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 시인의 시집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 2011)과 <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 2011). 개인적으론 데뷔 시집 <단편들>(세계사, 1997)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나온 시집들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뿔, 2007) 이후의 시들을 두 권으로 나눠서 묶은 것이다. 인터뷰기사가 있길래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1. 06. 06) 천사와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 풍경

……저의 시적 경향이라, 글쎄요, ‘불멸의 좌파 같은 시를 썼다’고, 나중에라도 그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노래했던 그 친구 이름이 닉 케이브였네요

-‘무가당 담배 클럽’ 참 재미있는 이름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클럽인지요, 아니면 시적 상상 속의 이름인지요?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가당 담배 클럽’도 실제로 있습니다, 단순한 동인이 아니라 시인, 가수, 영화감독 등 다방면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전 방위적 모임입니다, 특이한 점은 체 게바라, 세르주 갱스부르처럼 이미 죽은 사람도 클럽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면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말 못합니다. (시 ‘닉 케이브, 천사가 노래한다’ 부분, 시집 <삶이라는 직업> 수록)  

인터뷰를 마친 다음, 그의 시집에서 이미 잘 정리된 인터뷰를 발견했다. ‘불멸의 좌파 같은 시’를 쓰고 싶은 사람, 닉 케이브가 천사였듯이 ‘시를 쓰는 자들 또한 전직 천사’였다고 주장하는 시인 박정대씨(46·사진)다. 그는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설정을 빌려와 두 신작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와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천사는 곡마단의 소녀를 사랑해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가 천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은 흑백, 인간이 된 이후의 세상은 천연색이다. 마찬가지로 전자의 시집은 천사의 시각, 후자의 시집은 인간의 시각으로 씌어졌다. 모든 가능성에는 왜 거리가 있는지, 삶이 어떻게 직업이 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된다.

“두 군데 출판사에서 거의 동시에 시집 출간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미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있었는데 이것을 두 주제로 나누고, 새 원고를 추가했습니다.”

천사의 시각? 모든 게 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경쾌하고 몽상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각은? 생생하지만 고통스럽다. 그런데 천사는 이미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신의 구원을 바랄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전직 천사였던 진실한 인간들에게 고독은 숙명이다. 

시인이 볼 때 고독한 인간에게 구원은 같은 인간으로부터 주어진다. 이를테면 ‘천사가 지나간다’(<삶이라는 직업> 수록)란 시에 열거된 이름들, 가스통 바슐라르,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크, 밥 딜런, 백석,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파스칼 키냐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이다. 추상의 하느님 대신 천사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래서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살 만한 곳이라는 긍정에 이른다.

박씨의 시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며 이국적이고 불온한 동시에 선하다. 심야 카페, 담배 연기, 맥주, 영화 속 한 장면, 블루스 음악, 유럽의 작은 도시로 독자를 데려간다. 도시와 대중문화의 매력으로 제도와 의무에 찌든 현대인을 무장해제시켜 낭만과 초월의 영역으로 이끈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센·티·멘·털. “센티멘털과 보편, 센티멘털과 형이상학, 센티멘털과 연대와 운동과 전복을 연결시키는 것이 박정대의 본질”이라고 그의 동료인 성기완 시인은 해설에서 썼다. 

이런 시를 쓰는 그는 누구일까. 올해 20년차인 고등학교 국어교사, 퇴근 이후에는 철저히 시인이다. 일찍 잠들었다가 밤 11시쯤 다시 일어나서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즐기고 시를 쓴다. 첫 시집 <단편들>(1997)을 시작으로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키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등 이미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이며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 이런 비밀결사는 그에게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가 앞으로 쓰고 싶은 시는 어떤 것일까. 시집 <삶이라는 직업>의 마지막에 실린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 라이터 관리술’처럼 아주 짧고 쉬운 시다.(한윤정기자) 

11. 06. 12. 

