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겨레에 실렸던 북칼럼을 옮겨놓는다. 필립 로스의 초기 대표작 <포트노이의 불평>(문학동네)을 다루었다. 데뷔 단편집 <굿바이 콜럼버스>(1959)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장편을 연이어 발표하는데, <포트노이의 불평>의 그 세번째 작품이다. 국내 번역작들이 주로 중후기작에 집중돼 었고 <포트노이의 불평> 전후의 작품들은 빠져 있는데,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한겨레(20. 01. 03) 강한 남자’가 되지 못한 ‘유대계 미국인’의 좌절


<포트노이의 불평>(1969)은 필립 로스의 ‘사고작’이다. 데뷔작 <굿바이 콜럼버스>로 이미 전미도서상을 수상했지만 정작 필립 로스란 이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는 건 그에게 명성과 함께 오명까지 안겨준 이 책이 출간되면서다. 일종의 대형사고라고 할까. 미국문학사에 필립 로스라는 브랜드의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포트노이의 불평’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제목은 작품에서 중의적이다. 주인공 앨릭잰더 포트노이의 이름을 딴 의학적 질환의 이름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포트노이증’이라고 옮겨졌다. 흔히 쓰는 방식대로라면 ‘포트노이 콤플렉스’라고도 부름 직하다. 소설은 주인공이 정신과의사 슈필포겔에게 자기의 과거를 토로하는 긴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슈필포겔이 지어낸 병명이 바로 포트노이 콤플렉스다. 사전 형식의 정의에 따르면 “강력한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들이 종종 도착적 성격을 띠는 극도의 성적 갈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도덕적 충동이 어떤 종류의 성적 만족도 좌절시키는 질환으로 대개는 어머니와 자식의 결속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설명이 제시된다.


포트노이는 작가 로스와 마찬가지로 1933년생의 유대인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삼십대 중반의 엘리트 변호사로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이어야 할 것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정신과의 카우치에서 그가 토로하는 인생 이야기는 좌절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빈민 지역의 보험외판원인 아버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승진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 분노와 좌절감 때문에 변비에 시달린다.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터졌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에도 어쩌면 변비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위인이다. 가정에 헌신적이지만 정작 가장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하는 인물은 어머니다. 결벽증적인 어머니는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인 포트노이를 매번 잔소리와 협박으로 주눅들게 한다. 누나를 똥이라고 불렀다고 아들의 입을 세탁비누로 닦아내고, 밤참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아직 예닐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긴 빵칼을 들이밀며 위협한다. 포트노이에게 어머니는 규제와 금지의 화신이어서 처음 학교에 갔을 때 교사들이 모두 변장한 어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울분은 이렇다. “아버지가 어머니이기만 했다면!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이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왜 성별이 다 바뀌었는지!”


포트노이는 일찌감치 자위행위에 빠진다. 기행에 가까운 그의 자위행위는 뒤바뀐 오이디푸스적 가족관계 속에서 포트노이가 자기 존재감과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 벌이는 고투의 의미를 갖는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강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의사 슈필포겔에게 호소한다. “선생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벌벌 떨며 사는 건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남자가 되게 해주세요! 용감하게 만들어주세요!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온전하게 만들어주세요!”


그러나 포트노이의 고투는 끝내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거부하지만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데는 실패한다. 포트노이에게서, 그리고 작가 로스에게서 새로운 정체성이란 미국인이고, 이제 그는 미국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단계로 나아간다. 필립 로스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미국의 목가>(1997)를 비롯한 ‘미국 삼부작’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20.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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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5 0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가을에 다녀오기도 했고, 내년 봄에도 예정돼 있는 영국문학기행과 무관하지 않게 지난해와 올해 영국문학 강의 일정이 많이 잡혀 있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면 주로 19세기와 20세기 영소설 강의인데, 아직 예정에는 없지만 몇 가지 강의계획도 추가적으로 구상중이다(부커상 수상작가 강의 같은 것). 생존 작가로 이언 매큐언을 제외하면 20세기 후반 작가로는 도리스 레싱(1919-2013)과 존 버거(1926-2017)가 상반기 관심작가인데, 계기는 그들의 대표작들이 다시 번역돼 나온 것이다. 레싱의 <금색 공책>(1962)과 버거의 '그들의 노동에' 3부작(1979-1990)이 그것이다. 




