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71 | 172 | 173 | 17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싱거운 후기>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을 고쳤다



며칠 전에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이란 글을 썼다. 특별히 깊은 사유가 들어가는 글이 아니고 그저 있었던 일을 단순히 나열하는 글이라서 짧은 시간에 쉽게 써졌다. 그런데 그 다음날 다시 읽어 보니 고칠 데가 많았다. 퇴고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치는 작업을 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사람의 삶의 역사와 지식을 나타낸다’라는 말이 있다.(𐌢) ⟶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의 역사와 지식을 반영한다’라는 말이 있다.(〇)




책에서 읽은 것을 기억해서 그대로 옮겨 썼는데, 내 기억력을 너무 믿었다. 그 책을 찾아 봤더니 내가 쓴 게 틀렸다. 그래서 고쳤다.




그래서 함부로 자신의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다.(𐌢) ⟶ 그래서 함부로 자신의 글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다.(〇)




‘사람들에게’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라는 말이 더 적합한 것 같아 고쳤다.




이 블로그에 올린 내 글들이 나의 일기장과 같기 때문이다.(𐌢) ⟶ 이 블로그에 올린 내 글들이 나의 일기와 같기 때문이다.(〇)




여기서 ‘일기장’이란 말은 틀렸다. ‘일기’라고 고쳐야 한다. 만약 ‘일기장’이란 말을 쓰고 싶다면,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써야 맞다. ‘이 블로그는 나의 일기장과 같기 때문이다’로.




이런 나를 보고 큰딸은 재밌는 표정으로 웃으면서,(𐌢) ⟶ 이런 나를 보고 큰딸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〇)




‘재밌는 표정’이란 그 표정을 보는 사람이 볼 때 표정이 재밌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웃긴 표정’을 지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선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표정을 말하는 것이므로 ‘재밌다는 표정’이라고 써야 맞다.




그날의 주식 변동이나 은행 금리에 대해선(𐌢) ⟶ 그날그날의 주식 변동이나 은행 금리에 대해선(〇)




처음엔 ‘그날의’라고 썼다가 ‘그날그날의’로 고쳐 썼다. 하루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매일’을 뜻하므로 ‘그날그날의’라고 써야 맞다.




뛰어나게 잘난 사람은 만인이 모두 알고 있게 마련이어서, 만인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잘난 척할 필요가 없으므로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𐌢) ⟶ 뛰어나게 잘난 사람은 만인이 알고 있게 마련이어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잘난 척할 필요가 없으므로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〇)




‘모두’와 ‘만인’은 같은 뜻이므로 앞에선 ‘모두’를 뺐고, 뒤에선 ‘만인이’를 뺐다. 글은 경제성을 가져야 좋으므로 불필요한 중복은 피해야 한다.




....................................................

<글을 고치고 나서...>


글을 써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글을 올바르게 쓰기도 어렵고, 빼어나게 잘 쓰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데 어렵기 때문에 매력적인 일이다.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내게 있어 ‘노력’은 ‘매력’과 동의어다. 노력하는 사람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 사람을 닮고 싶게 만든다.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노력하는 시간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최소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걸 하고 있지는 않다는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며, 노력하는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사용하던 노트북이 고장이 나서 내가 써 놓았던 많은 글들이 날아가 버렸다. 복구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글들을 쓰느라 많은 시간 동안 행복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그래도 9년이나 사용한 노트북과의 작별은 좀 섭섭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맘대로글>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


내가 다니는 미용실이 있다. 친정어머니의 단골 미용실이라 가게 된 곳이다. 미용사는 의외로 60대 노인이었다. 그런데 노인 같지 않게 머리 손질하는 손놀림이 능숙하고 솜씨가 좋았다. 파마도 커트도 잘 했다.