 

P.S. 언젠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는데, 오래전에 내가 좋아했던 시는 <단편들>에 실렸던 '물질적 황홀' 연작이었다. 이런 시.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
세상의 물빛 머금은 모든 것들은 경건한 자세로
꽃을 피울 태세였지만 꽃의 어깨를 건드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비가 내려 습기찬 들판이거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팔짱을 낀 채 들꽃이 죽고 들꽃의 視線이 죽고
자막처럼 빠르게, 자동차들은 거리를, 물방울들을
튕기며 사라져갔다
일주일간의 죽음 끝에 햇살은 輓章처럼 나부낀다 (박정대, '물질적 황홀 6'에서)

음, 이제 또 월요일이군. 다시 죽어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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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3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중국인이 본 서구사상과 한계

얼마전부터 중국 근대 지식인들에 관한 책과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모으고 있는데, 계기가 된 건 옌푸(엄복)의 <천연론>(소명출판, 2008)과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성균관대출판부, 2009)를 지난달에 뒤늦게 발견한 때문이다. <천연론>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지만지, 2009)의 중국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그걸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건 '중역'인데, 그럼에도 이 중역이 의미가 있는 건은 옌푸의 번역이 갖는 역사적 의의 때문이다(때문에 '고전 번역'에 해당한다).  

 

구한말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량치차오(양계초)의 강권론적 자유론을 다룬 박노자의 논문에서 그 의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구적인 담론에 포획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에 1896년부터 또 하나의 이론적인 조건이 가미됐다. 1896년부터 그(량치차오)가 중국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히는 옌푸(1858-1921)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이다. 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진화와 도덕>(중국 서명 <천연론>, 1898년 발간)의 번역문 초고를 이미 1896년에 읽은 량치차오는 그때부터 옌푸식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그가 현실론적으로 체득한 서구 중심주의적 담론을 이론화.이념화하기 시작했다.(<우승열패의 신화>, 132쪽) 

 

박노자는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긴 했지만 옌푸의 사상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에 끼친 영향에 있어서는 량치차오가 더 앞서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량치차오의 경우는 <이태리 건국 삼걸전>(지식의풍경, 2001)을 1903년에 저술한 바 있고 이것은 다시 신채호에 의해 1907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되었다. 옌푸보다는 더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엄복'이란 이름으로만 어설프게 기억하던 옌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서양의 근대사상을 중국어로 옮긴 '최대 번역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1877년부터 2년 반동안 영국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옌푸는 부강한 영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청일전쟁에서도 패배한 중국의 현실에 낙망한다. 그는 중국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의 사회사상가 허버트 스펜서의 자유사상과 사회진화론에서 그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스펜서주의자이긴 했지만 저작이 너무 방대해(우리는 아직도 번역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 먼저 번역한 것이 헉슬리의 <천연론>이었다(그는 스펜서의 입장에서 헉슬리의 진화론을 비판한다). 이 번역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연이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1873), 밀의 <자유론>(1859), 에드워드 젠크스의 <정치학사>(1900),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 밀의 <논리학 체계>(1843) 등을 모두 번역한다. <천연론>을 옮긴 양일모 교수의 지적대로 "혼자서 번역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번역이었다."  

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업에 나선 것이고, 그것이 끼친 영향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간략하게 참조가 되는 건 조경란의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삼인, 2003)이다. '중국에서 사회 진화론의 수용 양상'이란 논문이 포함돼 있어서인데, 이 글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간추린 것이다(이 학위논문은 <중국근대와 사회진화론>(문학과지성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언급돼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은 중국에 체계적으로 수용된 최초의 서양사상이며, 옌푸와 량치차오가 사회진화론을 소개하고 대중화에 힘쓴 사상가였다면 장빙린과 루쉰은 사회진화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애쓴 인물들이었다(조선의 경우엔 유길준과 윤치호가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며, 만해 한용운이 이를 극복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고할 수 있는 책이 '옌푸와 서양'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벤저민 슈워츠의 <부와 권력을 찾아서>(한길사, 2006)이다. <천연론>의 역자 서문에는 역자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미국의 중국 연구를 대표했던 하버드대학의 고 슈워츠 교수의 위어난 엄복 연구를 배워가면서, 동양의 고전으로만 장식된 동양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바로 그 '엄복 연구'가 바로 <부와 권력을 찾아서(In search of Wealth and Power)>(하버드대, 1964)이다(알라딘에서는 1983년에 나온 재판본을 구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선 출간시에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었지만 책을 구하지 않은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먼댓글로 링크해놓았다). 다행히 아직 절판되진 않은 상태여서 바로 구하긴 했는데, 번역이 유려하진 않다. 물론 이런 책 자체가 번역소개된 점은 일단 고무적이면서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루이스 하르츠 전 하버드대 교수가 붙인 서문의 제목이 '서양과 중국을 향한 새로운 시선'이 옌푸 사상이 갖는 의의를 요약하고 있는데, 첫문단은 이렇게 나간다.  

