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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 괴테와 마주앉는 시간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이제 책 같은 건 없어도 살 듯한 세상이지만, 저는 책이 있어 산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달리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며 사는 사치까지 누렸습니다. 글을 읽다보면, 좋은 글을 찾아 읽게 되고, 그런 글을 쓴 사람을, 시공과 무관하게 만나게 됩니다. 잠깐 차 한잔을 나누어도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쏟아, 때로는 인생을 다 바쳐 쓴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 195쪽
전영애 선생님이 지난/현재의 삶- 학문을 향한 사랑으로 달려온 길과 꿈을 펼쳐내며 다듬어가는 시간들- 을 소박하고 온화하게 들려주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나태해진 정신을 번쩍 일으켜주었고 시들했던 열정을 다시 불사르기 위해 불쏘시개를 모을 힘을 주었다. 앞으로 나태해질 때마다 다시 펼쳐보려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데리고 '여백서원'에도 방문하고 싶다.
전영애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파우스트>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택하는 구절"(13쪽)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고 번역하셨다. 후자가 훨씬 와닿는데??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면, 노력하기 싫은데? 하는 마음이 들지만,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고 하면, 지금 방황하더라도 지향하는 어떤 지점에 언젠가는 가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이 첫부분에서 이미 전영애 선생님의 이 책이 좋아졌고, 선생님이 번역한 <파우스트>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집에 민음사판이 있는데, 1권은 확실히 읽었는데 2권은 기억이 안 남.. 완독은 못했던 듯.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저 단순한 악이 아닙니다. 이 악마는 내 마음속에 있는 "부정否定만 하는 영靈",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활동은 너무도 쉽게 느슨해질 수 있고/ 인간은 곧 무조건의 휴식을 사랑"하기에, "자극하며 작용하고, 악마로서, 이루어주고 마는 동무"로서 신이 인간에게 주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바깥에서 온 어떤 거대한 악이 아니고, 내 마음속의 꼬여 있는 부분이지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작심삼일을 극복하게 하는 조력자로 설정된 것입니다. - 18,19쪽
작심삼일을 극복하게 하는 조력자라고!! 언뜻 생각하기에는 내가 열심히 살려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데, 악마가 와서 속살대며 다른 길(유튜브, 넷플릭스?)로 유혹할 것만 같은데. 너무 느슨해지고 모든 것에 지루해하며 냉소하지 않도록, 영혼에 자극을 주는 존재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좀 이해가 된다. 괴테는 노년까지도 학문에 대한 열정, 세상에 대한 호기심, 여성을 향한 사랑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하니. 괴테는 문인이었지만 장관이기도 했고 다방면의 예술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연구도 많이 한 모양이다. 아니 대체 몸이 몇개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가만히 살펴보면, 문인 괴테는 인간 괴테의 한 면모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평생, 작은 나라이기는 했지만 바이마르 공국의 현직 4부 장관이었습니다. 교육, 문공, 산업(광산), 세무가 그의 주관 분야로, 산업부흥과 문화증진을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민생을 개선하고 또한 대학을 보살피며 교육을 통해 작은 나라를 이끌어올리고자 했던 정치인이며 26년간 극장을 이끌었던 연극인이고, 38년간 도서관 감독을 하면서 온갖 세계 신간을 모아들여 작은 공국을 문화의 한 메카로 만들면서, 당대의 세계 문물, 세계 지성과 교류를 활발히 했던 전인적 지성입니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도 신기한데, 그런 막중한 사람이 하는 말이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 내가 살아 있는 것, 알게 되었네"라니요. - 200쪽
그 어떤 요인이든 우리 누구나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그 아름다운 호기심이며 지식욕을 잃을 때, 이즈음처럼 너무도 일찍이 부과되는 것들로 하여 자발성을 상실할 때 그 무덤덤, 무감각, 무신경의 인생은 얼마나 황폐하며, 얼마나 가여운가요. 얼마나 불행한가요. 그 모든 것을 세상 탓이라고 밀쳐놓고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로 옮겨놓고 그 자리를 요지부동으로 고수하면서 어딘가를 향해 목청 높이는 삶은 또 얼마나 옹색하고 불행한가요. - 25쪽
이렇게 말씀하시는 전영애 선생님이야말로 작심삼일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열정과 근성으로 똘똘 뭉치신 분 같다. 얼마전 페이퍼에도 담았지만, 이분이 수십 년 전에 여성으로서 학문을 하기 위해 겪었던 수많은 고난들을 읽고 있으면 스스로가 엄청 부끄러워진다. 그때도 썼지만 선생님은 읽는 이더러 부끄러우라고 쓰신 게 아닐테지만..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무릎 꿇고 정좌하게 된다;; 나태한 자에 대한 죽비인가. 죽비 치고는 부드럽고 조곤조곤 하지만, 효과는 비슷한 듯.
