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주 후, 캐시는 내 심리상담실을 방문했다. 강간을 당하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맹비난이 쏟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캐시를 성폭행한 남자아이는 재판을 받아야 했기에 소속된 육상팀에서 출장정지 명령을 받았다. 그의 친구들은 캐시가 그 아이를 곤경에 빠뜨렸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다른 아이들은 그런 파티에 참석했으니 자업자득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한 술 더 떠 캐시가 그 아이를 유혹했다고 수근댔다. -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143쪽
1993년, 열다섯살이었던 캐시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간다. 파티가 진행될수록 점점 술에 취하고 섹스하는 아이들이 많아지자 캐시는 파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코트를 가지러 2층 침실로 향했다. 몰래 따라온 남자아이가 그녀를 강간했다.
이 이야기가 2015년에 샤넬 밀러에게 일어난 일과 얼마나 비슷한지, 소름이 끼친다. 샤넬 밀러는 성인이었고, 파티에 갔다가 인사불성 상태에서 성폭행(아마도 유사강간)을 당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지만, 그후 주변의 반응은 유사하다. 샤넬 밀러에게, 사람들은 유망한 운동 선수인 가해자 브록 터너의 앞날을 망쳤다며 비난한다.
샤넬 밀러는 사람들이 유독 성범죄에 있어서만 피해자의 행동을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나는 강간 사건에서 사람들이 왜 그 남자에게 맞서 싸우지 않았어요?라고 묻는 게 이상하다. 집에서 자다가 눈을 떴는데 강도가 물건을 훔치고 있는 경우에 사람들은 왜 그 남자에게 맞서 싸우지 않았어요? 왜 그 남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묻지 않는다. 이미 무언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는 남자가 왜 갑자기 이성을 신봉해야겠다고 결심하겠는가. 어째서 그 남자에게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남자가 그만둘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경우 난 의식이 없었는데도 어떻게 이런 질문이 쏟아질 수 있는가?
나를 긁어대는 주장은 또 있었다. 남자애들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소리. 마치 그 남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듯. 나는 대학에 가는 내 딸들에게 말했어요. 대형 트럭 앞을 지날 때는 차에 받힐 걸 예상해라. 트럭 앞으로 걸어 다니지 마라. 네가 남학생 사교클럽 파티에 가면 술과 마약에 취해서 강간당할 걸 예상해라. 남학생 사교클럽 파티는 가지 마라. 네가 남학생 사교클럽에 가서 폭행을 당한 거라고? 뭘 기대한 거야? (...) 남학생은 인간이다. 그들에겐 정신이 있고, 법이 있는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몸을 더듬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구조화된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인지 행위이다. - <디어 마이 네임> 86, 87쪽 * 진하게 표시된 부분은 원래 책의 음영을 그대로 반영한 것임
성범죄에 한해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남자에게는 이성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남자는 자제할 수 없다고, 그러니 네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고. 아니 이성과 합리성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해 온 긴 역사가 이때만은 홀랑 잊혀지는가? 이렇게 주장할 거면 스스로의 열등함을 인정하고 짐승 유사한 지위를 인정해야 모순이 없는 거 아닌가?
샤넬 밀러는 성폭행 사건을 겪기 바로 전해, 엘리엇 로저가 저지른 '산타바바라 총기난사 사건'을 겪는다.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친구들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 엘리엇이라는 인물이 남긴 유서인지 선언문인지를 보면 기가 찬다. 남탓의 끝판왕이랄까.
나는 엘리엇의 137쪽짜리 선언문의 시작 부분 일부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건 나 엘리엇 로저가 어떻게...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 때문에 내 손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잔혹함에는 서사적인 기승전결이 있었다. 마치 자신은 절대로 자기가 한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억지로 떠밀린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를 힘들게 만든 건, 그가 징벌의 날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건 여자들이었다.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외로움과 처벌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존재 상태를 견뎌야 했어. 그게 다 나한테 전혀 매력을 못 느낀 여자애들 때문이야. 그의 적개심은 자신에게는 마땅히 권리가 있다는 믿음과 자기연민 속에서 태어났다.
