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사랑하는 사람만이 날 수 있다"

13년 전에 옮겨놓은 스페인 시다. 유튜브에는 이 시의 동영상도 떠 있는데 내가 받은 인상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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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1-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쏠로 키엔 아마 부엘라.
정말 낭송하기 좋고 경쾌하네요
중얼거리기 딱 좋습니다
근데 사진속의 잘생긴 두남자는 누구죠

로쟈 2020-01-17 23:18   좋아요 0 | URL
오른쪽은 에르난데스로 보임.~
 

겨울학기에 내게 가장 유익한 강의는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시 강의다. 아이러니하게도 수강생은 가장 적은 강의들인데 나로선 그와 무관한 이득이 있다. 두 주제, 혹은 두 분야에 나대로 견적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다른 문학강의들이 큰그림을 이미 마련한 상태에서 퍼즐을 맞추는 식이라면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시는 먼저 대강을 그려야 하는데 이번에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할 때 그 ‘시작‘이 이번 강의였다.

현대시 강의는 다음주에 종강하지만 기형도에 대한 강의는 이미 진행한 적이 있어서 새로운 건 아니다. 다만 오늘 이성복 시를 다루면서 기형도가 이성복 시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를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다. <뒹구는 돌>에서 기형도의 유작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까지가 10년이다. 그리고 ‘가족풍경‘의 시화라는 점에서 기형도는 이성복의 직계다.

이성복은 <뒹구는 돌> 이후 <래여애반다라>(2013)까지 모두 일곱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한권의 선집을 제외하면). 시기를 구분하자면, 10년간의 공백기를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고 싶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6)
<그 여름의 끝>(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아, 입이 없는 것들>(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
<래여애반다라>(2013)

이 가운데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 시집은 단연 <뒹구는 돌>이다. 주로 1970년 후반에 쓰인 시들이므로 시인이 26-27세 때 쓴 것들이다. <남해 금산>은 혹 <뒹구는 돌>의 부스러기로 읽을 수 있겠지만 <그 여름의 끝>은 <뒹구는 돌>의 연장선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와는 별개의 ‘리셋‘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번의 리셋이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이루어지는 식. 이를 결코 ‘진화‘라고 말할 수 없다. 변모라면 모를까.

공백기를 채우고 있는 것이 산문집인데 시인은 1990년에 첫 산문집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을 펴냈고, 2001년에 그 증보판으로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말도 못했는가>를 출간한다. 나는 이 산문집들이 시의 부재에 대한 변론이자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복 시의 성취는 <뒹구는 돌>에서 <석류 꽃잎>으로 이어진다. 시가 더이상 쓰이지 않을 때 시인의 정신은 시가 아닌 산문에 깃든다. 그리고 그 피날레가 2015년에 펴낸 세 권의 시론집이다. 시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노래들에 해당한다.

이성복 시에 대한 강의는 이런 구도에서 진행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놀란 건 시집을 포함해 그의 책이 한권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 모든 책을 갖고 있음에도! 하는 수없이 몇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다시 구입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뒹구는 돌>은 바로 작년 11월말에 재판1쇄를 찍었다. 제목과 본문의 한자를 한글로 바꿔서 새로 조판한 것. 초판은 1980년 10월 30일에 1쇄, 2017년 9월에 53쇄를 찍었다. 이성복 시의 독자라면 이 재판도 기념으로 소장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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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 강의에서 토머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민음사)를 읽었다. 일찌감치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명사로 소개되었고 해럴드 블룸에 의해 ‘현대미국문학의 4대 작가‘의 1인으로 지목된 거장. 1937년생으로 어느덧 여든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이번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갖게 된 생각은 그를 ‘좌파 나보코프‘로 분류해도 좋겠다는 것. 코넬대학 재학시에 나보코프의 강의를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둘 사이에 사적인 인연은 없다. 그럼에도 가공의 픽션공간을 구축해나가는 방식은 나보코프를 떠올리게끔 한다. 차이라면 비록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할지라도, 현실에 대해서 냉소하는 나보코프와 달리 매우 뜨겁다는 것.

핀천은 1963년 첫 장편 <V>(<브이를 찾아서>로 번역)를 발표한 이래 총 8권의 장편과 1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다섯 권이 국내에는 번역되었고 두 권이 절판된 상태. 고로 강의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세 권뿐이다. 시기적으로는 90년대와 2000년대에 발표한 작품 네 편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중력의 무지개> 해프닝을 보건대 번역될 가능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면서도 기다리게 된다. 에디파 마스가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기다리듯이.

