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광고문이 하이스미스와 듀 모리에를 언급했고, 나도 읽으면서 자꾸 <리플리>와 <레베카>를 떠올렸다. 과연 이 소설 속의 앨리스와 루시는 두 명인가, 실재하는 인물인가,가 내내 걸리적거렸고 (디테일이 부족했는지 몰입이 힘들었다) 광복/해방 직전의 혼란스러운 모로코의 상황과 이국적인 (다분히 유러피언/어메리컨들의 오리엔탈리즘에 쩔어있는) 북아프리카 묘사에 불편한 심정이 들었다.
소설의 투박한 전개는 작가의 첫작품이 주는 신선함 탓이라고 생각했고 어디선가 본듯한 플롯은 억지로 만든 복고풍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1950년대 배경의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의 의의는 그 유명한 영화 <가스등>을 이제라도 찾아서 보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영화가 이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생각할 바가 크다. <레베카>는 읽었으니 뿌듯한 마음이었고, 고전이 되어버린 소설을 떠올리게(만) 하는 소설은 그 원전격인 고전을 읽는 편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듀 모리에와 하이스미스, 정말 대단한 작가들이야.
가스등, 그루밍이 언급될 때마다 나오는 뉴스의 자료 화면이지만 전체 영화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비가 주룩 오다 말다, 하는 우울한 시월의 어느 수요일, 이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혼자 흥분하고 있다. 눈에 띄게 오버하는 옛날 배우들, 처음 부터 누가 캥기는지 죄를 지었는지 착한지 다 보이는데, 그래도 이 나쁜 사람이 제대로 혼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가스라이팅'에 바보같이 (하지만 그저 행복을 바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인 여주인공 칼라를 탓하는 마음이 번갈아 두근거렸다.
영화는 매우 매우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 잠깐만,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단 말이지... 하는 주제 넘은 독자, 혹은 관객이 된다. (+ 런던에 10년 동안 비워 놓는 단독주택 있고, 참 부럽다)
덧: 주인공 폴라네 집에 새로 고용된 젊고 싸가지가 바가지인 하녀로 스무 살의 안젤라 랜즈베리가 열연한다. 짝다리에 껌 짝짝 씹는 이미지로. 잘 알려진 제시카 여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