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유영훈(류영훈) 옮김, 우석훈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열심히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불편한 진실과 더 불편한 현장을 낱낱이 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책 붙들고 고민하는 시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엊그제도 지인들끼리 모여 이놈의 자본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해가며 도대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삼 자본주의 비판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요즘 식사와 음주가 이어지는 어디에서든지 이런 풍경은 익숙하다. 내 세대들은 입을 모아 그동안 우리가 좇아온 가치들에 대해 눈물겨운 탄식을 멈추지 않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엔 모두가 투사가 된 기분이다. 지난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전에 우리의 주된 대화는 이번 명절엔 남들처럼 해외여행을 감행해볼까, 였다.

 

 

우린 386 선배들의 투쟁과 성공, 몰락을 바로 곁에서 뒤에서 지켜본 후배들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학번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지겹도록 데모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민주화 운동(그땐 싸잡아 빨갱이 운동이라 했다) 하다가 죽거나 폐인이 되는 사례 수백 가지를 성문 기본 영어의 1장 부정사의 사용법 다음으로 들어왔다. 전두환, 노태우가 주입하고 강요한 가치는 단연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헝그리 정신과 애국심이었다. 금메달을 따면 방송에선 일률적으로 ‘나가자 빛을 내자 대한의 건아들’이런 노래를 하루 종일 틀어줬다. 마트에 가면 과일도 모두 금메달 수박, 금메달 참외였다. 아직도 소름끼치게 기억나는 건 여고시절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분류된 학생들만 사박오일 동안 어디로 끌고 가(?)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명분은 신사임당 교육이었고 예절과 충효와 애국심을 가르친다고 했다. 실제로 그 교육을 받게 된 학생들은 마치 국가의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되는 과정처럼 보여 지기도 했다. 동선까지 기억나는 그 방에서 우리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약 십 분짜리 영상을 보고 모두 울었다. 아직도 왜 울었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소수 정예만 모아놓고 대한민국의 발전사와 비전을 상영해주니 예민한 감수성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놓고 바로 이어지는 다음 시간엔 마르크스가 죽일 놈이고 김일성은 친척이고 공산주의는 사회의 악이라는 강의를 들었고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대학생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이라고 했다. 당시 열일곱 살의 나는 영상물의 마지막 장면 휘날리는 태극기를 가슴에 간직하며 대학에 가서 죽어도 데모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두의 바람대로 대학에 들어가 나는 시험거부 같은 집단 시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얼굴 들고 시험을 치루는 학생이 되었다. 평소 친분 있던 한 선배가 강경대 학생이 맞아 죽은 후 단식투쟁에 돌입했지만 그냥 못 본 척 하고 도서관으로 향한 날을 기억한다. 그런데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한 회사에서 우연히 그때 보고 울었던 영상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회산 정부에서 의뢰한 홍보영상을 제작하는 곳이었고 나는 영상물 시나리오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웃긴 건 그 영상물 바로 옆에 장산곶매의 <파업전야>와 <닫힌 교문을 열며>의 비디오테잎이 나란히 있었다는 것.(나는 그날 집에 테잎을 가져가 울면서 영화를 보았다. 일부 선배들이 같이 보자고 했을 때 일없다고 했던가. 회사에선 보기 드문 수작이니 꼭 참고하라고 흔한 외국 CF 자료영상처럼 말했다...) 나는 그때 정부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정부를 치장하고 홍보하는 시나리오를 썼고 그걸로 월급을 받아먹었다. 어찌 보면 우린 민주화 선배들에게 빚진 세대일지 모른다. 우린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 같다. 우린 좀 다르게 살고 싶었다. 변명을 하자면 우린 교복자율화 1세대였고 강남 8학군을 누비는 신흥중산층이었다. 옷과 머리, 아파트와 자가용이 신분을 가르는 기준임을 학교에서부터 배운 첫 세대였다. 우린 돈의 가치가 민주화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일찍 깨우친 영악한 세대였다. ‘벤지’를 보고 자라면서 동물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ET’를 보고 외계인을 상상했고 ‘람보’를 보며 미국식 영웅주의에 길들여졌고 ‘주윤발’을 보면서 폭력을 미화했고 ‘마돈나’를 보면서 여성평등을 내재화했다. ‘마이클 잭슨’을 보면서 돈 있으면 흑인도 백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 우울할 땐 조용필과 변진섭과 이문세, 이승환의 넋두리를 함께 들어주면서.


 

그런 우리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소련은 붕괴했다. 회사에서 미국비자는 어엿한 신분이었고 자가용 소유는 신세대직장인임을 증명하는 라이센스였다. 우린 IMF가 터지기 직전 너도나도 압구정동에서 연애를 한 세대였다. 부모님은 강남에서 이주하며 부동산 차액으로 자식들 결혼을 시키셨다. 민주화 선배와 IMF 후배와 부모님에게까지 빚을 진, 대단히 운 좋은 우리 세대는 신도시 아파트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 대단한 속물들은 영어에 맺힌 한 때문에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조기영어교육에 매달렸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았다. 남들처럼 대출받아 집도 샀다.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때가 되면 차도 바꿨다. 가끔 주식으로 대박 난 후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주식 때문에 거리로 나앉은 동창 소식을 들으며 그건 남일 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두세 번 바뀌고 그나마 그 중에 존경하던 대통령은 약속이나 한 듯 세상을 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고 맘 편하게 사는 작자만 오래 행복하게 사는 건 맞았다. 그러는 사이 더 이상 승진의 기회는 사라졌고 아이는 커버렸고 우린 늙어 있었다. 하우스 푸어로 대변되는, 이젠 언론에서 조차 어쩌다 한번씩 2030 세대에 양념으로 뿌려주는 40대가 되었다. 가끔 <정의를 무엇인가>를 사본 주된 세대가 40대 남성이라며 이들이 움직이면 사회에 변화가 생긴다는 의미심장한 멘트가 덧붙여지는.

 

 

시즌이 시즌이어서 그런 것인지 언제부턴가 우리끼리 화두는 대한민국과 정치, 대기업과 실물경제, 부동산과 금융대출, 학교폭력과 배금주의 이런 것들이다. 결론은 모두 돈으로 귀결된다. 특히 가진 자들이 이미 가진 것들을 발판 삼아 못 가지거나 덜 가진 자들과 더욱 엄청난 격차를 벌이게 된 이 현실이 슬프고 분노스러워 죽을 지경인 것이다. 삼년 전 보다 나아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있다면 우리가 볼 수는 없다. 우리 사는 이곳에서 떠난 지 오래이니까. 비강남 지역에 33평 전세, 중형차 1대, 초중생 자녀를 둔 우리 세대 월급쟁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MBC 사장이 퇴진하는 것도 정봉주가 석방되는 것도 강호동이 컴백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궁금한 건 학교와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학도 가고 졸업 후 취직도 했고 나이가 차서 결혼도 하고 정상적으로 아이도 낳고 이 사회에 반하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는데, 아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이다. 왜 우린 지금보다 도통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는가 이다. 우리의 결론은 앞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건 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로또일 뿐이라는 것에 몰표를 던진다. 우리 같은 99%는 허구한 날 솟구치는 이자와 날아오는 고지서와 늘어나는 가격표에 둘러쌓여 주름살만 늘어날 뿐이라는 것. 중간에 어떤 극적인 일확천금의 기적이 없다면 우린 어쩌면 아이들에게 빚을 물려주면서 이 세상을 하직 할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 세대가 특별히 더 나라를 걱정하고 특별히 성격이 더 불안하고 유달리 아이를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닌 듯 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런 생각을 우리 세대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아가 우리나라만 이 꼴인 것 같진 않다.

 

 

 

회의(會議)는 언제나 회의(懷疑)스럽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뉴요커에 대한 환상은 좀 필요이상이었다. 증권가, 패션잡지, 변호사, 검사 등의 전문직으로 상징되는 뉴욕의 능력자들은 정장을 입고 백팩을 매고 스니커즈를 신고 베이글을 먹는다고 들었다. 마천루의 회색빛 이미지와 블랙톤의 슈트, 금발 단발머리, 그리고 빌딩 사이로 언뜻 지나가는 뉴욕의 차가운 하늘. 걸어가는 사람들의 시크하고 무표정한 얼굴. 낮엔 실용성을 따지다가 밤엔 시스루룩으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미드열풍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뉴요커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꽤 근사한 인종의 표상임을 각인 시켰다. 혹시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보시라. 뉴욕의 브로드웨이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모여들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시라. 물론 우리가 떠올리는 DKNY 슈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모델처럼 걸어가는 젊은 남자들은 거기 없다. 모두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어쩌다가 노숙자, 주정뱅이와 마주칠 확률도 있다. 2008년이 되기 전에 뉴욕에 갔을 때 엠파이어트 스테이츠 빌딩 맨 꼭대기 기념품 샵에는 모든 물건에 ‘I LOVE NY’ 라고 적혀있었다. 그땐 거기서 보는 뉴욕의 야경이 부럽긴 했다. 허나 이제 더 이상 우린 뉴욕과 뉴요커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월가에 모여든 사람들에 관심 갖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일까. 전후 60년 동안 우리는 미국이 하는 일은 거의 빼놓지 않고 충실하게 따라하는 나라가 되었다. 자발적으로 따라한 것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따라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따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내세운 가치를 누구보다 적극 수용하고 악착같이 실행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11년 가을 뉴욕 월가에서 일어난 시위를 기록한 점령보고서이다. 9월에 시작하여 두 달 간 치열한 점령의 시간을 가진 후 현재 혹한과 탄압을 맞아 중단 되었다. 새해가 된지 석 달이 되지 않았으니 시기적으로 따끈따끈한 최신의 뉴스에 해당한다. 책은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 목격이 주가 되는 체험담과 기자, 편집자, 작가, 교수들의 칼럼 릴레이로 교차 편집되어 엮여졌다. 칼럼을 쓴 지식인들도 현장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거나 연설을 했거나 공개총회에 참석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시위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어제까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같은 장소에 모여 그날부터 천막을 치고 공동체를 조직해 회의를 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행진을 하며 주장을 내세웠다는 이야기다. 뭐 그렇다고 월가의 은행들이 이참에 정신 들여 반성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모여서 떠들고 행진을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 것이다. 아니, 그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 일 것이다.

 

 

생각해보자.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시민의 휴식공간인 근린공원이 동네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곳이 시위대의 점령 장소가 되어 하나둘 천막촌이 형성되더니 밤마다 각종 악기소리가 들려오고 주변 상가들은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으며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되 있어 불안해서 죽겠는 날들이 두 달 째 이어진다면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린 아마 ‘책에서 읽은 대로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막상 현실의 중요한 순간에 와서는 체질적으로 옳은 행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로 변심하여 민원을 넣기 바쁘지 않을까.

