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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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난 딸. 루시가 입원한 병실에 갑자기 루시의 엄마는 나타난다. 살며시 딸의 발을 쥐고 어릴 적 부르던 애칭으로 그녀를 호명하며. 그렇게 과거가 루시 앞에 불쑥 찾아왔다. 그리움과 고통을 함께 쥐고서. 


루시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고 부모가 반기지 않는 남자(독일인)와 결혼했으며 오랫동안 고향을, 가족을 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는- 고향은, 가족은 -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나의 구조물"처럼 언제나 존재했다. "출신이랄 게 없다"고 소개되는 루시는 일리노이주 앰개시 출신으로서 "스타일이 없다"고 평가되는 차림새로 뉴욕에 살며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어린 시절의 빈곤함을 감춘 적 없지만 마치 감춘 것처럼(설명되지 않으므로) 지내는데, 그건 참으로 외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53쪽)


대학시절 루시의 룸메이트는 엄마를 유독 싫어했으면서도 엄마가 보내준 치즈를 버리지 못하고 두었다가 오랜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치즈를 치워 달라고 루시에게 부탁한다. 엄마란 그런 존재다. 당신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고 외쳐 놓고도 당신으로부터 도착한 사랑을 차마 내 손으로 버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존재. 


루시의 엄마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는 엄마. 지독한 가난(지독한 추위!), 주변의 멸시(쓰레기라는 말), 학대(트럭에 갇혀 있던 기억과 체벌). 그럼에도 이런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이게 다일까? 책을 끝까지 읽으면 그게 아님을 알게 된다. 엄마가 대화를 단절하고 눈을 감았을 때, 루시는 "오래전의 그 익숙하고 어두운 무엇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97쪽) 엄마는 그 시절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해, 루시가 겪어야만 했던 일들에 관해 눈을 감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엄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입원한 루시의 곁에 있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엄마라면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거니까"(80쪽) 라고 말한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 예기치 않게 - 찾아오기도 한다. 그 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 21쪽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시는 계속해서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내 기억은 그렇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는 등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자신의 기억에 기반해 재구성 된 것임을 강조한다. 엄마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의 기억은 루시가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 "나도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130쪽)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쓰는 이야기는 오로지 나의 것일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려 하거나"(세라 페인이 하지 말라고 한 지점)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지"(루시가 세라 페인의 글을 읽으며 느낀 지점) 않는다면. 쓰게 되는 이야기는 "오직 하나"이고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것"(169쪽)이다. 

결국 듬성듬성한 기억들을 그러모아 완성하게 되는 것은 '자기 서사'다. 자기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과거- 유년의 시절을 빈 구멍으로 남겨둘 수 없다. 엄마의 방문은 루시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꺼내보게 해주었고, "어둠에 대한 앎"을 그저 옷가게에 들어가 회피하지 않은 채 꺼내어 글로 쓸 수 있게 해준 게 아닐까. 그렇게 자기 서사를 기반으로 '냉혹해진' 그녀는 작가로 성장한다.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 일리노이 주 앰개시 -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5쪽)


이 소설은 계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 계급은 하나의 잣대일 뿐 자신의 우월성을 체감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저속한 심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옷차림을 평가하고 어떤 집에 살았는지 궁금해 하는 루시의 전연인(예술가), 도시 출신의 지방 출신에 대한 혐오감을 은연중 드러내 버린 이웃(제러미), 고양이를 보고 놀란 세라 페인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심리분석가, 세라 페인의 강연을 듣고 '무대에 능하다'며 은연중 깔보는 남자, 이웃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루시의 엄마 등, 이 책에는 그 저속한 심리를 드러내는 예가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루시는 이러한 저속함에서 자유로운가? 그녀는 가난한 부모와 형제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에이즈로 고통받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인디언(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1쪽)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138쪽) 