친척 결혼식이 있던 어느 날, 머리 드라이를 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아마 세 번째로 간 것 같다. 그날 그 미용사분이 내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왜 물으시냐고 했더니, 내가 참 특별한 분 같단다. 무슨 말인가 싶어, 뭐가 특별하냐고 물었더니, ‘보통 주부’ 같지가 않단다. 그러면서 “특별하게 멋있으세요.”하고 웃으며 말했다. 난 이건 그냥 나를 단골손님으로 만들고 싶어 기분 좋게 해 주려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 하고는 가벼운 미소로 응대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중3인 둘째딸에게 그 얘기를 들려 줬다. “오늘 이상한 소릴 들었는데, 미용실에서 엄마가 특별하대. 보통 주부 같지가 않대.”라고 했더니 딸이 무심코 “응 엄마 특이해.”하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 미용사가 한 말보다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나, 평범하잖아. 내가 뭐가 특이한대?”라고 했더니 “내 친구들의 엄마들하고 많이 달라.”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뭐가 어떻게 다른지, 했더니 아이 말은 이러했다. “겉모습도 다르잖아. 다른 아줌마들은 다 뚱뚱한데, 엄마는 말랐잖아. 그리고 아주 다른 건 말투가 다르고, 말의 내용도 좀 달라. 나 혼낼 때도 선생님처럼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하잖아.”라고 하면서 덧붙였다. “우리 친구들도 엄마 보고 특이하대. 아줌마 같지 않대.”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거 좋은 거지?” 아이가 대답했다. “그냥 엄마의 개성이야.”


난 내가 다른 주부들과 다른 점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나에 대해 아는 척하며 어떤 점을 말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나를 놀라게 한다.


그 미용사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 내가 미용실에서 했던 말을 더듬어 봤더니 이거였다. 커피 한 잔을 주시길래,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말을 했던 것. “커피가 참 맛있네요. 매일 마시는 커피지만 특별히 맛있게 느껴지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네요.”라고 했던 것. 이것밖엔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미용실에서 수다 떠는 취미가 내겐 없었다. 내가 한 그 말에 나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던 셈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의 역사와 지식을 반영한다’라는 말이 있다.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언어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자신의 글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다. 그건 마치 자신의 일기장을 보여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하면 난 가끔 공포를 느낀다. 이 블로그에 올린 내 글들이 나의 일기와 같기 때문이다. 글은 아무리 자신을 미화시키며 쓴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문체는 곧 그 사람이므로.


나이 들어가면서 내가 점점 아줌마스러워진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가령, 쓰던 핸드폰이 고장 나서 핸드폰을 새로 사러 갈 때 두 딸들이 내게 새로운 기종을 권하는데, 나는 기존 써 오던 핸드폰의 사용방식과 가장 비슷한 것을 골라 산다. 새로운 사용방식을 배우기 싫기 때문이다. 점점 두뇌를 써야 하는 변화가 싫고 익숙한 것만 좋아한다. 이런 나를 보고 큰딸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아줌마들은 할 수 없어.”라고 한다. 난 “응 아줌마들은 할 수 없어.”라고 답하며 인정한다.


언젠가는 아줌마스러워지는 시간을 지나 노인스러워지는 시간에 이를 것이다. 나의 친정 부모님을 보면 쉬이 추측할 수 있다. 그날그날의 주식 변동이나 은행 금리에 대해선 나보다 더 잘 아시면서 핸드폰의 문자 사용법을 모르시고 통화만 하실 줄 아신다. 또 신문을 통해 세상일엔 밝으시면서 컴맹이시다. 두 노인만 살기 때문에 컴퓨터가 아예 없다. 이런 두 분들의 모습은 곧 나의 미래 모습이다. 먼 훗날 스마트폰을 지나 더 새로운 무엇이 나왔을 때 나 역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둔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는 세월의 아쉬움과 늙음의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래서 ‘아줌마 같지 않다’라는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이 말에 의하면 내 개성이란다. 먼 훗날 노인이 되었을 때도 ‘노인 같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개성도 있었으면 좋겠다.

.....................................



<후기> 위의 글을 읽은 독자에게


위의 글을 읽어보면 결국 자기 자랑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줌마이면서 아줌마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듯하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의 공통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난 점이 한 가지 이상 있다는 점이다. 잘난 점이 한 가지라도 없다면 잘난 척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게 중요하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진짜 잘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뛰어나게 잘난 사람은 만인이 알고 있게 마련이어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잘난 척할 필요가 없으므로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재벌들이 돈 많다고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잘난 척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면 그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잘난 척은 열등감을 은폐하기 위한 또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고로, 부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미남 또는 미녀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들이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주자.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의 삶은 얼마나 고독한가. 그런 고독한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에게 하하하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주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엔 고생하며 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제일 편할 것 같은, 부모 슬하에 있는 청소년들조차도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졸린 눈으로 학교에 가서 딱딱한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고생을 한다. 지금 나보고 그런 학교에 다니라고 한다면 못 다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단상(12) 글을 왜 쓰는가, 자랑 때문인가 재미 때문인가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사람마다 글 쓰는 이유가 각각 다를 것이다.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두 가지만을 뽑아 쓰고자 한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인가, 재미있어서인가.