 

 

세계는 지금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반성에 여념이 없다. 미국발(發) 금융 위기에 이어 유럽 국가의 재정 위기로 세계경제가 다시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득 불평등의 심화로 1%가 독식하고 99%가 소외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會議)는 너무 오래된 회의(懷疑)가 되었다. 우리는 위기 때마다 자본주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얼마나 지겹게 들어왔던가. 그런 가운데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아온 한국은 여당과 야당이 한목소리로 '경제 민주화'를 제시하고 있다. 시장을 공정한 경쟁 체제로 만들고 결실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에 역점을 두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장’이 아니라 민주화의 주체인 ‘국민’이다. 바로 경제 민주화라는 한국적인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몫이며, 이는 국민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중략... 조선일보. 2012. 3. 12) - 정말 지겹다. 국민의 힘이며 국민의 몫이라는 말. 왜 늘 책임 이야기 할 때만 국민을 그다지도 챙기는 것인지.

 

 

나는 어쩐지 ‘국민의 몫’이 국민이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국민이 지는 책임이라는 소리로 들렸다.(그러니 앞으로 선택이나 잘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보수 언론은 여전히 경제위기의 책임을 국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 안에서 규정지으려 한다. 이는 세계경제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규정한 미국의 주장을 근거로 한 시각이다. 불공정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 낸 것은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가 시장에 던진 질문에 시장이 국가에 반론하는 전형적인 대립구도이다. 그 사이에서 국민은 언제나 설득과 통제의 대상이 되고 기득권은 변함없이 유지된다. 결국 가진 자들이 달라지는 건 하나 없고 국민만 가르치려 드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의 점령시위를 해석하고 보도하는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점령시위를 자본주의에 맞서는 범세계적 운동으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저 특정 시기 미국 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거나 금융권의 비도덕성을 성토하는 규탄대회이거나 개인화를 주장하는 행위라며 그 집단성의 의미를 축소하고 퇴색시키는 것이다. 어딜 봐도 시위현장에서의 폭력 장면을 주로 노출하면서 시민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제공하고 현장에서 일어난 주장이나 평화적 의지 같은 건 묻히도록 의도한다. 미국도 장애인을 앞에 두고 최루탄을 쏘는 나라인지 미처 몰랐다. 단지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몸수색을 당하고 체포가 되는 나라인지 몰랐었다. 시위의 ‘시간’, ‘장소’, ‘방법’에 대한 규제가 우리나라처럼 꼼꼼한지 처음 알았다. 질서유지에 강박관념을 가진 뉴욕경찰은 사소한 위법행위에도 엄격한 단속을 시행하는 조직이었다. 낮은 수준의 무질서를 단속하여 공동체의 건강에 기여하겠다는 야무진 발상을 도시이념으로 삼아온 곳이었다. 이 돈 가진 윗 것들이 안 가진 아랫 사람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어찌 이리 똑같은 것일까. 예를 들어 통장해지를 위해 은행에서 줄을 선 것도 점령시위대 소속이다 싶으면 바로 무질서 현행범으로 잡혀 들어가는 나라, 그 나라의 가장 쏘 쿨한 도시. 그럴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미래의 한 단면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뉴욕의 경찰은 물대포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 시위대를 탄압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먼저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떠올려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데자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파산 일보 직전의 월가 은행은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받고 시민은 그 덕에 파산했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의 진원지에 해당하는 AIG는 2009년 회생의 목적으로 받은 공적 자금을 임직원에게 거액의 보너스로 지급했다. 핵심인재관리를 위해 회사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미국인의 공분을 사고도 남을만한 작태였다. 우리가 지금 미국을 걱정할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처럼 미국인 대다수는 한 평생 채무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서브프라임 쇼크 이후 일반가정은 주택담보 압류, 강제퇴거, 학자금대출, 실업의 수순을 밝으며 고통을 떠안게 되었다. 금융권의 불공정 행위와 지속적인 착취, 도둑질의 결과 노숙자는 늘어갔고 방만 경영의 대표주자 세계 최대 기업이었던 GM은 파산했다.

 

 

월가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20,30대의 고학력 이면서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버거킹에서 굴욕적으로 화장실 사용을 금지 당하고 맥도널드에서 줄을 서야 했다. 그래도 커피는 마셔야 하므로 그 앞 스타벅스에 앉아 관광객들이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 할 때 답해주는 친절을 행하면서 말이다. 어쩌다 편집자의 집에서 샤워를 하게 된 날 트위터에 그 한 줄 기쁨을 알려가면서 말이다. 이들은 60년대 히피나 괴짜도 아니고 부잣집 철없는 도련님도 아니고 대단한 사회운동가, 평등주의자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냥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저 1퍼센트가 아닌 그 나머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서 대화하면서 모든 게 이루어지는 형국이었다. 날 것으로 노출된 그들의 대화는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았고 대단한 결론은 아니지만 합의가 창조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협력의 문화임을 보여주었다. 공개총회나 대변인 모델의 시도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지도자가 없이도 저항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점령시위대는 뜻있는 사람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모여 앉아 북치고 구호를 외치는 운동이 아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천막으로 이루어진 점령 공동체의 생활이 분명 자본주의를 넘어선 하나의 대안으로 또렷이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시위대는 분권화된 여러 작업 그룹으로 나뉘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다. 음식, 의료, 법률과 같이 가장 필수적인 분야부터 예술, 교육은 물론 여성, 장애인, 이민자, 퇴역군인 등 소수자에 대한 평등과 배려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박세길의 『자본주의, 그 이후』(돌베게, 2012)에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창조력이 자본이 되고 구성원이 복지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경제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는 풀뿌리 지역경제의 이상향이 바로 점령 시위대속에 있었다. 시위대는 ‘대안 경제 작업 그룹’을 만들어 지역자치회와 연대하고자 노력했다.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비록 경찰에 의해 해산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야별로 다양하게 구성된 직능조합의 형태와 유사했다. 자율적이면서 독립적인 창조자들의 수평적 연합체는 승자독식의 원리에서 벗어나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상생의 생태계 구축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월가 점령은 시위라기보다는 ‘대안적 미래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사례’인 것이 맞았다. 칼럼니스트 들은 이를 ‘점령 생태계’라 칭했고 점령을 무언가 아름다운 것으로, 무언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으로 바꾸는 일이라 평가했다. 사랑과 행복과 희망을 부르는 것이니 ‘공동체 정원’의 베이스캠프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있다고 해도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고민하는 가운데 수면위로 떠오르는 또 다른 ‘정의’에 대한 성찰이다. 이들은 분명 고용불안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느껴 경제정의를 실현하고자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분노와 같은 희망으로 모여들어 같이 가슴이 뛰는 시간을 경험했다. 사실 그곳에 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점령운동의 승리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거대 은행의 파렴치한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한 방법만 고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위대 주변 차이나타운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민자의 문제를 그들 다음으로 고민하기 시작 했다. 백인과 흑인의 발언권이 같다는 인종적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시위대에 걸림돌로 작용하던 노숙자 문제를 끌어안으려 고민하고 설득해야 했다. 사회운동에 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던 드럼서클과 연대하며 주민을 설득시키기도 했다. 시위대 안에서도 소수민족과 백인, 남성과 여성, ‘가치 있는 빈민’과 ‘가치 없는 빈민’으로 나뉘어 지는 이분법의 한계에 부딪혀야 했다. 소수 시위자의 폭력 때문에 다시 경찰의 폭력을 유발하는 전술을 반성하기도 했다. 갓 성인 된 혈기 왕성한 백인 청년들(무정부주의자)의 치기어린 난동을 이해해야 했다.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폭력, 강간 등의 범죄 및 안전 문제, 빨래와 용변 같은 위생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확인되지 않은 각종 ‘카더라 통신’으로 인한 내부분열을 막아야 했다. 이들은 공동체 속에서 부딪히는 현실적 문제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연대와 동맹의 새로운 형태와 모습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점령운동의 본질은 ‘누군가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표현의 형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처럼 ‘말소리를 들은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그 말을 반복하며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운율에 응답하는’ 펄스의 원리를 체험한다. 정신과 육체의 단절이 해제되는 순간이다. 연대는 단지 이익집단끼리의 단순한 악수가 아니라 ‘삶을 사는 방식과 세상에 대한 종합적 견해까지 서로 공감하는 것’임을 깨닫고 점령운동의 가치가 포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점령은 특정 공간을 정복하여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여든 장소에서 서로와 손을 잡고 마음을 일치시킨 후 그것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 미래사회의 초기 모델을 보여준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정부는 점령을 테러리스트의 행위와 유사하게 재구성하여 무질서한 폭력집단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물대포는 경찰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대포를 쏠 만큼 과격한 시위대의 폭력성을 강조할 뿐인 것이다.

 

 

 

분노했다면 점령하는 것이 다음이다

 

 

 

세상은 변했고 세대도 달라졌고 방식도 진화했다. 그저 우리 생각만 변하면 된다. 아니 맞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행하면 된다. 우린 생각은 하지만 그저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아직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 가슴이 아팠다. 그가 월가의 점령시위를 보고 블로그에 10월 달에 올린 글이 안타깝게도 유언이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2012년을 점령하라’ 였다. 2008년 촛불집회, 2009년 조문행렬, 2011년 희망버스... 그리고 다음은 무엇인가. 그는 미국이 비호감이더라도 우리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 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 2011년 10월  故 김근태

 

 

 

‘나꼼수’는 시종일관 쫄지마라고 했는데 ‘웃음을 잃지 않는 분위기’와 ‘비폭력적인 방법’은 월가 시위대에서도 일관된 기본방침이었다. 그런 가운데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연설한 슬라보예 지젝의 일침은 매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는 모인 사람들에게 훗날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그땐 우리가 젊었고 뜨거웠다고 곱씹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 충고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자기 합리화에 빠지며 현실에 안주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의 역사는 체제적 배제, 사회적 배제, 경제적 배제의 역사였다. 대한민국 1 퍼센트는 이제 그 옛날 쌍용 자동차 추억의 렉스턴 광고가 아니다. 우리는 이대로 가다간 살아있는 동안 1퍼센트를 위해 배제된 99퍼센트로 사는 길 말고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점령해야 할 것은 변화를 불신하는 아주 오래된 비겁함이다. 1퍼센트의 철벽같은 굳건함과 금빛 찬란한 위력을 믿고 의심 없이 현실을 체념하고 포기하며 온갖 종류의 절망을 푸념하고 사는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와 연대하기도 지레 겁을 내며 만연된 불신으로 체제에 순응하여 온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 책에 어느 편집자가 미국의 대형은행 경영진에 편지 보내기 운동을 독려하면서 느꼈던 심정을 적은 글이 더욱 고개를 숙이게 한다. 편지는 미국의 중산층이 주축이 된 부르조아의 시위였다. 직접 은행에 편지를 전달하러 간 편집자는 편지들이 청소부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점령시위대와 함께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교수이고 수입은 좋았고 건강보험 혜택을 받고 있었다. 부친은 은행에 다니고 도서관과 박물관이 집처럼 편하다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금융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안다고 했다. 한마디로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건전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한다.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그가 과연 그들만 비판하는 것이었을까.

