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선의의 거짓말



적적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거의 매일 친정에 들른다. 그러다가 내가 몸이 아파 가지 못하는 날이 생긴다. 최근 감기몸살을 앓을 때도 그랬다. 우리 집과 친정은 걸어서 십오 분쯤 걸리는 거리인데 아픈 몸으로 찬바람을 쐬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도 나를 보면 금세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눈치를 채시므로 친정에 가지 않는 게 나았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아시면 큰 걱정을 하셔서다. 이럴 때 내가 하는 거짓말은,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엔, 감기가 들어서 오늘은 가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어 내게 갖다 주러 오신다. 그러고는 체중이 빠진 것 같다면서 마음의 그늘을 가지신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젠 거짓말을 하는 요령이 생긴 것이다. 이럴 때 거짓말은 친정어머니와 나, 두 사람 다 편하게 만든다.


우리 대부분은 진실해야 옳은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진실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또 상대방을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대체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고 여겨질 때 거짓말을 할 것이다.

만약 늘 진실해야만 한다면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게 될 듯싶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친구가 옷을 새로 사 입고 나와서 “이 옷 어떠니?”라고 묻는데, 느껴지는 대로 솔직하게 말한답시고 “별로 예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해 준다면 그 친구의 기분은 어떨까. 둘의 관계는 좋은 친구관계가 유지될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연히 어느 커피숍에서 친한 친구의 남편이 어떤 여자와 만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연인관계였다. 이 때 이 얘기를 그 친구에게 해 줘야 할까, 말까. 어떤 것이 그 친구를 위하는 일이 될까. 만약 그 얘기를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남편에게 속고 사는 바보가 되고 말 것이며 더 불행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남편이 비밀리에 연애를 하다가 언젠가는 연인관계를 정리할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굳이 진실을 말해서 그 친구를 불행에 빠뜨릴 필요가 없다.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가 있는데, 동생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어머니가 충격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이 사실을 숨겨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이것은 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내가 어머니라고 가정하고 어떤 답을 원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고 결정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사람은 심적으로 힘들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할 것이다. 그 선택에 따라 결정이 다를 것이다. 이럴 때 나라면 고통스런 진실보다 고통을 없애주는 거짓을 택할 것 같다. 사람이 진실해야 함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게 해 주는 경우라면 거짓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꼭 필요한 경우는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본 경우가 아닐까. 가령 어느 축구 시합에서 누군가가 반칙을 했고 그 반칙을 공개하지 않으면 상대편 선수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경우에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또 죽어가는 암 환자에게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해 의사나 가족이 말해 줘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이 환자에게 고통을 준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으면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은 것에 따른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19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석방된 장 발장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은 미리엘 신부였다. 그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신부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장 발장은 성당의 은그릇을 훔쳐서 도망쳐 버린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경관들에게 잡혀 성당으로 끌려온다. 그는 다시 도둑질을 한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장 발장에 대해 화를 낼 줄 알았던 미리엘 신부는 다음과 같은 뜻밖의 말을 한다.





“오, 수고들 많소. 그런데 장 발장이 아니시오? 당신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져가시라고 드린 물건 가운데 은그릇만 가져가셨기에 왜 은촛대는 안 가져가셨는지 궁금했습니다.” - 빅토르 위고 저, <레 미제라블> 중에서.



        

 

그러면서 신부는 벽난로 위에서 은촛대 두 개를 가지고 오더니 장 발장에게 내밀었다. 장 발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떨결에 은촛대를 받았다. 이 일에 감동한 장 발장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다.


미리엘 신부가 거짓말을 했던 것은 장 발장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이 그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은 장 발장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거짓말이 되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 미리엘 신부의 거짓말을 떠올린다.


‘거짓말도 잘만 하면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거짓말도 잘하면 처세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다. 어느 누구에게든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해로운 진실보다 이로운 거짓말이 나으며, 악의의 진실보다 선의의 거짓말이 낫다는 생각이다.


그 누구든 미리엘 신부를 ‘진실성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거짓말을 해도 되는 조건은 그처럼 ‘진실성 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의 거짓말인 경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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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살다보면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모를 때가 있다. 이 때 옳게 판단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올바른 판단력을 얻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고 독서가 필요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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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3-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주째 감기를 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감기 조심하시길...

