니 하나도 이해되지 않을 일이 없는 것이다. 사후해석 편향은 이렇듯 과거를 덮거나 묻는 익숙한 방편이 되어 왔다.

 

 

그 외 실수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대충 보고 간과하는 습관, 멀티태스킹의 신화에 사로잡혀 집중력을 잃게 되는 경향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알고 익숙한 것은 자세히 쳐다보지 않는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지 15초 만에 과거의 문제를 망각하는 단순함도 지녔다.투자자들은 주 초반에 나온 소식은 꼼꼼하게 챙기면서 주 후반에 나온 소식은 대충 본다. 자기가 쓴 원고는 절대 자신이 교정볼 수가 없다. 회사에서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다가 전화 등의 방해를 받은 후 다시 본래의 집중력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이나 걸린다. 특히나 40대 이후부터는 집중력이 본격히 떨어지는 시기이기에 멀티태스킹은 실수를 부르는 자유路인 것이다. 운전하면서 네비게이션을 조작하거나 전화를 받는 것도 실수를 부르는 위험한 발상이다. TV를 보면서 뜨개질을 한 적이 있는데 다 뜨고 나서 펼쳐보니 특정 부분만 실의 조직이 더 엉성하게 짜여 진 적이 있다. 보통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며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많다. 실수를 유발할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 놓고 또 실수했다고 자책하는 주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했다.

 

 

더욱 씁쓸한 것은 편향은 편향사실을 공개하거나 인정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명백한 근거나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도 자신이 옳았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문가 일수록 무언가를 처리하는 그 한 가지 방식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자신은 부정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이후의 잇따른 상황에서 부정한 행위를 반복한다고 한다. 자신은 편견이 없다고 당당히 선언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노선을 확실히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그 아는 것보다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인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적, 객관적이지 않다. 자기 이성은 자기 직관을 이기지 못한다.

 

 

실수는 행복을 위해 존재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합리적이지 못하고 생각만큼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이 실수 없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과 비슷한 논점을 펼쳐낸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결론 내기를 끊임없이 자신의 직관을 이성으로 의심하라고 충고했다. 직관은 손 쓸 틈 없이 저만치 멀리 달아나지만 이성은 한참이나 느리고 게으르다. 느린 이성으로 빠른 직관을 제때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저자가 밝혀낸 실수의 원인 중 꼭 나쁘지만은 않은 습관도 있다고 여겨진다. 사람의 단점은 곧 장점과 연결되므로 똑같은 성격이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건을 엉뚱하게 재구성하는 습관은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사고의 오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 영역은 아닐까.

 

 

파리주민은 지도에서 센 강을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인식한다는 예처럼 사람은 세상을 본능적으로 균형 잡힌 모양으로, 더 정돈된 형태로 바라보고자 한다는 사실이 희망적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인식의 정확도로 보자면 분명 왜곡하는 습성이겠지만 이 부정확성과 비현실성이 외려 사람을 다시 살게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다. 인간의 합리화 과정에는 반드시 그 사람만의 독특한 기질과 성격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별자리를 중심으로 구성하듯 하루 동안 겪은 사건 중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서열화하여 재구성한다. 모든 것이 내 중심이고 내가 사는 세상의 주인공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각은 종종 위로의 일상이며 왜곡은 사고전환의 필수이다. 현재의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에 착각이나 왜곡만큼 도움닫기를 해줄 만한 것도 없지 않을까 싶다. 절망이 일어나기 전까지 착각은 현재를 버티는 유일한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무언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상황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존재이다. 그 방법을 빨리 배울수록 행복과 평화가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이 터진 후에는 자신의 결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위로를 할 줄도 안다. 남들은 다 틀렸다고 손가락질해도 그토록 맞고 싶어 했던 마음만은 오직 자신만이 이해해준다. 우리가 이야기의 원형을 파괴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무언가를 각색하는 일은 어쩌면 생존본능에 해당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은 애초부터 절망이 아닌 희망을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는 사실도 곧 사소한 이유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행복하면 실수도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실수에 대한 결론은 무엇이 궁극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양식부터 알아봐야 한다는 저자의 결론에 동의한다. 그러나 덧붙여 자신도 모르는 채 실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첨언도 곁들이고 싶다.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은 애초부터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인간만큼 희망이나 미래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실수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앞으로 더 행복해지기 위해 실수를 줄이는 삶을 살고 싶다. 실수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최소한의 실수로 최대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지나간 실수의 원인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실수하는 인간에게 더 매력을 느껴온 사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실수를 너그러이 포용하듯 누군가도 부디 나의 실수를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내 실수를 돌아보았기에 기꺼이 상대의 실수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다함께 행복해지는 지도를 그려나가야 하지 않을까. 실수를 지금보다 줄여야 할 이유가 있다면 나뿐만이 아닌 당신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의가 공동체의 가치로 자리매김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덧붙임)