 

 

당신 역시 은행가들과 늘 함께 있다 보면 잘못된 일도 괜찮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잘못인 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거품 안에서 살고 있다. 만약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가 그들의 거품을 깨뜨릴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는 당신이 믿고 있는 그런 게 아니라 국가적 재앙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사람들은 분명히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p181, 마크 그리프, <n+1>의 창간 편집자

 

 

혹시 왜 여러 방법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는 질책은 아닐까. 나같이 먹고 살기 편한 사람이 봐도 문제인건 빤한데 왜 당신들은 아무 말도 안하느냐로 들렸다. 사람은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관점과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모으게 만들었고 그렇게 돈을 모은 사람이 왕이 되는 세상이었다. 1%만 가지는 것이었지만 그 1%가 나도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새삼 이제와 가진 자들의 도덕을 기대하는 건 어쩌면 우리가 가지지 못해봐서는 아닐까 싶다. 지젝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부패와 탐욕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부패를 만든다면 우린 시스템에 대항하는 삶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자본이 되고 스스로 경제와 복지에 주체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 다만 그 속도를 앞당기는 일은 우리에 달린 듯하다. 특히 우리 다음 세대의 지속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라면 더 절실하다. 누군가 세상을 바꾸어 주리라 기대만 하는 것은 만약 안 바뀌더라도 할 수 없이 살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분노했다면 다음엔 일어서서 점령하는 것이 순서다. 그리고 먼저 우리들 자신의 절망부터 점령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99%의 절망으로 가득 찬 가슴이라 할지라도. 나머지 1%의 희망을 믿어 보는 것이다. 나와 같을 것이라 믿는 당신들의 가슴도 같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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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1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꽃잎이 지는 것이 슬픈 이유는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하루건 열흘이건 최고로 아름답게 피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꽃이 영원히 피는 것이라면 꽃은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꽃은 왜 어차피 지고 말 지 알면서도 온몸을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는 것일까. 혹시 꽃이 피고 지는 건 한 번의 아름다움이 시들어 버리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과 약속된 과정은 아닐까. 한번 만개하여 분분히 떨어진 꽃잎도 다음 계절엔 어느새 꽃봉오리로 다시 움트고 예전처럼 피어나는 걸 보면 꽃은 한번 피고 지는 아름다움을 단지 영원히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온 종이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넘기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진 이토록 처연한 이야기를 보니 꽃은 영원하기 위해 지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져버린 생명에서도 이처럼 진하고 서러운 꽃의 향기를 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미는 내게 그리움으로 눈물진 부용꽃이었고 붉은 빗줄기로 내리는 철쭉이었고 맨살로 벌거벗은 백일홍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도 꽃으로 피고 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을 꿈꿀 수 있는 존재였다.

 

 

단지 삶의 비밀을 먼저 알아버렸기에 신의 질투를 사 생을 일찍 마감한 사람들은 많았다. 우리가 아는 요절한 시인들은 필요이상으로 고지식하거나 이상적이거나 정의로왔기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죽음에게 내어줄 수 있었다. 천재적인 시인으로 태어난다는 건 다분 속세의 형벌이라는 전언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미의 스승이었던 이 도사는 일찍이 ‘천재도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행여나 그미가 천재성의 대가로 불행의 늪에 빠질까봐 얼마나 염려했던가. ‘천재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하기 십상’이라는 그의 통찰이 말해주듯 그미가 요절한 이유는 범속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너무나 고결했고 뛰어났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난설헌은 여덟 살에 이미 두보와 견줄만한 시를 써낸 신동이기도 했지만 하필 조선 땅에 태어났고 여성인데다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3대 악재가 겹쳐진 인물이었다. 조선의 여인은 재능도 형벌이었다. 작가는 4백년도 더 된 이 여성의 핏빛 봉우리를 무덤 속에서 꺼내어 다시 숙연하게 꽃피우도록 하였다. 내가 지금의 나이만큼 한 번 더 산다면 꼭 작가의 나이가 된다. 나는 그때 내 재능을 꽃 피울 수 있을까. 질곡 많은 한국의 근 현대사를 몸소 헤쳐 나온 작가가 발굴해낸 봉우리는 난설헌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여인들의 아까운 재능의 총체, 그 모든 눈물의 진액들인지 모른다. 흰 명주 수건에 붉게 물든 그미의 피눈물이 어찌 우리 가슴에 결결이 맺히지 않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교롭게도 그미가 살았던 조선중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명의 서양 철학자가 퍼뜩 떠올랐다. 그도 그미처럼 부유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언어와 다양한 학문을 교육받았으며 독서에 몰두하다가 문학적 사유에 재능을 보인 사람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도 가장 친한 친구와 아버지, 남동생, 자식을 연달아 잃으면서 고독의 시간과 투쟁하는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그미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조선이 아닌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남성이었고 여자와 결혼한데 있었다. 바로 전 생애를 통틀어 수상록 <隨想錄, Essais, 1586> 한 작품을 남긴 몽테뉴이다. 몽테뉴가 극심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죽기직전까지 ‘자기탑’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미에게도 시를 쓸 수 있는 자유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하는 통한의 푸념을 해본다. 틀림없이 몽테뉴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답고 방대한 분량의 고전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을까. 작가의 넋두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일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싶어 새삼 안타까움이 복받친다. 사람과 시정을 나누며 글맥으로 세상을 배워온 그미에게 시를 쓰는 일은 물과 공기 같은 생명유지의 장치였을 터이다. 시인에게 한 줄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미는 시집이라는 억압과 남편이라는 폭력,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자식의 죽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방법을 철저히 차단당했기에 스스로 소복을 입고 철쭉화관을 쓴 채 자신의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가 통하는 혈관을 막듯 시의 소통을 막았기에 그미는 영혼의 질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미에게 시집은 시를 쓸 수 있는 집과는 아주 멀었다. 조선조의 수많은 여성들이 붓과 서안 대신 실과 바늘로 창조해낸 조각보의 예술성을 보라. 내 어머니는 손재주가 뛰어나 전후 시골 기와집 대청마루에 일제 미싱을 몇 대놓고 동네 처녀들에게 양장기술을 가르치셨다. 당신이 제대로 배우고 돈이 있었다면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울 명동에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을 거라고 늘 아쉬워 하셨다. 그래서 더욱 굴하지 않고 뒤늦게 꽃을 피운 작가의 집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소설에는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산산 조각난 가슴을 기를 쓰고 이어 붙여온 여성들이 그미 주변에서 그 아픔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조선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무시당하고 본성을 억압당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서방 잡아 먹은 팔자가 되고 과거에 낙방하면 아내의 기가 너무 세기 때문이고 자식의 돌림병은 어미가 부실한 까닭이었다.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인 그미의 외할머니는 전실 자식이 셋이나 되는 후처 자리로 시집간 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어머니 김씨는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남편이 밖에서 딴 살림을 차려도 말없이 방에 틀어박혀 수만 놓을 뿐이다. 시댁의 영암 외숙모는 남편을 먼저 보낸 죄로 동서시집살이가 고달프기 짝이 없다. 주인집 아들과 합방을 한 달이였지만 결혼 소식을 듣고는 종년의 딸로 태어난 신세를 비관하여 자결을 하고 만다. 친정에 있을 때 몸종이었던 덕실이는 도도한 안방마님들에 앙심을 품고 그미의 남편을 유혹한다. 오라버니를 연모해온 수연은 벼슬아치의 첩실 소생이었기에 자발적으로 기생이 된다. 동지나 단오같은 몸종은 억지로 시집보내어져 소박을 맞거나 남편의 폭력을 못 이겨 도망 나오는 신세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열등감 때문에 그미를 평생 억압해온 시어머니 송씨도 잘나지 못한 아들로 속을 썩이며 질투와 미움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을 덮고 내가 시집갈 때 할머니, 이모님, 외숙모, 고모님이 하나같이 ‘꼭 잘살아야 한다’고 두 손을 꼭 잡으시며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엄마의 장례식 날에도 변함없이 헤어 질 때 내 손을 당신 두 손으로 힘주어 흔들며 ‘어떻게든 잘 살아야 한다’고 눈물 훔치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여자로 태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 시부모를 모신다는 것, 친정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당신들의 가슴을 너덜거리게 하였을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의 어머니와 자신이 겪어왔을 그 모든 상처들을 미리 어루만져 주시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미와 이어진 인연이라고 우리네 여인들의 슬픔만을 되새기며 울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원한과 절망을 안겨주려 난설헌의 영혼을 복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은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세대를 초월해 교류하는 상호작용으로 모두가 한자리에서 조우할 수가 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피어난 난설헌의 모습은 독자를 한마음으로 모으는데 충분 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난설헌과 똑같은 여성으로 태어나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내 어머니와 같은 연배의 작가가 분명 우리와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고민했기에 그 아픈 과정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싶었다고 믿는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 1932~)는 여성이 열 달 동안 자궁 속에 이물질과 같은 태아를 잉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와 공존하며 차이를 견뎌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여성적 문화란 차이를 견디는 문화, 타자를 포용하는 문화라는 것을 난설헌과 작가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그미도 그녀도 그 차이를 견뎌내고 세상을 포용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더욱 자신으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소설을 썼을 터이다.