이 소설은 루시의 9주간의 입원생활을 먼 훗날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큰 줄기는 입원 생활 동안 엄마와 나눈 이야기이고, 중간 중간 과거의 기억과 퇴원 이후의 루시의 삶과 생각이 조금씩 담겨 있다. 그래서 루시의 성장소설로 느껴지기도 한다. 성장은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니까. 어릴 적부터 쭉, 부유한 백인 가족보다는 블랙 호크(인디언)에게,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수용소에 학살 당한 유대인에게 감정 이입을 했던 루시는, 마침내 참전으로 인한 PTSD를 겪었던 아버지를 수용하고(이해X, 수용O)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움켜잡고" 두번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녀의 선언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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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10-08 19: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때 먹먹해져서 아무것도 못 썼어요. 너무 가슴 아프고 그래서 좋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충격도 받고 그랬던 것 같아요. 독서괭님 감상평도 너무 좋습니다.

독서괭 2024-10-10 10:31   좋아요 1 | URL
너무 좋으면 리뷰를 못 쓰게 되기도 하더라고요~ 생각보다 분량이 적었는데, 그럼에도 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곱씹어볼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망고님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24-10-08 2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서친님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의 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네요.
저는 독서괭님의 이 페이퍼도 루시의 소설만큼 좋네요. 저는 윌리엄 미워하는 힘으로만 루시의 이야기를 쓸 수 있거든요. (먼 산)

독서괭 2024-10-10 10:32   좋아요 1 | URL
네, 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단발님은 아직 안 읽으셨다는 작품입니다 ㅋㅋ 어서 읽으시지용. 좋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머지 시리즈도 꾸준히 읽어보려고 해요!

페넬로페 2024-10-08 2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망고님처럼 이 책 읽고 먹먹했어요
근데 저는 루시의 부모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병원에서의 엄마의 행동도요.
정서의 차이인가 봅니다.
다시 재독하고 싶어졌어요^^

독서괭 2024-10-10 10:35   좋아요 1 | URL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이 책에서도 그러니까, 완전히 이해 못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ㅎㅎ 저도 어머니가 루시가 수술해야 할 것 같은 순간에 갑자기 간다고 하고, 어머니 입원했을 떄 찾아온 루시에게 제발 가달라고 하는 게 잘 이해는 안 됐어요. 어머니는 자기 이해를 뛰어넘은 영역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끼고 눈을 감는 사람이 아닐까 싶긴 한데..
재독하면 또 다른 게 보이는 그런 소설일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4-10-08 22: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마지막 문장 정말 멋지지 않나요? 자기 삶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것을 끌어안으면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는 루시가 눈앞에 딱 그려지는 느낌이었어요. 역시 저는 이 시리즈 중 첫번째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 제일 좋았다는게 괭님 글을 읽음으로서 다시 확신하게 되네요. ^^

독서괭 2024-10-10 10:36   좋아요 1 | URL
저 문장 소름~~ 그런데 제 이름 넣어서 읊어보니 좀 쑥스럽..더라고요 ㅋㅋ 바람돌이님의 루시 시리즈 원픽! 저도 시리즈 다 읽게 되면 뭐가 제일 좋았는지 꼽아보고 싶어요^^

다락방 2024-10-09 0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괭 님 리뷰로 이 책을 다시 만나니 새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엄청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독서괭 2024-10-10 10:3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재독 고고~ 저도 빨리 나머지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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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을 들은 느낌이다. 쓰게 될 이야기는 단 하나 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결국 기억의 조각모음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는 나의 것, 나만의 것이다. 결코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 이야기가 당신의 길을 냉혹하게 지지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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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0-05 16: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은 아직 안 읽었어요. 루시 시리즈 중에 이 책이 제일 좋다 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저의 최애는 <바닷가의 루시>입니다. 현재까지는요 : )

바람돌이 2024-10-06 21:45   좋아요 3 | URL
저요 저요! 루시 시리즈 중 저의 최애는 요거 내이름은 루시 바턴입니다. ㅎㅎ 아직은 상처입고 그 상처를 극복해가는 루시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

독서괭 2024-10-06 21:48   좋아요 2 | URL
오오~~ 앞으로 하나하나 깨 나갈 루시 시리즈 기대됩니다. 다음 책으로는 일단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찜해 두었습니다.(시리즈는 무조건 순서대로 가는 주의.. 근데 이게 두번째 권 맞겠죠?)

