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혁명 - 리딩멘토 이지성과 인문학자 황광우의 생각경영 프로젝트
이지성.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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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도 혁명이고 책도 혁명이다

 

 

 

   고전을 읽어야 두뇌가 천재성을 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고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쓴다면 아마도 그건 이 책을 뛰어넘진 못할 듯하다. 이 책의 반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딩하라>를 떠올리게 하고 나머지 반은 황광우의 <철학하라>와 연결짓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고전을 읽어야 천재도 되고 리더도 되고 삶의 고민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영리하고 효율적이며 적절한 조합이다. 기회가 닿지 않아 미처 <리딩으로 리딩하라>를 읽어보지 못했거나 <철학하라>가 부담스럽다면 이 책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을 듯하다. 두 책을 절묘하게 믹스했는데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모델이 탄생했다. 바로 ‘혁명’의 테마이다. 두 사람 각자의 책이 ‘자아혁명’이었다면 두 사람이 함께하니 ‘관계혁명’이 되고 나아가 사회 및 국가혁명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핵심 타겟은 작년 한해 백 만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해당 주인공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김난도 교수는 이 책이 ‘이 시대 모든 청춘을 위한 지침서’라고 추천하고 있다. 턱없이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는 방법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말하는 혁명의 방법이 필수적이라 말하고 있다. 청춘이 지난 지 한참이라 생각하는 나도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꽤 달달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김난도 교수의 책이 좋고 나쁘고 혹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온 국민이 무슨 열풍처럼 불안한 심정을 추상적인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에 기대었다는 사실이다. 그 책이 감성코드를 자극했다면 이 책은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이성코드를 두드리고 있다고 할까. 위로의 공감대와 연대 후에 이차적 방안으로서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지성과 황광우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전을 읽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와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기 위해 변화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스펙 쌓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아르바이트로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끈질기게 고전을 시작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것이 청춘의 사명이자 임무이고 결국 혁명하는 길이라고 선동한다.

 

 

   사실 어찌 보면 피켓 들고 거리에 나가 시위하는 것이 (질 확률이 많은)몸의 혁명이요 책 읽고 앉아서 생각 바꾸는 것이 (이길 확률도 있는)정신혁명이라는 다소 보수적인 뉘앙스로 읽힐 우려도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생각은 바뀌고 마음은 움직인다. 또 하나 이 책도 결국 고전읽기를 독려하는 설명서이자 중요 고전의 해설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것 보다는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맹자와 플라톤을 집어 드는 것이 더 효율적인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각종 자격증을 위한 참고서와 실용서, 그리고 신간 자기 계발서를 외면하고 플라톤의 <향연>이나 한비의 <한비자>를 읽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이 필독서라는 것도 알고 읽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됨을 잘 알고 있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여간해선 큰맘을 먹지 않고서야 인문고전을 펼쳐들기 힘이 드는 것이 우리네 익숙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두렵고 아득한 마음을 제발 바꾸라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시작을 하라고 이런 책을 쓴 것 같다. (제목을 혁명으로 한 것도 환기를 위한 자극이 아닐까) 이런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고전에 대한 필요성은 늘 잠재적인 채로만 숨어 있어 습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공자와 이이, 플라톤, 애덤 스미스와 토마스 모어로 가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그냥가도 되지만 징검다리는 무엇보다 건너는 재미가 있고 덤으로 추억도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한번쯤 건너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니까.

 

 

 

생존은 성공이 아니라 혁명이다

 

 

 

   요즘 트위터를 하다보면 여기가 무엇을 하기 위해 모여든 곳인지 새삼 의아할 때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소통하는 것인지 너무나 혼란스럽다. 아니 정말로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발설하는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럽다. 어떠한 사안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에 휩싸여 감정을 드러낸 글, 즉각적인 피드백이 되어 무차별, 무한정으로 확산되는 글, 부정의 말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다소 경솔해 보이는 글, 이런 글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다가 누구를 향해 떠들고 있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떤 고속도로 휴게소에 위치한 화장실처럼 그때그때 감정의 배설물을 마음대로 적어 놓을 수 있고 마음에 맞으면 다른 사람 것도 마구 가져올 수 있고 시큰둥하면 모른 척해도 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거대한 공동의 장소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음향만 없을 뿐이지 어느 시장통에 불난 호떡집처럼 귀가 어지럽고 흡사 학창시절 쉬는 시간 십분 동안 떠들어대는 친구들의 소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소음이 그냥 일반 소음으로 지나가면 될 터인데 어떤 날은 그 소음으로 어이없는 상해를 당한 사람이 등장한다. 엊그제만 해도 어느 음식점에서 종업원과 다툼이 일어난 임산부가 업체 이름을 밝히며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 글을 올리자 사람들은 갑자기 벌떼처럼 모여들어 그 업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업체는 상당한 매출피해를 보았고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경찰조사 결과 종업원은 임산부가 주장한 것처럼 배를 발로 걷어차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임산부가 괘씸한 마음에 좀 과장해서 업체와 사람을 비난한 것일 뿐이었다. 조사 발표 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임산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엊그제 실컷 욕했던 종업원을 두둔하는 것이었다. 하루 만에 전세는 역전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진실이 드러난다면 내일이면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 것인가. 비단 이번뿐이 아니고 어떠한 사안이 수면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바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옹호하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고 단 몇 줄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단지 의혹만 제기되었을 뿐인데 하루가 지나면 기정사실화 되어 있고 소문은 진실이 되어 있다. 누군가를 붙잡고 나면 모두 다 이렇게 일이 커질지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그냥 내 생각을 몇 자 적어 올렸을 뿐인데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이 적어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같은 생각은 무시무시한 파급력을 가진 여론이 되고 무기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꼴을 얼마나 보아 왔던가. 이 모든 건 단지 현상과 사건에 실시간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만의 문제일까. 원인을 제공한 사건 당사자들의 문제일까. 우리는 단지 정의를 원했고 부조리를 비판했고 범죄자를 비난하고자 했을 뿐인데 왜 그러는 사이 우리가 의도치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서 우리는 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을 보는 것이며 왜 길게 보지 못하고 짧게만 보는 것이며 왜 드러난 외양만 보고 숨은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왜 상대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면서 나를 향한 기준은 넓고도 얕은 것이며 왜 기다렸다는 듯 무슨 일만 터지면 눈을 부릅뜨고 그 기준을 가지고 여론재판에 힘을 싣기 위해 스탠 바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혹은 계획적으로 공격을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아 놓고 보니 우리는 기득권층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숨겨 놓고 언제든 보이지 않는 입과 귀가 되어 때가 되면 여지없이 비겁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가해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다수의 네티즌, 불안한 청춘, 추락한 중산층, 이른바 2040 세대의 많은 이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의 몸부림을 보아줄 여력이 없는 듯하다. 냉소와 무관심의 만연. 그러면서도 놀랄만한 집중력과 발빠른 순발력. 광기가 휘몰아치는 순간의 소리없는 아우성. 침묵의 아비규환. 누군가의 절망 혹은 실패, 아니면 항복.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표면적인 평온...... 이것이 과연 첨단의 오늘을 살아가기에 스마트한 생존방식인 것일까. 혹시 우리는 생존의 의미를 혼자 살아남는 서바이벌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학교나 회사, 국가의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것이 생존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공하는 삶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때다 하고 결격사유가 되는 사람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생존을 경쟁과 성공의 프레임으로만 인식하면 반드시 나 아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죽거나 패배해야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의 ‘생존’이란 학교, 회사, 국가에 기대어 그 속에서 남을 밀어내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다운 나, 삶다운 삶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학교나 회사에서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나다운 나로 살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그들이 제공하는 생각으로 생존하는 시스템은 백날 해봤자 그들의 노예로만 사는 길일 뿐이라고. 변화된 생각으로 자신을 바꾸는 ‘자아혁명’, 그러한 자아가 모여 사회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관계혁명’이 완성될 때 비로소 내가 생존하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루어진 혁명을 통해 최종적으로 진짜 인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그것은 곧 나만의 고전을 쓰는 고전혁명이 아니겠냐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자칫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급진성에 짓눌려 깃발을 든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선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고전은 단지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성찰하여 고민한 사람들과 그들이 이룩한 결과물의 총체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것들 중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면면히 살아남은 아주 질긴 생명체인 듯하다. 그렇다고 나는 이 책이 대단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 너가 고전을 읽고 그것을 나눔으로 해서 사회, 국가를 바꿀 수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단한 혁명의 논리를 펼친 것이 아니라 고전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고 제시했을 뿐이다. 적어도 이 더럽고 비열하고 냉소적인 세상을, 가진 자만 배부르고 못가진 자만 쪼들리는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출발점을 고전으로 보고 연결고리를 논리화 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고전은 곧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혁명이기 때문에. 혁명이란 세상을 뒤엎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뒤집는 일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판을 짜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자는 혁명하는 방법으로 고전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생각’하고 다시 ‘질문’하고 그러면서 ‘변화’하라고 충고한다. 나아가 내가 읽은 것을 나누고 함께하라 지시한다. 아프고 좌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찰하고 누구의 잘못인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과 거짓 하는 정치인에게 속지 않고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라 가르친다. 고전을 읽는다고 이러한 깨달음이 당장 눈에 띄는 가시적 효과를 가져 오지는 않지만 분명 그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주장한다. 수레바퀴는 매번 반복해서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아도 수레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 책의 후반부엔 나와 사회, 국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위해 엄선된 동서양 인문고전 10선이 소개되고 있다. 자아혁명에서 시작해 관계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잘 상징하는 느낌이다. 장자의 <장자>는 세상이 절대가 아니라 상대라는 것을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역사가 패러다임의 교체에 관한 문제이지 객관성과 고정불변의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므로 우리에게 관점과 상대주의를 시사한다. 내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고 내 판단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는 뜻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혜능의 <육조단경>은 행복의 이상향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결국 마음에 달려있다고 우리에게 낙원과 행복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공자의 <논어>와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각각 대동사회와 이상국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는 동서양의 비슷한 결론으로 보고 지금의 우리 시대를 반추해보는 거울로 삼으라 충고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이이의 <성학집요>를 통해 리더의 조건을 정리해 볼 수 있으며 신분계급의 타파를 주장한 박제가의 <북학의>와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 부와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을 밝혀보자고 제안한다. 이 모든 고전은 시대적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진보적인 의견을 제시한 샘플들로서 결국 내가 원하는 행복, 내가 역할기능을 수행할 사회, 내가 살아가야 할 국가, 내가 바라는 지도자를 고민하는 방법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궁극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똑똑한 대중, 현명한 국민이 되는 길을 인도하고 있다.