 

 

소설의 마지막, 죽기 전에 그미는 주변의 여인들에게 아껴온 거울을 선물한다. 그미가 건네고 간 거울은 어쩐지 긴 시간을 거쳐 우리 앞에 어렵게 당도한 유품인 듯하다. 거울 앞에 하나로 모여든 우리네 심장이 유독 붉고 뜨겁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 세월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그네들의 서러운 꽃향기에 흠뻑 물들여진 탓일 터이다. 지난 겨울은 많이도 서럽고 외로웠다. 다시 꽃이 피는 봄이 그립다. 이번 봄에는 어디에서든 이름 모를 꽃이 더 많이 피어 주기를 기다려본다. 그미의 하얀 거울에 꽃이 피는 봄을 활짝 비추며 그 옆에서 난설헌이라 가만히 읊어 보리라. 뜨거운 심장이 다시 뛸 수 있어 고맙고 그 옛날처럼 활짝 피었기에 이번엔 잊지 않겠다 말하리라. 올봄의 여인들은 그렇게 모두가 아름다워지리라. 내 그미와 꼭 약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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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산문시같은,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비로그인 2012-03-1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댓글도 산문시처럼 아름답네요~ :) (저도 시구 하나 보태는 건가요? 히히)
꽃은 영원하기 위해서 진다... 이 구절이 마음에 콕, 박혀버렸어요.
이제 한사람님 글을 성실히 읽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_+
 
자본주의, 그 이후 -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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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 즐거워서 못살겠어요

달이 가는 게 해가 가는 게 행복해서 못 살겠어요

이제 겨우 ***일 남았네 이 고통이 끝나는 날이

조금만 더 웃으면서 견뎌내어요

좋은 날이 오고 말거야

 

 

 

 

설운도의 <원점>을 편곡한 것으로 들리는 ‘나꼼수’의 트로트 로고송(신곡)이다. 봉주 8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이 노래가 오늘따라 슬프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그 날까지 몇 일이 남았는지 까마득해서 일까. ‘나꼼수’에 출연한 MBC PD는 자신들도 매체가 있고 뉴스를 전달하는 어엿한 창이 있는데 거기서는 말 못하고 지하에 와서 떠들고 있으니 잠시 울컥하는 것 같았다. 사장이 퇴진하는 그날까지 끝장파업에 돌입한다는 PD의 목소리는 결연하다기 보다 서글퍼 보였달까.


주말에 ‘무도’와 ‘나가수’를 보지 않았더니 한층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시간이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의 파업은 내게 여가의 파업을 유도했다. 우리야 두어 시간 웃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파업하는 당사자들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일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영구적으로 파업이 불가능하다. 권력의 주체는 자본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반드시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 답답한 마음에 같이 무거운 책을 들고 만다.

 

 

이 책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로 유명한 박세길의 신간이다. 500p 분량의 꽤 촘촘한 사회과학서이지만 대부분 쉬운 용어로만 단계적 논리를 펼치시는 덕에 에세이처럼 술술 넘어가는 기특한 책이다. 내가 무리 없이 모두 이해했으니 나 같은 아줌마들도 충분히 흥미롭게 펼쳐들 수 있을 듯 하다. 가장 훌륭하다 생각되는 건 궁극의 질문과 최종적 답안 사이에 치밀하게 펼쳐지는 논리의 향연이다. 아주 세세하게 쪼개어 그것을 항목마다 밀도 높게 분석했다. 각종 통계자료는 기본이다. 그리고 다시 조직적으로 완성했다. 완벽을 기울인 교과서의 느낌도 나는데 신기한건 지루하지가 않았다는 것.

 

 

쏟아져 나오는 서사와 위로의 책을 접고 이 책을 꼼꼼히 읽게 된 이유는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은 치는데 이게 최선이 아니라면 그럼 다른 답은 있는 가였다. 적어도 내가 만나온 사람 중에 온라인이건 오프이건 자본주의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모두 다 이건 아니라고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절망이고 살아갈 날이 암울하다 말했다. 분단국가인 이 땅 한국에 사는 한 달리 살아갈 방법도 없고 지금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지 생각만 하면 서글프다 말했다. 좋은 날이 언제이고 어떤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 저 노래에서 좋은 날이 온다는 건 그들의 바램대로 정봉주가 나오고 MB가 들어가는 날일까 - 그때라면 고통이 끝나는 것일까. 과연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일까. 불행히도 우린, 그냥 웃고 말지요, 왜 사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요, 일 것이 틀림없다.

 

 

궁금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언제까지 인 것인지. 나는 돈이 있는 사람이었다가 망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돈이 개인에게 어떤 실력행사를 하는지 잘 안다. 돈은 사람의 인격 수준까지 결정하는 위력이 있다. 돈이 많으면 보다 착하고 우아한 사람이 될 기회가 많다. 성격도 좋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보일 확률도 많다. 돈이 많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람이 꼬인다. 어떻게든 돈 많은 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그 앞에선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틀려진다. 돈이 없으면 친구도 없어지고 친척도 멀어진다.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사람 곁에 본능적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해보면 미처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는 뜻밖의 수확도 있다. 처음엔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돈 떨어졌음을 처절하게 깨우치는 순간은 돈 때문이 아니다. 별 생각 없이 매일 같이 하던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 매일 마시던 커피가 떨어졌을 때,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샴푸가 떨어졌을 때, 눈가의 주름이 뭐 중요했다고 찍어 바르던 화장품이 떨어졌을 때, 휴지도 치약도 세제도 떨어져서 어제까지 잘 하던 일을 오늘부터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이런 것들을 생필품이라고 하던가.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고 하던가. 아침에 일어나 기분에 따라 양치질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고 치약이 없으면 이빨을 못 닦는데 돈이 없으므로 그 필수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래서 돈이 생기게 되면 나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부터 사게 되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일이란 거창한 도덕이나 희망이나 사랑 혹은 그리움 따위의 돈 없어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돈이 있어야만 가능한 아주 사소한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구나, 사람이 참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사정없이 겁탈할 때 인 것이다. 즉, 돈이 없으면 그 없어진 돈 때문에 사람을 알게 된다. 돈 있을 땐 나부터 시작해 내 돈에 가려 잘 안 보이던 그들이 보인다.

 

 

문제는 돈이 없으면 사람이 보다 잘 보인다는데 있다. 자본주의의 유혹은 어쨌든 우리 주변에서 돈 많은 사람을 본다는데 있는 것이다. 코스닥으로 떼부자가 되어 타워 팰리스로 이사를 가는 동료를 목격한다는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부동산 시세차익을 챙겨 벤츠를 사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청담동 카페 골목을 지나다 보면 남편이 의사인 사모님들이 죄다 외제차를 발레파킹 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는 것이다. 대기업 계열사쯤 되는 집안에 시집간 동창이 자주 간다는 (희한한 이름의)호텔은 식당이 회원제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암 것도 아닌 나는 맛있다고 해서 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재력이 좋아 결혼할 때 집이라도 장만해준 동료는 골프도 치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 꼴을 어김없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분이 씁쓸해 우연히 틀어본 TV에서도 일등한 사람에게만 상금이 왕창 몰아 터지는 서바이벌 게임을 두 눈으로 일주일 내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잘 살고 가진 거 나누는 나라가 될 줄 알았는데 이 놈의 엠비정부는 승자독식의 끝장판인 대기업 논리와 땅 파고 벽돌 쌓는 불도저식 개발과 등수에 집착하는 일등주의만 좇아가느라 나라를 다시 쌍팔년도 이전으로 되돌려 놓고 말았다. 원전은 일본을 의식해 수주되어야 했고 G20 의장 국가는 기어이 되어야 했고 평창은 삼수라도 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어떻게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진국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은 런던을 좇아가야 했고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벗고 PT를 해야 했다. 유럽과 미국에 극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프랑스 소녀들이 피켓을 들고 우리 아이돌 공연을 연장하라고 시위를 할 때 얼마나 짜릿했던가. 여기선 삼성 욕을 열나게 하다가도 뉴욕의 타임 스퀘어 광장에 하루 종일 빛나고 있는 삼성과 LG 로고는 그런대로 기분 나쁘진 않았던 우리. 부지런히 따라가고 숨차게 도망가느라 여튼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긴 한 것 같다.

 

 

근데, 그럼 뭐하나. 겉으론 번지르르해도 우린 속으로 썩었는데. 미국의 일본의 안 좋은 점은 그대로 사이좋게 복제해 썩어가고 있는데. 우린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져도 휘청하고 일본에서 쓰나미가 닥쳐도 흔들리는데. 중국과 미국이 팽팽하면 우리가 더 긴장해 뒤돌아 호들갑인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예부터 사대와 자주를 줄타기 해온 눈치 빠른 민족이었다. 물자와 자원은 적은데다가 성격은 조급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의 생존방식을 일찍 터득하느라 늘 그들의 동향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유달리 의식하고 그런 남들 눈에 나지 않으려고 자기검열을 하는 습관은 어쩌면 아주 오래된 우리 민족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전쟁이 적어 내부에서 ‘편가르기’에 치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쟁이나 내전이 많지 않았기에 임진왜란이나 일제침략, 한국전쟁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 그로인해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다. 이분법 논리는 좁은 남한에서 다시 되지도 않는 이념싸움으로 확산되고 우리는 허구헌 날 좌와 우로 구분된 시각의 뉴스만 보고 산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총선, 대선,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이 물갈이 하는 해인데 미국은, 프랑스는 누가 대통령이 될까. 아니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경제는 어떻게 되고 집값은 어떻게 되고 물가는 교육은 언론은 ... 소녀시대는 언제까지 소녀로 살 것인가, 무도는 언제 방송되나, 정봉주는 언제 석방되나, 강호동은 언제 컴백하나... 아 봄은 오는 것인가. 나는 다시 재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거창한 생각을 아니 아무리 시시콜콜한 생각을 해도 역시 지난 2년 동안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지금의 추락한 내 처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달려온 세월은 그럼 아무것도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공부 덜하고 일 좀 덜하고 남들 놀 때 놀고 여행이나 가고 살 것이지 뭐 하러 아득바득 열심히 살았을까, 였다. 그렇다. 나는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주저앉기 전에 열심히 살았던게 억울해서라도 꼭 재기 하고 싶었다. 이기는 놈이 다가지는 세상, 한 번 지면 땅 끝으로 추락하는 세상, 한 번 추락하면 인생 실패하는 세상, 돈 없으면 능력 있는 게 더 서러운 세상, 더 살아봐야 더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은 끝이 나길 바랬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세상은 이제 끝난다고 말한다. 반드시, 확실히, 자본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외친다.

 

 

저자는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사회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2007년 홀로 나와 치악산 기슭에서 10만 페이지 독서를 하고 그는 좌우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야 했다. 오랫동안 좌파적 시각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시각을 버리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겠다는 지적 오만을 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과연 좌우 대결구도는 얼마나 타당하고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지닌 것인가 자문했다. 기실 좌우대결 구도는 역으로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어왔기에 이대로 가다간 결국 우파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어질 것이라 충언했다. 사실상 좌우 대결구도는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중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신세대 창조자 -디지털 문명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 80년대 이후 출생하여 90년대에 10대를 보낸 세대 -들에게도 더 이상 좌우대결구도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좌와 우로 자꾸 이분법화 하는 것은 그렇게 좌우로 나뉘어야 자기들이 더 유리한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마지막 고집일 뿐이다. 나머지 중도자들은 좌와 우의 중간이 아니라 좌와 우가 모두 답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새로운 답을 찾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서있기만 하던 안철수를 대안으로 보았겠나.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 진정한 진보는 좌우구도 속에서 좌파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데 있다고.

