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성적인 문체와 이성적인 분석, 타오르는 열정과 절제된 외침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책. “그것은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뛰어내리는 일이며 불가능
의 혼돈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열정으로 춤추는 일”이라는 이브 엔슬러 앞에서, 허무주의는 자리할 곳이 없다. 존경과 감사를 바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10-28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넘 좋아요
비수같이 아름답다고 해야하나...?

독서괭 2024-11-01 15:05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레이스님! 내공이 느껴졌어요..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가 - 멈춰버린 삶을 활력 있게 바꾸는 인생의 다섯 기둥
코리 키스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원제는 'Languishing'이다. 책 속에서 역자는 이를 '시들함'으로 번역했다. 시들함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아니고,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해낼 자원 사이의 균형이 맞지 않아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업무 관련 현상"(12쪽)인 '번아웃'과도 다르다. 


저자 코리 키스는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어머니에게 버려졌다. 그와 당시 두 살이었던 그의 누나는 집으로 찾아온 할머니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계모로부터 심하게 학대 당했고, 알코올의존증이던 아버지는 이를 방임했다. 12살에 조부모님에게 입양되고 나서야 사랑과 돌봄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저자는, 모든 것이 잘 흘러가던 청소년기에 시들함에 빠졌다. 그는 사회학 교수가 되어 '텅 빈 채 그저 달리는'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스스로 우울증과 의존증을 경험하기도 했던 코리 키스는 연구를 통해 정신질환과 정신건강을 구분하는 '이중연속체 모델'을 제시하며 정신질환 치료와는 다른 방법으로 정신건강 증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좋은 정신건강 상태를 '활력flourishing'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저 좋은 기분과는 다르고, 우리의 심리적, 관계적, 사회적 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다할 때 얻을 수 있는 상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시들함의 증상과 원인을 분석하고, 2부에서는 시들함->활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 5가지를 제시한다. 


1. 배움: 자기성장의 이야기 만들기 


2. 관계; 따스하고 신뢰하는 유대 맺기 

  - 사회학적 관점에서 '대인존재감mattering'은 '사회적 기여'라는 활력 요소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대인존재감이 있다'라는 것은 타인과 세상에 중요하고 가치 있는 무언가에 이바지하며 산다는 것이다. (208쪽)


3. 영성: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굴곡 받아들이기 

  - 인생이 나에게 던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자. (...) 날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궁리해보자. 그러면 두려움, 분노, 원망, 좌절감에 시달리지 않고 가장 내밀한 가치관과 원칙에 따라 인생에서 만나는 갖가지 놀라운 일에 대응할 수 있다. (230쪽) 

  -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는 타인을 연민하기 어려운 것처럼 수용은 나 자신에서 시작해야 한다. (...) 우리는 활력 있는 사람이 사과를 더 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뿐만 아리나 활력 있는 사람은 자기연민 수준이 더 높다. (231쪽)  

  - 더 나은 문지기가 되자. 나는 내 안에 무엇을 들일지 결정하는 정신적 문지기다. 주의력은 우리의 문지기이자 보안요원이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 선택하는 일은 곧 내 안에 무엇이 들어오게 할지, 그리하여 무엇이 뇌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집에 누가 들어올지 항상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를 머물게 할지는 결정할 수 있다. (249쪽)


4. 목적: 타인과 세상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삶

  - 대학생에게서는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들린다. 19-21세 대학생 10명 중 4명은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 이런 학생은 예술, 공동체 봉사, 영적 헌신, 가족을 통해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40퍼센트가 넘는 학생은 아직 목적이 없었다. 내가 두려워 하는 점은 이 학생들이 목적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젊은이들이 친사회적 성향을 기르려면 어른들이 친사회적 성향에 부합하는 직업적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롤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 당신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거나 적어도 덜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제대로 일해서 성공하려는 열망의 관점에서 자신의 일을 설명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일을 소비의 관점에서 설명하겠는가, 아니면 기여의 관점에서 설명하겠는가? 부모가 자신의 직업을 설명할 때 타인과 사회에 무엇을 주는지 보다 자신이 무엇을 얻는지로, 곧 도움을 주기보다 받는 면에서 설명한다면 기여에 바탕을 둔 친사회적 삶의 지향점이 아니라 소비에 바탕을 둔 이기적 삶의 지향점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셈이다. 자녀의 직업적 꿈과 열망에 반응하고 자녀와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281쪽)

  - 아시아계 미국인의 낮은 활력도. 

