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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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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령”이라고 퉁쳐 부르는 기묘한 존재들의 생성과 소멸, 기쁨과 슬픔을 그린 소설. 내 마음을 쿡 찌른 몇몇 존재들(특히 세시와 에이나르)의 이야기와 결말 부분은 오랫동안 내 속에서 돌아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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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9 18: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왠지 책 제목이랑 내용이 독서괭님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

독서괭 2021-11-29 18:27   좋아요 3 | URL
그래요?^^ 별로 제 취향은 아니었는데 다 읽고 나니 묘하게 마음에 남더라구요!
 
[eBook] 당신의 손길이 닿기 전에
리사 윈게이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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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테네시 보육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강제입양 실화를 토대로, 피해자들의 증언을 참조하여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들의 입을 통해 사안의 심각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부모로부터 분리된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학대당하는 부분에서는 너무 마음이 힘들었지만, 끝까지 읽은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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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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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백야> ; 이별의 정석


도스토예프스키(열린책들에 의하면 '도스또예프스끼'!) 탄생 200주년이라는데, 한 권은 읽어줘야지 싶어 전집 중 <백야>를 선택했다. 도스또선생의 책 중 내가 읽은 거라곤 <죄와 벌>이 전부다. 중학생 때 모종의 허영심의 발로 때문이었는지 뭔지 읽었는데 엄마에게 마구 하소연하며 - "혼자서 두 페이지 세 페이지씩 떠든다니까 글쎄" -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꾸역꾸역 완독했던 기억이 나고, 서른 즈음에 다시 읽었을 때는 좀 힘들긴 했으나 꽤 재미있었다. 

<백야>는 도스또선생의 초창기 작품으로 뒤의 작품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낭만성이 있어 주목 받는다고 해설에 적혀 있다. 말이 많은 건 비슷하지만 <죄와 벌>에 비하면 그야말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즐거운 작품이었다. 


화자인 '나'는 몽상가이다. 그는 혼자 살며 사람과 교류하기보다는 사람을 관찰하고, 한번도 진짜 상대를 사랑한 적 없으나 몽상 속에서는 그 속의 상대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의 눈앞에 그토록 매혹적으로, 그토록 변덕스럽게, 그토록 광대무변하게 펼쳐지는 마술 같은 환영들을 보십시오. 그 마술 같은 생생한 화폭에서 전경을 차지하는 중심 인물은 물론 그 자신, 우리의 몽상가, 그 자신의 고귀한 존재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는지, 환희에 찬 몽상의 대열이 얼마나 끝없이 이어지는지. 당신은 어쩜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무엇에 관한 꿈을 꾸느냐고. 그러나 그걸 물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에 관해 꿈을 꾸는데......   - 47쪽 


어느 날 밤, 길거리를 배회하던 나는 울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우연히 불한당으로부터 그녀를 구해주게 된 나는 그녀가 울고 있던 사연을 듣게 되는데... 

나스쩬까, 눈 먼 할머니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가진 소녀,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에 하숙한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던 그녀는 남자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날 고백한다. 남자도 나스쩬까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형편이 어려우므로, 1년 뒤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남자는 이곳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음에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연을 들은 나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약속한다.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는 그녀를 대신해 편지를 전달해주기로 한 것. 그러나 그 뒤에도 이틀 밤이나 남자는 나타나지 않고, 결국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스쩬까는 당황하지만 서둘러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그 순간 운명적으로..!! 남자가 찾아온다. 나스쩬까는 그에게 달려간다. 


'백야'는 낮에도 밤처럼 꿈을 꾸던 남자의, 낮처럼 환하게 빛났던 세 번의 밤을 보여 준다. 진짜 현실의 여성과 마음을 나눈 환한 밤(백야)은 지나가고 이제는 밤은 다시 어둡고 낮도 예전같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스쩬까로부터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나'의 마음을 들어보자. 