 

 

역사의 진행방향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세대라 말하기엔 늙었고 기득권 세대라 하기엔 아직 젊다. 우린 언제나 낀 세대였다.(우리가 언제 제대로 뭔 세대를 주도하긴 했나)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세대와 기득권 세대와 마찬가지로 같다. 이 책을 좀 근사하게 리뷰를 해보려고 정리를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 다 요약하고 보니 A4로 19장이었다.(그래서 근사하고 설득력있는 리뷰는 포기한다) 이틀 동안 내가 한 일은 무슨 교양 리포트를 써내는 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흥분된 시간이었다. 그가 말하는 ‘상생의 인본주의’는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어난 변화가 마침내 자본주의를 멸하게 하고 전혀 새로운 가치로 이행하는 과정을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로 펼쳐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절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인 승자독식의 대항가치로 상생을 내세웠고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고 상생을 앞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민운동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희망으로 느낀 것은 지식근로자의 정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처럼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계급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인 것이다. 고용, 피고용의 관계에서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가 결국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력기반의 경제에서 생산수단이 창조력이 된다면 그 자체가 영구 파업을 상징할 수 있다. 더 이상 노동자는 통제 대상이 아니고 협력관계의 파트너가, 나아가서는 주총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지배 권력은 생산요소를 가진 창조자들에게 이동할 것이고 이는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좌파혁명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삼성의 힘은 이미 국가를 능가한지 오래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도 다시 언젠간 규제를 해제하는 것의 전 단계일 뿐이다. 국가는 자신을 지양하고 시장은 스스로 초월하고 구성원은 국가와 시장이 아닌 자신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시장에 의지하는 ‘쫓기는 삶’이 아니고 국가에 의존하는 ‘기대는 삶’도 아닌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삶으로 모두 이동하는 것. 물론 이는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린다.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에서의 보편적 인간형은 ‘자유와 평등, 개인과 집단, 경쟁과 협력 등 근대 이후 분리, 대립되었던 가치들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추구하는 사람’이니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51%의 이기심과 49%의 이타심’이 조화를 이루는 아주 균형적인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차이는 2% 안팎인데 역사의 변곡점은 그 2%의 변화로 공멸이냐 상생이냐의 기로에 선 듯하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해답을 어떤 해외의 역사나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우리 농업사회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찾는 과정에서 농업관련 책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을 쓰면서 생태계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논은 같은 땅에서 똑같은 작물을 반복해 재배하므로 토양이 황폐화 되어야 하는데 왜 수천 년이나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 저자는 논이 인공습지로서 상생하는 복합 생태계의 일부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전통사회에서 논은 지속가능한 농업의 표본이었고 논농사는 상생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학습의 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 중 지역가치 공동체로서 ‘향약’은 상생의 가치를 생활문화로 정착시켰으며 그 토대가 다름 아닌 논농사였다. 국사책으로 잠시 기억을 돌이켜 보면 ‘환난상휼’의 가치는 공동체 성원들이 어려움을 나누는 원칙이다. 지금 내가 쌀이 떨어졌는데 우리집에서 연기가 안나니 이웃이 알아서 한바가지 퍼다 주는 형국이다. 그러나 논의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상생의 가치도 사라졌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상생이 아닌 정복으로 바뀌자 지속가능한 삶의 조건도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오래전부터 인간의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공생인이라는 의미의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날 것을 호소해온 통섭학자 최재천을 떠올렸다. ‘호모 심비우스’ 정신은 지구 생태계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과의 공생을 우리 삶의 최대 목표로 삼자는 것이다. 저자는 논의 생태계, 즉 상생의 원리가 사회문제 해결의 일반적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혼자만 다 가지는 게 아니고 자본도 권력도 나누자는 것이다. 손해를 보자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서 성공과 결실이 더 커지고 오래가는 자연의 원리를 믿어보자는 것이다. 과학은 물론 경제도 사회도 생태계로 이어지고 통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저자는 말미에 역시 이 모든 흐름의 장애요소로 단연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지적했다. 나누자고 하는데 극도로 싫어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자기처럼 가지게 될까 두려워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가진 사람은 가진 게 많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은 욕심의 동물이므로 자기 가진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래서 무언가 가졌다 생각하면 더 이상 모험이 힘든 것이다. 가진 게 없어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도전하기가 쉬운 것이다. 다행히 나는 가진 게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자본주의, 그 이후는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두 쪽 모두에게 모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떤 쪽이 더 즐겁게 모험에 뛰어 들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의 결론이 내게 아주 기쁘게 들리는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사람과 제도와 권력의 본질을 꿰꿇은 저자의 의미심장한 몇마디를 옮겨 본다. 어느 한 명의 왕을 없애고 새로운 왕이 되기 보다는 모두가 왕이 되면 자연 한명의 왕이 사라진다는 논리는 퍽이나 마음에 든다. 모두 왕이 되려 하지 말고 평민이 되어 평등하게 살자는 불가능하고 위선적인 주장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누어 달라는 것도 실은 나도 한번쯤 왕이 되고 싶었던 속내에 대한 보상일지 모르니까. 다 같이 왕이 되어서 혹시나 또 거기서 쟁탈이 일어날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겠다. 일단 모두가 왕좌에 오른 다음에 둘러보아도 될 일이다. 아니 내가 왕이라면 새삼 둘러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다들 왕인데 누가 나보다 더하고 누가 나보다 덜하랴.

 

 

 

자본주의를 마감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역사의 무대에서 최종적으로 퇴장시키는 것은 자본가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대중의 꿈이다.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과거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던 자본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순간 자본주의는 수명이 다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될 때 왕이 사라지는 것처럼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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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1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임금님이 안 되고, 누구나 평면이 될 때에도 왕 같은 사람은 사라지겠지요. 논농사이든 두레이든 농업이든, 스스로 삶을 짓고 밥을 지으며 집을 짓잖아요.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이루면 좋은 꿈을 이루리라 믿어요.

가연 2012-03-13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네요ㅎㅎ 책을 못읽어봐서 정확히 모르겠으나, 좌우대립구도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결과적으로는 옳은 말이 되겠지요. 우파에게 유리한 국면이 될 것이라는 설명말이에요, 풋. 사실 뭔가 끄적거리고 싶은 말도 있긴 하지만 책을 안읽은 상태에서는 엄밀하지 못할 것 같아서 관두렵니다, 하하. 그런데 책을 정말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군요.

이건 여담인데요, 무도가 결방한지 벌써 6주... 저는 점차 지쳐갑니다ㅠㅠㅠㅠㅠㅠㅠ 너무 힘들어요... 저도 제 무도보는시간에 책이나 끄적거리며 보고 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 책보는게 나쁜 건 아닌데 무도가 거의 일주일을 견디는 힘이었던터라[...]

조통 2012-03-2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서평 또한 잘 읽어 보았습니다. 한 권의 새책이 나온 듯 하군요..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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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하필 여성인가

 

 

 

   이 책은 나름 조직생활의 처절한 부조리를 겪은 현직 아줌마의 세대 공감형 에세이가 아니다. 전직 방송국 보도부 기자 출신 고학력 인텔리 여성의 신랄한 사회비평이다. 그것도 통계조사와 학문적 연구가 아닌 본인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주가 된다. 엄연한 사회과학분야의 사회비평 장르에 속하는 책을 왜 굳이 애증의 에세이라 했는지 의아스러웠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사회에선 이런 말을 여성이 줄기차게 해대면 잘 안 먹힌다. 같은 여성은 혼자만 잘난 척한다고 뒤 돌아서 쓴웃음 짓고 남성은 앞에선 대단하다 놀랍다 맞는 말이다 추켜세우다가도 속으로는 그래봐야 소용없지 중얼 거릴지 모른다. 그래서 추측컨대 아마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이 책에 대해 대놓고 비판하진 못할 것 이고(특히 배운 남자들은 속으로 뜨끔해도 포용의 아우라를 잃지 않으려 애써 콘트롤 할 것이고) 여성독자들은 지지는 보내겠지만 마음으로 공감하지는 않을 듯 하다.(배운 여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 혼자만 흥분한다 싶어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못한다 싶어 적당한 열패감을 느낄 것이므로) 양쪽 다 잘 알아 들었다, 정도가 상위반응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라디오 방송진행으로도 유명하다 들었는데 이른바 이빨과 필력에 있어선 내공이 상당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떤 부분 여자 김어준, 여자 강준만, 여자 진중권의 뉘앙스가 감지되기도 한다. 진보가 논리에 집착한다는 꼭지는 거의 김어준의 주장 여자버전으로 인식되었다. 공감 가는 잡설과 시원한 직설과 이해갈 만한 독설이 치우치지 않게 그야말로 절묘한 배합으로 섞여 들었다. 그래서 아니, 그러다 보니 조금 진부해지는 보수적 아우라도 느껴진다. 뭐랄까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끄집어내어 치고 나가다가 끝에 가서는 나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다는 식. 어차피 잘나왔던데 끝까지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이게 죽어도 맞다고 생각한다고 할 것이지 왜 갑자기 중용의 가치로 꼬리 내리는 것인지 그게 좀 아쉬웠다.(나는 가장 짜증나는 것이 자기는 *나게 공부해서 일류대에 서울대 대학원에 미국연수까지 다녀왔으면서 꼭 학벌을 철폐하자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생활 한다고 모든 걸 친정 어머니에게 일임하고 당신 남은 인생 *빠지게 부려먹어 놓고 이제와 - 다 성공 하고나니 - 이제부턴 좋은 딸 되는 거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하는 여자들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건 누가 봐도 좌파구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그저 나일뿐이다 하는 좌파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이다. 참, 하나 더 교육이고 정치고 직업이고 사랑이고 뭐고 모든 예를 들어 비교할 때 꼭, 미국을 드는 사람들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괄호 안이다. 글의 맹점은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이게 다인 것 같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게 다는 아니다.)

