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국인이 본 서구사상과 한계

얼마전부터 중국 근대 지식인들에 관한 책과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모으고 있는데, 계기가 된 건 옌푸(엄복)의 <천연론>(소명출판, 2008)과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성균관대출판부, 2009)를 지난달에 뒤늦게 발견한 때문이다. <천연론>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지만지, 2009)의 중국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그걸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건 '중역'인데, 그럼에도 이 중역이 의미가 있는 건은 옌푸의 번역이 갖는 역사적 의의 때문이다(때문에 '고전 번역'에 해당한다).  

 

구한말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량치차오(양계초)의 강권론적 자유론을 다룬 박노자의 논문에서 그 의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구적인 담론에 포획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에 1896년부터 또 하나의 이론적인 조건이 가미됐다. 1896년부터 그(량치차오)가 중국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히는 옌푸(1858-1921)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이다. 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진화와 도덕>(중국 서명 <천연론>, 1898년 발간)의 번역문 초고를 이미 1896년에 읽은 량치차오는 그때부터 옌푸식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그가 현실론적으로 체득한 서구 중심주의적 담론을 이론화.이념화하기 시작했다.(<우승열패의 신화>, 132쪽) 

 

박노자는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긴 했지만 옌푸의 사상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에 끼친 영향에 있어서는 량치차오가 더 앞서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량치차오의 경우는 <이태리 건국 삼걸전>(지식의풍경, 2001)을 1903년에 저술한 바 있고 이것은 다시 신채호에 의해 1907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되었다. 옌푸보다는 더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엄복'이란 이름으로만 어설프게 기억하던 옌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서양의 근대사상을 중국어로 옮긴 '최대 번역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1877년부터 2년 반동안 영국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옌푸는 부강한 영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청일전쟁에서도 패배한 중국의 현실에 낙망한다. 그는 중국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의 사회사상가 허버트 스펜서의 자유사상과 사회진화론에서 그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스펜서주의자이긴 했지만 저작이 너무 방대해(우리는 아직도 번역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 먼저 번역한 것이 헉슬리의 <천연론>이었다(그는 스펜서의 입장에서 헉슬리의 진화론을 비판한다). 이 번역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연이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1873), 밀의 <자유론>(1859), 에드워드 젠크스의 <정치학사>(1900),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 밀의 <논리학 체계>(1843) 등을 모두 번역한다. <천연론>을 옮긴 양일모 교수의 지적대로 "혼자서 번역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번역이었다."  

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업에 나선 것이고, 그것이 끼친 영향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간략하게 참조가 되는 건 조경란의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삼인, 2003)이다. '중국에서 사회 진화론의 수용 양상'이란 논문이 포함돼 있어서인데, 이 글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간추린 것이다(이 학위논문은 <중국근대와 사회진화론>(문학과지성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언급돼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은 중국에 체계적으로 수용된 최초의 서양사상이며, 옌푸와 량치차오가 사회진화론을 소개하고 대중화에 힘쓴 사상가였다면 장빙린과 루쉰은 사회진화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애쓴 인물들이었다(조선의 경우엔 유길준과 윤치호가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며, 만해 한용운이 이를 극복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고할 수 있는 책이 '옌푸와 서양'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벤저민 슈워츠의 <부와 권력을 찾아서>(한길사, 2006)이다. <천연론>의 역자 서문에는 역자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미국의 중국 연구를 대표했던 하버드대학의 고 슈워츠 교수의 위어난 엄복 연구를 배워가면서, 동양의 고전으로만 장식된 동양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바로 그 '엄복 연구'가 바로 <부와 권력을 찾아서(In search of Wealth and Power)>(하버드대, 1964)이다(알라딘에서는 1983년에 나온 재판본을 구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선 출간시에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었지만 책을 구하지 않은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먼댓글로 링크해놓았다). 다행히 아직 절판되진 않은 상태여서 바로 구하긴 했는데, 번역이 유려하진 않다. 물론 이런 책 자체가 번역소개된 점은 일단 고무적이면서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루이스 하르츠 전 하버드대 교수가 붙인 서문의 제목이 '서양과 중국을 향한 새로운 시선'이 옌푸 사상이 갖는 의의를 요약하고 있는데, 첫문단은 이렇게 나간다.  

재능 있는 학자라면 자신이 연구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모국 문화와 비교되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 나라 사상의 표상적인 면들을 밝힐 수 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자기발견의 경이감 때문이다.(35쪽)

원문은 이렇다. 