옹달샘 2011-05-1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을 위한 거짓말보다는 나를 위한 거짓말을 더많이 하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페크pek0501 2011-05-15 21:34   좋아요 0 | URL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것,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려울 거예요. ㅋ
 


<책 속을 산책하다가 좋은 글을 줍다> 두 소설의 명문장


어느 날, 첫사랑인 사람으로부터 오랜만에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면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만약 이것을 소설로 쓸 경우, 전화를 받는 사람이 상대의 전화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면 이건 가짜다. 실지로 그런 대상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아마도 우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멎을 것처럼 긴장되어 말을 더듬거나 침묵으로 그냥 멍하니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 긴장감은 뜨거운 감정에 비례할 것이다.


경험한 것처럼 쓸 때 리얼하다


만약 길을 가다가 그리워하던 사람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는 어떨까. 갈등 없이 반갑게 달려가서 말을 건넨다면 이건 가짜다. 가짜가 아니라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연기일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린 아마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글을 잘 쓰려면 직접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경험한 것처럼 쓸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탁월해야 할 것이다. 내가 명작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도저히 경험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글’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혹시 책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연애소설부터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명작의 연애소설을 읽으라고 하고 싶다.



무릇 천지만물을 살피는 데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고, 사람을 보는 데에는 정보다 묘한 것이 없으며, 정을 살피는 데는 남녀 간의 정을 살핌보다 진실한 것이 없다. 18세기 문인 이옥의 말이다.

고미숙 저,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중에서.




18세기 문인 이옥의 말에 따르면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남녀 간의 정을 살피는 것이 으뜸이란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꼭 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은 직접 연애를 해 보는 것. 만약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연애에 관한 책이라도 읽어서 남녀 간의 정을 살펴봐야 한다.


소설은 결과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과정을 보여 주는 것


소설에서 “그 두 사람은 이별하였다.”라고만 쓴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싱거운가. 이런 식으로 쓴 글을 읽으면 독자 입장에서 어떤 감응도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런 감동도 없다. 다음은 내가 뽑은 명문장이다. 두 연인의 이별장면이다.



니나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내리려 했던 섬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배가 멎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릴 때 그 선객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섬을 바라보면서도 선장에게 항로를 섬 쪽으로 돌려 달라고 하기 위해서 종을 흔들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팔이 그를 붙들고 있고 그는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배는 계속해서 가고 섬은 대해의 한가운데에 그냥 떠 있다. 그 섬에는 다시는 어떤 배도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니나는 갔다.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이별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별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 풍경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글이다. 이런 글은 읽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들이 이별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밀한 묘사는 필수다.



1

책 소개



<생의 한가운데>는 린저의 대성공 작품으로서, 특히 그 형식의 참신성에 의해서 매우 찬탄을 받았다. 이 작품 속에서 린저는 이야기, 보고, 일기, 편지, 회상, 여주인공의 창작 등 여러 형식을 서로 섞어서 한 개의 새로운 형식을 낳고 의식적이고 기술적인 문체 구성을 시도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이며 남성적인 명성을 지닌 소설가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으로 풍요하게 장식된 ‘니나 부슈만’이다. 니나를 통해서 린저는 현재의 지성 계급에 속하는 여자가 자기의 의식 세계를 주위와의 분쟁 속에서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였다.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가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확 뒤집어 놓는 글은 좋은 글이다. 다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회를 주는 글이다.



만약에 신이 나를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행복 속에서도 선량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현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솟아온다. 그리고 도대체 현명이 행복이나 선보다 나은가 하는……


그리고 왜 도대체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도대체 원하지도 않는데 현명해져야 하는 것일까?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현명함’과 ‘행복’과 ‘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리석게 살더라도 행복한 게 나은가, 불행하더라도 현명한 게 나은가. 꼭 현명해져야만 선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까.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현명함’과 ‘선’, 둘의 가치 중에서 무엇인 먼저인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 있기는 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없는 게 아닐까.