 

 

   특히 미국을 집중적으로 예로든 중간부는 필요이상으로 반복과 부연이 많아 지루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같은 세대이고 내가 절감하는 비슷한 문제들을 대놓고 지적질하고 있어서 머리말 읽을 때까지는 그렇지, 그거야, 하면서 기대감이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 이상하게 불쾌해지는 마음이 무엇일까 나는 한 이틀 고민해야 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밝히기 싫어서 할 말은 많은데 꾹 참았다. 그러는 동안 별수 없이 나는 저자가 지적한 그 부분에 정확히 안착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었구나를 깨우쳤다. 지금 심정은 꼭 동네 아줌마들이랑 낮에 실컷 막장 드라마 작가와 작품과 공영방송의 상업성을 적나라하게 욕하다가 돌아와 밤에 다시 채널을 그 드라마에 고정시키는 기분이다. 어떤 영어학원 원장 욕을 더 없이 해놓고서 그 학원이 합격률이 높다고 슬그머니 등록하고 오는 기분이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고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유는 저자가 여성이라는데 있는 듯하다. 그것도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문제 풀고 그 시험점수로 대학에 붙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 들어가 조직의 쓴맛과 남자들의 구차한 맛과 사회의 더러운 맛을 똑같이 느꼈던 여성. 그렇지만 그 개성 강하다던 x세대도 이제는 배나온 학부모가 되어 이 나라의 교육현실을 한탄하며 그저 피 끓는 모정으로 쯪쯔 거리고 있는 사십대 여성.(엊그제까지 삼십대였던 ㅠ) 특히, 출산과 육아, 맞벌이의 억지스러운 현실에 할 말 많은 여성. 너만은 나같이 살지 말아라하시던 어머니의 무지막지한 희생을 업고 조직에서 인정받아 역시 한 여자의 행복은 다른 여자의 불행이 필수적이라는 원칙에 가만히 입다물어온 여성. 아마 어린 시절 고무줄하면서 ‘무찌르자 공산당’ 아니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같이 부르던 노래도 똑같았을 여성. 이 연대감 질펀한 동지의식이 나는 왜 불편했을까. 나는 왜 저자의 결론이 불쾌하게 들리는가.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나 하라고 떠들 땐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강준만이 책 내었을 땐 열화와 같은 리뷰를 썼고 진중권이 신간 냈을 땐 뜨자마자 구입했건만. 얼마 전 남인숙 작가의 여자가 남자를 분석한 글에는 가슴으로 공감했으면서 왜 이 저자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인가 말이다. 왜 하나같이 맞는 말만 하는데도 선뜻 박수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 책을 읽고 잘못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생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 덮고 지배적으로 떠오른 생각 중 또 하나. 저자는 과연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중 일반이 아니라 정치인과 고위관료, 여성이 아닌 기득권 층의 중년남성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저자가 인터뷰 해온 이른바 뱃지나 별이 달린 사람. 라디오 인터뷰 한번 하는데 아랫 것 열 댓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윗 사람. 공중파 인터뷰 좀 하겠다는데 대본 검열 들어간 후 지들이 직접 질문 적어주며 짜고 치는 고스톱 방송 하게 만드는 청와대 사람. 중요한 사안은 꼭 여지를 남겨두고 답하거나 이쪽이냐 저쪽이냐 물으면 꼭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자기 입장위주로 지식과 정보만 전달하는 정치인. 뭐, 아무래도 저자는 직업상 남성을 만날 일이 더 많았을 것 같아 그들에게 할 말이 많은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저자가 주로 남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쁜가. 이 묘한 아이러니는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말 안하고 사는 우리(?)만 바보 같고 따지지 않는 나만 불의에 눈감고 사는 비겁한 사람 같은 이 씁쓸한 기분. 이 무슨 삐뚤어진 피해의식이란 말인가. 누구도 쉽게 하지 않는 말을 하면 용기 있다 박수는 쳐주지 못할 망정 그럼 그동안 그거 다 받아내고 지켜본 우리는 이 현실이 좋아서 그런 줄 아느냐고 왜 당신만 혼자 정의로운 척하고 온갖 부조리를 다 파헤치는 양 잘난 척 이냐. 맞는 말만 하면 다 맞는 것이냐. 그냥 있어도 잘난 줄 충분히 아는데 꼭 이렇게 나머지(?) 동료들을 물 먹이고 혼자 정의로와야 겠느냐..... 꼭 지금 저자와 같이 직장생활하는 라이벌이나 되는 것 같다. 완전 많은 여성들을 대신해서 총대를 매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봐도 말이 안된다. 그러니까 이건 90년대 직장 다닐 때 플랫폼이다. 조직에서 여직원 모임에 나가지 않기로 유명했던 나로선 대국민적 호소를 앞세운 이런 식의 내밀한 페미니즘엔 함께 동조할 수 없다는. 만약 공론화 하고 싶다면 차라리 여성 공동의 목소리로 솔직할 것이지 대한민국이나 사회 운운하지 말라는. 저자는 여성의 평등을 외친 것이 전혀 아니건만 어쨌든 나는 똑같이 조직사회의 쓴 맛을 보아도 남성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결국 페미니즘의 영역 어딘 가에다 저자를 분류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끼리 페미니즘 주장하면 왕따다) 그러니까 여성의 적은 여성이 맞다. 여성을 차별하는 건 여성이 더 하다. 나는 내가 남성이었다면 이 여성이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혹시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나 역시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니까.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만 특별한 교육을 받고 색다른 음식을 먹고 다르게 살아오지 않았기에 분명 나같이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책을 대하는 나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면 왜 우리가 이 모양인지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분석은 이 책에 모조리 다 있다고 말씀 드린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같은 여성이 이런 주장하는 게 기분나쁜 자의식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유 같은 건 묻지 말라구

 

 

 

   박 에스더 기자는 이 땅의 권위주의, 군대문화, 배타주의, 단일가치, 민족주의 가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물론 이렇게 구분지어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다섯 가지가 올림픽 오륜기 처럼-아니 아우디 엠블렘처럼 -적절히 엮여있다) 그리고 그 기원을 장구한 역사속의 유교적 이념, 장유유서의 전통으로 보았다. 엉성하고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상당부분 디테일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성공한 여성들은 대개 완벽주의자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남성에게 지적질 안당하려고 발버둥치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 반복되는 주장이 많은데 여튼 핵심은 우리의 상하 위계적 문화를 관통하는 핵심코드를 권위주의적 문화로 보고 이와 친척인 군대문화가 사회조직의 일반문화로 정착된 것을 애통해 한다. 조금이라도 차지하게 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주의가 만연되어 있고 이념적 분단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흑백논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오랜 세월 단일 가치를 주입하고 강요해왔기 때문에 다양성이라고는 사회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푸념한다. 단일민족을 강조하여 앞으로는 민족적 우월감을 고취시키고 뒤로는 민족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보편적 인권을 희생시켜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전통과 현실과의 괴리로 생기는 위선이 경쟁력이 되어 도덕은 있는데 그건 그냥 교과서에나 나오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고 현실에선 뒤돌아 호박씨 까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도 모피반대나 동물보호, 낙태법, 10대 성문제, 장애인 인권, 동성애같이 민감한 문제는 답이 있는 것도 알고 무엇인지도 빤히 알면서(혹은 자기도 분명 의견이 있으면서) 다수는 반응이 없다. 우리 사회는 모든 담론이 진보냐 보수냐 혹은 성장이냐 분배냐, 수도권이냐 지방이냐 같이 대립된 가치위주로만 모아지고 무슨 대세가 아니면 이슈로 환기되지 않으면 토론의 주제로 끼지도 못한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상식적 규범들에 대한 의심을 좀 터놓고 시끄럽게 공론화하자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원래 시끄럽고 과정이 피곤한데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한 문제제기는 해보자고 말한다. 정이 전면 부정되고 반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합이 되는데 우리는 그 무엇도 제대로 반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말이다. 우리는 안전이나 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교화된 국민으로서 본능적으로 죄의식을 느낀다. 갈등은 곧 사회불안이요, 파업은 경제불안, 시위는 정국불안 식으로 마치 우리가 불안한 틈을 보이면 금방이라도 김정일 아들이 광화문에 폭탄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다시 하나가 되어 뭉치자 얼마나 지겹게 들어왔던가. 우리는 정부가 막강한 공권력을 가지고 시민을 억압하는 건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현상이라 떠들면서 롯데마트가 통큰 치킨으로 소비자와 상인간의 논쟁을 불러 왔을 땐 청와대 정무수석이 트위터 한마디로 정리하는 식의 일방적 간섭을 명쾌하게 해결했다고 말한다. 각종 분쟁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 전방위적으로 커다란 정부, 절대자 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적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저자는 우리가 한번도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와 보편적 인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적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체험해본적도 만들어 본적도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방송국이라는 조직에서 겪었던 일, 학창시절, 서울대 대학원 시절, 미국 연수 시절, 라디오 진행자 시절에 겪었던 에피소드와 만난 사람들을 예로 들며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마지막 결론은 의외로 싱거웠다.(물론 자신은 결론내지 않겠다고 했다)

 

 

“사랑하면 동거해. 결혼이 부담되면 혼자 살아. 애는 낳고 싶을 때 낳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게 아니잖아. 사회가 같이 키워 줄거야.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 니까”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회.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화가 진정한 민주주의라 결론 맺는다. 그러니까 너나 나나 다 똑같아야 하는 그 ‘같은’ 하나를 버리고 각자 ‘다른’ 나를 택해서 살 수 있는 그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자고 말한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은 필요 없다. 이미 우리는 하나였고 하나이기 때문에 이제부턴 좀 서로 달라도 그 다르다는 걸 문제 삼지 말자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산다. 아... 너는 너 나는 나 이유 같은 건 묻지 않는다...톰보이... 나는 왜 이 옛날 광고가 생각나는 것인지...내가 90년대 뭔 세대라 그런 것인지.