 

 

   고전을 통한 삶의 길 찾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해야할 시급한 임무였다.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다시금 고전 읽기의 중요성과 가치를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한권의 고전을 읽었다고 서재에 책을 꽂으며 내면의 시간을 가졌다고 우쭐해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했던 대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변화하려 애를 써야겠다. 비록 이념의 혁명가는 못되었지만 고전을 통한 혁명가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해서이다. 어떻게 하면 상사의 눈에 찍히지 않는 지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좋지만 왜 똑똑한 신하는 군주를 죽이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한비자>를 집어 들자. 지금 우리 처한 시대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의 시대와 <목민심서>의 정약용의 시대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고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본능, 혁명으로 생존하려는 본능을 일깨우도록 하자. 새로 태어나려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고 모든 가능성 역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고전에서 각자 롤모델을 찾고 나름의 인생의 가치를 찾고 그 가치에 꿈을 더해보자. 그렇게 반복하여 고전을 인내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한층 더 성숙된 시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과 내 머리에서 만들어진 글에 책임을 지자. 다시 옛날의 책상과 제쳐둔 서재로 돌아가자. 아주 먼 훗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때 집어 들려고 했던 고전을 당당히 빼어내자. 함께 간다는 건 같은 생각, 같은 꿈을 꾸는 것이라 했다. 함께 읽는 것은 변화의 에너지에 가장 확실한 근원이 될 것이다. 지금, 고전을 펼치시라. 그것이 함께 살 길이고 우리의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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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2-2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못읽어봐서 댓글 남기는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목차를 살펴보고 이 글을 읽어봤는데 뭐랄까, 자기계발서와 인문서를 섞은 느낌이 드네요. 사실 저는 계발서 계통은 절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절대 안보는 편이라ㅠ '철학하라' 라는 책이 더 끌리기도 하고, '철학하라'에서 다룬 고전과 여기서 다루는 고전이 겹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이 책만의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도 좀 궁금하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보다ㅋㅋㅋ 잘 지내고 계시나요? 매번 들르면 이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시간이 흘러있네요.

2012-03-0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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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말

 

 

 

   처음 이 책을 서점에서 보았을 때 끌렸던 이유는 단연 목차였다. 제목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떠올리며 책을 넘겨보는데 스무 개의 목차 소제목은 바로 정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차 중에는 ‘인간성을 지켜라’같은 보편적인 메시지도 있었지만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같은 특별한 조언도 있었다. 목차와 서문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아우라는 중용을 떠올리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일 먼저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1장이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이다) 일단 죽음부터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이 어쩐지 나 가려운 데를 콕 집어 긁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죽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출발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나는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 한 달 전에도 일 년 전 삼 년 전에도 변함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특별히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오 년 전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이다. 물론 엄마가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지만 아버진 십 오년 투병생활 끝에 가신 것이기에 어느 정도 준비기간이 있었다. 아버진 늘 바로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십 오년을 버티면서 내게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투병환자 치고는 그만하면 꽤 오래 사셨다고 까지 생각했다. 어떤 날은 내 젊은 날의 불행이 모두 누워있는 아버지 탓만 같아 하루라도 빨리 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충격이라기보다는 어떤 습관처럼 지켜보던 드라마의 아쉬운 종영소식만 같았달까.

 

 

   나는 아버지 병수발에 지친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랐고 엄마 역시 자기관리가 철저한 분이라 당연히 이변이 없는 한 그러실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삶의 여유를 찾고 돈 걱정 없이 즐기실만하니까 어이없게도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변은 여전했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것이었다. 엄마가 죽었음을 깨달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더 정확히는 엄마 없이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나, 였을 것이다.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 내 평화롭고 안온한 삶도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엄마 사후 일 년 간은 거의 정신병원과 수면제, 심리치료를 달고 살았고 때론 무당굿도 하고 점도 보고 술도 먹고 말 그대로 내 몸 내 맘이 가는 대로, 되는 대로 살았다. 수면제를 끊기 까지 한 육 개월이 걸렸고 사회로 복귀하면서 차츰 일상을 찾기까지 또 일 년이 걸렸다. 삼년 째 되니 조금 제정신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사람이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걸 알았다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외려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고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방황할 때가 더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곳에서 책 읽고 글 쓰면서 틈만 나면 지겹도록 엄마가 죽었고 아빠를 미워했다고 떠들었다. 책을 선택하고 글을 써대는 어떠한 기준도 없고 오로지 책과 관련해 어떻게든 이런 내 자신, 지금 내 상황과 화해를 하려 애를 썼다. 돌아보면 서평내용도 순전 모두 용서하는 밤, 그리하여 내일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자는 결론을 내는 식이었다. 책과 상관없이 나는 어쩌면 그 말을 하고 반복해서 되뇌이려고 서평을 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읽고 쓰고 또 읽고 써도 잠들 때 드는 마지막 생각은 단 하나, 이대로 죽어서 만약 내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쩌지, 만에 하나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날(사고) 이후 열에 일곱은 그런 밤이었다. 그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을 때 나는 갑자기 일어나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냉장고를 열어보고 서랍을 열어보고 아이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속옷을 갈아입은 다음 지인들에게 뜬금없이 그 새벽에 인사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꺼버리고 다시 눕고는 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부모님과 찍은 사진, 졸업사진, 결혼사진, 아이 백일사진, 돌사진을 확인하고 불을 켜고선 거울을 들여다봤다. 도저히 내일 죽을 사람같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이 거짓말 같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도 오늘 하루 살아내었다가 아닌 오늘 하루 죽어갔다고 달력에서 날짜 하나를 쓱쓱 지우며 눈을 감았다.(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엄마도 내일 자신이 죽을지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행을 가시는 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엄마가 훌훌 깃털처럼 가볍게 떠나시던 뒷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침에 마지막 통화를 했을 때 들떠있던 목소리도 기억한다. 엄마의 집은 변함없이 청소가 되어 있어 깨끗했고 이불도 빨래도 냉장고도 쓰레기도 모두 완벽했다. 생각해보니 한 평생 엄마는 항상 청소를 하고 집안을 완벽하게 치운 다음 외출을 나가셨다. 엄마가 죽는 날은 특별히 다른 날이 아니었고 늘 자신이 하던 대로 했을 뿐인 날이었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임을 깨우쳤다. 단지 그 일상은 일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예측불허의 순서였을 뿐이었다. 누구도 그 일상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가족이나 친구가 그 일상의 주인공이 되었을 경우 비로소 자기일상의 마지막을 남몰래 그려본다. 엄마는 어느 바람 좋은 봄날 꽃구경을 갔다가 오후 세시 이십분에 죽었다. 사망진단서에 쓰는 말로 두개골 골절이고 내가 하는 말로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 머리가 깨지기 직전까지 꽃노래를 부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불렀던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 지가 궁금해지기 까지 오년이 걸렸다. 정신과 의사는 내게 사람의 시체가 끔찍한지 알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무뎌지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온다고 위로했다. 나는 아직까지 엄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엄마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이후 죽음과 엄마를 매일 생각했더니 그렇게 되었다. 충격은 점점 무뎌지고 엄마의 마지막 일상은 내 일상 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어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옥죄고 있는 현실은 그 일상이 바로 오늘 혹은 내일일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그 일상에 대한 불신과 확신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며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바로 어제까지 같이 일을 한 사람이 오늘 아침 죽은 경우가 꽤 된다. 이 지독한 일상의 트라우마가 나에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변형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나에게 산다는 문제는 곧 죽는 날까지 산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와 같은 뜻인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결국 모두 어떻게든 죽기 때문이 아닐까 해서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문제가 왜 중요하냐하면,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죽는 것을 믿지 않고 믿는다 해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겪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죽는 날까지 죽음에서 얼마나 자유로와 질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불안하지 않게 살기 위한 일련의 방침처럼 읽혔다. 물론, 해답은 얻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어느덧 그날이 다가올 것이고 그날이 온다 해도 그 역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 싱겁긴 해도 이것이 오백 페이지되는 이 책을 덮고 난후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사는 길

 

 

 