    요즘 부모는 그 어느 때보다 자녀의 학업에 직접 관여한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 놀거나 여가를 보내는 시간은 줄이고, 자녀와 함께하는 학교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부모가 고등교육을 받고 권위 있는 고소득 직업을 가진 성공한 가정에서 이런 변화가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부모가 얻은 고등교육과 고소득 직업은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자녀에게 부모의 성공에 보탬이 된 것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도록 권하는 유인책이 된다. (...) 이 모든 요인이 모이면 기대치가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징벌적인 수준으로 높아서 결국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는 부적응적 완벽주의를 낳는다. 이런 식의 완벽주의는 학생이 뛰어난 학업 성취로 얻을 수 있는 웰빙을 좀먹는다. (284-285쪽)


5. 놀이: 일상을 벗어난 시간

  - 수동적 여가X, 능동적 여가를 추구해야

  - 사람들은 늘 경험을 추구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경험이 될 만한 것을 가져와 소비해버릴 상품으로 만드는 행태가 보여 안타깝다. 우리는 개인 장비를 이용해 뉴스의 정보원과 뉴스 리포터가 하나로 합쳐진 자신만의 보도 주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멋진 경험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니라 물건이 되고, 대상이 되고,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진정 의미 있는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330쪽)



나의 경우: 1번과 2번은 꽤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5번도 꽤. 달리기도 일종의 놀이이고, 아이들과 하는 놀이도 즐겁다. 3번과 4번이 문젠데.. 3번의 명상, 4번의 봉사를 어떻게 실천해 볼까. 아이 친구 엄마가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동네 쓰레기를 줍는 봉사를 하는 걸 봤는데 참 보기 좋았다. 거창한 거 하려 들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 봄이 좋겠다.


제목도 해결방안들도 그냥 보면 흔한 자기계발서 같다(자기계발서에 편견 있음). 하지만 연구 결과들 뿐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주변 사례들까지 풍부하게 담아 놓아 흥미로웠고, 향후 다가올 시들함 - 시들함은 주로 청소년기(10대), 25~34세, 65세 이후의 3단계에 가장 많이 발현된다고 하니 나 자신의 노년 뿐 아니라 아이들의 청소년기에 대비해서도 마음가짐을 가다듬을 계기가 되어 주었다. 역시나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는 자답게 아이들 관련 부분을 제일 유심히 보긴 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10-16 14: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질문이요.
독서괭 님이 이 책을 읽고자 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독서괭 2024-10-16 14:37   좋아요 1 | URL
어쩌다 책이 손에 들어와서 시작한 것이긴 한데, 계속 읽어간 동기는 아무래도 청소년 문제에 관한 고민입니다. 요즘 아이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고 무기력하게 폰만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도둑맞은 집중력>이랑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책 한 번씩 읽어주면 아이들 사교육 열풍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ㅎㅎ

다락방 2024-10-16 15:20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제가 알라딘에서 이렇게 마주치는 독서괭 님은 무엇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지에 대해 이미 충분히 답을 가지신 분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분이셔서요. 물론 내가 가졌으면 책을 안읽어도 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의 답은 이미 알고 계실것 같은데? 갸웃하는 생각에 여쭸습니다.

독서괭 2024-10-16 15:24   좋아요 0 | URL
저 이 책 읽으면서 다락방님 생각 많이 했어요. 다락방님은 활력이 넘칠 수밖에 없는 분이구나 깨달음요 ㅎㅎ

다락방 2024-10-16 15:34   좋아요 2 | URL
아하하하 그런가요?

그나저나 알라딘 분들 참 큰일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수시로 다락방 생각을 해대시니 어쩌면 좋은가요? 다들 왜들 그러시는지..허허 그것참.....

=3=3=3=3

독서괭 2024-10-16 18:21   좋아요 0 | URL
진짜 다락방님 생각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이 크나큰 존재감 어쩌죠!!

단발머리 2024-10-16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들함‘은 중고등학교의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사람들에게도 공통되는 문제인 거 같아요.

저는 3번이 항상 자신있어요. 뭐랄까... 확신의 단계를 넘어선.... 종교인의 자신 많음 ㅋㅋㅋㅋㅋ
제 고민은 항상 4번에 가 있습니다. 기여의 관점과 관련해......... 저는 항상 할 말이 없거든요.

독서괭 2024-10-16 18:23   좋아요 2 | URL
맞아요 65세 이후 노년에 많이 겪는다고 하더라고요. 은퇴 후 주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활력을 유지하는 사례도 나옵니다.
종교 맞아요. 신실한 종교인은 활력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대충 믿는 건 안되고요 ㅎㅎ
단발님, 적어도 여기 서재에서는 기여하고 계신데요?? 4번에서 말하는 건 가족 챙기는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만.. 우리 서로에게 기여하는 걸로 해요 ㅎㅎ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향을 떠난 딸. 루시가 입원한 병실에 갑자기 루시의 엄마는 나타난다. 살며시 딸의 발을 쥐고 어릴 적 부르던 애칭으로 그녀를 호명하며. 그렇게 과거가 루시 앞에 불쑥 찾아왔다. 그리움과 고통을 함께 쥐고서. 


