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혼종성 -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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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 이 책은 문화혼종성이 작금의 전지구화 시대를 정의하는 핵심이라 말하는 책이다. 문화혼종은 더 이상 수용과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관점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다보니 참고서적 분위기가 물씬이다. 저자는 건축, 음악, 종교, 문학 등 다양한 혼종화의 영역을 소개하며 모든 문화들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으며 어떤 것도 단일하거나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이며 서로 자기 살을 내어주고 남의 살을 빌려온 역사이다. 우리는 살을 섞었을 때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기대한다.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은 이러한 문화혼종화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를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짧게 핵심만 정리한 책이라 할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량이다. 개념정리에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보이다.

 

사실 한국에서 다문화란 여러 나라의 문화양식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소수문화를 상징하는 느낌이 많다. 수는 적고 힘은 작은, 완전한 역설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과 똘레랑스를 의미한다기 보단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환기하는 힌트로 기능한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은 아무래도 농촌으로 시집오는 동남아 여성들과 이주노동자들 덕택이 아닐까. 2007년도에 이미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백 만 명이 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이 늘어날수록 한국인 남편의 학대나 폭력, 노동자의 인권 및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하게 된다. 새로 출연한 언어의 개념은 자주 노출되는 사건과 기사로 재정립되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지금보다 더 현명한 지혜가 요구되는 필수적인 미래지향적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보편적 결론보다는 글 말미의 이택광의 해제가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택광은 지젝의 논의를 빌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옹호적인 시선이 외려 정치적인 억압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다문화주의라는 전략적 선택과 관리 방안이 마치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것처럼 운명화되는 것에 비판을 가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모든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이택광의 시선은 문화혼종성이 가지는 지구적 보편성 위에 한국적 특수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은 사실 우리에게 다문화가 무슨 의미이냐가 아니고 우리가 다문화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어떤 마음인가, 어떻게, 진정으로, 인 것이다. 오랜 세월 단일민족, 하나 된 국민이라는 가치를 선호해온 입장에서 한국인은 다문화 수용에 있어 그다지 개방적이지 못하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면서 퍼뜩 지난 2011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고가 떠올랐다. 관용과 평화의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많은 인명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했다. 바로 인구의 95%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에서 인종과 이민을 이유로 벌어진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테러범은 단일문화 국가이면서 살기 좋은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다시 말해 테러범이 인식하기에 한국은 다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로 본 것이다. 왜 하필 우리나라였는지 왜 우리나라가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나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오해라 할지라도 늘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외쳐온 과거를 돌아볼 때 테러범의 언급은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우리는 입으로는 다문화에 개방적이라 떠들면서 속으로는 폐쇄적인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문화를 포용한다는 의미가 추상이 아닌 정책적으로 실행되면 바로 일자리, 교육 및 의료, 복지 등의 혜택을 나누어야 할 경쟁 프레임으로 이동한다. 또 과거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을 향한 문화박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서 다문화에 포함되는 대상을 계급의식 구조 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농후하다 할 수 있다. 민족적,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은 마치 지난시절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 느꼈던 박탈감, 열등의식을 보상하는 차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냉정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문화혼종성의 그 인정 너머에 다가가야 할 메시지로서 어쩌면 역사와 시대의 필연으로 도래하고 있는 다문화국가를 맞이해 한국인이 가져야 할 용서와 관용, 배려의 정신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에 성과의 목표를 두었을 땐 아주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 민족이었지만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을 땐 상당히 변화가 느린 민족이다. 좋은 말로 주체적이고 반대로는 고집이 센 민족인 것이다. 노르웨이는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을 당하고도 여전히 다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며 테러범에 대해 관용적이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 한명이 살인사건을 일으키면 당장 그 나라를 쳐들어갈 것처럼 흥분하고 평소 숨겨왔던 적대심이나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그럴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살인자와 그의 국가를 매도하고 복수의 방법을 의논하기 까지 한다. 지난 9.11 테러 후 미국이 보여준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관용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보기에 좋아 보이고 이익이 되는 것만 발췌, 선별해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경제무역에나 가능한 것이지 생활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을 주고 받는 일엔 적절치 못한 듯하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이 사실은 서양의 문화적 산물을 매우 수월하게 차용해 온, 전유의 전통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한자와 불교를, 영국에서 국회체계를, 독일에서 대학과 군사체계를, 미국에서 물질문화 대부분을 차용해 왔다. 그러면서도 일본 고유의 문화는 어느 나라보다 차별화된다. 일본의 박물관과 전시관에 가보면 항시 유럽과 미국의 장점을 잘 믹스해 일본만의 개성을 살리는 쪽으로 공간을 연출한다. 좋은 것을 모방하고 가져오되 궁극에 자신들의 조건과 능력에 맞게끔 다시 재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반면에 우리는 독창성에 대한 아집과 잘못된 자존심, 괜한 자격지심으로 쓸데없이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거나 베껴도 꼭 재창조하지 않고 부분 이식하듯 물리적으로만 따라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행히 요즘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K-pop을 보면 이러한 국수적인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든다. 또한 첨단 IT기술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전략들을 보면 문화수용과 전파에 있어 상당한 개방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건 기술적 발전과 성장이 아닌 정신적 성숙과 그에 따른 실천인 듯 하다. 미혼모의 혼혈 아동문제, 이주노동자의 빈곤문제, 다문화 가정의 교육문제, 최근 탈북자의 문제까지 문화혼종성을 근간으로 하는 여러 사회문제는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자체를 자유주의적 환상이자 기만이라 비판한 지젝을 존중한다. 그러나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들이 섬처럼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저자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의 ‘눈과 뇌, 그리고 문화는 함께 작동한다’는 말씀을 떠올린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이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재구축 하기 위한 초석으로 이 책은 미약하나마 기본지식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 이전에 마음을 여는 오늘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로 모아지는 동일한 가치를 더 선호해 왔다. 이는 조직과 학교에서도 왕따를 배출해내는 사고체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며 무리에서 배척하고 싶은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문화는 타자성에 대한 인정을 그 초석으로 한다.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혹 자신에 대한 집착은 아닐까. 이것은 꼭 한국인이 보는 외국인을 말하진 않는다. 불교에선 수십 수백 수천가지를 모아서 자기로 삼고 있을 뿐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기에는 나라고 할 어떠한 실체도 없다고 말한다. 나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실체가 있다고 확신하니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타자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문화의 문제는 결국 다양한 문화, 즉 그 문화를 생성해낸 수많은 타자가 아닌 나의 우리 문화가 따로 있으며 그것을 만든 우리와 내가 문화의 주체자라는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문화에도 정답은 없다. 삶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문화는 그 다양한 삶이 모여들어 하나의 풍경과 내면을 창조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삶은 마주치게 되었고 그러하기에 문화는 섞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섞이지 않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문화혼종이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다음 세대의 새로운 문화를 위해 소화되는 생태적 과정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써 성공하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들은 삶의 위대한 생태계를 과소평가하는 일일수도 있겠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에서 삶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기 마련이니까. 문화가 섞이건 그렇지 않건 인간은 자기 삶의 방식을 긍정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 다문화 국가를 맞이할 우리나라가 어떻게 당면한 문제들을 헤쳐 나갈지 무척 궁금하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 마음을 먼저 열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은 억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 하나도 꿈쩍도 않았으면서 마음을 움직인 척 당연히 열은 척 한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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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28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나 언론이나 학문이나 사상에서 말하는 '다문화'는 모두 부질없다고 느껴요. '다문화'란, 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결을 나타내지 않을까 싶어요. 서로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 다르게 살아온 나날'을 받아들여, 작은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곧 '다문화'라 할 테지요. 꼭 먼먼 나라에서 한국을 찾아와 섞일 때에만 다문화일 수 없으리라 생각해요.