   먼저 이 책은 몽테뉴의 저서가 아니다. 몽테뉴는 우리 나이로 환갑의 나이까지 살았는데 마흔부터 이십년간 우리가 아는 수상록[隨想錄, Essais, 1586]을 집필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오로지 수상록 한 작품만 남긴 사람이 몽테뉴이다.(바꿔 말하면 수상록을 완성하는데 이십년이 걸렸다. 수상록이 중단된 것은 몽테뉴가 죽었기 때문이므로 더 살았다면 수상록의 집필기간은 더 늘었을 것이며 당연히 페이지도 추가 되었을 것이다) 천 페이지 넘어가는 수상록을 읽어보지 못하고 목차만 훑어보았다. 슬픔, 나태, 선악 등의 제목 외에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같은 일로 울기도 웃기도 한다’,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같은 제목이 눈에 띈다. 정석대로 하자면 먼저 수상록을 읽어보고 몽테뉴만 한 이십년 공부한 저자의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하겠지만 이 책을 먼저 접한다고 해서 원서 없이 해설서만 집어든 것 같은 일종의 부끄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여지껏 위대한 사상가의 평전이나 작품 해설을 이처럼 깊이 있고 재미나면서도 쉽게 서술한 책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몽테뉴에 대한 (교과서적인)부담감 때문에 이 책은 쉬운 쪽이 아닐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술술 넘어가는 터에 그냥 끝까지 내달렸다. 한 이틀 이 책에 올인하면서 간만에 책 읽는 재미를 보았달까. 몇몇 부분 감동적이고 문학적인 결론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저자는 놀랍게도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 여성이었다. 흡사 몽테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마냥 -그것도 개인비서나 친구 혹은 제자, 딸이나 되는 것처럼 -저자는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으로 보였다. 얼마나 읽고 생각하고 연구했으면 몽테뉴보다 더 몽테뉴를 잘 말할 수 있단 말인가.(한나 아렌트의 제자인 엘리자베스 영 브루엘이 쓴 <아렌트 읽기>의 느낌도 든다. 그러나 아렌트의 제자는 학문적인 책임을 가지고 아렌트를 연구한 반면 이 저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그저 몽테뉴를 읽고 독자로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내가 환갑 줄에 들어서게 되는 이십년 후면 몽테뉴가 태어난 지 오백년이 된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몽테뉴와의 오백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마치 유즘 유행하는 인생의 멘토같은 느낌을 받았다. 몽테뉴가 죽은 해는 1592년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다. 몽테뉴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순신을 떠올리면 그는 저 까마득한 세계사속의 한 페이지에 등장할까 말까한 교과서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아마도 어떤 작가와 작품을 말하는 내용의 책으로 자기 주장을 세상에 떠들려면 이 정도가 그 정점의 완성치일 것이다. ‘아마존 닷컴 올해의 책’같은 문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가끔 예외도 있는 것, 그래서 (아무의 권유도 없이 내 돈 내고 책을 산 입장에서) 주저없이 살길을 이 책에서 찾는 방안을 추천하고 싶다.

 

 

   몽테뉴는 약 십년간 둘도 없는 친구가 죽고 아버지와 남동생이 죽고 자식들이 연이어 죽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사람이다. 거의 이년에 한명 꼴로 집안에 초상을 지른 것이다. 잔인한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매일 밤 죽음을 생각하고 먼저 간 사람들을 생각하고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터이다. 그는 우연히 말을 타고 가다가 하인과 부딪히면서 낙마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 극적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된다. 연대기에 의하면 빈사상태의 낙마사고가 있고 3년 후부터 몽테뉴는 에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제일 먼저 우리에게 통보하며 몽테뉴가 그랬듯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선수를 친 것이다. 왜냐하면 몽테뉴가 자신의 빈사체험을 통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려면 일단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타일러 주는 것이다.

 

 

   몽테뉴는 가까운 이의 연이은 죽음과 낙마사고 이후 관직을 은퇴하고 영지에서 내면의 시간을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전환점인 듯 하다. 즉, 그동안 몽테뉴를 가장 괴롭히던 죽음에 대한 개념정리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썼다고 해서 여전히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매일 밤이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몽테뉴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집필을 하게 되며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집필을 중단하지 않게 되며 - 자신의 유일한 작품인 에세와 함께 성장하고 에세를 통해 자신을 완성해 나갔다. 저자는 바로 몽테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에세를 썼다고 분석한다. 이 책도 몽테뉴가 죽으면서 끝이 난다. 내가 만약 앞으로 이십년을 더 살수 있다면 몽테뉴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이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 시기를 온전히 사용한다 해도 그로써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진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과한 후 몽테뉴가 죽기까지 한 일을 이 책을 통해 밝혀주었다. 아마 어떤 이는 나처럼 이 책의 마지막에서 몽테뉴가 숨을 거둘 때 마치 내 임종의 순간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죽는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잠드는 것처럼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이다... 죽음은 대비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p33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잘 사는 길

 

 

 

   몽테뉴는 죽는 법을 배워야 사는 법도 떠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죽는 건 배우자마자 다시 써먹을 기회가 없다. 그저 다른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 단 한 번의 실전을 준비할 뿐인 것이다. 몽테뉴는 실전을 준비하는 장소로 뒷방을 선택했다. 가게 뒷방이라 불린 그곳은 완벽한 도피처이자 상실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장소로 기능했다. 그는 ‘자기탑’에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신뢰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일 매 순간 변화하는 의식과 경험의 흐름을 묘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법, 사물을 바라보는 법, 관찰한 것을 즐겁게 글로 옮기는 법을 터득했고 그게 살아가는 법이라 깨달았다. 그렇게 살다가 꽁꽁 얼었던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믿었다. 생활은 작품과 일치했고 작품은 인생과 일치했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이곳은 자신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외부와의 관계나 소통이 단절된 은밀한 장소라야 한다. 이곳에서는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재산이 없는 것처럼, 시종과 하인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회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나 재산을 잃게 되더라도 이들이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p243

 

 

   그러나 그가 오랜 기간 뒷방을 집필실 삼아 내면의 세계를 성장시키는데 주력했다 하더라도 은둔의 정도를 스스로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느리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일면이 있었고 건망증이 심하고 키가 작았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근엄해 보이는 16세기 법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스스로의 이중성을 "수줍음을 잘 타면서도 버릇없이 굴기도 하고, 순결하면서도 음탕하기도 하고, 수다스러우면서도 말수가 적고, 억세면서도 예민하고, 영리하면서도 어리석고, 무례하면서도 사근사근하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진실하고, 박식하면서도 무식하고, 자유분방하고, 인색하면서도 낭비벽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계획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려고 한 적이 없는 우발적 철학자’라 평했다. 그는 공개토론도 좋아했고 붙임성도 있는 편이어서 공직에선 사교적인 역할도 주도했다. 한창 종교분쟁이 심해 나라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내란에 휩싸여 있을 땐 구교와 신교를 중개하는 역할도 지혜롭게 수행했다.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처럼 그는 성을 개방하고 살아서 외려 안전해진 케이스였다.

 

 

   그가 제시한 관점의 상대성은 때론 싸워서 이길 수 없으면 피한다는 식의 주의전환 같은 요령도 알려주고 동물의 지능과 감정이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법관을 하면서 깨달은 인간의 결점과 오류의 발견은 인간의 이성이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의 배경이 된 듯하다. 이성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허세를 경계하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점 역시 늘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모든 일을 현실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궁극의 관점과 연결된다.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는 이 책에서 언급된 인간적인 번영을 의미하는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나 평정을 뜻하는 ‘아타락시아 (ataraxia)’, 그리고 운명애를 의미하는 ‘아모르파티’ 와 맥을 같이 한다. 모두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상징하는 개념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기적이 일어나거나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고 순리대로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p295

 

 

   몽테뉴는 질병, 전쟁, 기근, 죽음을 흡사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모두 관조하며 광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발 물러나 탑에서 글을 썼다. 자만심과 우월감, 습관, 야망과 탐욕, 가족과 주위환경, 광신, 운명과 죽음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집필하는 것을 종교로 삼았다. 자기모순을 똑바로 관찰하고 결점을 발견하고 이중성과 위선을 인식하며 그것들을 지닌 채로도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깨우치기 위해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불완전한 인간(자신)을 수용하며 완성된 인간으로 발전하는 길이었다. 몽테뉴에겐 관찰이 습관이고 자유가 규칙이고 솔직이 태도이고 여담이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강해’진 것이다.