바람돌이 2024-10-06 23:28   좋아요 2 | URL
2번째 권이 맞긴 한데 시점이 좀 달라요. 루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단편집이에요. 전 이 단편집도 아주 좋아합니다. ㅎㅎ

독서괭 2024-10-07 06:06   좋아요 3 | URL
이야~~ 시점 전환 저 그런거 완전 좋아합니다😆
 
별똥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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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놔.. 뭔 소리야… ㅜㅜ
철학3부작 중 가장 철학적이었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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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18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평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9-19 09:45   좋아요 1 | URL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ㅋ

잠자냥 2024-09-19 09: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놔 그래도 차페크인데 2별이라니... 이별이다 독서괭!

독서괭 2024-09-19 09:52   좋아요 2 | URL
그래도 차페크라 고민했지만 3별주기엔 제가 넘 힘들었따… 잠자냥님 리뷰 쓴 거 있나 봤는데 없더만요!! 별똥별 좋아한다고 쓰긴 하셨지만..

잠자냥 2024-09-19 09:54   좋아요 2 | URL
나도 어려워서 안 썼...어요! 파하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독서괭 2024-09-19 09:55   좋아요 2 | URL
맞짜나!! 나만 어려운 거 아니자나!!! 아휴 다행이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9-19 09:58   좋아요 2 | URL
동병상냥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9-19 10:15   좋아요 1 | URL
아주 흐뭇한 풍경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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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마셔야만 하는, 주정하는 마음을 모른다. 술을 마셔야만 잊을 수 있는 무언가- 그 시커먼 고통이나 공허같은 것들- 을 알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안녕 주정뱅이>의 글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책에 알코올중독자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무관하게 느껴지는 삶만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필연같은 우연이, 호된 뒤통수가, 방심하지 말라고, 삶은 그리 예측 가능하지 않다고 경고하는 듯 하다. 


「봄밤」에 등장하는 영경은 진성 알코올중독자다. 아이를 빼앗긴 후 시작된 알코올중독은,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라고 느낀 수환을 만나고서도 치유되지 않는다. 류머티즘으로 요양원에 입원한 수환과 중증 알코올중독으로 뒤따라 입원한 영경, 12년 동안 그들이 사랑한 의미는 어디 있었을까. 사랑이 상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관념에서 본다면 그들의 사랑은 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환은 알코올중독을 치료해야 하는 영경을 요양원에 붙잡아두고 설득하기는커녕 그녀의 외출을 용인한다, 나가면 술을 진탕 마시고 더 좋지 않은 상태로 돌아 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사랑이 상대의 가장 밑바닥까지 받아들이고 상대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념에서 본다면, 결코 그들의 사랑을 함부로 평할 수 없겠다. 수환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병증은 나을 가망이 없고, 이미 병든 영경에게 망각의 선물이라도 주는 편이 낫겠다고.. 적어도 자신이 그걸 막을 권리는 없다고.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는 윤경호라는 인물을 그린 「이모」는 시조카인 '나'가 췌장암에 걸려 입원한 경호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후 '나'는 경호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평생을 어머니와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다가 쉰 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가족과 연을 끊고 5년을 자신만을 위해 산 경호. 자신의 등골을 빼 먹은 '등허리'와 자신이 모질게 대한 '무력한 손바닥' 사이를 오가던 그녀의 인생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녀는 세상과 스스로 거리를 둠으로써 들끓는 증오를 갈무리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그들은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데가 있는 이웃들이었다." 


