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초기 단편집 Antarctica. 15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있다.(개정판엔 Close to the water's Edge가 추가로 실려있다는데 아직 못 읽었다.) 각 이야기가 매우 강렬해서 한 호흡에 이 얇은 책을 읽기는 힘들었다. <맡겨진 소녀>와 <Small Things like these>의 따뜻함 보다는 그 우물가의 음산함과 수녀원의 폭력성이 단단하게 뭉쳐있다. 이 단편집에 주어진 상의 이름 윌리엄 트레버와 함께 셜리 잭슨과 도리스 레싱이 연상된다.


강압적인 사회/가정 질서와 답답한 생활이 쌓이고 쌓이다 쩍 하고 금이 간다. 그 금 간 곳에 바람이나 빗물이 들어와 온 세계가 흔들린다.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순간 소설이 끝난다. 아니면 이미 비극이 벌어진 다음, 좌절한 인물이 그 사건을 수습하려다 더 큰 사고가 터져 버리는 결말이다. 상대적으로 약한 수위의 글들도 있지만 그 역시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이야기는 짧지만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는 예리한 묘사로 아주 길고 풍성한 소설 읽기를 할 수 있다. 


제일 내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Quare name for a Boy".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에서 일하던 여자가 크리스마스에 맞춰 귀향한다. 영국에서도 따로 만나곤 했던 고향 애인과 자신은 가벼운 사이라고 생각하지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한다. 자신을 보러 몰려 온 아일랜드 동네 아줌마들, 해변 산책에서 보는 어부들, 숲속에 아버지가 굴뚝도 없는 집에 가둬 죽였다던 어떤 여자 이야기 등 이런 묘사나 단상들이 모두 화자의 상황을 암시한다. 함께 펍으로 들어가지만 애인은 자신을 친구들에게 소개하지 않는다. 여자는 마침 읽고 있던 <자메이카 여인숙>을 떠올리고 아이 이름에 대프니가 좋겠다고 말한다. 애인은 "그건 사내 아이 이름으론 이상한데"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 하나로 그 애인과 두 사람의 관계의 많은 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 


천천히 재독하고 싶다. 억세고 무서운 이야기도 통쾌한 이야기도 있는데 모두 클라이맥스에서 끝나기에 독자가 그 뒷수습을 나름대로 하는 재미 혹은 부담이 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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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이 한번에 나와서 반가운 마음이 절반, 조금 지겨운 마음도 반에 반에 반. 이번엔 안 봐도 되겠지, 하다가 구입하고 말았다. 아 역시 읽길 잘했어. 몬난이 그림에 엉성한 펜 선이지만 강렬하게 풍기는 작가의 마음 (더하기 눈과 손과 머리). 등장인물 모두 열심히 살고 있었군요.


"피브"의 작가 나카타의 부모 이야기가 무겁게 등장한다. 그가 나름대로 매듭을 지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스트리밍으로 독자와 교류하며 작화를 보여주는 온라인 활동을 시도하는 작가들 이야기와 "피브" 애니메이션 프로젝트가 큰 에피소드로 실려있다. 계속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야기와 작은 연애의 시작도 함께.   

맘에 드는 컷들 … 그리고 나의 책장 일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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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1-0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안봐도 되겠지 그리고
지겨움의 콜라보...

한동안 실컷 보다가 질려 버렸네요.

유부만두 2023-11-08 12:36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 마음 잘 알아요.
이 시리즈 만화는 천천히 한두 권씩만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몰아서 보면 어쩐지 출판계의 웅변 같기도 하고 그림의 틈이 자꾸 보여서요.
하지만 잊을만 하면 후속편이 나와주니 한 번만, 이번만 하면서 보게 되네요.

단발머리 2023-11-08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중쇄도 중쇄지만 말입니다.
저기... 저, 안 보이는 곳도 좀 찍어주세요!! 저 아름다운 문동 너머에는 무슨 세상입니까!!

유부만두 2023-11-08 12:37   좋아요 1 | URL
안 보이는 곳은 보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오만육천 가지 있습니다. 아무리 청소하고 치우고 정리해도 어쩔 수 없는 책장. 그곳은 어둠의 세상입니다.

하이드 2023-11-0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보고 꽂혀서 1-3권 샀어요. 다 모아야지. 만화책은 잘 사지도 읽지도 모아두지도 않는데, 슬램덩크 다 사고 보니, 히스토리에 한 권씩 모으고 있고, 중쇄를 찍자도 모을래요. 만화에도 ‘운‘ 이야기 나오던가요?

유부만두 2023-11-08 15:59   좋아요 0 | URL
1권에 나와요. 생각나서 펼쳐보니 1권 그림체랑 18권 그림체 아주 달라요. (신간일수록 인물들이 못생겨짐) 하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막 넘쳐나는 느낌이에요. 생생하달까.