핀천의 장편은 <V>와 <제49호 품목의 경매>(1966), 그리고 <중력의 무지개>(1973)까지가 첫 사이클로 보인다. 일단은 <제49호 품목> 전후의 작품이, 이왕 한번 번역됐었기에, 다시 나오길 기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현재 읽을 수 있는 작품들로만 강의를 꾸릴 수밖에 없다(지난여름에 핀천만 제외하고, 필립 로스와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를 강의에서 읽었기에 핀천에게 빚이 있다). 단편집을 먼저 읽으면 이런 순이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1984)
<제49호 품목의 경매>(1966)
<바인랜드>(1990)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후기작들.

<메이슨과 딕슨>(1997)
<어게인스트 더 데이>(2006)
<타고난 악>(2009)
<블리딩 엣지>(2013)

설사 더 나오지 않더라도 세 권의 책으로 최소 3-4주 일정은 가능하다. 올해의 강의계획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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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을 강의에서 다루는 일은 드문데 이제까지의 예외가 <춘향전>과 <홍길동전>이다. 주로 한국근대소설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특히 <춘향전>은 ‘국민문학‘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어서 여러 차례 다뤘다. 강의준비차 <춘향전>에 관한 상당한 연구논저를 훑어본 기억이 있는데 유익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국사학자(조선정치사 전공) 오수창 교수의 논문이었다(<역사비평>에 수록된 논문이었다는 기억이다). 이번에 단행본으로 나왔다.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그물)이다.

˝<춘향전>에 대한 평가는 1960년대 이후 정반대되는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통설은 <춘향전>에 신분제에 대한 저항 등 새로운 시대의 논리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반대편에서는 <춘향전>이 구태의연한 봉건 논리를 되풀이했다고 설명하며, 목하 ‘반일종족주의론자‘들도 <춘향전>이 조선시대 질서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텍스트에 직접 표출된 논리와 이념으로 <춘향전>을 평가하는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춘향전>의 시대적 성격을 규명했다.˝

고전소설에 관해서는 이윤석 교수의 견해를 표준으로 삼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서 참고해보려한다(<춘향전>과 <홍길동전>에 관해서는 권위자라는 학자들의 무리한 주장이 난무하여 실망스럽다). 오수창 교수는 이번 책의 마지막 장에서 <춘향전>의 현대적 변용으로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을 다룬다. 마침 지난해에 이광수 전집의 하나로 <일설 춘향전>(태학사)이 출간돼 구입해놓은 바 있다. 한국근대소설에 대한 강의를 다시 진행하게 되면 읽어보려 한다. <춘향전>에 대한 견해는 나중에 근대소설 강의를 책을 묶게 될 때 밝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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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 더 구체적으로 1810년대 가장 중요한 영국작가는 제인 오스틴과 월터 스콧, 그리고 메리 셸리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1818)이라는 예외적인 문제작 덕분에 문학사에 이름이 오르게 된다. 그래도 당대의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월터 스콧(1771-1832)이었겠다. 생전에 제인 오스틴은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지도 못했으니 제인 오스틴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는 희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월터 스콧은 다른 두 여성작가에 비하면 거의 잊혀진 수준이다. 역사소설의 원조라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지만 사실 그대로 말해서 스콧은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작가다(18세기 감상주의 소설의 대가 리처드슨이 읽히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더라도 문학사를 공부하는 독자라면 스콧의 소설을 그대로 지나치기는 어렵다. 다행히 두 권의 대표작은 번역됐었다. 과거형으로 적은 건 현재는 한권만 남아 있어서다.

<웨이벌리>(1814)
<아이반호>(1819)

두권 가운데 현재는 <아이반호>(현대지성사)만 번역본으로 접할 수 있다(절판된 판본으로는 두권 다 갖고 있었지만 강의를 위해서 새 판본을 다시 구입했다).

스콧의 역사소설은 영국 바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러시아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푸슈킨의 <대위의 딸>과 고골의 <타라스 불바> 같은 소설들) 역사소설의 붐을 가져오기도 했다. 스콧표 역사소설의 특징과 핵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루카치의 <역사소설론>을 참고해야겠다). 당장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이룬 성취를 평가하려고 하니 스콧에 대해서 먼저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난 김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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