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를 모두 읽어야겠다.
1. 화재감시원
2. 둠즈데이북
3. 개는 말할 것도 없고
4. 블랙아웃
5. 올클리어
1,2는 읽었고, 다음은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소소한 유머가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비장하고 비극적인 둠즈데이북과 달리, 개는~은 순도 100% 코미디라고 하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수다쟁이 작가답게 장편은 죄다 두권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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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 별 관심이 없어 명성 높은 코니 윌리스 소설 읽기를 미뤄오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김하나 작가 덕이다. 그가 삼천포책방에서 <화재감시원>을 맛깔나게 소개했고, <둠즈데이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화재감시원을 즐겁게 읽은 내 앞에 운명처럼 <20주년 PACK 3900>에 포함된 둠즈데이북이 나타났다. 김하나작가는 이책을 읽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엉엉 울었던 기억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이 책을 절반 이상 읽어가면서도 누군가 죽더라도 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울고 말았지... 밤중 수유하면서 틈틈이 읽은 게 아니라 푹 빠져서 한번에 읽었다면 더 많이 울었을지도.

때는 2054년. 역사학을 공부하는 역사학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실습의 과정이 있으니, 바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이 실습과정을 거친 역사학도에게 역사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현재”가 된다. 중세를 공부하는 역사학도 키브린은 너무 위험한 시대라며 만류하는 던워디교수의 진심어린 걱정에도 불구하고 1320년으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시간여행 설비인 네트를 조작하는 기술자인 바드리는 키브린이 떠난 후 급하게 던워디교수를 찾아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해 쓰러지고 마는데...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실제로 그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역사학도라니! 얼마나 흥미로운 설정인가.
수다쟁이 작가인 코니윌리스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현재의 질병과 과거의 질병을 각각 극복해나가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1권을 읽으면서는 메인스토리와 관계 없어 보이는 너무 많은 수다를 보며, 아니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빨리 말하라고! 하며 작가든 바드리든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2권을 읽다보니 어쩐지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서술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이 할머니 작가가 좋아졌다.

종교도 신도 전혀 믿어본 적 없는 나에게, 종교적 감동이랄까, 를 선사한 작품으로 소설 <천국의 열쇠>와 영화 <레미제라블>이 있는데, 이 소설이 세번째가 되었다. 이 책에서 중세시대 신부로 등장하는 로슈신부는 <천국의 열쇠>의 프랜시스 치점 신부처럼 이런 신부들만 있다면 기꺼이 종교를, 신을 믿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품게 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남아 어쩐지 자꾸만 생각나는 소설에 별 다섯 개를 준다. 이 책을 끝내고 나서 쉽게 다음 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20주년PACK 의 줌파라히리나 존버거로 넘어가야지...

#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엉망인지도 몰라요, 던워디 교수님. 메이즈리와 블로에 경 같은 인물이 살아남아 우리가 사는 시대를 세웠을 테니까요. 도망가지 않고 로슈 신부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었거든요.

# 심술궂은 늙은이와 잔소리 많은 시누이보다 더 나쁜 경우는 허다했다. 가니에르 남작은 20년 동안 아내를 사슬에 묶어 놓았다. 앙주 공작은 아내를 산 채로 불태웠다. 그리고 로즈먼드는 자신을 보호해 주고 아플 때 간호해 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둠즈데이북 2 (20주년 PACK 3900)> (코니 윌리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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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7-1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독서괭님께 땡투하고 이 책을 샀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지금 저에게 오고 있어요. ㅎㅎ

독서괭 2019-07-15 10:41   좋아요 0 | URL
어므나~~ 기분 좋네요^^ 다락방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되어야 할텐데.. 이 코니윌리스가 마거릿애트우드와 함께 유명한 페미니스트 sf 작가라고 하네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강민선 지음 / 임시제본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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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도서관 사서나 하면서 살고 싶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본 생각 아닐까? 이 책은 이런 막연한 로망을 깨부수어 주고, 저것이 얼마나 무례한 생각인지 알게 해준다. 이 저자가 일했던 도서관이 유독 이상한 부분이 많은 곳일 수도 있긴 하지만.. 사서의 일에 온갖 잡무와 육체노동이 포함되는 건 일반적일 것 같다.
그럼에도, 저자는 결국 도서관을 그만두었음에도. 그럼에도 느껴지는 도서관에 대한 애정 때문에 눈곱만치의 낭만은 남겨진 듯...
독립출판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가 팬심을 드러낸 임소라 작가의 책들을 찾아보니 주제가 참 다양하다. 한번 찾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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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5-06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서도 감정노동자라고 생각해요. 도서관에 성격이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사서를 하대하면서 대하거든요.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여성 사서나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서를 만만하게 봅니다. 사서가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소리 높이면서 성질을 부립니다. 도서관에 가면 꼴사나운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

