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오늘자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대한 '해럴드 블룸의 읽기'를 바탕으로 적은 글이다. 번역본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고려대출판부),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을 참조했다. 참고로 국내에 소개된 체호프 단편집은 이 작품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한겨레(11. 06. 11) '중년의 불륜’ 그린 체호프 소설, 실은 자기 이야기?

인생은 아름다운가? 체호프적 자세라면 거의 언제나 아름다울 법하다. “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아내가 배신한 것이 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인생은 아름다운 것>)라는 게 이 러시아의 유머작가가 건네는 충고다.

그런 사고의 전환이 잘 안된다면 안톤 체호프의 가장 유명한 단편의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주인공을 따라 바닷가 벤치에 앉아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들을 ‘저급한 인종’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여자들이 없으면 이틀도 살지 못하는 중년의 바람둥이 구로프는 휴양지 얄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를 만나 한번 더 수작을 걸고 잠시 연인이 된다. 안나와 함께 바닷가 벤치를 찾은 그는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반복되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 완전한 무관심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한마디로 유부남 은행원과 젊은 유부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휴양지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에 안나는 눈물을 지으며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구로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구로프는 여느 여인들처럼 안나도 잊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추억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그는 같이 카드놀이를 했던 관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얄타에서 얼마나 매혹적인 여자와 사귀었는지 아신다면 깜짝 놀랄 겁니다!” 하지만 흘려들은 상대방의 대꾸는 이랬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지난번의 그 철갑상어는 맛이 좀 갔어요!” 흔하게 주고받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구로프를 화나게 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야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은행일도 지겨워졌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안나가 사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가고 오페라극장에서 그녀와 재회한다.

안나가 가끔씩 모스크바에 오는 걸로 두 사람의 밀회는 다시 이어지지만, 매번 눈물짓는 안나를 보면서 구로프는 자신이 처한 딜레마를 생각한다. 맙소사,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진정한 사랑에 빠지다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좀더 기다려보면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땐 분명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사실도 두 사람에겐 분명했다. 



체호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줄거리만 보자면 흔하디흔한 불륜담이고, 특별할 건 하나도 없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저명한 비평가 해럴드 블룸에 따르면 “그는 바람둥이 중 한 사람일 뿐이고, 그녀는 눈물짓는 여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독자는 이 두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두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리키의 평에 따르면, 체호프는 “따분한 일상의 희미한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낼 수 있는 작가”였다. 그런 따분한 일상 속에 잠겨 있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은 셰익스피어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체호프의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블룸은 말한다. 더불어 교묘하게 바꿔놓긴 했지만 구로프란 인물이 체호프 자신의 패러디라는 의견도 피력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개를 데니고 다니는 부인>은 건강이 악화되던 체호프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사랑에 빠진 시기에 쓴 작품이었다. 그러니 체호프에게도 인생은 아름다웠다. 다만 체호프식으로. 

11. 06. 11.   

P.S. 기사의 제목이 '중년의 불륜’ 그린 체호프 소설, 실은 자기 이야기?'라고 나갔는데, 노파심에서 적자면 비록 '자기 이야기'라 하더라도 '중년의 불륜'은 체호프와 무관하다(교묘하게 바꿔놓았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갈매기> 공연을 계기로 그가 크니페르를 만난 것은 1898년이며 미혼이었던 두 사람은 1901년에 결혼한다. 그리고 1904년에 체호프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체호프는 작품에 작가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는 걸 극도로 꺼렸지만, 블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흔적을 이렇게 읽어낸다.  

사랑에 빠진 체호프는 스스로의 모습을 <갈매기>의 트리고린에 빗대어 풍자했고, 구로프는 그보다 더 뒤틀린 자신에 대한 풍자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구로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안나가 눈물을 그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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