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13년전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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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9-06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목부터 마음에 안들어서ㅎ
감자와 고구마가 등장하는 시를 좋아하신다는 말에
감자와 고구마와 샘의 접점이 뭘까 생각해봄.

로쟈 2019-09-06 22:36   좋아요 0 | URL
감자, 고구마의 유익에 감사해야.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얼마전에 새번역 <모비딕>(1851)도 출간되었지만 내게는 올해 멜빌 강의 일정이 없다. <필경사 바틀비>에 대해서만 한 차례 강의하는 것 말고는. 지난해 미국문학 강의에서 할 만큼 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여전히 숙제는 남아있다. <모비딕> 이전과 이후에 대해서 다루는 것. <모비딕> 앞으로는 다섯 편의 장편이 있고(<타이피>만 예전에 번역본이 나왔었다) 뒤로는 두세 편이 있다. 먼저, <모비딕> 이전.

타이피(1846)
오무(1847)
마르디(1849)
레드번(1849)
하얀 자켓(1850)

이들 가운데 첫 소설 <타이피>만 유일하게 해양모험소설로 좀 팔린 것으로 안다(당시 독자들은 실제 모험담으로 생각했다고). 그에 고무돼 연거푸 작품을 써댔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알려진 대로 <모비딕>은 재앙과 같은 실패작으로 남았다. 물론 얼만큼 팔렸느냐는 기준으로. 이후 소설에 대한 열정을 지속적으로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멜빌은 1866년부터 세관 공무원생활을 20년간 하게 된다. <모비딕> 이후의 주요작은(<빌리버드> 같은 후기 문제작을 빼면) 두 작품이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1852)
사기꾼(1857)

<피에르, 혹우 모호함>(시공사)이 옃년전에 출간되었는데 같은 역자에 의해 <사기꾼, 그의 가면무도회>(지식의날개)도 이번에 나왔다. 19세기 미국문학을 다시 다룰 순번이 되면(2-3년 뒤가 되지 않을까 한다. 세계문학강의가 3-4년의 로테이션 주기를 갖고 있어서) 필히 읽어보려고 한다. 페이퍼를 예고편으로 미리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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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도서관에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계기 삼아서 알베르 티보데의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미친 사랑의 서>에서 플로베르 장을 읽었다. 플로베르와 그의 정부 루이즈 콜레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가 플로베르 서간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데(플로베르 서간집은 영어판의 경우 두 권으로 나와있다), 조르주 상드와 주고받은 편지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많은지 모르겠다(짐작엔 둘다 책 분량은 된다).

<감정교육>의 아르누 부인의 모델인 엘리자 슐레쟁제가 플로베르 인생의 여인으로 얘기되지만 엘리자는 꿈속의 연인이자 문학적 형상에 가깝고 실제 현실에서의 연인은 루이즈 콜레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46년부터 대략 8년간 지속되었다. 엘리자와 루이즈, 모두 1810년생으로 플로베르보다는 열한살 연상이다. 말년에 긴밀한 교분을 나눈 조르주 상드는 1804년생으로 플로베르보다 열일곱 살이 더 많다. 이렇듯 연상의 여인과 연하남의 관계가 프랑스식 ‘감정교육‘의 기본모델이다(<프랑스식 사랑의 역사> 참조).

플로베르보다 더 적극적인 정부였던 루이즈 콜레와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환멸과 증오로 일단락된다. 결혼을 혐오했던 플로베르는 가끔씩의 만남과 편지교환 상대로서의 정부만을 필요로 했을 뿐이었다(여러 가지로 플로베르는 카프카의 롤 모델이다). 플로베르의 허락 없이 그가 창작에만 열중하며 칩거해 있던 크루아세를 방문했다가 콜레는 냉대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슐레쟁제와 콜레, 그리고 상드를 플로베르 인생의 세 여인으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어머니와 조카딸 같은 가족을 제외하면). 이 여성들이 플로베르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오후에 몇 자 적으려고 했던 글인데 핸드폰을 몇 시간 유실했다가 찾게 되는 바람에 늦어졌다. 피로하기도 하여 짧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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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존 밴빌의 <바다>를 여름을 보내는 마지막 책으로 골랐다. 노동계급 출신의 스타일리스트이자 모더니스트라는 작가의 평판을 확인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그의 소설들이 더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한겨레(19. 08. 30) ‘나를 버리고 그들처럼’ 되려 한 남자의 삶