재능 있는 학자라면 자신이 연구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모국 문화와 비교되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 나라 사상의 표상적인 면들을 밝힐 수 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자기발견의 경이감 때문이다.(35쪽)

원문은 이렇다. 

It is the genius of the foreign critic to bring to the surface aspects of thought implicit in the life of the nation he stduies but explicit for him because of the contrasts supplied by his own culture. It is a shock of self-discovery which makes Halevy interesting to the English, Tocqueville to the Americans

이방인이라서 외국의 비평가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사상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고 할레비와 토크빌이 그 사례라는 것. 그런데, 번역에서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 관계가 뒤바뀌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끄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자기-발견의 경이(충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레비'란 이름이 생소해 찾아보니 프랑스 역사가 엘리 알레비(Elie Halevy, 1870-1937)이다. 백과사전엔 "19세기 영국 역사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19세기 영국인의 역사>(6권, 1913~47)의 저자이다. 이 대작은 1815년 이후 영국의 정치·경제·종교 발전을 추적한 것이다."라고 소개된다. 토크빌은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인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인 옌푸도 서양인들에게 그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동시대의 사례로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가졌던 의미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슈워츠 교수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 저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서양사상을 바라본 중국인 엄복이다. 그는 세기의 전환기에 유럽 사상가들의 저술을 중국어로 옮긴 인물이다.

옌푸의 번역 작업이 왜 서양인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그가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같은 당대 사상가들의 자기 이해를 제쳐놓고 '집단적 힘(collective energy)'이란 주제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서구의 비평가들로선 한번도 주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자기-이해'에 해당한다.   

아직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위치에 있었던 엄복은 당시 유럽 사상가들이 말한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등은 차치한 채, 근대세계로 접어드는 유럽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에너지를 다룬 그들의 저작에 매료되었다.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러한 주제를 표헌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개념들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물론 'energy'의 번역이긴 한데, '에너지에 관심을 갖다'는 말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들린다. '힘'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는 "그 주제에 관심이 없었는데"로 교정돼야 한다. 여하튼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 하버드 학자들이 본 옌푸의 의의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에 따르면, 지금에 와서는 옌푸의 시각이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으며 서양의 자기 이해에 포함될 것이다. 유감스러운 건 이런 내용을 말하는 6행이 번역본에서 누락됐다는 점. 아래가 빠진 대목이다. 

But the West has drifted into a new position now, where its involvement with nations overtly experiencing the issue of 'modern history' cannot fail to inspire it to review that issue in its own intellectual past. It is likely that the perspective of Yen Fu will, in significant part, become in the end our own. 

<부와 권력을 찾아서>는 이제 손에 들었기 때문에 언제 완독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책들, 동아시아와 미국에서의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이 더 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몇자 적었다.  

11. 06. 12. 

 

P.S. 박노자의 <우승열패의 신화>는 영어판으로도 출간됐다. 한국어판의 부제인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가 제목이다(애초에 <우승열패의 신화>에 실린 글의 절반 이상이 영어 논문을 번역한 것이었다).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은 <유럽과 미국 사상에서 사회진화론>과 <사회진화론과 미국사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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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6-1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 씨가 방송강연에서 학위논문 스승이었던 슈워츠 씨에 대해 매우 존경심을 지니고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슈워츠 씨의 또다른 저서<중국혁명과 모택동의 대두>(국내번역본의 제목은 중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도 첫장에 중국인들의 서양사상 수용의 역사를 담았는데 엄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죠.

