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부터 한국현대시 강의를 다시 진행하는데(한겨레) 준비도 할 겸 몇 권의 책을 구입했다. 한데 강의에서 다루는 시인이 아닌, 다루지 않는 시인들의 전집. 몇해 전에 평론가들이 꼽은 한국 10대 시인 가운데(생존 시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내가 다루는 시인은 김소월, 백석, 윤동주, 서정주, 김수영, 다섯 시인이고, 다루지 않는 시인이 한용운, 정지용, 이상, 박목월, 김춘수, 다섯이다. 김춘수를 제외하면 아직 준비가 부족하거나 관심이 미치지 않은 시인들이다.

한용운과 이상, 김춘수 시전집은 이미 갖고 있어서 이번에 구하거나 주문한 건 박목월 전집과 정지용 전집이다. 정지용 전집은 아직 배송받지 못한 상태인데 두 시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적을 수도 있겠다. 시전집을 주문하던 중에 생각이 미쳐서 조병화 시인의 선집들도 주문했다. 이 경우는 전집 구입이 어려운 경우. 생전에 시인은 무려 53권이 시집을 출간했고(발행시집 최다가 아닐까) 찾아보니 이를 갈무리한 전집(전6권)도 나와있지만 상당한 고가다. 나로선 선집에 만족하려 한다. 

















두 권의 선집을 이번에 주문했는데 먼저 받은 <사랑이 가기 전에>(시인생각)를 들춰보다가 널리 알려진 시로 ‘추억‘에 눈길이 머물렀다(대부분의 시가 밋밋한 가운데 그래도 시적 긴장을 느끼게 해주는 시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 시는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에 수록된 것인데 <사랑이 가기 전에>에는 마지막 연의 시행이 다르게 적혀 있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그러니까 1연에서 ‘하루 이틀 사흘‘이 종으로, 3연에서는 횡으로 배열된 것. 이 수정이 시인의 뜻에 따른 것인지 착오인지 궁금하다. 물론 변화 자체는 일리가 있다. 종으로도 걸어보고 횡으로도 걸어가본다는 것이니까. 잊어버리자고 벌이는 수작이란 원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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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내 마음의 망명지

14년 전에 쓴 글이다. 지금은 이런 분량으로 쓸 여유가 없다. 제목은 유종호 선생의 산문집에서 가져왔고 대략 다시 읽으니 일종의 유종호론이다. 친밀감을 느깐다고 적었는데 지금은 그만큼의 거리감도 느낀다. 인문지성들의 보수성이 나이의 문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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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 강의에서 한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작가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다.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친숙하지만, 발자크나 플로베르 같이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 작가는 아니어서다(그의 작품은 나도 초등학교 때 어린이용으로 읽은 게 전부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의 소설들을 읽다 보니(특히 <파리의 노트르담>) 위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뒤마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자크와 위고의 동시대 작가로 대중성에서라면 두 작가 못지않게 성공을 거둔 작가가 뒤마여서다. 위고와 마찬가지로 역사소설이 주 분야이면서 낭만주의 작가로 분류되는데, 발자크적 사실주의와 비교해볼 만하다. 주요작은 <검은 튤립>을 포함해 세 귄이다.

<삼총사>(1844)
<몬테크리스토 백작>(1845)
<검은 튤립>(1850)

문제는 분량인데 <몬테크리스토 백작>만 하더라도 <레미제라블>(1862)에 버금간다. 그래서 한권만 다룬다면 <검은 튤립>, 두권을 다룬다면 <삼총사>를 포함해서 다루려고 한다. 내년 가을 프랑스문학기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발자크-위고-뒤마라는 ‘삼총사‘의 소설적 특징과 차이, 소설사적 의의에 대해서 정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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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기억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노르웨이 작가. <나의 투쟁>(전6권)이라는 대작(원저는 3,600쪽이 넘는다)의 저자. 검색해보면 <나의 투쟁> 이후 <사계>도 시리즈로 발표한 것 같지만 나의 관심은 일단 <나의 투쟁>에 한정된다. 최근 <유년의 섬>이 나왔기 때문인데 권수로 4권째이지만 원서로는 3권에 해당한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원저와 번역본의 권수가 딱 맞지 않는다).

처음 번역본이 나왔을 때 전체 규모에 혀를 내두르면서 일단 영어판부터 구했는데 최근에 마지막 6권을 구해보니 1,168쪽에 이른다(영어판이 두군데서 나오면서 표지와 책크기가 달라 맞추느라 애먹었다. 한국어판도 4권에 이르러 표지가 달라졌다). 아마 번역본으로는 세권 정도로 분할돼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식이므로 전체는 최소 10권 이상이 될 터이고 4권이 나온 현재 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분량 때문에라도 독서가 그 자체로 투쟁에 해당하는 이 대작을 언제 읽게 될까. 내가 생각해둔 대답은 노르웨이문학기행을 가기 전까지라는 것. 크나우스고르를 결국 기억하게 된 건 <유년의 섬> 외에도 그의 뭉크론 덕분이다. 영어판이 나와서 지난달에 구입. 제목은 대략 ‘그토록 작은 공간에 그토록 많은 갈망을‘ 정도 같다. 뭉크 관련서를 몇 권 구입해서 이 역시 독서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투쟁>도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면 <유년의 섬>부터 읽어볼 참이다. 앞에 나온 세권을 책장에서 못 찾고 있는 게 실제 이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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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을에 프랑스문학과 러시아문학을 동시에 강의하고 있는데 일정에서 뒤늦게 아쉬움을 발견한다. 스탕달의 <적과 흑>(1830)을 다시 읽으며 러시아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이 궁금해져서다(스탕달의 수용에 대해서는 알아보아야 한다. 발자크와는 다르게 스탕달은 당대에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고 프랑스에서도 1880년대에 가서야 재발견된다).

그에 비하면 낭만주의 시인 뮈세(알프레드 드 뮈세)의 영향은 뚜려한 편이다. 유일한 소설 <세기아의 고백>(1836)이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1840)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다루는 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인데 매번 멍석 까는 걸 잊는다(확인해보니 푸슈킨은 <적과 흑>을 직접 읽었고, 레르몬토프는 간접적으로 영향관계가 추정된다.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과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이 그래서 <적과 흑>과 비교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단독으로 다루기에는 멋쩍기에 비교거리가 될 만한 작품을 더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정을 보류하게 만들었고 그에 더하여 최근에는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우리시대의 영웅>을 다루는 일이 줄어들었다. 언젠가 그의 희곡 <가면무도회>까지 같이 강의에서 다룰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그 기회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계기는 주어져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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