 

 

 

남들 때문에 사는 나라

 

 

   박 에스더 기자만큼이나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대한민국에 대해 결론내린 진단서는 한마디로 ‘남의 눈에 죽고 남의 눈에 사는 나라’이다. 우린 어렸을 적부터 내 눈보다 남들 눈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남들 다 가는 대학, 남들 다 낳는 아이, 남들 다 하는 결혼... 남들 보기 창피하지 않냐, 남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 남들은 그렇게 안 산다, 우리도 남들처럼 떵떵거리고 좀 살아보자, 우리가 남이가 등등등. 옷 살 때도 남들 눈에 안 띄게 무난한 걸 고르고 전자제품, 가구 살 때도 남들이 제일 많이 구입하는 걸 사고 남들이 재밌다고 하면 맛있다고 하면 영화보고 식당 간다. 어디 나갈 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 고르고 머리하고 액세서리 하는 건 기본이고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중형차를 사고 남들이 가봤다고 하니까 제주도 가고 남들이 다 스마트폰 쓰니까 나도 쓰는 식이다. 남들이 죽는 걸 보니 나도 죽을 수 있겠다 싶다. 남들이 다 읽는다고 하니까 덩달아 읽는 바람에 가끔 의아한 책이 베스트셀러도 되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대체 누구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우린 사는 동안 그 남들에게 쪽팔리지 않게만 살면 마치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도 하는 것 같다. 당신에겐 내가 남이고 나에겐 당신이 남이니 결국 우린 거기서 거긴데 한국 사람에게 ‘남들’은 흡사 초등학교 때 잊을만하면 한번 씩 와가지고 온 학교를 환경미화광장으로 만들어버리는 대머리 장학사나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남들’은 그렇게 실체가 없다가 가끔 무슨 일이 터지면 갑자기 재판을 하기도 한다. 바로 너무나 잘나고 똑똑하고 돈도 많고 외모도 우월한 특정 유명인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재빠르게 단결하여 그들을 평가하고 단죄하기도 한다. 이 집단적 감시문화는 개인의 사생활이고 인권이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 꼭 누구 하나 죽어나가야 그제서야 그럴 줄 몰랐다고 잠잠해지는 특성이 있다. 그러다가 이 ‘남들’도 다 같이 진심어린 한마음이 되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하나의 목적으로 소리 높여 외칠 때가 있다. 바로 4년마다 한번 열리는 월드컵 땐 잘 교육받아온 공동체 운명의식으로 인해 그 남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마법이 시행된다. 그러니까 그 남들은 결국 우리와 하나였던 사람들, 같은 마음이었던 사람들이니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나 비슷한 당신이고 친구고 동료에 불과하다. 내가 그런 것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자신들과 똑같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남들 만큼은 사는 한국인이 되기 위해선 저자의 말처럼 일생동안 숙제만 하다 인생 다 보내게 된다. 남들이란 혹시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가상의 인위적인 집단에 불과하지 않을까. 만약 손가락질 하는 남들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 남들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내가 타자를 평가, 감시, 단죄안하면 되는 문제이다.

 

 

   진심으로 남들 때문에 있지도 않은 남들 눈치 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건 오늘날 우리네 생존의 의미가 모두 경쟁과 성공 프레임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의 문, 그 1차선은 좁아 죽겠는데 달려온 사람은 수천만이니 그런 것일 테다. 내가 살려면 나 아닌 누군가가 밀려나야 하고 패배해야 되는 서바이벌의 체제 속에선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다. 정말로 남들도 나 잘되는지 어쩐지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창궐하고 있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라. 누군가 눈물을 흘려야 내가 웃을 수 있다. 이제 탈락의 쓰라림 같은 건 그저 매일 지겹게 보게 되는 cf 속 한 장면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간 일등은 그 행복이 얼마나 유지되는 것일까. 우린 집단적으로 생존의 의미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어쩌면 우린 아직 민주주의 나라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게 다른 대한민국이란 일등 혼자만 웃게 되는 나라, 이긴 사람 혼자만 다 가지는 나라, 그렇게 지독하게 올라갔으면서도 끝까지 행복하지 못한 나라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이 보다 낫다고 생각된다면 가차 없이 지금 가진 것을 나누는 나라, 나누고 사는 게 행복이고 보람이고 목적이 되는 나라, 그래서 지금 나누어 받았지만 나도 언젠가 있는 사람이 되면 그들보다 더 많이 나누겠다고 다짐하는 나라이다. 그걸 특별한 선의로 생각해 자랑도 생색도 칭찬도 하지 않고 다 같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일상이 되는 나라이다. 그게 생존이고 성공이 되는 나라다.

 

 

   나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응원가로 ‘잘 살아보세’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그 어린 목소리로 (다른 노래도 얼마든지 많은데)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이렇게 목청 높여 청군, 백군을 응원했다. 그 노래가 가끔 생각난다. 옛날에 못살아서 잘 살자는 게 아니고 이제는 좀 같이 잘 살아보자고. 또 하나 그렇게 운동회를 많이 하고 죽자고 응원했어도 내가 언제 청군이었고 백군이었는지 그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이겼는지 졌는지 그런 것도 기억 안 난다. 그냥 이기면 좋았고 졌어도 그때뿐이었다. 내가 이긴다고 저쪽편이 죽는 건 아니었다. 상대편이 이겼다고 내가 실패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한쪽의 승리가 다른 한 쪽의 좌절과 절망이 되지 않았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 졌더라도 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가난해도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저자가 말하는 소수인권의 문제들이 여간해선 화두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개개인들이 단일가치를 추구하는데 익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다수가 아닌 것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꼭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고 자칫하다간 나도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추락하면 다시는 못 올라올 것 같은 불신 때문은 아닐까. 혹시 재수 없고 운 없어 추락하더라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만은 잃지 않는 나라를 기대한다. 그렇게 잡은 남들의 손이 다시 내 마음의 온기를 채워줄 것이라 믿고 싶다. 글쎄, 나는 각자 생긴 대로 살자는 저자의 ‘차이’ 프로젝트도 좋지만 지금 우리에겐 재산도, 행복도, 사랑도, 웃음도, 그리고 고통과 상처와 실패도 좀 나누는 나라, ‘같이’ 떠안는 나라가 되었음 좋겠다. 남들 때문에 못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 때문에 살게도 되는 나라, 아니 남들이 나보다 더 힘이 되고 믿음이 되는 나라, 그런 남같지 않은 남들의 나라에서 좀 살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좀 잘되길 바란다. 만약 안 된다면 나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 부디 잘되어서 내 편견을 좀 깨뜨려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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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0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전 핀커라는 사람이 쓴 <성의 패러독스>(숲속여우비) 읽어 보셨나요?
여자가 쓴 글이라지만 '남성성으로 둘러싸인 데에서 남성 못지않게(?)) 일하면, 여느 남성하고 똑같은'
생각과 삶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고,
남자가 쓴 글이라지만 '남성성 아닌 사람됨을 헤아리며 살아가'면,
이때에는 사뭇 달리 글을 쓰는구나 싶어요.

모든 것이 권력이니까
권력을 거머쥐고 나서야 글을 쓰고 기자 일을 하겠지요.

글쓴이가 스스로 방송국 그만두고 글쓰기 그만두고
아이 낳아 열 해쯤 함께 살아내고 나서
다시 방송일을 하고 다시 글쓰기를 하면
아마 아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믿어요.
 
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은 꼬리를 물고

 

 

 

   벌써 십 년도 더 되었다. 저자가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 나는 한창 생태박물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우리나라 이 분야 최고 전문가를 소개해주며 자문을 받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당시 나는 이과분야의 교수들을 만나는 것을 거의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과학관 프로젝트를 하다보면 해당분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등) 교수들을 한번은 꼭 만나게 되는데 -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 그들은 거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적인 감각도 떨어지고 아이디어 면에서도 원리와 법칙만 설명하며 천재라 불리우는 어느 교수는 말투까지 어눌한 경우도 있었다. 많이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 표현하고 생각을 입체화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과학분야 교수들에겐 가장 중요한 핵심 컨텐츠만 과외 받듯이 찍어달라는 수준에서 자문을 마무리하곤 했다. 당연히 최재천 교수도 그럴 분(?)으로 생각하고 나는 틀에 박힌 질문들을 가지고 연구실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을 열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방안은 거대한 헌책방처럼 곳곳이 책더미에 쌓여 있었고 교수님은 방 한가운데 무슨 열반에 이른 수행자처럼 정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계셨다.(책상도 어깨높이 까지 쌓아 놓은 책으로 여분의 공간이 전혀 없었다) 머리와 수염과 의복의 상태는 며칠 밤을 새우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췌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흔쾌히 웃는 얼굴로 먼저 악수를 청하셨다. 더 말이 필요 없는 연구자의 진중한 아우라에 나는 흠칫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대화하면서 그가 전혀 과학자라는 (내 편견의)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창한 인문학적, 문학적 언어구사 능력이었다. 그때 나는 미래 지속가능한 에콜로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왜 인간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되는지를 강의 받듯 전해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태박물관 전체의 주제나 공간 연출까지도 아이디어를 얻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든지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세한 항목마다의 전시연출에도 모두 설명 드리고 자문을 받고 싶었다. 같이 동행한 영업부장이 나오면서 혀를 내두르며 저분은 과학계의 이어령(이어령은 업계에서 이빨로 통함)이라고 농담했던 것도 기억난다. 단순히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래 묵혀온 생각을 풀어 놓는 듯한 느낌. 그때 나는 저자가 가진 학문에 대한 열정과 동물과 환경을 향한 사명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미팅 순간의 집중력 등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조금 더 공부해서 가지 않은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고 돌아가는 내내 ‘최재천’이라는 이름 석자를 되뇌었다.(그땐 지금만큼 유명하시지 않을 때 였다. 유명하긴 해도 스타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도에 국립대구과학관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전체 컨셉을 통섭으로 하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뒤지다가 바로 <통섭, 에드워드 윌슨 저, 사이언스 북스, 2005>의 역자가 최재천인 것을 확인했다. 그분은 과거 전시하는 회사에서 자문 받으러 온 일개 기획자를 기억할리 없겠지만 나는 당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마치 ‘통섭’이라는 책이 나를 위한 구세주로 느껴지던 시기였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인연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그 책을 밤새워 읽고 과학관 컨셉을 도출한 후 (당시 막 뜨기 시작하던)통섭에 관한 브리핑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그러니까 나도 최재천 교수의 통섭을 얼마간 널리 알린 사람에 속한다 ㅋ) 그 책과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 이현우 역, 재인, 2005> 미셀 루드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 박종성 역, 에코의 서재, 2007> 훗날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생각의 나무, 2008>등은 우리가 과학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항상 참고서처럼 지니고 다니던 책이었다. 그 후 내가 조직생활을 때려 치고 사업에 손대었을 때 저자는 서울대에서 이대로 스카우트 되셨고 내가 보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했다.(내가 조선일보를 끊지 않는 이유 중에 최재천 교수의 칼럼도 속한다 ㅠ) 지금은 내가 처음 뵈었을 때보다 엄청나게 유명한 사회인사가 되셨고 그동안 많은 책들이 소개되어 일반인에게도 사랑받는 작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의 책을 서점에서 만날 때마다 웃기지만 나는 마치 나 혼자만 알았던 어떤 과학자의 비밀을 다 같이 공유하게 되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내가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음을 매번 환기하곤 한다. 그는 짧은 대화만으로도 과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경계가 필요치 않은 통섭학자임을 인식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 내가 말로만 통섭학자의 아우라를 느꼈다면 이번에 <통섭의 식탁>은 글로 된 증명서 같았다. 이 책을 덮은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배가 부르다. 모두 영양가 높은 지식만찬의 덕택이다.