그러나 나스쩬까, 너는 내가 모욕의 응어리를 쌓아 두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화사하고 평화스러운 행복에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할 것 같은가, 너를 신랄하게 비난하여 너의 심장에 우수의 칼을 꽂을 것 같은가, 너의 가슴이 비밀스러운 가책으로 고통받고 행복의 순간에도 우울하게 고동치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네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제대를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검은 고수머리에 꽂힌 저 부드러운 꽃 중에서 단 한 송이라도 나로 인해 구겨져 버리게 할 것 같은가...... 아, 천만에, 천만에!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 115쪽  


고작 사흘 밤의 인연이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차인 사람이 가져야 할 미덕이라 하겠다. '안전이별'이라는 말까지 생길 만큼 이별 후 각종 스토킹 행위에 시달리는 많은 여성들이 있으니. 제발 이 책 읽고 개과천선 합시다. 떠나는 사람은 곱게 보내 줍시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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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1 23: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백야 읽고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이 가서 좋았어요 ㅋ 뒷끝없는 도선생님? 적당한 길이에 백야처럼 낭만적인 마무리 ㅎㅎ

독서괭 2021-11-21 23:32   좋아요 3 | URL
정말 뒤끝없어 좋더라구요. 겸허하고 너그러운 마음… 도선생 바람직하다..!!

mini74 2021-11-21 23: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 책 읽고 무턱대고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겁도 없이 읽었지요 ㅎㅎ죄와벌보다 낫다니 저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맘이 드네요 *^^*

독서괭 2021-11-21 23:33   좋아요 4 | URL
와~ 전 카라마조프 본가에 있긴 한데 분량이 겁나서 손을 못대겠어요^^; 죄와벌보다.. 분량면에서 확실히 낫지요 ㅎㅎㅎ 짧습니다.

scott 2021-11-22 16:23   좋아요 1 | URL
역쉬 하루키옹의 추천으로!
불후의 명작 완독을 !!👍

페넬로페 2021-11-22 0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가 가기전에 ‘백야‘ 읽을 예정입니다.
나와 그 남자^^
어서 읽어야겠어요~~

독서괭 2021-11-22 13:10   좋아요 2 | URL
올해 도스또 한권은 읽어야지~ 하는 분들, 올해가 얼마 안 남았으니 <백야>를 추천드립니다. ㅋㅋ

2021-11-22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1-22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어제 밤에 댓글을 분명 달았는뎅 ㅠ.ㅠ

괭님 도끼옹 중편작 중에 <백야> 좋아합니다!!

흑백 영화도 추천 합니다!ㅎㅎ
도끼옹 200주년 백치 완독! 괭님 추카~추카~

독서괭 2021-11-22 23:12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어요? 댓글이 어디 갔을까요 ㅜㅜ
영화도 있군요! 몰랐어요. 이 짧은 글을 영화로 어찌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백치는 내년에 읽어볼까봐요~ㅎㅎ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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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모 토올스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은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원제인 <Rules of Civility>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연인'을 제목에 넣었는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 중 일부에 불과한 '연애'를 중심적인 요소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원제를 더 살리는 제목이었으면 좋았겠다.


다 읽은 후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근래 읽은 가장 낭만적인 소설"이라고 100자평을 썼다. 그 낭만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20대가 표상하는 젊음: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은 대부분 20대이다.

1938년의 뉴욕이 가진 분위기: 대공황(1929~1939)에서 벗어나는 시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재즈클럽, 맨하탄의 밤을 밝히는 불빛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는 도시. 

회상의 형식: 중년이 된 화자가 20대 시절인 1938년을 돌아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을 추억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상주의: 위의 모든 요소들이 결합하여 강렬하게 지향하는 이상주의적 삶에 대한 동경. 

이 책을 읽고나면 누구나, 20대의 나는 어땠지? 하고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혹은 있을 거라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너무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20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보스턴 출신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에서 영문학 석사를 했으며 투자전문가로 일했던 작가 본인의 이력 때문인지, 부르주아적인 느낌이 있다. 뭐랄까, 부르주아가 노동자의 노동이나 거친 삶에 대해 갖는 막연한 동경? 낭만화? 같은 것이 느껴진달까. 미국의 빈곤층이 이 작품을 볼 때 어떻게 느낄지는 궁금하다.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1938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는데 당시 미국 최빈곤층의 삶을 다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뉴욕이라는 도시다. 이 도시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번도 뉴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궁금해졌다. 