 

 

 

완전히 빠지는 것은 더 잘 사는 길  

 

 

 

   이 책에는 몽테뉴에 대한 후세의 평가 및 후속작업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같은 책을 가지고도 그가 17세기에는 협잡꾼이나 파괴분자로 비난받았던 사실과 오랫동안 편집의 전쟁이 이어져 왔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전해 받은 몽테뉴는 상당히 정치적이었던 인물로 느껴지는데 저자는 그가 정치에 소질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신흥귀족 출신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교양과 언어를 교육받아온 몽테뉴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몽테뉴에게선 어떤 열등감이나 패배감, 시대적 사명감이나 영웅심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양심과 죄의식에 관한 화두나 지도자로서의(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을 5년 역임했다) 의무와 책임의식, 혹은 권력에의 야망같은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는 포도주 제조나 영지관리에도 무관심했고 가정적인 남편, 다정한 아버지상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철저히 평생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집중적 관찰 및 연구에 몰두한 지독한 에고이스트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매일 매순간 생각해온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몽테뉴와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몽테뉴 말년에 인연을 맺은 사후 편집자 구르네에 관해 저자가 평한 부분에서도 비롯된다. 논란이 많았던 구르네라는 다소 불확실한 여성에 대해 저자는 매우 세심한듯 하면서도 어쩐지 애틋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같은 여성인 저자는 ‘그녀가 완전히 황홀경에 빠졌던 것처럼 누구나 완전히 매료되어야 한다’고 그녀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매료된 것은 저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십년전 부다페스트 헌 책방에서 몽테뉴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그것은 저자가 구르네에게 느낀 동질감이었고 그것은 저자가 몽테뉴에게 감지한 공감과 꼭 일치했다. 또 그것은 몽테뉴가 문학적 동반자 라 보에시에게 느낀 교류의 감성과 일치했다고 생각한다. 몽테뉴도 라 보에시도 구르네도 저자도 분명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고민했고 그들은 모두 거울을 보듯 상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것은 이 책을 읽게 되는 나같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저자는 이 세대를 초월해 이어지는 상호작용 때문에 고전이 각자의 마음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동시에 수많은 독자를 한마음으로 모은다고 부연했다.

 

 

   이 책에는 몽테뉴의 전후 세대를 포함해 그가 살았던 당시 16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과 주변국과의 관계, 그리고 당시 철학적 가치관이 몽테뉴의 인생과 잘 믹스되어 있다. 저자는 현대 비평가들이 자신과 닮은 꼴인 몽테뉴를 리메이크 할 때 반드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텍스트로만 저자의 의도를 분석하고 동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재구성 작업도 결국 몽테뉴를 알아가는 다양한 방식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자는 몽테뉴에게서 배운 대로 판단을 보류하고, 잘못된 판단이 가져오는 오류의 상황도 지혜롭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자신 말고 몽테뉴를 말해온 다른 사람도 정답일수 있다고 하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중요한 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몽테뉴의 에세를 영감을 얻은 누군가가 이어받아 자신처럼 완전히 빠져든 채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마치 우리 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살아가는 다양한 시도(불어로 에세예essayer는 '시도하다'라는 뜻)로 인식되기도 한다. 얼마나 대견하고 근사한 광경인가.

 

 

   문득 몽테뉴가 그의 절친 라 보에시를 사랑한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이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뇌리에 떠오른다. 그는 말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가야 하지만 죽음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고.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라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불행히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은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지 정답을 말해줄 수가 없고 누군가 내게 그럴싸한 답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주체는 결국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썼기 때문이고, 내가 읽었기 때문‘에 어제와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일찌감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각자 아름다운 해답일랑은 알고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 말고도 얼마든지 내게 적합한 답은 한두가지 쯤 얻어 놓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계속하여 질문해 보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지 나와는 같은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답을 교환하고 다른 답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것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지는 하나로 답할 수 없고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과정만이 정의를 말해줄 수 있을 뿐인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답하며 그렇게 죽는 날까지 그 ’어떻게‘를 어떻게든 실천하려 노력하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머리 터지토록 고민해도 어떻게는 살고 하나도 고민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산다. 그냥 살고 잘 살고 조금 더 잘 살고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지만 고민하면 조금 더 지금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희망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다행히도 고민의 주체인 우리 자신에게만은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토록 고민해야 할 이유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덧붙임)

 

오늘이 엄마의 다섯번째 기일이다.

나는 잘 있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오늘도 잘 떠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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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영우 박사가 지난 23일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준비를 잘 하셨나 봅니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더군요.
죽음을 생각하며 잘 살면 좋겠는데
대부분은 죽음도 생각하지 못하며 잘 살지도 못하죠.
저는 죽을 때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고, 가족들에게 최대한 피해주지 않고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는 동안 잘 살아야 하는데 그게 좀 자신이 없다라구요.
이책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오랜만이어요. 오랜만이지만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ㅋ

stella.K 2012-02-27 11: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3월은 저도 좀 기운이 나요. 더 이상 춥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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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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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 돌고래와 아부지

 

 

 

아부지, 기억나? 우리도 사진기 샀으니까 이참에 서울대공원에 가서 돌고래쇼나 보러가자고 그래서 아버지랑 나랑 둘이서 -그때 엄마는 왜 안 가셨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나요. 혹시 두 분이 냉전 중이셨을까요? -버스타고 가서 아주 어색하게 분수대 앞에서 사진 찍고 돌아온 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아부지랑 단둘이서 어디 가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거 같아서 앨범을 뒤져봤어. 그런데 그 분수대 사진에 우리 부녀의 역사적인 날이 85년 9월 8일이라고 찍혀 있더라구. 나 그래서 85년도 달력을 찾아봤지. 일요일이더군. 중3인 나는 가슴에 BANG BANG 이라고 쓰여진 빨간 티셔츠에 죠다쉬쯤으로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어. 사진기가 좋았는지 내 실력이 좋았는지 돌고래도 흔들리지 않고 잘 찍었더라구. 돌고래 한번 뛰어 오르는 게 뭐라고 비슷한 사진이 몇 장이나 있더라. 다른 동물 사진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린 돌고래 쇼를 보러 간 게 맞긴 했나봐. 그날 아부지랑 점심으로 무얼 먹었는지 아부지랑 무슨 이야길 나누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돌고래 쇼만은 또렷이 기억나니 말이야. 그래서 말이예요... 바보같이 툭툭, 눈물이 났지 뭐야. 살다, 돌고래보고 우는 여자 첨 봤다구? 몰라,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그 소설 주인공이 부모님과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보는 게 소원 이었다잖아...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내일이라고... 나도 다른 누구에겐 간절한 소원이었던 추억이 하나 있다는 게 왜 이리 기쁘면서 슬픈 건지 그만 무지 무지 아부지가 보고 싶었어. 맨날 엄마만 그리워했는데 그것도 미안하고 오랜만에 아부지가 사무치게 그리웠어. 그래서 마흔 넘은 아줌마가 열 살 딸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어. 괘씸하고도 얄미운 작가 같으니. 글쎄 나랑 갑장인 작가가 말이야(딸자식이 이제 6학년인거 까지 같더라구), 마지막에 ‘이제 모두 어른이 됐을, 그날 서울대공원을 찾았던 십 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고 아주 뻥뚫린 가슴에 작정하고 에어컨 바람을 광속으로 틀어주더란 말이지. 어디 꼭 나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기껏해야 그 십 만 명 중의 한사람 밖에 못 되었으면서 - 얼마나 찔리던지.

 

 

 

그날 우리랑 같이 돌고래 쇼 봤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처럼 어른이 되어버렸을까? 그래 그들도 나처럼 그때 나만했던 딸자식을 두었을지도 모르지. 혹시 아부지처럼 성미가 급해서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린 사람도 있을 거야.

 

아...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만한 어른이 되었는지 또 어쩌다가 아부지랑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믿기지가 않아서 반나절은 가슴이 먹먹했어. 이 소설 모르긴 해도 나처럼 아부지랑 돌고래쇼 본 적 있는 아줌마 아저씨라면 작가의 안부인사가 어떤 의미인지 눈물 나게 반가웠을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날 돌고래쇼는 보길 참 잘했어!

 

 

 

 

 

 

To : 84년도 단짝 친구

 

 

 

도연아, 기억나니? 84년도에 말야. 너 조용필 신곡이 나왔다고 우리 집에 전화해서 노래 들려준다고 숨죽이면서 오 분 동안 아무 말 안하고 있었던 거. 그때 네가 들려준 노래가 <친구여>란 노래였지.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아... 정말로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은 모두 어디 간 것이냐... 오늘 아부지와 단둘이 찍은 사진을 네가 생일선물로 준 앨범에서 발견했다. 무려 28년 전의 네 필체를 보고선 마치 네 얼굴(네 별명이 도곡동 김성희였다는 걸 밝히면 문제되나?) 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 같았어. 그때 딴에는 멋진 싯구절 베껴 써가며 하루에 한통씩 주고 받았던 편지들 피식 생각이 난다. 예쁜 편지지에 목을 매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구나.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 너도 가끔은 하늘을 보고 사는 거냐. 내가 보는 꼭 그 하늘에서 달도 보고 별도 세고 어떤 날은 그때 친구도 떠올려 보는 거냐. 웃기지? 사회비판적이고 쉬크하기로 짝이 없던 내가 달과 별을 보았냐고 물어 볼 줄 몰랐다구? 이게 다 소설 때문이다 친구야. 우리와 동갑인 작가가 글쎄 자기랑 동갑인 주인공을 만들어서 우리처럼 열 다섯 살 때 보았던 하늘을 생생히 기억하더란 말이다.