「카메라」와 「실내화 한 켤레」는 독자의 뒤통수를 팡 치는 소설적 재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떤 비극이 일어나기까지 이어진 우연과 우연의 연결 고리, 그 어딘가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단지 내가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가능성 때문이다. 「카메라」의 문정은 결별 후 관주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이 없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문정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단지 관희로부터 우연히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 「실내화 한 켤레」에서 작가는 고등학교 동창인 세 친구의 14년만의 재회를 경쾌하게 풀어 나가는데, 결국 독자를 아연실색 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너무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곤란하여 생략하지만, 나는 선미가 혜련을 향하여 한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독한 원시답게 아주 가까이 있는 친구의 불행을 보지 못했던 혜련에게 던진 질 나쁜 벌이랄까. 


마지막에 실린「층」은 '주정뱅이'라는 표제로 묶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인데, 서로 끌렸던 두 사람이 오해와 어긋난 우연으로 헤어지는 과정을 그리는 가운데, 순간적인 선택이 일으키는 결과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초밥집을 운영하는 인태는 간밤에 손님이 두고 간 휴대폰을 발견한다. 그날 밤, 예연의 직장 동료는 회식 자리에서 어제 알던 사람이 죽은 걸 뒤늦게 알고 무덤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초밥집에 휴대폰을 두고 왔으니 3차로 거길 가자고 하지만 예연은 거절한다. 그렇게 인태와 예연의 재회가 이루어질 우연을 예연이 걷어찼지만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예연은 집에 돌아와 누군가 집에 몰래 드나든다는 확신에 몸을 떨면서, 과거 인태가 그녀에게 집에 누가 드나드는 것 같다며 만나 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그녀는 뭐라고 했나.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초추의 양광'을 인용하는 여자와 이를 듣고 '꼬추의 발광'을 연상하는 남자는 그렇게 영영 스쳐 지나간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는 거절과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라는 변명이 교차하며, 그들은 영영 결별의 이유도 알지 못할 것이다. 


「봄밤」「삼인행」「이모」까지 읽은 후 중단되어 한참 시간이 흘렀다. 다시 집어 들어 「카메라」를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이어 「역광」「실내화 한 켤레」「층」을 읽고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을 읽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봄밤」「삼인행」「이모」를 재독하니, 이 책은 처분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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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8-16 17: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 주정 안 하는데.....
근데 술꾼 책 사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8-16 18:13   좋아요 3 | URL
제목 때문 아니에요 ㅋㅋㅋ 지만지 택 좋아하시고, 이 작가 전작 재밌게 읽으셨다고 해서!!

공쟝쟝 2024-08-16 2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 이 책 정말 좋아해요. 이 독후감 읽으면서 기억 다 안나가지고 ㅋㅋㅋ 다시 꺼내봐야지. 소설 속 이모처럼 살고 싶다고 썼고 그리고 거의 그렇게 살고있네요.
이런 저는 과거 주정뱅이였고 찐 철저한 과거형입니다 ㅋㅋㅋㅋ 독서와 벗한 후로는 술 잘 안마십니다! 이렇개 뿌듯하다 내가.

독서괭 2024-08-16 22:53   좋아요 1 | URL
오 소설 별로 안 읽은 쟝쟝님이 좋아하는 책! 소설 속 이모처럼 산다는 건.. 마지막에 규칙적으로 도서관 가던 모습 말이겠죠??! 쟝쟝님은 친구들도 언니들도 고양이도 있으니까 훨씬 행복하게 살겠죠!
술 줄인 거 칭찬해요😍😍😍

망고 2024-08-16 2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집입니당 읽고 울었던 기억😭

독서괭 2024-08-16 22:53   좋아요 1 | URL
이 단편집 좋아하는 분들 많군요~ 저도 이번에 다시 읽으니 좋더라구요. 다른 소설집도 더 읽어야겠어요^^

단발머리 2024-08-17 12: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단편집 안 읽은이 저뿐인가 하노라.........
맨날 알라딘 이웃님들 서재 돌아다니며 책 줍는데 ㅋㅋㅋㅋㅋㅋㅋ 왜 이렇게 계속 나오나요. 파도파도 또 나오고.
그래도 야무지게 적어둡니다. ‘권여선‘ 짠짠!