일찍이 R. 타고르는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사람이란 매우 가변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십 년 전의 ‘나’와 다르고 또 십 년 뒤의 ‘나’와도 다를 것이다. 현재의 ‘나’만 해도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이 여러 면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성격만 해도 적극적이면서 소극적이고, 사교적이면서 비사교적이고, 활발하면서도 생기가 없고, 명랑하면서도 어두운 일면이 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로 나를 표현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많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은 몸을 굽히고 자기 자신 속을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나를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도 참 자기가 아니야. 아마 그 수백 개를 다 합치면 정말 자기일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믿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많은 자기 중에서 다만 하나만,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야.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이승우 저, <생의 이면>이란 소설에도 이와 같은 글이 있다.




나는 내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2

책 소개  



모든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은밀함이다. ...... 이 소설은 자전적이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작가의 말 중에서.





다음은 <생의 이면>에서 내가 뽑은 명문장이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役)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나는 내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안다.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이다. 과거란 결국 인상(印象)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이고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라는 것에 공감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기억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5년 전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싸웠던 이유와 그 과정에 대해 말할 경우 두 사람의 말이 각각 다를 수 있다.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관해 지금 말하는 내용과 10년 뒤에 말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어떤 것을 취사선택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또 (시간이 흐른 뒤엔)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에 불과하다.



왜곡된 진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일 수 있을까? 물 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 그것들을 달이 아니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해라고 말할 것인가, 꽃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것들은 달이 아니지만 달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것. 우리의 검열 받은 기억 속의 과거가 그러하다. 그것들은 한낱 인상에 불과하지만, 그 인상을 조작된 것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일뿐만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물 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과 같이 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므로 입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여기에 소개한 <생의 한가운데>와 <생의 이면>은 몇 번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명작소설이다. 이 두 소설은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고, 사색적인 글이 많고, 작가만이 알고 있는 생의 비밀을 포착하여 매력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마치 한 사람이 두 작품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


두 권의 책을 통해서 두 작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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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생의 한가운데>와 <생의 이면>이란 두 소설이 공통점이 많아서 놀라며 읽은 기억이 있다. 오랜 전에 읽었던 책들인데, 요즘 다시 꺼내 보고는 좋은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소개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나는 좋은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란 없으며 그저 다양한 변주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이 중복되어 있음을 발견하는데, 그것도 독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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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자살에 대하여


“17일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 자살한 대학생은 249명이나 됐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자살이 78건(31.3%)으로 가장 많았고, 경제 문제도 16건이었다. 2008년에는 전체 대학생 자살자 332명 중 175명(52.7%)이 염세․비관․낙망 등을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조선일보, 2011. 2. 18.).” 이 기사에 따르면 생활고에 쫓겨 극한 상황에 몰린 대학생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을 휴학 중에, 대출 받은 학자금 700만원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원리금 납입이 여러 차례 밀리는 등 심한 경제난을 겪다가 목을 매 숨진 경우도 있다.


자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자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이 비정상적이어서 자살한다는 것으로 심리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환경이 자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다. 뒤르켐(‘자살론’의 저자)은 자살의 이유를 개인의 심리적 원인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사회가 문명화할수록 도덕이 붕괴된다는 생각으로, 잘못된 현대사회에서 자살 이유를 밝혀내려 했다.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자면, 학비로 인해 빚을 져서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을 했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에 문제가 있어서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학비 걱정을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사회정책을 만들지 못한 사회 탓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결혼까지 약속하던 상대가 더 좋은 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변심해서 그 아픔으로 자살을 한 경우도 역시 사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부의 축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자살이 아닌 것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예전에 나는 자살하기 쉬운 특이한 인간형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어 ‘자살할 수 있는 사람’과 ‘자살할 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도로 불행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자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로가 된다


‘트리갭의 샘물(나탈리 배비트 저)’이란 동화책에는 ‘마시면 죽지 않는 샘물’이란 게 나온다. 그 샘물을 마시고 나면 신기하게도 총을 맞아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먹지 않아 현재의 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만약 스무 살 청년이 그 샘물을 마신다면 늘 스무 살 청년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 동화 속 터크네 가족은 샘물을 마셔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하지만 위니는 영원히 사는 것을 거부하고 샘물을 마시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샘물이 있다면 그 샘물을 마시는 게 좋을까.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언제나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큰 불행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위독한 암 환자는 죽는 날까지 큰 통증을 견디다가 죽는다고 하는데, 그런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면 인간에겐 자살이란 특권이 있다는 게 오히려 위안이 된다. 그래서 “자살은 죄악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충성서약의 거부다(체스터턴).”라는 말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로의 커다란 샘이다(니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자살은 왜 나쁠까