로쟈 2011-06-14 09:34   좋아요 0 | URL
<중국혁명과 모택동의 대두>도 번역돼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교재에 <~하다>가 아니라 <~하게 하다>로 외워야 하는 단어라면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interest,surprise이 들어있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로쟈 2011-06-14 09:35   좋아요 0 | URL
단순한 착오라도 뜻이 반대가 되니 난처한 경우죠...

파고세운닥나무 2011-06-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국에서 옌푸와 동시대를 살았던 번역가 린슈(임서)를 공부할 생각입니다. 린슈는 서양의 문학작품을 번역했는데,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던 번역가였죠.
아무래도 비교문학쪽이다보니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옌푸도 함께 공부하면 좋을듯 합니다.
물론 옌푸를 걸치고 넘어가면 해야할 공부가 꽤 많아지겠죠^^;

로쟈 2011-06-15 20:41   좋아요 0 | URL
유학을 나가시나 보군요. 좋은 공부 많이하고 돌아오시길.^^

파고세운닥나무 2011-06-16 22:00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격려 고맙습니다^^
 

육아에 별로 관심이 없기에 읽어본 육아책도 따로 없지만,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다룬 진 리들로프의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양철북, 2011)란 책은 눈길을 끈다.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허다한 인물들이 '잘못된 육아법'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서구 합리주의 육아법'에 더 익숙한 우리로서도 한번쯤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한다. 저자의 '애착육아'론('캥거루 육아법'이라고도 부름직하다)은 개인적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것이어서 반갑다(물론 실천은 별개였다)...

경향신문(11. 06. 04) 인간의 본성 거스른 서구식 육아법

진 리들로프는 192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올해 3월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소살리토의 선상가옥에서 세상을 떴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25세 때 유럽 여행에 나섰다가 완전히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었다. 남미 밀림으로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간다는 두 남자를 만난 뒤 즉석에서 그들을 따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히 베네수엘라 카우라 강 상류에서 석기시대를 유지하며 사는 예콰나족은 리들로프의 삶과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975년 처음 출간된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원제 The Continuum concept)는 예콰나족의 육아법을 통해 본 현대인의 잘못된 육아법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기술한 책이다. 이후 이 책은 ‘서구 합리주의에 기초한 육아법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며 꾸준히 읽히고 있다고 한다. 출판사는 “16년 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서 제기한 문제를 육아의 차원에서 먼저 제기한 책”이라고 소개한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연속성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이는 ‘종을 그 종으로 지속시키는 성질’이다. 진화의 산물인 인간은 환경 변화에 맞게 스스로를 바꿔왔으므로, 현재 인간을 이루는 성질은 ‘필연’이며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쓸모없이 강해진 이성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잘 아는 우리의 타고난 감각”을 크게 훼손했다. 예를 들어 아기를 어떻게 기를지 결정하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님에도, 엄마들은 낯모르지만 권위있는 남성이 쓴 육아책을 보면서 잘못된 육아법을 익힌다. 

Yequana Mother with baby in sling.

예콰나족 엄마는 아기가 태어나서 기어다니기 전까지 하루 종일 안고 다닌다. 아기에게 특별한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고, 그 상태로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수다를 떤다. 아기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젖을 빤다.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기는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엄마는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콰나족 아기들은 그렇게 ‘자유방임’되지만, 다치거나 사고를 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리들로프는 전한다. 이는 어려서부터 품에서 떨어져 재우며, 정해진 시간에 젖을 먹는 습관을 들이고, 가지 말아야 할 곳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해두는 서양 엄마들의 육아법과 크게 다르다.

그래서 서양 엄마와 아기들이 더 행복한가. 서양 엄마들은 하루 종일 아기에게 신경을 쓰느라 걱정과 짜증이 극에 달한다. ‘(엄마)품의 박탈’을 경험한 아기들은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독립심이 부족해진다.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이야기하던 리들로프는 책 종반부에 접어들면서 잘못된 육아법에서 서구 사회의 온갖 병리 현상이 유발됐다고까지 말한다. 엄마 품을 빼앗긴 경험에 사로잡힌 성인들은 새 옷, 새 자동차, 승진 등을 끝없이 갈망한다. 병적인 자아도취에 빠지는 배우, 여러 개의 학위를 수집하는 학자, 끝없이 모험을 떠나는 모험가에게서도 엄마품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을 원인으로 찾는다. 