루시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고 부모가 반기지 않는 남자(독일인)와 결혼했으며 오랫동안 고향을, 가족을 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는- 고향은, 가족은 -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나의 구조물"처럼 언제나 존재했다. "출신이랄 게 없다"고 소개되는 루시는 일리노이주 앰개시 출신으로서 "스타일이 없다"고 평가되는 차림새로 뉴욕에 살며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어린 시절의 빈곤함을 감춘 적 없지만 마치 감춘 것처럼(설명되지 않으므로) 지내는데, 그건 참으로 외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53쪽)


대학시절 루시의 룸메이트는 엄마를 유독 싫어했으면서도 엄마가 보내준 치즈를 버리지 못하고 두었다가 오랜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치즈를 치워 달라고 루시에게 부탁한다. 엄마란 그런 존재다. 당신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고 외쳐 놓고도 당신으로부터 도착한 사랑을 차마 내 손으로 버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존재. 


루시의 엄마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는 엄마. 지독한 가난(지독한 추위!), 주변의 멸시(쓰레기라는 말), 학대(트럭에 갇혀 있던 기억과 체벌). 그럼에도 이런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이게 다일까? 책을 끝까지 읽으면 그게 아님을 알게 된다. 엄마가 대화를 단절하고 눈을 감았을 때, 루시는 "오래전의 그 익숙하고 어두운 무엇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97쪽) 엄마는 그 시절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해, 루시가 겪어야만 했던 일들에 관해 눈을 감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엄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입원한 루시의 곁에 있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엄마라면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거니까"(80쪽) 라고 말한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 예기치 않게 - 찾아오기도 한다. 그 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 21쪽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시는 계속해서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내 기억은 그렇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는 등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자신의 기억에 기반해 재구성 된 것임을 강조한다. 엄마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의 기억은 루시가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 "나도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130쪽)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쓰는 이야기는 오로지 나의 것일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려 하거나"(세라 페인이 하지 말라고 한 지점)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지"(루시가 세라 페인의 글을 읽으며 느낀 지점) 않는다면. 쓰게 되는 이야기는 "오직 하나"이고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것"(169쪽)이다. 

결국 듬성듬성한 기억들을 그러모아 완성하게 되는 것은 '자기 서사'다. 자기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과거- 유년의 시절을 빈 구멍으로 남겨둘 수 없다. 엄마의 방문은 루시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꺼내보게 해주었고, "어둠에 대한 앎"을 그저 옷가게에 들어가 회피하지 않은 채 꺼내어 글로 쓸 수 있게 해준 게 아닐까. 그렇게 자기 서사를 기반으로 '냉혹해진' 그녀는 작가로 성장한다.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 일리노이 주 앰개시 -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5쪽)


이 소설은 계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 계급은 하나의 잣대일 뿐 자신의 우월성을 체감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저속한 심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옷차림을 평가하고 어떤 집에 살았는지 궁금해 하는 루시의 전연인(예술가), 도시 출신의 지방 출신에 대한 혐오감을 은연중 드러내 버린 이웃(제러미), 고양이를 보고 놀란 세라 페인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심리분석가, 세라 페인의 강연을 듣고 '무대에 능하다'며 은연중 깔보는 남자, 이웃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루시의 엄마 등, 이 책에는 그 저속한 심리를 드러내는 예가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루시는 이러한 저속함에서 자유로운가? 그녀는 가난한 부모와 형제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에이즈로 고통받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인디언(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1쪽)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138쪽) 


이 소설은 루시의 9주간의 입원생활을 먼 훗날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큰 줄기는 입원 생활 동안 엄마와 나눈 이야기이고, 중간 중간 과거의 기억과 퇴원 이후의 루시의 삶과 생각이 조금씩 담겨 있다. 그래서 루시의 성장소설로 느껴지기도 한다. 성장은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니까. 어릴 적부터 쭉, 부유한 백인 가족보다는 블랙 호크(인디언)에게,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수용소에 학살 당한 유대인에게 감정 이입을 했던 루시는, 마침내 참전으로 인한 PTSD를 겪었던 아버지를 수용하고(이해X, 수용O)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움켜잡고" 두번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녀의 선언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고 2024-10-08 19: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때 먹먹해져서 아무것도 못 썼어요. 너무 가슴 아프고 그래서 좋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충격도 받고 그랬던 것 같아요. 독서괭님 감상평도 너무 좋습니다.