 

 

 

 < 생각에 관한 생각 >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저/이진원 역 | 김영사 | 원서 : Thinking Fast and Slow


리뷰에 인용한 책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는 꼭

<생각에 관한 생각>의 축약본 같았달까요. 비슷한 논점이 반복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직관'과 '이성'을 두 인물로 내세워 인간의 사고체계가 가지는 허술점을

밝힌 책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직관이 주인공이고 노벨상을 탄 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주장했습니다. 살면서 직관은 본능에 가까운 예지력이나

무당이 점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라 여겼는데 이 책을 읽고 직관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량은 500p가 넘고 전문용어가 많은 편이지만

자세한 설명과 흥미로운 실험등으로 지루한지 모르고 파고들게 되는 책입니다.

평소 인간의 사고체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면 유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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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5-0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과 '잘못'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 때에
내 '눈에 드리워진 들보' 때문에
스스로 이쪽 저쪽으로 편을 가르고 마니까,
마치 이것은 '잘'이고 저것은 '잘못'이라고
금을 긋고 말아요.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하는 까닭이 있어요.
찬찬히 숨을 고르면서
생각을 기울이노라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깨달을 수 있어요.
나한테 무언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생겨요.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한사람 님 삶과 마음에
이러저러하게 맺힌 앙금과 안개와 구름이
시나브로 걷힐 수 있기를 빌어요.

철수 2012-05-0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수..
어떤위치에서 누가하느냐....이를테면
의사, 판사, 고속버스 운전수, 비행기 조종사...
어떤상황에서,실수에 대해 용서를 빌고..용서를 받고 하는게 애매하겠죠.
사소한 실수일지라도..
그 실수로 인한 자신의 손해뿐아니라 타인의 손해의 크기가
쟁점이 될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일어날수 있는 소소한 그야말로 '실수'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발생할수가 있겠죠.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벼운 실수에 대해서
미소로 답하는 그런 사회를 꿈꿉니다.

리뷰 잘읽었습니다.

비연 2012-05-0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책인 듯.
리뷰 잘 읽었어요. 같은 책을 읽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친근감 게이지가 상승하니..
역시 알라딘 서재에 머무는 맛은 이런 거겠다 싶어요..^^

2012-05-02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4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 클라시쿠스 - 클래식 멘토 7인이 전하는 클래식 대화법
김용배 외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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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에는 어떤 눈물을

 

 

봄. 봄바람. 봄비. 봄처녀...

 

 

사실 그렇다. 불혹을 지난 여자에게 봄은 어떤 의미인가. 활짝 핀 벚꽃은 무슨 의미인가. 흐드러진다는 건 어떤 심경인가. 언젠가부터 해마다 봄이면 이 느낌을 설명해보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해석은 그때마다 틀렸고 꽃이 피는 이유만큼 지는 이유가 존재했다. 즉, 그때 봄에 처한 내 상황에 맞추어 꽃도 피고 봄도 가고 그랬던 것이다. 봄뿐만 아니라 의미부여하기 참 좋은 가을이나 겨울도 늘 그래왔던 것 같다. 계절이 아무리 네 가지 스타일이라 해도 한 사람에게 있어 계절은 그가 살아온 나이만큼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

 

 

요즘 들어 발견한 봄의 심상은 두려움이다. 지난날의 이별, 잦은 실수, 뜻밖의 시련, 이런 것들이 생각날까봐 나는 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꽃구경 가자는 말이 꼭 돌아오기 힘든 어디 먼 곳에 가자는 말로 들린다. 왜 그럴까. 사람의 뇌에 축적된 데이터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잘 정돈된 서랍처럼 생겨 먹진 않은 것 같다. 뇌 과학 같은 건 한 글자도 공부해보지 못한 내 방식대로 뇌 스캔을 해보자면 계절의 데이터는 내가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난립된 융합의 창고이다. 이 데이터들은 진화와 쇠퇴를 반복하면서 한 인간의 성장과 추락에 조용히 기여한다. 각 데이터들 간의 비교우위를 논하고 싶지만 인간은 한 곳에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정된 함수를 가지진 않는다. 예를 들어 올 봄에는 벚꽃을 보고 20년 전 헤어진 사람을 떠올릴 수 있지만 작년 봄에는 그때 만나던 사랑에 더 집착했을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나이가 들어가면 축적된 데이터와 그 데이터가 등장해 해당 계절을 지배했던 2차 데이터가 증가하고 그것들은 다음 계절을 맞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발전한다. 매해 봄마다 느꼈던 소회가 똑같았다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 총량의 무게로 인해 - 데이터의 사용양의 증가로 인해 - 감성의 깊이가 더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데이터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알 수 없는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소실되기를 바라는 시점이 온다. 나는 그 시기가 어떤 특정 계절을 같은 방식으로 견뎌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것을 보게 될 때가 아닐까 한다. 지난 봄에 보지 못했던 나무, 지난 봄비에 맞아 보지 못했던 바람, 지난 벚꽃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 혹은 슬픔. 계절은 나를 보기 좋게 통과하는 것 같아도 나 또한 계절에 그다지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봄을 걸어가며 제대로 느낀다.

