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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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얼마전 읽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떠올려낸다.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억울해지는 거에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젠가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 황정은 <백의 그림자> 중
 

내가 살고 있는 곳도, 슬럼이다. 언젠가 밀어버려야 할 구역.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는 곳, 서울의 떠오르는 구역, 즉, 언젠가는 사라질 동네, 그리하여 투자 가치는 1순위이지만 투자한 이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세입자들이 드글드글 거리는 곳. 집주인들은 언제 재개발이 되려나, 설레이며 기다리고, 세입자들은 재개발이 되면 어디로 가야하나 떨면서 기다리는 곳. 확실히, 서울의 중심이나, 전혀 중심답지 않은 이 곳에는 묘한 기운이 흐른다.

그저 잠을 자고 생활을 꾸려나갈 뿐인 나도, 집보러 다니는 것이 까마득하고, 이사할 일이 까마득하고, 이만한 집을 또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지역이 언제 재개발되려나, 언제쯤 사라지려나, 하는 두려운 마음에 괜히 평소엔 관심도 없던 부동산 뉴스를 들여다보곤 한다. 허나 내 맘은 그뿐이다. 이 곳이 사라지는 날, 이사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새 집을 찾는 귀찮음을 감수하며, 이사짐 센터의 구박을 한몸에 받고도 남을 책짐들을 꾸려, 그저 조금의 아쉬움과 추억을 가지고 손 흔들고 떠나면 될 뿐이다. 조금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금세 마르겠지. 그리고 몇년 후 번쩍번쩍해진 동네를 보며, 아, 저기 내 첫 보금자리가 있었지, 아련해 하며, 개발 미워, 라는 포즈를 취하면서, 그 번쩍번쩍한 건물의 깔끔한 식당과 카페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걸고 있는 것은 생활이지, 생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내가 존재했던 한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 참 눈물겹다. 처음 내 손으로 마련한 보금자리, 그 곳에서 보냈던 시간들, 함께한 사람들, 기억, 추억, 뭐 그런 것들이. 가끔 버스를 타고 지나다, 이 곳이 그리워질 그 언젠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련해지곤 한다. 하물며,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어떨까.

"살려고 오른 사람들을 죽이기야 하겠어"

라고, 망루에 오른 사람들은 끝까지 그렇게 믿었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재개발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생활이 아닌, 생계였고, 희망이었다. 노점상을 하던 아들과 함께 호프집을 하며, 상가 옥상에서 생활하던 할아버지도 있었고, 삶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심정으로 복집을 낸 복집 사장님도 있었다. 개발을 할 거라면, 그저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개발을 해달라는 이 당연한 외침이, 너무나 큰 바람일 수 밖에 없는 곳, 2000년대의 서울.

더 가슴이 아픈 건, 용산 참사 사망자 중 3명이 용산 주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몰랐다.) 전쳘연(전국철거민연대) 소속의 다른 지역 철거민들. 그 중에는 본인의 집을 철거당해 판자로 된 집에 살면서, 다른 이들의 불행을 두고 볼 수 없다며 함께 망루에 오른 이성수씨도 있었다. 이성수씨의 바람이라면, 그저, 바람이 들지 않는 집에, 벽이 제대로 갖춰진 집에 사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코가 석자면서, 자신의 일도 아니면서, 그렇게 함께 망루에 오른 이성수씨의 마음 앞에선, 심장이 뻐근해진다.

"상현아, 아버지는 평생을 정직하게 살려고 애썼다. 정직한 게 죄라면 지금 우리가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근데 상현아... 세상에는 지금 우리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니...아버지는 미련하게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구나..."



나도 알았다. 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그 망루 위에 올라간 것이 사람이었다는 걸, 그저 그들은 살기 위해 올라갔다는 걸. 그런데, 나는 '잘 몰랐다' 거기 살고 있었던 게 '사람'이었다는 걸, 그 망루 위에 올라간 게 '사람'이었다는 걸.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그 곳에 올라갔었다는 걸. 그들은 이 곳에 '생계'가 걸린 '사람'이었다는 걸.

나의 교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모르면서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 이 책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나의 교만함을 일깨워준다. 그저,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에게 조금 덜 무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알았다고 생각했기에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알았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비판의 목소리들에 몇마디 보태긴 했지만, 그 목소리는, 그 관심은,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메마른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고 생각했기에 함께 분노할 수는 있었으나, 사실은 몰랐기에, 함께 울어주지 못했다.

이 리뷰를 읽는 많은 분들은, 나보다는 나은 사람들일테니, 나만큼 무지하고 무심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여나, 나처럼 무지했기에 함께 울어주지 못했던 분이 계시다면, 온맘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주실 것을 권한다. 책 한 권을 낼 때 나무 한 그루를 벨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며 만든다는 보리출판사에서 만들었다. 내가 나무라면, 이 책으로 다시 태어나도 좋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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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1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이 나무라면 이 책으로 다시 태어나도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니, 이 리뷰에 영향력이 생기도록 추천했어요. 불끈.

웽스북스 2010-08-16 23:20   좋아요 0 | URL
여러분. 이것은. 알라딘의. 다락방님이 추천한. 리.뷰.입.니.다.

굿바이 2010-08-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로운 언어가 없어서, 정치적인 구호가 없어서 세상이 이지경인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묻고 또 물었어.
자신들의 목소리만을, 자신들의 욕망만을 관철하려는 사람들 덕에 국가에 의해 살해당한 용산의 '사람'들에게 나는 조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 책을 건내준 신부님은 용산에서 목이 쉬고 말을 잃으신 것 같았어.
우리의 언어는 점점 격렬해 지는데, 죽은 그들은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다음에 또 죽어나가야 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번호표를 받고 있는 이 땅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사람으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야.

영향력 없는 리뷰어라 이 책을 알릴 수는 없지만, 나는 아무 영향력도 없기에, 무자비한 배반은 하지 않을 것이고, 기어이 목이 메는 날이면 어디서든 울것이야,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웽스북스 2010-08-17 23: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또 들려오는 PD수첩 결방 소식에 화가 나네요.
이러면 더 보고 싶잖아요.

