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래시>를 마치고 이번 달 읽어야 할 <페이드포>는 사무실에 있고 읽는 중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검색해보니 아직 "신간"(내 손에 들어온지 6개월 이내)이라, 신간이 구간되는 11월 말경에 끝내기로 하는 계산을 마친 후, 집에 있는 구간들을 살펴보았다. 문득 백래시 읽기, 원서읽기에 밀려 잊혀졌던 주제독서(법률/재판/범죄심리)가 떠올랐고, 얼마전 오터레터를 통해 알게 된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기 때문에 이 구간 중의 구간(2010년도 출간. 검색창에 제목만 쳐서는 찾기 어려움. 손에 들어온 것도 비슷한 시기일 듯)인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출간된 지 오래된 책, 내용은 미국의 대법원을 다룬 책이 얼마나 재밌겠냐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다? 

일단 저자인 제프리 투빈이 기자이기 때문인지 딱딱하게 쓰지 않았다. 그는 대법관 하나하나의 개성을 살려서 보여주고, 이들의 임명 전후 과정, 대법원장이 바뀌고 대법관이 바뀌는 동안 변화하는 분위기 등을 이야기하듯 재미있게 들려준다. 무엇보다, 이 책 전반부의 많은 부분이 그 유명한 낙태판결, 얼마전 파기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둘러싸고 이를 파기할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와 관련한 치열한 정치적, 법적 싸움을 보여주는 데 할애되어 대단히 흥미진진했다. 로 판결(1973년) 이후 많은 주 정부들이 낙태 규제를 위한 법을 제정했고 그 법들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단은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어제 읽은 부분은 1992년의 Planned Parenthood of Southeastern Pennsylvania v. Casey 사건(케이시 사건)에서 로 판결을 유지하기로 연방대법원의 다수의견(5명)이 형성되게 된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 상고를 허가하고 대법관회의에서 의견을 나누었을 때만 해도 로 판결 파기가 다수였고, 대법원장 랜퀴스트는 다수의견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위 회의 당시에는 로 판결을 파기하는 쪽에 기울었던 수터 대법관이 생각을 바꾸어 오코너 대법관을 찾아갔고, 오코너와 수터는 로 판결을 유지하면서 그 내용을 다소 변경하는 데 합의한다. 이들은 로 판결 파기의견이었던 또 한명의 대법관(케네디였나?)을 설득하여 의견을 바꾸게 했다. 이들 "3인방"에 본래 로 판결 유지를 원했던 블랙먼 대법관(그는 로 판결 다수의견 집필자였다) 등 2명을 포함, 총 5명의 의견이 다수의견이 되어 결론이 뒤집히게 된 것. 이들이 의견 초안을 회람시키자 선고 전날까지 의견을 번복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낙태 문제는 첨예한 정치적 문제였다.


기존 로 판결이 임신 기간을 3분기로 나누어 규제 가능 정도를 달리 판단하였지만 오코너의 의견이 주를 이룬 케이시 판결에서는 삼분기 구분법은 "생존가능성 획득 이전의 규제에 대한 엄격한 금지"이며 케이시 사건 법원이 임신 과정 내내 존재한다고 판단한 "여성 안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생명에 대한 주 당국의 이익을 과소평가"하므로 폐시되어야 하고, 주 당국의 규제는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야기하는 경우에만 위헌적이라고 판단했다.(<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186쪽) 케이시 판결은 로 판결에서 후퇴했다고 평하는 것 같은데, <더 나인>에서 보여주는 오코너의 입장이 보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주로 집필한 "여성들이 임신을 중단하기 전에 배우자에게 그 사실을 통지할 의무를 부과한" 부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오코너는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타당한 비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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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님이 요청하신 오코너의 여성주의적 비판 부분 추가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을 두고 있었다. "기혼여성의 경우 여성으로부터 곧 낙태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배우자에게 통지하였다는 본인 서명이 붙은 진술서를 제출받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의사도 낙태시술을 할 수 없다." (...) 오코너는 (...) 다음과 같은 상식을 설시했다. "사이가 원만한 부부라면 아이를 가질지 여부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중요하고도 내밀한 결정을 할 때에는 의논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수백만 여성들이 그들의 남편 손에 육체적, 심리적 혹사를 당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이 그러한 이유로 임신을 했다면 낙태를 하겠다는 결정을 그들의 남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매우 상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 자신의 안전과 자기 아이의 안전을 몹시 걱정하는 상당한 숫자의 여성이 낙태를 하는 것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주가 모든 경우의 낙태를 금지할 때 만큼이나 불 보듯 훤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케이시 사건 및 향후의 사건에서, 오코너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여성의 자율과 건강이었다. 그녀는 알리토의 견해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혼인 및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본질과는 모순된다. 여성은 결혼을 했다고 하여 헌법적으로 보호되는 권리를 잃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112,113쪽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보여 원문을 찾아보았다.