10년이 되어 그간 대략 수합해놓은 책 한 권 한 권의 후기를 복사하여 작은 거실 바닥에다 구불구불 늘어놓고 그 사이를 거닐던 순간이 잊히지를 않습니다. 젊은 날이 참으로 캄캄했었는데, 한 치 앞이 안 보이게 캄캄했었는데, 시간 순으로 늘어놓은 그 구불구불한 종이의 열列을 따라 이리저리 걸어보자니 마침내 길 같은 것이 보인 것입니다.
눈 앞이 캄캄한 채로, 그 어떤 등댓불도 없이, 그러나 눈앞의 일만은 그저 힘껏 했었는데 돌이켜보자니 그 '힘껏'이 길을 만들어놓은 것이었습니다. - 53쪽
'눈앞의 일만은 그저 힘껏'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뭘 하다가도 중간중간 자꾸 핸드폰 들여다보고 딴짓 하는 사람(나)은 이 부분 인용하면서 다시 무릎 꿇는다. 죄송합니다..
위 인용문에서 언급한 후기들을 모아 낸 책이 <맺음의 말>이라고 하는데, 일단 담아뒀다.
그는 유연했습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입장 중에서 가장 굳을 수밖에 없는 것, 그렇다고 우리가 아는 것, 즉 종교에 대한 태도까지 그러했습니다. (...) 그러나 그런 '열림'이 쉬웠겠습니까. 청년 괴테는, 그의 '열림'이 어떠했는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조개들이, 살을 껍질 밖으로 펼쳐낼 때 물에 뜨듯이, 그렇게 나는 사는 걸 배웁니다.
조개가 연한 살을 내미는 곳은 짠 바닷물입니다. 우리의 세상과의 만남은 연한 살이 소금물에 닿을 때처럼 아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사고를 유연하게 열고 옮길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진정 큰 힘인 것 같습니다. - 70, 71쪽
언제든 그 순간에, '현재'에, '지금 여기'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하나의 이미지로 모아서 문제를 선명하게 파악하고, 늘 그런 식으로 그 한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 글로 쓴 그림, 그것이 예로부터 시詩 아닌가요. 괴테는 어려운 문제도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포착했습니다.
(...)세상의 문제에 원천적으로 답은 없습니다. 답이 있고 해결책이 쉬이 있으면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 그런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의 전모를 바르게 파악하면, 기이하게도 생겨나는, 문제를 감당해가는 힘. 그 힘이, 답은 없지만 그중 답의 근사치일 수 있습니다. - 116, 117쪽
최근 <내 딸이 여자가 될 때>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다소 심난하다. 여자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면서 겪는 많은 정신적 혼란,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그 와중에도 단단한 '진짜 자아'를 가진 아이는 이 시기를 수월히 넘긴다는 것. 결국 내 아이를 어떻게 진짜 자아를 가진 아이로, 자기 삶의 키를 잡고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울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위 인용문의 '문제를 감당해가는 힘'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일전에 어떤 심리학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에서 들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사소한 좌절'의 경험이라고 한다. 길을 잃어 물어물어 찾아가는 일(스마트폰 지도 켜면 되므로 좌절 없음) 같이, 사소한 실패를 겪고 이걸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회복탄력성을 키워주는데, 요즘 아이들은 미리미리 그런 실패의 경험을 차단하므로(부모나 스마트폰 등이) 그런 경험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영애 선생님이 첫 꼭지에서 얘기하신 에피소드는 서울에서 여백서원(여주)까지 혼자 책 한권 들고 길을 찾아온 열한살 남짓한 아이 이야기다. 내 아이가 이 아이처럼 크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험해.. 과연 내가 혼자 보낼 수 있을까? ㅠㅠ
제가 보여주려는 것은, 단순히 우리에겐 조금 낯선 인물인 괴테가 아닙니다. 첫째,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크는가. 둘째, 그런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어 생각하는 가운데 계획이 조금씩 세워졌습니다. 서원 안에 있는 '여백 어린이 도서관'을 찾아오는 어린이들이 참 예뻐서, 그런 아이들이 더 커서도 찾아오고 지켜갈 수 있는 곳을 떠올리던 생각의 끝자락에 맺힌 그림입니다. - 149, 150쪽
크게 소리는 못 내는 채로, 한마디 말이 내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바로 "손 놓지 말고"입니다.