좀 어이가 없는 밤.

프레이야 2010-08-17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끝문장까지 감동이에요.
저도 추천 누르지 않을 수 없어요.
바구니에 담아갑니다^^

웽스북스 2010-08-18 00:4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바구니 속 이 책은
프레이야님께 어떤 이야기들을 이끌어낼까,

매우 궁금해요.

누구엄마 2010-08-1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으로 아름다운 리뷰여요ㅡ
꼭 읽어야지, 하고 다짐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웽스북스 2010-08-18 00:47   좋아요 0 | URL
아이고나. 이런 극찬을.
고마워요. :)

우리 별이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웠으면 좋겠네.

風流男兒 2010-08-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좋은 리뷰를 만들어 낸 그 슬픔들이 가슴을 조금 아련하게 만드는 그런 오전이에요. 그래도 잊지는 않고 추천. 꾸욱.

웽스북스 2010-08-18 00: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고마워요. :)
오전에도, 오후에도.

레와 2010-08-1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한번뿐인 추천이지만, 힘을 모아서 눌렀어요!

웽스북스 2010-08-18 00:49   좋아요 0 | URL
힘을 모아 눌러도 1만 올라가던가요?
아. 야속한지고. ㅋㅋ

고마워요 레와님.

루체오페르 2010-08-1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리뷰입니다. 추천!

웽스북스 2010-08-18 0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루체오페르님.
요즘 자주 뵈어 좋아요.

순오기 2010-08-17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올 여름 책따세 추천도서라 7월말에 사놓고...독서마라톤에 만화는 인정해주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었어요. 얼른 보고 리뷰를 써야 겠지요.
보통 결혼하기 전에는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웬디양은 진짜 어른이에요. 추천~

웽스북스 2010-08-18 00:5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읽어보세요.
금방 읽어요

순오기님 남동생도 좋아하는 책일걸요. (멋대로 추측)

순오기 2010-08-20 22:57   좋아요 0 | URL
남동생이 그 만화가를 말하는 거임?ㅋㅋㅋ
좋아하겠죠~ ^^
 
내 귀는 짝짝이 웅진 세계그림책 11
히도반헤네흐텐 지음, 장미란 옮김 / 웅진주니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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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 이 이야기를 뭐라고 설명해볼까. 토끼판 루돌프 사슴코 정도로 이야기해볼까.

토끼 리키 귀는, 매우 짝짝이인 귀
만일 네가 봤다면, 축 늘어졌다 했겠지
다른 모든 토끼들 놀려대며 웃었네
가엾은 저 리키, 외톨이가 되었네

여기까지는 루돌프 사슴과 토끼 리키귀의 스토리가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 사는 데 아무 불편이 없음에도 단순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것들. 그리고 그 단순한 편견이 삶에 미치는 단순하지 않은 영향들. 아니 어쩌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들.

이 동화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들이 처음 접하게 되는 사회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향해 하게 되는 고민들, 혹은 행여 갖게 될지 모르는 타인을 향한 편견들에 대해 단순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여기까지인가? 그렇다면 웬디씨의 리뷰는 여기서 끝나는가?

이 동화 속 리키와, 루돌프 사슴간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결국 이 동화의 가치를 더해주는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그것은 다음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안개낀 성탄절날, 산타 말하길
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주렴
그 후로 사슴들이 그를 매우 사랑했네
루돌프 사슴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루돌프 사슴이 친구들 사이에 사랑을 얻는 방법은 권위 있는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 받은 것에서 기인했다. 결과적으로는 루돌프의 상처가 극복되었으니 참 다행스럽지만, 만약 산타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루돌프는 빨간 코를 평생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가엾은 존재로 살아갔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리키는?

극복한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극복하려고 일단 노력이라도 해본다. 귀에 당근도 꽂아보고, 모자로 가려보기도 하고, 나뭇가지로 귀를 세워보기도 한다. 그럴 수록 더욱 놀림감이 되지만, 굽히지 않고, 이것 저것 계속 시도해본다. 의사 선생님도 제발로 찾아가본다. 물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에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국 리키는 그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 낸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재치와 위트, 결국에는 친구들과 함께 깔깔깔 웃으며. 궁극적으로는 같아질 수 없었겠지만, 서로간의 동일시를 경험하면서, 그렇게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상처를 극복해내는 리키.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건, 이렇게 리키처럼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기지, 재치, 의지, 그리고 지혜가 아닌가 싶다. 언제까지 앉아서 산타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슬픈 건, 사실 세상일과 사람들은 뜻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고,  
오히려 산타와 같은 초극적 힘에 의해서 상황이 바뀌어가는 것이
차라리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되는 일들이 반복되어 간다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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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9-12-1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동이라는 토끼도 생각나네요.^^제목이 생각이 안나는데...
짧은귀를 가진 동동이가 이것저것 해보다가 귀모양 빵으로 대박(?)난다는..
그저...진심이 통하고 선함이 이긴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 제목이 짧은귀 토끼였나 봅니다.^^

웽스북스 2009-12-16 12:4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귀모양 빵으로 대박. 아. 재밌는데요 ㅋㅋㅋ

차좋아 2009-12-16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리키 보면서 막 웃었는데 리키 너무 귀여워요..ㅋㅋㅋ
씩씩한토끼죠. 무심한 듯 열심이 귀를 세우려는 리키.
마지막에 리키와 친구들이 당근으로 모두 짝짝이 귀를 만들잖아요. 그때 혼자 당근 먹고 있는 토끼가 있는데...그 말 안듣는 토끼로 이야기를 또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 삐딱 토끼도 너무 귀여워요^^

웽스북스 2009-12-16 12:46   좋아요 0 | URL
토끼얘기말고 제 칭찬을 해주셔야죠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9-12-16 12:53   좋아요 0 | URL
향편님 향편님 제 투데이히스토리좀 보세요
(볼줄 모르죠? 놀리고싶은 이마음~)

차좋아 2009-12-16 15:49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카테고리 하나 더 만드세요 '책 보다 리뷰~ ' 정말 잘썼습니다 짝짝짝!!!ㅋㅋㅋ
한참 찾았는데 못 찾았어요. 진짜 안 보이네요 투데이...


