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영국)과 서울(한국)의 시차는 8시간이다. 암스테르담과는 7시간. 갈 때보다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장거리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이 어제 오후 2시 45분이었으니 11시간 정도가 지났다. 간단한 해산식일 갖고서 리무진을 타고 집에 돌아온 시각은 6시 반쯤. 이로써 영국문학기행이 완료되었다(모든 건 이제 기억의 소관이 되었다). 시차보다는 피로감 때문에 한숨 자고 일어나니 런던에서라면 저녁식사를 하러 갈 즈음이다. 런던에서의 마지막날 한겨레에 실린 북칼럼을 옮겨놓는다. 출발전에 두 종의 번역본을 챙겨갔던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 적은 리뷰다(여러 차례 강의했지만 원고를 쓴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골랐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 전후에 적은 것이다. 이번 여행의 한 부산물이다...
















한겨레(19. 10. 04) 거기 그녀가 와 있었다 


작가 연보와 프로필 사진만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신경쇠약으로 평생 고통받았던 여성작가를 떠올리기 쉽다. 버지니아 울프 얘기다. <자기만의 방>(1929) 강연을 통해 여성작가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예리한 성찰을 제출한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가 또한 울프다. 울프 문학의 핵심은 무엇이고 성취는 무엇일까. 영국 문학기행 차 런던에 와서 런던 거리를 산책하길 즐겼던 울프를 생각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런던 거리의 풍경을 직접 담고 있는 소설이 대표작 <댈러웨이 부인>(1925)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1922)와 함께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기법을 발전시킨 소설로 유명하다. 하지만 울프는 <율리시스>에 대해서 상스러운 작품이라며 불편해했으니 같은 부류의 작품으로 분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겠다(댈러웨이 부인이 몰리 블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렵다). 울프가 서술기법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댈러웨이 부인>을 표본으로 삼아 말하자면 삶에 대한 긍정과 예찬으로 보인다. <율리시스>의 몰리 역시 긍정의 아이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삶에 대한 '고상한' 긍정이라고 해야 할까.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1920년대 초반 런던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댈러웨이는 영국 총리도 참석하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다. 꽃을 사러 나선 길에 그녀는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키며 곧바로 열여덟 살의 처녀 시절을 떠올린다.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젖히면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던 때였다. 당시 사랑했지만 결혼 상대로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헤어진 피터 월시가 돌아온다는 사실도 연이어 상기하는데 마침 이날 피터는 댈러웨이를 찾는다. 삼십 년의 시간적 간격이 놓여 있지만 댈러웨이는 그에게서 여전한 매력과 함께 거부감을 느낀다.


그렇게 늙은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댈러웨이는 만으로 쉰둘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한 차례 독감도 앓고 난 뒤라 기력도 떨어진 상태다. 그럼에도 댈러웨이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회복력을 보여준다. 화장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댈러웨이의 모습이 시사적인데, 비록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여전히 자기 삶의 구심점을 되찾는다.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부름”에 그녀는 기꺼이 응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환기해주는 것이 바로 파티다. 옛 애인 피터나 남편 리처드가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댈러웨이에게 파티가 갖는 의미였다. 댈러웨이에게 파티는 삶 자체다. 그리고 삶이란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녀에게 파티는 “하나의 봉헌”이고 “조합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댈러웨이에게 파티가 갖는 의미는 곧 작가 울프에게 창작이 갖는 의미와 동일해 보인다. 그것은 봉헌이면서 긍정이다. 작품에서 그러한 봉헌에 가장 큰 도전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쟁 후유증으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투신자살하는 셉티머스다. 댈러웨이는 셉티머스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지만, 그의 자살소식이 불청객처럼 파티장에 끼어든다. 댈러웨이는 파티 한복판에 끼어든 죽음, 다르게 말하면 삶의 한복판에 끼어든 죽음을 유감스러워하지만 공감의 능력과 회복력을 통해서 극복해낸다. 비록 젊은이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삶이 계속되어야 하듯 파티도 계속되어야 한다. 결국 소설은 댈러웨이의 건재를 과시하면서 마무리되는데 클라리사의 연인이었던 피터는 노년의 댈러웨이에게서도 여전히 클라리사의 매혹을 느낀다. “거기 그녀가 와 있었다”는 마지막 문장은 삶에 대한 울프의 당당한 긍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19.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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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입문서로 먼저 나온 건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이고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지만 그 못지 않은 책이 레이먼(라만) 셀던의 <현대문학이론>이다. 국내에선 문학과지성사에서 처음 번역본이 나온 이래 세 종의 번역본이 더 나왔는데 현재는 문지판만 스테디셀러로 버티고 있다. 거의 30년째 절판되지 않았다면 생명력을 인정해줄 만하다.

특이한 건 문지판이 원서 초판의 번역본이라는 점. 원서는 최초 저자 셀던의 사망 이후에 제자들이 가세해 증보개정판을 냈고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 6판이다. 절판된 판본 가운데 경문사판이 5판의 번역이었다. 나는 5판의 원서도 갖고 있었지만 서고에 물난리가 났을 때 훼손돼 폐기했고 이번에 6판을 주문했다. 오늘 배송된다고 하기에 생각이 나서 적는다. 업데이트하자면 6판의 번역본이 개정판으로 나오는 게 맞는데 문지판이 개정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확인하다 보니 문학이론 번역본들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적은 일이 있다. 기본 가이드북의 경우에는 독자층이 계속 유지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다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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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 합본호(1344호)에 실린 리뷰를 옮겨놓는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대해서 적었다. 애초에는 돌아온 탕아에 대한 릴케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 적으려고 했던 것인데, 분량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루기로 한다...

















