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he Love Hypothesis (Paperback) - 『사랑의 가설』원서
Ali Hazelwood / Penguin Putnam Inc / 2021년 9월
평점 :
Carry yourself with the confidence of a mediocre white man. (198쪽)
올리브와 안은 그 해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융합교육) 과정 grad school(대학원)에 들어간 단 두 명의 여학생들이다. 캐나다 출신의 올리브는 실험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과를 말로 전달해야 하는 상황에는 얼어붙는, 스스로를 'nobody'라고 여기는 인간이다.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베프 안과 룸메이트 말콤 뿐. grad school 면접을 위해 학교에 방문했을 때, 그때도 그녀는 자신을 의심했다. 오래된 콘택트렌즈 때문에 눈이 아파 시야가 흐린 그녀에게 대학원에 입학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해준 미지의 인물이 있었으니, 한참이나 그가 누구인지 올리브는 모르지만 독자는 다 알지롱.
아담 칼슨. 지도 학생을 눈물 바람으로 뛰쳐나가게 만드는 게 전문인 악명 높은 교수. 말콤이 그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에 올리브 또한 그를 무시무시한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 아담이 그때 그 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던 유일한 남자였던 관계로, 올리브는 누군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키스를 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계약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자, 이제부터 '계약 연애 로맨스'를 분석해 보자.
(이하 스포일러 주의)
계약 연애 로맨스의 3요소
제1요소: 계약
생각해 보면, '계약'과 '연애'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계약'과 '로맨스'는? 더욱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계약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질 때 무언가를 주고받기 위한 거래이지만, 우리가 '낭만적 연애'- 즉 로맨스 - 에서 추구하는 관계란 이해나 손익을 고려하지 않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순수하고 뜨거운, 세상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열중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계약'과 '연애'의 접목은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에 따라 자연스럽게 로맨스에 필수적인 밀고 당기기 서사를 구성하게 해 준다. 찾아보니 19세기 고전에도 비슷한 서사가 있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클리셰로 자리잡은 때는 20세기 할리퀸 로맨스가 흥행하면서부터라고.
'계약 연애'의 목적은 '연애의 외관'을 형성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계약당사자인 주인공들은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나, 중요한 것은 계약을 체결하게 된 동기다. 또한, 겉으로 드러난 동기와 내심의 동기가 일치하는지도 중요하다. 올리브의 경우, '절친 안이 나랑 썸씽 있었던 제러미와 맘 편하게 데이트 하길 바라는데, 제러미에 대해 미련이 전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가짜 남친이 필요하다'는 동기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일치한다. 아담의 경우, '스탠포드에서 내가 하버드 등 다른 학교로 가버린다는 소문 때문에 연구 자금을 동결했는데, 내가 여기서 연애하고 정착하려는 모습을 보이면 달리 생각할 것이므로 가짜 여친이 필요하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동기이지만, 독자는 내심의 동기가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롱.
다음으로 계약의 내용이다. 계약 내용에 관한 클리셰는? 물론 스킨쉽이다! 연애의 외관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스킨쉽의 정도와 한계는 무엇인가? 이건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부분이라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는 손 잡기, 가벼운 포옹, 팔짱 끼기 정도만 해도 충분히 '쟤네 연애하는구나' 할 수 있다(있지? 이것도 라떼는 이려나 ㅋㅋ). 그러나 미국에서는, 키스는 기본이다. 남들 앞에서도 멋진 일을 해낸 남친에게 달려가 뜨겁게 키스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상대를 잘 골라야겠지? 아담에게 "No sex!"를 외친 올리브의 미래는?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계약 기간이다. 기간이 한정된 관계라 더 쫄깃해지는 것. 과연 이 계약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계약이라는 수단으로나마 연인 행세를 하는 게 나을까? 어서 계약에서 벗어나 진짜 관계를 맺는 게 좋을까? 올리브와 아담은 각자의 동기에 따른 목표를 달성하는 때를 계약의 종료 시점으로 정한다.
제2요소: 상황
계약만 있으면 뭐 하나. 계속해서 이들에게 연인으로서의 행동을 강제하게 만드는 상황이 필요하다. 클리셰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만, 이 부분에서 얼마나 잘 썼는지가 로맨스의 흥행을 가르는 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얼마나 억지스럽지 않게, 얼마나 재미있고 맛깔나게,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설레게 상황을 구성하는가!