뉴욕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  - 92쪽 

신문판매대의 노인이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저거야. 남들처럼 뉴욕으로 도망칠 수가 없잖아."  - 142쪽
"뉴욕은 정말 사람을 확 바꿔놓지 않아?"  - 184쪽
바람이 아무리 괴로워도 지금 이 자리에서 보는 맨해튼은 정말이지 현실 같지 않을 만큼 너무나 찬란하고, 밝은 약속들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아서 평생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실제로 그곳이 손에닿지는 않을지라도.   - 500쪽





줄거리를 절반만 얘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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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내 취향이다.

1966년, "맨해튼에 사는 부유한 중년"인 '나', 케이티(캐서린) 콘텐트는 남편과 함께 사진전에 참석한다. 그 사진들은 1930년대 말 뉴욕 지하철에서 찍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다. 케이티는 그 안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 팅커 그레이. 그 얼굴로 인해 그녀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이라는 소제목이 끝나는 부분에 "뉴욕, 1969년"이라고 써 있는 건 뭘까? 작가가 된 케이티가 이 글을 썼고 그 날짜가 1969년이라는 걸까? 작품의 현실성을 더하기 위한 장치인가.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리뷰를 쓰려고 다시 보니 그런 것 같다.

추억을 소환하는 이 낭만적인 도입부에 끌린 나는 순식간에 이 책을 완독.. 하고 싶었으나, 여건상 찔끔찔끔 읽다가, 이래서는 빠져들지를 못하겠다 싶어 중반부터는 밤에 시간을 내서 쭉쭉 읽어나갔다. 그러자 너무 재밌는 거다, 특히 중반 이후는 자러 가면서 아쉬울 정도였다.


과거 소환은 1937년 12월 31일부터 시작한다. 케이티는 친구인 이브 로스와 함께 재즈바를 찾았다. 이날 이 재즈바에서 이들은 운명적으로 팅커(시어도어) 그레이를 만난다. 팅커는 "돈 있는 집에서 예절 교육을 받으며 자란 젊은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굉장한 미남"(31,33쪽)이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데, 팅커는 "매사추세츠 출신이고, 프로비던스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월스트리트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케이티는 "다시 말해, 보스턴의 백베이에서 태어나 브라운 대학을 다녔으며, 자기 조부가 세운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38쪽)며 팅커의 말을 해석한다. 이걸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책의 후반까지 읽으면 이 부분의 의미심장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사람은 1938년을 함께 맞이하고, 우정을 이어간다. 팅커를 보자마자 관심을 표하며 '내 거'라고 선언한 것은 이브지만, 왠지 팅커와 케이트 사이에 교감이 형성되어 가는 와중, 세 사람의 관계는 자동차 사고로 급선회한다. 팅커가 운전하던 차에 셋이 함께 탔지만 그중 이브만이 얼굴에 큰 상처를 입는다. 얼굴의 흉터와 한쪽 다리를 절게 된 이브를, 팅커는 자신의 집에서 보살피게 된다. 케이티는 하숙집을 나와 방을 얻는다. 이 사고 장면이 있는 소제목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연극이나 소설에서 이야기가 꼬이고 막혔을 때 초자연적인 힘이나 전능한 신 등을 등장시켜 이를 해결하는 것)로 붙인 게 재밌다. 

이로써 팅커는 이브의 차지가 된다. 이브보다 케이티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확실한 팅커가 한줄기 희망으로 케이티에게 키스를 하지만 케이티는 부드럽게 거절한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는 고착된 것으로 보였다.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케이티는 승진 제안을 걷어차고 존경하는 편집자가 있는 출판사로 직장을 옮긴다. 그곳 직원들과 어울리면서 디키 밴더와일을 만나는 등 상류층 청년들과 어울린다. 출판사에서 잡지사로 이직도 하고, 디키 일행을 따라서 간 홀링스워스 집안 파티에서 월러스 월코트와 재회해서 가까운 사이가 된다.

펼친 부분 접기 ▲



흔한 이야기 아닌가? 