리들로프는 ‘품의 박탈’ 경험은 아동기와 성인기에 들어와서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특별한 실험 결과를 소개한다. 좁은 곳에 갇혀 있느라 기어다니려는 욕구를 실현하지 못한 어떤 성인들은 언어 능력을 완전히 개발하지 못했는데, 몇 개월에 걸쳐 하루 한 시간씩 아기처럼 기어다니게 했더니 말더듬을 치유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의 진정한 욕구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지성’을 가진 어떤 독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다.(백승찬기자) 

11. 06. 11. 

 

P.S. 머리가 좀 큰 아이들을 위한 교육법에 대해선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민음사, 2011)도 참고할 만하다. 아이들을 엄격하게 닦달하는 교육법이라면 우리에게도 친숙한데 다만 중국계 예일대 교수가 전하는 '성공 노하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성공'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서. 달라이 라마가 서문을 쓰고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추천사를 쓴 <세상은 당신의 아이를 원한다>(에이지21, 2011)는 세계 최대의 청소년 자원봉사단체 '프리 더 칠드런(Free the Children)' 운동을 이끌고 있는 젊은이들이 엮은 책이다. '자비심'과 '용기', 그리고 '공동체의식'을 가진 아이들로 키우자란 제안을 담고 있다. 거기에 한가지 더 보태자면 '전쟁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력도 키워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평화만들기 101>(동녘, 2011)이 청소년도 읽을 만한 가이드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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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2011-06-11 20:54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에이미 추아 교수는 "자녀가 시인,코미디언,록음악가보다 의사,과학자,변호사가 되길 바란다"고 했던데 그의 교육법에 지나치게 이목이 집중된다는 생각입니다. 또 이민 2세에 예일대 로스쿨 교수라면 그가 중국계라고 해서 그의 교육법이 반드시 중국엄마식이며 서구엄마식과 대비되는 성공적인 교육법인지도 좀 생각해볼 문제일듯 싶네요...

로쟈 2011-06-11 21:02   좋아요 0 | URL
교육관에서는 '한국계'라고 해도 무방할 듯해요. 그래서 '거울'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雨香 2011-06-13 13:02   좋아요 0 | URL
와잎에게 이야기했다가,,"애나 좀 볼 생각이나 하지"라는 핀잔 들을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백일도 안 된 둘째가 엄마와 붙어 있어서 첫째를 책임져야 하는 주말이 두려운 것이 바로 현대의 삶의 방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랫동안 서가에 꽂혀있기만 한 '오래된 미래'를 이제는 손에 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와 더불어 여름 쯤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오래된 미래'부터 찾아내야 겠습니다. 어디에 있을라나..)

로쟈 2011-06-14 09:50   좋아요 0 | URL
잃어버린 건 육아뿐만이 아니니까요...
 
"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오늘자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대한 '해럴드 블룸의 읽기'를 바탕으로 적은 글이다. 번역본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고려대출판부),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을 참조했다. 참고로 국내에 소개된 체호프 단편집은 이 작품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한겨레(11. 06. 11) '중년의 불륜’ 그린 체호프 소설, 실은 자기 이야기?

인생은 아름다운가? 체호프적 자세라면 거의 언제나 아름다울 법하다. “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아내가 배신한 것이 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인생은 아름다운 것>)라는 게 이 러시아의 유머작가가 건네는 충고다.

그런 사고의 전환이 잘 안된다면 안톤 체호프의 가장 유명한 단편의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주인공을 따라 바닷가 벤치에 앉아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들을 ‘저급한 인종’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여자들이 없으면 이틀도 살지 못하는 중년의 바람둥이 구로프는 휴양지 얄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를 만나 한번 더 수작을 걸고 잠시 연인이 된다. 안나와 함께 바닷가 벤치를 찾은 그는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반복되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 완전한 무관심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한마디로 유부남 은행원과 젊은 유부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휴양지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에 안나는 눈물을 지으며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구로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구로프는 여느 여인들처럼 안나도 잊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추억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그는 같이 카드놀이를 했던 관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얄타에서 얼마나 매혹적인 여자와 사귀었는지 아신다면 깜짝 놀랄 겁니다!” 하지만 흘려들은 상대방의 대꾸는 이랬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지난번의 그 철갑상어는 맛이 좀 갔어요!” 흔하게 주고받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구로프를 화나게 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야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은행일도 지겨워졌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안나가 사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가고 오페라극장에서 그녀와 재회한다.