첫째,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견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목적 중의 하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책을 통해서든 블로그를 통해서든 글 쓰는 사람은 남에게 읽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여기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이 끼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지적 능력 또는 글쓰기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란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의젓한 인간이 진심으로 만족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답 -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을 자랑할 수 있어서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나타난다. 그래서 정확한 자서전이란 없다고 한다.



“하이네가 단언한 바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반드시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므로 정확한 자서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따른다면, 예컨대 루소만 하더라도 자기 참회록 속에서 줄곧 자신을 헐뜯고 있는데, 그것은 허영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나는 하이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때로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범죄를 날조하여 스스로 범인을 자처하고 나설 수도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작가 최인호는 최근 한 일간지(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왜 (사뮈엘) 베케트니 이런 작가들이 인터뷰를 안 하는지 알겠어. 인터뷰라는 건 자기 미화야. 100% 자기 미화. 난 옛날부터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동시에 싫었어. 나온 기사를 보면, 진짜 내 얘기가 아니야. 남에게 보여지는 내 얘기였어.”


여기서 ‘자기 미화’란 결국 ‘자기 자랑’인 셈이다. 신문 인터뷰뿐만 아니라 TV 출연에서도 ‘자기 자랑’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야기를 나누는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은 자신의 생활을 소개하며 자신의 집, 부부금실, 음식솜씨 등을 자랑스럽게 공개한다. 한결같이 집은 멋지게 꾸며져 있고, 부부금실은 좋으며, 음식솜씨는 최고임을 보여준다. 결국 ‘자기 자랑’이다. 의사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가 TV에 출연해 하는 일은 시청자들에게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줌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의 강점을 알리는 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어느 의사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 수가 증가한다고 한다. 그가 정치가라면 그가 출마할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작가라면 그가 쓴 책의 판매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점이 있더라도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TV 출연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랑하고 싶은 욕구는 작가들이나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주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주부들이 모이는 친구 모임엔 남편 자랑과 자식 자랑의 얘기가 늘 단골 화젯거리가 된다. 이것과 관련한 글이 있다. 러셀의 <런던통신 1931-1935>에 수록된 글이다.




평균적인 유부녀는 다른 유부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사는 듯하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그들의 남편보다 부유하고 자기 자녀들이 그들의 자녀들보다 성공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애를 쓴다. 부유한 유부녀라면 집안 관리와 인테리어에 있어 이웃들보다 나은 취향을 과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런던통신 1931-1935>, 90~91쪽.


 

결론적으로 말하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나 TV 출연을 하는 사람들이나 보통 주부들이나 모두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어떤 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모두가 갖고 있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가까운 것이지, 글 쓰는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글 쓰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매슬로우(A. Maslow)의 계층적 욕구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욕구충족을 증가시키거나 아니면 욕구충족의 감퇴를 회피하려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고 바로 그들 욕구의 충족을 추구하기 위해 동기를 갖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욕구는 가장 낮은 단계의 생리적 욕구를 비롯해,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 등 상향적 계층화된 욕구구조를 갖고 있다(황상재 저, <조직 커뮤니케이션 이해>를 참고). 이 이론에서 주목할 것은 ‘존경의 욕구’다. 이것은 남들로부터 존경 받거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이 욕구로 인해 인간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길 좋아한다.

 

 

둘째, 글쓰기 자체의 재미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에게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글 쓰는 이유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거나 자신을 자랑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악기 연주와 비교할 수 있다. 누구나 피아노나 기타를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결국 그 악기에 대한 흥미를 가진 자만이 악기를 다룰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도 결국은 글 쓰는 재미를 아는 자만이 글을 쓸 것이다. 따라서 글을 쓰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글쓰기가 재미있게 느껴져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면 일기를 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일기의 독자는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도 일기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글쓰기 자체가 좋아서 쓰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볼까 봐 꼭꼭 숨겨 둔다. 매일 쓰는 건 아니지만 한 달에 몇 번은 꼭 써 온 게 벌써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어떤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꼼꼼히 정리해 쓰게 되는데, 훗날 그 일기를 읽었을 때 무슨 뜻의 글인지 내가 알기 위함이다. 이럴 때 글쓰기는 나만의 비밀스런 세계 속에서 작은 행복을 갖게 한다. 