 

 

엄지를 치켜 세우며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신간 중에 어엿한 인기 장르가 된 것이 바로 ‘책 이야기’이다. 예전엔 문학 비평가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시나, 소설, 고전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모음집을 출간했는데 요즘은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읽어온 책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리뷰어로서 이런 책은 늘 관심의 대상이며 그들은 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떻게 해석하고 소개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책을 이야기하는 책속에서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듯 강렬한 호감을 느끼며 책을 찾아 읽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읽지 않았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허세부리기도 그만이다. 단점이라면 같은 이유로 책 이야기만 읽고 정작 해당 책은 패스하게 될 경우도 있다는 것.(고전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재천 교수의 책 이야기는 설사 이 책에 나온 그 어떤 책도 들쳐보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막강한(치명적인) 장점이 있다. 다른 분야와 달리 과학은 문턱이 높아 나같은 문과출신은 미리 포기하게 되는데 그나마 이런 책때문에 눈과 귀가 트이는 시간이기 때문에. 또 하나 읽다보면 어느새 과학과 인문의 구분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은 들어가는 입구는 분명 과학이었지만 나오는 출구는 인문으로 변해있다. 과학분야의 책을 소개하는 책 자체도 많지 않지만 저자처럼 인문학적 통찰이 문학적으로 제시된 글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저자가 주장하듯 배우는지 모르면서 깨우치는 방식이 가장 훌륭한 공부라고 저자는 스스로 우리에게 그 효과를 입증하는 과학자로 남을 듯하다.

 

 

 

   우선 이 책의 구성은 식탁이라는 컨셉 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요리의 향연으로 볼 수 있다. 총 56권의 책이 한 권마다 어엿한 하나의 꼭지를 이루며 메뉴판에 소개되어 있다.(359p나 되니 만만한 분량은 아니다. 비율을 보면 56권 중 세프 추천 3, 애피타이져 7, 메인요리 31, 디저트 5, 일품요리 6, 퓨전요리 4) 동물과 생명, 진화, 우주, 과학자에 관련된 자연과학 책이 삼분의 이 정도 차지한다. 나머지는 인문사회분야 혹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책들인데 주제도 가족, 여성, 경제, 역사,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범위를 말 그대로 경계 지을 수가 없다. 저자는 맨 처음 셰프가 추천하는 책으로 제인구달의 <인간의 위대한 스승들>과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 그리고 리처드 랭엄의 <요리의 본능>을 콕 집어 소개하고 있는데 각각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삶, 요리의 진화적 중요성을 언급하며 마지막에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를 찬양하고 있다.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그래서 가장 인간답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구절이 마치 자신이 이 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로 인식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음식을 준비해온 요리사였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는 저자가 왜 비빔밥을 예로 들며 책 이야기를 식탁으로 꾸렸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요리가 인간을 동물이 아닌 인간적인 존재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든 것이기에 요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사람인 것이다. 단순히 책을 나열하고 요리의 순서에 따라 형식적인 의미로 책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저자는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인간에게 영양을 섭취하게 하듯 (그러한 인간적인 마음으로) 책으로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내가 존경하는 부분은 이런 식의 지식이 체화된 혜안이다. 이것은 편집자가 책의 리스트를 받아 테마대로 끼워맞추기 식으로 단순 분류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확실히 감명 받은 (전공분야) 책에서 얻은 주제의식이 반영된 통섭의 결과이다. 그는 음식이 맛있다면 요리사를 향하여 엄지를 치켜세우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을 덮고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엄지로 수백 번 인사해야 하지 않을까.

 

 

개미만큼만 알아도

 

 

 

   책을 덮고 나니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르침은 역시 ‘알면 사랑한다’ 였다. 저자는 끊임없이 서로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설득한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모르면 사랑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책의 전반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게 쓰며들어 있는데 저자는 그들을 하나라도 더 알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다 같이 잘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우리 못지 않게 ‘이곳에서 삶을 누릴 자격과 권리를 지닌’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의 시작이라 주장한다. 그는 침팬지, 고릴라, 야생 원숭이, 개, 개미 등을 평생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저서를 소개하며 그들이 외치는 주장을 전해주고 있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통나무집을 짓고 숲속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고, 삶의 절반을 나무위에서 보낸 여성생물학자도 있었다. 꿀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에서 꿀벌이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춤을 해독하여 꿀이 있는 곳까지 날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지켜 달라 말한 적 없는 아프리카의 동물을 지키다가 밀렵꾼의 손에 살해된 비극의 과학자도 있었다. 저자인 그 역시 물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며 갈매기의 깃털에서 채집한 진드기의 아름다움에 전율이 돋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지금도 열대생물학자로서 타잔 네 동네를 드나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사는 동안 평생 열대 한번 못 가 본 사람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개하는 책을 하나 읽지 않고도 전해 받은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하고 경건하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으로서 생명체중 가장 스마트하다는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겸허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 지나친 인본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 그리고 같은 생명체로서의 상대적 존중과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만물의 영장이라 생각하는 인간은 산업경제에서 ‘성장’과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당당하게 파괴하는 주범이었기 때문에. 주의와 편의를 앞세워 야생동물을 박멸했고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이념으로 서식처를 파괴해 왔기 때문에. 그는 다른 저자들의 목소리를 빌어 개인 소비 수준으로 측정하면 세계의 부는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미래세대에도 사용해야하는 생물권의 건강상태로 측정해보면 부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며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모독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멸망하리라 예언한다.

 

 

 

   그는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담론 외에도 의생학이 어떻게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단한 아이디어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개미의 위대함은 이런 식으로 연구가 된다. 두발로 걷는 우리보다 험한 지형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넘나드는 다지류의 특성을 이용해 재난구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로봇이 개발된다면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대형참사 현장에서 더 많은 인명을 구조하지 않을까? 그는 공룡같이 무시무시한 동물의 필요성도 알게 쉽게 정리한다. 알파포식자들이 사라지면 남은 동물 중에서 가장 야비하고 경쟁력이 강한 소수가 생태계를 지배하여 지구를 황폐하게 한다는 경고는 이런 식이다. 그들은 시장을 독점하려는 몇몇 대기업들의 횡포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부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기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에게는 그 무엇도 아닌 우리 인간이 가장 잔인한 짐승인 걸 알고는 있느냐고. 인간만이 다른 동물의 행동과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데 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듯이 구느냐고.

 

 

 

   그는 생명과 진화를 말할 때엔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의 의미 즉, DNA의 영속가능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면 내 생명은 물론 생명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골고루 소중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느냐 반문한다. 많은 세계적 과학자들은 현대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사회 및 환경 문제로 생물다양성의 고갈을 꼽았다고 한다. 숲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동물이 멸종하고 생태계의 질서가 혼란스러워 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행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혹은 나 사는 동안엔 별일 없을 것이라고 눈을 감는다. 그는 바로 우리 다음 세대의 운명을 걱정한다. 자연 환경이 지속되지 못함은 물론 사람의 가족환경도 붕괴될수 있다는 섬칫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시작된 일이다‘라며 출산율 저하의 문제를 반 이상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같아 그 부분은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그 부분에서는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저자가 몰라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다행히도 인간은 생명과 생명 다양성을 사랑하게끔 태어났다는 것이다. 퍼뜩 집에서 열심히 장수하늘소를 키우던 아이 생각이 났다. 과학관에서 가져온 장수하늘소였다. 마트에서 집도 사고 먹이도 사고 육 개월을 키웠는데 어쩔 수 없이 밀폐된 공간에서 돌보다 보니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이는 장수하늘소 때문에 삼일을 울었다. 어른들의 영혼보다 순수한 아이들의 눈에는 장수하늘소도 자신과 같이 숨을 쉬고 일상을 교감하는 어엿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자들이 매일같이 바라보고 관찰하던 동물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업무상 스트레스 이상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라 말했다. 조금만 넓게 생각해보면 이는 꼭 자신이 기르던 동물에만 해당되는 감성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인 것이다. 과학과 기술도 그 폐해를 비난만 하지 말고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과학과 기술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자고 설득한다.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양보, 관점의 전환. 미래사회를 공상하는 인간이 아니고 현재사회에 공생하는 자연. 이 말을 하고 싶어 그는 수많은 반찬을 대접했던가 보다. 특정 영양소가 필요하다고 주입하거나 강요 혹은 위협한다면 더 멀어질 수 있으니 이렇게 음식에 골고루 버무려 천천히 섭취하게 만들었나 보다. 

 

 

 

   저자는 자신처럼 통섭형 인물이 많아져 문학과 과학의 만남이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거듭나길 학수고대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가 파도에 씻기듯 모래처럼’ 스러지는 풍경을 자세히 목격한 독자로서 다시금 알아야 사랑한다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알고 사랑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과연 모르고 사는 것보다 편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라지만 분명 사랑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기도 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건 살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목숨 같은 일이 아닐까. 아는 건 사는 것이다. 아니, 알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몰라도 살수는 있지만 그건 사실 죽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지켜야 할 가장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 지구를 양분하고 있는 두 지배자는 인간과 개미라 했다. 개미가 인간을 존중한다면 기꺼이 인간도 개미를 존중해야 한다. 딱 개미만큼만 알아도 우린 우리 아닌 것들과 영원히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존재인지 모른다. 몇 년 째 까치를 연구한다는 그만큼은 못되어도 우리가 몇 년 동안 개미만큼은 알려고 눈을 떠야하는 이유이다. 개미를 안다는 건 인간외 나머지를 다 안다는 것이니까. 그건 참 기특하고도 아름다운 그래서 진정으로 스마트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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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06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아도 미안하지 않다'고 느끼도록 하는 책이야기는 부질없다고 느껴요. '읽지 않으니 미안하다'고 느끼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내 이웃 이야기는 내가 이웃하고 부대끼며 느껴야 '참답게 알'지, 누군가한테서 말만 듣고서는 하나도 알 수 없거든요...

저는 요즈음 쏟아지는 '책을 말하는 책'이 하나같이 너무 재미없어요.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어 죽도'록 이끌어 내지 못하거든요...

cyrus 2012-03-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책'들에 대한 책이 나와서 좋긴 한데 너무 소개하는 데만 그치지 않을까 한편으로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특히 과학 관련 도서 같은 경우는요 ^^;;
자신들이 추천한 책들도 직접 읽어보게 만드게끔하는 어필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연 2012-03-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슨은 그런 생명체와 생물 다양성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랑을 'Biophila'라고 불렀었지요. 최재천도 윌슨의 사상에 많이 빚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책 전반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 이르기 위한 앎이 군데군데 숨어있는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한사람님만큼 이렇게 즐겁게 읽지는 못한 것 같네요ㅠ 통섭형 인물이 어떤 것인지 사실 잘 감이 안오기도 하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