안나가 가끔씩 모스크바에 오는 걸로 두 사람의 밀회는 다시 이어지지만, 매번 눈물짓는 안나를 보면서 구로프는 자신이 처한 딜레마를 생각한다. 맙소사,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진정한 사랑에 빠지다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좀더 기다려보면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땐 분명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사실도 두 사람에겐 분명했다. 



체호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줄거리만 보자면 흔하디흔한 불륜담이고, 특별할 건 하나도 없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저명한 비평가 해럴드 블룸에 따르면 “그는 바람둥이 중 한 사람일 뿐이고, 그녀는 눈물짓는 여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독자는 이 두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두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리키의 평에 따르면, 체호프는 “따분한 일상의 희미한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낼 수 있는 작가”였다. 그런 따분한 일상 속에 잠겨 있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은 셰익스피어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체호프의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블룸은 말한다. 더불어 교묘하게 바꿔놓긴 했지만 구로프란 인물이 체호프 자신의 패러디라는 의견도 피력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개를 데니고 다니는 부인>은 건강이 악화되던 체호프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사랑에 빠진 시기에 쓴 작품이었다. 그러니 체호프에게도 인생은 아름다웠다. 다만 체호프식으로. 

11. 06. 11.   

P.S. 기사의 제목이 '중년의 불륜’ 그린 체호프 소설, 실은 자기 이야기?'라고 나갔는데, 노파심에서 적자면 비록 '자기 이야기'라 하더라도 '중년의 불륜'은 체호프와 무관하다(교묘하게 바꿔놓았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갈매기> 공연을 계기로 그가 크니페르를 만난 것은 1898년이며 미혼이었던 두 사람은 1901년에 결혼한다. 그리고 1904년에 체호프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체호프는 작품에 작가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는 걸 극도로 꺼렸지만, 블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흔적을 이렇게 읽어낸다.  

사랑에 빠진 체호프는 스스로의 모습을 <갈매기>의 트리고린에 빗대어 풍자했고, 구로프는 그보다 더 뒤틀린 자신에 대한 풍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구로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안나가 눈물을 그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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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몇종 소개하면서 주요 저작 가운데 빠트린 책이 있는데,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2>(나남, 1996)이 그것이다. 책은 구입했지만 아직 페이지는 넘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보다 온전한 그림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기에.

 

하지만 그보다 먼저 구입한 책은 최근에 나온 <역사와 지식과 사회>(나남, 2011)이다. '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가 부제. 한국전쟁 연구를 갈무리하면서 이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 온축을 그대로 보여준다. 책은 오늘 받았는데, 책장을 넘기기 전에 먼저 인터뷰기사를 찾아서 옮겨놓는다. 

한겨레(11. 05. 08) 한국전쟁 연구, 지성사 되다

한국전쟁은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줬던 모든 사건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초래한 피해의 규모를 넘어, 두 한국이 아직도 겪고 있는 분단과 대결이라는 현실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중적으로 연구가 이뤄졌어야 하는 분야지만, 오히려 체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념에 휘둘렸던 역사가 있었다. 



한국전쟁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박명림(사진) 연세대 교수가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의 흐름, 곧 한국전쟁 학지사(學知史)를 정리한 책을 펴낸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나남 펴냄)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연구 경향의 흐름만 나열하지 않고 학문과 사회가 어떤 관계에 놓여왔는지 또한 앞으로 어떤 관계를 추구해야 하는지 등을 탐구한 책이다.