(...) 무엇을 시작하든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세상을 걱정하며 잡았던 서로의 뜨거운 손을 놓지 말고, 무엇보다 누구든 제자리에서 하던 일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각자 자기 일을 성심껏 해가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불의에 대해 눈 부릅뜰 줄 알아야겠지만 주변 또한 돌아볼 줄 알고, 분수 넘게 이것저것 사느라 혹은 허겁지겁 남 따라가느라 허덕이던 손길로 제 옷깃도 좀 여며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자긍심을 세우는 일이 아닐까요.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자기 안의 등불을 켜는 시간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161, 162쪽
세상 어딘가에 '손 놓지 말고'라는 마음으로 성심껏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든든한 기분이다. 생애 끝까지 깨어 있으며 경탄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는 괴테처럼, 전영애 선생님처럼, 나도 성심껏 내 일을 하면서 읽고 쓰고, 꺠어있기 위해 노력하며, "내가 받은 유산"인 시간을 소중히 써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꿈을 일상의 삶 속으로 적절히 조제해넣"(113쪽)어 오신 선생님의 발자취가 아름답다. 해외 문사들, 연구자들과 활발히 교류해오신 경험담들을 보고 있으면 와 너무 멋지다..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여백서원' 소개영상을 공유하려고 했는데, 타웹사이트에서 재생되지 않도록 설정된 모양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면 좋겠다.
링크: https://youtu.be/TgGtcriXooE
책에 인용된 괴테의 시구들도 얼마나 좋은지. 밑줄긋기로 넣어둔다.
"그대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나의 화살은 고운 깃 달고 날아갔다오.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테지요. - P30
바로바로 보답이 있기 어렵고, 바로 그곳에서 사례하기는 어려운 이 시간 차, 이 장소 차가 어쩌면 세상이 얽혀 있게끔 세상을 지탱해주는 넓은 그물망인지도 모릅니다. 받은 사람이 베품는 사람으로 크는 시간이고, 세상이 넓혀지는 시간입니다. - P82
내가 받은 유산 얼마나 찬란하고 얼마나 넓디넓은지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 - P43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초조, 더더욱 쓸모없는 건 후회 초조는 있는 죄를 늘이고 후회는 새 죄를 만들어낸다 - P47
가슴 열렸을 그때만 땅은 아름답다 그대 그토록 찌푸리고 서 있었으니 바라볼 줄을 몰랐구나. - P65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 P101
사랑이 빠져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괴테는 일찍이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사랑이 참 유난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것이든, 자연에 대한 것이든 다 그랬습니다. 언젠가 한번 마음을 끈 것, 그 마음에 위로를 준 것은 오래오래 사랑했습니다. 눈여겨보았던 꽃에 대해서는 평생 식물 연구가 이어졌고, 언젠가 마음을 의탁했던 바위에 대한 추억은 평생 지질 연구를 하게 했고, 언젠가 한번 신비롭게 본 색채 현상에는 40여 년 동안의 광학 연구가 이어집니다. 남겨진 업적들은 사람과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더구나 사랑이야 말해 무엇할까요. 한 사람에게 18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며 괴테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편지의 자모 하나하나가 당신에게 그 말을 할 거예요." - P104
"꿈을...... 일상의 삶 속으로 적절히 조제해넣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꿈과는 까마득히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꿈을 실현하겠다고 물불 안 가려선 무리가 따르는 법입니다. 좋은 꿈이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을까요. 삶에다, 마치 조제약에다 한 가지를 첨가하듯 꿈을, 어떻게든 조금씩이라도 섞어가면, 삶이 견디기 낫고 사람도 반듯해지고 꿈도 단단해지겠지요." - P113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놀라워함, "전율"이 "인간의 가장 양질의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긴 생애의 끝까지 괴테에서는 이 놀라움, 경탄의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논설이, 문학이, 시가 결정結晶처럼 서서히 맺혔지요. 깨어 있었습니다. 혹은 그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생애 끝까지 말입니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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