자살이 나쁜 이유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첫째,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타살과 마찬가지로 나쁘다는 관점이다. 칸트(독일 철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이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처분할 권리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내게도 없다. 칸트 생각에, 자살이 잘못인 이유는 타살이 잘못인 이유와 똑같다(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 172쪽).” 칸트는,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한 자살은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와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자살이 나쁘다고 주장한 다음의 명언들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문을 열고 달아날 권리가 없는 죄수다. 그는 신이 부를 때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플라톤).


자살은 참회의 기회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살인이다(커턴 콜린스).


둘째, 자살은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관점이다. 본인은 삶을 마감함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도피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은 세상을 지옥처럼 여기고 불행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자살하려 하는데, 이를 주위에서 말린다면, 어쩌면 그것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냥 지옥에서 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자살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겐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다(R. 오언).”라는 말보다 “환경이 인간의 산물이다(디즈레일리).”라는 말을 더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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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살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 마음이 아프다. 누구나 한 번쯤은 크거나 작은 일로 마음의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살’을 떠올려 봤을 것이다. 그럴 때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위안을 받아야지 실제로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죽음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편안히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좋은 사회’란 소수의 사람들만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잘 사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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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밀 뒤르켐 저)
 

 



    트리갭의 샘물(나탈리 배비트 저)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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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1-10-13 12:57   좋아요 0 | URL
제가 10년 전에 쓴 글을 읽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연애칼럼> 왜 질투할까


남녀 사이에서 질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연인 사이에서 상대가 다른 이성으로부터 온 전화를 웃으며 받으면 질투를 느끼고, 상대가 다른 이성에게 조금만 친절해도 질투를 느낀다. 부부 사이에서도 질투가 일어난다. 아내는 길 지나가는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는 남편에게서 질투를 느끼고, 남편은 어느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아내에게서 질투를 느낀다. 이럴 때 질투는 그만큼 상대방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리고 또 무엇을 확인하게 해 줄까.



김형경은 ‘사람풍경’이란 저서에서 “질투심의 심리적 배경에는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라고 썼다. “평범한 여자는 항상 남편을 질투하지만 미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와일드)”라는 말도 바로 ‘자신감 없음’이 질투의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뜻한다.


질투심을 잘 나타낸 작품으로 ‘오셀로’(셰익스피어 저)가 있다. 오셀로는 용감한 장군이긴 하지만 젊지도 않고 ‘얼굴이 검고 입술이 두툼한’ 추남이다. 그런 그가 권세가의 딸인 젊고 아름다운 데스데모나와 결혼한다. 이야고는 자신이 원하던 부관의 자리를 오셀로가 캐시오에게 주자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를 파멸시키려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오셀로에게 데스데모나와 캐시오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을 꾸민다. 그리하여 오셀로는 이야고에게 속아, 자신이 아내에게 준 손수건을 캐시오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 삼아 아내의 부정을 확신하며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뒤늦게 오셀로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하고 만다.


여기서 오셀로가 질투심을 갖게 된 이유에도 ‘자신감 없음’이 한몫하고 있다. 오셀로는 중년의 흑인 남자이고, 데스데모나는 젊은 백인 처녀였던 것. 만약 그 반대로 오셀로가 미남의 젊은이이고, 데스데모나가 나이 든 추녀였다면 결과는 좀 달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게 질투를 없애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 하겠다. 자신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질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치 있다는 느낌, 자신이 소중하다는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 김형경 저, <사람풍경>, 148~149쪽.

질투심을 극복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상대방의 노력이다. 상대방에게서 완전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 어떠한 감정이나 행위도 무시되지 않고 받아들여진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질투심이 극복되므로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좋다고 한다. - 같은 책, 149쪽.




결국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상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둘 다 상대의 태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 알랭 드 보통 저, <불안>, 21쪽.