박 교수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시기는 주로 1980년 ‘광주항쟁’ 때부터 최근까지 30년이다. 이전 한국전쟁 연구는 주로 무비판적 냉전반공주의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고, 광주항쟁을 겪은 80년대에야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 폭발한 현대사 연구에 대한 관심의 밑바탕에는 민족과 민중을 내세운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다만 민족해방이냐 민중민주냐 등 노선마다 필요에 따라 ‘꿰어맞추기’식으로 역사를 풀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박 교수는 “80년대 국내 연구에서 가장 뒤처진 부분은 역시 관심의 제고와 시각 전환을 넘는 사실의 발굴과 정리, 이론과 방법의 영역이었다”고 말한다. 급진주의적 시각으로 이뤄진 연구들이 나타났지만, 과거 반공주의를 대체할 정도로 객관적 평가를 받은 단독연구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연구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커밍스는 미국 비밀자료와 북한 노획문서 등 폭넓은 자료 발굴로 연구 주제와 시기, 영역을 대폭 확장했고, 미국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통해 기존의 친미-반공주의적 연구 접근법에서 탈피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다. 학제적·융합적 연구의 시작을 열기도 했다.

급진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진 커밍스의 연구는 한국전쟁 연구에 질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지만 한계 또한 존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한국 사회의 내적 모순에서 찾고 한국전쟁에 대해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의 합의된 전략을 간과했다거나, 미국의 개입에 대한 강한 비판을 앞세운 나머지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 지점들을 놓치는 모습도 보였다.

그 뒤 현실사회주의 붕괴라는 또 한 차례의 전환을 통과하며, 한국전쟁 연구는 이념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박 교수의 풀이다. 인물과 마을 연구 등 세세한 차원에까지 연구가 세밀화됐고, 전통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는 낡은 틀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다만 박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가 보편의 광장으로 나아가려면, 철학적이며 해석적인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은 평화와 인권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의 문제로 이어져야 하며, 이념적 굴레가 벗겨지는 최근에야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서 한국전쟁 연구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한 일간지는 이 책의 출간에 대해 “박명림 교수가 친북에 빌미를 제공했던 브루스 커밍스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며, 커밍스 연구의 한계를 지적한 부분을 부각시켜 보도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아직도 학문을 이념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책머리에서 박 교수는 “언론이 주도하는, 사실보다 주장을 우선하고 진실보다 이념을 우선하는 현상은 이제 병리적 수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최원형 기자) 

11. 06. 09.    

P.S. 말미에 언급된 '한 일간지'는 중앙일보이다. 아예 '박명림 VS 커밍스'의 구도로 프레임을 짰다. 인터뷰기사에서 한국전쟁을 표나게 '6.25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선 링크해놓은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를 참고하시길.  

중앙일보(11. 06. 03) “누가 전쟁 시작했는지 묻지 말라니…브루스 커밍스의 6·25, 북한에 면죄부” 

6.25전쟁 전문가 박명림(48) 연세대 교수가 브루스 커밍스(68)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커밍스 교수의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박 교수가 오는 8일 내놓을 예정인 『역사와 지식과 사회-한국전쟁 이해와 한국사회』(나남·작은 사진)에서다. 박 교수는 신간에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지금까지 30년간 6·25 연구의 흐름을 두루 살펴봤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은 브루스 커밍스. 책의 한 장(章)을 ‘커밍스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는 데 할애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 미친 커밍스의 영향이 막대함을 반영한다. 

커밍스의 영향이 학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이념 분쟁의 뿌리가 그와 연관된다. 박 교수에 따르면 “커밍스는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하는 물음을 제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는데, 이 한마디가 한국전쟁과 북한 이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특히 80년대 사회운동과 급진 학문, 이념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정말 컸다. 친북주의와 반미 주사파는 이 한마디를 금과옥조처럼 삼았다”고 지적했다. 80년대 한때 커밍스의 영향을 받았던 박 교수는 “이제 커밍스 연구의 시대적 한계를 분명하게 할 때”라고 말했다. 책 출간에 앞서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커밍스의 무엇이 문제인가.

 “민족·민중이라는 두 개의 기준에 초점을 두고 북한에 대해선 온정적이고 남한에 대해선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역사 서술의 객관성·균형성이 흐트러졌다. 전쟁 당시 남한과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비판하면서 북한의 학살은 간략하게 다루는 불공정성도 보였다.”