내게서 섹스를 박탈한 범죄를 저지른 모든 여자들을 처벌할 거야. 엘리엇의 세상에 있는 무언의 규칙에 따르면 여자들은 그와 섹스를 해야 했고,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 <디어 마이 네임> 148쪽 * 진하게 표시된 부분은 원래 책의 음영을 그대로 반영한 것임
야! 왜 내가 너랑 섹스를 해야하냐! 네가 매력 없는 게 내 탓이냐! XX*@#$%^&*!!XX (자체 심의 삭제)
누구나 엘리엇 로저를 제대로 미친놈이라고, 로저가 아니라 루저라고 생각하겠지만, 수없이 일어나는 이별살인, 스토킹 등의 저변에는 가해자의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네가 감히"라는 생각. 네가 감히 나를 거부해? 네가 감히 나를 우습게 봐?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 그리고 "네가 감히'라고 '감히'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여성이라는 존재를 아래로 보기 때문이다.
<토지>에도 아주 한심한 인물이 나온다. 자신의 불행을 여자탓으로 돌리는 인물, 윤이병이다. 윤이병은 금녀와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금녀는 주정뱅이 아버지에 의해 술집으로 팔려간다. 거기서 김두수에게 넘겨져 원치 않게 끌려다니던 금녀는, 도망쳐 윤이병에게 의탁한다. 그러나 찾아온 김두수에게 윤이병은 매수당하고 어찌저찌하여 결국 파국을 맞는데.. 이자는 모든 게 금녀 때문이라고, 너만 아니었어도! 하며 지랄을 한다. 안 그래도 못났던 인간이 가장 못나 보였던 순간.(이건 8권 내용은 아님. 6권인가..)
윤이병과 김두수를 생각하면서 문득 든 의문이 있다. 나는 악한 인간보다 약하고 멍청한(한심한) 인간을 더 미워하는가? 김두수는 악인이지만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금녀에게 집착하면서 "너만 나를 받아줬어도.."하는 남탓 모드를 잠깐 보이지만 자기도 그게 아닌 건 아는 것 같다. 윤이병은 김두수에 비하면 피라미, 환경에 따라 악인도 될 수 있고 그냥 무해한 자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다만 약해서 강자에게 무릎을 꿇는 그런 인간이다. 어쩌면 훨씬 평범한 인간. 그런데 왜 나는 김두수보다 윤이병이 더 싫을까? 아무리 윤이병이 한심해도 더 나쁜 놈은 김두수임이 명백한데?
<토지> 8권에서 김두수가 약해지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을 들으며 아, 내가 왜 윤이병보다 김두수가 덜 미운지 깨달았다. 그건 작가가 인물들에게 지닌 애정의 크기 탓이다. 그전부터도 느꼈지만 이 김두수라는 인물은 작가님이 상당히 애정을 가지고 만든 캐릭터라고, 엉엉 우는 그를 보며(들으며) 확신했다. 윤이병이라고 내게 연민을 느끼게 할 면모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작가가 보여주는 만큼 볼 수 있는 나는, 나쁜 놈이지만 성장환경부터 어머니에 대한 치유되지 않은 아픔을 지닌 복잡한 한 인물을 이모저모 보여주면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윤이병에 대해서는 애정이 별로 없으셨던 듯 ㅎㅎ
물론 김두수는 자기가 나쁘다는 걸 인식하고 있고, 윤이병은 못한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지가 나쁘다는 것조차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남탓을, 그것도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탓하는 인간은 혐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성범죄자들이 그렇다.
나쁜 놈들을 지칭할 때 '개새끼'라고 하는 말을 반대한다. (개한테 미안하니까)
나쁜 놈들을 지칭할 때 '미친놈'이라고 하는 말을 반대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나쁜 놈들을 지칭할 때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는 말도 반대하겠다. (벌레한테 미안하니까)
요즘 벌레 관찰을 즐기는 아이들을 위해 간만에 신간을 구매했다. 역시나 아주 좋아한다.
그림이 참 귀여운데, 실제 벌레보다 훨씬 귀여우니 징그러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는 애들 앞에서 티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는 중.
(하지만 '바퀴벌레는 ................ ' 이건 알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을 분들을 위해 ...처리 ㅋ )
이렇게 슬쩍 신간 소개를.
이제 피해자 탓하는 가해자는 그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