글쓰기엔 분명히 문장과 문단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적합한 낱말의 선택, 그것들의 조합, 직유나 은유로 문장을 묘사, 그것들의 배치, 문단 구성 등을 하는 행위는 마치 퍼즐놀이를 하는 것처럼 흥미롭다. 볼펜으로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컴퓨터로 글을 쓸 때 자판을 두드리는 즐거움도 있다. 자판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재밌는 놀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작가들이 글을 쓰는 큰 동기를 네 가지로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로 ‘미학적 열정’으로 인한 즐거움을 들었다.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 <나는 왜 쓰는가>에서.


확실히 글쓰기에는 감미로운 즐거움이 있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왜 연애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연인들은 ‘만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서’라고 말할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사람도 ‘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서’ 글을 쓴다고 할 수 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겐 세상에서 글쓰기만큼 유혹적인 일이 없을 것이다.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들은 글쓰기의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도 지금 이 순간, 그 행복 속에 있다. 

  

..............................................................

<참고사항>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작가들이 글을 쓰는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하였다.

1) 순전한 이기심 :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 이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3) 역사적 충동 :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 두려는 욕망.

4) 정치적 목적 :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 나는 왜 쓰는가, <동물농장>, 민음사, 137~138쪽.      

 

.......................................................................................
 

<후기>

나는 조지 오웰이 쓴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를 민음사에서 나온 <동물농장>이란 책에서 읽었다. 이 책에는 <동물농장>이란 소설 외에 ‘자유와 행복’과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가 실려 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만을 모아 놓은 것으로는 한겨레출판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이 있다. 29편의 에세이를 볼 수 있다.


조지 오웰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글은 모두 읽고 싶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5-1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는 이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위에 적은 두 가지 이유도 빠지지 않겠지요.^^

여전히 바쁘신지요?

페크pek0501 2011-05-19 18: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하나도 바쁘지 않아요. 바쁜 일이 끝났거든요. 그저 책 보며 운동하며 지내요. 10년간 했던 돈벌이를 손에서 놨더니 이 '게으른 자유'가 좋습니다. 행복해요.
앞으로는 글을 많이 쓰려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종종 들러 주시면 자극제로 알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순오기님처럼 덩달아...

페크pek0501 2011-05-1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른 자유'에 취해 살다

식구들이 다 나간 텅 빈 집에서 혼자 책 보다가 늦잠 자는 버릇을 못 고쳐요. 아침잠은 왜 그리 달콤한지...
제가 마약처럼 못 끊는 것 - 책과 아침잠과 커피와 운동, 이것들은 중독수준이랍니다. 아침엔 잠 자느라 저녁엔 운동하느라 하루가 짧아요.

컴추루 2011-05-3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2번인 것 같은데..그리고 운명에게 떠밀려서 오다보니 뭔가를 쓰고 있고..쓰지 않을려고 고개 돌리면 그 놈의 쓰고 싶은 욕망이 나를 또 가만히 놔두지 않아서 또 쓰고 있고ㅎ 은경씨 큰 목소리 듣지 않았더니 귀가 좀 심심합니다~

페크pek0501 2011-05-31 00:33   좋아요 0 | URL
닉네임이 바뀐 듯. 반가워라ㅋ. 나도 2번입니다.
글쟁이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글쓰기를 중단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어요.
오랜만에 연락되어서 물어보면 글쓰기는 늘 현재진행형이죠. 일종의 중독인가 봐요. 한 번 발을 담그면 뺄 수 없는... 아마 나도 이 짓을 계속할 것 같아요.

오늘 친구가 놀러와서 하루종일 수다 떨었어요. 컴추루님과도 언젠간 수다 떠는 날 있겠죠~~.
 


<책 속을 산책하다가 ~ > ‘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구별하라


1.

사람의 모습엔 ‘진실’인 것과 진실은 아니지만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P부인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울 거리 거리, 골목 골목을 헤매었다. 불쌍한 거지들을 찾아다니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면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탄일날에 기쁨을 알릴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P부인은 단 하루저녁만이라도 불쌍한 이들을 위해 따스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자기 집을 열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난로에 불을 많이 피우고, 뜨끈한 국과 밥을 장만하고, 포근포근한 융으로 만든 속옷 한 벌씩을 주려고 준비해 놓고는, 거리에 나와 불쌍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문둥이를 만날 때엔 아무리 불쌍하긴 해도 우리 집으로 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 중에도 비교적 몸이 깨끗한 사람을 붙들고 크리스마스에 자기 집에 오라고 친절히 말해 주었다.