2009-12-20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바이 2009-12-16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실한 웬디양!^^

난 루돌프 사슴코에 대해 무진장 열받은 초등학생이었다오. 왜? 루돌프가 썰매를 끌어야만 했던 것이냐? 코가 빨간 것도 억울한데, 뚱뚱한 산타할아버지 썰매까지 끌어야 하나? 철저한 자기 희생만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인가? 뭐냐, 힘든 일을 끝까지 시키기위해 루돌프에게 박수치냐? 어째서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는 없는가? 뭐, 이런 질문들로 엄청 화가 나서 씩씩거렸었어.

그런데, 어른이 되서 더 열받는 건 말이지, 그나마 희생을 해도 사랑을 얻는 게 아니라 이용을 당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 뭔가 하늘에 계신 분들이 개입해야 될 만한 상황이 더 많다는 거, 또한 그 분들의 개입을 요구하기 위해 미치게 그분들에게 기어야 한다는 거, 총체적으로 사는 일이 정말 던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지.

웽스북스 2009-12-16 12:46   좋아요 0 | URL
역시 굿바이어린이는 남달랐군요. 남달라남달라
저는 신나게 율동하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자랑이냐)

風流男兒 2009-12-1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히도반헤네흐텐이 이 리뷰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요.(이름이..)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야 겠는데요 ㅋㅋ

웽스북스 2009-12-16 12:47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ㅋㅋ 히도바헤네흐텐이 누군가했어요
아 근데 오라버님 서재 이름 ㅋㅋㅋㅋㅋㅋ 소리내어 읽어보니 중독성있어요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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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 보면 가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참 고맙게 만들어주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백석의 시같은 것이 특히 그런 것 같다. 누긋한, 이라는 표현이나, 눈이 푹푹 나린다, 뭐 이런 표현들은 도무지 번역으로는 전해질 수 없는 느낌.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나는 갑자기 얼마나 억울해지는지 모른다.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다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내가 놓치고 있을, 그 절묘한 표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번역자를 탓함이 아니다. 애초에 번역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공연한 원망의 눈초리를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을 향해 허망하게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 속 문장들은 아름답다. 서정적이고 유려하게 표현하면서도, 일본 특유의, 단칼에 자른 듯한 절제미가 함께 어우러져있다.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을 함께 녹여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종종 나의 탄식을 자아내니, 아, 원래는 얼마나 아름다웠던 것일까. (역시나 나는 억울한 거지)

열차가 접경의 긴 터널을 지나, 눈의 마을로 들어서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무진기행을 떠올린 것은 나뿐이었을까. 희뿌연 안개가 자욱해,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던 무진만큼이나, 눈으로 가득했던 그 마을은 몽환적이고, 뿌옇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 곳에서 주인공은 각자 다른 매력을 지닌 두 여인에게 묘하게 이끌리게 되나, 결국은 누구의 삶에도 개입하지 않은 채, 끝내 방관자로 남게 된다. 아니, 방관만 할 뿐인가. 자신을 향하는 고마코의 모든 애정을 헛수고로 여기는 잔인함도 잊지 않는다. 당신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서 옷을 새로 빌리기까지 했다던 고마코의 마음은 (이 부분을 읽으며 사랑은 매일 새로운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구나,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헛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무엇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그에게, 어떤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버거운 일일 뿐이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60년대식 원조 초식남이구나.

요코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던 그녀를 남겨둔 채, 그는 다시 그곳을 떠날테고, 잊을만 하면 다시 그 곳을 찾았을테고, 자신의 짐이던 요코가 사라진 뒤의 그녀의 삶은 가벼워지기는 커녕, 덕지덕지 다시 더께가 내려앉았을 생각을 하니, 다시금 그녀의 간절함이 마음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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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마미 2009-11-23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른 어느 때보다도 웬디님 감상글이 수채화 한 편 보듯 맑아 보입니다
고마코가 매일 다른 옷을 갈아입었다는 표현은
놓치고 기억하지 못하였다가
웬디님 글로 다시 봅니다.

설국 이기에 그곳에서나 눈빛깔과 눈냄새의 여자들을 느끼는거겠지요?
시마무라는 그곳을 떠나면
동경의 남자로서 다시 그곳으로 가기 까지는 설국의 일을 까맣게 잊을텐데...
이런 부분
우리 여자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남자들의 모습이고
기약도 없을 걸 어찌 관심을 보여버리는지
아 나쁜 남자다.... 해 봤자

이런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가능하고 그래서 아름답구요
소설을 나와 현실의 남자가 이런 상태라면
동우님 말씀대로 눈 녹은 후의 질척이는 세상과 더러움
바로 그것일테니
소설은 소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입니다 웬디님...
시마무라를 초식남이라고 부르는 웬디님이 약간 걱정스러운 ^^

웽스북스 2009-11-25 02:42   좋아요 0 | URL
어떻게, 리뷰를 쓸 때마다 이렇게 후니마미님을 걱정시키는 철없는 아가씨 모드가 되어가고 있는데요 ㅎㅎㅎ 초식남은 별 생각없이 한 말이니 너무 심려치 마셔요. 하하하. ㅋㅋ

다락방 2009-11-2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저도 지금 이 책 읽고 있어요. 딱 이 민음사판으로. 절반 읽었어요. 그런데 요코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게 되는군요!

웽스북스 2009-11-25 02:42   좋아요 0 | URL
본의아니게 스포일러가 되었군요. 흑. 지금쯤 다 읽으셨겠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11-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임질 것이 없는 관계는 아름다우나 또 얼마나 허망한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저도 원어로 읽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만과편견을 영어로 읽고 에잇 나 그동안 속았었군 하는 생각이 들던 때가 있는데 이 책도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일어는.........