 

 

이번 봄에 나는 흘러가는 음악의 가사 한 줄에도 폐부가 찔릴까봐 노래하지 않고 연주하는 음악만 들었다. 주로 뉴에이지풍의 피아노곡과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 가사가 없는 음악은 책을 읽을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집중력에 많은 도움이 된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무잡념의 시간은 나같이 생각 많고 머리 복잡한 사람에게 영원한 이상향이다. 지난날 적지 않은 세월을 성과위주의 삶을 살아왔기에 아직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결심한 일들은 해치우지 않고선 맘 편히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숙제를 끝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나는 늘 지금 말고 다음 과제를 질문하여 생을 달려왔다. 그렇게 달리다만 보면 스스로 멈추고 싶어도 관성에 의해 자기 몸이 의지대로 되질 않는다. 결국 나는 천천히 멈추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절벽너머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서도 계속 달리면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잠시 멈추는 법, 멈추고 쉬는 법, 쉬면서 계획하지 않는 법,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이런 것들을 몰라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을 모르고 자신을 소모하는 인생밖에 더 되었을까 싶은 것이 요즘이다.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무언가 삶을 리셋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아니 잠시라도 소모된 내 인생에 평화의 휴식을 제공하고 싶다면 클래식을 듣기를 권한다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오랜 세월 클래식 방송을 해왔던 평론가와 연주가, 방송인들의 이야기이다. 클래식 전문 방송 'KBS클래식 FM' 개국 33주년 기념도서이기도 하다. 93.1을 자주 즐겨 들었다면 7명의 저자들이 익숙할 것이다. 언젠가 비가 사정없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누군가와 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였다. 무심코 맞춰놓은 라디오에서 파바로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반포대교 건너 올림픽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차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평균속도 20km로 주행하고 있었다. 와이퍼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내쳐지는 빗물도 덩달아 격해지고 있었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빗물이 앞을 가리는 것인지 눈물로 시야가 흐려진 탓인지 운전을 더 하기가 힘들어 졌을 때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리곤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금 뚫려진 도로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감성을 건드렸던 음악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인지 알지 못했다. <당신의 밤과 음악>을 진행하는 이미선 아나운서는 출연자들 중 송창식의 이야기를 하며 이 노래를 회상했다. 성악가 지망생이었던 송창식이 선생님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생활이 어려워서 중간에 성악을 포기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테너 베냐미노 질리의 목소리를 꼭 빼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작년인가 놀러와에서 쎄시봉 특집에 송창식이 조영남과 이 노래 앞 소절을 부른 기억이 난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다시 노래를 들어보았다. 아무일 없었지만 다시 눈물이 흘렀다. 남 몰래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 있는 분들게 추천하고 싶다.

 

 

#2. 오늘은 어떤 음악을

 

 