크리스마스날 저녁, P부인의 집엔 절름발이, 곰배팔이, 소경, 늙은 것, 어린 것 할 것 없이 모두 모였다. P부인은 밤이 깊도록 손님 대접에 최선을 다했다. 거지들은 속옷 한 벌씩을 얻어 입고 맛있는 음식이 잘 차려진, 눈이 부신 식탁에 둘러앉아 후한 대접을 받았다. P부인은 나중에는 사진사를 불러다가 쾅하고 사진까지 찍고 손님들을 보냈다.


P부인은 자기 방으로 올라오는 길로 침대에 엎드려 감사하였다. 이렇게 기쁘고 의의 있게 크리스마스를 지내보기는 처음이라고 스스로 감격해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사진을 많이 만들어 여러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낼 것을 기뻐하며, 천사 같이 평화스럽게 잠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천사 같은 P부인의 가슴속엔 뜻하지 않은 분노의 불길이 폭발하였다.


그것은 다른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 몸둥이처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새 자동차 안에서 엊저녁에 왔던 거지 중에도 제일 보기 흉한 늙은 것 하나가 얼어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태준의 <천사의 분노>라는 단편소설이다. 불쌍한 이들을 돕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던 P부인은 급기야 자신이 아끼던 자동차가 시체로 인해 더럽혀진 것을 보고 가식적이었던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거지들을 집으로 초대해 후한 대접을 했던 P부인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2.

월나라 왕인 ‘수’에게는 아들 4형제가 있었다. 그리고 ‘예’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예’는 왕자 넷을 다 죽이고 자신이 왕의 뒤를 잇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중 세 명의 왕자를 무고(誣告)하여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게 여기고, 크게 왕을 헐뜯었다. 왕의 동생인 ‘예’는 또 나머지 한 왕자를 무고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그 왕자는 반드시 자기도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 사람들이 ‘예’를 추방하고자 하는 것을 이용하여 왕궁을 에워쌌다. 이에 월왕은 크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예(자신의 동생)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은 이런 곤란한 일을 당하는구나.”

하였다.


<여씨춘추>에 있는 이야기다. 왕은 어려움을 당하고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왕은 애초에 ‘예’가 세 명의 왕자를 무고하여 죽인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나머지 한 명의 왕자마저 죽이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월왕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지 않을까.


이처럼 인간에겐 당면한 문제의 본질을 꿰뚫을 만한 능력이 부족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듯하다. 어쩌면 세상에는 진실’은 숨어 있고 ‘진실처럼 보이는 것’만 가득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도...


 

3.

건강과 장수에 이르는 비결을 80년 동안 조사한 연구가 있다. 터먼 박사는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을 선발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가족관계, 학교교육, 여가활동, 성격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귀중한 정보들을 수집해 조사했다. 이 연구는 터먼 박사가 1956년에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배 연구자들에게 이어져 계속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이 연구의 결과는 건강과 장수에 대한 의외의 진실을 밝혀내면서,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상식과 통념을 뒤집어 버렸다.

이 연구의 성과를 담은 책이 하워드 S. 프리드먼, 레슬리 R. 마틴 저, <나는 몇 살까지 살까?>이다.



활달한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 좀 더 위험한 취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전반적으로 건강문제에 대해 태평했고 건강을 챙기는 일도 등한시했다. ‘항상 웃고, 활기차게 살면 장수한다’는 통념도 틀렸다는 말이다. - <나는 몇 살까지 살까?>, 85쪽.





건강문제에 대해 태평하여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들과 건강문제에 대해 걱정이 많아 스트레스가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장수할까. 이 연구는 적당한 ‘걱정’이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걱정하는 만큼 건강을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놀랍게도 신경증이 건강을 지켜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성실한 사람이 더 오래 사는 이유는 건강한 습관과 건강한 두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더 건강한 환경과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었다. 즉 성실한 사람은 더 행복한 결혼생활, 더 좋은 친구관계, 더 건강한 근무환경을 만들 줄 알았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인생경로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행복하게 산)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살았던 까닭은, 건강하고 부유하며 현명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장수에 이르는 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나는 몇 살까지 살까?>, 99쪽.


그들 특유의 사회적 관계, 직업, 취미, 습관의 유형이 건강으로 가는 정말 훌륭한 길을 닦아 놓았던 것이다. - <나는 몇 살까지 살까?>, 99쪽.