여름의 끝자락에 읽어볼 만한 책으로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바다>를 골랐다. 작가에게는 2005년 맨부커상을 안겨준 작품이고 나로서는 이번 여름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 가운데 하나다. 자동차 정비소 직원의 아들로서 ‘노동계급 출신의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밴빌의 문학세계가 어떤 것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아일랜드 최고 작가라지만 국내에는 <닥터 코페르니쿠스>와 <바다>, 단 두 작품만 번역되어 있어서 ‘밴빌의 문학세계’라는 말은 의미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약력을 참고해서 말하자면 그는 제임스 조이스와 사뮈엘 베케트 문학의 전통을 계승한다. 열두 살 때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서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이력에 더하여 “실생활을 써나가는” 조이스의 방식을 계승한다는 뜻도 포함하기에 그렇다. 다만 밴빌은 조이스와 마찬가지로 실생활을 전지적 시점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 시점으로 그린다. 주인공 화자의 말을 다 신뢰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손가락(스타일이라는 형식)이 가리키는 달(내용)만 보면 되지만,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손가락에도 주목해야 한다.

<바다>의 주인공이자 화자 맥스 모든은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책을 쓰는 딜레탕트다. 그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자 오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바닷가를 찾는다. 그곳에는 시더스라는 여름별장이 있었고 그는 열 살, 열한 살 무렵 별장 소유주인 그레이스 가족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가장 밑바닥 계층의 아이가 상류층 가족과 맺은 것이어서 특별하고 예외적이다. 맥스는 그가 속했던 ‘여름 세계의 사회구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휴가용 별장을 소유한 소수의 가족이 맨 꼭대기였고, 그다음이 호텔에 묵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다음이 집을 세내는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이 우리였다.”


‘우리’는 맥스네 가족으로 똑같이 휴가차 바닷가를 찾지만 이들의 숙소는 샬레라는 목조주택이었다. 실생활은 분명한 위계와 경계로 구성된다. “제대로 된 집에 사는 사람들은 샬레 출신들과 섞이지 않았고, 우리도 그들과 섞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맥스의 아버지는 노동자로 말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머니는 좌절과 불만을 삭였다. 부모의 불행이 어린 시절 맥스의 그늘이었다. 맥스는 부모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수치스러워했다. 그런 맥스에게 상류층 그레이스 가족은 신들로 여겨졌다. 그는 같이 놀던 친구들을 떠나 그레이스 가족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신이 신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레이스 부인을 여신으로 숭배하던 맥스는 또래의 딸 클로이와 사랑에 빠지는데 클로이의 모욕까지도 황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불행한 인생을 살면서도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유지한 그의 어머니가 보기에 맥스의 선택은 자신의 출생과 계급에 대한 배신이었다(맥스라는 이름도 그 자신이 새로 지은 것이다). 하지만 “늘 독특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맥스의 소망은 “독특하지 않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레이스 가족과의 인연으로 새로운 열망과 정체성을 갖게 된 맥스는 성장하여 부유한 여성 애나와 결혼함으로써 신분상승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대가로 지불한 것은 자기 존재의 상실이었다. 애나가 죽자 텅 빈 존재가 된 그는 다시 자기 존재의 기원을 찾아 시더스 별장을 찾는다. 밴빌의 매우 우아한 소설에서 맥스의 회상을 따라가다가 독자가 발견하는 것은 자기 계급을 배신하고 부유한 딜레탕트가 된 ‘늙은 사기꾼’의 초상이다.


19. 0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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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까지 강의 일정이 남아 있지만 사실상 여름강의가 일단락되었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는데, 기력과 의욕을 잃은 반면에(심신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쳬중도 좀 줄었다) 숙제였던 작품들(<율리시스>와 <창백한 불꽃> 등)의 견적을 얻을 수 있었다(이제 문학강의에서 다루지 못할 작품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등산에 비유하면 올라야 할 더 높은 봉우리는 남아있지 않다.

여름강의 마무리를 기념하는 뜻으로 어제 주문하고 오늘 받은 책이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와 염상섭의 <취우>다. 가격 때문에라도 둘다 강의에서는 다루기 힘든 소설들. 그렇지만 비중으로는 각각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미들마치>는 사실 예전판을 복사본으로 갖고 있어서 구매할 생각이 없었는데, ‘소장판‘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또 다른 번역판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염상섭의 후기작 <취우>는 전집판으로 <홍염>과 함께 나온 사실을 어제 검색해서 알았다. 전집을 모으고 있기에 자동반사적으로 구입.

이미 적은 대로 아쉬운 것은 둘다 강의용은 아니라는 점. <미들마치>는 적당한 분량으로 분권되어 나왔디면 좋았을 것이다(모범은 아니지만 동서문화사판이 이럴 때는 참고가 된다). 염상섭전집도 보급판이 나와야 강의에서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여름을 보내는 심사를 담아서 구입한 책들이라 몇 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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