한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친구인 두 여성. 한 사람이 남자를 차지하고, 다른 여자는 시기심에 이를 갈며 상류사회에서 다른 남자를 찾아.... 

이 책이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중반 이후에 드러난다. 이브는 모두의 세속적 예상을 뒤엎는다. 케이티와 이브의 우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팅커는 케이티가 넘겨짚었던 그런 인물이 아니다. 


더 이상의 줄거리는 스포일러가 되니 생략하고, 이 책의 매력을 꼽아보자.


1. 끊임없이 등장하는 책, 책, 책! 

  곳곳에서 책이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헤밍웨이가, 펄 벅이, 디킨스가, 소로우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케이티는 늘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 집에도 버섯처럼 책이 자라고 있다. ㅋㅋ 


"책이…… 아주 많네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병이죠."
"혹시……… 치료를 받고 있나요?"
"아무래도 불치병 같아요."
그는 서류가방과 포도주를 아버지의 안락의자에 놓고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건…… 듀이 십진분류법인가요?"

"아뇨, 그래도 비슷한 원칙이긴 해요. 그쪽은 영국 소설들이고요, 프랑스 작품들은 부엌에 있어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서사시들은 저쪽 욕조 옆에 있고요."
(...)
월러스는 내 침대 밑의 책더미를 가리켰다.
"그럼 저…… 버섯들은?"

"러시아 작가들이에요."              - 296, 297쪽

 


2. 인물들의 매력 + 뉴욕의 매력

   각각의 인물들이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케이티는 러시아인 부모를 둔 이민자 2세로 노동계층에서 공부를 통해 자주성가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상류사회 인물들과 어울리며 부를 즐기는 등 세속적이랄까 현실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브는 중서부에서는 경제적으로 최상위층으로 꼽히는 집의 딸인데 아버지의 도움을 거절하고 마음대로 산다. 대담하고 거침없는 모습.


 "(...)몇 주 전 주말에 웨스트포트에 있는 저 인간 집에서 다 같이 파티를 했는데, 저녁 식사 후에 저 인간 아내가 피아노로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동안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 인간이 하녀한테 식품저장실에서 뭔가 보여줄 게 있다고 말하더라고. 나중에 내가 가보니까 저 인간이 그 아가씨를 빵 상자 옆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막 목을 물려는 참인 거야. 그래서 내가 감자 으깨는 기구로 저 인간을 쫓아버렸지."

(...)

"네가 나타나서 그 아가씨도 운이 좋았다고."
이브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운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내가 식품저장실까지 저 자식을 ‘미행‘한 거니까."
이브가 감자 으깨는 기구를 손에 들고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이 사는 뉴욕의 주택 복도를 배회하는 모습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훌쩍훌쩍 뛰어 몸을 숨겨가며 비열한 인간들을 죄다 혼내주려고 나선 모습.
"그거 알아?" 내가 새로운 확신을 갖고 말했다.
"뭘?"
"너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야."     
 - 190, 191쪽


팅커는 "불사조" 같은 인물인데, 1938년 당시에는 품위를 지키며 쳇바퀴 돌듯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끔 내 기분이 바로 그래요. 내 고객 중 절반은 알래스카를 향하고, 나머지 절반은 에버글레이즈를 향하고 있는데...... 나는 강둑에서 강둑을 오가고 있는 기분."   - 73쪽


앤 그랜딘 부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케이티에게 야망을 품으라고 말한다.


부인은 드 로셔의 박스석을 가리켰다.

"제이크 옆에 있는 서른 살의 금발 여자 보여요? 제이크의 약혼녀예요. 캐리 클랩보드. 캐리는 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고 애를 썼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세 채나 되는 집에서 부엌 하녀들과 상차림과 골동품 의자의 커버 교체 같은 걸 감독하며 행복해 하겠죠. 그거야 다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내가 당신 나이라면, 캐리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을 거예요. 제이크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겠죠."   - 180쪽 

 상류층 자제인 디키 밴더와일과 월러스 월코트도... 