차트랑 2012-06-2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이렇게 생각합니다요

'가래떡 트는 기계'
다수를 한 곳에 모아 틀어대면
똑같은 모양의 가래떡을 얻을 수 있는데요
물론 그 전에 푹~ 스팀으로 익혀내야 하지요
적당한 길이로 잘라만 주면 됩니다.
얼마나 보기 좋아요 먹음직~
참 쉽지요~^^

한사람님의 글을 읽어 보니 교육만 그런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왠만하면 틀에다 넣고 마구 틀어대는거에요

기계를 쓰지 않으면 안되려나요??

기억의집 2012-06-2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글 올리셨네요,라고 말하려다 스크롤 해보니 24일에도~
반가워요. 한사람님~ 저도 현재 알라딘 간간히 잠깐 잠깐 들어오는지라 챙겨지 못했어요^^

책읽는나무 2012-06-2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정말 읽을수록 공감되는군요.
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척 하는 사람들.
책도 읽고,님의 글도 읽어보아야지 않을까? 싶네요.^^
올리시는 글마다 집중하게 만드시고,또 생각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으십니다.
이젠 실천(?)만 남은셈이지요.^^

아이리시스 2012-06-3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할 말은..안하는 걸로?!
그러면 안돼요!! 저는 호기심이 많으니까.
아..오늘 드라마 하는 날이었구나..(주말 별로 안 기다리는 1인)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