주간경향(19. 09. 23) 말테는 왜, 무엇을 바로 보고자 했나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가을날’이다. 자연스레 ‘가을날’의 시인 릴케도 떠올리게 된다.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1910)를 가을맞이로 다시 읽었다. 원제는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 제목대로 시인의 분신격 인물인 말테 브리게의 성찰과 단상들을 모은 기록이다.


이 소설 혹은 수기가 내게 가장 와닿았던 때는 스물여덟 살 무렵이었는데 작품에서 말테의 나이다. “우스운 일이다. 나는 여기 작은 방에 앉아 있다. 나 브리게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고,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는 여기 앉아 있고, 아무것도 아니다.” 말테가 앉아 있는 곳은 파리 한구석의 싸구려 호텔 6층 방이고, 릴케의 파리 체류 시기를 고려하면 때는 1902년 9월이다.

보통의 소설에서라면 파리 같은 대도시에 상경한 시골뜨기 주인공이 성공과 출세를 도모하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터인데, 말테는 그와 달리 방구석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거나 고작 도서관을 드나들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자칭하지만 그는 대단한 무엇이 될 생각이 없다. 대신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이제껏 어떤 실제적인 것과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고, 인식도 못했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가능할까?” 따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무슨 뜻인가? 이제까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잘 보고, 생각하고 기록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냥 흘려보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버터빵과 사과 한 개를 먹는 학교 휴식시간처럼.” 이런 문제의식하에 말테는 이제야말로 제대로 보고 생각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그 첫 단계가 바로 보기다. 말테는 여러 차례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가장 먼저 관찰하는 것은 파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559개의 병상이 있는 큰 병원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가기에 마치 죽음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러한 죽음이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자기만의 죽음’을 죽겠다는 소망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말테는 시종관이었던 자기 할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는데, 두 달간 지속된 죽음의 과정을 멀리 떨어진 농가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죽음이었다. 릴케 시의 주요 주제이기도 한데, 말테는 사람들이 마치 과일이 씨를 품듯이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품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자궁 속에, 그리고 남자들은 가슴속에. 그 죽음은 삶과 함께 과일처럼 익어간다. “그런 죽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독특한 품위와 조용한 자긍심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릴케는, 그리고 말테는 사람들이 죽으려고 오는 것 같은 파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창작에만 집중하며 평생 배회하는 삶을 살았다. <두이노의 비가>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같은 대표작을 완성하고서 몇 년을 더 살았을 뿐인데, 그럼에도 그 유명한 묘비명을 미리 써놓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말테의 수기>는 그러한 시적 여정의 이정표로 읽을 수 있다.


19. 09. 13.
















P.S. 릴케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은 김재혁 교수의 저서와 역서를 몇 권 참고할 수 있다. 리뷰에서 릴케가 평생 배회하는 삶을 살았다고 적었는데, 그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릴케의 시적 방랑과 유럽여행>(고려대출판문화원)이 요긴한 참고가 된다. 볼프강 레프만의 평전 <릴케>(책세상)가 절판된 것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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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산문집 목차를 보고 가장 먼저 읽고 싶었던 건 ‘윌리엄 포크너‘였다. 포크너로부터 받은 영향이 궁금했기 때문인데 그 영향은 위화뿐 아니라 모옌까지 포함한 같은 세대 중국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짧은 글이긴 하지만 역시나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 작가는 타인의 글쓰기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다.˝

두 대목에 더 밑줄을 쳤다. (1)˝포크너는 자신의 서술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았다. 그건 정확성과 힘이었다. 전투 때 탄알이 노리는 것이 모자의 흔들리는 깃털 장식이 아니라 심장인 것처럼 말이다. (2)˝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은 삶처럼 소박하다... 그는 시종일관 삶과 나란하고자 했고 문학이 삶보다 대단할 수 없음을 증명한 매우 드문 작가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인데, 바로 그 점에서 조이스와 포크너가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삶을 능가한다는 걸 보여주는 작가가 조이스라면 포크너는 정반대라는 것. 내가 <율리시스>에서 <피네간의 경야>로 가지 않고 걸음을 돌려 <소리와 분노>로 향하는 이유다. 조이스는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갔다.

일러두기를 보니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의 대본에서 일부는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문학동네)에 수록돼 있다(‘슈테판 츠바이크는 한 치수 작은 도스토옙스키다‘는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절판된 산문집 <영혼의 식사>(휴머니스트)에 실린 ‘회상과 회상록‘은 이번 산문집에 재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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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엇의 시집이 오랜만에 나왔다. <사중주 네 편>(문학과지성사)로 네 편의 장시와 희곡을 묶었다. 아마 과거 전집판에만 실렸던 작품들. 모더니즘의 대표 시인이지만 번역본의 부재로 강의에서 다루기가 어려웠는데(물론 번역된다고 해도 시는 강의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일단 나온 만큼 검토해봐야겠다.

사실 더 기대한 건 ‘황무지‘의 새 번역본인데, 이번 시집에는 빠졌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프르프록의 연가‘(제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는 미국 대표시선집 <가지 않은길>에 따로 실려 있어서 역시 다루기에 불편하다. 분량으로는 한권에 다 담을 수 있는 시들이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엘리엇의 에세이와 비평 선집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나 오래 전에 절판된 전집에나 들어 있었다. 20세기 시인 엘리엇이 이제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그럼에도 세계문학 강의자의 입장에서 그 공백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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