 -박 교수도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고 있는데.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의 문제다. 예컨대 6·25전쟁이 남침이라는 사실은 이제 명백히 밝혀졌다. 남침을 지적한다 해서 진보가 보수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커밍스의 책을 보면 6·25전쟁과 관련, 남침과 북침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일제시기에서부터 시작된 계급갈등이 해방 이후 더욱 증폭된 일종의 ‘내전(內戰)’으로 봤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한국전쟁을 미국의 남북전쟁과 같은 내전으로 볼 수 없다. 한국전쟁의 핵심 기원인 한반도 분단은 내부 사회모순이나 계급갈등과 상관없는 국제요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며 “선제공격을 감행한 북한에 면죄부를 주고, 북한의 독재와 폭력, 반인권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또 “더욱 큰 문제는 소련의 깊숙한 개입이 증명된 이후에도 자신의 기본 가설을 회의하거나 수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새로 발굴된 역사적 자료와 비교해 수정하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했다.

 -80년대 커밍스의 영향을 받았고, 『해방전후사 인식』 필자로도 참여하지 않았나.

 “80년대 커밍스의 연구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학의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커밍스 책이 나온 후 국내외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 북한의 파탄, 사회주의의 붕괴 등이다. 커밍스 책에는 이런 변화가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90년대 들어 옛 소련, 중국, 동구권의 새로운 문서자료가 발굴, 공개됐다. 한국전쟁이 남침이었음이 밝혀졌다. 북한의 주장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커밍스의 책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기 전의 연구다.”

 -6·25전쟁과 북한을 분석할 때 중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자유·인권·민주주의·평등·정의·개방 등 인간 사회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조명해야 한다. 자주·민족·통일 같은 특수과제도 중요하지만 보편적 가치보다 위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 교수는 커밍스의 성과를 일정 부분 인정했다. “일제시대 사회변동, 농민의 존재조건과 인식의 문제, 지방인민위원회, 게릴라 투쟁, 토지문제, 미국의 한국정책에서의 관료 갈등 문제 등은 커밍스 이전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6·25에 대한 최근 연구 경향은.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기원 논쟁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한국전쟁 발발 관련 학위 논문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생활·여성의 변화 등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으로 연구가 확대된다. 과거엔 정치학 중심이었는데 최근엔 사회학·인류학·역사학·신문방송학 등 거의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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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jpolitics 2011-06-10 09:45   좋아요 0 | URL
커밍스의 연구는 그야말로 "도약"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당시 주어진 자료와 한계내에서는 최선의 연구였다고 생각되는데, 현재의 자료를 통해서, 과거의 연구를 "무비판적으로 비판"하고 재단하는 것은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것 같네요. 박명림 연구 역시 커밍스의 기초적 연구를 토대로 발전된 것인데, 모 신문사의 기자는 학문의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이념의 틀로써 한국전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로쟈 2011-06-11 15:18   좋아요 0 | URL
자칭 '학자'들도 그런 태도를 보이죠...

릴케 현상 2011-06-10 17:15   좋아요 0 | URL
정말 중앙일보 기사 읽고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로쟈 2011-06-11 15:19   좋아요 0 | URL
<6.25전쟁의 재인식> 같은 책은 그런 태도의 '학술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1 20:31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는 올해 한국현대사 교과서를 고쳐야 한다는 캠페인을 광범위하게 벌였습니다.그 결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이태진 씨가 건국의 성과를 내세울 수 있는 자부심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화답을 받아냈고 교과서포럼 인사들이 또다른 보수인사들을 추가해서 한국현대사학회를 5월에 결성했죠.중앙일보는 이런 흐름을 주도한 데 대해 상당한 자부심이 있더라고요.그러니 박명림 씨와의 인터뷰 기사도 저런 식으로 쓴 거죠.
이태진 씨도 해방 이후사에 대해선 중앙일보나 교과서 포럼 쪽의 흐름과 동일하다고 봐야죠.

로쟈 2011-06-13 08:49   좋아요 0 | URL
결과적으론 박정희 재평가를 위한 사전포석일 거란 분석이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