웽스북스 2009-11-25 02:43   좋아요 0 | URL
그죠. 아무래도 넘사벽이 존재하는 일어. ㅎ
그나저나 휘모리님은 눈이 내리는 계절에 눈의 나라로 가신다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으흑.

차좋아 2009-11-2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기행! 맞다!! 젠장.. 무진기행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다시 생각해보니 설국을 먼저 읽었구나~~'다행이다.'라고 위안했지만,
<무진기행>을 읽으며도 설국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어요. 아쉽~~ㅋㅋ



웽스북스 2009-11-25 02:43   좋아요 0 | URL
괜찮아요. 향편님은 화재의 서재글에 오르신 풍월주시니까 ㅋㅋㅋ

차좋아 2009-11-25 12:25   좋아요 0 | URL
또 오를 수 있을까요?ㅋㅋ "웬디양님, 나한테 추천 했어요~ 안했어요~" 바른대로 말해요 ㅋㅋ

웽스북스 2009-11-29 21:25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원래 추천 잘 안해요. ㅎㅎㅎㅎ
했는지 안했는지 기억이 잘 안나지만. ㅋㅋㅋ

굿바이 2009-11-2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국을 읽으면서, 김연수 작가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라는 말이 자꾸 맴돌았어. 고마코가 매일 옷을 갈아입는 노력처럼 말이야. 그리고 매우 미약하지만 어느 때가 되면 고마코를 만나러 국경을 넘는 노력이라도.
그렇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 노력이라는 것이, 욕망의 대상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욕망 자체를 향한 것인지. 그리고 노력으로도 나도 타인도 위로 받지 못한다면 어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는 그저 눈만 내리면 되는 것인지.

웽스북스 2009-11-25 02:45   좋아요 0 | URL
타인을 통해 전적으로 위로받는 일이 가능할까요, 물론 있다 해도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인 게 아닐까 싶어요. 음. 실은, 생채기나 안나면 다행이죠. 그런데 그것조차 안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요. (아, 언니, 그래서 제가 이러고 있는가보아요. 흑)

동우 2009-11-25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정적이고 유려한 문장, 거기다 절제미.. 동감. 나보다는 엄청 젊으신 웬디양의 독후감에서도 문장 너머 그 아득하게 슬픈 아름다움이 느껴져.... 하하, 눈을 떠보니 점령군처럼 진주한 무진 안개의 이미지와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산골의 눈...겹치는 몽환적인 이미지..

웽스북스 2009-12-13 17:28   좋아요 0 | URL
아. 제 글에서 그런 걸 느끼셨다니.
저는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책의 느낌을 살리려고 좀 노력했더니. 하하.

2009-11-26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 보니 무진기행도 있었군요. 웬디님 글 읽고 나니, 눈과 안개를 머릿속에서 교차해보며 서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번 감상을 읽고 나니 웬디님 목소리가 정말 그 어느때와 달라서 읽고 나서 계속 내가 지금 주소를 제대로 찾아온 건지 자꾸 확인해보게 되었어요.

전 초식남 뜻을 몰라서 또 검색을 한번 해 봤드랬어요. 제가 찾은 건 '육식동물처럼 공격적이질 않고 온순하고 자기애가 강한 남자'라고 해 뒀네요.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4900.html

초식남과 시마무라를 같이 두고 보니 얼핏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저는 또 한편으로는 이 초식남의 모습은 작가가 결국 포장해낸 시마무라의 모습중 하나일 뿐인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전 시마무라의 모습이 그냥 당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 아니심?하면서 자꾸 그 사람의 행보에 꼬투리를 잡고 있었거든요.

웽스북스 2009-12-13 17:30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사실 제가 제대로 리뷰를 쓴건 이번이 두번째
지난번 거랑 많이 다르긴 다르죠.

초식남은 뭐랄까. 그런 의미이지만
사회적 맥락에서는 결혼과 많이 연결이 되는데
나만 믿어, 하는 마초남이 아니라
자기애가 강하고, 그렇기에 상대를 책임지는 걸 버거워하고,
뭐 그런 의미에서 썼던 건데,

이렇게 논란이 될줄은 몰랐어요. (별 생각 없었다는 뜻 ㅋㅋ)

도치 2009-11-30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설국의 느낌과 동일선에 있는 느낌의 감상글이네요.
저는 읽는 동안 시마무라의 모습에 시선이 묶여 다른 멋드러진 부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

웽스북스 2009-12-13 17:30   좋아요 0 | URL
도치님 시마무라에 너무 감정이입하신 거에요?
ㅎㅎ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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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그러고 보니 이것도 벌써 1년 전이구나.) 20대의 나를 설레게 한 마지막 남자는 슬프게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였다. 아. 쓰고보니 굉장히 비참하다. 강마에라니. 왜 나는 하필 그 가을에, 그 드라마를 봤을까. 그 드라마만 보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가슴설레하는 일로 20대를 마무리하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언니동생들이 하트뿅뿅 가득한 눈으로 브라운관을 보며, 사랑해요 강마에,를 외쳐댔고, 극중 강마에의 상대역이었던 두루미 빙의 현상을 여실히 느꼈으며, 강마에 역을 연기한 김명민의 부인에게 혹시 전생에 은하를 구하셨냐고 물으며 절규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10아시아로 이름이 변경된 매거진T의 모 기자는 이러한 우리의 증상을 단칼에 정의해 주었다.

박복에 이르는 병이라고

아. 인정하면 지는 거다. 인정하면 지는 거다. 하면서도 나는 그 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박복에 이르는 병이라니. 이토록 정확한 정의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이 증상은, 진정 알면서도 앓을 수밖에 없는 박복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모르는 게 아니다. (흥!) 게다가 이 병은 한 번 앓기 시작하면 완치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고보면 참 재밌는 현상이지. 이 책 달과 6펜스에서도, 폴 고갱을 모티브로 한 인물인 스트릭랜드의, 도무지 도덕적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도, 이 '박복에 이르는 병' 환자들인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스트로브. 한순간도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심한 인격 모독적 언사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 그의 병은 스트릭랜드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된 후에 급기야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으로 미루어볼 때 중기를 지나 말기에 막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집에 한 명의 환자가 더 있었으니 바로 스트로브의 아내. (이 병, 혹시 전염되기라도 하는걸까?) 반듯하고 착하나 단조로운 그의 남편에게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그녀는 남편이 스트릭랜드를 집으로 데려오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병은 한 가정을 파국으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정말 무서운 병이다.