 

 

 

그때 우리의 하늘은 온통 우울한 잿빛이었지. 84년은 바로 우리의 우상이었던 조용필이 결혼을 해버린 해였으니까, 하하하. 조용필이 광고하던 ‘두리스바’라고 기억나니? 그 광고 배경음악이 ‘나는 너 좋아’였잖아. 니가 나 좋다고 그렇게 편지에 고백하더니 지금은 어떤 남자만나서 어떤 사모님이 되어 있을까. 들리는 소문에 네가 아주 돈 많은 사업가를 만나서 학교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이라면 네 자식은 지금 걸그룹 누구와 나이가 똑같겠구나. 놀랍지 않니? 우리 애들이 그때 우리와 같은 나이가 되버렸다는 거.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났는데 우리 고등학교 독서실 다닐 때 줄기차게 들었던 휘트니 휴스턴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뜨더라... 그때 노래 좀 한다하는 애들이 쉬는 시간에 부르던 ‘Greatest Love Of All’... 그 노래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라. 실감도 안 나고 그냥 그랬는데 노래를 들으니까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저려오더군. 추억이란 그런 걸까. 우리 좋아하던 가수가 죽었다고 우리의 추억이 사라진 건 아닌데 더욱 우리의 이별이 실감나고 그래서 더욱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시절이 그립더라. 독서실 옥상에서 대학을 꼭 가야하는가, 얼마나 고민하고 떠들었니... 그때 보았던 우리 하늘엔 현정화, 양영자 선수가 탁구 복식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환호성이 일제히 울려 퍼졌었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땐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을지도 그땐 몰랐다... 1984년 그때 우린 고작 열 다섯 살이었다, 친구여...

 

 

 

 

To : 놀라지 않는 당신

 

 

 

   이 소설을 읽고 나니 편지를 부치고 싶은 사람이 두 사람 있었어요. 아부지와 중 2때 단짝. 소설 속 주인공 김정훈이 1984년에 아빠를 잃었거든요. 84년보다 약 삼 십년 후에 돌아가신 아부지와 84년에 둘도 없었던 친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불행히도 지금은 두 사람 다 제 곁엔 없군요. 하지만 소설이 가르쳐 주었어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 없기 때문에 지구라는 별에서 외로운 여행자가 되는 거래요. 사람은 없어져도 모든 건 그대로 남는다고 해요. 그 사람과 연결된 에너지와 그 사람이 남겨준 메시지,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언젠가 죽게 되지만 누구나 가진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구요. 아부지와 친구는 나를 살아가게 한 에너지였고 내가 깨달아온 메시지였나봐요.

 

 

 

   소설은 참 우리에게 아름다운 방법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네요. 제목을 보세요. 마린보이, 태권브이, 6백 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헐크, 그리고 원더우먼 이런 주인공들 생각나지 않아요? 나 어릴 땐 모두 그렇게 초능력자인 사람들만 TV에 나왔어요.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그들은 모두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가지 못하게 근사했죠. 간첩잡은 애국열사 아버지의 아들 김정훈. 교통사고 후 혼수상태에서 모두의 바람으로 기적같이 소생한 자유대한의 원더보이. 그래요, 꼭 죽었다가 깨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인도할 영웅의 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은 놀라왔어요.

 

 

 

   그런데 정훈이의 초능력은 멀리 뛰고 날아가고 무언가를 부숴버리는 육체의 능력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었어요. 기쁨이나 슬픔, 외로움이나 고통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 나아가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해주는 능력이었어요. 정훈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갔다가 돌아 온 후-그러니까 아버지의 상실을 겪은 후- 감각에 변화가 찾아온 거래요. 그러니까 작가는 타자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초능력으로 본 것이죠.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가 그동안 아픈 일이 많았던 가봐요. 사실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똑같이 느끼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잖아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그저 바라보는 입장에서 예상하고 예상한 그 수준만큼만 공감해 줄 수가 있지요. 그 정도면 이정도 힘들겠구나 예견할 수 있을 뿐 고통의 당사자를 아무리 사랑하고 친하다 한들 절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에 이 냉정한 현실은 내가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나처럼)상대가 내 고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외로움에 가닿게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처절한 고통일수록 더욱 뼈저리게 실감되는 상호 불통의 시간들. 이것은 내가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 없듯 상대도 마찬가지인 당연한 현실인데 사는 동안 이 자체가 얼마나 고독한 형벌인지 모릅니다. 작가는 필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모앙이예요.

 

 

 

   그래서인지 이해란 그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마음을 내 것처럼 느끼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단지 전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전해주고 소통했기 때문에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초능력이란 사람의 마음을 읽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줌으로써 함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산다면 우리 모두는 어떤 상처가 있어도 다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오래된 우주의 순리처럼 당연해 보이는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공감과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능력은 초능력인 것입니다. 작가는 우리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시대에 유행하던 <묘기대행진>을 빌어 암기, 암산, 속독, 차력, 혹은 염력 같은 초능력의 우화들을 소개합니다. 유리겔라 덕분에 집안에 숟가락이 남아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죠. 생각해보니 그땐 레슬링에서도 김일 선수가 박치기라는 초능력으로 일본선수를 보기 좋게 쓰러뜨리던 시절이었어요. 자원과 자본,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 우리에겐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무대포 정신과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정주영식 추진력(?)과 강압적인 군사문화가 어우러져 초능력이야 말로 저 앞서가는 선진국들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기특한 비법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중요한 초능력이 빠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초능력으로 쳐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묘기 대행진>의 변대웅 아나운서는 참가자 정훈이 말을 하면 도대체 ‘얘가 말만 하면 왜 이렇게 내일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의아해 했죠. 시청자들은 정훈이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립니다. 정훈이 말하는 슬픔이 곧 내 슬픔과 겹쳐지고 내 슬픔이 누군가에게 전해져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건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연대적 위로이고 대국민적 기쁨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놀라운 초능력으로 이만큼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되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잘 할 수 있었던 공감과 위로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국가 정보부의 고위직으로 출세한 권대령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다간 힘을 잃고 권력을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정훈과 같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지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강토는 말합니다. 이 나라에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고 이적행위’라고 말입니다. 지금과 다른 국가를 원한다면 제발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여겨야 한다구요. 공감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능력,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구요.

 

 

 

   권대령이 80년대 군사정권의 탄압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 권대령은 정훈을 계속하여 ‘군’이라고 부릅니다 - 정훈이 열일곱의 봄에 만난 강토와 무공, 재진아저씨는 각기 그 시절의 피해(성정체성 상실), 타협(순리대로 살아감), 개척(사회서적 발간)의 표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때의 내 청소년 시절을 관통하던 키워드 중엔 올림픽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84년 LA 올림픽, 86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 헝그리 정신과 애국심으로 대변되던 스포츠문화는 더욱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획일적 분위기를 형성했어요. 초딩 시절엔 지겹도록 무찌르자 공산당을 불렀고 중고등학교에선 죽어라 아, 대한민국을 외쳤어요. 고백을 하자면 그땐 점심시간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강 건너에서 교정으로 날아오던 매운 공기가 최루탄 잔향인지도 몰랐어요. 우리에겐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 해주는 원더보이는 잡혀가는 사람이었어요. 강토의 약혼자 이수형은 <장학퀴즈> 연말장원을 차지한 기억력의 천재였지만 존 레논이 암살당한 1980년 12월 서해 바닷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약혼자의 아버지는 언론자유를 요구하다 신문사에서 강제해직당한 후 나중에 자살을 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이처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 망각하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왔습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우린 어쩌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너무 쉽게 망각하면서 엉뚱한 능력들을 초능력으로 믿으면서 살아온 건 아닐까요.

 

 

 

   정훈의 아버지는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적어두는 비망록’이 있었죠. 아버지는 마치 은하수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우주비행사처럼 트럭을 운전했어요. 비망록은 삶의 기록이며 우주비행사는 삶의 여정일 거예요. 그런 아버지의 에너지는 아들에게 복제되었을까요? 정훈은 물었죠. 사람들이 비망록에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한’ 그런 몽상과 꿈과 소망을 적는 이유가 무엇이냐구요. 강토의 약혼자도 두 사람만의 장소를 영구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어요. 강토는 약혼자와의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억하죠. 이 소설은 정훈의 아버지와 강토의 약혼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고통에의 공감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죽은 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훈은 고문당하는 사람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저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삶의 순간들,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죽음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떠올리는 것이 곧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훈의 아버지도 강토의 약혼자도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야 나도 죽는 순간 덜 외로울 수 있을테니까요.

 

 

 

   우리 같이 나누었던 소원이요? 그 또한 터무니 없어 보이는 소원일지라도 실은 단 일 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 말해요.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내가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산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이예요.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관찰이다.”, 그러니까 어떤 불행이라도 일어나기 전까진 아직 불행하지 않은 거예요. 우주가 무한에 가깝다고 치면 그건 모든 경우의 수가 다 일어난다는 뜻이죠. 그런데 언젠가는 모든 경우의 수가 다 일어난다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겠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다른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어떻게 해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불가능한 일이 이 우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우주에서라도 언젠가는 일어난다. 작가는 그것이 기적이라 말합니다. 기적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일어 날 일이 지금 일어나는 것 뿐이라고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라 가장 똑똑한 일인 것이라구요.

 

 

 

   예를 들어 ‘불가능한 일요일에 우린 다시 만날’거라는 정훈의 바람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일이라구요. 모르겠어요. 인생이란 강물이 흘러가듯 언젠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들게 될지요. 우주의 모든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일제히 빛을 내뿜는 순간은 단 한번 뿐이라는데 내게 그 순간은 기쁠지 슬플지 모르겠어요. 권대령이 여러 번 충고했죠. 군이 ‘웃으면 이제 세상이 군과 함께 웃겠지만, 울면 군 혼자 울 것이’라구요. 재차 혼자 우는 것의 두려움을 강조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혼자 우는 것이 생각보다 두렵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혼자 우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일수도 있겠어요. 우리 모두는 결국 정훈이 처럼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눈물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까요.