     In well-functioning marriages, spouses discuss important intimate decisions such as whether to bear a child. But there are millions of women in this country who are the victims of regular physical and psychological abuse at the hands of their husbands. Should these women become pregnant, they may have very good reasons for not wishing to inform their husbands of their decision to obtain an abortion. 
    The spousal notification requirement is thus likely to prevent a significant number of women from obtaining an abortion. It does not merely make abortions a little more difficult or expensive to obtain; for many women, it will impose   a substantial obstacle. We must not blind ourselves to the fact that the significant number of women who fear for their safety and the safety of their children are likely to be deterred from procuring an abortion as surely as if the Commonwealth had outlawed abortion in all cases.


 => (이렇게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여성들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면, 이들에게는 남편에게 낙태 결정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 우리는 배우자에 대한 통지 규정이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경우만큼이나- 상당수의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낙태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이부분 앞에 남편에게의 통지가 아이에 대한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합리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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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터 대법관이 중간에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데이비드 수터는 특이한 사람이 많다는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독특한 사람으로, 독신으로 혼자 농가를 개조한 주택에 살면서 TV도 휴대폰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책이 너무 많아서 집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여 보강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는 조지 부시가 보수 대법관을 임명하기 위해 고심 끝에 고른 사람이었고 낙태지지자들은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임명되었고, 초반에는 공화당의 기대만큼 보수적인 인물로 비추어졌으나 1992년 케이시 판결을 시작으로 공화당의 뒤통수를 치는 판결을 여러 차례 하게 되고, 버락 오바마의 재임기에 사임함으로써(종신직인 미 연방대법관은 보통 사임시기를 자신을 임명한 당의 대통령 재임기에 하여 후임자 임명권을 주려고 한다) 오바마가 소토마요르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임하면서까지 거하게 공화당의 뒷통수를 친 셈. 

이런 그가 사법적으로 진보적인 법관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가 케이시 판결의 다수의견에 동조하게 된 것도 그가 "선례 구속의 원칙", 즉 선례로 만들어진 법리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안정성 추구를 중요시 여기는 보수적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책의 1/5 정도밖에 읽지 못했는데 오타가 몇개 발견되었고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도 눈에 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내용이라. 왜 여태 안 읽었나 싶다.. 항상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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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0-11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종신직인 미 연방대법관은 보통 사임시기를 자신을 임명한 당의 대통령 재임기에 하여 후임자 임명권을 주려고 한다.....

에서 저는 눈물이 나려고 하대요. 우리나라 대법원장, 대법관들은 왜 그런 전통 안 만들어서.... 우리나라 대법원장 후보는 대통령 절친의 친구라면서요. 이야... 이게 말이 되나요.
땅을 치면서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믿고 읽는 독서괭님 페이퍼! 엄지척!!


독서괭 2023-10-12 12:50   좋아요 1 | URL
미국은 종신직이니까 가능한 거겠죠? 저희는 6년밖에 안 되는데 그 사이 대통령 바뀔 거 고려해서 사임할 수는 없겠지요 ㅠㅠ
대법원장 임명 부결되었으니 다음번엔 누가 나올지..
건수하님이 문의하신 오코너의 글 부분 추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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