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http://dangbi.tistory.com/). 신년초의 독서나 독서계획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인데,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토콘드리아>와 <윤리적 노하우>에 대한 독후감이 돼 버렸다. 같이 생각해둔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와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물의 성향> 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몇 마디 적어야겠다.  

 

온라인 당비의생각(10. 01. 11) 다시 한 해의 책읽기를 시작하며 - 책읽기와 자비에 대하여

지난 연말에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던 책 중의 하나는 <권력, 섹스, 자살>이다. 제목만으로는 세간을 들썩이게 했던 고 장자연씨 자살사건을 바로 떠올리게 하지만, 아직 그 사건을 다룬 ‘책’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의 재수사 결과 전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가 불구속 기소되고 성상납 의혹을 받은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의 인물들은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한국사회에서 익숙한 ‘사법 불의’이다.  

<권력, 섹스, 자살>이란 ‘미래의 책’ 대신에 내가 읽은 건 ‘진화의 숨은 지배자’를 다룬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이 책의 원제가 ‘권력, 섹스, 자살(Power, Sex, Suicide)’이다. 내심 ‘올해의 책’의 하나로 꼽아두었지만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읽은 흉내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책장을 펼쳤다. 이런 경우 보통은 서론 정도를 읽어두는데, 그 정도라도 성과가 없진 않다.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지식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면 바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린 마굴리스의 ‘세포 공생설’이지만 그게 어느덧 ‘1970년대’ 이야기이다. 하지만, 최근 20여 년 사이 과학계에서는 미토콘드리아의 새로운 면들이 속속 밝혀졌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저자가 일러주는 것은 예정된 세포자살, ‘아포토시스(apoptosis)’이다. 모든 세포가 더 큰 이익, 즉 몸 전체를 위해 하는 자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이 아포토시스를 결정하는 것이 핵 유전자가 아니라 미토콘드리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이게 단순히 ‘과학적 발견’ 정도의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다. 세포들이 알아서 죽지 않는 것, 곧 아토포시스가 일어날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암의 근본원인이기에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의학적 발견’이기도 하다. 조금 인용해보자.  

“암에 걸린 세포는 한 생명체의 일부라는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진화의 초기단계에서 이런 속박은 분명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포가 죽음이라는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더 커다란 세포집단의 일원으로 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독립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아포토시스가 없었다면 세포들을 연결해 다세포 생물로 만들어주는 결속력은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포토시스는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은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세균 수준을 넘어 진화하는 일은 미토콘드리아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보자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세포집단의 일부로 예속되기보다는 자유로운 독립생활을 선택한 세포도 있었으리라. 다만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승자가 되지는 못한 것이리라. 즉, ‘가지 않은 길’이라기보다는 ‘가다 끊긴 길’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자유’에 대한 그리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암세포들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숙주인 유기체가 죽으면 결과적으로 암세포 자신 또한 죽음을 맞게 되므로 그의 ‘독립생활’도 자살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여, 공생을 위한 자살이냐 자유를 위한 자살이냐, 세포들의 두 갈래 길이다.     



두 갈래 길에 대한 명상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갈무리)에서도 빌미를 얻을 수 있다. 사회성 곤충들에 대한 연구가 1970년대에 많이 진행되었는데, 그중 네오포네라 아피칼리스라는 개미 집단에 관해서는 이런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가장 유능한 보모개미들만 모아서 새로운 작은 개미집단을 만들어놓았더니 보모개미들의 사회적 역할이 급격히 달라져서 양육하는 대신에 먹이를 구하는 일에 나서더라는 것. 원래의 개미집단에서는 반대로 낮은 등급의 보모개미들이 양육활동을 많이 하게 됐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단 전체 개미집단이 어떤 구성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 즉 개체의 정체성이 상대적 배치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이다. 한데, 문제는 이 개미사회는 전체를 조정하는 ‘중앙 통제적인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럼에도 전체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전체의 중앙에서 조정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바렐라는 이것을 ‘무아적 자아’ 혹은 ‘가상적 자아’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자아 없는 자아’이고, “간단한 구성 요소들의 활동으로부터 창발하는 정합적 전체 패턴이 마치 중심부에 있는 것 같지만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다.  

바렐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자아 없는 자아’가 대뇌의 뉴런 앙상블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자아” 또한 ‘중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자아가 가상적이고 비어있다는 ‘깨달음’은 동양적, 특히 불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낯설지 않다. 이 비어있음을 채우는 것이 곧 자비이다. 이때 자비란 무조건적이고 무자비한 자발적 연민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하면, “주체와 객체의 비이원적 드러남 속에서 자아의 비어있음의 실현을 체화하고 표현하는 행동”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말하면, 자아라는 환상의 횡단이 되겠다. 때문에 비어있음(공성)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무조건적인 자비라는 긍정적인 상태의 예비단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보모개미들이 자신의 상대적 배치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양육에 종사하기도 하고 먹이를 구하러 나서기도 하는 것은 윤리적 숙련의 높은 단계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이미 불성(佛性)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미와 인간은 진화의 여정에서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러한 불성과 자비를 통해서 만난다. 만날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는 어떤 형태의 지속되고 훈련된 수련 또는 주체의 변화를 위한 수련”에 전념해야 하고 “개인 스스로 발견하고 가상자아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키워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 해의 책읽기를 시작한다. 미토콘드리아와 개미를 머릿속에 넣고서 ‘자유냐 자비냐’를 오래 저울질해볼 참이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책읽기 또한 ‘숙련’의 문제라면 그것은 ‘자아실현’과는 무관하다는 사실. 고로 ‘나는 책을 읽는다’는 맞지 않다. 그냥 ‘책을 읽는다’. 자비로 세상이 가득할 때까지.  

10. 01.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