타히티에서도 역시, 박복에 이르는 병 환자들 덕에 그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의 아내였던 아타는 "내가 너를 때릴텐데" 라는 스트릭랜드의 말에 "그러지 않으면 제가 사랑받는 줄 모르잖아요" 라는 말로 응수해, 자신이 이전의 다른 환자들보다 한층 숙달되고 업그레이드 된, 하여 롱런이 예고된 환자임을 스스로 밝힌다. 사랑의 정의를 재창조해내는병이라니... ㄷㄷ 결국 그녀는 나병으로 스트릭랜드가 사망하기까지 그의 옆을 지킨 마지막 여인이 되는데, 스트릭랜드의 타히티에서의 삶과 예술은 아마도 그녀가 없었으면 불가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왜 우리는 반듯한 것으로부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스트릭랜드의 첫번째 아내처럼, 왜 우리의 그러한 양상은 나 자신을 바꾸어내는 데 이르지 못하고 그러한 자들에게 맹목적인 열광을 보내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그들의 삶에 기여함으로써 스스로의 보편성을 이루는 한 부분을 위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달과 6펜스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가의 괴이한 예술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여기 이 수많은 동변상련의 동지들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밟히는 걸까. (사실 이 병에도 나름 부류가 있는지, 스트릭랜드는 딱히 내 타입은 아니다 ㅋㅋㅋㅋㅋㅋ 그에게는 괴팍, 괴이만 있지, '우수'는 없지 않은가 ;;)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에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수많은 예술가들의 위대한 영혼, 그 뒷편에 가려진, 우리 박복에 이르는 병 환자들의 평범하디 평범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는,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 마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책은 미국에 있는 민정언니와의 지속적인 교감을 위해, 언니와, 언니의 지인들과, 또 언니의 지인의 지인들과 함께 세계 문학을 읽기로 한 <내가 읽는 책 이야기>의 첫번째 도서였는데, 놀랍게도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으니, 그 분들은 이러한 병증으로부터 너무나 자유로운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러니 개중 어린 편에 속한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 삶을 더 살아내게 되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흥, 할 수 있게 될지 궁금한 것이다. 최근 박복에 이르는 병 치료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는 웬디씨께서는 <내가 읽는 책 이야기> 동지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그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나요? 네? 처음부터 그런 병 따위는 앓았던 적이 없었다고는 부디 말하지 말아주세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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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quot;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할 수 밖에 없는 일에 관하여&quot; 달과 6펜스를 읽고
    from 케이프타운에서 2009-08-01 21:16 
    내일 모레면 마흔이 된다는 인식이 언제부터인가 생겼다. 서른은 아무 생각없이 지났는데... 올 해 초부터는 부쩍 마흔을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인생에 임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여러가지로 나를 미혹하던 일...
 
 
후니마미 2009-07-2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으흠, 그러고 보니까 나에겐 그 병이 아주 쪼금 있다 말았어요 ㅋㅋ 놀리는 것 아님
제가 대단한 이기주의자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남들이 다 좋아하면 나는 그 대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인기 투표 1위인 선생님에게 선물 같은 건 아예 안 했어요
내 소망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만 좋아하지 않는 한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겠다 주의여서..
에헤고 그러고 보니까 대단히 괜찮은 남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나 좋아하면 바로 오케이 싸인을 해 버리는 성급함이 더해져서
재수 나쁘게 별로 안 좋은
그러니까 대다수 사람들에게도 인정 받는 남자가 내 것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더구만요
그러다 이렇게 저렇게 산전수전 다 겪고 지금의 남편은 만났는데
제 마음 속에는 여전히, 네가 나를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지
너는 나를 모르는데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런 건 내 인생에 없다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연예인에게 절대 환호 할 수 없고
스타들이 어쩌구 저쩌구 해도 그가 나와 일대일이 아니 되는 한
나는 싫다 주의 굳건합니다
이게 무슨노미 똥배짱입니까만은...
하지만 30 대에 쪼금은 비스무리한 병을 앓다 말긴 했는데
내 것으로 하고 싶으나 안 되니까 신경질이 많아졌던 적은 있어요
그러나 그거이 지고지순은 아니었고
저는 그런 착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가 못 키웁니다

옛날의 예술가는 기생이 먹여 살렸다면
요새 예술가는 교사가 먹여 살린다고 하대요
으흐.
돈 버는 여자들 예술 하는 남자의 숙주 되기 딱 쉬운 거 요즘 세상이고요.

혹시 약오르는 글이 되어 버렸어요?
에공^^^



웽스북스 2009-07-25 12:48   좋아요 0 | URL
아. 옛날의 예술가는 기생이, 요새의 예술가는 교사가. 정말. 정말. 그렇네요.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자신의 삶을 위무받고 싶은 욕구의 한 방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보니 목사님들 결혼 상대자 1위도 교사라고 들었어요.

그나저나 후니마미님의 저 확고한 자의식. 놀라운 현실감각. 제가 좀 많이 배워야겠는데요. 민정언니가 좋아하는 분이라서 저는 무조건 후니마미님 굉장한 분이실 줄 알았어요. ㅋㅋ 민정언니가 또 보통이 아니니 말이죠. 앞으로 한수 두수 세수 네수 무한정 부탁드려요. 흐흐.

2009-07-25 0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5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지금도 제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에 대해 친구들은
'너 저사람 똘끼를 감당할 수 있겠냐'라는 말만 하고~~
나는 똘끼라도 좋으니 고개를 내게 돌려보라고 매일 밤 마법을 거는중~~
그 정상에서 살짝 벗어난 인간들의 향기 오오오
전 영원히 극복을 못할듯 해요.

