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셸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새 완역본이 나왔다(구 번역본으로는 김창석, 민희식 번역본 두 종이 있다). 이형식 교수가 옮긴 <잃어린 시절을 찾아서>(펭귄클래식, 전12권). 새 번역본으로 민음사판과 경합하다가 뒤처지는 줄 알았는데 한꺼번에 네 권이 출간돼 장정을 마무리지었다. 민음사판은 해를 넘기는 듯싶다.
이번에 나온 건 원작(전7권)의 5-7권으로 5권이 분권돼 있어서 전체가 4권이다. 전체로 치면 원작의 4-5권까지는 번역본이 분권돼 있고 6권과 7권이 단권이다. 원저의 제목을 따르면 이렇다. 괄호는 번역본 권수.
1권 스완 댁 쪽으로 (1,2)
2권 피어나는 소녀들의 그늘에서 (3,4)
3권 게르망뜨 쪽 (5,6)
4권 소돔과 고모라 (7,8)
5권 갇힌 여인 (9,10)
6권 탈주하는 여인 (11)
7권 되찾은 시절 (12)
전체 제목이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고 돼 있어서 마지막 권의 제목도 ‘되찾은 시간‘ 대신에 ‘되찾은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최대 약점이 바로 제목이다. 역자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절‘이어야 함을 강변하는데, 불어 ‘temps‘에 대한 이해는 차고 넘치겠지만 한국어 ‘시간/시절‘에 대한 이해는 부족해 보인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대표적인 ‘시간소설‘로, 시간소설은 모더니즘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에 견주어 리얼리즘 소설은 ‘시대소설‘이다. 비록 시간이나 시대를 (영어로 치면) 똑같이 ‘time‘이라고 옮기더라도 그렇다(이건 영어뿐 아니라 불어, 독어, 러시아어에서도 공통적이다). ‘시절‘은 ‘시간‘에 비하면 의미가 상당히 축소된다. 프루스트 소설의 의의를 그렇게 축소할 필요가 있는지(시절소설?) 의문이다. 게다가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통용되고 있는데 굳이 번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지도(다른 사례로는 카뮈의 <이방인>을 <이인>으로 옮긴 경우다. 식자우환의 사례들이다).
제목에 대한 불만을 적었지만 이미 1-8권을 구입하고 완간을 고대하던 터라 반갑다(정확히는 인도감과 함께 후련함을 느낀다). 내년 가을 프랑스문학기행을 앞두고 프루스트를 다시 읽을 기회를 가지려 한다. 민음사판도 순조롭게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19. 12. 25.
P.S. 펭귄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관련해서 예전에 한번 적은 적이 있는데, 보급판(반양장본) 형태로 나오면서 처음 나왔던 두 권의 양장본은 자취를 감추었다(잃어버린 양장본을 찾아서?). 특별한정판으로 나왔으니 절판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양장본 구매자들은 멋쩍게 되었다. 하긴 일곱 권이 다 나왔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