 














레싱의 작품은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1950)와 후기작 <다섯째 아이>(1988)를 강의에서 읽었고, 이번 봄학기에는 '폭력의 아이들' 시리즈(1952-1969)의 첫 작품인 <마사 퀘스트>(1952)를 읽을 예정이다. <금색 공책>은 그 두 작품에 이어지는 대표작.



분량이 좀 있기에 최소 두 주 정도는 확보되어야 강의를 진행할 수 있다. 
















레싱 장편에 대해서는 현재 그 정도로만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단편까지 다룬다면 세 권의 단편집이 후보다. <사랑하는 습관>(1957), <19호실로 가다>(1978), <그랜드마더스>(2003). 추가적으로는 레싱의 자서전과 회고록이 번역돼 나오길 기대한다.
















미술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존 버거는 부커상 수상의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들의 노동에' 삼부작을 포함하여 버거는 10권의 소설을 썼는데, 그 가운데 국내에 8권이 번역되었다. 현재 <결혼을 향하여>(해냄)만 절판 상태. '그들의 노동에' 3부작은 <끈질긴 땅>(1979), <한때 유로파에서>(1987), <라일락과 깃발>(1990)이며 과거에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민음사, 1994)로 출간되었었다. 무려 25년만에 재번역돼 나온 것.

















버거의 데뷔작은 <우리시대의 화가>(1958)이며, 네번째 소설 <G.>(1972)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그 다음 작품이 '그들의 노동에' 삼부작이고, <결혼을 향하여>(1995)와 <킹>(1999), 그리고 마지막 소설 <A가 X에게>(2008)가 뒤를 잇는다. 
















마침 이번에 죠슈아 스펄링의 작가론 <우리시대의 작가>(창비)도 출간되어 존 버거 읽기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버거의 소설로만 6-7강 정도의 강의가 꾸려질 수 있는데, 이번 여름 정도에 레싱과 같이 묶어서 계획을 세워볼까도 싶다. 버거의 나머지 미술책들은 기회가 닿을 때 따로 정리해야겠다...


20.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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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wingles 2020-01-03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존버거 3주기래서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하나씩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강의를 계획하신다니! 강의 기다리는 설레임이 독서의 또다른 즐거움이 될듯^^

걷는사람 2020-01-0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좋은글과 강의 항상 감사드립니다. 저는 책과 그다지 친하지 못했는데, 선생님 덕분에 문학이 삶에서 위로와 즐거움이 될수 있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영어권 간판 작가 두 사람의 소설이 예판으로 떴다. 2020년의 서두를 열게 될 작품들인데, 영국작가 이언 매큐언의 초기작 <차일드 인 타임>(한겨레출판)과 캐나다의 여성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신작 <증언들>(황금가지)이다. <증언들>은 올해 부커상 공동수상작으로 지난 10월 영국문학기행 때 서점에 빼곡히 쌓여 있던 책이기도 했다.

이언 매큐언에 대해선 올해 여러 작품을 강의하면서 절판된 초기작들이 다시 나오길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미번역 작품이 번역돼 나왔다. 책띠지에서 알 수 있지만 영화화된 덕분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매큐언의 세번째 소설이다. 번역본 제목으로 초기작을 나열하면 이렇다.

시멘트 가든(1978)
위험한 이방인(1981)
차일드 인 타임(1987)

여기에 이어지는 소설들이 <이노센트>(1990)와 <검은 개>(1992)다. 올해 발표한 신작 <나를 닮은 기계들(Machines like me)>(2019)까지 포함해 모두 15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이제 미번역작은 <달콤한 이(Sweet tooth)>(2012)와 <나를 닮은 기계들> 두 편이다. 하지만 <시멘트 가든>을 포함해 절판된 작품이 네 편이어서 현재 읽을 수 있는 건 아홉 편이 될 전망이다. 최소한 부커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 정도는 다시 나왔으면 한다.