 

 

 

   누구나 마음속에는 말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쯤 있고 그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좀처럼 이해받기 힘들다고 해요. 인간은 이해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으니까요. 문득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란 노랫말이 생각나요. 냉소를 미덕으로 아는 어른들이 된 우리에게 ‘원더보이’는 그런 당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해요.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는 사람들에게 부디 오늘처럼 놀라운 순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부탁하는 듯해요. 이 책이 당신에게도 켜켜이 두터워진 냉소를 안고 사는 가슴 한 켠에 천천히 심장을 데울 수 있는 나지막한 질문이자 아름다운 대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삶과 죽음과 그 너머의 고통까지 느낄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건 정말이지 놀랍기 짝이 없는 행운일테니까요.

 

 

 

 

 

 

 

 

태어나서 단 한번.
우리가 죽을 때.
그렇게.
우리는 아이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것이죠.
영원히 빛으로 죽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빠?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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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4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7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2-1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멋진리뷰인걸요.
엊그제 책을 한무더기로 주문할 때 (그것도 한국소설로만) 이 책은 저리가라, 하고
제껴놓았는데 이런, 조금만 더 늦게 책을 주문할걸 그랬습니다.
이 리뷰를 보니 무척이나 책을 읽고싶은걸요.
인용문구를 보니 막, 더 읽고싶고... ㅠㅠ
 
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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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많다고 하지 않고 깊다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아주 은밀한 속살 너머 저 깊고 깊은 그곳에 숨겨둔, 내 오래된 두려움에 가닿았기 때문이다. 책을 잡은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쓰는 이유도 그 깊은 여운을 조금 더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덮고 나자마자 글을 쓰면 내 속에 들어왔다가 시원하게 통과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통과한 후 책꽂이에 꽂혀지면 나는 뒤돌아 후련한 마음이 든다. 다음 적어도 마음에 새겨진 무늬정도는 기록을 한 사람이 되어 그 책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이 책은 기대만큼은 아닙니다. 이 책은 의외로 유익하네요. 이 책은 명불허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지 않고 나 혼자 비밀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십 년 전에 출간된 이 고전 한 권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나는 내 속내를 감추고픈 속속내와 마주한다. 아무래도 나는 고독이 꽤 좋았던 사람인 모양이다. 이 책은 은둔과 고독을 자처한 나를 위해 나타난 구원자처럼 기품 있고 당당하다. 그런데 다른 구원자처럼 자신의 손을 잡으라 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도 좋은 것이라 말했다. 다르게 살라고 충고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늦게 본 자식에다가 그 시절 흔치 않은 외동이였다. 친구들은 혼자서 방을 쓰는 것을 굉장히 부러워했고 학교 다닐 땐 우리 집에(정확히는 내 방에) 머물다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살면서 많이 받아본 질문 중에 혼자여서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외로운 것이 무어냐고 자주 되받아 물었다. 정확하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형제가 없었던 나로선 혼자 있는 것의 장단점을 비교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자여서 심심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육아의 고단함이 아니고 도무지 혼자인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혼자서 영화도 잘 보고 밥도 잘 먹고 여행도 잘 간다. 아파트 뒷산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돌아오는 벤치도 있다. 뒷산-도서관-벤치와 영화관-서점-카페는 아이 데리고 마트가는 만큼이나 빈번한 코스이다. 살면서 외로움이라는 건 이런 것이구나를 뼈저리게 느낀 적은 딱 한번, 엄마의 장례식 날이었다. 아버지 돌아 가신 후 엄마마저 떠나는 날은 그동안 혼자 누리고 받았던 모든 사랑만큼이나 무지막지한 슬픔도 온전한 내 몫이었다. 나는 아마 죽는 날까지 그때 느꼈던 외로움을 떠들다가 갈지도 모른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그 정도의 외로움을 느끼는 날은 내가 죽는 날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마치 인생외로움의 필수 코스를 그런대로 이수한 사람처럼 마음이 편하고 혼자할 수 없는 숙제를 마친 사람처럼 그 어떤 외로움에도 두려움이 없다. 물론 ‘혼자서도 잘해요’가 꼭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혼자인 시간을 무척 사랑하는 부류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 어찌 ‘혼자 있는 능력’ 을 말하는 이 책이 눈물겹지 않겠는가.

 

 

 

    ‘혼자 있는 능력’ 이란 사무치게 외로와 죽겠는데 이 악물고 고독을 잘 견디는 능력이 아니다. 혼자 있는 동안 각자의 뇌에서 최고의 잠재력이 발휘되는 기특한 순간의 능력이다. 즉,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정서변화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혼자 있는 건 능력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예를 들어 고독이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발전시켜 창작활동에 기여한다면 그때의 고독은 능력이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작가, 음악가, 철학자의 삶을 예로 들고 정신분석 및 통계자료를 통해 창조과정, 개인화 과정이 고독 속에서 더 잘 내면화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극단적인 예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뉴턴 같은 천재는 가정을 이루지 않았고 가까운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았고 금욕적인 생활에 몰두했다. 이들은 모두 철저하게 일과 연구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그들의 인생이 꼭 불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타인과의 친밀한 애착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삶이 꼭 불완전하거나 열등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인간관계에서 찾을 것인가 내면화된 고독 속에서 찾을 것인가는 개인의 성향과 선택일 뿐 어느 한쪽이 정답이거나 다른 쪽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었다.

 

 

 

    우리 모두는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저들의 고독와 우리의 고독은 질적으로 다르다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행복을 가르치는 많은 서적과 사회학 통계치로부터 대부분 노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라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내가 아는 행복론에서 건강한 노년은 적어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이웃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정원을 가꾸는 인자한 모습이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물로서 조직에선 거의 치명적인 결격사유에 해당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인간관계의 완성도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리라고 말한다. 혹시나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필요이상으로 불행해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꼭 친하지 않고 형식적, 피상적인 관계도 일상에선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이 나이 되도록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하나 없는지 왜 회사에선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 할 동료가 없으며 왜 그 흔한 학교 선배하나 남지 않았는지 자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현실세계라는 외부 대신 상상이라는 내면세계를 잊지 말고 그 속에서 불운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기르라고. 고독은 현실로부터 외면당한 절망의 공간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라고.

 

 

 

    그러니까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고독과 창의성을 연계시킨 지점이다. 창의성이라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증에 취약하다는 결과와 만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과 어린 시절과의 상관관계를 밝힌 것이다. 부모의 상실, 결핍 등으로 어린 시절 혼자 있었던 아이들이 상상하기를 즐기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싹트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 중 다수는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껴 고립된 시간에 놓이게 된다. 유전, 환경적 우울적인 기질은 강박증이나 신경쇠약, 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적 요소는 다시 자극제가 되어 내면 깊은 곳을 탐험하고 갈등과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상실과 고독은 창작의 가장 확실한 배경이 되고 다시 창의력을 가진 사람은 상실을 치유하며 고독을 내면화하는데 성공한다. 고독한 사람은 상상하고 상상하는 사람은 창조하고 창조된 세계는 자신은 물론 친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선사한다. 이른바 고독의 선순환 과정에 대한 치밀한 보고서인 것이다.

 

 

 

    저자는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면서도 친밀한 관계 맺기를 두려워했던 카프카의 삶에서 글쓰기를 언급했다. 분열적인 카프카를 치명적인 고독과 창의성을, 창의적 재능과 우울증의 본보기로 제시했다. 카프카는 누군가 곁에 있으면 자신의 나약한 정신구조가 무너질까봐 -글을 못 쓰게 될까봐 -연인을 거부하고 두려워했다. 카프카에겐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가장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카프카를 보면서 간혹 가족이 없어야 글을 쓰는 사람과 가족이 있어도 글을 쓰는 사람과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도 정도가 있듯이 예술가도 고독에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정도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절대 고독에서만이 절대 작품이 탄생한다고 믿는 예술가는 아마도 더 간절히 사랑을 원하고 그래서 혹 자신의 재능이 그 사랑으로부터 파괴(패배)당할까봐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친밀한 관계는 자기 창조의 동력을 앗아간다는 것을 천재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면 오랜 고독과 그 속에서의 집중이 내면의 재능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인간관계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려는 개인의 보상기제일수도 있겠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인간관계보다는 내면의 관심사에 더 몰두하게 된다는데-이는 죽음이 가까워지므로 이별을 준비하는 자연스러운 자세가 아닐지-우리는 나이들어 이웃과 교류하나 없는 어르신들을 고집불통의 노인네라 속으로 흉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면 정서적으로 성숙한 것이고 혼자 고독하게 지내면 병적인 것이라 구분해 오진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창조적 삶을 위해 고독하게 살라는 뜻은 절대 아니라 부연하고 싶다. 어쩌다 보니 찾아온 고독을 지속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말하고 싶다. 누구든 지금 고독하다면 고독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그것에서 생성된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투사할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글이 되었건 음악이 되었건 자기 고독을 치유하는지도 모르고 상상력은 고독을 입체화해 줄 것을 믿어 보라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은 새로운 통찰을 얻는 순간, 다시 말해 새로운 발견을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혼자 있는 순간 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대개는 그렇다
- p20

 

 

 

 

    우리는 베토벤이나 칸트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고독하다. 가끔은 고독하고 어쩌다 고독하고 불현듯 고독하고 그리고 자주, 쓰리게 고독하다. 상대가 나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독하고 알아도 어쩔 수 없어서 고독하고 어떻게 해준다 해도 고독하다. 아마 죽는 순간 가장 절정의 고독이 완성되겠지만 어차피 고독으로 완결될 거 기왕이면 긍정의 고독, 생산의 고독이 더 그립고 절실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외롭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그 외로움을 비교적 잘 내면화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외로우면 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독이야말로 고독을 이기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어느 비오는 밤 당신이 고독해보여도 혹은 당신이 그 빗소리에 고독하다 외친다 해도 당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독은 슬픔이나 절망이 아니다. 고독은 고독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할 수 없는 희망이요 기쁨이다. 당신의 고독을 늘 질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고독하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제대로 고독할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내가 맞는다고 하는데 슬며시 미소 짓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디 당신의 고독위에 나와 같은 반가운 미소가 사뿐히 내려앉기를. 우리는 고독한 이 밤이 가장 좋은 사람들이니까...