웽스북스 2009-07-25 12:50   좋아요 0 | URL
흑. 흑. 흑.
휘모리님. 저는 휘모리님이 너무 좋아요. 흑. 흑.

털짱 2009-07-25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덕분에 오랜만에 추억의 책장을 들추게 되네요. 그동안 말없이 격려해주시고 진심으로 응원해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인사가 참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받아주실거죠? ^^

웽스북스 2009-07-25 12:51   좋아요 0 | URL
흑. 털짱님. 와락. 이게 얼마만이랍니까 ㅜㅜ

저 요즘 다이어트 중인데, 내년 여름에 비키니 입고 만날까요 (어머 부끄러워라)

민정 2009-07-25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말이지 그 병이 심한 나머지 자존심따위는 없었는거 같은걸?
고등학교때는 막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과목만 무진장 열심히 공부하고 (질문을 만들려면 공부를 해야하잖아) 선물을 가져다 바치지 않나 편찮으시다니까 자율학습 땡땡이 치고 찾아가기도 했어.
연예인도 또 한없이 좋아해서 말이지,
내 고3때 친구들이 쪽지에 써놓은걸 보니 LA에 박찬호한테 시집가거들랑 나를 불러달라는 얘기들이 있었다고. ㅋㅋㅋ 그때 내 이상형은 박찬호였거덩.

근데 그 박복에 이르는 병을 나처럼 적극적으로 앓고난 다음에는 뭐랄까 사람 보는 기준이 달라진달까 그런거 같애.
대학교때 진짜 그렇게 내가 동경할만한 선배랑 연애를 한적이 있었는데, 본인의 의지랑 상관없이 여자가 끊이지를 않아서 질리도록 맘고생만 한다음부터는 그런 남자 쳐다도 안보게 된걸 보면.

나도 옛날에 예술하는 남편을 벌어먹여보겠다.. 그런 생각도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현실에 눈을뜨고 나니 그딴거 다 필요 없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보인다는 사람이랑 나만 재밌게 사는게 더 최고더라. ㅋㅋㅋ

도움이 되었을까?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웬디더러 그런 무지막지한 연애나 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슴아플것 같단 말이지.

바라만 보고 좋을 그대는 그냥 바라만 보고 좋을 그대야.
사진만 보고 혼자 좋아하는거랑 별 다를게 없으니,
그냥 사진만 걸어놓고
웬디가 예뻐서 입이 귀에 걸리는 사람을 찾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

그러니 나는 지금 스트릭랜드씨를 바라보면
옆에서 쿡 찔러나 볼거라니까,
절대로 내 무릎 굽히지 않는 선에서.


웽스북스 2009-07-25 12:52   좋아요 0 | URL
아. 언니. 정말. 언니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 보면서 저도 이래저래 많이 생각 해요. 그치만, 흑, 전, 바라만 보고 좋을 그대가 좋아요. 아. 하지만 스트릭랜드보다는...강마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언니네 부부는 도대체 왜 그렇게 닮아가는 겁니까. 아침에 사진 보고 화들짝 했어요. 정말. 흐흐.

치니 2009-07-2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의 증세가 심하냐 덜하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병에 안 걸려본 사람 없지 싶습니다.
저는 강마에가 좋았지만 상대역 두루미에게 빙 현상은 없었으니 좀 덜한 거지 싶습니다? 음하하하. -_ㅠ 그래봐야 박복에 이르는 병에 걸린 건 똑같겠죠. ㅋ

웽스북스 2009-07-25 12:54   좋아요 0 | URL
그죠. 아. 하나님은 왜 박복에 이르는 병같은 걸 만드셔서 ㅜㅜ

근데 제가보기에는 하린군이, 흠, 여러 여자 앓게 할 소질이 다분해 보입니다. 물론 치니님이 키우셨으니, 누군가를 박복에 이르게 하지는 않겠지만. 사진만 봐도 장래가 매우 촉망된달까요. 하하하. ㅋㅋ

박슴도치 2009-07-2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의식이 강해지면 박복이라는 안개는 사라지는 듯 합니다.
그것도 너무 강해지면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고는 하지만 병세 호전을 위해는
좀 그래도 괜찮습니다. ^++++++++^

웽스북스 2009-07-31 00:35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저 자의식 매우 강합니다... 너무 강해서 곤란한데 ㅋㅋㅋㅋㅋ
병세는 낫지 않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거 최악인데요 ㅜㅜ

hohoya 2009-07-2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웬디양은 참 귀엽습니다.
톡톡튀는 재치있는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군요.

박복에 이르는 병이라.......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 병의 치유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어요.
박복에 이르는 병으로 수없이 병원을 들락거린 한사람입니다. ㅜㅡ;

웽스북스 2009-07-31 00:36   좋아요 0 | URL
어이쿠나. 호호야님.
첫 대면부터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해 주시다니. 흙.

그나저나, 제가 덩치로보나 나이로보나,
귀엽다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Jade 2009-07-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웬디양님. 저는 저 첫줄을 읽으면서 헉 웬디양님의 그이는 어떤 사람일까 마음졸였었는데 >.<


웬디양님은 주변에 좋은 분들도 많고 여기저기 모임이나 여행도 많이 하시고 재밌게 사시는거 같아서ㅡ 좀 더 그렇게 자유롭고 해피하게 사셨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ㅡ

또, 웬디양님이 좋은 분 만나서 알콩달콩 연애하시면 또 다른 재미있는 삶을 사실거 같기도 하고 ㅎㅎ


근데, 제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닌데 말이예요 ㅡㅡ;;

웽스북스 2009-07-31 00: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이드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이렇게 낚여주다니. 흙. ㅋㅋㅋㅋㅋ

원래 다른 사람 사는 모습은 재밌고 해피해 보이나봐요.
실상은 그렇지도 않아요. 다들 보여지는 모습만 보게 되니까.
제이드님은 잘 지내죠? 못본지 한참됐네 정말.