 월러스 아파트에서 둘이 책 바꿔 보는 거 너무 좋았고(307쪽), 디키가 종이비행기 날리는 장면은 최고였다(451쪽). 종이비행기 이 장면을 읽으면서 아, 이 책 영화로 만들면 참 좋겠네 싶었는데, 영화는 아직 없는 듯.

 

 

3. 우정.. 우정!! 

  이브와 케이티의 우정이 팅커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날 밤 늦게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복도가 유난히 조용한 가운데, 혼자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또렷하게 떠오른 사람은 이브였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은 오늘처럼 서로 적당히 의견이 어긋나기도 하는 사람들이 모인 디너파티에 초대받아서 다음 날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붙들려 있을 때, 베개에 기대앉아 내 이야기를 시시콜콜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이브의 존재가 내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는데.....   - 157쪽 


이 작품 다음에 쓴 <모스크바의 신사>는 더 평이 좋던데, 무척 기대된다. 이 책보다 더한 벽돌이지만....^^  

이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감사하며 마무리.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 사람은 반드시 소박한 즐거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아함이나 박학다식처럼 온갖 화려한 유혹들에 맞서서 소박한 즐거움을 지켜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게는 찰스 디킨스의 책들이 아버지의 커피 
한 잔과 같은 역할을 했다. 소외계층에 속하면서도 용감한 책 속의 젊은이들과 아주 적절한 이름을 지닌 악당들에게 조금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우울할 때도 디킨스 소설을 읽다가 정거장을 지나칠 만큼 책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209,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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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5 15: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 책을 제가 지금 읽었다면 과거의 그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일 수 있었을 거라고 이 리뷰를 보니 생각하게 되네요. 책을 너무 잘 읽어주셨고 또 정리도 잘 해주셨어요. 멋진분 ㅠㅠ

에이모 토울스는 모스크바의 신사에도 그렇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좋아요. 모스크바의 신사에서는 주인공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힘들어하는 게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꿀잼이에요 ㅋㅋㅋ

제가 이 우아한 연인 읽고 팅커가 바지 뒷주머니에 늘 꽂고 다니는 월든 을 샀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읽기는 몇 년 지나 읽었지만 말예요. 팅커가 케이티 우연히 만나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 하나만 말해달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 장면 너무 좋아요 ㅠㅠ

독서괭 님 만세만세 만만세!!

독서괭 2021-11-05 15:10   좋아요 4 | URL
앗 만세만세를 외쳐주시다니 영광입니다 ㅎㅎ
저 딱 읽으면서 다락방님이 이 책 왜 좋았다고 하셨는지 알겠다 싶었어요. 책 얘기 많이 나오고 주인공이 어디나 책 들고 다니며 읽고, 먹는 데 진심이고 ㅋㅋ 여적여 없고.
저는 이미 월든은 몇 년 전부터 갖고 있지만 안 읽었네요.. 언젠가 읽긴 읽겠지요? 저는 이 책 읽고 나니 애거서크리스티가 문득 읽고 싶어지던데요. 10대후반~20대초반에 몇 권 읽고 못 읽어본 것 같아요. 추리소설을 많이 좋아하진 않아서요.
팅커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 얘기해달라 하는 장면 귀여워요. ㅎㅎ 얘네 연애 너무 귀엽게 하지 않나요. 전 디키가 좋더라구요. 종이비행기에 진심인 연하남, 귀여워~~
다락방님 만세만세 만만세!!!^^

scott 2021-11-05 15: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괭님의 리뷰 속에 담긴 < 우아한 연인 >들 속 인물들의 모습들이 너무 좋습니다.
이 작품은 뉴욕이라는 도시, 2차 대전의 전운이 전혀 감지 되지 않았던 들끓던 광란의 시기를 낭만적이게 그렸죠.
작가가 사전 조사를 아주 오랜 세월 걸쳐서 했다고 하네요(트럭 4대 분량 자료를 읽었다고 함) ㅎㅎ
저희 집에도 버섯 처럼 책이 자라고 있지만 ㅎㅎㅎ

모스크바의 신사들 두툽해도 괭님 11월 ! 가을 독서의 나날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 ^^