건수하 2024-08-18 21:25   좋아요 3 | URL
저도 안 읽었습니다 :)

독서괭 2024-08-20 18:30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생각보다 읽으신 분이 많았지만 그대로 안 읽으신 분이 더 많겠죠? 특히 아주 좋아한다는 분들이 여럿 계신 거 보니 충분히 권할 만한 책인 듯 합니다^^ 단발님, 수하님도 한번!

자목련 2024-08-18 07: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단편집 좋아해요. 너무 좋아서 리뷰는 쓰지 못했다는 ㅋㅋㅋㅋ

독서괭 2024-08-20 18:30   좋아요 1 | URL
그 마음 알죠, 너무 좋으면 못 쓰게 되기도 하더라고요 ㅜㅜ 특히 단편집은 쓰기 어렵더라구요.
 
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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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 아기를 안은 채 소녀를 데리고 가는 고된 행군. 강렬한 이미지와 압축적인 표현들. 

이 얇은 책이 실린 두 편의 단편 중 첫 번째인 '숄'을 읽으며 계속 떠오른 건 <빌러비드> 였다. 그 때문에 자꾸만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로사가 흑인 이미지로 연상되었고... 아니야! 그거 아니야. 유대인, 유대인.. 하며 애써 이미지를 수정했지만, 결국 이 소설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빌러비드>에서 세서가 겪었던 가혹한 여정과 딸의 죽음은 <숄>에서 로사가 겪은 일과 유사하다. 비극적이고, 잔혹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편은 몇십 년 후, 홀로코스트가 끝나고 미국으로 망명한 로사와 스텔라(로사의 조카, 행군을 함께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사는 늙었고 플로리다의 무더위에 튀겨져 껍데기만 남은 듯한 상태로 일상을 이어간다. 뉴욕에 사는 스텔라가 보내주는 돈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내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 그녀가 뉴욕을 떠난 이유는 운영하던 골동품 가게를 스스로 때려 부쉈기 때문이다. 때려 부순 이유는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바로.. 

로사는 딸 마그다를 둘러쌌던 숄, 마그다의 목숨을 연명시켜 준 마법같은 숄을 등기로 보내 달라고, 스텔라에게 부탁한다. 숄이 있으면 마그다는 살아난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기, 결코 독일 병사에게 강간당했을 때 생겼을 리 없는 아기, 결코 수용소에서 죽었을 리 없는 아기... 로사는 마그다에게 편지를 쓴다. 뉴욕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눈부신 딸에게. 


펜을 잡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작고 뾰족한 막대기에 지나지 않은 그것이 상형문자의 웅덩이를 흘린다. 기적처럼 폴란드어를 말하는 펜. 혀에 채워졌던 자물쇠가 제거되었다. 그럴 때가 아니면 혀는 이와 입천장에 사슬로 묶여 있다. 살아 있는 언어에 푹 빠진다는 것. 

갑자기 이 청결함이, 이 능력이 샘솟는다, 하나의 역사를 만들고, 말하고, 설명하는 이 힘이 솟아오른다. 되찾고 유예하는 힘! 


거짓말하는 힘. 

마그다의 숄이 든 상자는 아직도 탁자 위에 있었다.   - 70,71쪽 



그런 로사 앞에 우연히 나타난 퍼스키라는 남자는 바르샤바 출신의 부유한 노인이다. 같은 바르샤바 출신이라며 반가워하는 그에게 로사는 "당신이 겪은 바르샤바는 내가 겪은 바르샤바와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 그는 일찌기 미국에 와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한 유대인과 지켜본 유대인이 같을 수 있겠는가? 

로사는 그녀의 삶을 도둑들에게 빼앗겼고, 생각 속에서 - 숄과 마그다 - 살아갈 뿐이다. 그 안에는 누구도 침투할 수 없다.