 

 

 

 

 

덧붙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짧은 리뷰도 처음이고

줄이는 것도 힘들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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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2-0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깊은 위로 말고요,
때로, 때때로 한번씩 어깨를 툭~하고 쳐주는 그런 보일듯 말듯한 제스츄어요~^^

원제가 'solitude'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우리말 제목이 의외네요~^^

중전 2012-02-0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독은 기쁨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아마 혼자 놀기의 명수여서 그런가 봅니다.
어릴 적에는 우리집 마당에 스무명의 아이들이 해질녘까지 놀다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저는 혼자가 되어있었어요.
지금은 '조직'내에서도 늘 '혼자'인 것이 약간 문제가 되곤 합니다만...

중전 2012-02-11 21:22   좋아요 0 | URL
스무 명의 아이들이란 게, 제가 그때는 무척 활동적이었을 때이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 저희 집이었어요.
아무튼 방도 여러 개였고 장독대, 우물, 감나무, 분꽃이 많이 폈던 꽃밭도 있었드랬는데.... 결혼해서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이십 여 년만에 주인이 바뀐 집에 가보았더니 에게, 마당이 이렇게 좁았나 싶었어요.

꽃도둑 2012-02-0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시간에 갇히는 거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요...
번잡하고 북적대고 복잡한 곳에 있는 것도,그런 일과 사람들을 맞닥뜨리는 거 그야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아, 나를(?) 알아주는 글인 것 같아 내심 위안이 되네요..^^
창의적인 일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일텐데...조금 더 기다려보죠 뭐..ㅋㅋ

보물선 2012-02-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미투한번 와봐봐.
어제 알라딘에서 10만원정도의 적립금이 들어왔다가
그거 실수한거래서 완전 김샜어.
그거 다 써버릴껄! ㅠㅠ

보물선 2012-02-10 15:34   좋아요 0 | URL
내말이~~
좋다가 말았잖아....ㅠㅠ

cyrus 2012-02-10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에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요.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으로 고독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다는군요. 마침 이 책이랑 <고독의 위로>를 같이 읽어보려고 하는데
저 역시 이 책으로 고독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

[그장소] 2015-04-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할 나위 없네요.^^
누구나 다 안다면 굳이 이 상태를 이해시킬 필요도 없을텐데.
일상생활을 나눔으로 좋음은 이미 했었으니
이제 온전한 혼자로 삶도..그런 형태가 되길
바래봅니다.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 남자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당신에게
남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를 다시 생각해봐

 

 

 

   누군가 결혼은 택시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마침 잡아타려고 하는데 내 앞을 지나가다 운 좋게 걸리면 타게 되는 것이 택시이듯 결혼도 내가 지금 하려고 작정한 그 타이밍에 하필(?) 내 앞에 있던 남자와 하게 된다는 뜻. 즉 결혼은 서로 죽고 못 살아야만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고 죽고 못 살게 될 수도 있는 운명적 인연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다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할 줄 몰랐던 사람이라고 꼭 결혼을 안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만 해도 뜻하지 않은 사람과 전혀 뜻하지 않은 시기에 결혼을 했고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그러다 또 뜻밖의 남자를 만나 뜻하지 않게 인연을 만들고 지금은 뜻과는 달리 헤어진 상태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여튼 나는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모두 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 인생에서 남자는 늘 뜻밖 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어쨌거나 남자는 나와 맞지 않는다, 정도가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고 이 책을 마주한 내 심경이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결혼하고 일 년 간을 가장 많이 싸우고 분노하며 상대를 이해해보려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그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나는 좀 더 남자에 대해 빨리 편해질 수 있었을까, 싶은 책이다. 아마도 그때라면 나 잘난 맛에 이런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2,30대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라, 는 식의 충고 혹은 위로형 서적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남자는 이렇게 길들여야 하고 사랑과 이별은 잘 해야 하고...하는 책들은 웃기다는 쪽이었다. 그건 독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땐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마디로 일과 성공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남녀간에 발생하는 성격차를 통해 원인과 결과를 제시하는 방법론적 서적들은 거의 사치에 가까웠다. 어떤 면에선 남자에 대한 분석이나 방안에 대한 신뢰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책과 같은 일반론 속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낭만이나 치기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책을 덮고 나니 내용의 주 타겟은 한창 그 남자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 때문에 정말 죽을 것 같은 여자이어야 할 듯하다. 도저히 내가 택한 이 남자와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시점의 여자이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실상 그 시기엔 이런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너무 배가 고프면 요리책 따윈 너무 멀거나 귀찮은 것이다. 나만해도 이제 남자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남자 분석 같은 건 필요치 않을 줄 알았는데 바로 이런 시점에 아무런 기대가 없기 때문에 외려 내 열린 마음에 이런 책이 무리 없이 안착하는 이상한 경우가 발생했다. 그냥 이 책이 끌렸다. 이젠 모두 이해하고 긍정하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인 내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난날 내 남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높았던 여자였을 뿐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그다지 새롭진 않다는 것인데 -사실 여자에게 남자처럼 진부한 소재가 어디있단 말인가 - 성실하고 논리적이고 치밀한 자세로 그 점을 편안하게(치밀하면서 편안하기 힘들다)보완했다. 느낌은 생각보다 괜찮다.

 

 

   지금 남자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내게 있어, 이 책의 느낌은 이렇다.

 

 

   평소에 여기저기서 잘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한번 원 없이(?) 다양하게(?) 써본 제품이라 그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데-그래서 다시는 구매의사가 없었던 차인데-그래도 한번 마음을 바꾸어 보라고 작정하고 설득을 하는 느낌. 제품의 피상적, 구체적, 추상적, 심리적 모든 문제들을 다 알고 있는 전문가 한분이 콕콕 집어 올바른 사용법을 쉽게 가르쳐주는 느낌. 그동안 제품 사용에 있어 내가 이해할 수 없었거나 그냥 묻었거나 넘어가 버린 문제점들을 소상히 밝혀주는 느낌.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이 어필하듯 남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내 생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당신 생각이 원래 맞지만 더 현명하고 우월한(?) 당신이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는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는 남자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면 같이 가는 방법을 달리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잘 살고 있거나 이미 헤어졌다면 이 책은 필요치 않을까? 내 생각에 남자와 사는데 잘 살고 있는 여자는 없다고 보기에 어느 시기든 유용할 것이며 남자와 헤어졌더라도 그 시기를 돌이켜보며 조용한 회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듯 하다. 비록 지나갔지만 앞으로의 시행착오를 막는 의미에서도 이 책은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한 가지 남자에 해당하는 혹자들은 이 책이 여성이라는 우월적 위치에서 남자를 관찰하는 시각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시종일관 이 책에 의하면 남자들은 오로지 여자를 통해서야만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여자를 통해서만 성숙한 인간, 철든 남성이 된다. 여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불안감을 관리할 수 있으며 ‘언제고 여자에게 길들여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남자라 말하기 때문이다. 아니라 반박하고 싶은 남자만 이 책을 들쳐 보면 된다.

 

 

남자는 진짜 남자가 목표라구

 

 

 

   우선 작가가 진단하는 병인은 남성성에 집착하는 남자病이다. 남자가 대화에 소질이 없는 이유,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 서열을 중요시 하는 이유, 게임이나 술 중독,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 폭력적이 되는 이유, 일찍 죽는 이유 등등 결국은 진짜 남자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 말한다. 여자는 결코 ‘여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닌데, 남자는 진짜 남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내가 가장 짜증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남자들의 태도중 하나는 누가 봐도 잘못한 일에 절대로 사과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대체로 아내가 조목조목 하나부터 열까지 지나온 경위를 밟아가며 잘못된 부분을 하나씩 짚으면서 결과적으로 당신이 잘못했다고 따져드는 순간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못견뎌한다. 아내 입장에선 미안하다 한마디면 될 것을 그 한마디를 하지 않는 서운함이 괘씸함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남자의 잘못을 역순으로 톺아보는 시뮬레이션 과정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남자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 끝에 가선 모멸감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미안하다는 답을 해줄 리가 없다. 아내는 억울하다. 애초에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잘못한 사람은 잘못을 추궁하는 것만 서운해 하고 자기 자존심만 중요하게 생각하니 어떻게든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다보면 끝까지 그 소리를 안 하고 넘어가려는 꼴을 죽어도 못 봐주는 아내 때문에 또 진정성 없이 일단 순간을 모면하려고 대충 미안하다 얼버무리는 태도로 사태는 전환된다. 이 상황을 이미 예상하는 아내는 점점 입을 닫게 되고 남편은 항상 화나 있는 아내를 보게 된다. 남자들은 말한다. 왜 화가 나 있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하하. 아내들은 말한다. 내가 백번을 이야기해도 달라지 않고 똑같다고.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늘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이유로 스파크가 일어난다. 나처럼 남자를 과감하게 버린 내 지인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남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남자는 결코 철들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라 그걸 못 견디는 여자인 자신일 뿐이다. 고로 결혼 생활을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하는 여성들은 남자들이 특별히 우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남자를 잘 견디는 방법을 터득했거나 아니면 특별히 남자를 잘 견디는 성향으로 타고 났거나인 것이다.