독서괭 2021-11-05 16:13   좋아요 5 | URL
우왓 트럭 4대 분량!! 굉장하네요. 한 책 쓰는 데 4-5년 걸릴만 합니다.
들끓던 광란의 시기라는 표현이 맞네요^^ 젊은 에너지가 넘쳐서 저까지 들썩들썩하는 기분이었어요.
스콧님 집에 자라는 버섯은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요 ㅋㅋㅋ
당장 읽을 책이 쌓여 있지만 조만간 <모스크바의 신사>도 도전하겠습니다! ^^

페넬로페 2021-11-05 18: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매력적인 내용인 것 같아요~~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뉴욕을 배경으로 한 것도 좋고 인물들이 신선한 것 같아요**
꼭 읽고 싶어요**

독서괭 2021-11-06 07:32   좋아요 2 | URL
스콧님이 이 작가에 대한 멋진 페이퍼를 쓰셨답니다^^ 19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작품을 쓰나봐요. 저도 첫 책 읽고 좋아서 <모스크바의 신사>와 이번 신간(아직 번역 안 됨)도 번역되면 읽어볼 생각이예요~ 페넬로페님도 고고~^^

새파랑 2021-11-05 1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장 낭만적인 소설인데다가 책속에 등장하는 책이라니~! 전 이 책 읽을꺼여서 실눈뜨고 리뷰 읽었어요 ^^ 역시 사람은 뉴욕으로~!!

독서괭 2021-11-06 07:34   좋아요 2 | URL
책속에 책 등장하면 좋아하는 플친님들 많겠죠?ㅎㅎ 새파랑님 읽으실 예정이군요!! 멋진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뉴욕 언젠가 가보고 말거야~~

붕붕툐툐 2021-11-05 2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등감이 있는 거 같아요. 20대, 부르주아, 연애는 제가 싫어하는 키워드거든요~ㅎㅎ 근데 독서괭님이 너무 매력적으로 잘 쓰셔서 혹하네용? 특히 마지막 발췌문 왤케 공감이 갈까요? 책으로 소박한 즐거움 느끼는 건 플친님들 다 동의하실 듯 합니다!ㅎㅎ

독서괭 2021-11-06 07:36   좋아요 2 | URL
20대와 연애는 피해갈 수 없지만..^^;; 연애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귀엽고 매력 있어요.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고 썼지만 막상 화자인 케이티는 노동자 계급이라, 어떠실지… 궁금하니 일단 읽어보시면 어떨까요?ㅋㅋㅋ 책으로 느끼는 즐거움 동의 백번~^^
 
[eBook] 오셀로 :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윌리엄 셰익스피어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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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비극을 책으로 쭉 읽었을 때도, <오셀로>가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나,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오셀로가 제일 재미있다! 

이야고 역의 이인철님 연기에 감탄하며 듣다가, 중반 이후 오셀로가 이야고의 술수에 넘어가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오셀로 역의 오만석님 연기가 폭발한다. 와~~ 마음 같아서는 기립박수 치고 싶었다. 


이야고는 정말 역사상 최고의 악역이라 할만 하다. 처음부터 단지 '무어인'이라는 이유로 오셀로를 싫어하고, 부관 자리에 앉은 젊고 잘생긴 카시오를 싫어하고, 아내를 비롯한 모든 여성들에 대해 혐오를 서슴치 않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이용하고 그들이 입는 피해는 안중에도 없다. 현대에서라면 싸이코패스로 분류될 인물이다. 나는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나약함을 파고들어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악마,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다고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잘 간파하는 이야고는 오셀로나 카시오 앞에서는 누구보다 그들을 생각하는 척 하여 누구보다 정직하고 충직하다는 이미지를 쌓는다, 오셀로에게는 데스데모나와 카시오의 부정을 의심하는 기미를 슬쩍 슬쩍 흘리면서도 차마 이야기할 수 없다고 빼면서 '감춰진 진실'이 있음을 오히려 강변하는 전략을 쓴다. 오셀로는 이에 홀랑 넘어가고 만다. 특히 이야고가 은근슬쩍 구체적인 장면을 언급하면서(두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다거나, 카시오가 올라탄다거나) 오셀로의 상상을 부추기는 부분은 진정 악마적이다. 오셀로의 머릿속에 이미 박혀버린 망상은 지워지지 않고,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90퍼센트 이상 확신하는 상태에서 오히려 이야고와 공모하여 결정적으로 부정을 밝혀낼 전략을 짜기에 이른다. 사랑은 질투에 쉽게 무너지고, 남성연대만이 남는다. 그는 데스데모나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들을 마음도 믿을 마음도 없다.