실은 저 이 시리즈 사서 읽고 10권쯤? 나오고 한참 안나올 때 그냥 다 팔았다가 11권 사면서 다시 사 모은거에요. 너무나 비효율적인 책관리죠;;; 너무나 기분파.

잠자냥 2023-11-08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만두 님... 책장 지저분하다고 하시더니.... 저게요?? 어디가 지저분??

유부만두 2023-11-08 16:51   좋아요 1 | URL
마루 32칸 중 2칸만 저 모습. 방의 책장은 저도 무서워서 근접을 못해요.

은오 2023-11-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만두님 댁 다른 책장도 깔끔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ㅋㅋㅋㅋ
나무님도 책장 지저분하다고 하시더니 겁나 깔끔하던데 만두님도 엄살이실듯 ㅋㅌㅋㅋㅋㅋ
저렇게 쌓인 만화책ㅠ 천국이네요!!!!

유부만두 2023-11-08 20:06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게 상상해 주세요. 우리집에 만화책 많다요~ 어른이 좋은 점. 내 맘대로 만화책 살 수 있음. (어릴적 한풀이 맞고요)
 

요즘 서재 친구분들의 영어 원서 읽기는 어린이 주인공의 경제 생활 분투기 <프론트 데스크>다. 나는 번역서로 읽었는데 주인공 미아네 같은 90년대 중반의 중국 본토 이민자들의 고된 미국 이민 초기 생활이 실려있다. 책에는 또한 많은 면에서 대조되는 모텔 주인 야오 가족이 나온다. 이들은 악덕 고용주, 부유층, 앞선 이민자 가족이라 언어 사용에 유리한 입장이며 무엇보다 대만 출신이다. 


주인공 미아는 야오의 아들과 같은 반이다. 둘 사이에는 오해가 생기고 적대감이 있지만 학교 선생님의 눈에는 "같은 아시안" 학생이다. 선생님의 중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무지와 부족한 배려는 이들을 억지로 묶으려 한다. 부모의 고용/피고용 상황과 중국/대만 출신이라 어색한 아이들은 미국 사회(학교)에서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에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Stay True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90년대에 "다른" 중국 출신의 bad behaving하는 이민자들/유학생들에 대해 저자의 대만 출신 부모가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고 너무나 다른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에선 주변인, 유색인으로 묶여 차별당하는 일이 다수 묘사된다. 


어린이 모험/탐정 이야기는 의례적으로 가출과 반칙, 어른의 법에 반항하는 이야기다. 그래도 <프론트 데스크>에선 만 열 살, 5학년 어린이가 모텔 데스크에서 밤 시간에도 혼자 있거나 위험한 어른들과 맞서는 장면도 많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미아의 가족이 (많은 경우 착취하는 미국인들/선이주자들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몰린) 불법 이민자들을 감춰주고 고용주를 속이는 것이 정의롭게 묘사되었기에 이 책이 금서 목록에 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금지하는지 잘 보아야 한다.


https://youtu.be/JuGzzR-w5us?si=crCJwTATDsix4u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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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1-07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분류는 참 폭력적인데요. 상대는 오히려 ‘왜? 뭐가?‘하고 되물을 것 같기도 하구요.

매일글쓰기46일차 응원합니다. 기대에 항상 부응하시느라 바쁘신 가운데서도, 건강관리 각별히 하시길요 ㅎㅎ 오늘 춥더라구요. 반팔에 자켓 입고 나간 사람 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1-07 18:51   좋아요 1 | URL
제가 기대에 부응하느라 내복 입은 사람입니다! ㅎㅎㅎ 그래서 바지가 껴;;;;
 

디즈니+채널에 아가사 크리스티 영화가 올라왔다. 어쩐지 푸와로 탐정의 콧수염의 숱이 성겨진 느낌이다. 


책은 아직 안 읽었고 (아마 안 읽을 것 같고) 영화 본 감상을 적어본다. 


베니스에서 은퇴 혹은 휴가 중인 푸와로에게 친구 소설가가 찾아와서 강령회에 같이 가자고 한다. 심령술사를 믿지 않는 푸와로는 유명한 성악가의 집에 들어서며 (마침 핼러윈 파티 중) 어쩐지 음산한 기운을 느낀다. 그 집은 아이들이 갇혀 죽었다는 괴담을 갖고 있는데다 1년전 집주인 성악가의 다 큰 딸이 집밖 운하로 몸을 던진 사연도 있다. 딸을 못잊어 괴로워 하는 성악가는 유명 심령술사를 초빙해 (핼러윈 파티 후 대부분의 손님을 내보낸 다음) 딸의 영혼과 대화를 시도한다. 딸의 혼령이 찾아왔는지 심령술사(양자경)는 몸을 떨며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소리친다. 


범인은 우리 중에 있다! 적은 혼노지에 있으며 환자는 서울에 있다고? 