동우 2009-07-27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박복에 이르는 병이라- 한 인간의 매혹적인 개성에 매료되어 대책없이 빠져드는 병. 달과 육펜스에서 충분히 어떤 캐릭터에 감정의 투사가 가능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양하게 읽어 느끼는 스펙트럼을 보는 재미, 하하 아마 후추장은 이런걸 노려서 이 책읽기모임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갑니다. 웬디님보다 한참을 나이먹어 이제 초원의 빛처럼 아스라한 그 박복에 이르는 병의 감성, 그 파토스 사라지지 않고 어느 감정모체의 밑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나니- 하하. 촌철살인의 한마디가 달과 육펜스의 웬디님 독후감을 압축합니다그려. "사실 이 병에도 나름 부류가 있는지, 스트릭랜드는 딱히 내 타입은 아니다. 그에게는 괴팍, 괴이만 있지, '우수'는 없지 않은가." 그 말랑말랑한 우수가 좀 스트릭랜드를 장식하였더라면 이 소설은 한층 피상으로 그린 스트릭랜드의 예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 하하

웽스북스 2009-07-31 00: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무래도 후추장님. 좀 똑똑하신듯. 어떻게 이런 생각을. ㅋㅋ

저 한마디를 읽어주시다니. 와. 역시 동우님. 내공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도 이렇게 세대와 세월을 거슬러 교감할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아요.
게다가 요즘은 게을러서 리뷰도 잘 안쓰는데
어쨌든 이렇게 정기적으로 리뷰도 쓰게 되구요.

후훗. 그래도 8월은 방학이라 기쁩니다. 꺄아.

니나 2009-07-2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민정언니 조언을 새겨들어야겠어 하하하

웽스북스 2009-07-31 00:39   좋아요 0 | URL
넘우 시의적절한 조언? ㅋㅋㅋㅋㅋㅋㅋ

굿바이 2009-07-3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정양의 조언에 뭔가 음모가 있는것 같지 않니?(최대한 의뭉한 눈빛으로 말하고 있음)
음하하하~

박복하기로 전국구 대표인 굿바이 한 마디 하는 바,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선아가 마음가는대로 그대로 쭉 살아봐. 남의 가슴에 대못 때려박는 일만 아니라면 말이야. 경험에 의하면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더라(갑자기 급 우울해진다)
그렇지만 뭔가 저지르기 전에 살짝 알려줄래? 뭐 강마애같은 인간이 마음에 든다든지 아니면 그런 인간을 사귈거라든지 ㅋㅋㅋㅋ

심샛별 2009-08-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박복에 이르는 병은...일종의 유전질환으로서 당뇨병처럼 치료는 힘드나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잘 관리하고 살면 됩니.....쿨럭.


2009-08-06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독후감을 읽은지는 꽤 지났는데,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났네요. 글 쓰다가 후다닥 일어나서 창 닫힌 적도 몇번.. (아, 이런 확인 할 수 없는 변명) 부족민중에 누군가가 언급을 했는데, 아무래도 저 같은 경우도 결혼을 했기에 그 박복에 이르는 병을 그냥 얼버무리고 본건 아닌가 싶어요.

저는 좀 후니마미님 스러운 과라 그냥 사람들이 막 다 좋다고 해도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보거나 다같이 보니까 나도 얼떨껼에 그럼 한번 고개 돌려하는 이런 정도 밖에 안되서요. 현실계에서 쭉정이처럼 이 남자 저 남자랑 엮인 적만 많지만 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봉착했던 것이 그림만 멋지면 다 일까, 그외에 작가의 인생까지도 내가 봐야 할까 하는 것이였어요.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계기나 인생역정이 분명 있을 테지만, 그것말고도 그 사람의 비도덕적인 가치관이나 (저에겐) 괴팍스러운 그런 성향들을 제가 알고 나면 그 그림이 고지곧대로 보여지지 않을꺼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봤자 제가 보는 건 "그림이구나. 아 요건 좀 마음에 든다. 저건 좀 별로네. 이건 또 뭥미?" 요렇게 하는 정도지만 말입니다.

덧붙임) 민정이의 글은 결혼 1년차 신혼부부의 꼬신내(고소함? 이거 표준어로 어떻게 해야 할지)로 염장지름도 좀 다분해보입니다.

후니마미 2009-09-2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blog.daum.net/namu-dal/15961215


독후감, 올렸어요
독후감이랄 수가 없는
넙치요리,

웬디님은 넙치 엇다 팔아버리신 건 아니죠?
그렇게라도 하고 싶더라구요

얼렁 올리셔요

다 못 읽었으면 왜 못읽는지 그런 거를 올리면 더 좋지요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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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녀온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국내에 <카모메식당>, <안경>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오기가미나오코 감독의 <요시노 이발관>이었다. 영화는 일본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상하게도 그 마을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가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으로, 그 마을에 사는 남자 아이들이라면 모두 예외 없이 그 전통을 따라야만 했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바가지 머리' 외에 다른 머리는 선택할 수 없었기에, 누구도 자신들이 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마을에 멋진 염색머리를 한 전학생이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게 강요되는 바가지 머리를 거부하고,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바가지 머리는 인권에 대한 침해라며. 그제야 아이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꼭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어야만 했던 것이지?
 