셰익스피어가 정말 사람 심리를 잘 다룬다고 느꼈던 부분은 이거다. 

데스데모나는 베니스의 귀족으로 고결하고 정숙하기로 이름난 처녀였다. 오셀로는 베니스를 위해 많은 공적을 세운 훌륭한 장군이지만,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라는 이유로 은근히(때로는 대놓고) 멸시를 당하는 처지다. 그럼에도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듣다가 그에게 사랑에 빠져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그와 몰래 결혼한다. 

바로 이 지점, 데스데모나가 아버지를 배신할 만큼 오셀로를 사랑했다는 것- 그것이 나중에는 데스데모나의 부정의 심증을 제공하고 마는데, 이는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시오가 결혼을 인정받고 전장으로 떠나는 오셀로에게 남기는 말에서 드러난다. 

 

브라반시오  이 애를 조심하게 무어, 눈여겨 보라고. 

               아버지를 속였으니 자네를 속일지도.       - 민음사판 <오셀로>, 53쪽


또한 데스데모나가 기꺼이 오셀로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이, 다시 또 부정의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전에 만난 남자(여자)들한테도 이랬니?" 

오셀로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보이지만, 백인들 사이에서 멸시받는 위치에 놓인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없을 리 없다. 그 자신도 데스데모나의 선택을 받은 것에 확신이 없지 않았을까. 이야고는 그 점을 정확히 파고든다. 

 

이야고  부인께서는 장군님과 결혼하려고 아버님을 속인 분 아닙니까? 

          장군님 얼굴을 무서워할 때가 

          장군님을 제일 좋아할 때가 아니었습니까? 

오셀로  그건 그러네.

이야고  그래서 말인데요, 

         그렇게 젊으신 분이 가면도 쓰지 않고 

         장군님 장인어른을 속이신 거잖아요. 

         장인어른께선 장군님이 마술을 쓴 걸로 아셨잖아요.        - 오디오북 <오셀로>, 3막 3장 


위 부분은 내가 들으면서 받아 적은 것인데, 오디오 제작을 하면서 말을 얼마나 매끄럽게 다듬었는지 알 수 있도록 민음사판 오셀로의 이 장면과 비교해 보았다.


이야고  그녀는 당신과 결혼해서 아버지를 속였고

          떨리고 무서운 듯한 당신의 표정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오셀로  그랬었지.

이야고  아 그럼요,

          너무 어린 여자가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아버지 두 눈을 새카맣게 속여서

          그는 그게 마술인 줄 알았다니까요.        - 민음사판 <오셀로>, 111, 112쪽



4대 비극 중 다른 세 작품을 들으면서- 특히 <햄릿>에서- 여성혐오를 피할 수 없구나 싶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야고가 대놓고 여성혐오를 하고, 이야고가 주장하는 "여자들은 음탕하여 쉽게 부정을 저지른다"는 인식 하에 오셀로가 쉽게 데스데모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였다. 무어인에 대한 인종혐오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으로 에밀리아라는 인물의 대사들은 셰익스피어가 나름대로 여성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에밀리아의 명대사를,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데스데모나  에밀리아, 말해봐. (...) 

              정말로 자기 남편을 감쪽같이 속이고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그런 여자가 정말로 있을까?

에밀리아    세상에는 온갖 여자가 다 있어요. 물론이죠. 

데스데모나  에밀리아는 이 세상을 다 준다면 그렇게 하겠어?

에밀리아    세상 전부 준다면, 생각해 봐야죠.

데스데모나  난, 난 절대로 하지 않아. 달님께 맹세해.

에밀리아    저도 달님이 보는 데서는 하지 않겠지만, 

              어두운 데서야 어때요? (...)

(...)