다양한 사연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의심을 받고 세상 냉철한 푸와로가 이번엔 그 집에 깃든 영혼을 느끼고 심지어 대화까지 나눈다. 지나치게 똘똘한 의사의 어린이 아들은 징그럽기 까지 하고 찰스 디킨스는 시시하다며 에드거 앨런 포우의 책을 읽고 있다. 영화 <식스 센스>의 소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 결국 범인은 설마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인간의 감정이 모든 비극과 귀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책 표지의 사과가 실마리를 줄 수도 있다. 영화에서도 여러 번에 걸쳐 사과가 등장한다. 


화면은 내내 어둡다가 끝에 가서야 밝아진다. 의도하지 않게 내 얼굴이 태블릿 화면에 비춰서 곱절로 음산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양자경의 포스에도 불구하고... 지루했다. 세네 번 끊어서 다른 책 읽다가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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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0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책하고 내용이 아주 다른데요?! 😱

유부만두 2023-11-06 21:29   좋아요 0 | URL
그래요? 영화는 1940년대 후반이 배경인데 베니스에서 미국식 핼러원 어린이 파티라 좀 어색하긴 했어요. 베니스 풍경은 마지막에나 나와서 좀 아쉽고요, 책은 재미있었을까요?

단발머리 2023-11-07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재미있을 거 같기는 해요.
벌써 45일차인거에요? 잘 달리고 계십니다, 유부만두님!

유부만두 2023-11-07 15:57   좋아요 0 | URL
격려 감사합니다, 단발님!
영화는 예외나 반전이 없는 정석적인 영화에요. 큰 기대 없이, 양자경 배우의 연기를 즐기신다면 좋아요.

서곡 2023-11-09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디플에 올라왔군요! 봐야겠습니다 양자경 배우 더욱 잘 나가길 기대해봅니다 ㅋ

유부만두 2023-11-10 11:54   좋아요 1 | URL
큰 기대는 하지 말고 보세요. 책에서 많은 부분을 각색했다는데 그래도 매우 고전적으로 차분합니다.
 
















3년 전에 1권을 읽었는데 3권까지 나와있다. 그리고 오늘 드라마 시리즈를 보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가벼운 터치의 동물로 그려졌던 환자와 의료인들이 '사람'으로 나와 생활도 하고 연애도 한다는 게 크게 다른 점이다. 그래서 환자들의 병증이 더 크고 무겁게 다가온다. 5화의 워킹맘 에피소드에서는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우씨. 아직도 이렇게 건드리면 아픈 곳이다. 


젊은이들 연애하고 그러는 건 좀 어색하게 애틋한데 넷플릭스 드라마라 그런지 망상을 겪는 환자의 시각 표현 cg와 자해와 자살 장면이 수위 높게 나온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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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11-05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 원작이 있었군요? 드라마 예고 재밌어보여서 저는 완결됨 보려고요. ^^

유부만두 2023-11-06 07:22   좋아요 1 | URL
드라마는 12회 완결이에요. 원작 1권에 없는 연애 이야기가 큰 비중으로 들어가고요 병원 안 이야기와 바깥 세상의 차별과 편견도 많이 다뤘어요. 그런데 폭력 수위가 꽤 높아요.

은오 2023-11-0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은 책에 만화에 드라마에 온갖 컨텐츠 다 섭렵하시는군요. ㅋㅋㅋㅋ 드라마 마지막으로 재밌게 본게 쿠팡플레이 <안나>인데(얜 넷플릭스에서 했으면 진짜 대박났을듯).... 요새는 재밌는게 없네요. ㅠㅠ 최근에 본 마스크걸은 옛날에 웹툰 재밌게 봤는데 드라마는 실망스러웠고...😫

유부만두 2023-11-06 17:08   좋아요 1 | URL
저도 마스크걸 별로 였어요. 다들 웹툰이 좋았다고 하기에 역주행으로 봤거등요? 그런데 그림이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다 봄;;;)

전 그야말로 잡독 잡청 잡.... 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11-06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드라마 재밌겠어요.
챙겨봐야겠습니다.✍️

유부만두 2023-11-06 17:09   좋아요 1 | URL
연애 장면이나 (동네 길목에서 친구/연인이 투닥거림+노래방 장면) 뻔하게 시간 끌기 장면이나 피 많이 나오는 장면은 빨리 돌리며 봤어요. 책은 1권만 예전에 읽어서 기억도 가물가물인데 드라마 재미있게 봤어요. 내용이 심각하고 슬픈 게 대부분이라 재미라고 하기가 좀 미안하기도 하고요.

공쟝쟝 2023-11-06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4일차 잘한다 잘한다 유부만두! ㅋㅋㅋ

유부만두 2023-11-07 17:21   좋아요 1 | URL
어깨춤 추면서 칭찬을 잘 받겠습니다. ^^

자목련 2023-11-07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작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만화였네요. 저도 보고 싶은 드라마에요^^

유부만두 2023-11-07 17:22   좋아요 0 | URL
연애 파트는 좀 뻔하지만 환자와 병원 이야기는 (간호사가 쓴 원작) 매우 강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