It is the genius of the foreign critic to bring to the surface aspects of thought implicit in the life of the nation he stduies but explicit for him because of the contrasts supplied by his own culture. It is a shock of self-discovery which makes Halevy interesting to the English, Tocqueville to the Americans

이방인이라서 외국의 비평가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사상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고 할레비와 토크빌이 그 사례라는 것. 그런데, 번역에서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 관계가 뒤바뀌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끄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자기-발견의 경이(충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레비'란 이름이 생소해 찾아보니 프랑스 역사가 엘리 알레비(Elie Halevy, 1870-1937)이다. 백과사전엔 "19세기 영국 역사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19세기 영국인의 역사>(6권, 1913~47)의 저자이다. 이 대작은 1815년 이후 영국의 정치·경제·종교 발전을 추적한 것이다."라고 소개된다. 토크빌은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인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인 옌푸도 서양인들에게 그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동시대의 사례로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가졌던 의미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슈워츠 교수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 저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서양사상을 바라본 중국인 엄복이다. 그는 세기의 전환기에 유럽 사상가들의 저술을 중국어로 옮긴 인물이다.

옌푸의 번역 작업이 왜 서양인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그가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같은 당대 사상가들의 자기 이해를 제쳐놓고 '집단적 힘(collective energy)'이란 주제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서구의 비평가들로선 한번도 주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자기-이해'에 해당한다.   

아직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위치에 있었던 엄복은 당시 유럽 사상가들이 말한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등은 차치한 채, 근대세계로 접어드는 유럽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에너지를 다룬 그들의 저작에 매료되었다.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러한 주제를 표헌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개념들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물론 'energy'의 번역이긴 한데, '에너지에 관심을 갖다'는 말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들린다. '힘'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는 "그 주제에 관심이 없었는데"로 교정돼야 한다. 여하튼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 하버드 학자들이 본 옌푸의 의의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에 따르면, 지금에 와서는 옌푸의 시각이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으며 서양의 자기 이해에 포함될 것이다. 유감스러운 건 이런 내용을 말하는 6행이 번역본에서 누락됐다는 점. 아래가 빠진 대목이다. 

But the West has drifted into a new position now, where its involvement with nations overtly experiencing the issue of 'modern history' cannot fail to inspire it to review that issue in its own intellectual past. It is likely that the perspective of Yen Fu will, in significant part, become in the end our own. 

<부와 권력을 찾아서>는 이제 손에 들었기 때문에 언제 완독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책들, 동아시아와 미국에서의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이 더 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몇자 적었다.  

11. 06. 12. 

 

P.S. 박노자의 <우승열패의 신화>는 영어판으로도 출간됐다. 한국어판의 부제인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가 제목이다(애초에 <우승열패의 신화>에 실린 글의 절반 이상이 영어 논문을 번역한 것이었다).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은 <유럽과 미국 사상에서 사회진화론>과 <사회진화론과 미국사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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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6-1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 씨가 방송강연에서 학위논문 스승이었던 슈워츠 씨에 대해 매우 존경심을 지니고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슈워츠 씨의 또다른 저서<중국혁명과 모택동의 대두>(국내번역본의 제목은 중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도 첫장에 중국인들의 서양사상 수용의 역사를 담았는데 엄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죠.

로쟈 2011-06-14 09:34   좋아요 0 | URL
<중국혁명과 모택동의 대두>도 번역돼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교재에 <~하다>가 아니라 <~하게 하다>로 외워야 하는 단어라면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interest,surprise이 들어있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로쟈 2011-06-14 09:35   좋아요 0 | URL
단순한 착오라도 뜻이 반대가 되니 난처한 경우죠...

파고세운닥나무 2011-06-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국에서 옌푸와 동시대를 살았던 번역가 린슈(임서)를 공부할 생각입니다. 린슈는 서양의 문학작품을 번역했는데,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던 번역가였죠.
아무래도 비교문학쪽이다보니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옌푸도 함께 공부하면 좋을듯 합니다.
물론 옌푸를 걸치고 넘어가면 해야할 공부가 꽤 많아지겠죠^^;

로쟈 2011-06-15 20:41   좋아요 0 | URL
유학을 나가시나 보군요. 좋은 공부 많이하고 돌아오시길.^^

파고세운닥나무 2011-06-16 22:00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격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