데스데모나  난 이 세상을 다 준대도 

               그런 나쁜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어. 

에밀리아     나쁜 짓이라고 해도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요? 

               그 대가로 세상을 얻는다면 세상은 마님 것이 되고 바로 마님의 세상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나중에 바로 고치면 돼죠. 

데스데모나   그런 여자가 세상에 존재할까?

에밀리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걸요. 

               그런 짓으로 생긴 자식들로 세상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이 있어요. 

               하지만 여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건 남편 때문이에요. 

               남편 노릇을 소홀히 하고 아내에게 줘야 할 돈을 다른 계집 손에 쥐어주고 

               터무니 없는 질투에 사로잡혀서 여자들을 가두고, 때리고, 생활비를 줄이니까. 

               여자들도 화가나서 그러는 거죠. 아무리 정숙한 아내라도 복수하고 싶을 거예요. 

               남편들도 알아야 해요. 아내들에게도 남자들처럼 감각과 감정이 있다는 걸요. 

               눈도 있고 코도 있듯이 단맛이나 신맛도 똑같이 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왜 남자들은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옮겨 다니죠? 재미로 그러나요? 정말 그러는 것 같아요. 

               남자들은 여색을 타고 났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남자들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닌가요? 

               그런데 여자도 남자들처럼 열정도 있고 욕망도 있고 장난삼아 재미를 볼 수도 있잖아요? 

               우리 여자들도 의지가 약할 수도 있고 색을 밝힐 수도 있잖아요. 

               남자들도 우리 여자를 소중히 여겨줘야 해요. 

               세상에 여자들이 저지르는 모든 나쁜 짓은 원래 남편들이 먼저 저지르고 가르쳐준 게 아니고 뭐예요?

- 오디오북 <오셀로>, 4막 3장



에밀리아 언니 짱 멋져.. 완전 현자 수준.


다만 마무리는 다소 허망했다. 일단 이야고가 그렇게 쉽게 본색을 드러내다니. 어떻게든 거짓말로 에밀리아의 말을 덮어버릴 능력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셀로도 불쌍하긴 한데, 데스데모나랑 에밀리아가 훨씬 불쌍하고, 자기 연민에 빠진 대사들은 좀... 끝까지 자기 변명을 하나 싶긴 했다. 


아무튼 무지무지 몰입되고 재미있으니 많이들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오디오북 많이 많이 제작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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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31 23: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께서 완전 강조하시니 11월 1일에 구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카드값 리셋 기념~!!)
저도 오셀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오디오북으로 꼭 다시 들어봐야 겠어요~!!

독서괭 2021-10-31 23:38   좋아요 6 | URL
헤헤 영업성공!!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닷~^^ 새파랑님의 감상평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미미 2021-10-31 23: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밀리아 너무 좋았어요! 특히 오셀로에게 욕퍼부을때ㅋㅋㅋㅋ김치 싸대기아닌 욕 싸대기 맞고 드뎌 괴로워하기 시작한 오셀로의 양심ㅋㅋㅋㅋ 곳곳에 웃음 지뢰가득한 작품!

독서괭 2021-11-02 00:56   좋아요 2 | URL
ㅋㅋㅋ욕싸대기 ㅋㅋㅋ 속시원하게 퍼부어주죠! 전 중간에 에밀리아가 “그 악당”이 이야고인 줄 모르고 바로 옆에 이야고 있는데 “그 악당”을 마구 욕할 때도 넘 웃겼어요 ㅋㅋ

mini74 2021-11-01 00: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이아고 너무 싫어하는 ㅎㅎ 그만큼 인물표현이 대단! 한 것 같아요.

독서괭 2021-11-02 00:57   좋아요 3 | URL
이야고 정말 너무 간악하죠! 가증스럽고 음모 꾸미는 데 너무나 부지런 ㅎㅎ

붕붕툐툐 2021-11-01 1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겠당~ 아직 안 들어서 기쁜 1인 요기요~ㅎㅎㅎㅎ

독서괭 2021-11-02 00:57   좋아요 2 | URL
ㅎㅎ기쁨을 남겨둔 툐툐님 부럽네용~^^ 정말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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