독서괭 2024-10-10 10:31   좋아요 1 | URL
너무 좋으면 리뷰를 못 쓰게 되기도 하더라고요~ 생각보다 분량이 적었는데, 그럼에도 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곱씹어볼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망고님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24-10-08 2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서친님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의 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네요.
저는 독서괭님의 이 페이퍼도 루시의 소설만큼 좋네요. 저는 윌리엄 미워하는 힘으로만 루시의 이야기를 쓸 수 있거든요. (먼 산)

독서괭 2024-10-10 10:32   좋아요 1 | URL
네, 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단발님은 아직 안 읽으셨다는 작품입니다 ㅋㅋ 어서 읽으시지용. 좋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머지 시리즈도 꾸준히 읽어보려고 해요!

페넬로페 2024-10-08 2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망고님처럼 이 책 읽고 먹먹했어요
근데 저는 루시의 부모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병원에서의 엄마의 행동도요.
정서의 차이인가 봅니다.
다시 재독하고 싶어졌어요^^

독서괭 2024-10-10 10:35   좋아요 1 | URL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이 책에서도 그러니까, 완전히 이해 못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ㅎㅎ 저도 어머니가 루시가 수술해야 할 것 같은 순간에 갑자기 간다고 하고, 어머니 입원했을 떄 찾아온 루시에게 제발 가달라고 하는 게 잘 이해는 안 됐어요. 어머니는 자기 이해를 뛰어넘은 영역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끼고 눈을 감는 사람이 아닐까 싶긴 한데..
재독하면 또 다른 게 보이는 그런 소설일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4-10-08 22: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마지막 문장 정말 멋지지 않나요? 자기 삶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것을 끌어안으면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는 루시가 눈앞에 딱 그려지는 느낌이었어요. 역시 저는 이 시리즈 중 첫번째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 제일 좋았다는게 괭님 글을 읽음으로서 다시 확신하게 되네요. ^^

독서괭 2024-10-10 10:36   좋아요 1 | URL
저 문장 소름~~ 그런데 제 이름 넣어서 읊어보니 좀 쑥스럽..더라고요 ㅋㅋ 바람돌이님의 루시 시리즈 원픽! 저도 시리즈 다 읽게 되면 뭐가 제일 좋았는지 꼽아보고 싶어요^^

다락방 2024-10-09 0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괭 님 리뷰로 이 책을 다시 만나니 새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엄청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독서괭 2024-10-10 10:3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재독 고고~ 저도 빨리 나머지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수업을 들은 느낌이다. 쓰게 될 이야기는 단 하나 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결국 기억의 조각모음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는 나의 것, 나만의 것이다. 결코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 이야기가 당신의 길을 냉혹하게 지지해 줄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4-10-05 16: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은 아직 안 읽었어요. 루시 시리즈 중에 이 책이 제일 좋다 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저의 최애는 <바닷가의 루시>입니다. 현재까지는요 : )

바람돌이 2024-10-06 21:45   좋아요 3 | URL
저요 저요! 루시 시리즈 중 저의 최애는 요거 내이름은 루시 바턴입니다. ㅎㅎ 아직은 상처입고 그 상처를 극복해가는 루시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

독서괭 2024-10-06 21:48   좋아요 2 | URL
오오~~ 앞으로 하나하나 깨 나갈 루시 시리즈 기대됩니다. 다음 책으로는 일단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찜해 두었습니다.(시리즈는 무조건 순서대로 가는 주의.. 근데 이게 두번째 권 맞겠죠?)

바람돌이 2024-10-06 23:28   좋아요 2 | URL
2번째 권이 맞긴 한데 시점이 좀 달라요. 루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단편집이에요. 전 이 단편집도 아주 좋아합니다. ㅎㅎ

독서괭 2024-10-07 06:06   좋아요 3 | URL
이야~~ 시점 전환 저 그런거 완전 좋아합니다😆
 
별똥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놔.. 뭔 소리야… ㅜㅜ
철학3부작 중 가장 철학적이었다. 그런 것 같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9-18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평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9-19 09:45   좋아요 1 | URL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ㅋ

잠자냥 2024-09-19 09: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놔 그래도 차페크인데 2별이라니... 이별이다 독서괭!

독서괭 2024-09-19 09:52   좋아요 2 | URL
그래도 차페크라 고민했지만 3별주기엔 제가 넘 힘들었따… 잠자냥님 리뷰 쓴 거 있나 봤는데 없더만요!! 별똥별 좋아한다고 쓰긴 하셨지만..

잠자냥 2024-09-19 09:54   좋아요 2 | URL
나도 어려워서 안 썼...어요! 파하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독서괭 2024-09-19 09:55   좋아요 2 | URL
맞짜나!! 나만 어려운 거 아니자나!!! 아휴 다행이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9-19 09:58   좋아요 2 | URL
동병상냥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9-19 10:15   좋아요 1 | URL
아주 흐뭇한 풍경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