김규항의 <예수전>은 바가지 머리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도 제 스스로 의문을 가지거나 되돌아본 적이 없는, 성찰을 잊은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제발 한 번 쯤은 '왜?'라고 묻길 바란다며 다그치는, 그리고 제 스스로 몸소 저항하는 그 평화로운 마을의 전학생 같은 책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믿기에 편한 예수의 모습을 정하고, 그에 걸맞게 예수의 삶을 재규정해 나간다. 믿기 편하게, 적절히 자신들의 부를 향한 욕망을 합리화시켜주는, 제 입맛대로의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되묻는 불편한 작업은 굳이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마몬의 신앙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씩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주기에, 그리하여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리기에 스스로를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부'라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의 여부를 떠나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가 지배 체제에게 사형 당한 이라는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들은 이 점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당시 폭동과 살인을 가한 정치적 테러범이었던 바라빠보다 더 위협적으로 간주되던 인물이었으며, 그것은 곧 예수가 혁명적 인물이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죽음으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만을 선택하고, 그와 다른 견해를 배척하는 것을 마치 타협 없이 예수를 섬기는 순수한 신앙의 결정체인 양 자위하고 있다. 저자는 그런 이들에게 한낱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생각을 전할 때도 그의 본디 생각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어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며,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위임 받은 양 구는 태도는 하느님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관념 속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 만들고자 하는 이였으며, 자선과, 적선이 아닌 ‘나눔의 체제’로 변화함으로써 이러한 사회를 가능케 하기 위해 몸소 보여준 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퍽 새롭고 신선할 지는 모르나, 아마도 이 책을 읽을 이들의 상당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다뤄진 예수에 대한 견해는 이미 여러 진보적 신학 혹은 신학자들을 통해 이야기되어 왔으며, 특별히 교회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마몬 신앙의 대표 선수를 자원하며 보여주고 있는 여러 모습에 대한 반증으로 최근 들어 더욱 대두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 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기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예전에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좋은 책들은 정작 그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고, 이제는 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고. 사실 이 책의 첫번째 타겟 독자일, 여전히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는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김규항을 알고, 좋아하며, 이 책을 읽을 이들의 상당 수는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신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던 이일 확률이 높다. 저자 역시, 경험이나 직관을 통해 이 책을 실질적으로 읽게 될 자가 누구인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사실 그들 중 일부를 향해 쓰여졌고, 더욱 힘주어 쓰여졌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그리 하셨듯,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시대의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증명해내듯.
 
저자는 그들 중 상당수가 서 있을 묘한 지점을 간파해낸다.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변혁이 아닌, 변형 정도에 그치는 변화를 말하는 것, 끊임 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는 듯하지만 실은 현실의 모순을 순화하고, 정당한 분노를 누그러뜨려 진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절대 극복될 것이라 믿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극복을 바란다기 보다는, 자신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확인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저자는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여 인민들로부터 반감을 사는 사람들보다, 이러한 이들, 즉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해 많은 인민들에게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오히려 공고히 지키고 있다며 그들을 향한 일침을 가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진보’ 혹은 ‘사회적 변화’라는 것 역시 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나의 삶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는가, 철저하고 처절하게 돌아볼 일이다. 이제는 거의 전국민적 ‘교양’ 덕목의 수준으로 자리잡은 ‘쿨함’을 지향하느라 진짜 변혁을 위해 한걸음씩 내딛는 누군가의 뜨거운 시도를 촌스럽게 여기며 조소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사실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가지는 않았는지. 작은 행동, 작은 변화를 통해 실은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겨우 바가지 머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형태의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책은 끊임 없이 나를 다그치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젠 삶으로 그 물음들에 성실히 응답하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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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5-12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 구매자 40평이 아니라 리뷰쓰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미 강력한 추천이 되었어요. 깨달음을 많이 주는 리뷰였답니다. 잘 읽었어요. 저도 이 책 보고 싶네요.

웽스북스 2009-05-12 14:54   좋아요 0 | URL
헤헤 마노아님. 저 구매자가 아니라서요 ㅋㅋ
아. 오랜만에 리뷰를 쓰려니 힘들더라고요 ㅎㅎㅎ

치니 2009-05-1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 강력 뽐쁘 리뷰이지만, 읽을 지 말 지 망설여져요.

웽스북스 2009-05-12 22:42   좋아요 0 | URL
히잇, 강력 뽐쁘에는 가끔 부응해주는 것도 좋지요 ^-^
그나저나 치니님에게 뽐쁘가 됐다니, 저 좀 기쁜데요 흐흣

가끔 들르는 이 2009-05-1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웬디양님은 글 솜씨가 가면 갈수록 느는 거 같아요. 부럽네요.

웽스북스 2009-05-12 22:43   좋아요 0 | URL
아, 가끔 들르는 이, 님,
아마 마음에 드는 부분은 거의 제가 쓴 게 아니라
책의 내용을 가져온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저의 글쓰기는 날로 정체정체 ㅜㅜ

가시장미 2009-05-13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 리뷰를 보니 더 읽고 싶네요. ^^

웽스북스 2009-05-17 17:34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가시장미님!! ^-^

BRINY 2009-05-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어렵지 않을까해서 고민중이었는데, 웬디님 리뷰 보니 봐야겠다는 결심이 듭니다.

개인주의 2009-05-15 10:59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려울까봐 사기 전에 사전작업으로 훑어봤는데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려구합니다 저도^^;

웽스북스 2009-05-17 17:34   좋아요 0 | URL
네네 BRINY님, 누피님, 어렵지 않아요. 읽어보세요. ^-^

마노아 2009-05-1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주의 마이 리뷰 당선이에요. 축하해요, 웬디님. 리뷰 읽으면서 한 건 할 줄 알았어요.^^

순오기 2009-05-16 10:20   좋아요 0 | URL
저도 축하해요~ '스트레칭 가이드북' 이후 리뷰당선인가요?^^
알라딘은 일년에 한번은 리뷰 당선의 기쁨을 선사하죠.
돌베개 책들은 참 좋다면서도 쉽게 읽어지지 않더라고요.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여럿 있거든요.ㅜㅜㅜ

웽스북스 2009-05-17 17:35   좋아요 0 | URL
와. 감사합니다. ^-^ 스트레칭 가이드북 이후 처음 맞아요. ㅋㅋ 리뷰도 좀 부지런히 쓰고 그래야되는데 워낙 게을러서. (사실 이 리뷰도 누군가의 부탁으로 쓴거거든요 ㅎ)

이매지 2009-05-2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웬디양님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
이 책 저도 읽어보고 싶던데 어렵지 않다니 용기 불끈! ㅎㅎ