결과적으로 사려 깊은 계획과 통제력, 성취감, 인내심, 근면함 등이 장수에 도움이 됐고 직업적 성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건강에 대한 오류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첫 번째 오류는 가족력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질병의 성향이 집안 대대로 유전되기도 하고, 분명히 유전적 원인으로 생기는 병들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력으로 심장마비에 걸릴지, 혹은 장수할지에 대해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본인의 인생경로가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두 번째 오류는 건강에 관한 ‘조언 목록’이 건강 증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언 목록’이란 의사로부터 받는, ‘적당히 먹기, 금연, 살빼기, 충분한 수면, 운동’ 등의 목록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 연구에 참여한, 장수한 사람들은 그런 목록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목록이 장수에 이르는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이 연구는 결론을 내린다.


한 연구의 기록인 이 책은 건강한 사람은 행복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서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정확히 짚어 준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

 

누구나 책을 읽을 땐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 다시 말해 저자의 의도대로 읽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독자들마다 각각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이 책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 이태준의 단편 <천사의 분노>는 불쌍한 거지들을 돕고 싶어하는 P부인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씨춘추>에 있는 이야기는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나는 몇 살까지 살까?>는 하나의 연구결과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강상식 중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아 준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 이상의 세 권의 책 내용은 그렇게 각각 다르지만 이 책들에서 모두 나는 ‘진실’과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구분하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것은 중요한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를 나의 삶에 대입하면? : 내게도 ‘진실’은 아닌데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진실로 착각하고 지나온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상(11) 높은 사람들의 횡포


1. 높은 사람들의 횡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언행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전에 서울대 음대 교수의 제자 폭행사건이 있었고, 고려대 의대 교수는 조교에게 폭언과 협박을 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다음엔 민주당 소속 시의원이 주민센터의 동장에게 폭언한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동장은 “큰 충격을 받아 이틀 동안 병원에 다녔다. 사람들 있는 데서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 생각만 하면 손이 덜덜 떨린다”며 눈물을 흘렸다(국민일보, 2011. 4. 7.)고 한다.


혹시 그들은 사람을 둘로 나누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자신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서 무시해도 좋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권력자는 남을 무시해도 되는 자리인가. 이런 사건들을 알고 나니 사람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사람과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중요한 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정말 잘못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깨달을 때 반성할 수 있다. 그런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잘못을 하고서도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산다면 자신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들도 생기지만 자신 또한 불행해진다. 좋은 인간관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생텍쥐페리)’라는 말이 있다. 모든 불행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서 생긴다. 모든 감정의 그 기저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깔려 있다. 인간이 완전히 홀로 산다면 사랑도 미움도 상처도 분노도 없을 터이니 불행도 없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 적이 없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은 남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남의 인격에 대한 무시는 반드시 부메랑 효과를 낸다(서양속담)’라는 말이 있다.



2. 이 글과 관련한 책들

  

<좋은 지도자에 대하여>


노자는,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 노자, <도덕경> 56쪽.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싫어하지 않습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 노자, <도덕경> 279쪽.





 노자는, 지도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 노자, <도덕경> 83쪽.





이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라고 한다. 아마도 그런 지도자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지도자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한 사람을 겨냥한 악의적 댓글이 그 당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작은 고통으로도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아니 작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삼자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이고 당사자에겐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로 여겨지는 일도 자신의 일이 되고 보면 큰 일이 될 수 있다. 또 사람에 따라 고통의 느낌엔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되기도 한다.


만약 작가가 소설에서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폭언을 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그렸다면, 그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세상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 고통에 독자가 공감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바람직한 세상이 되기 위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얼마나 슬퍼할 수 있을까. 남의 고통은 그저 남의 고통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게 아닐까.


수전 손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202쪽.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210쪽.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영역이 아닌 타인의 삶의 영역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좋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그저 타인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연결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세희가 쓴 소설에 이런 글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삶의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그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사람들은 가진 게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둘로 나눠져 승자가 되거나 패자가 된다. 작가는 난장이로 상징되는 못 가진 자가 패자가 되어 고통을 받고 사는 세상이 과연 옳은 세상인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그 부당함을 깨닫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가진 자들의 ‘죄’와 못 가진 자들의 ‘고통’이 대립하는 이 소설은 사랑이 없는 욕망을 비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그는 폭력에 대해 일침을 가하듯 이렇게 썼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타인에게 직접 고통을 주는 폭력이나 폭언은 어떠한가.




 

소개한 책
  

노자, <도덕경>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71 | 172 | 173 | 17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