이 책의 저자들은 하나같이 일상에서 클래식을 듣다 보면 삶이 풍요로와지고 행복해진다 주장한다. 또 클래식이 어느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젠 손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며 한곡이라도 집중해서 들어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다 점점 문학이나 미술 등의 인접장르 속에서 음악을 발견하는 재미도 느껴보라 말한다. 음향기기에 집착하거나 특정 연주가 한사람에게만 몰두하거나 특정 작곡가만 찾아서 듣는 것도 나름의 클래식을 이해하는 방법이라 전한다. ‘클라시쿠스’라는 말은 원래 고대 로마에서 시민 계급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최상급을 지칭하는 계급용어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 클라시쿠스는 최고의 계층이 아니라 일상에서 클래식과 동행하는 사람, 클래식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일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클래식을 대중가요보다 더 우선시 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클래식 연합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그땐 다른 대학교 선배들이 술 사주고 영화 보여 준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들은 확실한 부르조아였다. 당시 그 나이 대 - 정신이 제대로 박힌 ㅋ - 선배들이라면 대부분 민주화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 선배들은 아메리칸 트래디셔널의 달달한 자켓을 입고 머리엔 무스를 바른 채 아버지 자가용을 끌고 다녔다. 우린 철없게도 그 선배들이 예매하는 영화를 좋다며 졸졸 따라다니며 무료 관람했고 이 나라의 오렌지족 문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때 우린 매주 한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그 작곡가의 일생을 토론하고 끝나고 나면 신나게 호프집에 가서 건배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 -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OST 로 유명 -, 드보르작의 교향곡,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이런 곡들이다. 이 책에서도 클래식 동아리 활동을 한 저자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클래식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클래식은 부르주아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택한 하나의 예술적 표상이 맞다고 확신한다. 적어도 당시 지방에서 부모님이 소 팔아 보내주신 돈으로 학교를 다니며 오월의 축제기간에도 공부를 하던 선배들은 클래식 같은 건 듣지 않았다. 그때 동아리 선배들이 지금 이 나라 클래식계의 주류가 되었는데 이제와 우린 부르조아가 아니다 말하는 건 명백한 위선이라는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분위기속에서 클래식을 들어왔고 전공이나 취미가 음악이었고 직업까지 이어졌다면 대부분 모범생의 길을 걸어왔거나 보수, 우파 일 확률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이건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좌파가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좌파는 클래식을추구하는 성향과 정치적인 진보의 자세간에 괴리감을 많이 느낀다. 클래식은 귀족과 모범생, 격식과 예절, 보수와 기득권, 안정, 교양, 불변등의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역사속에서 노동과 혁명은 전복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클래식과는 상반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에서 더욱 미적가치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경쟁과 계산중심의 자본주의에서는 그야말로 특정 계층만 진정한 휴식이 가능한 것 아닐까. 사회주의에선 다 같이 같은 신분으로 놀이를 향유하고 서로가 교감하며 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와 정치적 관점이 아닌 삶의 가치관과 꿈꾸는 방식으로 보자면 클래식은 외려 좌파에 어울려야 맞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저자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체와 주장을 피력한 사람은 유정아였다. 방송인 유정아는 클래식의 속성이야말로 ‘혁명적’이라 주장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꿈이 테너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녀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기존의 것을 지키고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견디거나 혁신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즉, 음악을 듣는 행태는 보수적일지 모르나 그 청취를 통해 내 몸속에 들어온 음악은 나와 세상을 바꾸는 적혈구가 된다는 것이다. 서양의 클래식은 자신의 삶을 지켜줄 절대자에게 바치거나 노동의 힘겨움을 잊기 위한 의식에서 생겨났다. 작곡가는 음악이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교회나 왕, 귀족을 위해 봉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오늘날에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클래식을 상류층이 즐겨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 작곡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호흡이 그들의 삶과 음악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클래식 말고도 다른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고 시대적 환경과 변화에 따라 취향도 다양해졌을 뿐인 것이다. 내 생각에 클래식은 다른 음악보다 시간과 공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음악의 근원적인 보편성을 자기 본질로 획득하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이 클래식의 장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들음으로써 과연 내안에서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냐 인 듯하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클래식을 듣는 방식 또한 다양할 것이다. 요즘은 클래식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어플도 다양하고 손쉬운 음원서비스도 많아 공연예술의 높은 문턱을 보완해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다. 혁명하고 싶으면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거창하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도 주체없이 눈물이 흐르고 마는 이 내 한 몸에 쏟아지는 저 처연한 계절을 견디기 위한 백신으로서라도 클래식은 아주 좋은 적혈구 주사가 되어 줄 것이다. 나처럼 봄이 시리고 아직도 겨울 옷을 벗지 못한 많은 분들과 이 책에서 소개하는 추천곡을 같이 듣고 싶다. 오늘만은 행복한 클라시쿠스로 살자.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그 다음 날엔 또 그날의 오늘로...

 

 

 

 

 

꽃미남 연주자들로만 구성된 눈이 즐거워지는 연주다.
피아니스트 지용과 비올라의 용재 오닐의 표정에서

애절함을 느껴보자.

 

<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Op.114 '송어' 4악장 - 2010 디토 페스티벌 실황 中 >

 

앙상블 디토

바이올린 - 스테판 피 재키브

첼로 - 마이클 니콜라스

비올라 - 리처드 용재 오닐

더블베이스 - 다쑨 장

피아노 - 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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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4-1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같이 들어야 하고,
아이들도 청소년도 들어야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노동자도 대통령도,
군수도 공무원도,
버스기사도 농사꾼도
다 함께 느긋하며 즐겁게 들어야 한다고 느껴요.

철수 2012-04-1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기 좋은 멜로디입니다.
거울같은 강물에 숭어가 뛰노네..
화살보다 더 빨리 헤엄쳐 뛰노네..
나그네 길 멈추고 언덕에 오올라아서..
경쾌한 해석이 아주 좋네요.

아..글은 안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긁적긁적..

2012-04-19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4-19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제 편견인데... 우파는 클래식을 안 들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ㅠㅜ
제가 부산 살거든요. (여기서 우파는 사회학, 정치학적 우파 말고... 보수꼴통들이 자기들이라고 우기는 우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