독서괭 2019-05-06 09:54   좋아요 0 | URL
그런 경우가 종종 있군요. 사람 대하는 직업이라면 어느 정도는 당하게 되는 일이긴 하지만.. 불만이 있어 민원제기 하러 오는 사람도 아니고 도서관에 책 보러 오는 사람이라면 덜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닌가 봅니다..ㅜ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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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책을 둘러싼 가벼운 추리/미스테리, 은근하게 진행되는 로맨스...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 <그 후>, <논리학입문>, <이삭줍기>, <만년> 모두 안 읽었지만 이 책을 읽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물론 읽었다면 더 재미날 것 같긴 함. 시리즈 7권까지 있던데 에피소드 형식이라 뒤가 마구 궁금하지는 않아서 당장 다 읽을 것 같지 않지만, 생각날 때 한권씩 읽으면 즐거운 독서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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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자기 몫을 되찾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야망 에세이
김진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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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진아는 광고회사에서 미친 듯이 일했으나 결국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사표를 ‘당하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카피라이터, 35세에 결혼했으나 2년만에 이건 아니다 싶어 이혼 후 비혼으로 살아가는 여성, 광고회사에서 별 비판의식 없이 ‘여혐’광고를 만들다가 뒤늦게서야 페미니즘에 입문한 늦깎이 페미니스트다.
최근 카피라이터의 글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제일 유명한 건 박웅현 작가일 듯. 김하나 작가, 김민철 작가, 그리고 이 책이 첫 책인 김진아 작가까지. 길지 않고 어렵지 않은 문장을 구사해서 쉽고 시원시원하게 읽힌다는 점,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정확하게 짚어진다는 점이 특징으로 느껴진다. 단숨에 대중을 사로잡아야 하는 광고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할 것도 같다. 이 책 역시 시원시원하게 읽힌다. 저자가 솔직하게 내보이는 과거의 빻은 나(...)의 모습과 프리랜서이자 카페경영자로 일하면서 느낀 불평등,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모색 등의 내용이 아주 흥미로웠다.

# “경력이 너무 많네요.˝
그사이 내 나이 앞자리는 3에서 4로 바뀌어 있었다. 연차도 연봉도 부담스러운 위치가 돼버린 것이다. 아무리 일 잘 하고 커리어가 좋아도 팀장 자리를 누구의 라인도 아닌 나같은 여자에게 내어줄 곳은 없었다. 조직 내에서 열심히 일하던 여성도 40대가 되면 밀려나는 것이 남성중심적 기업구조다. 조직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는 프리랜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남성은 전성기가 40대에 시작되는 데 비해 여성은 40대에 ‘한물간‘이란 수식어를 달거나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다. 송은이처럼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여성조차 방송국 내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1인 미디어로 자체 해결하는 일은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력단절에 대한 위협은 늘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여성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임신과 출산을 하든, 인맥 서클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든, 단지 나이가 들든, 조금이라도 연결고리가 약해지는 순간 여지없이 덮쳐온다.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 나 역시 방심 혹은 자만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일로 모든 걸 해결해왔다. 일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적 발언권을 얻었다. 일은 경제적 자립을 넘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었다. 그런 일이 사라진다는 건 내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 16~17쪽