애트우드의 소설은 <시녀 이야기>만 읽었는데 <증언들>이 그 속편이라 자연스레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다른 작품에 대한 독서계획은 아직 없지만 추가적인 독서는 <증언들>까지 읽고 판단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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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 한국시에 대하여

14년 전에 올린 글이다. 실제로 쓴 건 그보다 6년 전이니 20년 전에 쓴 것. 요즘 한국 현대시에 대해 다시 강의하고 있어서 내게는 낯설지 않다(이번주에 미당에 대해 강의했고 다음주는 김수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견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몇 가지 쟁점과 개별 시인들에 대한 견해는 좀더 세밀해졌다. 기회가 닿을 때 한국현대시에 대한 생각도 책으로 엮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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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셸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새 완역본이 나왔다(구 번역본으로는 김창석, 민희식 번역본 두 종이 있다). 이형식 교수가 옮긴 <잃어린 시절을 찾아서>(펭귄클래식, 전12권). 새 번역본으로 민음사판과 경합하다가 뒤처지는 줄 알았는데 한꺼번에 네 권이 출간돼 장정을 마무리지었다. 민음사판은 해를 넘기는 듯싶다.

이번에 나온 건 원작(전7권)의 5-7권으로 5권이 분권돼 있어서 전체가 4권이다. 전체로 치면 원작의 4-5권까지는 번역본이 분권돼 있고 6권과 7권이 단권이다. 원저의 제목을 따르면 이렇다. 괄호는 번역본 권수.

1권 스완 댁 쪽으로 (1,2)



2권 피어나는 소녀들의 그늘에서 (3,4)


3권 게르망뜨 쪽 (5,6)


4권 소돔과 고모라 (7,8)


5권 갇힌 여인 (9,10)


6권 탈주하는 여인 (11)


7권 되찾은 시절 (12)


전체 제목이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고 돼 있어서 마지막 권의 제목도 ‘되찾은 시간‘ 대신에 ‘되찾은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최대 약점이 바로 제목이다. 역자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절‘이어야 함을 강변하는데, 불어 ‘temps‘에 대한 이해는 차고 넘치겠지만 한국어 ‘시간/시절‘에 대한 이해는 부족해 보인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대표적인 ‘시간소설‘로, 시간소설은 모더니즘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에 견주어 리얼리즘 소설은 ‘시대소설‘이다. 비록 시간이나 시대를 (영어로 치면) 똑같이 ‘time‘이라고 옮기더라도 그렇다(이건 영어뿐 아니라 불어, 독어, 러시아어에서도 공통적이다). ‘시절‘은 ‘시간‘에 비하면 의미가 상당히 축소된다. 프루스트 소설의 의의를 그렇게 축소할 필요가 있는지(시절소설?) 의문이다. 게다가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통용되고 있는데 굳이 번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지도(다른 사례로는 카뮈의 <이방인>을 <이인>으로 옮긴 경우다. 식자우환의 사례들이다).

제목에 대한 불만을 적었지만 이미 1-8권을 구입하고 완간을 고대하던 터라 반갑다(정확히는 인도감과 함께 후련함을 느낀다). 내년 가을 프랑스문학기행을 앞두고 프루스트를 다시 읽을 기회를 가지려 한다. 민음사판도 순조롭게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19. 12. 25.



P.S. 펭귄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관련해서 예전에 한번 적은 적이 있는데, 보급판(반양장본) 형태로 나오면서 처음 나왔던 두 권의 양장본은 자취를 감추었다(잃어버린 양장본을 찾아서?). 특별한정판으로 나왔으니 절판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양장본 구매자들은 멋쩍게 되었다. 하긴 일곱 권이 다 나왔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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