"아니, 아니에요. 사람은 가끔 혼자 있을 필요가 있죠."

"너무 많이 혼자 있다는 건, 너무 생각이 많다는 거요." 퍼스키가 말했다.

"삶이 없는 사람은," 로사가 대답했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데서 사는 거죠. 가진 게 생각뿐이라면, 생각 속에서 사는 거고요." 로사가 대꾸했다.

"댁의 삶이 없다고?"

"도둑들이 빼앗아갔어요."   - 45쪽



'숄'이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을 '홀로코스트', '나치' 등의 직접적 언급 없이 이미지적으로 강렬히 재현하였다면, '로사'는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 사이의 분열을 보여준다. '그때 그곳에 있었던 이'(로사,마그다)와 없었던 이(퍼스키), 이제는 다 잊고 미래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이(마그다)와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곱씹어야만 하는 이(로사), 이들은 더 이상 같은 폴란드인, 같은 유대인이라는 말로 한데 묶일 수 없다.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철망을 설치해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는 호텔에 분노하고, 호텔 지배인이 '그때 그곳에 없었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화를 쏟아내는 로사. 그녀는 언제까지 그 지옥에 갇혀 있어야 할까? 숄이 자아내는 마그다의 환상은 마치 약물이 주는 환각처럼 그녀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지만, 로사를 '인간'이 아닌 '생존자'라 칭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대학교수의 편지는 그녀를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반복된 패턴에서 로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며 작가는 끝을 낸다. 

강렬하기는 '숄'이었지만, 서로 다른 입장의 세 유대인을 보여준 '로사'는 더 흥미로웠다. 앞으로 숄을 볼 때면 이 작품 떠오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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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8-06 14: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참... 이런 책도 선물해주고... 괭님은 참 좋은 사람을 곁에 두셨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갑자기 다락방 빙의 ㅈㅈㄴ)

독서괭 2024-08-06 14:57   좋아요 0 | URL
누군지 참!! 독서괭은 복도 많지!! ㅋㅋㅋㅋㅋㅋㅋ
1회 퀴즈대회 선물은 아직 못 읽었는데 말입니다… 근데 다음 퀴즈대회 일정 안 나왔나요?

잠자냥 2024-08-06 15:03   좋아요 1 | URL
요즘 ㅈㅈㄴ 정신상태가 퀴즈 낼 상태가 아니고... 퀴즈 열라 풀 은곰탱이도 원하는 걸 다(?) 가져서(번호 땀 /만나서 술마심/ㅈㅈㄴ 회사 어딘지 앎) 문제 풀 의욕이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독서괭 2024-08-06 15:29   좋아요 2 | URL
으에엥 저랑 건수하님 망고님 등 퀴폐들은 어쩌라구~~ (데굴데굴)

건수하 2024-08-06 16:04   좋아요 1 | URL
은곰탱이는 모든걸 다 가졌군요 은곰탱이만 생각하는 ㅈㅈㄴ까지…

독서괭 2024-08-06 16:16   좋아요 1 | URL
헉 회사도 알려줬어요?? 진짜 다 줬네…

잠자냥 2024-08-06 16:28   좋아요 2 | URL
알려주긴… 대화 중에 나온 정보 취합해서 곰탱이가 알아맞혔습니다요. 그래서 그렇게 된 마당에… 제가 만든 책 줬습니다요.

독서괭 2024-08-06 17:47   좋아요 1 | URL
다 가진 은오님.. 퀴즈에 미련 없을 만 하네요.. 서재에도 안 오고 ㅜㅜ 엉엉 ㅜㅜ

다락방 2024-08-07 13:49   좋아요 1 | URL
대화 중에 나온 정보로 취합해서 알아냈다니, 퀴즈왕 은오 님 답네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대단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8-07 15:41   좋아요 0 | URL
대단해요.. 정보 공유는 안 해주겠죠? 흑흑

2024-08-07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07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07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07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