일은 경제적 자립을 넘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었다... 100% 공감한다. 휴직이 아닌 완전한 단절이라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너무 쉽
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 소비자이기만 했을 땐 나 역시 이런 돈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자기결정권에 홀려 거울앞에서처럼 쇼윈도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포기할까?‘에 몰두하느라 ‘왜 나는 이것밖에 벌지 못할까?‘ ‘왜 여자 자산가는 찾아보기 힘들까?‘ 같은 구조적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하지만 내 가게를 운영하고 외식업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돈을 쓴 거지?‘
이젠 어딜 가면 사장 관상을 본다고 말한다. 사장이 없으면 가게 이름에 ‘오빠‘나 ‘총각‘이 들어가진 않는지, 가게 앞에 ˝넌 먹을 때가 제일 이뻐˝ 같은 ‘얼평‘ 네온이 붙어 있진 않은지 본다. 관심 가는 공간이라면 공식 계정이나 사장의 SNS를 훑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미리미리 거를 수 있도록.
- 61쪽

여성이 운영하는 가게나 여혐을 드러내지 않는 가게를 이용한다는 것. 이런 방식의 연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앞으로는 나도 좀더 신경써서 보게 될 것 같다. 저자 본인은 사장부터 직원까지 모두가 여성인 “울프소셜클럽”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 또 하나, 월스트리트 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물이 왜 성인 여성이 아닌 소녀여야 할까? 취업차별, 임금격차, 유리천장 등은 현실 여성에겐 생존 문제다. 이것을 강변하기에 포니테일 머리를 한 소녀는 지나치게 귀엽다. 허리에 손을 올린 깜찍한 모습은 금방이라도 아이돌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할 것 같다. 여성의 절박한 투쟁이 소녀의 당돌한 용기 정도로 축소돼버린 느낌이다. 미국판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월스트리트를 오가는 남자들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도발 말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소녀는 남자들에게 대등하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지켜줘야할 존재, 시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런 식으로 광고나 마케팅에서 쉽게 ‘소녀‘가 여성 전체를 대변해 사용되는 것은 안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 93~94쪽

2017년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과 마주보며 세워진 “fearless girl” 동상에 대한 일침.
검색해서 보니 진짜 너무 귀엽다... 쟤가 황소를 어떻게 이겨...

# 이 야심만만한 미러링에서 변수는 그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예상대로라면 돈 버느라 바쁜 나를 위해 요리도 하고, 내 기분이 어떤지도 살피고 그래야 하는데 자아비대 예술남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걸 기대하는 나를 되려 비난하고 가스라이팅했다.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내가 조심할 정도였다. 경제권을 쥐면 관계의 주도권을 쥘 거라는 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게다가 연하남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에 연상의 내가 있었다. 너무 나이 들어 보이면 어쩌지?‘ 남성 성적 대상화에 익숙지 않은 나는 그를 평가하는 대신 끊임없이 내 나이와 얼굴을 점검했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었다.
(중략)
호텔 클럽에서 춤추는 어리고 예쁜 여자들을 내려다보던 돈 좀 있는 남자들‘ 질문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난 왜 그렇게 이 장면이 굴욕적이었을까. 치기 어린 복수를 하고 싶을 만큼.
저 한 컷에는 가부장제의 작동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자는 경제적 부와 기회를 독점한 상태에서 선택권을 가진다. 경제적 독립을 제한받는 여자는 자신의 상품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삼는다. 여자들 간의 외모 경쟁은 심지어 경제력이 있는 여자조차 자발적 성적 대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여성이 디스플레이되고 남성이 초이스하는 이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이루어진다. 어떤 강요나 강제의 기운도 없다. 주체적 메이크업, 주체적 노출, 주체적 섹스…… 마치 여자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만 같다.
애초에 두 성SEX 사이의 불공정함과 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정당한 거래라도 하는 듯 자연스럽다. 흥분과 쾌감마저 깃든다. 마흔두 살의 피카소가 열일곱 살 미성년자와의 관계에 대해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정점에 있고 그 아이도 지금 그 애 인생의 정점에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는 이야기. 선택하는 이도 선택받는 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아주 태연한 방식. 굴욕적인 것은 바로 이 태연함이다.
- 104~105쪽

저자 본인이 직접 실행한 ‘연애미러링’ 이야기도 정말 재미있다. 결론적으로 미러링은 실패하여 씁쓸한 뒤끝만 남겼지만...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얇고 가벼운데 읽고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 가득해서 주변에 선물하고 추천하고 싶은 책.