강당에 강의를 들으러 어마어마하게 사람이 몰려 버려, 아담의 무릎 위에 앉아야 했던 올리브, 워크샵 같은 행사에 갔다가 웃통 벗고 운동하던 아담의 등짝에 선스크린을 발라줘야 했던 올리브, 무려 트럭을 밀어 옮기는 괴력을 발휘한 근육남 아담에게 키스를 해야 했던 올리브. 그리고 마침내 호텔방까지 같이 써야했던 올리브. 이 모든 상황 뒤에는 올리브를 지켜보며 강하게 부추기는 안이라는 캐릭터가 있었으니.. 주인공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라 하겠다 ㅋㅋ 또한 이 모든 결정은 올리브가 했고, 아담이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포인트. 설령 마음이 있어도, 설령 만지고 싶어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한 조금도 하지 않는 아담이다.
제3요소: 갈등
그냥 설렘설렘 하다가 둘이 고백하고 사귀면서 끝나면 재미는 있겠지만 좀 싱겁겠다. 로맨스에도 단짠단짠이 필요한 법! 진짜 마음이 생겼는데도 '나 네가 좋아졌어'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갈등'이 짠맛을 더해주는 소금 한스푼 되시겠다.
독자들이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대로 아담은 올리브가 아담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올리브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난 교수고, 넌 학생이야!" .... 괜한 오해를 살까 다가가기 어렵고, 나이 차이도 8살이나 난다. 그녀는 날 기억도 못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제러미라는 딴 놈을 좋아한다! 이것이 아담의 입장이자 오해.
올리브의 오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결여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아담의 오랜 친구인 다른 교수로부터 "아담이 계속 얘기하던 멋진 여자가 너였구나"라는 말을 듣고서 그게 자신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아담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오해한다. 더 깊은 내면에는, 일찌기 엄마를 잃은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떠날 거라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어 아담에 대한 마음을 알리기를 주저한다.
별점 포인트
계약 연애 로맨스의 3요소를 모두 잘 써냈다면, 틀림없이 페이지는 잘 넘어갈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별 세 개에서 네 개는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추가 별점을 줄 포인트는?
당연하게도, 너무나 중요한 캐릭터다! 주인공 두 사람의 캐릭터.
아담은, 물론 모든 로맨스의 남주가 그러하듯, 매우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스탠포드에서 tenure(종신직 교수)를 받은 34살 교수(우리는 앤드류 포터의 소설들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짐작해 볼 수 있다)가, 키가 엄청 크고, 몸도 매우 좋은데, 얼굴까지 잘생겼으며, 심지어... 여자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기까지 한다고?? 이 세상엔 없다. 내 장담한다. 아담은 올리브가 한 말을 모두 경청하여 기억하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 스킨쉽은 절대로 하지 않는- 그러나 찾아온 기회는 놓치지 않는(!) - 올바르고 바람직한 남자.
올리브는, 많은 로맨스의 여주가 그러하듯,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잘 모르며... 눈에 안 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약간 횡설수설하면서 말을 다다다다 쏟아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말들이 매우 이공계 사람다워서 재밌기도 하고, 어설퍼 보이는데 자기 연구에 대해서는 열정적이고 똑똑해서 정이 가는 캐릭터다. 이런 두 사람이 티키타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게 읽힌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별점 4개 반을 주고 알라딘에는 4개로 할지 5개로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5개로 결론 낸 이유는, 이 리뷰 첫 줄에 인용한 문구에 있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지만, 한편으로 STEM이라는 분야에서 특히 소수자인 여성이 겪는 불평등, 차별, 성희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Carry yourself with the confidence of a mediocre white man." 이라는 말은, 올리브의 여성 지도교수가 자신감 없는 올리브에게 해준 조언이다. 그녀는 자신을 'mediocre' 라며 후려치는 남성교수의 말을 듣고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극복하고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아담은 옆에서 지켜보고, 따뜻하게 지지해주지만, 그의 주도 하에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즐거운 독서였다. 리뷰 숙제 끝!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