 

 

   작가는 남자가 대화에 소질이 없는 이유는 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학습해온 남자공식에 위배되는 발언이기 때문이라 정리한다. 그리고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변화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한 절대 ‘단 1센티미터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옮겨 앉으려 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남자는 죽자고 남자를 이기려 드는 여자를 가장 싫어하며 ‘스스로 멋진 남자라고 느끼게 만드는 여자’, ‘자신을 남자로 느끼게 해주는 여자’에게 끌린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여자에겐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면서도 종국에는 여자가 그것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마침내 찾아낸 여자에겐 충심으로 투항한다. 한마디로 남성성을 모독하는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어하면서도 또 그 자기만의 약점을 알고 보살펴 주고 챙겨주길 원하는 것이다. 이에, 남자는 자신이 진짜 남자라고 느낄 때에만 사람구실을 한다는 것이 작가의 심오한 결론이었다.

 

 

   작가는 이 진짜 남자 컴플렉스에 해당하는 질병을 ‘유리커브’에 비유하며 유리커브의 열쇠를 여는 것이 유리커브를 발견한 여성의 역할이자 임무라 하였다. 아니 여성이야 말로 유리커브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들렸다. 오랫동안 사회에 여성의 승진을 막는 유리 천장이 있다면 남자들에겐 오랜 세월 환경과 교육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의 감옥, ‘유리커브’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표현과 교류가 서툴고 자신의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두르고 있는 갑옷처럼 유리큐브는 사방이 좁아 터진 밀폐의 은신처이다. 여자들이 답답하다고 망치를 들고 유리큐브를 깨려 들지 말고 지혜롭고 유일한 산소통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의 유리큐브를 인정하고 때로는 반들반들하게 닦아 주고 때로는 질식하지 않도록 열어 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남자도 힘들고 슬픈 거야

 

 

 

   또 하나 맞벌이 여성들의 불만에 해당하는 가사부담의 정도에 대해서도 명쾌한 분석이 이어졌다. 나 역시도 늘 집안일과 육아는 그저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보조로서 도와주는 일이라 여기는 구석이 못마땅했는데 남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 때문에 여자들이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자신의 일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었을 그때는 자신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하므로 일찌감치 가사를 자기 영역에서 제외시켰다는 분석이다. 이제 작가는 여자들이 가장으로서의 남자들의 책임감을 나누어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내심 남자들의 부양에 기댈 목적으로 결혼을 하는 여성들이 반드시 감당해야할 태도라 느껴진다. 여자들 스스로 나는 아이 낳고 뒷바라지하고 살림을 하니까 앞으로 경제적 활동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평생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남자들은 잠시 바깥일 하는 아내의 원래 담당인 집안일을 해주는 것이 선심 쓰듯 도와주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차라리 남자의 책임감을 덜어주고 그 책임감을 핑계로 회피하고 있는 많은 의무들을 나누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 충고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것이다.

 

 

   직장 다닐 때는 같은 경력인데도 군가산점 등의 이유로 남자들이 조금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재수안하고 휴학안하고 군대 못가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죄로 재수하고 휴학도 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신입사원이 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시절을 보내었다. 나는 이미 밤새고 뺑이치고 삼년 경력자가 되어 있는데 그들은 갓 들어와 내 지시를 받으면서도 나와 월급이 같았고 슬그머니 일 년 지나면 나와 같은 직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고 대학원 졸업하고 그 와중에 애까지 낳고 돌아온 오년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물론 군대는 국가가 부른 것이고 출산은 내 개인의 선택이므로 보상을 해줄 이유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남자들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국가적으로 시스템화 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보상도 꼭 여자를 차별하는 결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업무적으로 차별을 받거나 직종 특성상 남녀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회사 생활하는 동안엔 남녀차별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축에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여자들의 경력은 세월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억울함과 여자들의 결혼과 출산은 사회에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외려 민폐일 뿐- 피해의식이 많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맨날 야근이다 회식이다 늦게 오는 남편이 아무리 힘들어 죽겠다 소리쳐도 속으로는 다 밖에서 누릴 것을 누리고 대접받을 건 받으니까 그 정도 힘들어도 견디는 것이겠지(아니 당연히 견뎌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누릴 거 누리고 받을 거 받아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구나, 당신들이 힘든 것도 내가 힘든 만큼 같은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우친다. 주로 약자이고 피해자인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슬픔이 있듯이 강자이고 보호자이고 책임자인 남자도 남자이기 때문에 슬픈 것이었구나, 힘은 누가 더 세고 눈물은 누가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힘겨운 슬픔 만큼은 누가 누구보다 더 인 것이 아니었구나... (작가가 대단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남자가 아니면서 남자 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남자보다 더 남자를 잘 말하고 그로써 여자의 생각을 슬슬 바꾸어 놓는다는 것. 작가를 보면서 남자를 말하는 것도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다. 남자에 대한 오해를 여자가 풀어주는 것을 보면)

 

 

   유익한 책이다. 작가는 마지막에 칸느 여우 주연상 전도연은 못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 중 그를 대할 때 필요한 것만을 골라 잘 연기하라고 마무리 한다.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기하라 충고한다. 알면서도 저주고 저주었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원하는 행복을 성취하라 말한다. 이 책은 각 챕터마다 초반엔 주제와 관련된 짧은 이야기가 제시 되고 그 원인과 해석이 뒤를 잇는다. 중국 고전 <금병매>의 캐릭터 반금련, 무대, 서문경, 춘매, 설화를 패러디 했다는 소설이 재미나다. 어쨌거나 남자가 필요한 주인공에 해당하는 금련이 연애에 몇 번 실패하고 무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남편의 실직등 위기를 맞이한 후 중년을 맞는 구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남자를 조종 및 통제하기에 불가능으로 접어든 시기는 마흔 이후로 보는 것 같다. 남자 역시 여자의 도움을 거치지 않고 중년을 맞이하는 인생은 불행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너무 많은 걸 깨우친 중년이 아닌) 아이 하나 낳고 집장만 하느라 뒤도 안 돌아보고 부지런히 뛰었더니 어느덧 낼 모레 마흔을 앞둔 마음 울적한 주부에게 권한다. 나 같이 남자한테는 학을 떼어서(?) 더 이상 남자는 필요 없다는 돌싱내지는 싱글맘에게도 권한다. 나쁜 남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지 좋은 남자야 왜 필요 없겠는가(그러나 불행히도 남자는 잘난 남자와 못난 남자로 구분 지을 뿐이란다...) 가끔 내가 몇 살까지 살게 될까를 상상해 볼 때가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또 뜻밖의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므로 당분간은 이 책의 가르침을 가슴에 고이 간직해두어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어쨌거나 내겐 남자가 되었건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건 그 문제와 대안을 말하는 책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요즘 하루 한권 읽고 그 다음날 리뷰를 쓰는 폭풍의 독서가 이어지고 있다. 아...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이 놈의 남자 근육보다 더 끌리는 저 단단한 책들과 그리고 그를 질펀히 통과한 후 내가 즐기고 있는 이 육체적 사유의 시간을. 다만 좋은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이 현실에 써먹을 날이 부디 다시 돌아오기를 몰래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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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전 2012-02-0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 년 세월을 살면서 저희 부부만큼 많이 싸운 부부도 드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싸우다가 앞뒤 안맞는 남편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더니 돌아오는 말, "그렇게 똑똑한 여자가 왜 나랑 결혼했어?"
참고로 우리 남편은 아직도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똑똑하자!"고 입에 거품을 뭅니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지러운 세상이라구요.
얼마 전,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나이 탓인지 싸우기도 힘에 부쳐서요. ㅎㅎ
싸우고 서재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끼니 때가 되었는데 밥을 줘? 말아? 잠시 갈등했어요.
저는 별로 왜곡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는데 남편은 중학교 때부터 하숙, 자취를 했지요.
오제은 교수 이론에 의하면 남편은 '내면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멈춘 상태라는 거지요.
제가 내린 결론은 '에미가 속상한다고 새끼 밥을 굶기면 되겠어!'
그때부터 '어진 에미'가 되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당신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묻는 것이었어요.
(남편만 모르지만 저는 자타가 인정하는 천사표에요.)
속으로는 '넌 내 새끼니까!'
겉으로는 "나같은 마누라 데리고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폭풍 독서, 리뷰...부러워요. 멈추지 마세요!

2012-02-05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8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2-02-08 19:46   좋아요 0 | URL
난 집에 있는 맘들이 젤 부럽다!
굶고 사는 것도 아니고
골치 안아파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