며칠 전 시골로 내려가 은둔하는 어느 명예교수의 ‘외톨이 생활 두렵지 않다!‘는 인터뷰를 봤다. 방문한 기자에게 ˝부인이 직접 만든 음료를 내왔다˝는 대목에서 실소가 터졌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의 밥과 빨래를 엄마가 해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허탈함이었다. 최근엔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누가 박사학위를 받았다거나 작품을 완성했다거나 수상을 했다거나 하면 그남자가 대단해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남자 주변의 여자들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소로의 엄마 같은 엄마일까? 고독사를 꿈꾼다는 교수의 아내 같은 아내일까? 아님 여자친구? 남자가 자기 일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식단 짜고 장 보고 요리하고 씻고쓸고 닦고 빨고 종일 주변에서 조용히 움직이던 그 여자는 누굴까? 가사 노동 외 비서 노동을 한 여자도 많겠지? 지금껏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업적과 성취들 또한 그렇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손‘의 돌봄을 받고?
- 53~54쪽

사실 <섹스 앤 더 시티>의 더 큰 해악은 ‘꾸밈 중독beauty sick‘보다 ‘남자 중독relationship sick‘의 패션화다. ˝나는 나를 더 사랑해˝라고 외치지만 그들의 삶은 남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친구들과의 대화 소재도 늘 남자다. 세상의 다른 요소들은 표백된 것처럼 모든 신경과 에너지와 감정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야망과 재능이 무엇이건 간에 연애와 결혼이 여자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선동하는 프로파간다. 사실 <신데렐라>에서 <섹스앤 더 시티>로 시대와 인물이 달라졌을 뿐 여자 주인공의 서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
- 70~71쪽

여자들은 권력에 대한 감각이 없고 권력욕도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의 욕심은 분명 권력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력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런 유의 욕망을 드러내고 스스로 권력을 쟁취한 여자를 보지 못한 탓에 확신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남자에게 선택받아 그 남자의 자산을 공유하는 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훨씬 쉽고 가능성 있게 느껴졌다. 논현동에서 목격한 것은 이런 생각에 무게를 더했다. 20대 남자에게 욕망당하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건 이 때문이다.
한창 커리어에 집중하고 성장해야 할 시간이 심리적 내전상태에서 흘러갔다. 우울과 분노와 자책의 총구가 향한 곳은 물론 나였다. 남자들도 이렇게 권력욕을 분산시킬까? 직업인으로서의 성공과 남자로서의 성공, 두 마리 토끼를 쫓을까?
- 87~88쪽

그제야 편의점만큼 많은 거리의 뷰티숍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되었다. 세계가 놀라는 ‘뷰티 산업 강국‘의 실체는 바로 ‘꾸밈 억압 강국‘이었다. 이 견고한 성채에 나는 얼마만큼의 벽돌을 쌓았던가. 광고회사에 입사한 후 만들었던 수많은 화장품 광고, 차음료 광고, 쇼핑몰 광고, 속옷 광고에서 ‘지금 당장 이 제품으로 이 배우만큼 아름다워져라! 저 모델만큼 날씬해져라!‘ 때론 사탕발림하고 때론 불안을 팔지 않았던가. 같은 방식으로 나 역시 패션 잡지에 영화에 드라마에 예능 프로에 360도 포위, 설득 당했다. 그렇게 주체적 꾸밈에 한껏 취해 졸라맨 건 나만의 코르셋이 아니었다. 나의 그것을 전시함으로써 주위 동료와 후배들, 거리며 지하철에서 마주친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 온라인 친구들의 코르셋까지 함께 옥죄었던 셈이다. 서로가 서로의 채찍이 되어 어린 세대에게서 ‘꾸미지 않을 자유‘를 빼앗을 때까지.
-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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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0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글 잘 쓰는 사람이 별처럼 많아서 읽을 만한 에세이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추세입니다..... 읽을 땐 좋으나 읽고 나면 왠일인지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이..... 저 혼자 골방에서 프로 에세이스트들이랑 싸우고 있어.....

독서괭 2019-05-03 06:51   좋아요 0 | URL
전 syo님이 언젠가 멋진 에세이 책을 내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일단 <아무튼, 도서관>은 꼭 써주시면 좋겠구요, 공부 끝나고 새로운 환경에 접하시면 또다른 재미나고 의미있는 글들을 쭉쭉 써내실 것 같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