이와 비슷한 시각은 일찍이 쿨리(미국의 사회학자)에게서도 볼 수 있다. 쿨리에 따르면, 우리의 자아개념은 다른 사람들의 인식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눈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단 둘의 관계인 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더욱, 상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에 대한 ‘자신감 있음’ 또는 ‘자신감 없음’은 상대에게 달렸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고 해도, 또 아무리 평소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어느 부분에선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설령 약점이 없다고 해도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질투는 누구에게나 사라지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남녀 사이에서 약간의 질투는 관심이 있다는 증거라는 점에서 기분 좋게 봐 줄 수 있지만, 만약 질투가 지나쳐서 상대를 피곤하게 한다면 둘의 관계는 나빠진다는 것이다. ‘오셀로’처럼 질투가 이성의 작동을 멈추게 하여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질투를 경계하는 다음의 명언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질투는 사랑을 계속해서 살린다는 구실 아래 사랑을 죽이는 용이다.”(H. 엘리스)


“질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 가운데 하나지만 부도덕과 불행의 가시를 품고 있다.”(쇼펜하우어)


모든 인간관계는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한 쪽이 강자라면 한 쪽은 약자가 된다. 예를 들면 연인관계에서 전화를 많이 거는 쪽이나 만나자는 말을 많이 하는 쪽이 약자가 된다. 질투의 측면에서 보면 질투를 많이 하는 쪽이 덜 질투하는 쪽보다 약자가 된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상황에 따라 뒤바뀔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만약 남녀 사이에서 한 쪽이 질투심이 생겼다면 그것을 무조건 상대에게 표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질투를 한다는 것은 첫째, 자신의 ‘자신감 없음’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 자신이 약자임을 시인하는 것이며, 셋째, 그것으로 인해 둘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질투할 시간에 차라리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더 좋아할까’,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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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


셰익스피어 저, <오셀로> 

 

      

 

 

 

 

 

 

 

 

김형경 저, <사람풍경> 



  

알랭 드 보통 저,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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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09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좋은글이네요
돌아다니다가 봤는데 정말 풀리지않는문제였는데
이렇게 정의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페크pek0501 2011-02-11 00:14   좋아요 0 | URL
글 수준에 비해 후한 점수를 주신 것 같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면 뭔가 부족한 듯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 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맘대로글> 논문은 끝났고 새해는 밝았다



1.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석사논문이 완성되어 끝이 났다. 에이포 용지 백 장쯤 되는 분량의 논문이었다.



처음엔 어떤 목표에 의해 학위가 필요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몸이 점점 지쳐 가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포기하자니 나의 무능력과 게으름 때문에 논문 하나 끝내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꼬리처럼 내 삶을 따라다닐 것만 같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논문을 반 이상 쓴 다음부터 나를 지배한 생각은 다른 것, 오직 하나였다. ‘꼭 논문을 완성하고 싶다’였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완성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은전 한 닢’이란 수필이 있다. 늙은 거지 하나가 은전 한 닢을 애지중지하였다. 그 거지가 그것을 애지중지한 이유는 이러하였다.




“... 나는 한푼 한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다양(大洋)' 한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렸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요?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피천득 저, <은전 한 닢> 중에서





그 거지가 은전 한 닢을 갖고 싶었던 것은 무엇을 사고 싶다거나 무엇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은전 한 닢이 갖고 싶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논문을 반 이상 쓴 다음부터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학위의 필요성이나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꼭 논문을 완성하고 싶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거지처럼 나도 자기만의 ‘생각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 감옥에는 타인의 시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조용하고 고독했다. 밖에선 눈이 온다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밖에선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의 감옥은 조용하고 고독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으면서도 큰 우주였다. 나는 그 세계에서 논문이 완성되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만의 ‘생각의 감옥’에 갇혀 지내곤 한다.


2.

새해가 되었다.


새해에 바라는 나의 가장 큰 소망은 한 가지.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것’이다.


입맛을 잃을 정도로, 잠을 설칠 정도로 괴롭거나 슬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입맛이 달고 잠이 달다면 건강 걱정, 가족 걱정, 돈 걱정, 그 밖의 걱정이 없는 삶이다.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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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과 관련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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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1-0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홀로 고독한 작업을 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엔가 몰두할 수 있는 건 고독하지만 하나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