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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독서괭이 이 책을 좋아할 것인가에 관해 대단히 무해하고 쓸모없는 내기를 하신 두 분에게 그 답을 말씀드린다.
독서괭은 이 책을 좋아합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21세기 최고의 책 10권에 이 책을 뽑지는 않을 것 같지만..(혹시 모른다, 아직 안 꼽아 봤으니까)
이 책을 매우 사랑하는 분이 계속 홍보하셔서 읽어볼까? 읽어봐? 하면서도 계속 미뤘던 이유는, 제목부터 너무 촉촉해 보여서.... 애 낳고 연애세포가 전멸상태에 가까워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틈틈이 로맨스소설과 웹툰을 보던 독서괭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걸 책으로 보고 싶지는 않은 뭐 그런 기분이랄까...
그러나 읽고 나니,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분이 왜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는지 알겠어서 후련하기도 하다.
이 책은 결코 영상화 될 수 없는데(설마 이미 된 건 아니쥬?) 메일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게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 오디오북으로도 만들 수 없는데(설마...) 두 사람이 서로의 목소리를 상상하다가 후에 실제 목소리를 듣고 놀라는 장면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하면서, 그들과 함께 상대방을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소설의 설정이 주는 최고의 재미다.
에미가 주소를 잘못 적어 보낸 이메일- 지긋지긋한 잡지 구독을 끝내기 위한 -을 거듭 받게 된 레오가 정중하게 잘못 보냈음을 알리는 답장을 보낸 것이 이들 인연의 시작이다. 그 뒤 몇 달 동안 잊고 있다가, 에미의 '복된 새해' 어쩌고 하는 단체 메일이 레오에게까지 가게 되고, 다소 빈정대는 답장을 한 레오는, 에미와 메일을 계속 주고받게 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에미는 남편이 있다. 그녀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언니처럼, 친엄마처럼 여기는 아이들과 살고 있다. 서른넷의 그녀에게, 한참 나이 많은 남편과 평온하기만 한 가정은 뭔가 부족했을까? 통통 튀고 때로는 무례할 만큼 직설적이며 경쾌한 그녀의 메일을 보면, 에미가 가정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에미 스스로도 알고 있다. "메일에서의 에미는 굳이 착하게 굴려 애쓰지 않고 평소에 억눌러왔던 약점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거예요."(170쪽)
레오는 마침 5년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만났다 헤어졌다 반복하면서도 놓지 못하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파리로 가버린 것. 에미와 메일을 주고받는 것이 그에게는 편안한 위로가 된다. 어쩌면 "그 여자는 냉장고예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손을 대면 제가 뜨거워져요."(179)라고 표현되는 전 여친(마를레네)과의 육체적 관계에 지쳐서, 메일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 속 에미에게 빠지게 된 게 아닐까?
두 사람은 점점 서로의 메일을 기다리고 서로를 더 많이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된다(모습도 모르면서!). 놀이처럼 진행한 '찾기 놀이'(사람 많은 카페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게임)를 한 뒤, 서로의 모습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두 사람 모두 이성에게 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음을 알게 된 후, 환상이 더 강해진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때로는 에미가, 때로는 레오가 선을 그으면서 둘은 아슬아슬한 이메일 친구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에미가 자기 친구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시켜 줄 때는, 안 돼! 그러지 마!! 싶었다. 자기가 소개시켜 줘 놓고는 막상 둘이 서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레오에게 친구 험담을 하는 에미를 보는 건 너무 별로였다.
하지만 에미가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다. 그녀는 가정을 깰 생각이 없고, 가정과 레오를 모두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오를 친구라고 믿어야 했고, 친구라면 자신의 친구의 남자친구가 되더라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한편으로 에미는 레오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었고, 에미가 보기에 '레오와는 전혀 맞지 않는' 친구를 소개시켜 준 후 '나랑 안 맞는다'는 대답을 들음으로써 자신이 아는 레오가 현실의 레오와 일치함을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이 사귀는 것 같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자, 에미는 퍼뜩 깨닫는다. 레오가 친구와 사귀게 되면 이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걸.
그럼에도, 에미는. "저는 당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아요!!!!" (287쪽)라고 강변한다.
후반부는 두 사람이 겪는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서로가 궁금하다. 만나고 싶다. 아니, 만나고 싶지 않다. '바깥 세상'인 이메일 속에 존재하는 환상의 그/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진짜 키스가 필요하진 않아요. 메일을 쓰는 거 말고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장 저에게 키스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필요할 뿐이에요."(327쪽)
결국 레오는 끝을 보기로 결심한다. 거기에는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가 보낸 메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환상 속 관계는 끝내야 한다. 실재하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 둘은 레오가 보스턴으로 떠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남을 갖기로 약속하는데...
그 만남은 성사되지 않지만, 에미는 현실과 환상 사이 벽의 붕괴를 느끼며 레오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지각한다. 그러나 빠이빠이. 단호박 레오는 이미 멀리멀리...
이 마지막 괜찮았다. 음.끝까지 못 만나고 끝나는 게 제맛(?)이지. 그런데, 후속편이 있던데 거기서는 만나는 걸까?(궁금)
*****************스포일러 끝 **************************************************************************
이 책을 읽고 나면, 과연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이런 메일친구나 무슨 카톡친구나..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을 잠식할 정도로 비중이 커진다고? 하긴, 온라인으로만 연애하다가 돈까지 사기당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외로운 마음에 스며든다면 뭐든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런 말을 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텐가...
저는 이를테면 당신이 스무 명의 여자 가운데 섞여 있다 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에미 로트너를 즉시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57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145
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가슴에 관심 없어요. 저는 여자를 이루는 다른 모든 것은 뚝 떼어놓은 채 오로지 가슴 크기에만 관심을 쏟는 재주는 없습니다. 273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274
레오, 당신은 여자가 뭘 원하는지 아는구나!
하지만 나에겐 메일을 보내지 마시오. 나는 새벽 세 시에는 자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